Subido por lucy he

[로보] 동생이 영웅이라 꿀 빱니다 1-135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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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영웅이라 꿀 빱니다
로보 저
시민 직작
뉴토끼용 공금 갠소
1.
지선우.
세기의 영웅이라 불리는 세계 최강의 남자!
2세대 귀환자!
처음 1만의 사람들이 사라졌다. 전체 인구수에 비해 너무나도 적은 수였기
에 그들의 실종은 크게 조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어 10만이 넘는 사람이
사라지자, 문제가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쯤 포털이 열렸다. 이세계와 연결된 포털에서는 신화 속에서나 볼
법한 괴물이 쏟아져 나왔다. 처음에는 군대로 그들을 물리치려 하였다. 그
러나 생체 방어막을 지닌 그들에게 총은 통하지 않았다. 갈수록 더 강한 무
기를 사용하였으나 소용없었다. 심지어는 최후의 수단으로 여겼던 핵도 통
하지 않았다.
수많은 인류가 처참하게 죽어 나갔다. 그때 등장한 이들이 바로 2세대 귀환
자! 각성자였다.
그들은 돌아오자마자 각성한 능력을 이용하여 몬스터를 죽여 나갔다. 그리
고 그런 이들 중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낸 이가 지선우였다!
선한 마음씨에 뛰어난 실력, 그는 영웅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이였다. 하지
만 그런 그에게도 아픔은 있었으니.
“조명 비춰.”
바로 실종되기 전에 하나뿐인 형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부모님 없이 살아오
던 지선우에게는 단 하나뿐인 가족이자 버팀목. 그러나 지금 그는 여기 없
다.
카메라가 무덤 앞에서 하얀색 국화를 들고 있는 지선우를 비췄다. 수려한
얼굴에 슬픈 표정이 떠오르자 주변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는 그 정도로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아직도 형이 그리우십니까?”
PD가 묻자 그가 서글픈 목소리로 답했다.
“네, 그립습니다.”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였다.
“형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성실하고 상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지선우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좋은 분이셨군요.”
“네. 분명 살아 계셨다면 저보다 뛰어난 영웅이 되셨을 겁니다.”
그 말에 모두 안타까워하며 한숨지었다.
그리고 그 시각, 마계의 어느 장소.
한 남자가 귀를 후벼 파며 외쳤다.
씨발, 누가 내 욕하냐!”
지구에서는 죽었다고 알려진 지선우의 하나뿐인 형, 지현우였다. 그는 그대
로 손을 올리더니 바로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괴물의 뒤통수를 후려쳤
다.
뻑!
커다란 소리와 함께 고통에 찬 괴물의 비명이 이어졌다.
“크와앙!”
부들부들 떨며 뒤통수를 문질렀으나, 정작 때린 사람은 끄덕도 하지 않았
다. 그저 태연히 물어볼 뿐이었다.
“너냐?”
괴물, 발록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빡.
그러자 이번에는 손이 다른 뒤통수로 향했다. 졸지에 의자 역할을 하고 있
던 케로베로스가 2차로 비명을 내질렀다.
“깨개갱!”
“너냐?”
“멍멍!”
케로베로스도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
아니면.”
현우의 시선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으로 향했다.
“너냐?”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허공이 갈라지며 작은 요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고, 전 아닙니다. 결백 그 자체입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여기서 날 욕할 놈이 너밖에 더 있어?”
“제가 하나뿐인 고객님을 왜 욕합니까?”
“염병할.”
“제발 말 좀 곱게 하십시오.”
“내가 말하는 데 뭐 보태 준 거 있어?”
“욕쟁이 할머니 같지 않습니까?”
요정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누가 할머니냐? 누가?”
현우는 투덜거리는 요정을 보면서도 그에게는 손대지 않았다. 요정이 어떤
존재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지구인을 마계로 끌고 와 죽인 장
본인. 정확히는 장본인의 수하지만.
“
본인의 입으로는 전부 다 지구를 위해서라고 했지만, 죽어 간 사람들의 면
면을 생각해 보면 동의하기 어려웠다.
“난이도 조절에 실패한 것뿐입니다. 덕분에 2차, 3차에선 적절한 난이도 조
절에 성공, 많은 사람이 살아서 돌아갔습니다. 이제 그들이 지구를 구해 주
겠지요.”
그러면 영문도 모르고 끌려와 죽어서 마계의 거름이 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저 재수가 없었을 뿐이지요. 흔한 일이지 않습니
까?”
“그래, 그럼 이것도 재수가 없는 거겠지.”
현우는 허공에서 주절주절 떠들어 대는 요정을 낚아챘다. 그동안은 목숨과
연결된 문제라 살려 두었지만, 오늘은 어쩐지 기분이 지독하게 나빴다. 뒈
져도 요정은 조져 놓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하하, 고객님?”
손아귀에 꽉 잡힌 요정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돼!”
손아귀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요정이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쳤지만, 이대로
라면 손안에서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저, 정말 좋은 소식입니다!”
요정은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그러나 현우는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요정의 말은 도통 믿을 수가 없단 말이지.
“저엉말입니다! 귀환, 귀환!”
요정은 현우의 손을 작은 주먹으로 탁탁 치며 다급히 외쳤다. 그러자 손에
서 힘이 약간 빠졌다. 물론 요정이 빠져나갈 정도로 힘을 빼진 않았다.
“귀환 뭐?”
“귀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디로?”
“지구로요. 지구!”
“정말?”
“제 주인님의 이름에 걸고 맹세합니다!”
그제야 현우의 손에서 완전히 힘이 빠졌다. 요정은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구르다 간신히 몸을 바로 세웠다. 진짜 성격 지랄 맞아서는.
“돌아갈 수 있다고?”
현우는 가만히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마계로 끌려와 고생한 기나긴 나날.
그동안 계속해서 잊지 않으려고 애썼던 단 하나의 존재. 하나뿐인 가족. 사
랑하는 내 동생.
지선우.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재산을 노리는 친척 틈 사이에서 기댈 곳은 단 하나
뿐이었다. 언제나 형이 제일 좋다며 웃던 작고 귀여운 동생. 그 동생만을 바
라보며 힘겹게 살아왔다.
이 엿 같은 곳에 끌려와 고생하면서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돌아가실 거죠?”
현우는 빨개진 눈으로 요정을 노려보았다. 마계로 오고 나서 많은 시간이
지났다. 너무 많은 시간이 말이다. 여린 동생은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살
아는 있을까. 어느 것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돌아가고 싶었다.
‘보고 싶어.’
보고 싶었다. 그 갈망 하나로 현우는 대답했다.
“돌아갈 거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요정이 입을 쭉 찢어 웃었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바로 앞에 까만 점이 생기더니 이내 점점 부피를 키워 나갔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포털이었다. 이게 정말 지구로 가는 길일까. 현우는 의심을 가지
면서도 포털을 외면하지 못했다. 어쩌면 동생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럴 수 없었다.
“크르륵!”
포털을 본 발록이 당황하며 날뛰었다.
크륵!”
주인이 현우가 무얼 하든 옆에서 지키며, 모든 것을 알리라고 하였는데 시
간이 촉박했다. 망할 요정! 발록은 속으로 외치며 다급히 주인을 불렀다. 바
로 마계의 서열 1위인 알베르크를!
그동안 수시로 현우랑 드잡이한 인물 되시겠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현우는 포털 속으로 발을 내딛고 있었다. 안 되겠다! 발록은 다급한 표정으
로 케로베로스를 잡아 현우의 뒤를 향해 던졌다.
“깨갱?”
나는 왜? 케로베로스가 허공을 허우적거리며 현우의 등판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이윽고 현우가 손을 내뻗어 케로베로스의 목을 잡아챘고, 둘을 삼
킨 포털은 그대로 닫혀 버렸다.
“어라? 케로베로스는 예정 외인데요.”
요정이 뺨을 부풀리며 발록을 노려보았다.
“크륵크륵?”
발록은 필사적으로 다른 곳을 보는 척하며, 요정의 시선을 피하려고 애썼
다. 현우는 날파리처럼 다루던 요정이었지만, 다른 이들에겐 재앙이었다.
그러니 발록이 이러는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 그때, 발록의 주인이 도착했다.
마계 서열 1위. 알베르크. 2미터에 달하는 장신에 기다란 흑발을 늘어트린
그는 절세의 미남이었다. 고혹적인 보랏빛 눈동자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
현우가 없군.”
“그는 가야 할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가야 할 곳이라. 그가 가야 할 곳은 없어.”
“아니요. 그분은 지구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요정은 어디선가 안경을 꺼내 쓰며 난데없이 나타난 서류를 넘겼다.
“저희가 지구인 훈련 장소로 마계를 빌리긴 했지만, 1차 대여 기간이 방금
끝났습니다. 처음엔 뭣 모르고 기간을 좀 길게 잡긴 했지요. 그 때문에 지현
우 님이 생각보다 오래 마계에 머물게 된 것이고요.”
“……알고 있다.”
“알고 계시면서 왜 그러십니까?”
“현우가 돌아가는 건 싫어.”
“이미 돌아갔습니다.”
“데려올래.”
“안 됩니다. 중간계 서약을 잊었습니까?”
“다 안 된대. 되는 게 뭐야?”
정말 안 되니까 그러지요! 요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막무가내인
작자가 마계의 마황이라니. 하지만 무시할 수도 없는 게 전투력이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데다가 보기와는 다르게 약삭빠르다. 그러니 살살 달래야 했다.
“
현우에게 당했던 것처럼 또 쥐어 잡히기 싫으면. 요정은 단단히 각오하고
알베르크를 바라보았다. 이제 설득의 시간이다!
우엑.”
기나긴 까만색 포털을 통과하고 나니 속이 울렁였다. 대체 이런 감각을 느
껴 본 게 얼마 만이지? 알베르크와 드잡이질을 할 때도 느끼지 못했던 이런
느낌. 현우는 식은땀을 닦아 내며 고개를 들었다.
“여긴 어디야?”
사방이 금속 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어디 공장 안인
가? 현우는 비척거리며 걸어 나가 벽을 어루만졌다. 문이 어디지. 문을 찾
는데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
2.
‘
어디?’
시선이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CCTV가 보였다. 누군가 렌즈 너머
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분 나쁘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기물 파
손을 하면 안 되겠지. 마계와는 다르게 지구는 그러면 안 되니까. 현우는 그
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렸다.
“끼잉.”
그런 현우의 곁으로 작은 온기 하나가 달라붙었다. 까맣고 복슬복슬한 작은
강아지. 얼핏 보기엔 지구의 포메라니안을 닮았다.
“넌 뭐냐?”
커다란 눈망울이 어쩐지 낯익다. 기억이 떠오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
다.
“아, 케로.”
마계에서 내내 같이 있던 케로베로스.
“끼이잉!”
현우가 알아본 듯하자 케로베로스가 신나서 앞발을 파닥였다. 그런데 얘는
왜 작아졌담? 머리는 왜 또 하나고? 너무 작아져서 이제는 실수로라도 치
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끌어안아 보았다.
작고 따끈한 몸이 부드럽게 달라붙었다. 품에서 놓기 싫은 감촉이었다. 그
래서 멍하니 케로베로스를 안고 있자니, 갑자기 벽면이 열리며 사람 여럿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완전 무장을 한 채 총을 들고 있었고, 현우를 위험한 존재인 듯 바라
보며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흑발에 얼핏 보이는 피부는 동양인의 그것이었
다. 가끔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니 중국이나 일본은 아니다.
‘한국이구나.’
다행히 요정은 현우를 돌려보내는 데 있어 실수를 하지 않았다.
“움직이지 마!”
오랜만에 보는 동향인은 참으로 무례했다. 언제 봤다고 반말이람? 저도 모
르게 손이 움찔거렸다.
‘한 대 쥐어 팰까.’
폭력은 누구에게나 공평해서 맞고 나면 알아서 숙이게 되어 있다. 원래 자
신이 이런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마계가 사람을 버려 놨다.
어떻게 할까 싶어 손을 폈다 오므리기를 반복하는데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
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짧은 실랑이 후에 완전 무장을 한 이들이 반으로 갈
라지며, 그 사이로 머리를 짧게 자른 남자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복을
걸친 몸이 제법 단단해 보인다.
“안녕하십니까.”
남자는 현우에게 차분히 인사를 건넸다.
“헌터관리국의 최무혁이라고 합니다.”
최무혁. 헌터관리국이 자랑하는 S급 신진 헌터. 그들이 S급 헌터를 끌어들
이기 위해 제시한 많은 조건들은 지금도 여기저기서 회자되고 있었다. 수많
은 재물과 권력. 그러나 그들은 그 모든 걸 걸고서라도 무혁을 끌어들인 걸
후회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제 역할을 잘 해내고 있었으므로.
“귀하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무혁의 질문에 현우는 자신의 이름을 툭 내뱉듯이 던졌다.
“지현우.”
그것이 지구로 돌아와 인간과 한 첫 대화였다.
“이곳은 추우니 다른 장소로 이동해서 이야기할까요?”
그러면서 무혁은 손을 내밀었다. 조금도 경계를 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현
우는 그 손을 빤히 바라보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죠.”
무혁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앞장섰다. 그렇게 바뀐 장소는 처음과 비교해
서는 많이 나아졌지만, 폐쇄적인 면에서는 다를 바가 없었다. 방에는 창문
하나 없었으며, 커다란 전면 거울 하나가 전부였다.
전면 거울 너머에는 보나 마나 사람들이 서서 이곳을 바라보고 있겠지. 다
시 슬슬 기분이 나빠져 왔다. 확 다 뒤엎어 버릴까.
이들이 이러는 이유는 알고 있었다. 유일하게 돌아온 1세대 귀환자여서. 의
심하고 궁금해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현우가 그를 배려해 줄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그의 손이 바로 앞에 있는 묵직한 책상에 닿았다.
그 모습을 본 케로베로스는 몸을 움츠리며 얌전히 뒤쪽으로 물러났다. 이제
일어날 상황을 알아서 추측하고 몸을 사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막 현우가
폭발하려는 순간, 무혁이 현우 앞으로 잔 하나를 밀어 주었다.
“커피 마십니까?”
책상을 잡고 있던 손이 멈췄다.
“커피?”
“네.”
현우는 컵을 바라보더니 정색하고 답했다.
“난 커피는 안 마셔. 다른 거 줘.”
무혁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
커피가 싫으시군요. 그럼 뭘로 드릴까요?”
“과일 주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어느새 책상 밑에 있던 손이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기다리기를 잠시, 폐쇄
된 방문이 열리고 과일 주스가 들어왔다. 딸기주스였다. 현우의 가슴이 격
하게 두근거렸다. 강해진 뒤로 굶은 적은 없었지만, 그게 다였다. 마계의 음
식은 하나같이 맛이 지랄 맞아서 배를 채우는 데 그쳤다. 그런데 딸기! 딸기
주스라니.
덜덜 떨리는 손이 주스 잔을 잡았다. 그리고 한 모금. 새콤달콤한 맛이 혀를
감싸 안았다. 그래, 이 맛이야! 현우는 딸기주스를 조금씩 아껴 마시며 환희
했다.
“주스 좋아하십니까?”
현우는 대답 대신 딸기주스에 몰두하는 걸 택했다.
“더 가져오라 할까요?”
무혁은 제법 친절하게 물었다. 비쩍 마르고 작은 몸이 동정심을 불러일으켰
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예쁘장하게 생기기도 했고.
현우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주스 잔을 몇 개나 비웠는지 모르
겠다. 배부를 정도로 주스를 마시고 나니 절로 노곤해졌다.
‘좋아, 특별히 봐줬다.’
“
깽판 치는 것보다는 적당히 상대해 주기로 마음을 바꿨다. 모두 환상적인
주스 맛 때문이었다.
“그럼 몇 가지 질문하겠습니다.”
무혁은 그렇게 말하며 앞에 과자를 밀어 주었다. 주스에 이어 과자라니! 입
이 호강했다. 현우는 과자를 갉작이며 먹었다. 아껴 먹기 위함이었다. 오랜
만에 넣어 보는 달달한 것은 그에게서 이성적인 사고를 빼앗아 갔다.
“이름이 지현우 맞습니까?”
끄덕.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는 스물다섯 살.”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이는 기억하지 못한다. 마계의 흐름은
지구와는 달라서 더 빠르기 때문이었다. 중간까지는 열심히 나이를 계산했
던 것 같은데, 결국엔 귀찮아서 때려치웠다.
“가족이 있습니까?”
끄덕. 있지. 내 작고 어리고 사랑스러운 동생, 지선우. 그 아이는 약속을 지
키지 않고 사라진 형을 원망하고 있을까. 울었을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
어졌다. 그와 동시에 무서워졌다.
하나뿐인 사랑하는 가족이 자신을 미워할까 봐. 동생을 생각하며 마계에서
힘겹게 버텼지만. 지켜 주겠다던, 언제나 곁에 있겠다던 약속을 어긴 것도
사실이었다.
“혹시 그 가족이.”
무혁이 재차 입을 여는 순간, 어디선가 쿵! 하는 울림이 들려왔다. 울림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쿵! 쿵! 쿵! 여러 차례 울리며 점점 이곳으로 가까
워져 왔다. 무혁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최대한 소식이 새어 나가지 않게
단속을 했는데, 그게 실패한 모양이었다.
으득. 무혁은 이를 갈았다.
“한 번 더 장소를 이동해도 되겠습니까?”
내가 왜? 현우가 그런 뜻을 담아 물끄러미 바라보니 무혁이 그를 살살 달랬
다. 강제로 끌고 가도 되는 일인데 이상하게 세게 못 나가겠다. 무혁은 혀를
찼다.
“먹고 싶은 건 전부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바나나주스는 어떻습니까?”
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무혁은 현우가 일어나자마자 그를 안아 들었다. 남자의 품에 안기다니! 저
도 모르게 주먹이 움찔거렸다. 만약에 먹고 실은 걸 전부 주겠다는 말이 아
니었으면 진작 후려쳤으리라.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케로베로스도 냉큼 주인의 다리에 매달렸다. 작은
강아지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본체는 무서운 마수인지라. 매달리는 것쯤
은 쉽게 해내었다.
그렇게 무혁이 잽싸게 자리를 비우자마자, 폐쇄된 공간-취조실-의 벽이 마
지막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이는 장신의 한 남자. 말끔
한 정장 차림의 그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이였다.
세기의 영웅. 지선우.
“씨발, 왜 아무도 없습니까?”
그였다.
까만 눈동자가 싸늘한 시선으로 취조실 내부를 훑었다. 방금까지 누군가가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들어온 정보는 틀리지 않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선우는 우르르 몰려오는 헌터들을 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글쎄, 무슨 짓일까요?”
들어 올린 손 위에서 생겨난 머리통만 한 커다란 물방울이 미친 듯이 제자
리에서 돌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약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일정 조건
하에서는 가장 강할 수도 있는 물. 선우는 그런 물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헌
터였다.
머리통만 한 물이 여러 개로 나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안색은 점점 새파
래졌다. 일부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선우는 그
들을 쉽게 놔줄 생각이 없었다. 인질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물러서려던 이
의 발이 서서히 얼어붙기 시작했다.
“움직이지 않으시는 게 좋으실 겁니다. 잘못 움직이면 부서지거든요.”
그런 끔찍한 말을 상냥한 목소리로 하지 마! 헌터관리국의 헌터들은 움직이
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오들오들 떨었다.
뭐야, 저 사람 지선우 맞아? 지선우는 세기의 영웅이잖아.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신입이 중얼거리는 말에 몇몇 헌터들이 푹 고개를 숙였다.
여기 아직 쓸데없는 환상을 지닌 헌터가 하나 있었다. 외부에서는 지선우를
영웅이라 추켜세웠지만, 그와 접촉한 적 있는 헌터들은 알고 있었다. 그가
사실은 미친 개새끼란 걸. 방송에 나오는 모습은 어디까지나 위장에 불과했
다.
“자, 그럼 대답해 주십시오. 여기 있던 분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 그건.”
가장 앞에 선 헌터가 입을 열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기 위해 눈치를 보
자 가차 없이 물방울이 몸을 관통했다.
3.
“ ,
어 어헉!”
“고작 팔이잖습니까.”
고작 팔이라니. 물방울 하나가 통과했을 뿐인데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너덜
거린다. 그는 비명을 삼키며 팔을 움켜쥐었다. 끔찍한 고통이 뒤따랐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당장이라도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지겹네.’
선우는 물방울을 좀 더 잘게 쪼개며 기온을 떨어트렸다. 지금 그에게 다른
헌터의 상태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빨리, 취조실에 있었던 사람
을 만나고 싶었다.
외부에는 2세대 실종자들이 되돌아오고 나서 포털이 열렸다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포털은 1세대 실종자들이 생기면서부터 있었다.
1세대 실종자들이 사라지면서 처음으로 생긴 포털. 그 포털은 몬스터를 뱉
어 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람이 들어갈 수도 없었다. 그걸 정부가 연구하
던 도중에 2세대 실종자가 생기고, 그들은 새로운 포털을 통해 돌아왔다.
이후,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난 대량의 포털은 사람 대신 몬스터를 토해 냈
고, 자연 발생 각성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 지경까지 가서도 처음 생긴 포
털은 여전히 용도를 알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선우는 헌터관리국에 사람을 심었다. 그리고 정부
가 감추고 있는 처음 생긴 포털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실종되었던
형이 다시 돌아올까 봐. 아니면 그 관계자라도 나타날까 봐.
그렇게 10년을 기다렸다. 그런데 오늘,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다. 닫힌 포털
에서 사람이 하나 나왔노라고. 그 소식을 듣자마자 선우는 서슴없이 이곳으
로 향했다.
형이 사라졌을 때 선우의 나이는 열한 살. 부모 없이 자라 온 그에게 형은
유일한 핏줄이었다. 그런데 그런 형이 하루아침에 없어져 버렸다. 믿을 수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형을 찾아 헤매었다. 고아원에 가게 되어
서도, 마계로 끌려가서도, 되돌아오고 길드를 세우면서도. 계속. 계속. 계
속.
현실에 절망하면서도 끝없이 찾았다. 그리고 지금, 오랜만에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뭐,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십시오.”
전부 죽여 버리고 찾으러 가면 된다. 아무런 방해하는 이 없이. 나중에 헌터
관리국에서 들어올 항의 따위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손 위에서 머물던
물방울이 수십, 수백 개로 나눠지며 허공을 맴돌았다.
겉보기에는 아름다워 보였으나, 결과까지 그러진 않으리라.
“다, 다 말하겠습니다.”
이미 늦었다. 선우는 무료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빨리 형을 찾아
야 하는데 이 버러지 같은 이들 때문에 시간을 낭비했다. 그러니 지금이라
도 시간을 단축하자.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반대편 벽이 터
져 나가며 무혁이 도착했다.
“그만하시죠?”
“싫다면?”
“무력 대응하겠습니다.”
화르륵. 무혁의 손에서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다루는 것은 불. 선
우와는 반대되는 원소였다. 그 때문이었을까? 둘은 평소에도 사이가 나빴
다. 그런데 하필 이런 상황에서 부딪치게 되다니.
한쪽에서는 물이, 다른 쪽에서는 불이 타오르기 시작하자 중간에 낀 관리국
헌터들의 안색만 새하얘졌다. 아무래도 오늘이 제삿날인 모양이었다.
여기서 잠깐 기다리십시오.”
무혁은 현우를 방에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
무언가 일이 생긴 것 같은데.’
현우는 손가락으로 톡톡 턱을 두드리다가 문에 손을 얹었다. 먹는 것을 제
공해 준다기에 얌전히 있었지만, 배가 부르니 슬슬 이성이 돌아왔다. 굳이
여기 묶여 있을 필요가 있나? 답은 ‘아니다.’였다.
‘동생도 찾아봐야 하고.’
쾅!
가볍게 손을 퉁기자 제법 두꺼워 보이는 철문이 문짝째로 떨어져 나갔다.
‘이 정도야 쉽지.’
현우는 손을 탁 털고는 그대로 소란이 일어나는 곳으로 향했다. 가기 전에
무슨 일인지 확인만 해 볼 셈이었다. 뒤에서는 케로베로스가 헥헥거리며 열
심히 따라왔다. 그게 거슬려 목덜미를 잡아 들자 좋다고 짖어댄다.
“왕왕!”
“그래, 그래.”
현우는 그대로 복도를 걸어 나갔다. 처음 왔던 방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무혁이 한 건 현우를 안고서 직선으로 달린 것뿐이었으니까. 뻥하니 뚫린
벽을 통해 안쪽을 들여다보니 절로 이런 소리가 나왔다.
“개판이네.”
그 목소리에 대치 중이던 장신의 남자 둘과 헌터들이 일제히 현우를 돌아보
았다. 장신의 남자 하나는 아까 만났던 무혁이었고, 다른 하나는? 모르겠
‘
다.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낯이 익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 그래서 현우
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
“누구세요?”
그와 동시에 허공에 떠 있던 물이 전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어 남자
는 현우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거참, 얼굴이 반듯하게도 생겼네.’
무혁이 남자답게 훈훈한 외모라면, 그는 좀 더 미인형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성스럽단 소리는 아니었다. 키도 크고 몸도 제법 탄탄해
보였으니까.
‘그런데 진짜 낯이 익네.’
무혁이 아까 자신의 나이를 스물다섯 살이라고 했으니, 지구의 시간으로는
10년 정도가 흐른 듯했다. 그러면 그때 얼굴을 본 사람이라는 소린데.
‘모르겠어.’
현우는 가까이 다가온 남자를 보며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떨어지지 않는
시선이 따갑다. 평소 성격이라면 어디서 눈깔을 부라리냐고 진작 눈알을 찔
렀을 텐데. 이상하게도 이 남자에게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현우.”
남자가 현우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바닥이 더럽고 엉망인데도 전혀 개의
치 않는 듯했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
모를 리가 없지.”
남자가 눈을 둥글게 휘며 웃었다. 그러더니 이내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울고 있는 미인의 모습은 파격적이라, 현우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역시 다정하네.”
자신이 다정하다고? 소름 끼치는 이야기였다. 아직도 목덜미를 잡힌 채 들
려 있는 케로베로스가 몸을 부르르 떠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넌 누군데? 막 질문을 이으려는 순간, 남자가 눈물을 닦아 준 손을 조심스
럽게 잡아 왔다. 그리고 말했다.
“형.”
조심스럽게 불러오는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10년 전의 작은 아이가 떠
올랐다.
“지선우?”
작고 여리며 사랑스러운 나의 동생.
“응.”
남자는 지선우였다.
지구 시간으로 10년. 마계 시간으로는 수십 년. 그 기간을 버티면서 울어 본
적이 없었다. 어린 동생을 지구에 두고 와서 가슴이 미어지는 순간에도 이
“
를 악물고 버텼다.
어떻게든 지구로 살아 돌아가겠다고. 그전까지는 절대 울 수 없다고 버티는
사이 점점 감정이 죽어 갔다. 다리가 부러져도, 팔이 찢겨 나가도 웃으면서
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랬는데. 눈앞이 흐려졌다. 흐려져서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되는데. 선우를 제대로 봐야 하는데. 현우는 손등으로 눈을 닦아 냈다.
그런데 눈이 고장 난 모양이었다. 눈물이 도통 멈추지 않았다.
“선우, 선우야?”
“응.”
돌아오는 대답에 다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왜, 왜 울어.”
이번에는 선우가 현우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아까는 분명 크다고 생각한
남자의 손이건만, 지금은 달리 느껴졌다. 여전히 선우는 여리고 작은 하나
뿐인 동생이었다. 현우는 눈물을 닦는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내내 손에 들고 있던 케로베로스는 이미 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 다행
히 원래 하던 가락이 있어 땅에 제대로 착지한 케로베로스는 눈을 크게 떴
다.
세상에! 저 미친놈이 울고 있어!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인 줄 알았는데. 아
무래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케로베로스는 작은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하
염없이 눈물을 떨어트리는 현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는 건 케로베로스뿐만이 아니었다.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헌터들과 무
혁도 서로의 눈을 의심하며 선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세상에! 그 지선우가
무릎 꿇은 채 울고 있어! 사실 저 사람은 지선우가 아니었던 건가! 아니면
지금 이 모든 게 환상인 걸까.
“허?”
특히 무혁은 스스로 자신의 손에 상처를 입혀 보기도 했다. 그러나 눈앞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선우는 울면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현우는 한참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다가 선우처럼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형?”
“미안해. 정말 미안해. 선우야.”
현우의 미안하다는 말에 선우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사과하는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내내 형만 생각해 오던 마음에 찬바람이 스쳤다. 혹시 형은 자신과
만나는 걸 원하지 않은 걸까.
“왜.”
왜 사과해? 되물으려는 순간, 현우가 말을 이었다.
“나만은 곁에 있어 주겠다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고작 열한 살이었던 동생은 이 험난한 세상에서 어떻게 자
라난 것일까. 부모님이 돌아가시던 날, 이 여린 존재를 세상의 모든 상처로
부터 보호해 주겠다고 그렇게 결심했는데. 무려 10년이란 세월 동안 혼자
두었다.
약속 어겨서 미안해.”
선우가 용서하지 못한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여전히 다정하다니. 그건 과
분한 말이었다.
현우의 그런 말을 들은 선우는 안심했다. 떨어져 있는 동안, 형도 내 생각을
했구나. 나를 잊지 않았구나. 그리고 그 세월만큼 자신에게 죄책감을 가지
게 되었구나.
형을 만나 터져 나온 감정의 파도에 허우적거리면서도, 계산적으로 생각하
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건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
“
4.
모든 것은 어린 동생을 버려두고 사라졌던 형의 잘못. 선우는 본능적으로
형의 죄책감을 가장 자극할 수 있는 말을 골랐다.
“괜찮아.”
그렇게 말하자 형의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터져 나왔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마계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지냈지만, 지구의 상황은 대충 알고 있었다. 빌
어먹을 요정이 가끔 소식을 알려 줬다. 진작 터트렸어야 하는 건데.
몬스터가 쏟아지고 세상이 변화하는 와중에 어린아이가 의지할 이 하나 없
이 홀로 남은 것이다. 많이 힘들었을 터였다. 그런데 괜찮다니. 선우의 거짓
말은 현우를 더 괴롭게 했다.
“아냐, 나는 정말 괜찮았어. 비록 많이 힘들고, 많이 괴로웠지만.”
선우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형에게 말했다.
현우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선우는 각성하기까지 힘들게 살아왔다. 각성
하고 나서도 믿을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버텨 내며 지금의 자리를 거머쥐
었다. 그래도 선우는 괜찮다고 말했다.
“형이 돌아올 거라고 믿었으니까.”
그 담담한 목소리가 현우를 더 괴롭게 만들었다.
“봐, 결국 돌아왔잖아.”
현우는 무너져 내렸다. 돌아온 것, 그걸로 된 거야? 자신의 동생은 어쩜 이
리도 착한지 모르겠다. 어떠한 원망을 토해 내도 모자랄 판국에 상냥한 말
을 하는 동생을 보고 있자니,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명확해졌다.
내가 너를 지켜 줄게. 아무도 널 해칠 수 없도록. 현우가 생각하는 바를 입
으로 꺼내려는 순간, 선우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러니 이제 형은 내가 지켜 줄게.”
그래, 네가 이제 형을 지켜 줘. 응? 현우는 울다 말고 고개를 들어 선우를 바
라보았다. 뭔가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았다.
“예전에는 형이 나를 지켜 줬으니까. 이제는 내가 지켜 줄 차례야.”
아니, 나 진짜 강한데. 안 지켜 줘도 되는데. 내가 그렇게도 약해 보이나. 현
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지구의 무력 기준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마
계 1위랑 맞짱 뜰 정도면 강한 축이 아닐까 싶은데. 왜 저렇게 말하나 모르
겠다.
낑
현우랑 선우의 만남을 내내 지켜보던 케로베로스도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
었다. 어이, 인간. 그건 아니지 않을까. 네 앞에 있는 사람은 마계 서열 1위
의 알베르크 님과 맞짱도 떴다고. 그 말은 어지간한 인간은 현우를 이기지
못한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왕왕!”
케로베로스는 멍청한 인간에게 현실을 자각시켜 주기 위해 앞으로 나섰으
나, 그런 그의 머리를 현우가 내리눌렀다.
‘닥치고 가만히 있어.’
강렬하게 전해지는 의도에 케로베로스는 다시 얌전해졌다.
현우는 생각했다. 그래, 선우가 그걸 원한다면. 나는 뭐든지 해 줄 수 있어.
어차피 힘을 쓰는 생활도 지쳤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동생을 위해 내내
성실하게 달려왔지만, 실상 그의 본성은 게을렀다. 쉬고 싶었다.
“그래. 지켜 줘.”
네가 원한다면 뭐든 못할까. 현우의 말에 선우가 환하게 웃었다. 마치 햇살
같은 미소였다.
“응, 형.”
그러더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현우를 대뜸 일으켜 세우더니 그대로 안
아 들었다. 치욕의 공주님 안기였다.
“ .”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케로베로스는 앙증맞은 두 발로 머리를 가리고 엎드
렸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일어나
긴 했다. 선우는 현우를 안아 든 채로 저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와앙!”
나도 같이 가야 하는데! 케로베로스는 허겁지겁 달려 나갔다. 그리고 남은
헌터들과 무혁은 아직도 그 자리에서 굳어 있었다.
“저대로 보내도 됩니까?”
그나마 간신히 입을 연 건 한참 뒤였다.
“보내지 않으면 어쩌겠습니까.”
무혁이 답했다. 사실 보내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둘의 눈물에 생각이 많아
졌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옷을 툭툭 쳐서 먼지를 떨쳐 내고
는 뒤돌아섰다. 하나뿐인 1세대 실종자를 선우에게 빼앗겼으니 후속 조치
를 취해야 했다.
그전까지는 오래 떨어져 있던 형제가 재회하는 순간을 내버려 두는 게 낫겠
지. 무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뭐든 동생이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 그렇게 결심했지만, 아무래도 이건 아
닌 것 같았다. 현우에게는 아직 어릴 때의 기억이 선명해서, 힘센 장신의 남
자와 어린 동생을 매치시키는 데 다소 시간이 걸렸다. 그렇기에 당장 떠오
르는 건 여리고 약한 동생이라. 그런 동생에게 무리를 시키는 것처럼 느껴
졌다.
“나 무겁지 않아?”
전혀.”
선우는 단호하게 말했다. 말 그대로였다. 형은 지나치게 작고 말랐다. 이런
몸으로 지금까지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한 걸까. 목이 메어 왔
다.
“전혀 무겁지 않아.”
그러더니 현우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현우는 좀 더 편하게 몸에서 힘을
뺐다. 지금은 동생을 믿어 보자. 그런 생각에서였다.
“형은 너무 말랐어.”
말랐나? 마계의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아 최소한으로 먹은 건 맞다. 그래도
나름 근육도 잡혀 있는 몸인데.
“또 너무 작아.”
마른 건 참아도 작은 건 못 참는다.
“그건 아니지.”
그래도 키가 175는 넘는데 그게 작다니. 정확히는 자신이 작은 게 아니라
선우가 큰 것이었다.
“네가 너무 큰 거야.”
작고 귀엽던 동생이 정말 많이도 자랐다.
“각성자는 등급이 높을수록 신체 조건이 좋아지니까. 자연히 키가 크고 몸
이 단단해지지. 형, 나는 S급 각성자야.”
“
뭐라고? 현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번에는 정말로 놀랐다. 이 말은 강
할수록 몸도 같이 큰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런데 나는 왜 이래? 분노에 절
로 몸이 떨려 왔다.
‘시발 놈의 요정새끼!’
요정에게 따지고 싶은 것이 아주 많았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여기에는
요정이 없다는 것이었다. 요정은 다른 세계에서는 미친 듯이 참견하지만,
인간 세상까지는 나오지 못한다고 했다. 세상의 균형을 위해서.
‘역시 진작 터트렸어야 했다.’
분노로 떨림이 멈추지 않는 가운데, 선우는 오해를 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자신보다 커서 늘 든든하게 보이던 형이 지금은 그보다 작고 약해졌다. 심
지어 지금은 몸까지 떨고 있지 않은가.
예전과는 완전히 바뀐 입장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형이 싫다거나, 한
심스러워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바뀌었어도 형은 여전히 선우가 가
장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하나뿐인 가족이었다.
역시 형은 자신이 지켜 줘야 한다. 그 생각이 더 확고해지는 순간이었다.
뻥 뚫려 기능이 망가진 건물을 지나 밖으로 나왔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엔
환한 해가 떠 있었고, 어디선가 기분 좋은 따스한 바람이 불어왔다. 마계와
는 완전히 다른 환경을 보니 그제야 내내 생각하고 있던 것이 마음에 와닿
았다.
‘돌아왔구나.’
정말 돌아왔다. 현우는 울컥했다.
이제 내려 줘.”
좀 더 지구의 환경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선우는
현우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들이켜는 숨이 달다. 마계의 톡 쏘는 듯한 대기
와는 완전히 다르다.
생각해 보면 열다섯 살도 많은 나이는 아니었다. 끌려간 사람 중 현우가 가
장 어린 나이였다.
‘그래도 이제 그 엿 같은 곳을 벗어났어.’
현우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얼마 만에 제대로 웃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때, 낯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길드장님.”
장신에 호리호리한 몸을 가진 남자가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몸에 달라
붙는 레이싱 슈트를 입은 그는 곱슬곱슬한 옅은 갈색 머리를 손으로 흐트러
트렸다. 그러고는 선우에게 말을 걸었다.
“이런, 벌써 저지르셨습니까?”
그는 이번엔 현우 쪽을 바라보았다.
“1세대 생존자입니까?”
시선은 현우를 향하고 있었지만, 말은 선우에게 걸고 있었다. 완벽하게 현
우를 무시하는 행태였다. 그 모습에 선우의 손이 자연스럽게 올라가더니,
인정사정없이 곱슬머리의 머리를 후려쳤다.
빡!
“
머리가 빠개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악! 내 머리!”
남자는 머리를 붙잡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내 형입니다. 예의를 지키십시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남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네?”
“두 번 말해야 이해합니까?”
선우는 다시 손을 들었다. 그러자 남자가 양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 아닙니다. 이해했습니다.”
그러고는 현우를 노골적으로 훑어 내렸다.
“약해 보이는데.”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현우가 뭐라도 하기 전에 뒤에서 까만
털 뭉치가 쏜살같이 뛰쳐나가 남자에게 박치기를 했다. 마치 대포알 같은
기세였다.
“악! 뭐야, 이 털 뭉치는!”
겉보기에는 손바닥 두 개 합친 크기의 작은 강아지. 그러나 실상은 마계의
이름난 마수 케로베로스였으니. 작정하고 부딪치니 이마가 얼얼했다.
왕왕!”
케로베로스는 남자를 응징하고 가슴을 폈다. 보세요, 현우 님. 제가 무례한
자를 혼내 주었습니다! 현우가 열받으면 주변이 초토화되는데, 이 무례한
자는 그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괜히 엮여서 같이 처맞기는 싫었다.
“저건 뭐야?”
그런 케로베로스를 보며 선우가 물었다.
“아, 케로?”
여기서 사실 케로베로스가 마계의 마수라는 걸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으니. 최대한 밝힐 수 있는 부분만 밝히기로 하
였다.
“강아지야.”
“강아지? 평범한 강아지 같진 않은데.”
“그건 그런데 말은 잘 들으니 괜찮을 거야.”
그동안 주먹으로 길들였으니, 안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누구야?”
“부길드장.”
“안녕하십니까, 서찬영이라고 합니다. 선현 길드의 부길드장을 맡고 있습니
다.”
“
인사는 정중했지만, 그게 다였다.
5.
아무래도 이 사람은 현우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사람에게는
굳이 대우를 해 줄 필요성을 못 느껴 현우도 건성으로 인사를 했다. 그냥 고
개를 끄덕이기만 한 것이다. 적어도 주먹으로는 인사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런데 길드가 뭐야?”
자신이 없는 사이에 뭔가를 세운 건가? 현우의 질문에 선우가 대답했다.
“그냥 사람 모인 단체.”
“그래도 그런 곳의 길드장이면 대단한 거 아냐?”
그 말에 선우가 수줍게 웃었다. 그리고 옆에서 그걸 실시간으로 보고 있던
찬영은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나 냉랭하게 찬바람만 몰고 다니던 길드장이 웃고 있었다. 심지어 반말
을 쓴다.
‘나한테는 안 써 주면서!’
왜 반말을 쓰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랬다. 자신은 친해지기 전까지는 말
을 낮추지 않는다고. 그랬는데 형이란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모든 걸 터놓
고 있었다.
‘아니, 알지.’
선우가 열한 살 때 형을 잃었고, 이후 힘겹게 길드를 세우기까지의 이야기
는 다큐멘터리로도 나왔다. 그래서 찬영도 사정은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약한 거 아냐?’
1세대 실종자일 텐데.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는다. 자연 찬영의 안에서
현우의 위치는 바닥으로 떨어져 내려갔다. 강한 사람이 좋아서, 선우의 길
드에 들어와 힘겹게 여기까지 올라왔다. 그런데 고작 형이란 이유로 옆에
서 있다니. 불공평하다.
찬영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차는 준비되었습니까?”
“네,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럼 가자, 형.”
선우는 또다시 현우를 안아 들려고 했다.
“아니, 괜찮아. 이번엔 내가 걸을게.”
“하지만 그러면 형이 힘들잖아.”
전혀 힘들지 않다. 옆에서는 케로베로스가 저 인간이 뭔 개소리를 하냐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현우는 그런 케로베로스의 머리를 살짝 쳤다. 그러자
죽는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깨개개갱!”
엄살이 심하다. 현우는 한참을 구르다 축 늘어진 케로베로스의 목덜미를 잡
아 들며 말했다.
“정말 괜찮아.”
“그럼 천천히 걷자.”
“응!”
둘은 여름의 초입에 불어오는 따스한 바람을 만끽하며 차까지 걸어갔다. 차
는 생전 처음 보는 커다랗고 고급스러운 차였다.
“내 차야.”
선우가 그렇게 말하며 수줍게 웃었다.
“대단하구나!”
해 준 것도 없이 사라져 버렸는데, 선우는 그동안 너무나도 잘 자랐다. 그
사실에 순간 울컥했다. 이 모든 게 현우, 자신의 죄였다. 여기까지 오는 게
쉽지도 않았을 텐데 어쩜 이리 잘 자라 주었는지. 그저 미안할 뿐이었다.
“타자.”
선우가 운전대를 잡고, 현우가 보조석에 탔다.
“길드장님, 저는요!”
“타고 온 게 있을 것 아닙니까.”
“그야 그렇지만!”
알아서 돌아가십시오.”
그렇게 선우는 매정하게 찬영을 뿌리쳤다.
탑승을 거부당한 찬영은 황급히 구석에 놓인 자신의 바이크에 올라탔다. 그
리고 이미 출발하여 저 멀리 앞서 있는 선우의 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평소
에도 선우는 찬영에게 살갑게 굴지 않았다. 그걸 아는데도 이상하게 평소보
다 더 가슴이 답답했다.
“
바이크네.’
까만색에 날렵하게 생긴 독특한 바이크가 뒤를 따랐다. 그를 멍하니 바라보
고 있자니 선우가 물어 왔다.
“맘에 들어?”
“응? 뭐가?”
“바이크.”
맘에 들기야 한다. 보고 있자니 마계에서 타고 다녔던 드래곤이 생각나 어
쩐지 그리워졌다. 잘 지내고 있겠지. 나의 바이크 1호.
물론 2호랑 3호도 있다. 연료는 마계의 마수요, 시동은 주먹이면 충분했던
자신의 바이크들. 하지만 그걸 선우에게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기에 수
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멋지긴 하네.”
‘
그 말에 선우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저런 바이크쯤 형이 원한다면 몇 개
든 구해 줄 수 있었다. 다만 걱정되는 건 단 하나. 안 그래도 연약해 보이는
형이 바이크를 타다가 다칠까 봐. 차마 구해 주겠단 말을 하지 못했다.
더불어 찬영에게서 바이크를 뺏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괜히 형이 보고서
타고 싶어 할라. 대신 다른 차를 주면 되리라. 찬영이 듣게 되면 기겁할 생
각을 하며 선우는 부드럽게 운전대를 돌렸다.
그런 동생을 보며 현우는 새삼 감상에 잠겼다. 쭉 뻗은 도로, 높은 빌딩, 거
리를 메운 사람들. 하나같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들이었다. 그 때문인
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그리고 마침내, 차가 어느 빌딩 앞에
서 멈춰 섰다.
다른 건물보다 훨씬 크고 번쩍거리는 빌딩 앞에 선 선우는 먼저 현우의 안
전벨트를 풀어 주었다.
“내리자, 형.”
“여긴 어딘데?”
현우의 질문에 선우의 답이 돌아왔다.
“우리 집.”
아니, 우리 집은 좀 더 작고 아담했는데. 달동네 구석에 있던 작은 월세방.
여름에는 비가 새고, 겨울에는 추웠던 그 방이 그들의 집이었다. 그런데 여
기가 집이라니.
엉겁결에 선우에게 이끌려 빌딩으로 들어서니,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이쪽
을 향했다. 그러나 그도 잠시,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시선을 바닥으로 돌
렸다. 그 모습에 현우가 의아함을 느끼기도 전에 둘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
다.
엘리베이터는 가장 위층에서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또 다른 문이 나타났
다. 일반적인 문과는 다르게 생긴 은빛의 두꺼운 문. 현우는 가까이 다가가
문을 손으로 만져 보았다.
‘깰 수 있을 것 같은데.’
느낌으로 보아 마수의 껍질을 사용하여 만든 문인 듯했다.
“들어가자.”
선우가 카드를 대자 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리고 드러난 내부를 본 현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단아하고 고급스러운 내부는 생전 본 적도 없는 것이
었다. 그야 어릴 땐 단칸방에서 살았고, 커서는 마계에서 머물렀으니까 당
연한 소리였지만 말이다.
“우리 집이야.”
선우는 강조하듯 다시 말했다.
“형의 방도 있어.”
그 말에 다시 가슴이 찡하니 아파왔다. 다시 나타날지, 아닐지도 모르는 자
신을 위해 방을 만들어 놓은 동생의 심정이 와닿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가 보자.”
현우는 씩씩하게 선우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다시 감탄했다. 자
신의 방이라 안내해 준 곳이 너무나도 크고 아름다워서. 감탄사밖에 내뱉을
수 없었다.
“와아.”
한참 감탄하다가 뒤늦게야 제정신을 차리고 선우에게 물었다.
“이런 데는 비싸지 않아?”
아무리 마계에 살아서 물가를 모른다고 해도, 이 정도는 알았다.
“괜찮아. 이 빌딩이 내 거거든.”
하지만 이어지는 선우의 대답에 현우는 다시 입을 벌렸다. 이 빌딩이 선우
거라고? 밖에서 보았던 빌딩의 크기를 생각해 보았다. 주변 건물들에 비해
훨씬 컸었지? 그리고 주변에도 이 빌딩보다는 작지만, 비슷한 건물이 여럿
있었다. 그럼 이 빌딩의 가격은 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다른 데도 또 있어. 혹시 여기가 맘에 안 들면 말해 줘.”
그런데 여기 말고 또 있단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동생은 대체 무슨 일을 저
지른 걸까.
“아냐, 맘에 들어!”
현우는 잽싸게 고개를 내저었다.
“앙앙!”
내내 존재감이 잊혀 있던 케로가 이때다 싶어 잽싸게 짖었다. 그러고는 근
엄한 포즈로 서서 방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제 이 방은 현우 님이 지낼
방. 케로로서는 안전을 철저히 점검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사소한 일
로 귀찮게 했다가는 지랄 맞게 화를 낼 테니까. 체크를 소홀히 할 수 없었
다.
“그런데 여기 애완동물은 금지인데.”
그런 케로를 보며 선우가 배시시 웃었다.
“왕?”
누구보고 애완동물이래! 케로가 발광하려는 순간, 현우가 선우를 올려보며
물었다.
“안 돼?”
말이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안 되진 않지.”
어이, 방금 안 된다며. 케로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선우를 바라보았다.
“형이 원하면 안 되는 건 없어.”
오랜만에 만난 형제는 서로 바라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절로 분위기가 포근
해졌다. 아, 이게 행복이구나. 현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
“1
세대 실종자라고.”
말을 내뱉은 남자는 독특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한쪽 눈은 백안인 데다가
눈을 가로지르는 상처가 있다. 그 때문에 원래도 싸늘해 보이던 인상이 더
험악해 보이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도가준. 선현 길드에 밀려 2위가 된 백
호 길드의 길드장이기도 했다.
“그걸 지선우 혼자 삼켰단 말이지. 욕심도 많지. 그런 건 나눠야지.”
하지만 혼자서 지선우에게 1세대 실종자를 공유하자고 하면 귓등으로도 안
들을 게 뻔했다. 그렇다고 그걸 강제로 듣게 만들 수도 없었으니. 그럼 어떻
게 하느냐?
“모이면 되지.”
가준은 히죽 웃었다.
“다른 길드에 소식 돌려.”
“정말 돌립니까?”
부길드장인 민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지만, 가준은 말을 바꾸지
않았다.
현재 각성자들은 정체되어 있다. 그런 상황에서 등장한 1세대 실종자라니.
탐나는 소재 아니던가. 물론 꽝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아닐 가능성도 있었
다. 그게 뭐든 지선우 혼자 가지게 두는 것도 거슬렸고.
“좋은 건 나눠야지.”
가준은 독한 눈빛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가준이 마음먹고 움직이니 길드마다 1세대 실종자에 대한 소문이 도는 건
금방이었다.
“정보 출처가… 보자, 도가준?”
온화하게 생긴 청년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게다가 데리고 있는 사람이 지선우.”
둘의 사이를 알고 있는 청년, 자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6.
대놓고 도가준이 지선우에게 시비를 거는 모양인데 여기 끼어도 될까? 하
지만 1세대 실종자의 존재는 자윤도 탐났다.
“뭔데, 뭐야?”
고민하고 있는데, 자윤과 비슷한 또래의 여성이 책상 위로 엉덩이를 올렸
다. 자윤의 여동생인 아윤이었다. 비록 같이 각성하지는 않았지만, 머리가
좋아서 길드 내의 지낭 역할을 하곤 했다.
“1세대 실종자가 나타났어.”
“1세대 실종자? 다 죽은 거 아니었어? 정말?”
“그래, 그런데 정보 출처가 도가준이다.”
“아, 그 아저씨?”
“너랑 몇 살 차이 안 나잖아.”
대 후반이면 다 아저씨지.”
“너 그러다 돌 맞는다.”
“누가 감히 돌을 던져? 요람 길드 자윤의 여동생인데.”
그야 그렇지만, 좀 더 말을 조심할 수는 없나.
아윤은 머리는 좋은데 가끔 말을 쉽게 하는 게 단점이었다.
“하여간 이렇게 되면 한 손에 꼽히는 길드는 다 노리겠네?”
“그렇겠지.”
“어디 보자, 선현 길드는 지선우 길드니까 빼고. 2위인 백호 길드. 3위인 우
리 요람 길드. 4위인 혜선 언니의 최강 길드. 5위, 5위는 누구였더라. 최근
길드 순위가 엎치락뒤치락해서. 아, 맞다! 평화 길드. 이름이 참 촌스럽네.
여기 길드장이 누구였더라. 보자… 한도진. 그런데 이 사람은 정보가 너무
없어.”
최근에 급부상한 길드인데, 길드장의 정보가 너무 없었다. 각성자들끼리 힘
순위를 다투는 대회에 나온 적도 없었고, 길드 회의에도 언제나 대리인을
보냈다. 그러니 몇 세대 각성자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2세대 아니면 3세대겠지만.”
세대를 올라갈수록 헌터의 힘은 강했으니까. 이름을 들어 봤을 법한 길드는
2세대나 3세대 헌터가 길드장이다.
“딱 한 번 본 적 있긴 하지만 참 음침했지.”
“20
몸을 구부정하게 말고 후드티를 깊이 눌러쓰고 있었다. 옷도 어쩐지 낡은
느낌이 나서 접근하고 싶지 않았다.
“옷만 제대로 입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왜 매번 같은 옷만 입는지 모르겠다
니까.”
“그랬었나?”
“그랬어. 자세만 바르게 하면 오빠보다 키가 더 클 덴데.”
“나보다?”
“응.”
그 말에 자윤은 새삼 감탄했다. 한 번 스치듯 본 사람이었는데, 그런 건 또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대. 이러니 여동생이 사랑스럽지 않을 리 없었다.
“잘 봤네.”
“나는 원래 잘 봐.”
아윤은 헤헤 웃으며 답했다.
“자, 그럼 우리도 1세대 실종자를 노려 볼까?”
“상대가 지선우이긴 하지만, 도가준이 힘을 모으자고 했으니.”
“승산이 없는 건 아냐!”
“선현 길드가 아무리 크고 강해도. 지선우가 지랄 맞아도.”
길드 여럿이 힘을 모으는데 아예 모르는 척 넘어갈 순 없겠지.”
“그거지!”
둘은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1세대 실종자라니, 그에게서 무엇을 알 수
있게 될지 두근거렸다.
“
*
커다란 창에서는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하지만 덥지는 않았다. 내부에서
에어컨이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그 상태로 소파에 길게 누워 있자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앙앙!”
케로도 바닥에 네 발을 쭉 펴고 누워서는 가끔 작게 짖었다. 기분이 좋은 모
양이었다. 하긴 마계는 날씨도 엿 같고, 평화로운 낮잠을 방해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으니까. 그렇게 가만히 평화를 즐기고 있자니 선우가 컵을 하나
들고 다가왔다.
“형, 주스 마셔.”
옅은 주홍빛의 주스는 맛있어 보이긴 했지만, 다소 낯선 모양새를 하고 있
었다.
‘주스가 빛나네?’
햇빛 때문인가 했는데, 그도 아닌 것 같았다.
몸에 좋은 걸 조금 갈아 넣었어.”
선우는 수줍게 말하며 현우에게 컵을 넘겼다.
‘어쩜 애가 이리 착해.’
오랫동안 버려둔 형을 원망해도 모자랄 판에, 이러는 걸 보니 가슴이 찡했
다. 나도 뭔가 해 줘야 할 텐데. 현우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그걸 읽기라도
한 듯 선우가 입을 열었다.
“형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해. 그러니 형은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선우야.”
결국, 감동의 파도에 허우적대던 현우는 선우를 꼭 끌어안았다. 어릴 적에
선우를 돌보던 버릇이었다. 선우는 형이 안아 주고 스킨십을 하는 걸 무척
좋아했으니까.
“혀엉.”
선우는 그런 형을 마주 안았다. 오랜만에 만난 둘 사이에서는 우애가 폭발
하듯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런 둘을 케로베로스는 흰 눈으로 바라보았다.
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수시로 눈에 들어오니 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저 인간이 뭐라고 저렇게 수시로 끌어안아 대냐. 형제라고는 하나도
없는 케로베로스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감정이었다.
“그런데 길드장이라며. 일 안 해도 돼?”
“
머무르면서 선우가 건네준 휴대폰으로 이런저런 정보를 검색해 보았다. 보
아하니 선우의 길드는 한국에서도 1위로 손꼽히는 커다란 길드로, 기업이
나 마찬가지였다.
“며칠 쉬기로 했어. 나도 그동안 계속 달려오기만 했으니까.”
“그래! 쉴 땐 쉬어야지.”
케로베로스는 이제 관심 없는 얼굴로 탁자 다리를 이로 갉기 시작했다. 자
연스럽게 케로베로스를 무시하며 현우는 선우에게 권했다.
“너도 여기 누울래?”
소파가 커서 둘도 충분히 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돼?”
“당연하지.”
현우가 다시 눕고 바로 옆에 선우가 누웠다. 선우의 덩치가 더 커서 몸의 일
부가 소파 밖으로 삐져나왔지만, 아무도 그걸 지적하지 않았다. 외려 현우
는 동생이 떨어질까 봐, 선우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갉작갉작.
케로베로스가 탁자 다리를 갉는 소리가 더 커졌다. 그렇지만 둘은 그것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환장하겠네. 케로베로스는 한숨을 쉬며 자기가 갉
던 탁자 다리에 기댔다.
현우는 금방 곯아떨어졌다. 그런 형을 선우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금은
잘 자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깊은 잠에 들지 못하는 걸 알고 있었다.
이해는 한다. 그도 다른 세계로 끌려가 요정에 의해 혹사당한 적이 있으니
까.
매일 제대로 된 잠을 자지 못했다. 마수 때문에, 미쳐 버린 사람들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 때문인가. 지구로 돌아와서도 오랫동안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그랬기 때문에 창백한 안색으로 눈을 감은 형이 안타까웠
다.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선우는 눈을 감은 형을 꼭 끌어안았다. 이제는
절대 형과 떨어지지 않으리라. 형을 지켜 주리라. 이제는 그럴 힘도 능력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사납게 웃었다.
‘도가준, 씨발 새끼.’
길드 사이로 1세대 실종자가 귀환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파고든 결과, 소문
의 근원지는 백호 길드의 도가준 같았다. 그 또한 선우와 같은 2세대 각성
자였다. 다른 세계에서부터 서로 견제하던 둘은 현실로 돌아와서도 사이가
나빴다.
‘눈알 긁어 준 거로는 성에 안 찼나.’
감히 형을 노려? 어떻게 만났는데 쉽게 다른 이들에게 넘겨줄 수 없었다.
그리고 형을 힘들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이제부터 그들에게 대응
할 때였다. 선우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그러나 그도 잠시, 다시 표정이 풀렸다. 일단 지금 여기 있는 형에게 집중할
때였다. 선우는 형처럼 자신도 눈을 감았다.
*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선현 길드에 가해지는 압박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
다. 제아무리 1위 길드라 해도 다른 길드들이 모여서 힘을 합치니 버텨 내
기가 쉽지 않았다. 그걸 가장 몸으로 느끼고 있는 자는 부길드장인 찬영이
었다.
길드장인 선우가 미룬 일을 전부 처리하고 있던 찬영은 여기저기서 들어오
는 소식에 이를 갈았다.
“이것들이 미쳤나!”
떨거지들이 모이면 뭔가 달라질 줄 아나. 왜 난리들인지 모르겠다. 그놈의
1세대 실종자가 뭐라고. 길드장인 선우는 며칠째 출근을 미루고, 다른 길드
들은 자신들과도 실종자를 공유하자고 땍땍거리고 있었다. 그나마 헌터관
리국은 한 발짝 물러서 눈치만 살피고 있으니 다행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까짓 1세대 실종자 따위 저들에게 던져 주고 싶었다. 하지
만 안 된다. 아무리 약하고 쓸모없어 보여도 길드장의 가족이다. 무려 대한
민국 서열 1위인 길드장의 가족. 마음에 안 들어도 다른 데서까지 무시당하
게 둘 수는 없었다. 그건 길드장의 권위와도 관련된 일이었다.
입술을 잘근거리던 찬영은 회의 때 실무진들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는 1세대 실종자를 절대 넘기지 않습니다. 다른 길드에서 뭐라 말하건
자리를 지키십시오. 이건 선현 길드의 위상과도 관계된 일입니다. 함부로
정보를 유출하거나, 다른 길드의 생각에 동조하는 이는 엄하게 벌하겠습니
다.”
개 같은 성격이었지만 지선우의 밑에서 몇 년을 굴렀다. 자리가 사람을 만
든다고, 찬영은 누구보다 선현 길드의 부길드장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다.
「귀하가 말한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도가준은 선현 길드에서 도착한 서류 봉투를 뒤집어 보았다. 그러나 저 한
문장이 적힌 종이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심지어 보낸 사람은 서찬영이네?”
선현 길드의 부길드장. 지선우라면 사족을 못 쓰는 개새끼.
“야, 이게 몇 장째냐?”
“세 장째입니다!”
옆에 서 있던 부하가 배에 힘을 빡 주며 대답했다.
“그래. 세 장째. 우리가 제안 넣은 건 몇 개고?”
“다섯입니다.”
“두 번은 답장도 안 했단 소리네?”
“……네.”
옆에 서 있던 부하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도가준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7.
건방진 서찬영. 지선우 밑에 있으니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지선우 하
나 믿고 날뛰는 놈이라 욕을 보내지 않은 걸로도 나름 자제한 것이다. 그걸
알긴 아는데 말이지.
속이 뒤집혔다.
지금까지 가준의 말이 이렇게까지 먹히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대한
민국에서 최고로 쳐 준다고 해도 독불장군은 오래 버틸 수 없다. 지선우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다른 길드의 의견도 수용하는 편이
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진짜 뭔가 있나 보네?”
도가준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비열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선현
길드가 이렇게 나오니 더 찔러 보고 싶어졌다. 정식 루트로 말을 안 받아 주
면 다른 방법도 있지 않은가.
“언제까지 안에서 박혀 있기만 하겠어.”
정부 기관인 헌터관리국도 아닌 척하면서 슬슬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계
속 한 장소에 1세대 실종자를 둔다고? 자신 같으면 안 그런다.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옮기겠지. 그때를 노리면 된다.
도가준은 새로이 계획을 세웠다.
이리 데굴, 저리 데굴. 거실의 러그 위에서 구르던 현우는 괜히 잘 자고 있
는 케로를 찔러 보았다.
“꾸억!”
배를 찌르니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도 깨지 않는다. 원래 이렇게 경계심이
없는 마수가 아닌데, 벌써 평화에 찌든 모양이었다. 현우가 죄 없는 케로를
괴롭히자, 소파에 앉아 흐뭇한 얼굴로 형을 바라보고 있던 선우가 물었다.
“심심해?”
“어? 아니. 딱히 심심한 건 아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얼굴에는 심심해 죽겠다고 적혀 있었다. 내내 집에 갇
혀 있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뭔가 해 보고 싶은 거 있어?”
“해 보고 싶은 거?”
현우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해 보고 싶은 거. 마계로 간 초반에는 하고 싶
은 것들을 손꼽으며 버티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점점 기억
은 희미해졌다. 남아 있는 건 하나뿐인 가족인 선우에 대한 것뿐. 그 외는
이미 포기한 지 오래였다.
“쇼핑이라도 갈까?”
선우가 담담하게 물어 왔다.
“나가도 돼?”
현우도 바보는 아니었다. 대충 선우의 상황은 짐작하고 있었다. 하나뿐인 1
세대 실종자, 그를 품고 있는 선현 길드. 그다음은 대충 예상이 되었다.
“안 될 건 뭐람.”
쉽게 이야기할 게 아닐 텐데. 현우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선우를 바라보았
다. 그런 현우를 보며 선우는 웃었다.
형 내가 왜 길드를 만들었는지 알아?”
“왜 만들었는데?”
“혼자보다는 여럿이 형을 찾기 더 쉽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야. 선현 길드
는 형을 위해서 존재하는 거야. 그리고 선현 길드가 있으면 형은 원하는 대
로 할 수 있어. 무엇보다 나도 있잖아.”
현우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선우는 대체 왜 이리 자신을 위해 주는 걸까.
10년을 홀로 둔 못난 형인데. 괜스레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울지 마, 형.”
“안 울거든?”
“응. 알았어. 그럼 나갈까, 형?”
현우는 찡해 오는 코끝을 문지르며 일어났다.
“그래, 나가자! 까짓것 나가지 뭐!”
기특한 동생과의 첫 외출이다. 방해하는 놈이 나타나면 으깨 버릴 테다! 현
우는 살벌한 생각을 하며 동생과 마주 웃었다.
“으앙!”
현우가 일어서자 케로도 자리에서 엉기적거리며 일어섰다. 따라가야지.
“ ,
외출 준비는 금방 끝났다. 애초에 준비할 것도 별로 없었다. 그냥 입고 뒹굴
던 옷만 갈아입으면 끝날 일이었다. 현우는 선우와 나란히 걸어 엘리베이터
를 타고 내려왔다. 층수가 점점 내려가고, 1층이 되자 문이 열렸다. 그리고
이어 보인 광경에 현우는 저도 모르게 눈을 깜박였다.
넓은 1층 홀에 사람이 가득 차 있었다. 하나같이 정장을 걸치고, 무기를 소
지한 각성자들이었다. 그 사이로 익숙한 사람 하나가 다가왔다. 저번에 보
았던 레이싱 슈트를 입은 청년, 부길드장 찬영이었다.
오늘의 그는 다른 이들처럼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피곤한 듯 눈 밑이 거뭇
하긴 했으나 말끔하게 차려입으니 제법 잘생겼다. 현우의 동생인 선우만큼
은 아니었지만. 현우는 아직 선우보다 잘생긴 사람을 보지 못했다. 사람이
아닌 존재라면 하나 있었지만, 알베르크는 다신 만나지 못할 존재가 됐으니
까 패스다.
“오셨습니까?”
“준비는 끝났습니까?”
“끝났습니다. 백화점도 섭외했고, 미리 사람을 보내서 점검 중입니다. 도착
할 무렵엔 끝날 겁니다.”
“철저히 하십시오.”
“걱정 마십시오.”
둘의 대화가 끝나고 선우가 현우를 돌아보았다. 현우는 그제야 어깨를 으쓱
하며 물어보았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뭐야?”
“경호원이야.”
경호원?”
“아무래도 둘만 움직이기엔 위험해서 사람을 조금 동원했어.”
선우는 그렇게 말했지만, 조금이라기엔 그 수가 제법 많다. 게다가 선우에
게는 한참 미치지 못했지만, 제법 쓸 만한 자들이었다.
“괜찮지?”
둘만 외출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사람이 너무 많이 붙는다. 도로 들어가
서 뒹구는 게 나을까, 하고 선우를 바라보니 눈이 반짝거린다. 여기서 돌아
갈 수는 없었다.
“괜찮아.”
결국, 현우는 선우가 원하는 대로 하기로 했다. 양쪽에 늘어선 사람들을 지
나 차에 탑승하자, 앞과 뒤를 차가 에워쌌다. 어쩐지 조금 부끄러웠지만, 선
우를 보면서 참았다.
“
대체 누구람? 경호를 맡은 1팀에서 3팀까지의 팀원들은 하나같이 호기심
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호위 대상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부길드장인
찬영은 간단하게 설명했다.
“길드장님에게 소중한 분입니다.”
찬영은 딱 거기까지만 말했다. 그 이상은 아직 그들에게도 밝힐 수 없었으
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팀장들은 의욕이 넘쳐났다.
평소에 그들의 손을 필요로 하지 않던 길드장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다니.
성격에는 여러모로 문제가 있었지만, 그들을 여기까지 이끌어 온 사람이었
다. 존경하지 않을 리 없었다.
“맡겨 주십시오!”
그들은 힘차게 외쳤다.
선우는 그들의 합류를 막지 않았다. 아무리 본인이 주의해도 만약의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는 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처음으로 현우
를 본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누군지 알 수 없는 건 둘째 치고, 길드장이
보이는 태도 때문이었다.
언제나 무감해 보이던 길드장이 한 사람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속삭이고 있
었다. 그를 본 몇몇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보이는 건 변하
지 않았다.
“지금 내가 보는 거 환상 아니지?”
“아닌 것 같습니다.”
“세상에. 길드장님이!”
능력은 뛰어나지만, 성격은 개차반이라 언제나 외부에 보이는 모습을 조작
하느라 바빴는데. 그런 그가 저런 모습을 보이다니 기적 같은 일이었다.
“저런 모습은 처음 봤어!”
“그러게 말입니다.”
팀장들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오늘 임무, 제대로 해내야겠는걸.”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들은 기합을 넣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우가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형, 어디부터 갈까?”
‘들떴네.’
정작 외출하고 싶었던 건 자신보다 선우였던 모양이었다. 선우는 밖으로 나
오는 순간부터 내내 들뜬 것 같았다. 반면 현우는 신경을 거슬리는 감각을
내리누르고 있는 참이었다.
그의 기준으로는 강하다 할 수 없는 자들이었으나, 그런 자들이 수십 명이
들러붙자 슬슬 거슬리기 시작했다. 나름 거리를 두고 호위를 하고 있었지
만, 감각이 예민한 현우에게는 그 거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참자, 동
생이 원하는 일인걸. 현우는 손을 꽉 쥐었다.
“이제 백화점에 갈 건데, 뭐 사고 싶은 거 없어?”
그런 현우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우가 웃으며 물어 왔다. 그래, 모처
럼 동생과 외출했는데 타인의 존재감은 잊도록 노력해 보자.
“어, 그럼. 옷?”
옷이라면 선우가 잔뜩 사다 나르고 있었지만, 달리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옷? 좋지. 형에게 어울리는 걸로 골라 보자. 그리고 새 옷을 입고 카페에
가서 차를 마실까?”
“좋지.”
차는 커다란 백화점 앞에 멈춰 섰다. 어렸을 적에도 지나가면서 보기만 했
지, 단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미지의 장소였다. 그 때문인가? 조금 긴장
이 됐다.
“들어가자.”
선우가 현우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백화점의 문 입구
의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문 닫은 거 아냐?”
“겉으로는 그렇지.”
선우는 뒤쪽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환영하듯 문이 열리며 백화점 직원들이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화려하게 반짝이는 불빛 아래, 넓은 공간이 드러났다. 그 모습에 잠시 멈칫
거리니 선우가 현우의 손을 잡아왔다.
“괜찮아. 오늘 여기 하루 종일 빌렸거든. 형이 하고 싶은 건 뭐든지 해도
돼.”
내가 뭘 들은 거지? 현우는 놀람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렇게 커다란
백화점을 하루 종일 빌렸다고? 그게 가능해? 어렸을 적에 마계로 끌려가
아직은 현대의 상식이 다소 부족한 현우로서는 그게 가능한 일인지도 알 수
없었다.
‘아니, 가능하니까 했겠지만.’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런 그의 앞으로 한 여성이 다가와 인사와 함께
자신의 소개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H백화점 퍼스널 쇼퍼 유진아입니다. 다시 찾아 주셔서 감사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고객님의 만족스러운 쇼핑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
습니다.”
퍼스널 쇼퍼는 또 뭐람. 슬쩍 선우의 눈치를 보니 귓가에 속삭이듯 설명해
준다.
“쇼핑을 도와주는 사람이야.”
원래 백화점에는 그런 사람이 붙나? 의문을 가지는 사이, 선우가 퍼스널 쇼
퍼에게 물었다.
8.
“
남성복 매장은 몇 층입니까?”
“3층과 4층입니다. 3층은 일상복, 4층은 정장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습니
다.”
“그렇다는데? 어디부터 갈까?”
“3층!”
“좋아. 그러면 엘리베이터 탈까? 아니면.”
“에스컬레이터 탈래.”
현우는 냉큼 대답했다. 다소 부끄럽긴 했지만, 처음 와 보는 곳인데 이 정도
의 흥분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딱히 사고 싶은 건 없었지만, 구경하는 재미도 제법 괜찮았다. 동생은 뭘 입
어도 잘 어울려서 입히는 보람이 있었다.
“이것도 입어 봐!”
“응, 형.”
선우는 얌전히 의상을 들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뒤늦게 생각난 듯
사이로 얼굴을 내밀며 말했다.
“형은 안 입어 봐?”
“나는 괜찮은데.”
그러자 선우의 눈꼬리가 축 처졌다.
“입어 볼게!”
현우도 선우가 골라 준 옷을 입고 옆의 탈의실로 들어갔다. 옅은 아이보리
색의 니트를 걸치고 나오자, 같은 옷을 입은 동생이 옆에서 웃었다.
“잘 어울린다.”
“너도.”
“이대로 입고 갈까?”
선우가 현우의 어깨에 머리를 올리며 속삭였다. 키 차이 때문에 불편할 법
도 한데 한번 기댄 머리는 도무지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현우는 그런
선우의 머리를 손으로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그럴까?”
현우가 말하자 선우에게서 작은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왜 웃어?”
“행복해서.”
선우는 그렇게 말하며 아쉬운 듯 머리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퍼스널 쇼퍼
에게 말했다.
“지금까지 입어 본 것 전부 다 주십시오.”
현우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전부 다?”
의상을 갈아입다 얼핏 가격표를 보았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무
시무시한 가격이었다. 그래도 이제 빌딩까지 가진 동생이니까, 하나 정도는
받아도 되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전부 다라니! 현우는 당황했다.
“그건 아니지!”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왜?”
“비싸잖아!”
현우가 그렇게 외치자 퍼스널 쇼퍼의 표정이 묘해졌다. 대한민국에서도 손
꼽히는 헌터인 선우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던전을 닫아 온 각성자였다. 한
“
번 던전을 닫을 때마다 들어오는 수익은 기본이 억 단위. 물론 한 자릿수가
아니다. 그런 그에게 있어 이 정도 옷은 간식값도 되지 않을 텐데, 비싸다
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구나.
‘진짜 무슨 사이람?’
퍼스널 쇼퍼는 궁금증에 근질거리는 입을 꾹 다물며 손톱으로 손등을 눌렀
다.
“안 비싸.”
“비싸!”
선우는 말을 정정했다.
“나한테는 안 비싸.”
“그래도 받을 수 없어.”
현우는 단호하게 말했다. 동생이 고생해서 번 돈인데 쉽게 쓸 수 없었다. 그
래서 거절했건만 선우는 그런 마음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의 미간에 주름
이 생겼다.
“왜 받을 수 없어?”
“그야.”
현우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네가 힘들여 번 돈이잖아.”
선우의 미간 주름이 사라지며 눈꼬리가 축 처졌다.
“형.”
알고 있다. 비록 지금은 드래곤도 쉽게 쥐어 패는 능력을 갖췄지만, 거기까
지 올라가는 길이 쉽지만은 않았다. 1세대 실종자 중에서 어린 나이였던 현
우는 최약체 중 하나였다. 가진 건 독기뿐이었다. 그랬는데 더 어렸던 선우
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차라리 내가 돈 벌어서 사 줄게.”
“안 돼.”
이번에는 선우가 단호하게 잘랐다.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곱게 모셔
놓고 싶은데 일이라니. 약하기만 한 형이 어떻게 돈을 벌겠다고.
“그럼 나도 안 받을래.”
현우는 고집을 부렸다.
“몰라, 나는 살 거야.”
선우는 선우대로 고집을 부렸다.
“전부 선현 길드로 보내 주십시오.”
당황한 현우가 선우의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갑자기 그가 표정을 굳혔다.
내가 너무 세게 나갔나? 현우가 후회하며 의견을 철회하려는데, 이질감이
느껴졌다. 거리를 두고 늘어서 있던 각성자들의 기운이 더 강하게 느껴졌
다. 이어 어디선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겨우 그거 하나뿐이었는데 내부에 긴장이 감돌았다. 선우가 이를 드러내며
현우에게 말했다.
“형, 잠시 여기 있어.”
“어? 어.”
선우는 그대로 일어나 앞으로 나섰다. 그러더니 퍼스널 쇼퍼에게 말했다.
“이후 금액은 선현 길드 앞으로 달아 두십시오.”
천장이 얼어붙더니 파스스 부서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사람 하나가 떨어져
내리고, 선우가 뛰쳐나갔다. 마치 몸을 웅크리고 있던 짐승이 튀어 나가는
것 같았다.
“왕!”
내내 구석에 박혀서 졸던 케로가 네 다리로 당당하게 서더니 현우의 앞을
가로막았다.
쿵!
커다란 울림과 함께 격렬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상대가 악을 쓰며 덤벼들고
있었지만,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선우가 조금도 밀리지 않고 상대하
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주위를 지키던 선현 길드의 길드원들이 모이
고 있었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 승패는 확실해진다.
기껏 쳐들어온 보람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게 다가 아닐 것 같은데.’
차분하게 주위를 살펴보니, 인기척이 하나 더 느껴졌다. 그는 모습을 드러
내자마자 곧바로 선우에게 덤벼들었다. 선우가 쥐어 패던 사람을 내던지고
그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서로 쉽게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었다.
‘허? 누구지?’
현우가 목을 으득 소리 나게 꺾었다. 아무리 힘을 감추고 있다지만, 이런 상
황에서까지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었다.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날카롭지만, 시원하게
뻗은 눈매가 어쩐지 낯익다.
‘어디서?’
어디서 보았지? 생각나지 않았다. 시선이 마주친 그가 이쪽으로 몸을 틀었
다.
‘누구지?’
현우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애절한 표정이 눈에 박혀 왔다.
그때였다. 벽에 까만 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그 점은 점점 커져서 사람만
한 크기가 되어서야 확장을 멈췄다. 이어 그 안에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아, 또 나보다 키가 크네.’
기분 더럽다. 또다시 여기 없는 요정을 탓하는데, 그 안에서 나온 남자가 싱
긋 웃어 보였다. 생긴 건 나쁘지 않은데 특이하게 한쪽 눈이 멀쩡하지 않다.
인상도 너무 냉정해 보였고.
‘
역시 생긴 건 선우가 최고네.’
흐뭇하게 미소 짓고 있는데 남자가 현우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왕왕!”
케로가 짓다가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남자는 케로를 잡아채더니, 힐
끗 쳐다보곤 내던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얌전히 떨어질 케로는 아니었
다. 케로는 솜씨 좋게 벽을 뒷발로 차고 제대로 바닥으로 착지했다. 어느 모
로 보나 평범한 개의 능력은 아니었다.
케로는 으르렁대며 다시 달려들려고 했다. 그 남자가 현우에게 말을 걸지만
않았더라면.
“자, 그럼 같이 가 보실까, 공주님?”
저게 미쳤나. 부풀려졌던 케로의 털이 쪼그라들며,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
다. 심지어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괜히 옆에 있다 불똥 튀길라.
케로는 제일 최약체로 보이는 퍼스널 쇼퍼 뒤에 숨었다. 그래도 현우는 힘
이 없는 자는 어지간해서 패지는 않았으니까. 예전에도 때릴 때 그랬다. 이
정도 처맞아도 죽지 않을 걸 아니까 때리는 거라고.
“뭐?”
현우는 기가 막혔다. 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지? 공주님? 그는 오늘 처음
으로 사람이 말도 안 되는 일을 겪으면 몸이 굳는다는 걸 깨달았다.
‘
세대 실종자라고 해서 뭔가 대단할 줄 알았는데. 막상 보게 된 이는 작고
말랐다. 이런 걸 보호한다고 그 애를 썼단 말이지. 가준은 피식 웃으며 가죽
1
장갑을 낀 손을 1세대 실종자의 몸에 댔다. 공포로 굳어서 그런지 설득하거
나 강제로 끌고 갈 필요도 없었다.
‘쉽네.’
물론 선우를 붙잡아 두는 건 쉽지 않았지만. 기대도 하지 않았던 혜선과 평
화 길드장 도진이 제대로 활약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선우는 때에 맞춰 오
지 못했다. 그가 왔을 때는 이미 가준과 1세대 실종자의 몸이 커다란 까만
점, 정확히는 텔레포트 포털을 통과한 뒤였다.
“도가준!”
다급한 선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우!’
언제나 자기 잘난 줄 알던 지선우. 그런 그가 소리를 높이는 건 처음 들었
다. 가준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성공!”
가준은 포털의 반대편으로 빠져나오며 즐거운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힘
겹게 포털을 유지하고 있던 각성자가 숨을 몰아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비싼 돈을 들여서 텔레포터를 길드에 가입시킨 보람이 있었다. 최근에 남모
르게 가입시킨 거라 지선우도 모르고 있었을 터였다. 알았으면 대처했겠지.
절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진짜 오랜만에 지선우에게 엿 먹였다. 이 어
찌 즐겁지 않을까.
“자, 그럼 1세대 실종자씨.”
가준은 잡고 있던 작은 어깨를 놓고 빙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처음으로 1
세대 실종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게 되었다.
예쁘장한 얼굴이 사슴처럼 순해 보였지만, 눈 밑의 눈물점 때문에 묘하게
색기가 도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가준의 취향은 아니었다. 그는 이런 비
리비리하고 작은 몸을 가진 남자보다 풍만한 몸의 관능적인 여성을 사랑했
다.
“이제부터 아는 정보를 전부 토해 내야 할 텐데.”
가준은 선우가 1세대 실종자에게서 캐낸 정보, 그걸 전부 알고 싶었다. 그
러니 온건한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면, 과격하게 굴 생각도 있었다. 그러니
조금 겁만 줄 생각이었다.
“아픈 거 좋아해? 손톱을 뜯는다거나, 바늘로 각막을 걷어 내거나 하는 거.”
눈을 가늘게 뜬 채 입꼬리를 찢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싸늘하게 생긴 인상
인데, 이러고 웃으면 더 무서워 보인다. 그래서 그런가? 앞에 선 1세대 실종
자가 어깨를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9.
‘
정말 초식 동물 같네.’
가준은 손가락으로 턱을 두드렸다. 그리고 그때,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잠시 귀를 의심했다. 그러다 혹시나 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반쯤 기절한 텔
레포터 하나, 좀 떨어진 곳에서 문을 지키는 길드원 둘. 그 외에 이 공간에
있는 사람은 가준과 1세대 실종자뿐이었다.
“나다.”
1세대 실종자가 가준을 노려보며 이를 드러냈다. 그래 봤자 귀여운 송곳니,
조금도 위협이 되지 않았다.
“하?”
기가 막혔다. 가준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1세대 실종자를 내려다보았
다. 지금 이 자그마한 게 뭐라고 한 것인가.
“아픈 거 좋아하냐고?”
1세대 실종자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넌 좋아하냐? 모르겠다면 내가 알려 주지.”
1세대 실종자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어 북 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화끈거리는 통증이 배에서 느껴졌다.
“쿨럭!”
가준은 기침을 하며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뭐지? 방금 무슨 일이 있
었던 거지? 장기까지 으깨지는 듯한 통증이었다. 애써 통증을 참고 위를 올
려다보니 사슴 같다고 생각한 순한 얼굴이 웃고 있었다.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현우는 태연하게 자신을 협박하는 덩치를 보며 머
리에 열이 오르는 걸 느꼈다. 이렇게 화난 거, 무척 오랜만이었다. 마계에선
하도 이놈 저놈 쥐어 패놔서 덤벼드는 이들이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오랜만
의 신선한 경험이었다.
이렇게 새로운 경험을 준 이에게 보답해야 하는 게 아닐까? 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리고 힘차게 배를 후려쳤다. 그래도 현대
에서 살인은 안 된다는 기억은 남아 있기에, 죽지 않을 정도로 쳤다. 장신의
몸이 현우보다 낮아지며 기침을 토해 냈다.
현우가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아프냐?”
남자는 대답 없이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무너진 몸을 바로 세우며 경계 태
세를 하고, 독을 살포하기까지 물 흐르듯 동작이 이어졌다. 제법 실력이 있
는 남자였다. 그게 덜 처맞는단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독쟁이네?”
“시발! 누가 독쟁이!”
독이 더 강해졌다. 하지만 남자에게는 불행하게도 현우는 어지간한 독은 통
하지 않는 몸이었다. 더불어 마계로 간 초기에 독 때문에 무척 고생해서 독
을 싫어했다. 절로 주먹에 감정이 실렸다.
훙!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주먹이 휘둘러졌다. 그리고 남자는 그걸 피해
냈다!
“와, 이걸 피하네?”
보통은 보고도 피하지 못하는 게 맞았다. 그런데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지
어떻게 피해 냈다. 간만에 때리는 맛이 있는 놈을 만난 것 같았다. 현우는
주먹을 으득 쥐고서는 목을 좌우로 꺾었다.
이어 다리가 허공을 가르는 순간, 벽이 터져 나갔다. 남자가 그대로 벽을 무
너트리고 밖으로 몸을 뺀 것이었다. 그러나 그걸 그대로 놔두면 재미없지.
현우는 이를 드러내며 짐승처럼 웃었다.
남자가 뛰쳐나간 벽 사이로 몸을 빼내자, 골목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
막 빛이 쏟아지는 거리로 뛰쳐나가는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현우는
잽싸게 그 뒤를 따라 몸을 날리며 그의 뒷덜미를 잡았다.
“잡았다.”
쿵!
사람이 사람을 깔아뭉개는 거라고는 믿을 수 없는 소리가 났다.
“씨발!”
제법 독기가 있어 맞는 족족 반격하려고 애썼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현우
와 남자의 실력 차는 컸으니까.
“꺄아악!”
마침 지나가던 사람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에 현우가 뒤늦게 정신
을 차리고 고개를 들자, 그사이에 남자가 몸을 비틀어 빠져나갔다. 그리고
재빠르게 가까운 건물 벽을 박차고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다
면, 현우도 할 수 있다.
현우는 금방 몸을 위로 끌어 올렸다.
“도망가네?”
“씨발, 너 뭐야!”
퉤. 남자는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알잖아?”
“1세대 실종자.”
“맞아.”
“그런데 이렇게 세다고? 2세대와 3세대도 이렇게 차이가 나진 않아!”
내가 알 게 뭐람. 현우는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둥그렇게 휘었다.
“뭐,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조금만 더 맞자?”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남자는 다음 건물로 건너뛰었다. 제법 너비가
있는데 하는 행동에 망설임이 없다. 현우는 그 뒤를 따라 뛰면서 심장이 뛰
는 걸 느꼈다. 백화점을 처음 구경했을 때에 느꼈던 두근거림. 그것과는 질
이 다른 느낌이었다. 마계에서 사냥을 할 때 느끼던 그 격렬하던 감정, 그
감정이 되살아났다.
하하!”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남자를 다시 따라잡는 것도 금방이었다.
“시!”
남자가 현우에게 걷어차이며 말을 이었다.
“발!”
곧바로 굴러서 피하며 현우의 발을 잡아채려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외려
한 번 더 거세게 차였다. 현우는 손가락을 들어 이마 옆을 톡톡 두드렸다.
“아까 뭐라고 했더라? 손톱을 뜯어내고.”
그대로 남자의 가죽 장갑을 잡아당겨 벗겼다.
“각막을 걷어 낸다고 했나?”
겁도 없지. 상대가 누군 줄 알고 그딴 소리를 지껄이나. 현우는 어리석은 남
자에게 작은 교훈을 주기로 하였다.
“시발, 억울하면 너도 뽑던가.”
그러면서 치켜뜬 눈이 사납다. 아, 생각났다. 마계에서도 이런 놈이 하나 있
었다. 하도 덤벼들길래 몸을 망가트렸더니 기어서라도 덤비려고 했다. 그게
짜증 나서 좀 더 손을 봐줬는데, 그래도 굴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했더
라? 손이 남자의 목으로 향했다.
맞아, 죽이려고 했었다.
“
그렇지만 안 되지.’
작은 교훈은 작은 교훈으로 그쳐야 했다. 여기가 마계가 아니란 걸 잊어서
는 안 됐다. 현우는 아쉬운 표정으로 손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남자의 이마
를 손바닥으로 세차게 후려쳤다. 버티고 있던 몸이 벌러덩 뒤로 넘어가며
코피가 터졌다. 이미 피범벅이던 얼굴이 더 엉망이 되었다.
“너, 이름이 뭐냐.”
남자, 독쟁이가 목소리를 쥐어 짜내 물었다. 참 빨리도 묻는다. 현우는 이대
로 가 버릴까, 하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현우.”
“1세대는 다 너같이 강해?”
“아니.”
강하고 뭐고 1세대는 현우 혼자 남았다. 그러니 강함을 측정할 대상이 없었
다.
“시발, 그나마 다행이네.”
“욕은 그만하고.”
다시 손을 올리자 그제야 나불대던 입이 다물린다. 이제 이걸 어떻게 하지.
문득 내려다본 아래쪽에서는 소란이 일고 있었다. 건물 위를 사람 둘이 날
아다니며 날뛰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현우는 머리를 긁적이다 독쟁이를 돌아보았다.
‘
이거 어쩔 거야?”
“뭘?”
아래를 가리키자 독쟁이가 얼굴을 구겼다.
“해결할 수 있지?”
그러면서 주먹을 흔들어 보이자 독쟁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운동 거리도 못
됐지만, 그래도 간만에 움직였더니 나름 개운하다. 현우는 나오지도 않는
땀을 닦으며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켰다.
“간만에 몸 좀 풀었네.”
그 말에 엎어져 있던 독쟁이가 이를 으드득 갈았다. 그런 그에게 다가가 바
로 앞에 주저앉은 현우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 참고로 이번 일은 무덤에 갈 때까지 비밀로 하는 거다?”
“그런 게 어디 있.”
“여기 있지. 싫어?”
현우는 주먹을 쥐고 흔들어 보였다. 그렇게 사람을 개 패듯 팼는데 손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다. 그게 더 오싹했다.
“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가준은 깊이 한숨을 쉬었다. 1세대 귀환자를 잡기
위해 왔는데, 되레 본인이 처맞았다. 얼마나 맞았는지 몸이 떨려서 일어나
기도 힘들었다.
내 이름은 도가준이다. 기억해.”
“내가 왜?”
가준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욕을 꾸역꾸역 집어삼켰다. 방금 전에도 욕을
하다가 한 대 더 맞았기 때문이었다. 주먹도 작으면서 얼마나 매서운지. 맞
으니 골이 흔들렸다.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너무 떨려서 땅을 두
손으로 짚고 나서야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몸을 세운 가준은 떨리는 손으
로 피범벅이 된 얼굴을 훔쳤다. 죽을 맛이다.
‘장기도 좀 다친 모양인데.’
조금만 방심해도 피를 토할 것만 같았다.
‘지선우랑 싸울 때도 이렇게 처맞진 않았는데.’
기분이 개 같았다. 옷매무새를 정리하던 가준은 문득 현우의 시선을 느끼고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왜, 더 패게?”
“아니.”
현우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이미 팰 만큼 팼는걸. 더 맞고 싶어?”
“사양하겠다.”
“
순해 보이는 얼굴이 새삼 두렵게 느껴졌다. 저런 게 사슴은 개뿔. 그랬다가
는 생태계가 망가질 게 뻔했다.
가준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잠겨 있는 옥상 문을 발견하고 뜯어냈
다. 올라올 때는 벽을 타고 올라왔지만, 똑같이 내려갈 기운도 없었다. 힘없
이 계단을 내려가고 있자니, 옆에 현우가 붙었다.
“너.”
“왜?”
“돈 있냐?”
“있지.”
“그럼 내놔.”
이젠 삥도 뜯냐. 말없이 지갑을 건네니 안에서 만 원짜리 하나를 빼곤 돌려
준다.
“차비가 없어.”
태연하게 말한 현우는 만 원을 접어 옷 주머니에 넣었다.
“가는 길은 알고?”
“길드 이름 알면 다 되는 거 아닌가?”
“여기 선현 길드랑 거리 멀어.”
그 말에 현우는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되돌아섰다.
많이 머냐?”
“많이 멀지.”
“그럼 데려다 놔.”
“싫다면?”
그 말에 현우가 주먹을 들어 보였다. 자그마한 게 왜 이리 폭력적인지 모르
겠다. 가준도 폭력으로는 어디서 지는 사람이 아닌데 말이다.
“알았다. 데려다주지.”
먼저 손을 든 이는 가준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외면적으로 보이는
모습이었을 뿐이다. 방금 전까지 현우와 붙어서 싸워 지긴 했지만, 그건 어
디까지나 1대 1의 상황에서였다.
“
10.
가준은 버릇처럼 턱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러다 신음을 내뱉었다. 시
발, 턱도 아파. 어찌나 구석구석 팼는지 안 아픈 데가 없었다.
‘사람이 좀 더 늘어나면 어쩌려나.’
다행히 미리 차고 있던 전자 기기들은 망가지지 않았다.
‘운이 좋았군.’
사람을 더 동원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강자라도 수가 많으면 지치
기 마련이다. 거기에 자신이 낀다면 좀 더 유리하게 이끌어 갈 수 있지 않을
까.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시선을 느꼈다. 그리로 고개를 돌리니 현우가 가
준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눈이, 시선이 지나치게 소름 끼친
다.
“허튼 생각은 하지 마.”
조용한 목소리가 계단 사이로 울려 퍼졌다.
“죽는다.”
문득 가슴이 조여 왔다. 알 수 없는 공포가 똬리를 틀고 가준을 압박하는 느
낌이었다. 저도 모르게 기기에서 손을 떼자, 압박감이 줄어들었다. 가준은
애써 태연한 척하려 애쓰며 말했다.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나? 선현 길드가 어떤 조건을 불렀는지 모르지만,
두 배로 주겠다.”
그 말에 현우가 차갑게 식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내 얼굴 보고 뭐 떠오르는 거 없어?”
가준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사슴.”
“뭐?”
“사슴 생각난다고.”
“누가 사슴이냐?”
“너. 작은 사슴 같아.”
이 부분에서 가준은 당당했다.
“평균 성인 남성 키거든?”
“각성자들 사이에선 작은 편이지.”
“내가 너보다 더 세.”
“외양과 강함은 상관이 없지.”
“아오!”
순간 더 맞게 될까 봐 움찔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남에게 굽히고 싶진 않았
기에 등을 펴고 버텨 냈다.
“됐다.”
“뭔데?”
“나중에 직접 알아봐. 난 힌트를 다 줬어.”
무슨 힌트를 줬단 말인가. 가준이 기막혀하는 사이, 1층에 도착했다.
아래층에 내려오자, 백호 길드의 길드원 몇이 가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리고 그중에서 힐러이자 부길드장인 민영이 기겁한 표정으로 가준에게로
달려왔다.
“이게 무슨 꼴입니까? 지선우와 정면으로 맞붙었습니까?”
“지랄. 지선우랑 정면으로 맞붙었다고 이렇게 다칠 리가 있겠냐?”
그럼 몸 상태가 왜 이렇습니까?”
“됐고. 치료나 해.”
민영은 한숨을 쉬며 가준의 상처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엉망이 되었던
몸이 빠르게 회복되어 가기 시작했다. 이어 새로 옷을 갈아입고 나니 훨씬
나아졌다.
“가지. 데려다줄 테니.”
그 말에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현우가 벌떡 일어서 따라붙었다.
“
왕
케로는 현우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세상에, 인간이 현우 님을
끌고 갔어. 말 한마디로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했다.
‘공주님.’
키워드는 그것이었다. 공주님, 외워 둬야겠다. 뭐, 일단 그건 그거고. 중요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현우 님이 사라지자마자 이 자리에 도착한 선우의
상태가 너무 이상하다.
원래 저런 인간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싸늘하게 가라앉은 모습이 마계의 마
왕님을 떠오르게 했다.
“형.”
한 손을 들어 얼굴을 감싼 선우가 재차 말했다.
“ ?”
형
언뜻 보이는 눈을 보니 반쯤 맛이 갔다. 이러다 큰일 나는 건 아니겠지. 케
로는 눈치를 보다가 선우의 곁으로 다가가 짖었다.
“왕왕!”
정신 차려. 현우 님은 되돌아오실 거야! 그러나 그 소리는 선우에게 전달되
지 않았다. 이걸 어떻게 하지? 현우에게 소중한 이는 케로에게도 소중했다.
왜냐하면 현우의 지랄 맞은 성미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망가지면 가장
먼저 혼나는 게 누구겠는가. 자신 아니겠는가!
케로는 다급하게 선우의 바지 끝자락을 물어 당겼다.
“왕!”
내가 알아. 케로는 마계의 입구를 지키는 파수견이었다. 지금은 이런 모양
새지만, 본신의 능력은 대단하단 소리였다. 거기다 현우와는 마계에서 상당
히 오래 알고 지냈다. 그 말은 추적이 가능하단 소리였다.
케로는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냄새 맡는 시늉을 하곤, 다시 선우의
바지 끝자락을 물어 당겼다. 선우가 이해할 때까지. 차분하게 반복했다.
“형이 있는 곳을 아나?”
그 말에 케로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가 바닥으로 떨어지기가 무섭
게 선우는 케로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안내해.”
“ .”
아니, 어린 짐승의 목덜미를 함부로 잡으면 안 된다고. 케로는 속으로 투덜
거리면서 현우가 있는 방향을 향해 힘차게 짖었다.
“왕왕왕!”
그와 동시에 선우의 몸이 빠르게 앞으로 튀어 나가더니 벽을 뚫고 뛰었다.
‘다른 입구도 있지 않아?’
기막혔지만, 다른 방법도 없었기에 케로는 선우의 손에 들려 빠르게 이동했
다.
‘그냥 내가 본체로 뛰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헌데.’
아직 그래도 되나 모르겠다. 그래서 케로는 내내 달랑 들려 갔다.
“길드장님!”
뒤에서 선우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달리길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그들은 외딴곳의 도로에서 현우를 태우고
달려가는 차를 발견했다.
그를 발견한 선우는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차의 곁에 붙어서 문짝을 뜯어
내고,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형을 안아 들었다. 문짝이 떨어지자
얼마간 더 미끄러지던 차가 멈춰 섰다.
“형, 뒤에 있어.”
드디어 찾았네. 케로는 입을 벌려 하품을 했다. 그러고는 현우와 함께 뒤로
물러섰다.
아 피 냄새.’
이미 한탕 하신 거 같은데. 저기 서 있는 선우란 인간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하긴 분노로 가득 차 있으니 뭔들 보일까. 케로는 그냥 얌전히 지켜보기로
했다.
‘ ,
돌아 버릴 것만 같았다. 그토록 형을 지킬 거라고 다짐했는데, 형을 놓쳤다.
다른 길드들이 연합할 거라는 건, 뻔히 알고 있었는데. 왜 방심했던 걸까.
선우는 이를 악물었다. 그나마 형이 데리고 다니던 작은 개가 냄새를 잘 맡
은 탓에 다시 찾을 수 있었지만, 머리끝까지 치민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도가준.”
절로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선우. 이 차가 얼마나 구하기 힘든 건 줄 알아? 그걸 문짝을 부숴 놓아?”
도가준이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목젖을 뜯어 놓고 싶었다. 그러
면 다시는 저렇게 말을 할 수 없을 테지. 선우는 손을 폈다 오므렸다.
“말이 많습니다.”
“내가 말이 많건 말건.”
“각오는 하고 이런 일을 저지른 거라고 믿고 있겠습니다.”
“무슨 각오?”
가준이 피식 웃었다.
죽을 각오.”
그와 동시에 선우는 가준을 공격해 들어갔다. 순식간에 도로가 얼어붙고,
빠르게 회전하는 물방울들이 한 방향으로 폭사되었다.
그걸 차를 던져 막은 가준은 곧바로 독을 사용했다. 하지만 허공에 나타난
물방울이 곧바로 독을 흡수하여 가둬 버렸다. 그러더니 그 상태로 가준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래서 선우와의 싸움은 짜증 난다. 딱히 상극인 능력도 아닌데 잘 맞아떨
어지질 않는다. 독은 소용없으니 몸을 써야 하는데, 그는 몸을 쓰는 데도 엄
청난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
‘바닥을 구르면서 제법 싸워 봤다고 생각했는데.’
곱게 자란 도련님처럼 생긴 선우에게는 이겨 본 적이 없다. 가준은 본인이
망가트린 차의 파편을 던지고는 그대로 선우에게 돌진했다. 그러나 그를 쉽
게 맞아 줄 선우가 아니었다. 그는 날아오는 파편을 그대로 걷어내고 돌진
해 온 가준에게 손을 휘둘렀다.
다리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지고 싶지 않아서 가준은 이를 악물
고 움직였다. 그러나 언제나 그러하듯이, 가준은 선우를 넘어설 수 없었다.
추위에 점점 움직임이 둔해지면서 맞는 횟수가 늘어나고, 결국엔 그 자리에
주저앉게 되었다.
‘재수 없는 날이네.’
하루 내내 처맞기만 했다. 치료받자마자 무리하게 움직인 몸이 욱신거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
가준은 중지를 세우며 가진 것 중 가장 강한 독을 퍼트렸다. 그와 동시에 뒤
로 물러났다. 평소에 선우는 가준이 덤벼들면 상대해 주긴 했지만, 어느 정
도 선을 두는 편이었다. 인간들의 세계는 각성을 위해 끌려갔던 마계와는
달랐으니까.
“어딜 가려고 합니까?”
무뚝뚝한 목소리가 이어지며 선우가 가준의 목으로 손을 뻗었다. 아슬아슬
하게 스쳐 간 손끝이 목에 상처를 냈다. 화끈한 통증에 절로 신음이 새어 나
왔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더 뒤로 물러섰다.
조금만 늦었어도 목을 뜯겼을 것이다.
“와우. 오늘따라 적극적이네?”
차갑게 가라앉은 눈을 하고 있던 선우가 가준을 노려보았다.
“당신이 자초한 겁니다.”
“그래, 어디 죽을 때까지 해 보자.”
가준은 히죽 웃으며 다시 자세를 바로 잡았다. 목에서 흘러내린 피가 셔츠
를 적시고 있었다. 그리고 막 둘이 다시 부딪치려는 순간,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배고파.”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방관하던 현우였다.
“왕왕!”
현우 님이 배고프시단다! 당장 밥을 대령해라! 케로도 덩달아 짖었다.
“배고파?”
반쯤 돌아갔던 선우의 눈동자가 점점 원래대로 돌아왔다.
“응, 밥 먹으러 가자.”
현우가 익숙하게 케로를 잡아 올렸다. 그걸 본 선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손
을 내렸다.
“허?”
반대편에서 서 있던 가준은 그런 선우를 보며 기가 막혔다. 천상천하 유아
독존이던 그가 다른 사람이 한 말을 듣고 태도를 달리했다. 있을 수 없는 일
이었다.
“뭐 먹고 싶어?”
“치킨이 먹고 싶은데.”
“맛있는 치킨 집을 알아.”
심지어 보면 현우가 주도권을 잡은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1세대 실종자에
강자라 하더라도, 선우가 저럴 성격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가준은 의문을
가졌다.
11.
“
너희 둘 무슨 사이냐?”
가준의 질문에도 선우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
대폰을 꺼냈다. 하지만 휴대폰은 이미 망가진 상태였다.
“난 휴대폰 멀쩡한데.”
가준이 보호 케이스 안에 있던 휴대폰을 꺼내 두 손가락으로 들어 보였다.
“내놓으십시오.”
“깡패냐. 질문에 대답하면 줄게.”
선우가 귀찮다는 듯이 눈썹을 휘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싸웠다가는 형의
배고픔이 더 길어질 수도 있었다.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뭐라고 물었습니까?”
“둘이 무슨 사이냐고.”
그러자 선우가 의아하단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보면 모릅니까?”
“모르겠는데.”
“형제입니다.”
그렇게 대답한 선우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뭐?”
형제라고요.”
“형제?”
안 닮았잖아! 가준은 몇 번이나 둘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그사이 선우
가 가준의 손에서 휴대폰을 채 가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길드장님!
“부길드장. 주소 부를 테니 여기로 차 한 대 보내 주십시오.”
─ 네, 보내 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보다 괜찮으십니까? 다른 길드가 공격해
왔다면서요!
전화 저편에서 당황한 찬영이 우다다 질문을 쏟아 냈으나, 선우는 주소만
말하고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뒤로 던졌다. 그를 간신히
받아 든 가준이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진짜냐.”
“진짜입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제가 대답을 해 줄 의무는 없는 것 같습니다만.”
“그럼 저쪽이 동생이야?”
가준이 현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
형입니다.”
“아, 형. 형이라고?”
가준이 침을 꿀꺽 삼켰다.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아까 현우가 작다는 말에 보였던 살벌한 눈길을 기억하고 있는 탓
이었다.
아니, 방송에서는 성실하고 착하고 좋은 형이었다며? 어디가? 그 형에 그
동생이라더니. 겉으로 내숭 떠는 것은 똑 닮은 모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현 길드에서 보내온 차가 도착했다. 그 옆에는 바이크
하나가 따라붙었는데, 그 위에는 정장을 입은 찬영이 타고 있었다. 답답해
서 직접 온 모양이었다.
“길드장님!”
애처로운 목소리가 선우를 불렀지만,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차에 현
우를 태웠다. 그리고 자신도 맞은편에 탔다.
“먼저 가지.”
그 말과 함께 곧바로 차가 출발했다. 그렇게 차가 출발하고 남은 이는 찬영
과 가준뿐.
“어라, 선현의 개 아냐? 버림받았네?”
“닥치십시오!”
“
찬영이 험악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가준은 큭큭 웃으며 비웃는 걸 그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덤벼들고 싶었지만, 찬영은 자신이 가준을 이기지
못할 걸 알았다. 게다가 상대는 백호 길드의 길드장. 그로서는 함부로 건드
릴 수가 없었다. 그저 이를 갈며 이 자리를 떠나는 것이 할 수 있는 최선이
었다.
“그럼 다음에 보자.”
가준이 인사를 들은 찬영이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바이크까지 떠나가고, 홀
로 남은 가준은 몸에 달라붙은 먼지를 털어 내고,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그
러다 휴대폰이 울림을 깨달았다.
─ 야!
“아, 혜선 누님.”
─ 어떻게 됐어? 왜 연락이 없어? 설마 혼자 먹으려는 건 아니지?
“아니, 제가 그럴 위인입니까?”
─ 그럼 뭐야!
“지선우에게 도로 뺏겼어요.”
─ 그걸 왜 뺏겨!
“누님도 지선우 혼자서는 오래 상대하지 못하시면서, 제 탓하시는 겁니까?”
─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지선우 추적 막으려고 되게 외진 곳으로 골랐잖아.
어떻게 온 거래?
그러게요. 어떻게 왔을까요?”
─ 장난치는 거 아니거든?
“저도 아닙니다.”
─ 아이씨. 뭔가 다른 알아낸 거 없어?
가준은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없습니다.”
─ 진짜 하나도?
“네.”
─ 거짓말.
저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치는 빠르네. 하긴 일부러 답을 늦
게 했는데 모르면 바보다.
─ 뭔가 알아낸 거 있지? 알려 주면 나도 정보 하나 줄게.
“무슨 정보인데요?”
─ 평화 길드장에 대한 거.
“그 사람에 대한 건 누님이나 저나 아는 게 비슷하지 않습니까?”
─ 하나 더 알게 된 게 있어.
“
뭡니까?”
─ 너 먼저.
까탈스럽긴.
“지선우와 1세대 실종자 지현우는 형제다. 다음 누님!”
─ 그런 거였어? 어쩐지 지선우가 기를 쓰고 보호하더라. 하마터면 괴수 입
안에 머리를 넣을 뻔했네.
이미 가준은 처넣고 신나게 두들겨 맞았다.
“뻔했네, 가 아니죠. 지선우 성격이라면 보복 들어올 텐데요. 당분간 몸 사
려야 하겠습니다?”
─ 그렇지. 간만에 정보가 좀 들어오나 했더니. 이번엔 내 차례지? 평화 길
드장 나보다 세더라.
“……누님보다?”
─ 그래. 지선우 붙든 거 거의 평화 길드장이었어. 난 제대로 붙잡지도 못했
어. 그거도 전력 아닐지도 몰라.
새로운 정보였다. 갑자기 치고 올라온 것 치고 정보가 너무 없다 싶었는데,
그런 강자였단 말이지. 가준은 입술을 혀로 핥았다.
당분간 해야 할 일이 많을 것 같았다. 가준은 아직 1세대 실종자를 포기한
게 아니었다. 딱 1명 되돌아온 사람이 그렇게 강한데 어떻게 쉽게 포기가
“
되겠는가. 궁금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강해졌는지, 왜 혼자서 돌아왔는
지. 알고 싶은 것은 많았다.
‘다음번엔 더 주의해서 움직여야겠네.’
가준은 타고나길 뱀이었다. 음습하고 포기를 모르는 끈질긴 뱀. 그러니 상
황이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슬슬 지는 해 때문에 가준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뱀처럼.
*
출발한 차 안에서 선우는 사과부터 했다.
“미안해, 형. 직접 식당에 가서 먹는 게 맛있는데, 그러기엔 아직 위험해.”
마음 같아서는 직접 식당에 데려가고 싶으나, 아직 위험은 남아 있었다. 그
래서 길드원을 시켜 치킨을 포장해 오기로 하였다.
“난 괜찮아.”
어디서 먹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곳에 선우가 있는데. 현우는 씩 웃으
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집에 빨리 돌아가자.”
현우의 말에 선우의 얼굴에 감동이 서렸다. 그곳을 집이라고 불러 주는구
나. 당연한 그 말에도 가슴이 저렸다. 그동안의 노력이 보상받는 느낌이었
다.
그럼 빨리 돌아가자.”
선우는 바로 옆에 앉은 형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어디 다친 데는 없지?”
“응, 멀쩡해.”
외려 다친 쪽은 현우가 아닌 가준 쪽이었지만, 그건 입 다물었다.
“정말이지?”
“응, 너도 괜찮아?”
“나는.”
선우는 잠시 눈을 굴리다가 대답했다.
“조금 아픈지도.”
“뭐? 어디?”
현우가 당황한 표정으로 선우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차가 급
하게 멈춰 섰다.
끼이이익!
선우는 잽싸게 현우를 끌어안아 보호했다. 거칠게 멈춰 서긴 했지만, 운전
기사도 각성자이기에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차가 멈춘 이유. 그건 차 앞에 서
있는 남자 때문이었다.
운전기사는 직업 정신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사람이 나타
났다고 해서 무리하게 멈췄을 리는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이는 어디까지나
길드장인 선우니까. 그렇다면 다른 이유 때문에 멈춰 섰단 것이고, 그 이유
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선우는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차에서 내려섰다.
“형은 안에서 기다려.”
어느새 정신을 차린 운전기사가 단단히 각오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그는
현우를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려 들 것이다.
차에서 내려선 선우는 맞은편에 선 남자를 쏘아보았다. 장신에 낡은 후드
티, 청바지를 걸친 남자는 허리를 구부정하게 구부리고 있었다. 아까 백화
점에서 보았던 남자였다. 평화 길드의 길드장, 한도진. 그 정체를 눈치채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직 볼일이 남아 있습니까?”
운전기사는 이미 길드에 연락을 넣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찬영도 가까
이에 있었다. 여러모로 그에게는 불리한 상황이다. 그런데도 도진은 다시
나타났다.
“죄송합니다만.”
도진이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그 말에 선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쪽은 부탁을 이딴 식으로 합니까?”
“너무, 너무 급해서 그랬습니다.”
도진은 그리 말하며 그 자리에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부탁입니다. 원하신다면 어떤 대가라도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습니다.”
선우는 단호하게 도진의 말을 잘랐다. 그에게는 부족한 것이라고는 형뿐이
었는데, 그도 이미 충족되었다. 그런데 굳이 대가를 받아 가며 남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바를 대충 짐작하고 있기에 더 그랬다.
“1세대 실종자를 만나고 싶습니다.”
“거절합니다.”
“잠시, 잠시… 하나만 물어보고 싶습니다.”
“거절합니다.”
“원하는 걸 모두 드린다고 해도 말입니까?”
“딱히 부족한 건 없습니다만.”
“
몇 차례나 거절했다. 그러자 도진의 등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에겐 시간
이 없었다. 이대로 1세대 실종자가 돌아가면, 다시 찾을 수 있을는지 몰랐
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대로 몸을 일으킨 도진이 곧바로 차를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그는 미리
대비하고 있던 선우에게 가로막혔다. 기다란 다리가 우아하게 허공을 가르
며 휘둘러졌으나, 도진은 피하지 않았다. 뒤로 물러나면 큰일 나는 사람처
럼, 두 팔을 교차하여 공격을 가로막았다. 그런 후, 다시 차를 향해 미친 사
람처럼 달려들었다.
빠른 공방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막기만 하던 도진도, 이대로라면 끝이 없
다는 걸 깨달았다. 결국 그는 휘둘러지는 다리를 향해 마주 주먹을 휘둘렀
다.
12.
살과 살이 맞부딪친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난폭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어 선우는 다리를 회수하며 곧바로 능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S급 각성자
답게 몸을 사용하는 것도 능숙했지만, 도진과 맞부딪치고 나서 깨달았다.
신체적으로는 그를 이기기 쉽지 않을 것이란 걸.
아무래도 도진의 능력은 신체와 관련된 모양이었다. 그러니 능력을 사용하
는 데 거리낌이 없어졌다. 날카롭게 회전하는 물방울이 그에게 탄환처럼 쏘
아졌으나, 또다시 강하게 주먹을 휘두르니 그대로 휘말리듯 터져 나갔다.
그사이 운전기사는 현우와 케로를 차에서 빼내 밖으로 대피시켰다. 차 안에
서 공격을 받았다가는 이도 저도 안 된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자
연 현우는 두 사람이 싸우는 걸 직접 눈으로 보게 되었다.
‘음?’
자연스럽게 수준을 가늠해 보던 현우가 잠시 동작을 멈췄다. 선우에게 덤벼
들고 있는 남자가 생각보다 강하다. 그동안 지구에서 머물며, 많은 대중 매
체를 접해 왔다.
그 과정에서 선우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선우는 세계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강하다 하였다. 자연 한국에서는 가장 강한 게 되었다. 그런데 저 남자는 선
우보다 윗줄로 보였다. 하지만 그에게 선우를 해치려는 의도는 보이지 않았
다. 그래서 당장 움직이기엔 애매했다.
문득,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날카롭지만, 시원하게 뻗은 눈매. 백화점에서
보았던 남자였다. 하지만 더 이전에 그를 보았던 적이 있었다. 현우는 기억
을 더듬어 보았다. 그가 살아오며 접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열다섯 살 이후엔 마계에서 지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계로 가기 전
의 기억은 선명하지 않았다. 남아 있는 기억의 대부분은 선우에 대한 것이
었다.
그럼 저 눈매를 어디서 봤던 걸까? 더듬고 더듬어 마침내 기억해 냈다.
“한예원.”
오랜 시간 동안 기억 저편에 묻어 두었던 사람 하나가 떠올랐다.
한예원. 현우보다 세 살 많았던 소녀. 고등학교 2학년인 소녀는 제 앞가림
도 힘든 상황에서 남에게 신경을 많이 썼다. 특히 가장 어렸던 현우를 보살
피려 애썼다.
현우가 그 이름을 내뱉자마자, 미친 사람처럼 돌진하던 도진은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그 때문에 선우의 공격이 그대로 적중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외쳤다.
한예원, 예원이를 아십니까?”
다급히 말이 이어졌다.
“짧은 단발에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색이 옅은 편입니다. 키는 160 정도. 성
격은 무척 밝고 명랑하며 남 돕는 걸 좋아합니다. 실종 당시 나이는 열여덟
살이었습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선우는 공격을 위해 들었던 손을 내렸다. 도
진은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은 표정으로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외쳤다.
“그 아이도 1세대 실종자입니다!”
알고 있다. 내내 묻어 두었던 기억들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당시 겪었던 끔
찍한 상황들이 떠올랐다.
예원은 너무나도 착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마계는 착하다고 해서 살아남
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전투에 관한 재능과 독기가 있어야 살아남았다.
그랬기에 1년이 지나기도 전에 무모하게 나선 전투에서 죽어 버렸다. 지금
도 기억난다.
‘나한테 오빠가 하나 있는데.’
마지막으로 죽음의 자리를 지킨 사람은 현우였다. 평소 예원과 가장 가까이
지낸 사람이 그였기 때문이었다.
‘겉은 냉정해 보이지만, 사실은 착한 사람이야. 내가 돌봐 줘야 하는데.’
피를 토하며 예원은 서럽게 울었다.
“
이제 지켜 주지 못하겠네. 오빠, 도진 오빠.’
언제나 강하게 보이려 애쓰던 예원이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아파, 나 아파.’
동생을 다시 되찾기 전까지는 울지 않으려 했다. 그랬기에 이를 악물고 참
았다. 그런 현우도 예원의 마지막에는 흔들렸다.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죽
게 된 예원이 가엾어서, 자신도 저렇게 될까 두려워서. 울고만 싶어졌다.
‘괜찮아, 예원아. 나 여기 있어.’
그걸 참고 거짓말을 했다. 목소리를 속이려 애쓰며 예원의 오빠 시늉을 하
였다. 아마 죽어 가는 예원은 알았을 것이다. 그 모든 게 현우의 어설픈 배
려였다는 것을. 그런데도 예원은 마지막으로 웃으며 말했다.
‘오빠. 고마워.’
그게 예원의 끝이었다. 속이 문드러지는 것 같았다. 내내 잊으려 애썼던 죽
음들이 현우의 속을 뒤흔들었다. 울렁이는 가슴을 손으로 내리누르며 애써
버텨 냈다. 선우 앞에서는 과거의 괴로움을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걸 눈치채서였을까? 선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형, 무시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현우가 아는 선우는 너무나도 다정한 아이였기
에, 고개를 내저었다. 괴로워도 괜찮다. 지금은 선우를 만났으니까, 이 정도
는 버텨 낼 수 있었다.
‘
아냐, 알아. 나 알고 있어. 한예원.”
그렇다면 저 남자는 보나 마나 그 사람일 터였다.
한도진. 한예원의 하나뿐이라던 오빠.
“그럼 그쪽은 도진이겠네.”
“……맞습니다.”
도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몇 번이나 망설이고, 망설이다 입을 열
었다.
“예원이는, 예원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겉은 냉정해 보이지만, 사실은 착한 사람이라. 예원이 했던 이야기가 떠올
랐다. 현우는 도진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남자답게 잘생긴 얼굴은
눈매 때문에 언뜻 보면 싸늘해 보였지만, 눈동자는 달랐다. 희미한 불빛 아
래 흔들리는 까만 눈동자는, 그만큼 깊고 아름다워 보였다. 현우는 깊게 숨
을 들이쉬었다.
“한예원… 예원 누나는.”
잠시 말을 끊었다 이었다.
“죽었어.”
도진의 눈이 일그러졌다.
“1세대 각성자는 나 하나뿐이야. 전부 다 죽었어.”
“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도진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더니 이내 바닥으로 뚝 떨어져 내렸다. 바닥의
흙이 물기를 머금고 어두운 색으로 물들었다.
“으으.”
도진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새끼 잃은 짐승이 우는 소리가 저리 서
글플까. 그를 바라보는 현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 왔다.
“으아아!”
그 자리에 무너진 도진은 주먹으로 땅을 내려치며 울었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부모님은 어려서부터 도진을 싫어했다. 그가 말을 더듬었기 때문이
었다. 말을 더듬는 멍청한 아이는 자신들의 자식이 아니라고 외면하고 학대
했다. 하지만 그런 도진을 3살 어린 여동생만은 버리지 않았다. 언제나 웃
으면서 곁에 있어 주었다.
‘오빠!’
밝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그래서 지켜 주고 싶었다. 지켜 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어느 날, 한국에서 1만의 사람이 사라졌다. 그 인원 중에는 도진의 사랑하
는 동생 예원도 있었다. 예원이 사라진 순간부터 도진의 세상은 지옥이 되
었다. 모든 것이 끔찍하게만 느껴졌다. 그런 상황에서도 도진은 다시 일어
서려고 버둥거렸다.
예원이를 찾아야 했으니까. 그날부터 발품을 팔며 일을 시작했다. 여동생을
찾기 위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았다. 그렇지만 그는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그쯤 다시 10만의 사람이 사라지고, 포털이 열렸다. 세상은 엉망이 되었지
만, 도진은 포기하지 않고 움직였다. 그리고 그때, 2세대 실종자 중 일부가
각성자가 되어 귀환했다.
‘돌아올 수 있는 거구나.’
희망이 생겼다. 희망은 도진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었다. 움직이고, 또 움
직이고.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각성자가 되어 있었다. 힘을 손에 넣었고,
말더듬도 고쳤다. 이제 동생만 찾으면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각성자가 되니 정보를 모으기 훨씬 쉬워졌다. 쉬워졌지만, 개인이 모으는
데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길드를 세웠다.
이름은 평화 길드.
길드장이 되니 정보는 더 쉽게 모였지만, 그걸로도 예원을 찾을 수는 없었
다. 1세대 실종자가 애초에 나타나지를 않았기 때문이었다. 몇몇 분석가는
그걸 가지고 이야기했다. 어쩌면 처음 사라진 1만의 사람은 운이 나쁜 샘플
일지도 모른다고. 왜냐하면, 세대를 더해 갈수록 더 빠르게 실종자가 돌아
왔으며, 더 많은 수가 살아남았기 때문이었다.
1세대는 버리는 말이었다.
그게 다른 이들의 결론이었다.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에 계속 정보를
추적했고, 마침내 1세대 실종자의 정보를 알게 되었다. 되돌아온 1세대 실
종자가 있다.
‘같이 손잡도록 하지.’
나쁜 짓인 줄 알았지만 가준의 손을 잡았다. 1세대 실종자를 차지한 선현
길드가 그를 내보이려 하지 않았으므로. 수십 번 면회 요청을 넣었지만, 전
부 거절당했다.
‘지선우 발목만 잡아. 뒤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 말대로 해 줬다. 하지만 가준은 실패했고, 도진은 다급해졌다. 다시는 1
세대 실종자를 만나지 못하게 될까 봐. 이제 길드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1
세대 실종자를 만나는 건 하늘의 별 따기가 되리라. 그래서 서둘러 그들을
찾았고 여기까지 왔다.
왔는데. 알게 된 소식은 기쁜 소식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여동생이, 소중한 존재가 죽었다 하였다.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살아갈 이유가 있나?’
알 수 없었다. 도진은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점점 어두운 생각이 머
릿속을 채워 가기 시작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내내 꺼내지 않았던 무기를 꺼냈다.
카라. 그가 던전에서 얻은 저주받은 단검. 보통보다 긴 도신을 가진 단검이
도진의 손안에서 회전했다. 이어 역수로 쥐어진 단검이 곧바로 목표를 향해
움직였다.
그 목표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13.
콰직.
순식간에 단검을 내려찍었다. 하지만 도진에게는 어떠한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검이 뚫은 건 그의 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다급히 힘을 빼긴
했으나, 너무 늦었다.
당황한 도진은 고개를 들어 바로 앞에 선 사람을 바라보았다. 1세대 실종
자, 아직 이름도 모르는 그가 바로 앞에 서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손에는 단검의 날이 잡혀 있었다.
“형!”
선우가 기겁하며 달려들고, 이어 도진도 빠르게 움직였다.
“이게, 이게 무슨 짓입니까!”
조심스러운 손길로 단검의 날을 잡고 있는 손을 폈다. 이어질 상황에 손이
덜덜 떨려 왔다. 카라는 저주받았으며, 그 무엇보다 날카롭고 단단하다. 무
엇이든 손쉽게 베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 걸 힘도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맨
손으로 쥐었으니 걱정되는 것도 당연했다.
도진은 이를 악물고 손을 완전히 펼쳤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피투성이
가 되어 있어야 할 손이 너무나도 멀쩡했다. 생채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멍하니 중얼거리는 사이, 펼쳐진 손이 회수되었다. 이어 달려온 선우가 다
시 그의 손을 잡아 펼쳤다.
형 손이!”
“손은 멀쩡해. 중간에 힘을 뺐나 봐. 다치지 않았어.”
아니, 그게 가능할 리가 없는데. 도진은 멍하니 자신의 단검을 바라보다가
그것으로 자신의 손을 그어 보았다. 힘을 주어 긋자 상처가 생기며 붉은 피
가 흘렀다. 단검은 멀쩡하게 제 기능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방금은 어떻게 된 거지?’
알 수 없었다.
흐르는 피를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부드러운 살이 닿아 왔다. 무언가 싶
어 보니 1세대 실종자가 그의 뺨에 손을 대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 뺨을 잡
아당겼다. 힘도 없어 보이는데, 제법 아프다.
“피부가 탱탱해서 잘 당겨지지도 않네. 뭐 하려고 했어요?”
물어오는 말에 도진은 입을 다물었다.
“형!”
“나는 괜찮으니, 잠시만 기다려 봐.”
“위험해.”
“그리 위험해 보이진 않는데. 봐 봐, 이래도 가만있잖아.”
그러면서 다시 뺨을 잡아당겼다 놓는다. 이어 재차 물었다.
“ ,
뭐 하려고 했냐니까요?”
도진은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 말 한마디 하기가
어렵게만 느껴졌다.
“예원이가 이걸 보면 좋다고 할 것 같아요?”
아니, 아니다. 예원이라면, 그 착한 아이라면 이 모습을 보면 울 것이다. 왜
오빠는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느냐고, 어째서 그런 행동을 했느냐고 나무랐
을 것 같았다.
“아니, 아닙니다.”
“그럼 왜 그랬어요?”
따져오는 말에 도진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바로 앞에 있는 이는 예원
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나한테 사과할 일은 아닌데요.”
“그래도 죄송합니다.”
재차 사과를 하자, 매섭게 눈을 뜨고 있던 그의 눈이 서서히 내려왔다.
“죽지 말아요.”
이어지는 말에 다시 눈가가 뜨거워져 왔다. 도진은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삼키며, 그에게 물었다.
“
이름, 이름이 알고 싶습니다.”
“현우, 지현우.”
“현우 님.”
“그냥 현우라고 불러요.”
“현우.”
이름을 부르자, 현우가 잘했다는 듯이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 잠깐의 손
길에 어쩐지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형, 이리 와.”
옆에서 내내 노려보고 있던 선우는 그런 현우를 잽싸게 안아서 끌어당겼다.
“그럼 이제 볼일은 끝난 겁니까?”
끝난 건가? 동생에 대해 알게 되었으니, 이제 모든 것이 끝난 건 맞았다. 하
지만 쉽사리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죽었다고 전해 듣긴 했지만, 아
직 미련이 남아 있었다.
“아직입니다.”
그 말에 선우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하지만 도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현우, 제가 당신을 따라가도 되겠습니까?”
그 말에 현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왜요?”
이유는 금방 떠올랐다. 지금 무엇을 하고 싶은가, 그를 생각하니 결론이 나
왔다.
“예원이. 예원이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듣고 싶습니다.”
예원이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죽었다는 이야기만 듣고 끝을 생각했으나,
그게 아니란 것도 깨달았다. 아직 시체도 찾지 못했고,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알아내지도 못했다.
도진은 마음을 다잡았다.
“뭐든 하겠습니다. 그러니 따라가게 해 주십시오.”
“무슨 헛소리입니까? 당신도 한 길드의 길드장이 아닙니까? 그게 가능하리
라 생각하는 겁니까?”
중간에 끼어든 선우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도진을 바라보았다.
“길드장을 그만두겠습니다.”
“미쳤습니까?”
“길드는 부길드장에게 물려주면 됩니다.”
“정정하지요. 돌았습니까?”
선우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힘겹게 5위권 내로 든 평화
길드의 길드장을 포기하겠다니. 지금 가진 걸 모두 버리겠단 소리와 똑같았
“
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이해도 된다. 만약 같은 상황이라면, 선우도 그렇
게 했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받아 주십시오.”
“길드장은 그만두실 필요 없고요. 그냥 가끔 찾아오시면 이야기는 해 드릴
게요.”
현우가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약속은 꼭 지킵니다.”
“그것 때문이 아니라 걱정이 돼서 그럽니다.”
“뭐가요?”
그 말에 도진이 현우의 손을 바라보았다. 아까 단검의 날을 쥐었던 손이었
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또 일어나면 어찌합니까?”
“아.”
현우가 어색한 표정으로 손을 등 뒤로 감췄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선우가 도진처럼 현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쩌자고 그런 위험한 일을 했어, 형.”
“위험하지 않았어.”
그건 사실이었다. 암만 위험한 무기라고 해도, 현우 정도의 강자가 그런 걸
로 상처 입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선우도, 도진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
다. 그러니 걱정하는 것도 당연했다.
“위험했습니다.”
“위험했어, 형.”
도진과 선우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말을 꺼냈다.
“아니라니까.”
부정은 하지만,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힘으로는 둘을 이길 자신이 있는
데, 어째서 이렇게 움츠러드는지 모르겠다. 둘의 눈빛을 피해 고개를 돌리
자, 미묘한 얼굴로 올려다보는 케로가 보였다.
“뭐야.”
인상을 팍 쓴 채 케로를 잡아 들어 화풀이 겸 손으로 마구 주물렀다.
“우옹.”
케로는 그런 현우의 손에 자신을 맡긴 채 얌전히 있었다. 그래도 몸이 작아
져서 그런지 후려치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이제 돌아가자, 형.”
“
괜히 현실을 도피하는 현우를 바라보던 선우가 눈빛을 누그러트리며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쯤 되어 찬영이 현장에 도착했다.
“길드장님?”
뒤늦게 도착한 찬영은 옆에 서 있는 도진을 보고 경계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에게 선우는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평화 길드 길드장입니다.”
너무 간략해서 상황을 파악할 수 없을 정도였다.
“네?”
평화 길드 길드장이 왜 여기 있는데? 혹시 1세대 실종자를 노리는가, 싶었
지만 그렇다 하기에는 태도가 지나치게 얌전하다. 찬영이 머리를 굴리는 사
이, 선우는 현우를 다시 차에 태웠다. 그리고 찬영에게 말했다.
“참, 저번에 갔던 치킨집 기억합니까?”
“가끔 들르셨던 그곳이요? 네, 기억합니다.”
“거기서 치킨 세 마리만 포장해 오십시오. 간장, 양념, 후라이드.”
“네?”
“최대한 빨리.”
그 말을 남기고 선우는 우아하게 차에 올라탔다. 그러는 사이에도 도진의
시선은 내내 현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게 지독하게 거슬렸지만, 일단은
형을 안전한 장소에 두는 게 먼저였다. 그렇기에 선우는 운전기사를 재촉했
다.
“빨리 출발합시다.”
“네!”
운전기사는 다시 운전석에 올라타 핸들을 잡았다. 하지만 막 출발하려는 순
간, 앞을 가로막는 인영 몇이 보였다. 도진 때문에 잠시 지체한 사이, 다른
이들이 따라잡은 모양이었다. 선우는 짜증을 내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귀찮게 하네.”
선우는 다시 차에서 내려야 했다. 그가 혀를 차며 나오자마자, 찬영이 잽싸
게 곁에 붙었다. 지금은 현우를 지키는 것보다, 선우에게 가세하는 게 낫다
고 판단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능력은 선우와 궁합이 좋은 편이었으니
까.
“곧 길드원들도 도착합니다.”
“얼마 정도 걸립니까?”
“5분에서 10분쯤으로 예상합니다.”
그 정도 시간이라면 충분히 버틸 수 있다.
“지키십시오.”
선우는 서 있는 도진을 지나쳐 가며 차를 턱으로 가리켰다. 그 말에 도진은
얌전히 움직여 차의 옆에 섰다.
여어.”
그런 선우를 바라보며, 가준이 손을 흔들었다. 그 옆에는 머리색이 금발에
가까운 인상이 부드러운 청년과, 시원시원해 보이는 외모를 가진 여성 한
명이 서 있었다. 다른 길드의 길드장이자 S급 각성자인 자윤과 혜선이었다.
먼저 입을 연 이는 혜선이었다.
“금방 다시 만나네.”
“귀찮게 말입니다.”
선우가 차가운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자 가준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가로
챘다.
“어쩔 수 없었다고.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순 없어서 말이지.”
다음을 노리기로 한 건 철회했다. 기회가 있을 때 더 부딪혀 봐야지. 선우도
머리가 있다면 이 일 이후로 현우가 머무는 장소를 옮길 것이다. 경비도 더
철저히 세우겠지. 그러니 지금 움직이는 게 맞았다.
“제가 내줄 리 없다는 건 알 텐데요?”
“알지. 아니까 이리 몰려온 거 아니겠어?”
선우가 어느새 자신을 포위하듯 선 3명을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
“여럿이 모인다고 이길 것 같습니까?”
“그건 해 봐야 하지 않을까?”
“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그건 힘들겠
지. 아무리 수적으로 우세해도 상대는 같은 S급 각성자이다. 짧은 시간 내
로 쓰러트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낮에도 그래서 시간을 끄는 방법을
택하지 않았던가.
14.
가준은 새로운 가죽 장갑을 잡아당겨 단단히 여몄다.
‘뭐, 원래 고전이 잘 먹히는 법이지.’
이번에도 시간을 끌 속셈이었다. 여기 온 이들은 이들 셋만이 아니었다. 각
자 길드에서 강자로 손꼽히는 이들도 끌고 왔다. 길드장들이 선우와 찬영을
상대로 시간을 끄는 동안, 그들은 다른 쪽을 공략할 것이다.
‘그래, 그랬는데 말이지.’
가준은 선우의 뒤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거기에는 낯이 익은 사람 하나가
더 서 있었다.
“그런데 낯이 익은 얼굴이 하나 더 있네?”
“한도진.”
평화 길드 길드장이 왜 여기 있는데?
“네가 왜 여기 있지?”
도진은 가준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그저 몸을 늘어트린 채 차를 보호하
듯 서 있을 뿐이었다.
곤란하게 됐네. 안 그래도 저쪽은 괴물이 있는데 말이지.’
원래라면 이런 위험한 일에서는 슬쩍 발을 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
지 가정 때문에 다시 움직이기로 했다. 그건 바로 선우가 현우가 가진 힘을
모를 가능성. 현우가 선우에게 힘을 감추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면 어떻게 강한 힘을 가진 형제를 그리 대하겠어?
각성자들이 자신의 가족을 대하는 극단적인 상황이 두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약한 가족을 무시하는 것, 다른 하나는 지나치게 과보호하는 것이
다. 가준은 선우의 행동이 후자라고 생각했다.
‘만약에 동생에게 힘을 감추고 싶어 하는 거라면 이쪽에도 승산은 있지.’
그리 생각하며 서로 가진 패를 가늠하는데, 찬영이 끼어들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무슨 짓이냐니.”
“지금 선현 길드에 맞서시는 겁니까?”
“아니, 뭐. 대충 그런 셈이지?”
가준이 머리를 긁적였다.
“미쳤습니까?”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쟁이라도 하자는 소리입니까?”
‘
그 정도는 아니고. 우리도 머리는 있거든. 여기서 전쟁을 벌일 생각은 없다
고.”
“S급 각성자가 여럿 모였지 않습니까!”
찬영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시발, 상대 쪽에는 괴물이 있는데.’
가준은 기가 차서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걸 찬영은 다르게 오해한 모
양이었다. 가준과 마찬가지로 장갑을 낀 손에서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이어 강렬한 전류가 찬영의 몸을 휘감았다.
찬영은 보기 드문 전격계 각성자였다. 전격을 이용하여 몸을 빠르게 움직일
수 있고, 상대를 감전시킬 수 있었다. 원거리 저격은 다소 어려워하는 단점
이 있었지만, 그래도 상대하기 어려운 능력이었다.
거기에 선우의 능력은 수계였으니, 궁합이 딱이었다. 불꽃과 함께 일어난
전격이 이리저리 튀기 시작하자, 그와 동시에 허공에 물방울이 떠오르기 시
작했다. 미친 듯이 튀던 전격은 물방울에 스미듯 달라붙었다.
이어 전격을 머금은 물방울이 빠르게 쏟아지자, 혜선이 방패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쿵!
커다란 방패가 땅에 박히며 반투명한 막이 세 사람을 감쌌다.
불굴의 방패.
“
그게 혜선이 가진 능력이었다. 대부분의 공격 효과를 반감시키며, 몸이 튼
튼하고 질겨 잘 버틴다.
혜선이 공격을 막자 곧바로 자윤이 바람을 쏘아 보냈다. 나무도 두 동강 내
는 절삭력을 지닌 바람이었지만, 그는 이내 얼음에 가로막혔다. 하지만 자
윤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애초에 요란한 공격을 보낸 건 본격적인 공
격을 가리기 위한 속임수에 불과했다.
진짜 공격은 가준에게서 시작되었다. 그가 독을 풀고, 자윤이 그걸 은밀하
게 바람으로 실어 나른다. 몇 번인가 합을 맞춰 본 덕분인지 공격은 수월하
게 이어졌다. 문제가 있다면 선우가 예민해서 독 공격으로는 딱히 이득을
보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선우는 독이 실린 바람을 물로 가뒀다.
“와, 저걸 저렇게 막네.”
혜선이 방패 뒤에서 고개를 빼며 투덜거렸다. 그러다 또다시 날아오는 공격
에 다시 몸을 감췄다.
“누님도 잘 막으시는데요?”
“안 막으면 뒈지는데 막아야지.”
혜선은 인상을 찌푸리며 선우에게로 신경을 집중했다. 몇 차례 공방이 이어
지고, 슬슬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할 무렵 따로 분리해 뒀던 이들이 움직이
기 시작했다.
“S급 각성자가 있다는데?”
요람 길드의 길드원이 불안한 표정으로 말하자,
“그래 봤자 1명이잖아. 이쪽은 여럿이니 괜찮아.”
백호 길드의 길드원이 혀를 날름 내밀며 답했다.
“몇은 시간을 끌고, 몇은 차를 공략한다.”
선현 길드라면 운전기사도 각성자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각 길드의 정
예. 그를 이기는 건 어렵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일단은 한도진, 그만 붙잡
아 두면 되었다.
새로운 기척을 느낀 도진은 차에서 몸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진심으로 전력을 다해 싸울 셈이었다. 그게 현우에게 저질렀
던 잘못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는 일일 테니까.
구부정하게 구부리고 있던 등이 펴지며, 장신의 몸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특유의 존재감은 그리 크지 않았다. 일부러 죽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어 그는 그림자와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현우가 있는 차를 향해 은밀하게 움직이던 몸이 갑자기 그 자리에 덜컥 멈
춰 섰다.
‘왜 이러지?’
어떻게든 움직여 보려고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무언가가 그를 붙잡고
있는 듯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이?’
미친 듯이 굴러가던 눈동자가 이윽고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이어 그는 깨
달았다.
‘미친, 그림자잖아?’
그를 붙잡고 있는 것은 그림자였다. 희미한 달빛 아래 길게 늘어선 그림자
는 마치 괴물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사이로 까만 어둠이 스치고 지나가며
하나둘씩 그 자리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 있는 자들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도진은 그제야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낡은 옷을 툭툭 턴 그는 다시 차 옆으
로 다가가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그걸 가준도 보았다.
‘일진이 나쁘네.’
상황이 꼬였다. 그래도 나름 길드의 정예들을 데리고 왔는데, 이렇게 쉽게
도진에게 쓰러질 줄은 몰랐다.
‘어쩔까.’
고민하는데 옆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물러나죠.”
자윤이었다.
“뭐? 왜!”
‘
방어에 신경 쓰느라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혜선이 되물었다.
“우리 측 사람들이 전부 쓰러졌습니다. 지금은 물러나는 게 맞는 것 같아
요.”
그 말에 주위를 둘러본 혜선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쪽 사람들은 전부 쓰러
졌으나, 상대 쪽의 전력은 변함이 없었다. 딱히 밀릴 것 같진 않았지만, 문
제는 시간제한이었다. 조금 있으면 선현 길드의 길드원들이 이곳에 도착한
다.
찬영이 쏘아 보낸 전격을 후려쳐 흩어낸 혜선이 이를 으득 갈았다. 자윤의
말이 맞았다. 오늘은 이만 물러나야 했다. 아쉬움이 남았지만 어쩔 수 없었
다.
물러남을 결정하자마자 혜선은 깊게 숨을 들이켜고 고함을 질렀다. 그 소리
에 쓰러진 이들이 부들거리며 정신을 차렸다.
“후퇴!”
그 말에 그들은 힘겹게 몸을 세워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차 몇 대가 나타나고, 그 안에서 선현 길드의 길드원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
왔다.
혜선은 아직도 공격 중인 찬영과 선우를 내버려 두고, 곧바로 몸을 빼내어
자기 길드원을 챙겼다. 그는 가준과 자윤도 마찬가지였다. 필요에 의해 손
을 잡긴 했어도, 결국 그들도 서로 경쟁자였을 뿐이었다.
“잡아!”
찬영의 목소리에 길드원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부상을 입었다고 해
도 상대측도 만만한 이들은 아니었기에 얼마 잡아들이지 못했다.
이들을 죽일 수는 없겠지만, 나중에 소속 길드에서 돈이나 아이템을 뜯어내
고 돌려보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아.”
찬영은 엉망이 된 주변을 둘러보며 머리를 거칠게 쓸었다. 그래도 너무 늦
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아무리 선우가 강하다고 하더라도 상대는 S급 각성
자 셋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선우에게 묻자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를 향해 발걸음
을 옮겼다.
“정리는 확실하게 하십시오.”
“네.”
“아, 그리고 치킨. 잊지 마십시오.”
“네, 네?”
찬영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선우가 뭘 하려는지 깨
달은 순간, 잽싸게 길드원을 반 나눠서 호위로 붙였다. 선우와 현우를 태운
차가 호위를 꼬리같이 달고 서서히 멀어졌다.
현장을 정리하는 건 길드원들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찬영은 멀어져 가는
차를 보다가 자신의 바이크를 찾았다. 치킨을 사러 갈 생각이었다. 그게 누
구 입으로 들어갈지 생각하면 울분이 터졌지만, 선우의 말을 어길 수는 없
었다.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찬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헬멧을
썼다.
*
지내던 숙소로 돌아온 현우는 기지개를 쭉 켰다.
“먼저 씻어, 형.”
“응.”
간단하게 씻고 잠옷을 입은 채 거실로 나오니, 고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저도 모르게 냄새가 나는 방향으로 다가가니 테이블 위에 곱게 놓인 잘 튀
겨진 치킨 세 마리가 보였다.
“배고프지?”
그러고 보니 납치되는 바람에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새삼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현우는 얌전히 테이블 앞에 주저앉아 선우가 건네
주는 앞 접시를 받았다.
“뭐부터 먹을래?”
“후라이드!”
선우는 후라이드 치킨 한 조각을 집어 현우의 앞 접시에 놓아 주었다. 침이
흐를 것만 같았다. 노란색의 치킨은 노릇노릇 제대로 익혀진 상태였다. 하
지만 아직 동생이 자리에 앉지 않았기에 얌전히 기다렸다.
“먼저 먹지.”
음료까지 세팅하고 앉은 선우가 그렇게 말했지만, 현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넌 뭐 먹을래?”
“나도 후라이드.”
현우는 집게를 들어 선우의 앞 접시에도 치킨을 놓아 주었다. 그러고 나서
야 드디어 치킨을 먹어 볼 수 있었다.
15.
치킨 조각을 들어 베어 물자 바삭바삭한 껍질이 이 끝에서 부서졌다. 이어
적당히 짭조름한 맛이 느껴지는 부드러운 고기가 닿아 온다. 한입 크게 베
어 물고 씹으니 그 맛이 가히 천상의 맛이었다.
현우는 정신없이 치킨을 먹었다. 마계에서 치킨이 너무 그리워 비슷하게 생
긴 마수를 잡아 튀겨 본 적도 있는데, 맛이 끔찍했었다.
그에 비해 이 맛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현우는 치킨을 뜯으며 히죽 웃었다.
“맛있어?”
열심히 먹는 현우를 보며 선우가 다정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그를 아는 사
람들이 본다면 놀랄 만한 모습이었다.
맛있어!”
현우의 말에 내내 아래쪽에 앉아서 치킨을 먹는 둘을 올려다보던 케로가 움
찔했다. 먹고 싶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현우의 성격을 아는 케로는 인내심
을 키워 나가는 중이었다.
“먹고 싶은 만큼 먹어. 더 사 올 수 있어.”
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치킨을 탐닉하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몇 조각
을 해치우고 나니 그제야 배가 좀 찼다.
“이번에는 양념.”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선우가 양념 치킨을 접시 위에 놓아주었다. 양
념도 후라이드 못지않게 맛있었다. 양념에 살짝 눅눅해진 겉면도, 그 안의
고소한 속살도 혀를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간장도 만만치 않았다. 약간의 청양고추를 썰어 넣어 매콤하면서도 달착지
근한 간장 맛이 맛있어 끊임없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슬슬 먹는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하자, 내내 다정한 표정으로 현우를 바라보
던 선우가 입을 열었다.
“예전에 기억나? 내가 감기 걸려서 아팠던 날.”
그 말에 현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나지.”
“
기억나지 않을 리 없었다. 당시엔 현우도 어렸다. 갑자기 열이 심하게 오른
동생을 두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해 보려고 약국에 가
서 약을 사 와 먹였지만, 열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힘겹게 업고서 병원도
가 보았지만, 돈이 없었다.
동생이 죽는 건 아닌가 무서웠다. 그래서 내내 옆에서 수건으로 땀에 젖은
이마를 닦아 주며 울음을 꾹 내리눌렀다.
서툰 솜씨로 끓인 죽을 조금이라도 먹여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입이 꺼끌
꺼끌한지 도무지 넘기질 못했다. 그 와중에 선우는 먹고 싶은 게 있다고 했
다.
그게 치킨이었다.
“내가 치킨 먹고 싶다고 했었잖아.”
그래, 그랬다. 아픈 동생이 먹고 싶단 말에 현우는 달랑 5천 원을 들고 밖으
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치킨집을 죄다 뒤져서 간신히 마리당 5
천 원 하는 옛날 통닭을 찾아냈다. 혹시나 식을까 봐 품에 넣고 달려와, 제
입에는 살 한 점도 넣지 않고 모두 선우에게 주었다.
“그랬지.”
“그때 먹어 본 치킨 맛이랑 여기랑 비슷해.”
어쩌다 먹어 본 맛이 너무나도 비슷해서 선우는 그 가게의 단골이 되었다.
형이 생각나는 건 뭐든 놓칠 수 없었기에, 바쁜 와중에도 가끔 그곳을 찾았
다.
선우의 말에 현우는 먹던 치킨을 내려놓았다. 웃으면서 말하고 있었지만,
당시 그가 가졌을 감정이 손에 잡히는 듯했다.
‘나도, 나도 네가 그리웠어.’
현우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형.”
“선우야.”
둘은 치킨을 사이에 두고 애절한 눈빛을 교환했다. 기나긴 세월을 돌아 마
침내 다시 만났다. 이제는 다시는 헤어지지 않으리라.
현우는 선우에게 남은 치킨을 밀어 줬다.
“치킨. 더 먹어.”
“아냐, 난 괜찮아.”
“먹으라니까.”
현우는 치킨을 먹기 좋게 발라서 선우의 입에 넣어 주었다. 선우는 그걸 받
아먹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동생이 잘 먹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아진 현우는
재차 치킨을 발라냈다.
그렇게 둘 다 배불리 먹은 후, 소파 위에 늘어졌다.
*
날렵한 검은 차 한 대가 도로를 달리다 한편에 멈춰 섰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남자 둘이 내려섰다.
한 명은 무혁이었고, 다른 이는 다소 마른 듯한 몸에 안경을 쓴 남자였다.
“이미 말끔하게 정리하고 튀었군요.”
안경을 쓴 남자, 영진의 말에 무혁의 표정이 굳었다.
“소식이 너무 늦었습니다.”
“예산 단위가 길드들과는 달라서요. 저희 정보부도 나름 열심히 하고 있지
만, 따라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이미 한차례 싸움이 벌어진 다음, 정리된 자리에 도
착하는 것 말이다.
“이래서는 곤란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영진은 안경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며 대답했다.
“이렇게 나가다가는 헌터관리국이 길드들을 앞서는 일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겠지요.”
무혁의 얼굴에 불쾌함이 떠올랐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분발하십시오.”
노력하겠습니다.”
영진은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나저나 1세대 실종자는 어땠습니까? 정보부에 인계되기 전에 선현 길드
에 뺏겨서 아는 게 있어야지요.”
어땠냐고? 무혁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기억을 더듬었다. 작고 여려
보이는 사람이었지. 사실 일반인 기준으로는 그다지 작은 편도, 여린 편도
아니었지만, S급 각성자인 그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약해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1세대라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약해 보였다니 유감이군요.”
보통 각성자는 세대가 높을수록 강하다. 3세대보단 2세대가 강하단 소리였
다. 그렇기에 1세대는 2세대보다 강하리라 추측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
이었다.
“뭐, 그래도 유일하게 귀환한 1세대니까 쓸모는 많겠지요.”
다른 1세대의 행방, 가진 힘의 정도, 알고 있는 정보. 모든 것이 중요했다.
어떤 사소한 것이라도 놓칠 수 없었다.
“특히 마계에 관한 것을 좀 더 많이 알고 싶습니다.”
지구와는 또 다른 세계. 특이한 식생을 지닌 그곳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
면,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어쩌면 1세대의 등장으로 인해 자국이 해외
보다 앞서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
그러니 되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게 쉬울까. 무려 선현 길드의 선우와 같은 핏줄인데. 게다가 현장
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상당히 아끼는 것 같았다고 했다.
“여러모로 이야기가 복잡해졌군요.”
영진은 혀를 차며 다시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무혁은 그 자리에 그
대로 서서 도로 옆의 공터를 바라볼 뿐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영진이 기다리기 지칠 무렵, 무혁은 다시 차로 돌
아갔다.
“
*
꿈을 꿨다.
뺨이 통통한 작은 아이가 현우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형!”
한 손에는 빵 봉지를 들고 열심히 뛰어오다가 넘어질 듯 갸우뚱거렸다. 당
황하여 달려가 몸을 잡아 주었다. 다행히 아이는 넘어지지 않았다.
“조심해야지, 선우야.”
“응! 형, 이것 봐. 학교에서 빵 받았어.”
그러면서 단팥빵을 보여 주었다.
반반 먹자.”
혼자 다 먹어도 괜찮은데. 반반 나눠 먹자는 기특한 소리를 하는 동생이 사
랑스러웠다. 부모를 잃은 지 몇 년, 동생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현우도 없었
을 터였다.
“
사랑하는 동생. 현우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익숙한 천
장이다. 선우의 집 천장이었으니까. 현우는 눈을 깜박거리다가 고개를 돌려
보았다.
바로 옆에는 케로가 배를 까놓은 채 잠들어 있었다. 원래 예민하기로 소문
난 종족인데 이리 배를 까고 있는 걸 보니 이 녀석도 많이 변했다. 현우는
케로의 뱃살을 만지작거리다가 상체를 일으켰다.
간만의 평화로운 시간이 기꺼웠다. 이런 감각이 얼마 만이던가. 기억도 나
지 않는다.
‘조금 더 누워서 잘까.’
다시 몸을 눕히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형.”
선우는 작은 가방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
“형에게 줄 게 있어.”
또? 여기 오면서 현우는 선우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받았다. 한때는 보호해
야 할 대상으로만 생각했던 동생에게 받기만 하자니 슬슬 부담이 되기 시작
했다.
“안 줘도 되는데.”
몸을 일으켜 세우며 슬쩍 말해 보았지만, 듣지 못한 척을 한다. 안 들렸을
리가 없으면서. 선우는 침대로 다가와 이불 위에 가방의 내용물을 털어 냈
다. 작은 가방에서 나오는 건 생각보다 많았다.
“아공간 가방이야.”
그래서 그 많은 게 들어 있었구나.
“그런데 이건 뭐야?”
현우의 물음에 선우가 침대 위에 흩어진 액세서리 하나를 들어 올렸다.
“이건 반지.”
“그냥 반지는 아닌 것 같은데?”
“맞아. 아티팩트야. 보호의 반지라고.”
그러면서 능력을 이야기해 주었다.
보호의 반지(유니크)]
소유자가 위험에 처할 시 강력한 배리어를 펼친다. 재사용 시간 48시간
[
이어 현우의 손을 잡은 선우가 반지를 끼워 주었다. 다소 큰 것처럼 보이던
반지는 손가락에 들어가자마자 착 달라붙었다.
“일단 이걸 끼고.”
전혀 필요 없는 반지였지만, 이걸 껴서 동생의 마음이 안정된다면야. 현우
는 열린 마음으로 반지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선우의 마음은 반지로 끝나지
않았다.
이동의 귀걸이(유니크)]
착용 시 짧은 거리의 이동이 가능하다. 이동 장소 무작위, 재사용 시간 24시
간
[
귀걸이도 하고.”
“
희생의 팔찌(유니크)]
소유자가 입는 상처를 대신 받는다. 10회 사용 후 부서짐.
[
팔찌도.”
“
재생의 목걸이(유니크)]
소유자가 입은 상처를 천천히 치료한다. 마나를 보충 후 사용 가능.
[
이건 목걸이야.”
이미 귀걸이부터 부담되기 시작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있어.”
“하지만 다 큰 성인 남자가 이걸 전부 하는 건 좀 그렇지 않아?”
현우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선우를 설득하기 위해 애썼다.
“그래도 너무 화려한 디자인은 피했어.”
그건 그렇다. 전부 제법 단아하게 생겼으나, 그건 하나만 착용할 때의 이야
기지. 개수도 많았고, 일단 착용자가 자신이다.
“
16.
“
그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현우의 완곡한 거절에 선우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다시 가방
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사실 몇 가지 더 준비한 게 있는데. 이게 싫으면 다른 걸 써도 돼.”
“어? 그럼 다른 거 할게!”
현우는 냉큼 대답했다.
“그럼 이걸로 할래?”
그러면서 꺼낸 아이템은 서클릿이었다. 왜 판타지에 보면 엘프들이 이마에
두르는 화려한 장식 말이다.
정화의 서클릿(유니크)]
독 저항, 정신 공격 저항률을 30% 올려 준다.
[
그걸 보는 순간, 현우는 얌전히 귀걸이를 부여잡았다. 절대 서클릿을 찰 수
는 없었다! 다음으로 나오는 아이템들도 그에 못지않게 화려한 것이 보기만
해도 두려울 정도였다. 보드라운 털이 달린 망토며, 왕이나 들 법한 완드,
정강이까지 오는 화려한 세공의 각반 등등. 뭐든 하나만 껴도 시선을 한 몸
에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들은 한두 개만 차면 돼.”
“아냐, 됐어.”
현우는 한숨을 삼키며 마지막 미련을 담아 물었다.
“그런데 이거 진짜 다 해야 해?”
“응, 전부.”
“너무, 너무 많은데?”
“이게 뭐가 많아. 그래도 추리고 추린 거야.”
현우는 울고 싶어졌다. 형에게 상처 나는 게 싫다더니 귀를 뚫는 건 괜찮은
거니? 주섬주섬 액세서리를 모으는 손길이 느리다. 할 수만 있다면 전부 창
밖으로 던져 버리고 싶었다. 혹시 케로가 이걸 전부 물고 도망가 주지 않을
까… 기대감을 가지고 바라보았으나, 졸린 눈으로 하품을 하고 있다.
‘도움도 안 되는 녀석!’
현우는 절망했다.
“그래도 이제는 좀 안심이 되네.”
“그래, 너라도 안심이 된다니 다행이다.”
“괜찮아, 형. 각성자들은 능력을 위해서라면 더한 것도 차고 다니는데. 오히
려 없어서 못 차는걸.”
이 정도는 무난하다. 선우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현우의 생각
은 달랐지만.
“그렇구나아. 하지만 저번에 보니까 안 하는 사람도 있던데?”
“누구?”
“가준이라는 사람이라든가.”
그 말에 선우가 잠시 멈칫했다. 그러더니 미간을 찌푸리고는 답했다.
“아냐. 도가준도 여러 개 쓰고 있어.”
“어떤 거?”
일단 장갑. 몇 켤레 두고 번갈아 쓰고 있지. 구하기 어렵지 않은 탓에 등급
은 높지 않지만, 제법 쓸모 있어.”
“그리고?”
“보이지는 않지만, 목걸이에 꿴 반지 여러 개.”
“그랬나?”
도가준의 멱살을 잡은 기억은 있었지만, 액세서리까지 눈여겨보지는 않았
다.
“도가준뿐만이 아니야. 이혜선도, 류자윤도 비상용으로 액세서리 몇 개는
가지고 다녀. 귀걸이랑 반지는 기본이지.”
“이혜선이라면?”
“최강 길드의 길드장. 방패를 들고 있던 여자 말이야. 그 뒤에 서 있던 금발
머리의 남자는 류자윤.”
선우가 간단한 외모와 함께 이름을 설명해 주자, 누가 누군지 아는 건 어렵
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이 액세서리를 차고 있었던가? 그 부분은 잘 떠오르
지 않았다. 싸우는 와중에 액세서리가 번쩍였으면 금방 알았을 것 같은데.
의문을 가지는 사이, 선우가 재차 말했다.
“하여간 이제부터는 절대 나서지 마. 알았지? 차라리 날 시켜.”
“알았어.”
몇 번이고 다짐을 받고 나서야 선우는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
그래, 괜찮겠지.’
마계의 알베르크도 액세서리를 제법 했었잖아? 그래도 보기 싫지 않았다.
‘그건 알베르크라서 그렇지!’
알베르크는 절세의 미인이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은 아니다! 현우는 괴로움
에 침대를 뒹굴었다.
“역시 안 되겠어! 조금만 줄이자!”
“줄일 게 없는데?”
“하지만!”
“잘 어울려, 형.”
선우는 배시시 웃었다.
‘나보단 너에게 훨씬 어울릴 거야!’
정장을 입고 있어도 워낙 잘생겼다 보니 이 정도 액세서리도 너끈히 소화할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현우는 괴로움에 뒹굴다가 떠오르는
것이 있어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넌 액세서리 안 하고 있잖아! 다들 몇 개 들고 다닌다면서!”
“나도 들고 다니는데?”
“착용은?”
‘
당장 쓸 것도 아닌데 할 필요가 있나? S급 각성자는 그 자체로 전략 무기
같은 느낌이라서. 액세서리를 굳이 할 필요는 없어. 그냥 비상용으로 인벤
토리에 몇 개 가지고 다니는 수준이지. 도가준은 워낙 조심성이 많아서 따
로 하고 다니는 거고.”
얄밉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생이 처음으로 얄밉게 보였다. 그런 이유라면
현우도 액세서리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강자였으니까.
굳이 동생에게 힘을 밝히지 않으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이걸 다 차고 다니
느니 강함을 증명하고 편하게 다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고백하자.’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선우가 눈을 휘며 평범해 보이는 목걸이 하나를 꺼
내 보였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금속 목걸이였지만, 이것 또한 특수한 효과
를 가진 액세서리였다.
“그럼 이걸 쓸래?”
“뭔데? 더는 추가하고 싶지 않은데!”
“도가준이 목걸이에 반지를 여러 개 달고 다닌다고 했지?”
“그랬지?”
“이게 그 목걸이야. 단순해 보이지만, 특수한 능력이 있지. 여기에 아이템을
여러 개 끼우면, 능력치가 반영돼. 더불어 아이템 축소 기능이 있어서 딱히
불편하지도 않아.”
“
그러면 굳이 이렇게 액세서리를 하나하나 차고 다닐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
다. 그렇기에 이 목걸이는 이외의 능력이 없어도 유니크 등급을 가지고 있
었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단 두 개만 존재했다. 선우에게 하나, 가준에게
하나.
한국에서 열린 던전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막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려던
현우는 그걸 보고 나서야 차분해졌다. 이 정도면 다시 생각을 바꿔도 될 것
같았다.
‘저 정도라면 할 수 있지.’
가준과 똑같은 목걸이라는 건 좀 싫지만, 그래도 훨씬 낫다.
“그거 할래.”
“좋아. 그럼 작업해서 돌려줄게.”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현우가 찬 액세서리를 떼기 시작했다.
“그런데 좀 아쉽다.”
“뭐가?”
“형한테 잘 어울리는데.”
현우는 저도 모르게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니거든?”
“정말인데.”
나보단 네가 해 보지, 그래? 정말 잘 어울릴 텐데.”
“정말?”
선우가 배시시 웃었다. 그러고는 현우에게서 떼어낸 귀걸이를 자신의 귓가
에 가져다 댔다.
“잘 어울려?”
현우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얄밉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생이었다. 그래, 선우는 이제 20대 초반이다. 아직 어
리단 소리였다. 이런 장난 정도는 칠 수도 있지 않나.
“그럼 형이랑 나랑 세트로 귀걸이 하나 할까?”
그 말에 현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과 같은 귀걸이 좋지. 그
렇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퍼뜩 제정신을 차렸다.
“형제끼리 세트 귀걸이는 이상하지 않아?”
“뭐가 이상해? 원래 형제자매끼리는 이런 거 흔하게 하지 않아?”
“……그랬나?”
오랫동안 마계에 가 있었더니, 그새 한국의 풍습이 조금 바뀐 모양이었다.
자매라면 몰라도 형제까지 그러는가. 고민하는 사이, 귀걸이를 몇 개 꺼내
현우에게 대 보던 선우가 물어왔다.
“형은 어느 게 좋아?”
“
단순한 거. 제일 단순한 거! 현우는 까만색의 보석이 박힌 작은 귀걸이 하나
를 골랐다.
“아, 이거? 지금 가진 건 하나뿐인데, 하나 더 구해야겠네.”
작게 콧노래를 부른 선우는 현우가 고른 귀걸이를 소중하게 챙겼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지는 않은데 어쩐지 피곤했다. 현우는 그대로 다시 축 늘
어졌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선우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은 어떻게 됐어?”
“누구?”
알아들은 것 같은데 의뭉을 떤다.
“예원이 오빠.”
선우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현우를 바라보았다. 참으로 귀여운 모습이었
지만,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현우는 선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알고 있잖아.”
“알고 있지.”
작게 한숨을 쉰 선우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런 위험한 작자를 가까이 둘 필요가 있어?”
그냥 이야기나 좀 해 주는 건데?”
“그럼 형이 이야기하고, 내가 그걸 녹음해서 들려주는 건 어떨까?”
이럴 땐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쓰다듬던 머리카락을 반대로 넘
기자 잘 정돈되어 있던 선우의 머리가 엉망이 되었다.
“심술부리지 말고.”
“안 부렸는데.”
“거짓말하네.”
코를 잡고 가볍게 흔들어 주니 선우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어딨는지 말해 봐.”
선우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아래?”
“로비 입구에서 죽치고 있어.”
“왜?”
“못 들어오게 했거든.”
“들어오라고 해.”
“싫은데.”
“
투정을 부리는 선우의 모습을 다른 이가 본다면 기겁할 것이다. 언제나 바
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딱딱한 태도를 고수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뭐.’
무려 10년 만에 만난 형이다. 선우는 만나지 못했던 기간 동안 하고 싶었던
모든 걸 현우와 함께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남이 보기엔 다소 위화감이 들 만
한 행동도 꺼리지 않았다.
선우는 침대에 앉아 있는 현우의 무릎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현우
가 좀 더 편한 태도로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지켜야 해.’
그러자면 선우가 더 강하고, 더 예리해져야 했다. 아무도 현우에게 손댈 생
각을 가지지 못하도록. 다시는 형을 잃는 일이 없게 말이다.
“선우는 착하지? 그러니까 불러오자.”
“알았어.”
형은 하고 싶은 걸 하도록 해야 했다. 그리고 그걸 안전하게 지키는 건 선우
의 몫이었다.
그 전에 일단은 그 남자를 불러오자. 내키지는 않지만, 형이 원하는 것이었
으니까.
17.
선우에 의해 불려온 도진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의 모습에서 달리 변한 것이 없었
다. 눈을 가리는 기다랗고 너저분한 앞머리, 깨끗하지만 너무 오래 입었다는 티가
나는 낡은 옷. 그 상태로 허리를 구부리고 있으니 쉽게 접근할 모습은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일어나서 어색하게 존댓말로 인사를 하자, 도진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그러고는 그대로 얌전히 서서 현우를 바라보았다. 가진 힘이나 덩치에 비해 얌전
한 느낌이 묘했다.
“그럼 앉을까요?”
“네.”
현우가 소파에 앉자 잠시 머뭇거리던 도진이 그대로 바닥에 앉았다. 심지어 무릎
까지 꿇고 있다. 아니, 지금 벌 받는 중이세요?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집어삼키며 소파를 향해 손짓했다.
“여기 앉으세요.”
“네.”
도진은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옮겨 앉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선우
가 거실과 가까이에 붙어 있는 부엌에서 머그컵을 가져와 현우의 앞에 내려놓았
다. 그 안에는 보기에도 달아 보이는 핫초코가 들어 있었다.
‘이런 건 어디서 구해 오는 거람.’
잠시 망설이다가 한 모금 마셔 보니 생각보다 맛있다. 저도 모르게 홀짝홀짝 마시
다가 뒤늦게야 자신 혼자 머그컵을 쥐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넌 안 마셔?”
선우에게 물어보니 금방 답이 돌아왔다.
“난 괜찮아. 단 거 별로 안 좋아해.”
사실 현우도 딱히 좋아하진 않는다. 그래도 이건 제법 먹을 만했기에 선우에게 머
그컵을 밀었다.
“너도 마셔 봐. 먹을 만해.”
“응.”
선우는 배시시 웃으며 머그컵을 받아들었다. 그렇게 동생이 핫초코를 마시고 있는
걸 보다가, 뒤늦게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손님인 도진의 앞에는 그 무엇도
놓여 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도진을 힐끔 바라보니, 선우가 속삭이듯 말했다.
“괜찮아.”
“하지만 손님인데?”
“누가 손님이야? 딱히 원했던 사람도 아닌데.”
선우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하고는 다시 핫초코를 홀짝였다. 아무래도
저번에 도진이 먼저 공격해 왔던 걸 아직 마음에 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래도 어떻게 그러나. 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잠시만 기다려.”
핫초코 정도야 현우도 탈 수 있었다. 현우가 부엌으로 가자 선우가 빠르게 따라붙
었다.
“왜?”
“그래도 뭐라도 내놔야지.”
“그럼 내가 할게.”
“나도 할 수 있는데?”
나이가 몇인데 이 정도도 못 할까. 현우는 선우에게 물어 핫초코 통을 꺼내 거기에
쓰인 설명을 읽었다. 아니, 정확히는 읽으려고 했다. 설명서의 내용이 전부 영어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역시 내가 할게.”
“아냐. 할 수 있다니까.”
핫초코 타는 법이야 거기서 거기지. 일단 전기포트에 담겨 있는 뜨거운 물을 머그
컵에 붓고 그 안에 핫초코 가루를 풀었다. 정량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니까 조금씩
붓고 젓자 제법 그럴싸한 모양이 되었다.
“잘하네.”
옆에서 선우가 그렇게 말해 주긴 했지만, 현우 자신이 먹은 것과는 뭔가 좀 달랐
다. 그래서 다른 그릇에 조금 부어서 맛보았더니 뭔가 미묘한 맛이다. 가루가 부족
했나.
현우는 가루를 더 추가했다.
‘얼추 색이 비슷하네.’
이 정도면 됐겠지. 현우는 자신만만하게 머그컵을 도진 앞에 내려놓았다.
“드세요.”
도진은 머뭇거리다가 머그컵을 들었다. 잠시 셋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핫초코를
전부 해치운 도진은 조용히 머그컵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예원이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습니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었다.
“대가는 충분히 지불하겠습니다. 그게 무엇이건 전부.”
대가는 필요 없다. 그저 과거의 이야기를 해 주는 것일 뿐인데 대가는 무슨 대가.
하지만 선우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무엇을 내놓을 수 있습니까?”
현우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선우를 찔렀다. 그러나 선우는 했던 말을 철회하지
않았다. 그런 선우에게 도진은 신중하게 대답했다.
“무엇이든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이런 건 어떻습니까? 형을 지켜 주십시오.”
재차 선우를 찌르려던 현우가 손가락을 거뒀다. 이게 무슨 이야기람?
“물론 형은 제가 지킬 거지만, 세상일은 혹시 모르니 말입니다.”
1세대 실종자의 가치. 선우는 형만 있으면 되었지만, 다른 이들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들은 유독 실종 기간이 긴 1세대 실종자가 아는 모든 것을 궁금
해했다. 혹시라도 더 강해지는, 도움이 되는 단서가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포기하
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도움이 될 만한 강자는 많을수록 좋다.
‘게다가 가준보다 강한 것 같았지.’
싸워 보면서 느꼈다. 그는 절대 자신의 아래가 아니다. 그런 이가 지금껏 어떻게
실력을 감추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걸 알게 된 이상 저런 쓸모 있는 사람을 그
냥 놓아줄 수는 없었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도진의 대답은 빨랐다. 깊게 고민해 보지도 않은 것 같았다.
“좋습니다. 그럼 계약서를 작성하도록 하죠.”
선우는 언제 준비해 뒀는지 서류 하나를 꺼내 왔다. 온갖 조건이 더덕더덕 붙은 계
약서였지만, 도진은 망설이지 않고 사인을 했다. 지구에서의 나이는 현우보다 도
진이 위인 것 같은데, 저렇게 아무 데나 사인을 하다니. 어디 가서 사기당할 것 같
은 사람이었다. 현우는 그 생각을 가감 없이 내뱉었다.
“그러다 사기당하려면 어쩌려고요?”
“사기 치실 겁니까?”
“그건 아니지만.”
현우는 사기 칠 생각이 없었고, 선우도 그럴 아이가 아니다.
“그럼 됐습니다.”
본인이 괜찮다는데 말을 더 얹기도 그랬던 현우는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그럼 예원 누나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이 이야기는 예원의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현우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초반에는
자주 같이 다니곤 했으니 말이다.
현우는 고르고 골라 그나마 괜찮았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처음 같이 몬스터를 사
냥하면서 당황했던 일,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찾아 헤매다가 마계의 열매를 먹고
배앓이를 했던 일. 끔찍한 기억은 말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 도진뿐인
게 아니었으니까.
현우도 선우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줄어 가는 사람
들, 그 때문에 예민해져서 미친 짓을 저지르는 이도 늘었다. 어리고 약했던 현우나
예원은 쉽게 마음을 놓을 수 없는 환경이었다.
힘든 상황에서도 사람은 전부 뭉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누군가를 고통에 밀어 넣
어서라도 살아남고자 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이
어졌다.
그 상황에서 아득바득 버티다 보니, 잊는 법을 깨달았다. 같이 하던 사람을 잊고,
인간성을 버리기 시작했다. 독기는 있었지만, 나름 모범생에 가까웠던 현우가 망
가져 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마지막 사람이 죽는 순간으로부터 수십 년간 현우는 혼자 살아남아 마계에 머물렀
다. 멀쩡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이 정도 이야기하는 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자신은 달라졌다. 약하던 현우는 이제 없다. 그런데도 이야기를 이어나갈수록 기
분이 이상해졌다.
“형, 그만하자.”
어느 순간, 선우가 현우의 손을 잡아 왔다.
“뭐?”
오늘은 이걸로 됐어.”
그러면서 도진을 노려보자, 그도 말을 덧붙였다.
“제가 너무 무리를 시킨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왜 저러는 거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둘은 현우가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끼잉.”
어느새 소파에 있던 케로도 저 멀리 떨어져서 낑낑대고 있었다. 현우는 곰곰이 생
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한 번에 전부 말하기엔 이야기가 길지요.”
“그런 것 같습니다. 이만 쉬십시오.”
“그래, 형. 일단 눕자.”
선우는 또다시 현우를 덜렁 들어 침실로 데려갔다. 그런 후, 침대에 눕히고서는 이
불을 덮어 주었다. 옆에는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케로도 데려다 놓았다.
“잠시만 기다리면 힐러를 데려올게.”
힐러까지? 무슨 일이람.
“아니, 됐어. 무슨 힐러까지 불러. 나 멀쩡한데?”
그 말에 선우가 씁쓸한 표정으로 현우의 손을 잡았다.
“알았어. 그럼 힐러는 나중에 부를 테니, 일단 좀 쉬자.”
“
그러면서 가슴을 토닥여 주고는 작은 등을 켠 뒤, 방을 나갔다. 엉겁결에 끌려와
눕긴 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다가 케로를 잡아당
겨 안았다. 최근 토실토실해진 케로의 뱃살을 주물거리니 제법 기분이 좋았다.
뭐, 동생이 걱정이 된다니 자는 척이라도 해야지. 현우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문을 닫고 나온 선우는 그대로 도진에게 턱짓을 했다. 그 의미를 알아들은 도진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선우도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두터운 문
이 닫힌 뒤에야 입을 열었다.
“이제 만족하십니까?”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죄송합니다.”
도진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마계에서 10년 동안 있었다면, 그만큼 괴로
운 기억도 많았을 텐데 배려하지 못했다. 동생의 일을 듣고 싶은 욕심에 안 그래도
약한 사람을 힘들게 하고 말았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그것은 선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살기를 필사적으로 누르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라고 형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지 않았겠는가.
마계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왜 힘이 느껴지지 않는지. 묻고 싶은 것은 많았다.
그런데도 묻지 못했다. 형을 지키고 싶었으니까. 좀 더 천천히 접근할 셈이었다.
‘그랬는데.’
그걸 도진이 모두 망쳤다. 아니, 아니다. 거기에는 선우의 잘못도 있었다. 선우는
주먹을 꾹 쥐었다.
18.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도진을 핑계로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자신이 있었다.
욕심을 과하게 부렸다. 그래 놓고 남에게 화풀이라니. 선우는 쓰게 웃었다. 그리고
도진에게 사과했다.
“저도 죄송합니다.”
성격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도진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지금 이런 선우도 과거 순진하고 착하던 때가 있었다. 형과 같이 있던 그때
말이다.
“아닙니다.”
선우의 말에 대답한 도진은, 고개를 숙여 바닥을 바라보았다.
‘예원이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
하지만 그걸로 인해 타인이 고통받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원래의 그라면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사랑하는 동생의 이야기를 더 듣기 위해 애썼을 테지
만. 이상하게 현우에게는 마음이 약해졌다.
‘약해 보여서 그런가.’
작고 말랐으니까.
‘그나저나 이제 어쩐다.’
상황이 난감해졌다. 선우가 사과를 해 오긴 했지만, 다시 단단하게 굳어 버린 표정
을 보니 더는 도진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을 것 같았다. 계약서를 파기하고 싶어 할
지도 몰랐다. 그에게 불리한 계약서라도 파기되는 건 곤란하다.
해결책이 필요했다. 생각을 정리한 도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계약서대로 그분을 지키겠습니다.”
선우가 알 수 없는 눈으로 도진을 바라보았다.
“예원의 이야기는 더 이상 묻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굳이 제 형을 지킬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려는 겁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이요.”
도진은 손으로 입가를 매만졌다.
“당장은 힘들겠지만, 언젠가는 쉽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오지 않으면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도진에게는 더 살 의욕도 없었다. 그래서 죽어 버리고자 했는데, 그를 가로
막은 이가 현우였다. 그러니 이 목숨, 그에게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길드도 있긴 했지만, 애초에 필요에 의해서 만들었던 것이니 미련은 없다.
‘이참에 길드도 정리해야지.’
동생을 찾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위선을 내세워 모은 사람들이다. 이제는 놓아
줄 때도 되었다. 도진이 빠지면 전력이 줄어들겠지만, 그래도 적당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도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유독 날카롭게 올라간 눈꼬리가 예민해 보이는 남자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
의 이름은 박현희. 평화 길드의 부길드장이었다. S급 각성자는 되지 못하고 A급
각성자인데, 그나마도 턱걸이로 간신히 인정받은 자였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
정으로 테이블을 노려보다가 재차 물었다.
“제가 잘못 들은 거지요?”
“아닙니다. 맞게 들으셨습니다.”
얇은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럼 진짜 길드에서 나가시겠다고요?”
“네.”
현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꾹 눌렀다. 평화 길드는 타 길드와 사정이 조금
달랐다. 무려 5위에 든 길드라고 하나 아직 모자란 부분이 많았다.
길드원들이 하나같이 독기를 품고 노력하는 부분은 좋았지만, 그것만으로는 되지
않는 것도 있었다. 강함은 원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평화
길드에는 길드장이 필요했다. 그들을 구원하고 여기까지 끌어준 강자. 그런데 그
강자가 자신들을 버리겠단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현희는 이를 악물었다.
“어째서입니까!”
그동안 길드장인 도진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왔다. 노력하고 노력해서 간신히 여
기까지 기어 올라왔는데. 절망이 현희의 심장을 조여 왔다.
“ ?
목적을 이루었습니다.”
“길드 출범 때 말씀하셨던 그 목적 말입니까?”
“네.”
당시 도진은 말했다.
‘나는 목적이 있어서 길드를 세웠습니다.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
습니다. 길드는 수단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그때 현희와 길드 수뇌부는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저희를 여기까지 이끌어 주신 분은 도진님입니다. 그런 도진님을 위
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때는 그랬다. 하지만 시간은 흘렀고, 상황이 달라졌다. 길드가 점점 발전
하면서 욕심이 생겼고, 더 위를 노리고 싶어졌다. 길드장이 빠져나가면 그 모든 것
이 물거품이 된다.
‘나는 길드장을 맡을 위인이 되지 못한다.’
운영 정도야 하겠지. 그렇지만 그 이상은 할 수 없었다. 현희가 길드장이 된다면
길드는 다시 아래로 점점 내려가게 될 것이다.
“다시, 다시 생각하실 수는 없습니까?”
“죄송합니다.”
도진은 단호하게 답했다.
“저희는 길드장님만 보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저도 거들어 드릴 생각입니다.”
그걸로는 부족하다. 발밑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그 1세대 실종자 때문에 그렇습니까?”
정보는 통제되었지만, 몇몇 수뇌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길드장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에 더해 현희는 도진의 여동생이
1세대 실종자 중 하나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도진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지만, 그게 오히려 답이 되었다. 1세대가 뭐라고 말했
는지 모르지만, 그 곁에 있어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 현희는 머리를 팽팽 굴렸
다.
“그냥, 지금까지처럼 저희를 이용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민폐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게 왜 민폐입니까!”
“예전처럼 던전도 자주 가지 못할 텐데요.”
“괜찮습니다!”
“길드장이 해야 할 일도 대부분 하지 못할 겁니다.”
“제가 할 줄 압니다.”
그런 현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진이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그가 선수를 쳤다.
“길드장은 길드에서 가장 강해야 합니다. 저는 그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부길드장님도 저 다음으로 강하지 않으십니까.”
“
그 차이가 많이 나잖습니까. 제발 저희를 버리지 마십시오.”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도 생각을 조금이라도 돌린 것 같으니 다행이다. 현희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이 상황을 만들어 낸 1세대에게 원망을 품었다.
“
툭툭.
책상을 손으로 두드리던 반백의 남자가 무혁에게 말했다.
“도로 데려오지.”
“선현 길드가 접근도 못 하게 막고 있습니다만.”
“아무리 선현 길드라 하더라도 정부의 행사를 아예 무시할 수는 없지 않나.”
“그라면 거부하고도 남습니다.”
“거참, 국가가 먼저이거늘 이렇게 이기적이어서야.”
남자는 혀를 차더니 말을 이었다.
“길드, 그놈의 길드. 저들의 이익만 생각하는 버러지 같은 놈들. 정말 지선우, 그가
헌터관리국의 제안을 무시할 거라고 생각하나?”
“그동안 무응답으로 대응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 그렇군. 그럼 우리도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 없지.”
남자, 김철수는 눈을 가늘게 떴다. 헌터관리국 국장, 김철수. 정치질로 국장의 자
리를 차지한 그는 비각성자였다. 거기다 언제나 보호받고 있으니, 각성자가 작정
하면 얼마나 무서워질 수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다들 마지못해 지켜 주는 예의를
자신의 권력 때문인 줄 아는 것이다.
무혁은 한숨 쉬고 싶은 걸 참으며 바로 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힘으로 겁박하는 건 이미 옛적 이야기지. 이제는 다르게 대응할 때야. 그러니 정
보를 퍼트려 보자고.”
“1세대의 정보를 말입니까?”
“그래! 1세대 실종자 유족에게도 알리고, 언론사도 좀 찔러 보고. 여기저기서 원하
면 아무리 지선우라도 계속 감추고 있을 수 있겠나. 선현 길드 이미지가 있는데.
가족이라도 그 이상은 힘들지. 최대한 복잡하게 해 놓고 보호를 미끼로 우리가 낚
아채 보는 거지!”
김철수다운 발상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이 기회에 선현 길드의 목줄
을 잡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지현우가 지선우의 가족이라는 걸
밝히지 말 걸 그랬나. 일이 더 복잡해지게 생겼다.
‘차라리 내가 국장이 된다면.’
아니,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이제 20대 후반인 젊은 사람을 국장에 앉히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무혁도 이 자리에 머무는 것이기도 했고.
“그럼 정보부에 전달하여 이렇게 진행하도록 하지.”
S급 각성자의 원한만 살 것 같은데. 무혁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물러가 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국장은 손을 휘휘 저었다. 무례한 태도였다.
탕.
섬세하게 세공된 문이 닫히고, 무혁은 곧바로 혀를 찼다. 이제 국내는 새롭게 알려
지는 1세대의 정보로 들끓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소식은 외국까지도 새어 나가
겠지.
각성자 강국인 일본과 미국에 말이다.
‘나도 움직여야겠군.’
적어도 외국에는 뺏기지 말아야 하지 않겠나. 앞으로 할 일이 많았다.
‘안 그래도 요즘 일이 많은데.’
당분간은 야근 확정이다.
*
소문의 시작은 인터넷 뉴스였다.
세대 실종자 나타나다!]
10년 전 처음 열린 포털로 사라진 1만 명!
그중 1명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익명의 제보자가 전해 준 소식에 의하면 다시 모습을 드러낸 최초의 1세대는 길드
에 몸을 의탁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1세대를
생각하면 조금 의문이 생긴다.
[1
과연 그는 길드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게 맞을까? 강제로 잡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 말이다. 제보자가 전해 준 또 다른 정보에 의하면…….
작은 언론사에서 시작된 인터넷 뉴스는 점점 들불처럼 크게 번져갔다.
“1세대? 지금에 와서 나타났다고? 거짓말 아냐? 여기 언론사도 찌라시 잘 떠들어
대는 곳이잖아.”
“하지만 다른 곳에서도 뉴스가 떴는걸? 여기는 믿을 만한 곳이잖아?”
“그건 그런데.”
처음에는 미심쩍어하던 사람들도 정보의 양이 늘어나자 그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
했다.
19.
어딜 가도 1세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뉴스에 뜨는 소식은 점점 자세해지기
시작했고, 상위 길드에서 그를 독점하고 있단 소문도 퍼졌다.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지. 상위 길드라면 사람 하나 숨겨도 모르지 않을까?”
“그것도 그렇네?”
사람들은 길드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길드들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
로 사람들의 시선이 더 몰린다면 그들도 더는 가만있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아무리
강한 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길드라고 해도, 국민의 시선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
릇이었으니까.
그 소란 속에서 실종자 가족들이 만든 단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족이 사라진
지 10년. 긴 세월에도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던 이들에게는 빛과 같은 소식이었기
때문이었다.
“1세대 실종자를 만나야 합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만난단 말입니까? 인터넷에서는 연일 떠들어 대고 있지
만, 현실은 다릅니다. 길드들은 입을 다물고 있고 그가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습
니다.”
“압니다. 알지만!”
단체장인 박덕수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뭐라도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울분을 토해 내는 그 목소리에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숙였다. 그런 와중에 중년 여
성이 손을 들며 말했다.
“일단 길드에 문의라도 해 보는 게 어떻습니까?”
“그 오만한 작자들이 들어 주겠습니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낫죠.”
앞으로 어떻게 할지 열심히 이야기하는데, 갑자기 사무실 문이 쾅 열렸다. 그리고
청년 하나가 들어오며 외쳤다.
“선현, 선현 길드랍니다!”
“뭐?”
“1세대 실종자를 데리고 있는 길드 말입니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뉴스에 떴습니다!”
방송이나 거대 언론사에서 나온 정보는 아니었지만,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데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선현 길드에 연락을 넣어 보겠습니다.”
선현 길드의 이미지는 좋은 편이었다. 다른 상위권 길드처럼 거만하게 군 적도 없
었고 사회적인 공헌도 자주 하였으니까. 그러니 어떤 식으로든 답이 돌아올 것이
다. 그들은 그렇게 믿었다.
“
*
와 씨발. 이렇게도 엿 먹이네?”
새로 들어온 소식에 가준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죽어도 1세대 독점은 못 보겠다 이거지.”
1세대 실종자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길드들은 전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앞으
로 진득하게 기다리면 기회는 다시 생기기 마련이다. 그걸 굳이 다른 데 떠들어서
경쟁자를 늘릴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조용히 있었는데, 이걸 다른 이가 다 풀어
버렸다.
헌터관리국이 말이다. 최대한 정보의 출처를 감추려고는 하는 모양이었지만, 멍청
이가 아닌 이상 이걸 모를 리 없었다.
기가 막혀 헛웃음만 터트리고 있자니, 전화가 왔다. 혜선이었다.
“여어, 누님.”
“ ,
미친 거 아냐?
“걔네는 언제나 반쯤 미쳐 있었어요.”
원하는 목표는 큰데, 그 앞길을 가로막는 것들이 많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래
서 이런 일을 벌였는지도 모른다.
─ 이 정보가 퍼져 나가면 경쟁자만 더 들러붙을 건데 왜 이런 짓을 한 거지?
“그러게 말입니다. 게다가 지선우가 적이 얼마나 많은데 말이죠.”
─ 너를 포함해서?
“그래도 저는 신사죠.”
─ 헛소리하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덮을 거야?
“그러기엔 정보가 퍼지는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요람 길드도 이번에는 쉽게 손을
쓰지 못할걸요.”
자윤과 아윤은 언론사 집안의 자식들이었고, 덕분에 정보전에 능했다. 하지만 그
런 둘도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
─ 빌어먹을 인터넷!
분노한 혜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어쩌겠습니까. 그래도 일단은 대책을 생각해 봐야 할 테니 한번 모이죠.”
─ 알았어. 요람 길드에는 내가 전하지.
혜선의 최강 길드는 요람 길드와는 사이가 괜찮은 편이었다. 자윤의 동생인 아윤
과 언니동생할 정도로 친한 탓이었다.
─
네 그럼.”
전화를 끊은 가준은 서랍을 뒤져 담배를 찾았다. 어떤 독한 걸 피워도 독술사인 그
에게는 심심하게 느껴져서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게 당겼다.
“정말 어쩌자고. 쯧.”
가준은 혀를 차며 1세대 실종자, 현우를 떠올렸다. 이제 그는 어떻게 되려나. 힘이
야 약하지 않았지만, 때로는 힘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게 있는 법이었다.
‘지선우가 어떻게 대처할지도 궁금하군.’
가준은 최악의 경우를 떠올리며 담배를 물었다.
“ ,
*
국내에서 돌던 정보는 이내 해외까지 새어 나가기 시작했다. 일본, 러시아, 미국.
각성자 강국은 그 정보를 전해 듣고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일본의 모처.
반질반질하게 닦여진 나무 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서 명상에 잠겨 있던 청년이 천
천히 고개를 들었다.
“준이치 님.”
얼마 지나지 않아 문 저편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십시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험악한 인상을 가진 남자 하나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정보 하나가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급히 찾아온 걸 보니 정말 중요한 정보인가 보군요.”
목소리는 상냥했지만, 그 말에 남자는 몸을 굳혔다. 눈앞에 보이는 부드러운 인상
의 청년, 준이치가 보이는 것과는 다른 사람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말해 보십시오.”
“1세대 실종자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 말에 준이치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 모습에 남자는 공포를 느끼며 빠르
게 말을 이었다.
“1세대 실종자를 감추고 있는 곳이 선현 길드라고 합니다.”
“선현 길드?”
준이치의 표정이 달라졌다.
“네!”
“흐음. 좀 더 자세히 조사를 해 보십시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나세요.”
남자는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나 문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준이치는 무릎
위에 올려져 있던 주먹을 힘주어 쥐었다.
선현 길드. 그가 라이벌로 여기는 지선우가 길드장으로 있는 길드였다. 그 길드에
서 1세대 실종자를 데리고 있다고? 신경이 쓰였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신경이 쓰인다면 가져야지요.’
준이치는 가볍게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매섭게 앞을 노려보았다. 어쩌면 이번 일로
지선우를 넘어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섣부르게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세대 실종자?”
“그렇습니다. 이반 님.”
붉은 머리의 남자가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깜박였다. 그의 이름은 이반, 러시
아의 신예 중에서는 첫 번째로 손꼽히는 강력한 각성자였다.
화염의 이반.
“아버지는 어쩌시겠다고 하는데?”
“표드로 님은 당분간은 지켜보신다고 합니다.”
그는 타국의 신예와는 달리 아직 길드장의 자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성격이 게
으르기도 했거니와, 그보다 더한 강자인 아버지가 길드장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나도 지켜보지, 뭐.”
그렇게 결정하긴 했지만, 조금은 흥미가 생긴다.
“1
사라진 지 10년이 지난 각성자라.’
얼마나 강할까. 게으르단 소리를 듣는 이반이었지만, 그래도 그의 속성은 불이었
다. 내부에는 깊이 타오르는 불꽃을 지니고 있기에, 호승심이 강한 편이었다. 그런
그도 1세대 각성자에 대해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일본의 준
이치나, 러시아의 이반뿐만이 아니었다.
‘
높은 빌딩. 창가 가까이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깔끔하게 넘긴 금발에 보기 드문 외
모를 가진 그는 실전으로 다져진 단단한 근육을 정장 아래 감추고 있었다.
“1세대 실종자라고.”
“네. 이번에 헌터관리국에서 찾아낸 모양입니다.”
“지금도 거기 있나?”
“그건 아닙니다. 찾은 건 헌터관리국이 맞지만, 선현 길드에 빼앗긴 모양입니다.”
“흐음.”
흥미가 돋았다. 2세대 실종은 전 세계에서 발생했지만, 1세대 실종은 한국의 한
지역에서만 이루어졌다. 이후 2세대 실종자들이 돌아올 때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길래, 다들 포기했는데. 설마 10년이 지나서 되돌아올 줄이야.
“선현 길드라. 거긴 좀 위험한데.”
“하지만 그래 봤자 조그만 나라의 길드 아닙니까.”
“길드장이 S급 각성자이지 않나.”
“그래 봤자 1명입니다. 아무리 강하더라도 1명이 여럿은 못 이기지요. 저희 가디
언 길드에는 S급만 3명이 있지 않습니까? 레온 님도 계시고요.”
그래, 그렇지. 그래도 일단은 온건하게 접촉해 볼까? 알렉. 한국에도 지부가 하나
있지?”
크지는 않았지만, 유독 포털이 잘 열리는 나라가 한국이었다. 그 때문에 한국과 우
호 관계를 지닌 미국은 돕는다는 핑계로 자국 길드의 지부 몇 개를 집어넣어 두었
다. 가디언 길드도 그중 하나였다.
“네.”
“그쪽에 말해 놔.”
“네, 일러두겠습니다.”
바야흐로 세계가 움직이고 있었다.
“
*
으으, 좋다.”
보드라운 잠옷을 걸치고, 양손에는 율무차가 담긴 머그컵을 꼭 쥔 현우는 그 상태
로 커다란 TV를 보고 있었다. TV에서는 10년간 보지 못했던 영화가 흘러나오고,
바닥의 러그 위에서는 케로가 뒹굴며 자고 있었다.
평화로운 오후였다.
간만에 보는 화려한 화면의 영화도 제법 마음에 들었고. 현우는 율무차를 홀짝이
다가 작게 하품을 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문 입구 쪽에 서 있는 도진을 바라보
았다.
처음에 선우는 도진을 안에 들이지 않으려고 했지만, 현우가 반대했다.
“
그래도 도와주겠다는 사람인데 문밖에 세워 놓는 건 좀 그렇잖아?”
“형, S급 각성자는 튼튼해서 며칠 내내 서 있어도 멀쩡해.”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현우는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안쪽에 있으시라고 해.”
선우는 불만이 많은 듯했지만, 결국 현우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 과정에서 더 많은
타협의 과정이 있었지만, 늘어놓기엔 너무 길어서 생략하겠다. 하여간 그렇게 도
진은 내부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도진은 현관 앞에 저렇게 서서 현
우를 지켰다.
“
20.
“
굳이 거기 서 있지 않아도 되는데요. 이쪽에 와서 앉아요.”
“저는 괜찮습니다.”
도진은 단호하게 말하며 그 자리를 지키고 섰다. 이럴 때는 비장의 수단이 있지.
“계속 거기 서 있으면 제가 부담스러워요.”
그러면서 눈을 내리깔자, 도진이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커다란 덩치로 그
렇게 움직이는 걸 보니 어쩐지 대형견이 생각난다.
‘까만색 커다란 레트리버.’
다만 사람을 좋아하는 일반적인 레트리버와 다르게, 이 레트리버는 아직 낯을 가
린다. 도진은 현관 안쪽으로 들어오긴 했으나 더 다가오지는 않고 머뭇거렸다.
“더 가까이 와요.”
손짓을 하자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온다. 그 모습이 어쩐지 우습기도 하고, 재밌기
도 하여 현우는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지켜 준다면서요. 너무 떨어져 있어도 힘들지 않을까요?”
그렇게 도진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최후엔 현우가 몸을
기대고 있는 소파 가까이 섰다.
“앉아도 되는데.”
“이렇게 있는 편이 반응이 빠릅니다.”
“힘들잖아요.”
“힘들지 않습니다.”
“보는 내가 힘든데요? 그러니 여기 앉아요.”
현우가 어떻게든 도진을 앉히려고 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가 그어 놓은 선
이 여기까지인 모양이었다.
현우는 머리를 긁적이고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선우는 오랜만에 아래층으로 내려와 길드장의 업무를 다하고 있었다. 밀린 일을
처리하는 손이 빠르다. 순식간에 서류를 다 처리한 그는 몸을 일으켜 회의실로 향
했다.
마음 같아서는 올라가서 형과 같이 있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찮았다. 회의실에
는 미리 연락을 넣어 부른 길드의 수뇌부가 선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길드장님.”
부길드장인 찬영을 선두로, 몇몇 길드원이 선우를 반겼다.
“상황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선우의 말에 찬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좋지는 않습니다. 어떻게든 정보를 막아 보려고 했지만, 이미 전부 퍼진 뒤입니
다.”
“해외 반응은요?”
“아직은 크지 않지만, 알 사람은 거의 다 알고 있다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근원지는 예상대로입니까?”
“네, 헌터관리국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가준을 포함한 다른 상위권 길드가 이런 짓을 벌였을 것 같지는 않
았다. 욕심이 있으니까. 소문이 퍼지면 퍼질수록 그들로서는 원하는 걸 쟁취하기
더 힘들어진다. 그러니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거기에 헌터관리국이 난장을 부린 것이다. 선우의 표정이 매섭게 변했다. 차라리
그를 가지고 수작을 부렸으면 모를까, 형에게 손을 댔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속
이 들끓었다.
‘이제야.’
평온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는데. 헌터관리국 때문에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분
노를 삭이고 있자니, 찬영이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이며 서류를 내밀었다.
“그리고 오늘 헌터관리국에서 공문을 보내왔습니다.”
선우는 누런색의 봉투를 뜯어내고 안의 서류를 꺼내 보았다. 이어 표정이 더 험악
해졌다. 개소리를 길게도 적어 놓았다. 글은 길고 장황했지만, 대충 요약하자면 이
런 내용이었다.
「1세대 실종자를 넘겨라.」
손안에 있던 종이가 구겨졌다. 이어 얼어붙은 종이는 강한 힘에 바스러져 바닥으
로 떨어져 내렸다.
“무시합니다.”
“하지만 마냥 무시하기엔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정보가 국민에게 다 퍼졌습니다.
게다가 1세대 실종자 가족 연합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1세대 실종자가 있는 게 맞
다면 만나고 싶다 합니다.”
이해는 한다. 선우는 가족이 사라진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현우
를 외부에 내보내고 싶진 않았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각성자가 되기까지, 많은 인
연이 생겼다. 그중에는 좋은 인연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인연도 많았다.
그런 이들 앞에 형을 내밀라고? 그 끝이 안 좋을 게 뻔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감추
어 둘 수만도 없다. 뭔가 조치를 취해야 했다.
‘죽일까.’
형을 죽었다고 위장하고, 더 은밀한 곳에 감추면 되지 않을까. 아니, 아니다. 그러
면 형의 남은 인생은? 살아남더라도 내내 숨어 살아야 하는 인생을 형이 반길까?
고민 중인 선우를 보며 찬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현우는 선우의 가족이었다. 그런 사람을 함부로 밖으로 내돌리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선우가 받는 상처도 상처였지만, 선현 길드에도 흠집이 생긴다.
“저는 현우 님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보호를 택했다. 그건 다른 이들도 같은 의견이었다. 나머지는 어떻게든
감수할 수 있으리라. 그리 생각하며 의견을 제시했다. 그런 찬영을 힐끔 바라본 선
우가 물었다.
“보호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보다 부길드장.”
“네?”
“방송에 우리가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어느 정도 됩니까?”
“크지요?”
아, 바보같이 대답했다.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거기에 요람 길드의 영향력까지 더하면?”
“더할 수만 있다면 최고지요. 요람 길드의 길드장은 거대 언론사의 핏줄 아닙니
까.”
“그렇지요. 좋습니다. 요람 길드에 연락하십시오. 최대한 빨리 만나 보고 싶다고.”
이어 선우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말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수뇌부들은 전
부 그 계획에 찬성했다. 상대가 언론 플레이로 나왔다면, 이쪽도 그렇게 나가면 그
만이다.
다들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현 길드에서 연락이 왔어.”
자윤의 말에 아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다가왔다.
“뭐래?”
“만나자는데?”
“흐음, 하긴. 언론 플레이를 하려면 우리가 돕는 쪽이 빠르겠지.”
“언론 플레이?”
“지선우는 형이란 사람을 보호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며? 그럼 방법은 두 가지뿐
인데. 형을 더 깊이 감추거나, 아니면 아예 드러내거나.”
아윤이 펼친 손가락을 접어 보였다.
“하지만 더 깊이 감추는 건 지금으로서는 하책이니까, 나라면 아예 내보일 거야.”
“위험하지 않나?”
“어느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지. 잘만 내보이면 적어도 대낮에 사람 많은 곳에서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될 텐데. 평소에 지선우 이미지가 워낙 좋았잖아? 사실
성격이 개차반이긴 해도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는 잘 지키는 편이고.”
지선우가 난폭하게 구는 건 같은 각성자들 한정이었다. 아윤은 그 점을 콕 찍어 말
했다.
“그럼 우리가 돕는 게 낫나?”
“돕는 게 낫지. 다만 우리도 공짜로 도울 수는 없으니 뭔가 얻어 가는 게 있어야겠
지? 내가 지선우라면 돈이나 아이템으로 때우려 하겠지만, 우리가 요구해야 하는
건 그게 아냐.”
“
세대와의 만남.”
“맞아! 와, 나 1세대는 처음이야. 만날 생각 하니 두근거리는걸?”
“쉽게 만나게 해 줄까?”
“그걸 조율해 봐야지. 나한테 맡겨!”
아윤이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1
요람 길드와 선현 길드의 만남은 쉽게 이루어졌다. 요람 길드로 찾아온 지선우를
앞두고 아윤은 몸을 긴장시켰다. 이제 원하는 걸 받아내야 한다. 그 길이 쉽지는
않겠지만, 최선을 다할 것이다.
탕!
아윤은 책상을 두 손으로 내려치며 말했다.
“저희 길드가 원하는 것은 1세대와의 만남입니다!”
절대 양보하지 않으리라! 눈을 부릅뜨고 말하자, 지선우가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어떻게 말해도 절대 물러나지… 네?”
“좋다고 했습니다.”
이걸 이렇게 쉽게 허락한다고? 아윤은 미심쩍은 눈으로 지선우를 바라보았다.
“대신 횟수는 3회로 제한합니다.”
회
“2회.”
“9회!”
“1회.”
“흐응, 이렇게 나오시면 그쪽만 손해일 텐데요?”
“언론사가 한 군데만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거대 언론사를 섭외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요?”
“방법이야 많지요.”
으으, 저 생긴 것만 잘생긴 얼굴. 반드르르한 낯짝을 보며 아윤은 이를 갈았다. 그
런 아윤을 선우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두 분 다 너무 흥분하지 마십시오. 적절한 정도를 같이 정해 봅시다.”
그런 둘을 자윤이 중재했다. 아윤은 머리가 좋은데 가끔 급발진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언제나 그녀의 오빠인 자윤이 나서곤 했다.
“좋아요. 그러면 양보해서 5회.”
“제가 처음 말한 횟수도 많이 양보한 횟수입니다.”
지선우는 조금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원래 이 정도 횟수일 거라고는 생각했어.’
하지만 조금도 넘어가 주지 않는 모습이 얄밉다.
“10 !”
그럼 대면 시간은요? 설마 10분 보여 주고 다시 감출 생각은 아니겠지요?”
“설마요. 20분 드리겠습니다.”
“20분 동안 뭘 해요! 1시간은 줘야지요.”
이런저런 사정으로 조율하는 데 제법 시간이 들었다. 그래도 결국엔 적절한 선을
찾을 수 있었다. 최소한 아윤이 생각했던 최저기준에는 도달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우리가 손해 보는 것 같아.”
“그럴 리가요. 제 쪽이 손해입니다.”
형 얼굴 몇 번 보여 주는 걸로 생색내긴. 아윤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럼 다음 단계를 진행하죠.”
“좋습니다.”
“먼저 시작할 건 이미지 확립하기예요.”
아윤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종이봉투를 건넸다.
“안에 든 거 다 제대로 작성해서 오세요.”
안에 든 건 별다른 게 아니었다. 흔히 연예인들이 처음에 작성하곤 하는, 프로필
시트였다. 이것이 앞으로 벌일 일에 중요한 시작이 될 것이다.
“제대로 스타를 만들어 보죠.”
아윤의 명랑한 목소리 아래 요람 길드와 선현 길드가 손을 잡은 프로젝트가 시작
되었다.
“
21.
거처로 돌아온 선우는 낯선 광경에 눈을 깜박였다. 분명 현관에 세워 두었던 도진
이 거실로 들어와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둘은 같이 게임을 하고 있었다.
“성공!”
현우가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나무 탑에서 나무토막을 빼내자 이어 도진이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신중하게 중간에 끼워진 나무토막을 손으로 밀기 시작했다. 대
체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모르겠다.
“형.”
“어, 선우 왔네!”
현우가 손을 흔들었다. 선우는 그런 현우에게 다가가며 둘 사이에 놓인 젠가를 노
려보았다. 형이 심심할까 봐 여러 가지 게임을 갖춰 놓긴 했지만, 그걸 도진과 둘
이 하고 있을 줄이야.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처음은 자신과 같이 하면 좋았을
텐데.
“게임하고 있었어?”
“응. 생각보다 재밌더라.”
“재밌었다니 다행이네.”
그 사이 도진이 건드리던 나무 탑이 무너졌다. S급 각성자가 그 정도도 못 할 리
없으니 아마 고의로 무너트린 것일 터였다.
“졌습니다.”
“또요? 젠가에 약한가 보네요.”
그럴 리가 있나. 그래도 형이 웃는 모습을 보니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다. 선우는
형의 옆에 앉으며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뭐야?”
“프로필 시트.”
“그게 뭔데?”
되묻는 현우에게 선우는 사정을 천천히 설명했다. 지금 밖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
들, 그로 인해 벌어지는 사람들의 움직임. 그 모든 걸 해결하기 위해 자신이 선택
한 방법을 말이다.
“미안해.”
설명을 마친 선우는 사과의 말을 내뱉었다. 진심으로 형을 볼 낯이 없었다. 어떻게
든 지켜 주겠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형을 힘들게 만들고 말았다. 자신이 좀 더
강했더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자책하는 선우를 보며 현
우가 말했다.
“사과는 그만해. 네가 원해서 벌어진 일도 아니잖아?”
현우도 어느 정도는 이런 상황을 예상했다. 그렇기에 선우가 최선을 다한 것도 알
고 있었다.
“그래도.”
“다시 한번 사과하면 화낼 거야.”
현우가 단호하게 말하니 선우가 눈을 글썽거렸다. 그런 형제를 바라보며 도진은
절로 떠오르는 씁쓸함을 감추었다. 의좋은 형제를 볼 때마다 예원이 생각났기 때
문이었다.
울지 마. 아직 어리다니까.”
현우는 붉은 기가 감도는 선우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그러리고는 손에 든
서류 봉투를 열어 보았다.
‘프로필 시트라.’
이름, 나이, 성별, 생일, 취미, 특기 등등. 하나씩 비어 있는 빈칸을 채워 나갔다. 하
지만 뒤로 갈수록 조금씩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취미?”
내가 취미가 있었던가? 현우는 가만히 머리를 굴려보았다. 마계에 가기 전에는 너
무 바쁘고 힘들어서, 마계에서는 살아남기도 바빠서 취미를 가지지 못했다. 심심
할 때 몬스터를 때려잡거나, 마족과 싸우긴 했지만 그게 취미가 될 수는 없겠지.
아마 여기서 요구하는 취미는 좀 더 평범한 것일 터였다. 현우는 손에 든 볼펜으로
머리를 긁었다. 아무리 해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생각나는 게 없어?”
“그러네. 넌 취미가 뭐야?”
“나?”
“참고해 보게.”
현우의 말에 선우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현우 못지않게 치열하게 살아 온 선우
였다. 평범하게 취미생활을 구가할 시간은 없었다. 그래도 굳이 말해 보라면 하나
있긴 했지만, 그걸 취미라고 해도 좋을까?
형의 옛날 흔적을 더듬는 것인데 말이다. 예전에 같이 살던 집을 사들여 주변을 그
대로 유지하고, 가끔씩 가서 자고 온다거나. 하는 것들.
“
독서.”
그래서 선우는 가장 평범한 취미를 말해 보았다.
“독서? 무슨 책을 보는데?”
“그냥 이런저런 책?”
선우의 답을 들은 현우는 이번엔 도진에게 물었다.
“도진 씨는 취미가 뭐예요?”
그러자 쓰러진 젠가를 정리하던 도진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취미 말입니까?”
“네.”
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딱히 없는 것 같습니다.”
현우, 선우와 마찬가지로 도진도 취미생활을 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동생을 찾기
위해 미친 듯이 앞만 보고 달려왔으니 말이다.
주변의 사람에게 물어봐도 딱히 괜찮은 답이 돌아오지 않으니, 빈칸에 뭘 써넣어
야 하는지도 고민이 됐다. 현우는 손가락으로 볼펜을 휙휙 돌리며 생각해 보았지
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생각나는 게 없다면 같이 해 볼까?”
그런 현우에게 선우가 제의했다.
“
취미생활을?”
“같이 해 보다 보면 마음에 드는 걸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좋은 생각이네.”
“그럼 나갈까?”
선우는 현우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러나려 했지
만, 현우가 그런 그를 잡았다.
“여럿이서 하면 더 쉽게 생각날지도 모르니까요.”
그 말에 도진은 얌전히 합류했다.
“
먼저 독서를 해 보기로 했다. 다행히 선현 길드의 본거지인 빌딩에는 도서관이 존
재하고 있었다. 전부 직원복지를 위한 시설이었다. 실제 이용하는 사람은 적었지
만.
“도서관 크네?”
전용 사서도 존재했다. 일단 셋은 흩어져서 읽고 싶은 책을 찾아오기로 했다. 현우
는 잠시 망설이다가 가장 가까운 책장으로 다가갔다. 대충 책 하나를 골라잡고 돌
아오자, 선우와 도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책이야?”
“이거.”
『몬스터 대백과』
“너는?”
현우의 말에 선우가 책을 내보였다.
『추리의 역사』
그다음엔 둘의 시선이 자연 도진에게로 향했다.
『네덜란드 동화 모음집』
무슨 기준으로 책을 고른 건지 모르겠다. 셋 다 보이는 대로 집어 온 모양이었다.
그래도 일단은 한번 읽어 보기로 하고 도서관 한편에 자리 잡았다. 일반적인 도서
관은 아니라 그런지 편하게 앉을 수 있는 소파에 쿠션과 담요도 있었다.
선우가 자연스럽게 소파에 쿠션을 놓아 주자, 현우가 거기 앉았다. 그리고 그 위에
도진이 담요를 덮어 주었다.
그런 후 셋은 독서 시간을 가졌다.
‘몬스터 대백과라.’
지금까지 발견된 몬스터들이 등급에 따라 분류되어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현우
도 아는 몬스터들이었다.
‘아, 얘는 때릴 때 손맛이 좋았지. 그리고 이 녀석은 속도가 빨라서 가끔 타고 놀기
괜찮았고.’
지나간 기억이 떠올랐다. 대부분 폭력으로 점철된 기억은 금방 질렸다. 현우는 책
을 넘기다가 슬쩍 동생을 바라보았다.
선우의 책은 현우의 것보다 더했다. 삽화라고는 일절 없고 빽빽한 글씨가 종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자연 흥미가 떨어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도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동화책이라 그런지 표지부터 알록달록했다. 옆에서 훔쳐보다 보니 제법 재밌기도
했다. 현우의 고개가 점점 도진에게로 기울었다.
도진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눈치챘다. 그냥 집어 들었으니 읽고 있긴 했지만,
딱히 흥미는 없었기에 책을 현우에게로 기울여 주었다. 그러자 기울던 현우의 자
세가 좀 더 편해졌다.
팔랑팔랑.
고요 속에서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만이 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책을 바꿔 왔는데, 이번에는 방금 전과 다르게 표지
가 화려했다.
도진과 같은 동화책이었다. 그러나 현우는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선우의 미간이
좁아지며 종이 넘기는 소리가 더 커졌다. 그제야 현우가 고개를 들어 선우를 바라
보았다.
“아까 책은 벌써 다 읽었어?”
“응.”
“이건 무슨 책이야?”
『독일 동화 모음집』
“재밌겠네?”
“형도 같이 볼래?”
선우는 언제 인상을 구겼냐는 듯이 배시시 웃으며 물어왔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도진과 현우 사이에 끼어들어 앉았다.
그렇게 조용하다면 조용할 독서 시간이 지나갔다.
으아아!”
도서관을 빠져나온 현우는 길게 기지개를 켰다. 동화책은 나름 재밌긴 했지만, 계
속하고 싶은 취미는 아니었다. 선우도 그 사실을 눈치챈 듯했다.
“그럼 다음엔 다른 걸 해 볼까?”
“뭐 하지?”
셋은 잠시 우두커니 서 있다가 인터넷으로 취미를 검색해 보았다.
“게임.”
“그건 패스.”
지금도 가끔 게임을 하고 있지만, 취미라고 하기엔 미묘했다.
“영화감상.”
“그것도 패스.”
“요리?”
“그건 해 본 적 없네. 해 볼까?”
“
셋은 다시 꼭대기 층의 거처로 돌아왔다. 선우는 익숙한 듯 앞치마를 두르고, 현우
에게도 입혀 주었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요리 재료를 턱턱 꺼냈다. 거기에 칼까지
집어 드는 모습이 무척 익숙해 보인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매번 차를 끓여 주기도 했었지.
“요리 잘해?”
기본적인 것밖에 못 해.”
“어떤 거?”
“가벼운 밑반찬이랑 밥 정도? 형은?”
“나도 그 정도.”
부모님이 없는 집에서 어린 선우에게 요리를 맡길 수는 없었으니, 밥을 하는 건 언
제나 현우였다. 그랬는데 이제 선우도 요리를 하겠다고 나서는 걸 보니 감개무량
했다. 정말 많이 컸구나. 감동에 젖어 있다가 도진에게도 물어보았다.
“도진씨도 요리 잘해요?”
“예원이는 잘한다고 했습니다.”
그랬었지. 마계에서 맛없는 몬스터의 시체를 뜯을 때면 예원은 불평을 늘어놓곤
했다.
‘우리 오빠가 얼마나 요리를 잘하는데. 여기서 이런 맛없는 걸 먹어야 한다니!’
그렇게 말했으니 정말 요리를 잘하는 모양이었다.
셋은 각자 역할을 나눠 요리를 시작했다. 선우가 밥과 국을 하고, 현우가 가벼운
밑반찬을, 도진이 메인을 맡았다. 재료는 충분했고 부엌도 넓었기에 셋은 움직이
며 열심히 요리를 했다.
불고기에 잡채, 계란말이에 시금치나물, 콩나물무침, 멸치볶음, 소고기뭇국에 밥
이 놓였다.
“도진 씨는 정말 요리를 잘하네요.”
“
도진의 요리를 먹어 본 현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했다. 반면 현우가 만든 요
리는 맛이 애매했다.
22.
요리가 맛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딱히 맛있지도 않은 묘한 맛.
‘그러고 보니 제대로 요리를 한 지도 오래됐지.’
어렸을 때도 딱히 잘하는 건 아니었고. 새삼 이런 걸 잘 먹어 준 동생에게 미안함
이 느껴졌다.
“내 건?”
“네 거도 맛있어.”
도진만큼은 아니었으나, 선우도 제법 손재주가 좋았다. 덕분에 점심은 잘 먹었지
만, 이것도 취미에 넣고 싶지는 않았다. 손이 너무 많이 갔기 때문이었다.
‘남이 해 주는 요리가 최고다.’
현우는 새로 깨달은 진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도 많은 것을 시도해 보았다.
가벼운 스포츠부터 예술적 취미까지. 하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건 없었다.
현우는 그 모든 걸 끝내고 평소 자주 누워 있는 소파로 다가가 드러누웠다. 거기
누워 담요를 덮고 케로를 끌어안으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이제 알 것 같다. 내 취미는 낮잠 자기야.”
“좋은 취미네.”
“하지만 그대로 적으면 안 되겠지?”
“안 될 건 뭐람. 조금 서사를 부여하면 될 것 같아.”
서사?”
“응, 이건 내가 알아서 할게.”
선우가 알아서 한다니 믿음이 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럼 하루 종일 움직인 건
뭐였을까? 싶기도 했다.
‘뭐, 그래도 선우가 좋아했으니까.’
가끔은 동생과 함께 움직이는 것도 좋지. 현우는 배시시 웃으며 몸을 쭉 폈다. 점
차 졸음이 몰려왔다. 여느 때와 같은 평온한 밤이었다. 물론 평온함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으니까.
“
이른 아침, 현우는 의자에 앉은 채 반쯤 졸고 있었다. 지나치게 일찍 일어난 탓이
었다.
“더 잘래?”
“아니, 괜찮아. 약속 있다며.”
“늦추면 돼.”
당당하게 대답하는 선우에게 현우는 손을 휘저었다.
“안 돼. 약속 시간은 지켜야지.”
“역시 형이야.”
선우는 그런 현우를 치켜세우며 자연스럽게 등에 담요를 둘러 주었다. 안 그래도
졸린 데 담요까지 더해지니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문이 열리며 활발
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요람 길드의 아윤이라고 합니다!”
머리를 하나로 묶어 올린 여성, 아윤은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보기에
는 선우랑 비슷한 듯했다.
“어디 보자. 이쪽은 아는 사람이고, 이쪽도 낯이 익으니 남은 사람은 하나뿐이네
요. 반가워요. 1세대는 처음 보네요!”
아윤이 가까이 다가오려는 걸 선우가 중간에 막아섰다.
“저는 비각성자인데도 경계하는 건가요?”
투덜거리자 선우가 말을 받았다.
“요람 길드의 길드장이 여동생을 아껴서 여러 가지 아이템을 건네준 건 유명한 이
야기입니다.”
“그래도 누군가를 납치할 만한 아이템은 없답니다. 이미 입구에서 확인해 놓고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않습니까?”
“당신답네요.”
아윤은 불퉁한 표정을 짓고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러고는 들고 있던 작은
가방에서 태블릿 하나를 꺼냈다.
“그럼 오늘 일정을 말씀드릴게요. 일단은요.”
숍에 간다. 물론 일반적인 숍은 아니다. 유명 연예인이나 재벌 집 안주인이 다니는
숍 중에서도 가장 좋은 곳으로, 아무나 받아 주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저희가 누군가요. 국내 상위 길드의 일원. 예약은 어렵지 않았답니다. 제
어머니가 자주 다니는 숍이기도 하고요. S급 각성자야 저절로 피부가 좋아진다지
“
만, 저희는 아니니까요. 관리가 필요하답니다. 풀코스로 부탁드려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어 숍의 원장이 직원 하나와 함께 현우에게 달라붙었다.
“어머, 피부가 너무 좋으신데요?”
원장은 감탄하며 현우의 얼굴을 마사지했다.
“크게 손대지 않아도 되겠어요.”
얼굴을 비롯한 전신을 마사지하고, 깔끔하게 정리한 뒤 메이크업까지 했다. 메이
크업 부분에선 현우가 반항을 했지만, 아윤이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살짝 할 거예요. 살짝. 한 듯 안 한 듯 그런 느낌으로요. 너무 해도 효과가 없으니
까요.”
“굳이 해야 하나요?”
“자고로 예쁜 것에 약한 게 사람이지요.”
“예쁘지는 않은데.”
현우가 투덜거렸지만, 아윤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러리고는 태블릿을 톡톡 두드
리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건 진짜 물건인데.’
그 지선우의 형이라고 해서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나 싶었는데, 아니다. 키가 좀 더
작고, 호리호리하며 순하게 생겼다. 화장을 위해 눈꺼풀을 살짝 내리까니 청순해
보이기까지 한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계획에는 딱 적합한 외모였다.
아직 성격은 어떤지 몰라도 하는 걸 보니 딱히 모난 것 같지도 않고. 가만히 세워
만 놔도 방송에서 좋은 반응을 얻을 것 같았다.
‘연기는 좀 못해도 돼.’
그쪽은 지선우가 잘하니까. 대충 그에게 묻어만 가도 된다.
‘먼저 다큐멘터리에 모습을 비추고, 그다음에는 손님을 불러서 대담하는 디너쇼
방송. 어느 정도 이목을 모은 후에는 외부 활동을 시작한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1세대 실종자 가족 연합을 만나는 것. 물론 혼자 보낼 생각
은 없었다. 안전을 지켜 줄 사람 몇은 붙여야 했다.
이런 식으로 차근차근 진행하면서 선현 길드가 그를 데리고 있는 게 당연한 일이
되도록 만들어야 했다.
‘으으, 말 걸고 싶다.’
아윤은 괜스레 태블릿을 만지작거리며 현우를 바라보았다.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
다. 하지만 일하는 중에는 묻지 않기로 약속했으니 물을 수 없었다. 물었다가는 저
꼬장꼬장한 지선우가 계약을 파기하겠지. 자윤과 아윤이 거대 언론사의 자식은 맞
지만, 다른 방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니까. 지금은 몸을 사리는 게 맞았다.
“어때요?”
모든 과정을 끝마친 현우가 바로 앞에 섰다.
“멋져요! 역시 원장님이시네요.”
관리하기 전에도 미인이었는데, 하고 나니 더 빛이 난다. 이어 아윤이 불러온 코디
네이터가 옷을 새로 입혀 주었다. 폭신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톤다운된 핑크색 앙
고라 상의에 적당한 바지를 입혀 놓으니 정말 무해한 사람으로 보인다.
살 된 사람으로 보이지 않네.’
어쩌면 군대를 가지 않아서 그런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갈 일은 없겠지. 앞에 세대
가 붙는 실종자, 각성자는 군대 면제니까. 서로 경계하는 길드가 그때 최초로 손을
잡았었다.
각성자가 강제로 차출되면, 나라에서는 어떻게든 놓아주지 않으려고 발악할 테니
까. 게다가 환경이 열악하기도 하고.
‘그놈의 망할 군비리.’
이건 이쯤 생각하자. 아윤은 군대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리고 관리
가 끝난 현우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관리가 끝난 현우를
내보이자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선우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건 도진도 마찬가지
였다.
“내가 말했죠? 여기가 잘한다고.”
“……정말 잘하긴 하는군요.”
아윤은 어깨를 으쓱했다.
‘25
*
이어 넷은 차를 타고 장소를 이동했다. 목적지는 외진 곳에 있는 달동네였다. 아
니, 정확히는 달동네였던 곳이겠지.
들어서는 입구에는 경고판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사유지입니다.」
그 앞에는 미리 섭외한 이들이 와 있었다. 과거 지선우의 다큐멘터리를 찍었던 제
작사 팀이었다. 다큐멘터리 쪽으로는 아윤도 인정하는 최고였다.
“일찍 오셨네요.”
“시간에 맞춰 왔을 뿐입니다.”
감독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잘 부탁드려야지요.”
이걸 찍기로 한 뒤로 받은 돈이 어마어마하다. 뿐이랴. 최초로 1세대에 대해 찍는
것이다. 여파 또한 굉장할 것이다. 감독으로서도 반드시 잘 찍어야 하는 일인 것이
다.
그나저나 이 넓은 땅이 사유지라니. 대단하다. 감독은 휘파람을 불고 싶은 걸 간신
히 눌러 참았다. 저쪽에서는 작가가 미리 작성해 온 대본을 형제들에게 보여 주고
있었다.
너무 과장되거나 가식적이지 않게, 그러면서도 사람의 가슴을 자극할 수 있는 그
런 느낌으로 적느라 작가도 고생했다.
“그럼 대본 숙지 후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감독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외쳤다.
방송 시작 전, 현우는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본을 숙지할 때는 몰랐
는데, 지금 보니 너무나도 익숙한 장소였다.
여기는.”
11년 전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남은 돈으로 간신히 구한 달동네의 작은 월세방. 선
우와 함께 1년 동안 둘이서만 살았던 그 집이 있는 동네였다.
가슴이 지끈거렸다. 이 감정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현우는 천천히 길을 따라 움
직이기 시작했다.
“어? 어! 빨리 카메라!”
그걸 본 감독이 뒤에서 빠르게 카메라를 찾았지만, 현우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
저 과거의 추억만이 선명하게 떠오를 뿐이었다.
높은 비탈길을 오르다 보면 끝부분에 작은 집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낡은 녹색
의 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그때 그 모습 그대로의 집이 보였다.
현우는 조심스럽게 걸어서 그들이 머물렀던 방으로 향했다. 나무 문은 많이 낡았
지만,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드나든 흔적이었다.
문을 열자 오랜 기억 속의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관리된 문처럼 안도 깔끔하게 치
워져 있었다. 그렇지만, 오래된 물건 특유의 느낌은 지우지 못한 모양이었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낮은 앉은뱅이책상부터 수저통에 꽂힌 숟가락 하나
까지 전부 기억을 자극했다.
“형.”
이 모든 것이 그냥 남아 있을 리는 없었으니, 누군가가 손을 쓴 것일 터였다. 그리
고 그런 사람이 있다면 선우뿐이겠지. 현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이제 다
커 버린 선우가 서 있었다.
“
23.
손꼽히는 S급 각성자. 그걸 머리로는 아는데 가슴이 이해하지 못한다. 현우에게
선우는 아직 어리고 사랑스러운 동생일 뿐이었다.
고작 11살이던 아이를 10년 동안 방치했는데, 바르고 꿋꿋하게 잘 자랐다. 그게
기쁘면서도 죄책감이 되어 마음을 두드린다.
현우의 눈가가 붉어지면서 눈동자에 물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내 하고
싶었던 말을 이제야 꺼냈다.
“다녀왔어.”
그 말에 선우가 눈을 둥글게 휘며 웃었다.
“어서 와, 형.”
오래전에 같이 살았던 집에서 형제는 다시 재회의 인사를 나누었다.
“이제 다시는 사라지지 마.”
“응, 사라지지 않을게.”
“약속.”
현우는 선우가 내미는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었다. 어린 선우를 두고
자리를 비울 때마다 했던 약속을 다시 했다. 그러면서 다짐했다. 이제는 요정이 아
니라 그보다 더한 존재가 오더라도, 선우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완벽해!”
감독은 황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미리 대본을 준비했는데, 필요 없는 일이었
다. 이리도 날것 그대로의 모습이 펼쳐지는데, 여기에 대본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
가.
“
땀 빼면서 필사적으로 따라 올라온 보람이 있었다.
‘화면이 너무 좋다.’
지선우는 보기 드문 미남이다. 거기에 형도 타입은 다르지만, 잘생겼다. 그런 둘이
함께 어우러지니 어찌 좋지 않으랴.
감독은 자연스럽게 방을 둘러보고, 마당으로 나온 둘을 따라 움직였다. 이후로도
촬영은 수월하게 이어졌다. 편집까지 해 봐야 알겠지만, 대단한 물건이 탄생할 것
같았다.
촬영은 늦은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끝났다. 예전에 살았던 동네에서 찍고, 선현 길
드로 갔다가 주변을 잠시 돌았다. 선우나 현우나 긴장하는 성격은 아니라서 딱히
힘든 점은 없었다.
“편집본은 언제쯤 나와요?”
아윤이 감독에게 물었다.
“밤새우면 다음 주까진 어떻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완성되자마자 확인부터 할게요.”
방송 날짜는 이미 잡아놓았다. HBC 방송의 황금시간대로 말이다. 원래 그 시간에
는 『인간 시대』라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되는데, 제법 인기 있는 프로였다. 그 프
로에 이걸 밀어 넣을 생각이었다.
물론 홍보도 철저하게 할 생각이었다. 아윤은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며 조곤조곤
대화 중인 선우를 바라보았다. 자윤과 아윤도 사이가 좋은 남매였지만, 저들은 더
한 듯했다.
‘여차하면 안고 다니겠네.’
이어 시선이 그 옆을 향했다. 선우야 자기 형이니 그렇다 치지만, 도진도 만만치
않았다. 다 자란 성인 남성을 마치 어화둥둥 대하고 있었다. 저녁이 되니 추울까
봐 담요를 덮어 주고, 어디선가 구해 온 뜨거운 음료를 쥐여 준다.
‘둘이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
하는 것만 봐서는 소중한 사람을 대하는 것 같았다. 선우나 현우에게 직접 물어보
기는 좀 그렇지만, 도진은 다르다. 아윤은 슬쩍 도진의 옆에 달라붙었다.
“안녕하세요?”
아까는 제대로 인사를 하지 못했기에, 인사부터 다시 했다. 그러자 도진이 무심한
얼굴로 아윤을 내려다보았다.
“저희 오랜만에 보죠?”
“네.”
“오늘 날씨도 좋고 촬영하기엔 딱이었던 것 같아요.”
“네.”
다른 사람이라면 물러날 정도로 싸늘한 단답이었으나, 상대가 누구인가. 아윤이
아니던가.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런데 현우 씨와는 어떻게 친해졌어요? 나도 친해지고 싶은데. 비결이 있나요?”
“……친해 보입니까?”
도진이 되물어왔다. 그 정도면 충분히 친한 거지! 누가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그
렇게 행동한단 말인가.
“네, 친해 보여요.”
도진이 시선을 돌려 현우를 바라보았다. 바라보는 눈에 어린 것은 아윤으로서는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나름 눈치는 빠르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한참 만에 부정의 답변이 나왔다.
“그럼요?”
“그저 죄를 갚는 중입니다.”
죄는 무슨 죄람. 그렇게 치면 아윤도 현우에게 죄를 갚아야 할 것이다. 그를 납치
하기 위한 계획에 참여했으니 말이다.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것인가. 아
윤은 생글생글 웃으며 태연하게 대화를 이었다.
“그럼 저도 갚아야 할 게 있겠네요. 어떻게 한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윤은 주먹으로 손바닥을 내려쳤다.
“현우 씨에게 물어볼까요? 혹시 원하는 게 있는지?”
“지선우가 반기지 않을 겁니다.”
그 말은 도진이 옆에 붙어 있는 것도 마지못해 허락했다는 뜻이렷다? 어떻게 비벼
볼 틈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윤은 다른 사람을 시켜 근처 가게에서 음료 여러 개
를 사 오라 일렀다.
그런 후, 종이 트레이에 담긴 음료를 들고 현우에게 슬쩍 접근했다.
“이제 가을이 다 되어 가서 그런지 좀 싸늘하네요.”
“그러게요.”
현우는 금방 말을 받아 주었다. 옆의 선우는 노려보고 있었지만, 딱히 제지를 하지
는 않았다. 여기까지는 괜찮다는 것이다.
“음료수를 좀 샀는데 드실래요?”
“이미 마시는 게 있는데.”
“하나 더 마시면 되죠. 어떤 걸 좋아해요? 종류별로 있어요.”
그러자 현우가 호기심이 생긴 듯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 틈에 아윤은 슬쩍 가까운
곳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딸기라떼도 있고요, 핫초코도 있어요. 아니면 자몽에이드는 어때요?”
“자몽에이드요?”
호기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아윤은 트레이에서 자몽에이드를 빼서 현우에게 건네
주었다. 현우는 들고 있던 컵을 선우에게 넘기고, 자몽에이드를 받아들었다. 그리
고 쭉 마셔보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씁쓸하네요.”
그러면서 계속 마신다.
“하지만 달기도 하고.”
“묘한 맛이죠? 그게 자몽에이드의 매력이죠.”
아윤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좋아, 이렇게만 가자. 그러면 며칠 사이에 좀 더 가까
워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도진과 대화해 보길 잘한 것 같았다. 아윤은 슬쩍 웃
으며 다른 음료도 빼 들었다.
*
토도독. 폰을 두드리는 손이 빠르다.
야, 그거 봤어?
뭐?
금요일 저녁에 하는 다큐멘터리 『인간 시
대』. 거기에 지선우가 나온대.
정말? 봐야겠다! S급 각성자의 이야기는 쉽게
보기 어렵지.
그렇지. 그런데 예고편 보니까 뭔가 의미심장
해. 못 보던 사람이 하나 더 나오더라고.
누굴까? 지선우랑 붙어 다니던데.
모르겠어. 호기심만 잔뜩 자극하고 말이야. 궁
금해서 미치겠어.
빨리 금요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먼저 풀려난 예고편은 폭발적인 반응을 가져왔다.
보통 S급 각성자를 하늘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높이 있고 알기 어렵기 때문이었
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최초로 TV의 다큐멘터리에 나온 지선우 때문에 깨졌다.
각성자가 일반인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가는 순간이었다. 그 뒤로 각성자들의
방송 출연 횟수가 늘어났다. 지선우만큼의 열풍을 몰고 오지는 못했지만, 일반인
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엔 충분했다.
각성자를 좋게 생각하는 사람이 늘었으며, 어린이들은 장래 희망을 각성자라고 써
내곤 했다. 그러나 지선우는 한 번의 다큐멘터리 이후엔 방송에 잘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사실에 안타까워했다.
그러던 와중에 『인간 시대』에 지선우가 나온다고 한 것이다. 그것도 정체 모를
다른 사람과 함께! 자연 호기심이 동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마다 다큐멘터리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금요일 빨리 안 오나?”
“아, 너도 『인간 시대』 보려고?”
“봐야지! 무려 지선우인걸. 이제 21살인데 세계에서 손꼽히는 S급 각성자잖아!”
“으으, 빨리 보고 싶다.”
“나도!”
예고편에 대한 반응이 폭발적이니, 『인간 시대』 전후로 들어가는 광고의 값도
하늘 모르게 치솟았다. 그러니 HBC는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아윤도 마찬가지였
다.
“와와, 이것 봐. 오빠!”
아윤이 신난 표정으로 태블릿을 자윤 앞에 들이밀었다.
“반응이 죽여 줘!”
방방 뛰면서 하는 말에 자윤은 여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너라도 좋으니 됐다.”
“왜, 오빠는 안 좋아?”
“반응이 이렇게 좋다는 건, 그만큼 지선우의 인기가 높다는 거잖아.”
“그렇긴 하지.”
그런 면에서는 위기감이 느껴지긴 했다. 아윤은 슬며시 들이밀었던 태블릿을 회수
했다.
“그래도 오빠 인기도 높아.”
“지선우만큼은 아니지.”
“가준 아저씨보단 높을걸.”
“그 사람은 그런 거 생각하고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잖아.”
그도 그렇다.
“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긴 하지.”
“그보다 1세대와의 면담 준비는 잘 되어 가?”
“응. 꼼꼼하게 질문할 걸 정리해 뒀어. 뭐든 대답해 준다고 했으니까, 이 기회를 놓
치면 안 되지.”
좀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하고 싶다. 자윤도, 아윤도 그런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고
작해야 3위 길드에 멈추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철저히 준비하는 것은 당연
했다.
언젠가는 정상으로!”
“정상으로.”
우렁차게 외친 둘은 이내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그리고 시간은 예외 없이 흘렀
다.
“
금요일 밤, 9시.
HBC 다큐멘터리 『인간 시대』.
방송 시작!
『지선우, 영웅을 조명하다.』
시작은 전에 방영되었던 다큐멘터리의 타이틀이었다. 과거 찍었던 다큐멘터리의
내용 일부가 빠르게 지나간다. 그리고 마지막, 무덤 앞에 하얀색 국화를 내려놓는
지선우에게 묻는다.
『만약에 형을 다시 만난다면 가장 먼저 어떤 말을 할 것 같으세요?』
그 말에 서글픈 표정으로 국화를 내려다보던 지선우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형, 어서 와.』
카메라의 앵글이 바뀌고 회색의 묘비를 비췄다. 이어 그 위에 작은 무언가가 툭 떨
어지며, 작은 원형으로 퍼져나갔다.
24.
눈물. 그것은 눈물이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S급 각성자가 보인 최초의
눈물.
이어 다시 바뀐 앵글이 하늘을 비추고 천천히 떨어져 내린다. 그러고는 저 멀리 멀
어져 가는 선우의 뒷모습을 비췄다.
이어 음악이 흘러나오며 새로운 타이틀이 떠올랐다.
『영웅의 가족』
다시 배경이 바뀐다. 이번에는 포근하고 단정한 느낌의 스튜디오였다. 스튜디오
중앙에 놓인 의자에는 평소와는 다르게 편한 옷을 입은 지선우가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보이지 않는 리포터의 인사에 지선우가 마주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첫 번째 다큐멘터리로부터 2년이 지났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그 말에 지선우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글쎄요. 잘 지낸 걸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저에게는 하루하루가 지옥과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선우 씨는 S급 각성자에 모든 걸 가지셨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힘드셨
나요?』
『모든 걸 가졌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단 한 가지, 부족한 게 있었습
니다.』
『그게 무엇인가요?』
이어 화면 한구석에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가족]
[
『형이요.』
『아, 기억납니다. 첫 번째 다큐멘터리에서 나왔었죠. 1세대 실종자라는 형 말입
니다.』
시청률이 가파르게 치솟기 시작했다.
현우는 커다란 쿠션을 끌어안고 흥미진진한 얼굴로 TV를 바라보았다. 바로 옆에
있는 동생이 방송을 타는 걸 보니 신기했다. 그동안은 외부 방송을 거의 차단해 둬
서 보지 못했기 때문에 더 그런 느낌이 들었다.
“대단하다.”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선우를 바라보니 어색한 표정으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
다. 천하의 선우라도 형의 앞에서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처음 방송에 나갈 생각은 어떻게 한 거야?”
“선현 길드의 이미지를 잡는 데 대중매체가 효과적일 거라는 결론이 나왔거든. 그
리고.”
그리고?”
“방송은 어디서나 볼 수 있잖아. 소문도 빨리 퍼지는 편이고. 혹시 형이 지구 어딘
가에 있다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
“윽.”
현우는 끌어안고 있던 쿠션을 놓고 선우에게 다가가 옆에 앉았다. 그러고는 아직
도 다른 곳을 보는 동생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선우는 알아
서 고개를 숙여 높이를 맞춰 주었다.
‘망할 요정.’
더 빨리 올 수 있다면 좋았을걸. 동생이 이렇게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난 세월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그놈의 요정 때문에 동생을 지켜 주지도 못하고, 자라는 모습
도 보지 못했다.
“혹시 어릴 적 사진 있어? 중학생 때나 고등학생 때 찍은 사진.”
졸업앨범을 기대하고 묻자 선우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없는데. 각성 이후엔 학교를 다니지 않아서.”
그 말에 현우는 충격을 받았다.
“그러면 공부는!”
“나중에 검정고시는 봤어. 봐 두면 좋다고 해서.”
“학창 시절의 추억은?”
“딱히 필요하지 않아서?”
“
필요하지 않은 게 어딨어! 현우는 치솟아 오르는 울분을 삼켰다. 만약 옆에 있어
줄 수 있었다면 선우가 제대로 학교를 졸업하도록 도울 수 있었을 텐데. 가장 중요
한 시기에 자신은 이곳에 없었다. 그게 너무나도 속상했다.
아무래도 다음에 요정을 만나면 사지를 찢어 놔야 할 것 같았다.
“난 진짜 괜찮았어.”
선우는 계속 괜찮다고 말했지만, 쉽사리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보다 방송이나 마저 보자. 나 나오는데 안 볼 거야?”
“……봐야지.”
현우는 다시 시선을 TV로 돌렸다.
화면 속의 선우는 담담하게 말을 잇고 있었다.
『네, 저에게는 단 하나뿐인 가족입니다.』
이번에는 아래에서 다른 글씨가 떠올랐다.
성실하고, 다정한]
[
화면은 내내 그렇게 흘러갔다. 지나치게 음울하지 않게, 그렇다고 너무 밝지도 않
게. 하지만 그게 외려 사람들의 가슴을 두드렸다.
『형이 사라졌을 때 나이가 어떻게 되셨나요?』
『11살이었습니다.』
『보호자는요?』
『없었습니다. 제 유일한 보호자는 형이었습니다.』
『그러면 형의 나이는요?』
『15살이었습니다.』
고작해야 중학교 2학년생. 그러나 그 어린 소년은 더 어린 동생을 위해 많은 노력
을 했다. 아침마다 신문 배달을 다녔으며, 어떻게든 돈을 벌려고 애썼다. 그 과정
은 쉽지 않았지만, 동생을 생각하며 무너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으아.”
현우는 쿠션으로 얼굴을 가렸다. 동생의 이야기는 괜찮았는데, 본인의 이야기가
나오니 부끄러워졌다.
“보기 힘들어.”
얼굴을 가린 채 웅얼거리자 선우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왜, 좋은데?”
“너무 추켜세우는 것 같단 말야.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니야. 형은 충분히 노력했어.”
선우의 말에 속이 울렁거렸다.
“정말 내가 충분히 노력했다고 생각해?”
“응.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자랐지.”
“
정말 자신의 동생은 어쩜 이리 기특하고 상냥한 걸까. 현우는 쿠션에 고개를 묻은
채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선우가 그 손을 마주 잡아 주었다.
그래, 예전에도 이랬다. 힘들어서 무너지고 싶을 때마다 선우는 형의 손을 꼭 잡아
주곤 했다. 그러면 다시 힘이 솟아났다.
“마저 보자.”
“응.”
둘은 다시 방송에 집중했다.
『그런 형이 사라졌을 때, 어땠어요?』
선우가 손으로 턱을 부드럽게 쓸더니 입가를 가렸다.
『믿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형이 곁에 있어 줄 거로 생각했으니까요. 그래
서 처음에는 무작정 기다렸습니다.』
차가운 방 안에서 이불을 덮어쓰고 기다렸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도록 형은 돌아
오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 뭔가 큰일이 났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다음엔
밖으로 나서서 형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러도, 불러도 형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보호자가 없는 어린아이, 선우는 오래지 않아 집주인의 신고로 고아원에 가게 되
었다. 가지 않겠다고 버텨 보았지만, 힘없는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포털이 열렸고, 그 근처에 있던 1만의 사람이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끔찍한 사건이었죠.』
『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사건이네요.』
수많은 실종자가 생겼고, 많은 사람이 슬픔에 빠졌다. 그리고 이후, 2세대가 실종
되었다 돌아오면서 각성자의 세계가 열렸다.
『만약에요. 정말 만약에 형이 돌아온다면, 어떤 기분이실 것 같으세요?』
『더없이 기쁠 겁니다.』
마지막 인터뷰로부터 2년]
[
화면이 전환되며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카메라에 모습을 드러낸다. 단정하게 차려
입은 청년은 무척이나 순한 인상이다.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네, 제 이름은 지현우. 현재 25살입니다. 그리고 1세대 실종자이기도 하지요.』
하늘 모르고 치솟았던 시청률이 더 올라갔다.
댓글
- 지금 내가 뭘 본거지?
- 1세대 실종자라고?
- ?????
-
거짓말!
방송의 게시판이 터져나갈 듯 들썩였다. 아니, 터져나가는 건 방송국의 게시
판만이 아니었다. 인터넷에는 관련 정보가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고, 어느 곳이
건 1세대의 이야기로 넘쳐났다.
HBC
댓글
- 이게 가능한 이야기야?
- 주작 아냐?
- 설마, 지선우가 거짓말을 할 리 없어! 게다가 HBC 방송이잖아? 공영방송이라
고?
다들 놀라서 이야기하는 와중에도 방송은 착실하게 송출되었다.
리포터는 여전히 차분한 어조로 질문을 이어나갔다.
『1세대면 10년 전 실종자, 맞지요?』
『맞습니다.』
『그러면 지선우 씨의 형, 맞지요?』
『그도 맞습니다.』
돌아온 형]
[
이어 화면이 다시 전환되고, 이번에는 형제가 나란히 모습을 비췄다.
『처음 형이 돌아온 걸 알았을 때, 기분이 어떠셨어요?』
『기뻤습니다.』
『형은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10년이면 서로 많이 변했을 텐데, 한 번에 알아보셨나요?』
『네, 세월이 얼마나 지나건 형은 형이니까요.』
『대단하시네요.』
리포터는 자극적이거나, 사람들에게 반발을 살 만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저 시
종일관 비슷한 어조로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대담이 끝나자 두
형제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선현 길드 내에 둘이 머무르는 방을 보여 주고, 일상을 살짝 엿본다. 그런 다음에
는 감독이 찍은 회심의 장면을 풀어놓았다.
과거의 집으로 돌아온 형제. 그들은 비탈길을 올라 낡고 작은 집에 도달한다. 그리
고 아직도 그 모습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집을 보며 처음으로 눈물을 내보인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워 보이던지. 사람들은 넋을 잃고 화면에 눈을 고정했다.
그렇게 눈물을 빼는 구간을 지나고 나서는, 낯선 일상에 젖어 드는 형의 모습을 보
여 주었다.
뭐야, 이렇게 변했어?”
어디를 가건 현우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많은 것이
변했다. 게다가 사라지기 전에도 어린 나이였기에 겪어 보지 못한 것이 많아, 모든
것이 신기했다.
그런 형의 곁을 지키고 선 선우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얼핏 보면 형제가 뒤바뀐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
댓글
- 귀엽다!
- 형제가 둘 다 잘생겼네.
- 그런데 그럼 다른 1세대는 어떻게 된 거야?
- 그러게. 그건 궁금하네. 일부러 말 안 한 건가?
- 대놓고 말할 건 아니지 않아?
- 내가 아는 사람이 있는데, 1세대 실종자 유족 연합하고 대담을 하기로 했대.
- 그게 정말이면 다행이고. 그런데 보다가 운 사람 없어? 난 너무 울어서 휴지를
다 썼다.
- 나도. 보다 보니 눈물이 나오더라고. 그렇게 어렸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여기저기서 선우와 현우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아마 한동안은 어디서나
이 이야기로 떠들썩할 것이다.
25.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현우가 볼멘소리로 항의했으나, 이미 방송은 나가고 난 뒤였다.
“잘 만들었네.”
선우는 다 보고 난 뒤에 감상을 말했다. 이미 최종 편집본을 보긴 했지만, 다시 봐
도 완벽했다. 자극적인 이야기는 교묘하게 피해 가면서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했
다.
“그러게.”
일단 이렇게 첫 발자국을 떼었다. 한동안은 계속 방송 출연이 이어질 것이다. 물론
언제까지나 그렇게 지낼 생각은 없었다.
‘적당한 때에 끊어내야 해.’
물론 그 과정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주변에서는 여전히 1세대인 형을 노리고 있
었고, 대중의 관심이 끊어지는 순간 거리낌 없이 나설 것이기 때문이었다.
“
*
다큐멘터리 방송 후 반응은 두 가지로 갈렸다. 긍정적인 반응, 부정적인 반응. 물
론 긍정적인 반응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렇다면 부정적인 반응은 묻어 버리면
된다. 아윤은 그쯤 되어 정보를 풀었다.
‘좋은 일 많이 했네.’
선우는 자신 또는 선현 길드를 내세워 좋은 일을 많이 했다. 대충 조사해서 알고는
있었지만, 파고드니 미담이 쏟아져 나왔다.
일단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재단을 세웠지.’
이 재단은 실종자 가족을 도움과 동시에 어려운 환경에 처한 아이들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렇게 지원을 받고 자란 아이들은 선현 길드를 좋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
다.
연일 선현 길드와 형제의 이야기가 뉴스를 탔다.
“남 좋은 일만 한 건 아닌가, 몰라.”
아윤은 투덜거리며 선현 길드에 들어섰다. 내일은 실종자 가족과의 대담이 있는
날이었다. 그 전에 미리 이야기를 듣고 입을 맞춰 두기 위해 움직였다.
“안녕하세요!”
활발하게 회의실로 들어서자, 그 안에 있던 이들이 아윤을 돌아보았다.
지선우, 지현우, 한도진, 서찬영.
‘화려한 구성이네.’
물론 아윤도 어디 가서 밀릴 사람은 아니었지만.
“자, 먼저 이거 받으세요.”
아윤은 도착하자마자 종이뭉치를 하나씩 나눠 주었다.
“예상 질문 리스트예요. 참고로 이건 미리 약속한 만남 횟수에 포함되는 거 아닙니
다? 필요해서 적은 질문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먼저 질문을 훑어봐 주세요.”
‘
「더 살아남은 다른 사람이 있나요?」
「그곳의 환경은 어땠나요? 힘이 없는 것 같은데 거기서 어떻게 살아남으신 건가
요?」
「기억나는 사람이 있으신가요?」
그런 질문들이 지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자연 질문을 바라보는 선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굳이 이런 걸 물어야 합니까?”
“상대는 실종자 가족이라고요. 가족이 사라졌다고 생각해 보세요. 더한 것도 물어
볼걸요.”
선우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형은 소중한 존
재였으니까.
“어쩔 수 없다니까요. 자, 그럼 시작해 보죠!”
질문자는 아윤이었다.
“더 살아남은 사람이 있나요?”
“없어요.”
“어떻게 혼자서만 살아남았나요?”
운이 좋아서, 그리고 강해서. 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다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랬
기에 대응할 핑계가 필요했다. 현우는 발치에서 꾸벅꾸벅 조는 케로를 들어 책상
위에 올렸다.
토실토실한 포메라니안같이 생긴 강아지가 그러고 있으니 오죽 귀여우랴. 아윤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귀여워!”
저번에는 촬영에 신경 쓰느라 바빠서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자세히 보니 무척 사
랑스러웠다. 아윤은 저도 모르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한번 만져 보고 싶었기 때문
이었다.
그 순간, 동그란 눈이 반짝 떠지더니 콧잔등에 주름이 잡혔다.
“으르르릉.”
고작해야 작은 강아지일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더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는 공포가 몸을 잠식해 나갔다. 그쯤, 현우가 강아지의 머리를 탁 쳤다.
“그만해, 케로.”
동시에 압박감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평범한 강아지가 아니네.’
아윤은 다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사이 케로를 들어 올린 현우가 말했다.
“소개할게요. 케로베로스, 케로입니다.”
소개가 끝나기 무섭게 작은 케로의 몸이 순식간에 부풀기 시작했다. 상당히 넓은
회의실인데도 좁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 어어?”
아윤은 의자를 빼고 뒤로 물렀다. 여차하면 문을 열고 달아날 생각이었다.
괜찮아요. 안전해요.”
그런 아윤에게 현우가 웃으며 말했다.
‘안전해 보이지 않는데요!’
계속 자라나던 케로가 성장을 멈춘 순간, 무시무시한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가 셋에 울끈불끈 근육질의 몸을 가진 몬스터는 그 자리에 서서 몸을 길게 폈
다. 그 때문에 회의실에 있던 책상과 의자가 밀려 넘어졌다.
“그만, 그만!”
현우가 그런 케로의 다리를 찰싹찰싹 때렸다.
‘저러다 물리면 어쩌려고!’
아윤은 겁에 질렸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거대한 몬스터는 얌전히 다리
를 오므리고 그 자리에 웅크리고 앉았을 뿐이었다.
“다시 소개할게요. 케로예요. 다른 세상에 있을 때,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테이머세요?”
“아뇨, 테이머는 아니고요.”
“그런데 어떻게 몬스터를 다루세요?”
아윤의 질문에 현우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마계는 인간이
살기 힘든 곳이었지만, 몬스터라고 살기 편한 곳도 아니었다. 언제나 투쟁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몬스터라도 다치는 일이 많았다.
케로베로스는 그런 몬스터였다. 누군가에게 다쳐서 쓰러져 있던 케로베로스. 그리
고 그런 케로베로스를 치료해 준 현우. 이후 케로베로스는 현우를 지켜 주기 시작
“
했다. 그런 미담이었다.
물론 실제는 달랐다. 케로베로스가 사경을 헤맬 정도로 때린 것은 현우, 간신히 회
복되자마자 끌고 다니며 탈것으로 이용한 것도 현우였다. 그냥 간만에 특식을 먹
어 보고자 인간을 건드렸다가 지옥을 맛본 케로베로스의 서글픈 흑역사일 뿐이었
다.
“그런 일도 가능하군요.”
아윤이 신기한 눈으로 케로를 바라보았다. 연극이긴 하지만 좋은 역할을 맡은 케
로는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고개 낮춰! 천장 무너져.”
그 결과는 다시 다리를 찰싹 맞는 걸로 돌아왔지만 말이다.
“확인했으니 이제 원래대로 돌아가도 될 것 같아요.”
“네.”
“그런데 케로라고 했죠? 얼마나 강한 거예요?”
“그건 모르겠네요. 아직 여기서 나타나는 몬스터의 종류를 다 몰라서요.”
“아, 그건 그렇겠네요. 그러면 실험해 보는 건 어때요? 몬스터는 이쪽에서 제공할
수 있어요. 어느 정도 강한지 알아 두면 좋지 않겠어요?”
새로운 정보에 아윤은 흥분했다. 하지만 뭔가를 더 진행해 보기도 전에 선우에게
가로막혔다.
“그건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만.”
단호한 말에 아윤은 아쉬운 얼굴로 다시 질문지를 내려다보았다.
네 그럼 다음 질문을 이어 나갈게요. 기억나는 사람은 있으신가요?”
“몇몇은 기억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워낙 많았기에 전부를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대화를 나누기도 전에 죽은 사람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사람이 많이 줄어
들고 친해진 후에는 죽기 전에 유언을 들어 주는 게 가능했지만, 그전에는 불가능
했다.
과거를 떠올린 현우의 어깨가 살짝 흔들렸다. 모든 것을 잊고자 했지만, 전부 잊혀
진 건 아니었다. 시간이 약이라지만, 그 약이 완벽하게 모든 것을 치료해 주진 않
았다.
선우는 그런 현우의 어깨를 손으로 감싸 쥐었다. 자신의 온기가 그에게 조금이라
도 닿길 바라면서.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현우는 모든 질문에 성의껏 대답했다. 그렇게 긴 시간에 걸
친 연습이 끝나자, 지쳤다.
“쉬고 싶어.”
“그러면 올라갈까.”
“응.”
현우는 대답하면서 자연스럽게 선우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선우는 그런 현우를
안아 들었다. 회의실을 나서는 그의 뒤로 케로가 쫄랑쫄랑 따라갔다.
“ ,
도진은 그 모든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대답하는 내내 떨리던 어깨를 그도 감싸
주고 싶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실종될 당시 예원의 나이는 18세. 그리고 현우
의 나이는 15세였다.
여동생인 예원보다 어린 나이였다. 그런 아이가 혼자서 살아남아 10년 만에 돌아
오기까지, 어떤 일을 겪었을지.
저지른 죄를 갚기 위해 지켜 주겠노라 생각했는데, 모든 것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
다.
“안 따라가요?”
혼자 남아 있던 아윤이 도진에게 물었다.
“잠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하긴 지금은 지선우에, 케로라는 몬스터까지 붙어 있으니 안전하겠네요. 애초에
선현 길드 본사에 쳐들어올 미친놈이 몇이나 되겠느냐마는.”
아윤은 책상 위에 놓인 질문지를 톡톡 치더니, 다시 말을 꺼냈다.
“대단한 것 같아요.”
도진은 대답도 없는데, 혼자 말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 어린 나이에 혼자 다른 세상에 떨어져서 살아남은 거잖아요. 난 그 나이 때 친
구들과 놀러 다녔는데. 상상도 되지 않네요.”
아무리 냉정하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아윤은 한숨을 쉬면서 자리에서 일어
났다.
“일단 준비는 대충 끝났으니 내일을 대비해 봐요.”
나올 만한 질문은 다 뽑아왔지만, 어디까지나 가상의 질문일 뿐이었다. 실제 가족
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어디 이성적으로 질문만 할까.
‘아니.’
아윤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더 많은 대비를 해야 했다. 아직 딱히 친해진
건 아니지만, 현우가 망가지는 걸 보고 싶진 않았다.
‘내가 원래 이렇게 마음이 약하진 않은데.’
기지개를 쭉 켜고는 그대로 회의실을 나섰다. 그렇게 아윤이 나가는 와중에도 도
진은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26.
“
드디어 오늘이군요.”
박덕수를 비롯한 실종자 가족들은 바로 앞에 서 있는 커다란 빌딩을 올려다
보았다. 오늘 여기서 사라진 가족들의 행방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들어갑시다.”
그들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대담이 이루어지는 곳은 대강당이었다. 안내대로 자리에 착석하고 나니 어
느새 약속한 시간 1시가 되었다. 시간이 되자마자 앞의 문이 열리며 청년
몇이 들어섰다.
“지선우다.”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은 지선우였다. 그리고 다음은 그의 형인 지현우, 부
길드장인 서찬영, 그리고 마지막 청년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지금부터 대담을 시작하겠습니다.”
마이크는 서찬영이 잡았다. 대담이라고 하나 전부 질문을 할 수는 없는 노
릇이다. 그렇기에 실종자 가족 중 대표를 뽑아 앞자리에 배치했다. 일단 그
들에게서만 질문을 받고, 차후 전체 질문 시간을 정해진 시간 동안 가질 예
정이었다.
박덕수는 대표이기에 앞에 앉았다. 이제 사라진 가족의 행방을 알 수도 있
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손이 덜덜 떨렸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지
현우를 바라보았다.
그 옆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키가 크고 덩치가 있어서 그런가, 유독 여려 보
였다. 저런 몸으로 어떻게 그곳에서 살아 돌아왔는가. 과거 자신의 아들보
다 작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 아들도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희미한 희망을 가졌다.
“안녕하세요. 지현우입니다. 1세대이기도 합니다.”
순해 보이는 얼굴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건네받은 마이크를 쥔 채 잠시
망설였다. 이어 질문 시간이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질문의 물꼬를 튼 사람은 덕수였다.
“다른,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같이 사라진 인원이 1만 명. 그 많은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가. 질문을 하고
답이 돌아오기까지의 빈 시간, 미친 듯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전부, 전부 죽었습니다.”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거짓말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 많은 사람이 전
부 죽었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강당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럴 리가 없다고 외치는 사람, 울기 시작하는 사
람, 그 속에서 덕수는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 이내 정신을 차렸다.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된다. 여기서 무너지면 그동안 아들을 찾아다닌 게 허송세월이
된다.
그게 저, 정말입니까?”
더듬더듬 묻자 답이 돌아왔다.
“네.”
“그걸 어떻게 압니까!”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만약에 살아 있었으면, 이번에 돌아왔을 겁니다. 하지만 중간에 요정이 말
한 적이 있습니다. 살아남은 인간은 저 하나뿐이라고요.”
요정. 다른 세계로 끌려가 각성한 이들이 말하곤 했던 존재였다. 조율자, 각
성을 도와주는 도우미. 여러 가지로 불리곤 했지만, 마냥 선한 존재는 아니
라 하였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당신 같은 사람이 살아남았는데 내 아들이 죽었다
고?”
덕수는 어느 순간부터 울부짖기 시작했다.
“사실을 말해!”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구석에 있던 까만 털뭉치가 앞으로 나섰다. 그
러더니 순식간에 부피를 불려 나갔다.
“크르릉!”
“
머리를 세 개 가진 거대한 짐승이 울부짖었다. 소란스럽던 대강당이 순식간
에 조용해졌다. 도망쳐야 하나? 눈치를 보던 사람 중 하나가 움직이려는 순
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케로는 안전해요. 도망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이 몬스터는 뭡니까!”
“마계에서 저를 도와준 친구입니다. 케로, 다시 원래대로.”
현우가 짐승을 툭툭 치니 다시 빠르게 줄어들어 작아졌다. 그래, 그렇지. 아
무런 능력도 없는데 그곳에서 살아남았을 리 없다. 무언가가 있었으니 살아
남았겠지. 덕수는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납득했다. 그리고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 제 아이는. 다른 사람들은 정말 전부 죽은 겁니까?”
“네.”
“어째서? 어째서!”
눈가가 뜨거워졌다. 이어 눈물이 주르륵 흐르기 시작했다. 10년 전 자식이
사라지고 나서 내내 참아 왔던 눈물이었다.
“죄송합니다.”
현우가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하지만 사실 알고 있었다. 사과해야 하는 건
그가 아니라는 걸. 그가 다른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그저 운이 좋아 혼
자 살아남았을 뿐이다. 원망해야 하는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아는데, 아는데도 원망스러웠다. 덕수가 우는 사이, 옆에 있던 중년의 여성
이 다급히 말을 꺼냈다.
“제, 제 아이의 이름을 아시나요? 예나, 박예나예요! 나이는 21살이고요. 대
학생이었어요. 그날, 친구랑 놀러 간다는 걸 말리는 건데. 그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으면!”
그러며 가슴을 두드린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저 평소
와 같이 놀러 나가는 걸 배웅했을 뿐인데, 그게 어째서 잘못이 된단 말인가.
사람들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내 아이를, 내 남편을, 내 부인을 아시나
요. 통곡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담담하게 그들을 대하던 현우의 표정이 점점 창백해지기 시작했
다.
‘충분히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그저 몸만 강해진 것인가.’
작게 한숨을 내쉬는데, 갑자기 무언가가 머리 위에 떨어져 시야를 가렸다.
누군가가 접근하는지 알아채지도 못했다. 얼떨떨한 기분에 머리를 덮은 걸
걷어 내려 했으나, 큰 손이 그걸 막았다.
선우는 아니었다. 그는 지금 유족들을 상대하고 있었으니까. 그럼 이건 누
구지?
가만히 계십시오.”
익숙한 목소리, 도진이었다. 그제야 머리를 덮은 것이 도진의 겉옷임을 깨
달았다. 낯선 체향이 훅하고 풍겨 왔다. 그러나 딱히 거슬리거나 기분 나쁜
향은 아니었다. 외려 기분 좋은 향이었다. 시원하고, 부드러운 느낌이다.
도진은 점퍼를 덮어준 걸로도 모자랐는지, 살며시 현우를 껴안았다. 그 손
길이 너무나도 조심스러워 마치 유리 세공품을 대하는 것 같았다.
가족인 선우도 아니고, 타인에게서 이런 취급을 받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
서 그런가? 기분이 묘해졌다. 내내 꾹꾹 누르고 있던 오래된 기억이 현우를
자극했다.
“으.”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괜찮습니다.”
다정한 목소리가 달래 주었지만, 그걸 듣고 있자니 외려 더 서러워졌다. 현
우는 잠자코 도진에게 몸을 맡겼다. 어차피 점퍼에 가려져 아무도 그를 볼
수 없다. 그러니 잠시, 그에게 의지하기로 했다.
잠시, 아주 잠시만.
“
장내의 소란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형!’
선우는 내내 걱정하던 형을 돌아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버텼을지 걱
정이 되었다. 그리고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고 말았다. 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는 형을 감싸 안은 도진에게 다가갔다.
“이제 괜찮습니다.”
뭐라 한마디 해 주고 싶었지만, 그가 없었다면 형은 더 괴로웠을지도 모른
다. 그렇기에 선우는 그에게 뭐라 하는 대신, 형을 넘겨받는 걸 택했다. 도
진은 순순하게 현우의 곁에서 물러났다.
“이것도 가져가십시오.”
그러면서 점퍼를 걷어 내려 했으나, 현우가 그 끝을 꾹 잡았다.
“미안, 잠시만 더 이대로 있을게.”
그 모습이 어찌나 힘들어 보이던지. 유족들의 반발을 무시할 걸 그랬다, 하
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들어가서 쉴래?”
“아냐, 아직 괜찮아.”
점퍼 사이로 고개를 내민 현우가 대답했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손을 잡았
다. 그로부터 30분, 다시 대담이 진행되었다. 질문은 아윤이 뽑아 왔던 예상
질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랬기에 이후는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앞으로 선현 길드는 혹시나 모를 일에 대비하여 1세대 실종자 유족 연합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생각입니다. 재단을 통한 생계지원 및 1세대 실종자 유
해를 찾는 일까지.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그렇게 기나긴 대담이 끝났다.
“
대담이 끝나자마자 선우는 곧바로 현우를 안아 들고 거처로 돌아왔다. 그리
고 침대에 눕히고는 따뜻한 차 한 잔을 쥐여 주었다.
“이제 괜찮다니까.”
“그래도 쉬어. 많이 힘들었잖아.”
“그래. 알았어.”
선우는 현우의 머리를 넘겨 주고는 이불을 곱게 덮어 주었다. 그런 후, 방
밖으로 나갔다. 현우가 혼자서 감정을 토해 낼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현우는 향기롭고 달달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생각에 잠겼다. 그래도 이제
큰 고비는 넘긴 셈이었다. 여전히 자신을 노리는 사람은 있겠지만, 예전보
다는 덜할 거라 하였다.
조건이 붙긴 했지만, 약간의 자유가 생긴 셈이었다. 그럼 이제 뭘 하면 좋을
까?
‘쉬고 싶다.’
그 생각은 마계에서부터 지금까지 바뀌지 않았다. 게으름을 피우면서 뒹굴
고 싶다. 평화로운 세상에서 평화를 즐기고 싶었다. 이제는 그게 가능할 것
이다.
한 번 더 차를 홀짝이며 멍하니 있다가 문득 침대 옆에 내팽개쳐진 점퍼를
발견했다. 현우는 자연스럽게 일어나 점퍼를 털어 내고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미처 감사의 인사를 하지 못했다. 다시 만나면 고맙다는 말부터 해야 할 것
같았다.
“크흥!”
바닥에서 쭉 몸을 펴던 케로가 침대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그래, 너도 오늘 잘했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신나서 몸을 발라당 뒤집는다. 그러더니 얼마 지나
지 않아 고롱고롱 잠들었다.
‘정말 팔자 편한 녀석이라니까.’
현우는 피식 웃고는 그 옆에 몸을 눕혔다. 케로를 따라 잠시 자는 것도 괜찮
을 것 같았다.
27.
푹 자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았다.
“형, 밥 먹어.”
마침 선우가 부르러 와서 일어서려던 현우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점퍼
에 닿았다.
돌려줘야지.’
잠바를 들고 밖으로 나가자, 식탁을 차리는 선우와 도진이 보였다. 처음에
선우는 도진과 같이 식탁을 쓰기도 싫어했지만, 현우의 말에 결국 함께 식
사하게 되었다. 물론 언제나 같이 먹는 건 아니었다. 대부분은 도진이 회피
했으니까. 본인은 일이 있어 그러는 거라는데, 아니라는 게 너무 티가 났다.
“점퍼, 고마워요.”
현우가 도진에게 다가가 점퍼를 건네자 그가 얌전히 받아들었다. 그런데 점
퍼도 안에 입고 다니는 옷처럼 미묘하게 낡았다.
“옷, 선물 받은 거예요?”
아무리 꾸미는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도 한 길드의 길드장이다. 그런
도진이 이렇게 입고 다니는 걸 보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물어봤는
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동생이 골라 준 옷입니다.”
그래서 그렇구나. 도진의 말에 납득하는데 뒤에서 선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나도 형이 사 준 옷들 아직 가지고 있어!”
“그걸 왜 가지고 있어.”
지금은 들어가지도 않을 텐데. 그때보다 많이 자랐으니 입으려면 찢어야 할
것이다.
“형이 사 준 거니까.”
‘
선우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현우는 선우에게 다가가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
듬어 주었다. 자신은 선우가 준 물건을 지키지 못했는데. 가방에 매달려 있
던 작은 인형은 생일에 선우가 준 것이었다. 그러나 마계에서 지내는 동안
잃어버렸다.
이후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찾으러 가 봤을 때는 아무것도 없었다.
“고마워.”
내가 사 준 것들을 잘 간직하고 있어서. 현우는 부드럽게 웃었다.
“고맙긴. 참, 얼른 앉아. 밥 먹자.”
선우는 현우의 의자를 빼 주며 재촉했다. 도진과 선우가 같이 만들었다는
식사는 무척이나 맛있었다. 형이 돼서 얻어먹기만 하는 건 미안했지만, 자
신의 요리는 딱히 맛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조금은 연습해야겠다.’
여기는 마계가 아니고 이런 나날이 흘러갈 것이다. 그러니 뭐든 조금 배워
두는 게 좋겠지. 현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
모든 것이 엉망이로군.”
헌터관리국 국장 김철수는 얼굴을 구긴 채 신문을 넘겨 보았다. 대부분 1세
대의 이야기가 지면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부정적인 이야기가 단 하나도 없
었다. 나름 손을 써 보았지만, 요람 길드의 언론조작은 이기지 못했다.
“
요즘 젊은이들은 정신이 글러 먹었어!”
국가에 기여하여 발전을 도모한다. 그게 얼마나 훌륭한 이야기인지 이해를
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이런 행태를 보이는 것이다.
“류영진.”
“네.”
다소 마른 듯한 몸에 안경을 쓴 남자가 대답했다.
“이거 어떻게 안 되겠나?”
“힘들죠. 예산과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놈의 예산과 시간!”
김철수는 분노하며 신문을 구기다 의자에 털썩 앉았다.
“드러난 것이 다는 아닐 텐데. 무려 마계에서 10년 동안 지낸 사람이다. 뭔
가 더 알고 있는 게 틀림없어.”
“그야 그렇지만, 지금 국가에서 소환하면 욕이란 욕은 다 먹을걸요.”
“욕을 먹더라도 소환이 가능하면 다행이지.”
선현 길드는 지현우의 소환을 거부할 것이다. 그리고 되레 국가를 협박할
가능성도 있었다. 실제 그런 경우가 제법 많았으니까.
‘이렇게 압박하는데 뭘 믿고 국가에 봉사합니까? 나라가 여기뿐이랍니까?’
“
그렇게 말하고 해외로 뜬 각성자도 있었다. 일단 미국에라도 건너가면 더는
건드릴 수 없다. 그게 지금의 한국이니까.
“되는 일이 없어.”
“그야 그렇죠. 그래서 정보부에는 다른 이야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
“이럴 바엔 차라리.”
“차라리?”
영진은 김철수 가까이 다가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처음에는 못마땅하던
얼굴이 이내 점점 펴지기 시작했다.
“나쁜 계획은 아니군. 하지만 그게 드러날 경우 일어날 일은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그래, 그럼 일단 진행해 봐.”
“그러겠습니다.”
영진은 김철수에게 인사를 하고 국장실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마침 지나
던 무혁과 마주쳤다.
“오랜만입니다.”
“본 지 며칠 안 되지 않았습니까?”
정보부에서 야근만 하다 보니 날짜 개념이 희박해진 모양입니다.”
영진의 말을 잠자코 듣던 무혁이 국장실을 바라보았다. 요즘 영진의 국장실
출입이 잦다. 이유야 알고 있지만,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렇지만
예감만 가지고서 뭐라 할 수도 없으니.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네.”
무혁은 멀어지는 영진을 보며, 다시 몸을 움직였다. 그도 더는 가만있어선
안 될 것 같았다.
“
*
현우는 넓은 바닥에 앉아 멍하니 유리창의 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푸른
하늘,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이 어여쁘다. 저건 양 구름, 저건 나비구름. 저
건…….
구름을 지켜보고 있자니 마찬가지로 옆에서 멍하니 앉아 있던 케로가 꼼질
꼼질 거리며 현우의 품에 파고들었다. 예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행동인
데, 이제는 곧잘 한다. 이래도 현우가 자신을 내치지 않을 걸 알기 때문이었
다.
“좋다.”
이 조용한 시간이 너무 좋았다. 투쟁하지 않아도 되는 삶, 이런 걸 원했다.
현우는 그대로 케로를 끌어안고 스르르 옆으로 누웠다. 바닥에 깔린 러그의
촉감이 부드럽다.
평온하네.’
게으름의 극치였다.
‘
선우는 빠르게 손을 놀리고 있었다. 선현 길드의 본거지, 게다가 옆에는 도
진과 케로가 있다. 그 외에도 길드원 중 뛰어난 이들이 그를 지키고 있으며,
선우도 가까운 거리에 있으니 안전하다.
그걸 알면서도 형의 곁에 가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다. 오랜 시간 품어 온
불안감은 형을 되찾고 나서도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길드장님.”
그런 선우에게 찬영이 찾아왔다.
“뭡니까?”
“해외에서 던전형 포털이 열렸습니다.”
포털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게이트형과 던전형. 가끔 열리는 게이트형
은 몬스터를 방출한다. 그 때문에 시간에 맞춰 토벌하지 못하면 주변이 엉
망이 된다. 그리고 던전형, 이 경우는 당장 몬스터가 밖으로 나오진 않는다.
대신 안에서 점점 수를 불려 나간다. 그러다 갑자기 폭발하는 것이다.
어느 쪽이나 위험하다. 그렇기에 각 나라는 가능한 몬스터가 밖으로 나오기
전에 포털을 해결하길 원한다. 게이트형은 몬스터 전멸, 던전형은 던전 보
스 사망. 그게 포털이 닫히는 조건이었다.
둘 다 전조 증상이 있으나, 운 나쁘게 인적이 드문 곳에서 발생하면 막기도
전에 터져 나가기도 했다.
“어디입니까?”
“아프리카 쪽입니다. 규모가 S급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S급 각성자가 필요
해 여기저기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쪽은 S급 각성자가 무척이나 드물었다. 그나마 있는 S급 각성자도 강대
국이 좋은 조건을 내밀고 빼갔기 때문이었다.
“그럼 굳이 제가 갈 필요는 없겠군요.”
“네, 굳이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조건을 후하게 걸었으니, 아마 다른
나라에서 먼저 나설 것 같습니다.”
“그럼 됐습니다.”
선우는 다시 살펴보던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쉽게 풀
리지만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 소식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포털 측정 결과 S급을 넘어서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상당히 위험하단 소리였다. 하지만 그래도 가고자 하는 각성자는
있을 것이다. 더 위험한 던전일수록 주어지는 아이템의 가치도 높아졌으니
까. 그래, 그래야 맞는 말인데.
“이상하게 모이는 S급 각성자가 없다고 합니다.”
“동시다발적으로 던전이 터지기라도 했답니까?”
네 그런 모양입니다.”
“신기한 일이군요.”
“그 때문에 그쪽에서도 매달리고 있습니다. 대가도 올라가고 있고요.”
평소라면 선우도 가 봤을지 모른다. 하지만 무려 다른 나라, 단순 왕복만 하
는 데도 얼마가 걸리던가. 그동안 형을 혼자 둔다고?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랬는데 말이지.’
다시 살펴본 조건이 너무 좋았다.
‘피닉스의 수호.’
착용한 대상자를 절대적으로 보호하는 아이템. 기간에 따른 횟수 제한이 있
긴 하지만 그로도 훌륭하다. S급 각성자의 공격도 막아 낼 수 있기 때문이
었다.
잠시 선우는 형이 착용하고 있는 아이템을 떠올렸다. 괜찮은 것만 모아서
주었다고 해도 아직 부족한 감이 있었다. S급 각성자가 작정하고 공격이라
도 하면 제대로 막지 못할 게 뻔했다.
‘이건 탐나는데.’
선우는 고민했다. 이것도 현우를 탐내는 다른 이들의 음모는 아닌지 이리저
리 들춰 보았다. 그러나 그런 경향은 보이지 않았다.
“제가 자리를 잠시 비워도 괜찮겠습니까?”
“ ,
고민하다가 꺼낸 말에 찬영이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언제나와 같이 선현 길드는 제가 지키겠습니다.”
“전 그보다 형이 걱정됩니다.”
“그분도 제가 지키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말입니다.”
저렇게 보여도 찬영은 엄연한 부길드장으로, 가진 힘이 약한 건 아니었다.
선우는 잠시 계산을 해 보다 대답했다.
“좋습니다. 이번 요청 승낙한다고 보내십시오.”
“알겠습니다. 같이 가는 팀은 몇 팀으로 할까요?”
“1팀만 데려가겠습니다.”
“더 데려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어차피 선우가 대부분 처리하고, 1팀은 보조하는 역할만 할 것이다.
“곧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찬영이 밖으로 나서고 나서야 선우는 잠시 서류에서 눈을 뗐다. 잘한 짓인
가 모르겠다. 하지만 형을 보호할 아이템은 필요하니까. 게다가 요청을 들
어주는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던전형 포털이 터지면 인명 피해가 엄청날 것
이다. 가는 편이 나았다.
28.
선우는 현우와 도진에게 소식을 알렸다.
“어딜 간다고?”
“아프리카. 정확히는 케냐지만.”
아프리카. 그 먼 나라에 포털을 닫기 위해 간다는 말에 현우의 얼굴에 걱정
이 서렸다. 선우가 충분히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직 이쪽의 몬스터
는 접해 본 적이 없기에 어떤 수준인지 몰랐다. 그러니 불안도 당연한 것이
었다.
“위험한 일은 아니야.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그런 현우의 마음을 읽어 내기라도 한 듯 선우가 걱정을 덜어 내고자 했다.
그래도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케로를 데려가.”
그러면서 까만 털뭉치를 건네주었다. 마침 졸고 있던 케로는 하품을 쩍 하
며 선우와 얼굴을 마주하였다.
“왕?”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본 모습을 보았으니까. 원래는
강한 몬스터라는 것을 안다.
“안 돼.”
선우는 케로를 그대로 현우에게 돌려주었다.
나보단 형을 지키는 쪽이 더 나아.”
자신보다는 형이 위험해질 확률이 더 높으니 말이다. 그러나 현우도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날 지켜 줄 사람은 많아. 그러니 네가 케로를 데려가.”
“안 된다니까.”
졸지에 형제 사이를 왔다 갔다 하게 된 케로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면 날 데려가!”
“거기가 어딘 줄 알고 데려가 달래.”
“케냐라며!”
“안 돼.”
“대체 되는 게 뭐야?”
현우가 케로를 흔들며 물었다.
“형은 여기서 쉬고 있어. 이미 많이 힘들었잖아. 힘들 텐데 왜 따라온다는
거야?”
“그거야!”
네가 걱정되니까. 현우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
차라리 몰래 따라갈까?’
케로를 이용하면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 당
연하지만 이쪽에서 난리가 날 것이다. 지켜야 할 대상인 현우가 없어지는
셈이 되니까.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을 하는데 옆에서 도진이 말을 얹었
다.
“괜찮을 겁니다.”
“하지만!”
“정말이야, 형. 나는 약하지 않아.”
나보단 약해! 현우는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말을 꾹꾹 내리눌렀다.
“역시 케로는 데려가.”
끝없는 실랑이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 실랑이는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야 진정되었다. 결론적으로 선우는 케로를 데려가기로 했다.
“와웅?”
선우는 그의 품에 안겨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케로를 보며 작게 한숨지
었다. 결국, 형의 고집을 이기지 못했다.
‘몰래 두고 갈까?’
“몰래 두고 가면 나도 따라갈 거야.”
생각을 읽는 것이 귀신같다.
‘
알았어. 데려갈게.”
컨트롤 되지 않는 몬스터가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마는. 형의 불안을 잠재울
수만 있다면 나쁘진 않은 것 같았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선우는 도진을 만난 후로 처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에 도진도 마주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렇게 선우의 외국행이 결정되었
다. 지구로 돌아와서 처음 동생과 떨어지게 된 것이다. 겨우 한 사람이 사라
졌을 뿐인데 집이 휑하니 빈 느낌이 들었다.
‘부디 무사하기를.’
보내기 전에 케로에게도 단단히 일러두었다.
‘만약에 선우가 다치면.’
현우는 간만에 바짝 긴장한 케로를 앞에 두고 손으로 목을 그었다.
‘넌 죽는다.’
‘와, 왕!’
군기가 바짝 든 케로가 힘차게 짖었다. 마계에서의 지옥 같던 나날을 떠올
리며, 반드시 지키겠노라고 앞발을 들어 맹세했다. 아니면 아작나는 건 자
신이었으니까. 그렇게 케로는 선우에게 덜렁 들려 같이 떠나갔다.
“
이제는 선우가 돌아오는 나날을 기다리며 평소와 같은 생활을 하면 되었다.
현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날이 오기까지는.
*
찬영이 곤란한 표정으로 도진에게 서류 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다.
“헌터관리국에서 보냈습니다.”
도진은 묵묵히 봉투를 뜯어 안쪽을 보았다. 그러고는 곤란한 듯 눈썹을 들
썩였다.
“국내에도 새로 포털이 열린 겁니까?”
“네, S급, 어쩌면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S급 각성자는 저뿐만이 아닐 텐데요.”
“다른 길드들도 거의 다 요청을 받은 듯합니다.”
그동안 열린 포털의 대부분은 A급 이하였다. S급이라 불리는 포털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그 이상 가는 던전이 발견되었다고? 해외에서,
그리고 국내에서?
“그래서 국내의 S급 각성자는 전부 모으는 것 같습니다.”
“정말 S급 이상 가는 던전이 맞습니까?”
“헌터관리국의 측정은 정확한 편이니까, 맞겠지요.”
그야 그렇지만, 느낌이 나빴다. 분명 헌터관리국에서도 1세대를 탐내는 걸
알고 있는데, 그동안 너무 조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그
런 포털이 열렸다니, 의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종류는 뭐라고 합니까?”
“게이트형이라고 합니다.”
게이트형은 던전형보다 더 위험하다.
‘만약에 이 모든 게 진실이라면.’
인명 피해가 커질 것이다. 그걸 알고 있었지만, 쉽사리 참여 여부를 결정할
수가 없었다. 현우가 있었으니까. 마침 케로도 선우를 따라 자리를 비운 상
황인데 도진마저 빠지면 호위하는 사람의 수준이 확 떨어진다.
“일단 저는 여기 남아 있을 생각입니다.”
찬영도 비슷하게 요청받았지만, 그는 어떻게든 거절할 생각이었다. 마침 길
드장인 선우도 자리를 비우고 있으니, 부길드장인 그마저 억지로 참여시키
지는 않을 것이란 계산이었다.
도진은 이를 악물었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목숨의 무게를 잰다면 가
는 게 맞았다. 하지만 그러면 현우는?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세요.”
그런 도진에게 현우가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괜찮으니 가세요. 더 많은 사람을 살리는 게 중요하죠.”
당신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괜찮아요. 찬영 씨도 있고, 다른 사람도 남아 있잖아요.”
“노리는 사람이 더 강하면 어쩔 겁니까?”
“제가 때려눕힐게요!”
그러면서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찬영이 고개를 뒤로
돌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대놓고 웃을 수는 없었지만,
가소로워 보인 모양이었다.
“……주먹은 그렇게 쥐는 게 아닙니다.”
도진은 손을 뻗어 현우의 주먹 쥐는 법을 교정해 주었다.
“이렇게. 네, 힘을 좀 더 주고. 그래야 타격이 들어갑니다.”
“이렇게요?”
다시 쥐는 모양은 완벽했다. 습득력이 무척 빨랐다.
“그러니 안심하고 다녀오세요.”
안심될 리가 있나. 도진은 손끝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걱정되잖아요? 저도 여기 남아 있는 것보단 가서 다른 사람을 지켜 주는
게 마음이 더 편할 거예요.”
“위험합니다.”
“
괜찮다니까요. 찬영 씨도 강하지요?”
“네? 네!”
“그렇다잖아요.”
얼른 다른 사람을 지켜 주라고 등을 떠미는 모습이 찬란하다. 본인도 힘들
었을 텐데, 어쩌면 이리 상냥할까. 도진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러면 대신 약속해 주십시오. 이곳을 벗어나지 않겠다고.”
“그럴 테니 안심하고 다녀오세요.”
“절대, 절대로 위험한 짓은 하시면 안 됩니다.”
이어 도진은 조심해야 할 것을 하나하나 짚어 주었다. 어떤 게 위험한지, 그
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대처하는 게 좋은지, 몸을 사리는 법을 알려 주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하필이면 포털이 열리는 곳이 제주도다. 여차하면 당장에 달려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그렇기에 그런 약속밖에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도진도 거처를 떠나갔다. 도진이 떠나기 무섭게 찬영은 경비를 강
화했다. 외부로 나갔던 팀들을 불러들이고, 본인은 거처에 들어앉았다.
테이블 앞에 앉은 찬영은 태블릿을 조작하며, 종이를 빠르게 넘겼다. 작업
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익숙해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지겨워져 소파
에 슬쩍 기대 누웠다.
“
마음 같아서는 방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찬영이 자신의 눈이 닿지 않는 곳
에는 있지 말라 하였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심심해.”
심정을 토로하니 찬영의 등이 움찔거렸다.
“지금은 어쩔 수 없으니 참으십시오.”
“네, 참을게요.”
차라리 케로라도 있었으면 나았을 텐데. 아니, 지금쯤 케로는 동생인 선우
를 열심히 돕고 있을 터였다. 뒹굴뒹굴하던 현우는 게임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제법 유명한 카트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현란하게 칠해진 작은 자동차에 탑승한 캐릭터가 미친 듯이 질주하기 시작
한다. 그러나 게임에는 딱히 소질이 없었던 탓에 부딪치고 미끄러지고 난리
다. 맵을 외우고, 원래 가진 힘을 써서 미세하게 조절하면 완벽하게 운행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운전을 했
을까.
찬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12시. 점심시간 무렵이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부엌에 서서 달그락거
리기 시작했다.
땡. 땡. 땡.
전자레인지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식사하십시오.”
얼린 밥을 데우고, 통조림 몇 개를 땄다. 선우가 본다면 이런 걸 형에게 먹
일 순 없어! 하고 통곡했을 모습이었다. 그래도 찬영에게는 이것이 최선이
었다. 외부에서 요리할 사람을 부를 수도 없었다. 내부에도 요리사는 존재
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모든 걸 조심하는 게 좋았다.
최선은 직접 요리를 하는 것이었지만, 찬영은 요리를 해 본 적이 없었다. 혹
시나 불평을 할까 봐 조마조마해하는데, 현우는 얌전히 식탁에 앉았다.
아니, 외려 눈을 반짝이는 것 같았다.
“통조림이네요?”
“네.”
“와, 통조림은 별로 못 먹어 봤는데.”
그러면서 통조림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요즘엔 이런 것도 통조림이 나오네요.”
깻잎, 진미채, 볶음김치, 여러 맛의 참치. 직접 만든 요리만큼은 아니었지
만, 평균적인 맛은 되었다. 게다가 신기함까지 더해지니 식사가 즐거워졌
다.
“
29.
선우나 도진이 없어도 일상은 굴러갔다. 위험한 일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
는 순간, 손님이 찾아왔다.
하필이면 지금.’
미국에 전신을 둔 ‘피닉스 ’길드의 부길드장이 찾아온 것이다. 요청 몇 번 거
절했다고 직접 찾아올 건 뭐람.
‘이래서 거대길드 놈들은!’
자기네가 가진 권력을 아는 만큼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다. 게다가 국
적이 미국이니 오죽하랴.
찬영은 이를 악물었다. 상대는 미국의 거대길드지만, 선현 길드도 밀리지
않는다. 굳이 직접 상대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는 쉽사리
물러가지 않았다. 로비에 죽치고 앉아서 찬영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무슨 일 있어요?”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낀 현우가 찬영에게 물었다.
“미국의 길드에서 부길드장이 직접 찾아왔습니다.”
“왜요?”
“1세대와의 대면 요청을 몇 번 거절했거든요.”
“그렇다고 직접 와요?”
“그러게 말입니다. 너무 끈질겨요.”
어차피 돌아갈 답은 또다시 거절일 텐데 말이다. 머리에서 김이 날 정도로
고민하던 찬영은 결국 결론을 내렸다.
‘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되겠습니까?”
“됩니다. 중요한 일이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원래 이러면 안 되는데!”
찬영은 벽에 머리라도 박을 기세였다.
“잠시, 최대한 빠르게 다녀올 테니 여기 가만 계십시오. 절대로 나가시면 안
됩니다.”
“나가지 않겠습니다.”
현우의 확답을 듣고 나서야 찬영은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되는 일이 없네.’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타국의 부길드장이 찾아올 건 뭐람. 찬영은 빠르게
움직였다. 면전에 대고 거절한 뒤 다시 후다닥 돌아올 셈이었다. 현우를 좋
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길드장의 가족이었다. 보호하는 일을 소홀히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모든 건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어째서 안 된다는 겁니까!”
상대 쪽에서 진상을 부리기 시작했다.
미국에는 손꼽히는 거대 길드가 둘 있었다. 그중 하나가 가디언 길드였고
다른 길드가 피닉스 길드였다. 둘은 한국으로 치면 선현 길드와 백호 길드
‘
같은 느낌이었다. 하나는 압도적으로 1위를 하고, 2위가 1위를 넘기 위해
악을 쓰는 느낌. 더불어 무례한 것까지 똑 닮았다.
통역 아이템을 통해 고스란히 들어오는 소리에 찬영의 얼굴이 구겨졌다.
“안 된다면 안 되는 겁니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것부터, 이 무슨 무례한 짓
입니까?”
“이쪽의 요청을 몇 차례나 거절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직접 찾아온 것뿐
입니다.”
바보냐! 거절했는데, 왜 찾아와! 마음 같아서는 강제로 로비에서 끌어내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러기엔 데려온 면면이 무시 못 할 이들로 이루어져 있
었다.
‘진상 부리는데 이 정도를 데려온다고?’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는데 부길드장
이 손을 뻗어 찬영의 팔뚝을 잡으려고 했다. 잽싸게 손길을 피하긴 했으나,
그 일로 인해 로비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워워. 싸우자는 게 아닙니다. 그냥 제 말을 더 들어 주길 원해서 그런 것뿐
입니다.”
부길드장은 웃으며 변명했지만, 이미 분위기는 틀어졌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건 찬영만이 아니었다. 집에 얌전히 머물고 있
던 현우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감을 인지했다. 그와 동시에 그는 눈을 감
고 주변을 훑기 시작했다.
강대한 힘이 풀려나가고, 빌딩을 중심으로 주변을 싹 훑었다. 근처에 머무
는 각성자들의 정보가 전부 현우의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역시 이상한 게 맞았다. 로비에서 깽판 치는 이들은 그렇다 치고, 외부에도
왜 이리 각성자가 많은지. 선현 길드 빌딩 근처라는 걸 고려해도 지나쳤다.
‘어쩔까.’
찬영은 당분간은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다. 문밖에서 지키는 사람이 있긴
했으나, 별일 없으면 들어오진 않을 것이다.
‘좋아. 그럼 조금 움직여 볼까?’
현우는 몸을 일으켜 빠르게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 후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쓰니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마스크도 있으면 좋을 텐데.’
당장은 없으니 어쩔 수 없다. 현우는 그 상태로 열리는 창문 쪽을 향해 다가
갔다. 안전장치가 되어 있어 다 열리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떻게 혼자
서 통과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읏차.”
비좁은 창문을 빠져나가 빌딩 벽면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좀 더 섬세한 기술 좀 배워 둘걸.’
뒤늦게 후회되긴 했지만, 지금에 와서 어쩌랴. 몸으로 때워야지. 현우가 빌
딩 아래로 내려오는 건 금방이었다. 땅에 발을 대자마자 기척을 지우고 움
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건 몰라도 기척 지우기 하나만큼은 그 누구도 그를
이길 수 없었다.
척박한 마계의 환경, 그곳에서 적응하느라 이걸 가장 먼저 익혔기 때문이었
다. 그런 만큼 숨는 것 하나는 능숙했다.
움직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목표를 발견했다. 일반 각성자를 기준으로 더
강한 자, 그리고 외국인. 마침 그에 적합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는 빌딩
의 그늘진 곳에서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현우는 다시 기척을 드러내
며 그에게 다가가 모자를 벗었다.
“안녕?”
인사를 들은 각성자가 흠칫 놀라더니, 곧바로 뒤돌아섰다. 이어 현우의 얼
굴을 확인하더니, 품에서 무전기를 꺼내 다급히 뭐라 외쳤다. 그걸 확인하
자마자 모자를 다시 썼다. 그나저나.
‘뭐라는지 모르겠다.’
영어를 배운 지도 한참이 지났다. 게다가 현우는 딱히 공부를 잘하는 학생
도 아니었다. 문장이 길어지니 조금도 알아먹지 못하겠다. 일단은 유인부터
하자.
현우는 그대로 뒤돌아서 뛰기 시작했다. 비각성자가 뛰는 속도에 맞췄기에
빠른 속도는 아니었다. 그러니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따라잡혔다. 하나뿐
이던 외국인은 어느새 여럿으로 늘었다.
‘그런데 외국인만 있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일부는 현우와 같은 동양인이었다.
지현우, 맞지?”
가장 앞에 나선 남자가 물어 왔다. 알면서 따라와 놓고 되묻기는. 현우는 피
식 웃으며 손을 풀었다. 이럴 가치도 없는 녀석들이긴 했지만, 간만이었으
니까.
“맞다면?”
“순순히 따라와 줘야겠다.”
그러면서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순순히 따라오라고 한다고 그럴 사
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현우도 그럴 생각은 없었다. 선우가 없다고 설치는
이 바퀴벌레 같은 놈들을 전부 때려잡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막 주먹을 드
는 순간,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보스인가?’
분위기가 주변을 둘러싼 녀석들과는 좀 달랐다. 현우는 자세를 바로잡고 갑
자기 난입한 사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장신에 20대로 보이는 청년인데 인
상이 기묘하다.
반쯤 감긴 듯한 실눈에 단정히 정리된 머리, 얼핏 보면 힘도 쓰지 못할 모범
생 같아 보였으나 그게 아님을 현우는 알고 있었다.
‘몸이 단단해.’
겉으로 보이는 분위기는 느긋해 보이지만, 숨겨진 기세는 날카롭다. 대충
가늠해 보니 선우보다 약간 아래 같았다. 하지만 그 차이는 미묘해서 노력
여하에 따라 뒤집힐 수도 있을 것이다.
“
「여기서 뭘 하는 겁니까?」
이번에도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듣겠다. 하지만 대충 국적은 알 수 있을 것 같
았다.
‘일본 사람이네.’
“뭐야! 끼어들지 말고 꺼져!”
앞에 나섰던 남자가 위협적으로 말하며 주먹을 휘둘렀다. 험악한 인상에 커
다란 덩치, 일반인이라면 무서워서 도망칠 기세였으나 상대가 나빴다.
새로 나타난 남자는 귓가를 톡톡 치더니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꺼지라고 하셨습니까?」
남자는 꺼지기는커녕 외려 그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쯤에서 현우
는 방관자 모드로 돌아갔다. 여기서는 굳이 자신까지 끼지 않아도 될 것 같
았다.
「손을 더럽히기는 싫습니다만.」
남자가 옆으로 손을 내밀자, 어느새 나타난 여성 한 명이 그에게 지팡이 같
은 것을 내밀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지팡이가 아니라 가느다란 검이었다.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무례하시군요.」
그다음은 예상대로의 결과가 이어졌다. 무례한 놈은 검집으로 실컷 두들겨
맞고 바닥을 기게 되었고, 밀린다 싶어지자 외국인들이 그를 들고 튀었다.
그 과정에서도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지만, 생략하기로 한다.
현우는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막 몸을 세우려는 순간, 목 부분
에 검이 와 닿았다.
「같은 일행입니까?」
“뭐라는 거야?”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해 줬으면 좋겠다. 감히 목에 검을 들이댄 이 녀
석을 조질까, 말까 고민하는데 옆에 서 있던 여성이 말을 꺼냈다.
“같은 일행이냐고 물으십니다.”
그녀는 한국어를 할 줄 아는 모양이었다.
“아닌데요. 같은 일행이면 도왔겠죠.”
「같은 일행이 아니라고 합니다.」
남자는 혀를 차며 검을 거뒀다.
「운이 좋군요.」
그러고는 뒤돌아서려다가 갑자기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모자를 벗어 보시지 않겠습니까?]
모자를 벗어 보시라고 합니다.”
“싫은데요?”
“그렇다면 잠시 실례를.”
여성이 앞으로 발걸음을 내디디며 현우의 모자로 손을 뻗었다. 이걸 받아
쳐, 말아? 망설이다 뒤로 한걸음 물러서자 손이 모자 끝을 스치고 지나갔
다.
그 때문에 대충 얹혀 있던 모자가 툭 떨어져 내렸다.
“악!”
몰래 나온 거라 얼굴을 들키면 안 되는데. 아까 그 녀석들이야 기억도 안 나
게 조질 생각이라 보여 줬던 거였고.
‘너무 방심했다.’
현우가 다시 모자를 줍는 사이, 그의 얼굴을 본 여성의 눈이 동그래졌다.
“
30.
“
지현우!”
정체를 들켰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부정을 해 보았다.
“아닙니다.”
“맞는 것 같습니다만. 대체 왜 여기 있는 겁니까?”
“잠시 산책 중이었어요.”
이럴 때요?”
어설픈 핑계는 조금도 먹히지 않았다. 그야 당연하지. 주변에서 자신을 노
리는 상황인데 태연하게 혼자 외출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현우는 천천히 뒤로 물렀다. 이대로 도망친 다음에 외출한 걸 무조건 부정
할 생각이었다. 목격자가 있긴 했지만, 아무도 저들의 말을 믿어 주지 않을
것이다. 다들 현우에게 힘이 없다고 믿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때, 청년이 현우에게 말을 걸어왔다.
“지현우라고 했습니까?”
갑자기 튀어나온 한국말에 현우는 잠시 멈칫했다.
“한국말 할 수 있었어요?”
“조금.”
그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현우에게 던져 주었다. 얼핏 보기에는 블루
투스 이어폰처럼 생겼다. 그걸 받아들자 자신의 귀를 톡톡 쳤다. 이제 보니
그도 같은 걸 착용하고 있었다.
“번역 아이템이에요.”
여성의 설명을 듣고 그걸 귀에 찼다.
“이제 편하게 말할 수 있겠군요.”
신기할 정도로 명확하게 번역되어 들려왔다.
“
그나저나 지선우의 형이라더니. 어째서 힘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겁니
까?”
그야 감추고 있으니까.
“각성을 하긴 한 겁니까?”
“그걸 말해 줄 의무는 없을 텐데요.”
그러자 청년이 눈을 접으며 웃었다.
“건방지시군요.”
“건방진 건 그쪽이겠지요.”
존대만 하다뿐이지 당장 칼을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조금도 지려고 하지 않는 건 지선우랑 비슷하긴 하군요.”
“뭐라는 겁니까? 내 동생보다 약하면서.”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그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건 내내 통역
해 주던 여성뿐이었다. 짧게 한숨을 내쉰 청년이 현우에게 가까이 다가왔
다. 하지만 딱히 살기가 느껴지진 않았기에 가만히 서서 그를 맞이했다.
“힘이 없는 자의 건방짐은 위험만 부른다는 걸 모릅니까?”
뭐라는 거야? 감추고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현우가 더 강하다. 그걸 기준으
로 본다면 저 청년이 내뱉는 말은 본인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
뭐 그러다 지옥으로 굴러떨어진다면 그것도 운명이겠지요. 그때가 되면
후회해도 늦습니다.”
위험한 건 너겠지. 현우는 주먹에 힘을 주었다. 이대로 한 대 후려칠 생각이
었다. 만약에 골목길 사이로 또 다른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말
이다.
“여어. 준이치.”
새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금발의 미청년이었다. 마치 천사와도 같은 외모를
가진 그는 천연덕스럽게 다가와 일본인 청년에게 말을 걸었다.
“이런 데서 다 만나는군.”
“지크프리트.”
“이름을 불러 달라니까. 레온이라는 멋진 이름이 있는데 왜 매번 성을 부르
는 건가?”
“부르기 싫습니다.”
“까탈스럽긴. 그런데 여기 이분은 누구신가?”
“알아서 뭐 하려 그러십니까?”
준이치는 내내 까칠하게 굴었으나, 레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외려 웃으
며 몸을 숙여 현우에게 인사를 해 왔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레온이라고 합니다. 당신의 이름을 알 수 있겠습니
까?”
“ ,
찬영입니다.”
찬영에게는 미안하지만 당장 생각나는 이름이 그것뿐이었다.
“찬영. 멋진 이름이군요. 하지만 본인의 이름이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러면서 눈을 둥그렇게 휘며 웃는데 후광이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을
홀릴 만한 외모였다. 하지만 마계에서도 현실에서도 미인을 잔뜩 봐 왔던
현우는 거기에 넘어가지 않았다.
“맞는데요?”
“뭐, 본인이 그 이름을 원한다면야. 그렇게 불러 드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면서 손을 내뻗는데 그 앞을 검이 가로막았다.
“더 접근하지 마십시오.”
“이런, 질투하나? 준이치.”
“이름 부르지 말라 하지 않았습니까?”
“대신 너도 내 이름을 부르면 되지 않나.”
“절대 싫습니다.”
준이치의 날 선 목소리에 레온이 몸을 바로 세웠다. 이어 골목길로 다른 각
성자들이 들어섰다. 하나같이 똑같은 제복을 착용하고 있고, 가슴에는 기이
한 문양이 새겨진 배지를 착용하고 있었다.
“
변태.”
“뭐가 말인가?”
준이치는 말없이 그들의 복장을 바라보았다. 복장부터 시작해서, 착용하고
있는 액세서리, 태도까지 전부 마니악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미국의 ‘가디언’이었다. 만만치 않은 상대란 소리였다.
“유키.”
“네! 호출은 아까 전에 끝마쳤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새로운 무리가 나타났다. 일본의 거대길드 오로치
길드의 길드원이었다.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져 갔다.
새로이 등장한 이들을 바라보던 레온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현우에게 물었
다.
“어떻습니까? 원하신다면 제가 저 위험한 사람들로부터 지켜드릴 수도 있
는데요.”
둘 다 비슷한 놈이면서 뭐래? 현우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장담컨대 저들보단 이쪽이 훨씬 신사적입니다.”
“헛소리도 일품이군요.”
준이치가 비웃듯이 말했으나, 레온은 그를 깔끔하게 무시했다.
“
정말입니다. 언제까지나 동생 밑에서 보호만 받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차
라리 이쪽으로 와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원하는 건 뭐든 들어드리겠습니
다.”
레온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설탕 발린 소리를 내뱉었다. 하지만 현우는 거
기에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런 이유로 상황을 봐가면서 슬슬 뒤로 물러
났다. 그리고 뒷발로 차올린 돌을 손으로 낚아채서 골목길 입구로 던졌다.
어찌나 은밀하고 빨랐던지 그를 눈치챈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쿵!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자연히 시선이 돌아갔고, 그 틈에 현우는 현장에서
몸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준이치와 레온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거기에
는 아무도 없었다.
“
하
준이치가 검을 움켜쥔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어디서도 기척이 느껴
지지 않았다.
“유키.”
“네!”
준이치의 비서나 마찬가지인 유키는 감각계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가진 힘
이 강하지는 않았지만, 숨어 있는 자를 찾거나 추적하는 데 큰 재능을 가지
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유키도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흔적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 ?”
흔적을 잡아내지 못한 건 유키뿐만이 아니었다. 레온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을까.”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환상이라고 하기엔 목격자가 너무 많았
다. 추적에 능한 길드원이 나서서 찾아보았지만, 결과는 유키와 다르지 않
았다.
“신기한 일이군.”
준이치는 현우가 사라졌고, 찾을 수 없음을 확인하자마자 그대로 골목길을
벗어났다. 그 뒤를 유키가 황급히 따르고, 남은 길드원은 쓰러진 사람을 챙
기기 시작했다.
이들의 출신지를 알아 두면 여러모로 쓸모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흐음.”
레온도 그걸 알기에 쓰러진 사람이 탐났지만, 쉽사리 움직이지는 않았다.
여기 있는 길드원들은 ‘가디언’의 정예가 아니다. 그저 시간 남는 자들을 끌
고 왔을 뿐이다. 반면 준이치는 길드원의 핵심 인력을 끌고 온 것 같았다.
면면이 낯익다.
“오늘은 물러나야겠군.”
레온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느낌이 묘하군.’
힘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약하게 보이느냐면 그것도 아니
었다. 깊숙한 곳에 묻어 둔 본능이 그를 볼 때마다 꿈틀거렸다. 지금까지 이
랬던 적은 없는데.
‘뭐, 좀 더 두고 볼까.’
레온이 발걸음을 옮기자, 제복을 입은 이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독특한 복
장을 입고 지나가는 그들의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코스프레인가?”
“아니. 저거 가디언 길드의 복장 아냐?”
“가디언 길드는 미국 길드잖아. 여기 왜 있겠어?”
“하지만 저기 선현 길드가 있잖아. 모종의 이유로 방문한 게 아닐까?”
들려오는 소리를 잡아채 들은 레온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쏟아지는 관심이
제법 기껍다. 어느 애송이는 질색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어느 애송이,
준이치는 마침 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유키. 아까 잡은 사람들에서 얻은 정보는 언제까지 올릴 수 있습니까?”
“하루 내로 해결하겠습니다.”
“반나절.”
“네, 반나절 내로 올리겠습니다.”
그제야 준이치는 느긋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지선우의 다큐멘터리를
보자마자 빠르게 한국으로 왔는데, 운이 좋게도 그 형을 봤다. 방송을 전부
믿는 건 아니지만, 내용대로라면 내돌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운이 좋았나.’
운과 별개로 지현우에 대한 이미지는 나빴지만 말이다. 준이치, 그는 무능
력하고 약한 것을 혐오했다. 그리고 지선우의 형은 전형적인 약자로 보였
다. 남에게 기대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거머리.
1세대이기에 정말 무능력자일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힘을 감추고 있다 생
각했는데, 아니었나. 그럼 역시 그 커다란 몬스터의 도움으로 마계에서 살
아남아 온 것인가.
‘그게 가능한가?’
준이치도 마계에 끌려간 적이 있었다. 2세대 각성자였으니까.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진 몬스터가 싸고돈다고 해도, 쉽게 살아남을 환경은 아니었다.
먹을 수 있는 것은 드물었고, 그나마도 그걸 얻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환경은 척박하고 몬스터의 종류는 다양하다.
‘모르겠군.’
좀 더 파고들어야 할 것 같았다. 요즘 선현 길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포
함해서 말이다. 지선우는 갑자기 해외로 불려 갔고, 1세대를 지키던 평화
길드의 길드장도 제주도로 불려 갔다. 그런데다가 갑자기 선현 길드를 찾아
온 피닉스 길드의 부길드장. 길드 근처를 배회하던 수상한 자들.
이 모든 것을 이으면 무언가 나올 것 같았다.
적에 대해서는 많이 알수록 유리하지.’
그러니 이 모든 것을 파고들 생각이었다.
‘
한편, 이 모든 것을 내내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31.
“
실패했군요.”
겉면이 어둡게 코팅된 차 안, 핸들을 붙잡고 있던 남자의 말에 옆에 앉아 있
던 또 다른 남자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제기랄.”
그는 이를 악물며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그냥 실패했으면 다행이지. 하필이면 이와모토 측에 몇 명이 잡혀갔어.”
“회수할 수는 없는 겁니까?”
“그게 쉽겠냐. 지선우보단 뒤처진단 평을 받고 있긴 하지만, 그도 엄연한 S
급 각성자다. 어지간한 각성자는 덤벼들어도 뚫지 못해.”
“회수할 수 없다면 처리는요?”
“그도 쉽지는 않지. 아니, 왜 하필 여기서 일본과 미국이 나타나지? 그나마
러시아는 없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운이 나빴습니다. 그나저나 아까 추적했던 사람이 지현우는 맞는 겁니까?
길드에서 쉽사리 내보낼 리 없을 텐데요.”
맞을 수도 있고, 재수 없으면 미끼일 수도 있지.”
시대가 어느 때인가. 기이한 능력을 가진 각성자가 나타나고, 그 못지않은
아이템들도 쏟아져 나왔다. 얼굴을 바꾸거나 혼란을 주는 아이템이 있을 수
도 있었다. 게다가 상대는 선현 길드. 막대한 권력과 부를 자랑하고 있으니
그런 걸 가지고 있을 법도 하다.
“곤란하군요.”
핸들은 잡은 남자가 버릇처럼 안경을 추켜올렸다.
“다음 작전을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잠시 차 안에 침묵이 흘렀다.
“
*
드넓은 공동. 그 안에서 거대한 얼음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자라난 얼음꽃은 이내 성장을 멈추더니, 산산조각 나며 전면으로 비산했다.
“끼에에엑!”
무시무시한 속도로 쏘아진 얼음 조각은 전면에 위치한 대규모의 몬스터 무
리를 전부 쓰러트렸다. 의기양양하게 몰려왔던 것치고는 초라한 최후였다.
“정리!”
선우가 물러나자 따라 들어온 1팀이 빠르게 쓰러진 몬스터들을 정리하며
확인 사살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선우는 연결되지 않는 폰을 꺼내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졌지만, 역시나 안에서 전자기기는 작동하지 않는다.
그런 그의 옆에 케로가 앉아서 앞발을 할짝이다 하품을 내뱉었다.
“캬앙!”
귀여운 그 모습을 무심결에 바라본 1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도 잠시, 다시 긴장이 맴돌기 시작했다. 케로가 보기와는 다른 존재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중간보스를 만나서 활약한 것이 케로였으니까. 늑대의 형태를 가진 거대한
중간보스는 대뜸 뛰어든 케로에 의해 박살 났다.
다리를 물어서 뜯어냈으며, 입에서 청백의 불꽃을 내뿜어 몸을 녹여 냈다.
날뛰는 모습만 보면 미친 것 같이 보였다. 여차하면 케로마저 제압해야 하
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다행히 중간 보스를 처리하고 나서는 다시 작
아져서 종종걸음으로 따라다니기만 했지만, 그 모습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나저나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
“S급 이상의 던전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느껴지지 않아.”
높게 잡아봐야 A+급. 그 정도의 던전으로 느껴졌다. 만약 더 높은 등급의
던전이었다면 지선우도 저렇게 여유를 부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이 느끼는 위화감을 선우도 느끼고 있었다.
‘이상해.’
생각보다 던전 등급이 낮게 느껴진다. 같이 들어온 각성자들 또한 이상했
다. 각성자가 적은 나라라는 점을 감안해도 그 수준이 너무 낮았다. 그나마
S급 각성자가 셋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들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마
치 시간을 끄는 사람처럼.
“오, 정말 대단합니다! 역시 소문대로군요.”
“정말이요. 저희가 손대지 않아도 금방 클리어할 것 같습니다.”
시시덕거리며 말을 걸어오는 모습이 거슬렸다.
필사적으로 매달려서 더 위험할 줄 알았는데, 케로와 1팀만 풀어놔도 해결
할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물론 던전이란 언제나 유동적이라 진짜로
그렇게 두지는 않을 테지만.
선우는 폰을 품에 넣으며 말했다.
“속도를 더 높입니다.”
“네!”
일단은 최대한 빠르게 던전을 돌파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
서걱.
역수로 쥔 단검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몬스터가 쓰러져 나갔다. 그 모습에
같이 던전에 들어온 다른 각성자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평화 길드의 길드장. 국내에서 5위권에 머무는 길드의 길드장이기에 어느
정도 강하리라 예상하긴 했지만, 그 예상은 금방 깨졌다. 한도진은 사람들
이 생각하는 것보다 강한 힘을 가진 실력자였다.
“뭐야. 언제부터 저렇게 강했어?”
앞에서 탱을 서던 혜선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의 길드원에게 물었다.
“길드장님이 모르시는데,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아니, 그도 그렇지만.”
처음 지선우를 상대할 땐 저 정도로 강한 것 같지 않았는데. 힘을 감추고 있
었던 건가. 혜선은 머리를 긁적이다 앞으로 힘차게 발을 내디디며 몬스터를
방패로 밀기 시작했다.
“에라이!”
개나 소나 다 힘을 감춰 대니, 정직한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원래도 힘을
갈구하던 욕망이 더 커졌다.
‘강해지고 싶다.’
더, 더 강해져서 가장 위에 서고 싶다. 그걸 위해 혜선은 무엇이든 할 생각
이었다. 그러니 여기서 뒤처지고 싶지 않았다.
쿵!
밀리던 몬스터들이 쓰러지자 그 위를 방패 아래의 뾰족한 부분으로 내리찍
었다.
빨리 해치우자!”
혜선의 고함에 뒤를 따르던 각성자들이 기합을 넣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사이 도진은 어느새 저 멀리 앞서나가고 있었다.
“
*
던전 클리어!”
마지막 보스가 쓰러짐을 확인한 각성자가 크게 외쳤다. 길게만 느껴졌던 던
전 공략이 드디어 끝났다. 밖으로 향하는 문이 열리자마자 선우는 가장 먼
저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선우가 나오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이 멀리서 플래시를 터트렸다. 던
전에서 폭력을 휘두르던 각성자는 막 던전에서 빠져나왔을 때, 가장 예민하
다.
그렇기에 보통은 접근을 막았지만, 선우는 달랐다. 그는 단 한 번도 약한 모
습이나 폭력적인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기에, 멀리서나마 기자들의 취재가
허용되었다.
‘그래, 그랬는데.’
오늘따라 여기저기서 터지는 플래시 빛이 거슬렸다. 선우는 매서운 눈초리
로 앞을 바라보았다. 당장 전부 꺼지라 하고 싶었다. 여기서 묶여 있을 시간
이 없다. 얼른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서 형을 봐야만 했다.
선우는 재차 폰을 꺼내 들었다. 마지막 보스와 싸울 때 망가졌는지 화면이
새카맣다. 그게 마치 불길한 징조처럼 느껴져서 더 초조해졌다. 그리고 그
“
순간, 옆에서 커다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캬오오오!”
어느새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케로가 기자들을 향해 포효하고 있었다. 중간
보스를 뜯어 버릴 때처럼 본격적인 건 아니었으나, 비각성자인 기자들은 몸
을 움츠렸다.
“몬스터! 몬스터다!”
“도망쳐!”
기겁한 일부가 도망치고, 주위를 막고 있던 각성자들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때, 1팀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잠깐, 잠깐만요!”
1팀의 팀장 아인은 앞으로 나서 다가오는 각성자들을 가로막았다.
“적이 아닙니다. 아니에요! 테이밍된 몬스터입니다!”
그 말에 미처 도망가지 못했던 기자들이 눈을 반짝였다.
“테이밍 말입니까?”
“지선우 씨가 테이밍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아니에요. 일단 물러나요. 몬스터가 흥분합니다!”
아인은 단호하게 소리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사람들과 케로 사이에 낮
은 돌벽이 생겼다. 그제야 사람들은 조금씩 흥분을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길드장님, 어떻게 할까요?”
그제야 아인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선우에게 의견을 구했다.
“무시합니다.”
“네?”
그래도 되나? 지금까지 선우가 만들어 둔 이미지가 있는데. 아인은 당황했
지만, 이내 납득했다. 아무래도 두고 온 형이 걱정된 탓이겠지. 그녀 또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울었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럼 이동하겠습니다.”
금방 1팀이 선우를 둘러쌌다. 그리고 케로도 다시 작은 모습으로 돌아와 선
우의 뒤를 따랐다.
“지선우 씨!”
몇몇 기자가 목놓아 선우를 불렀지만, 깔끔하게 무시했다.
“인터뷰는 한국으로 돌아가서 하겠습니다!”
그래도 달라붙는 기자는 아인이 상대했다. 그렇게 케냐에 파견되었던 선현
길드의 길드원들은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
던전 클리어!”
제주도의 던전도 마찬가지의 상황을 맞이했다.
“와씨. 인간이 할 짓이 아니네.”
혜선은 던전을 나오자마자 헐떡이며 주저앉았다. 위험하다 한 던전치고는
수월한 편이었지만, 문제는 스케줄이었다. 중간중간 쉬면서 컨디션을 체크
해야 하는데 앞에서 한도진이 날뛰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속도가 빨라졌다.
그 때문에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니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남아 있지 않
았다. 명색이 S급 각성자인 혜선이 이러하니, 다른 사람들은 더했다. 일부
는 나오자마자 그대로 기절하기도 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도진은 나오자마자 혜선에게 보고하고 그대로 사라졌다. 미처 잡기도 전이
었다.
“아니! 이대로 가면!”
어차피 리더는 탱커인 혜선이긴 했지만, 이래선 곤란하다.
“으아아아!”
혜선은 소리를 지르며 그 자리에 드러누웠다. 오늘따라 유독 하늘이 새파랬
다.
“괴물새끼들.”
“
지선우도 그렇고 한도진도 괴물이다. 언제가 돼야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
까. 혜선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앗, 길드장님! 이런 데서 주무시면 안 됩니다!”
“몰라, 조금만 잘게.”
그리고 이내 코 고는 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32.
“
으아아아!”
거꾸로 매달린 요정이 비명을 질렀다.
“살려, 살려 주세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건 계약 위반입니다.”
필사적으로 소리쳤지만, 지금 여기 요정을 도와줄 이는 하나도 없었다.
“제발 놔주세요!”
“싫은데.”
“알베르크 님!”
요정은 훌쩍이며 바로 앞에 나른하게 늘어져 있는 마족의 이름을 외쳤다.
“풀려나고 싶으면 현우가 어디로 갔는지 말해.”
“안 돼요. 안 됩니다. 비록 포털이 열리긴 했지만, 그곳은 아직 청정구역이
라고요. 알베르크 님은 못 가요!”
갈지 말지는 내가 결정해.”
“으아아아!”
요정은 묶인 상태로 펄떡거렸다.
‘환장하겠네!’
그러나 아무리 날뛰어도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의 주인께서는 요정 하나
둘쯤 사라져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요정의 수가 워낙 많으니까. 이
대로 끝없는 고문에 시달리느니 차라리 말해 주는 게 낫지 않을까. 요정은
엉엉 울었다.
“
*
선현 길드로 먼저 귀환한 이는 도진이었다. 그가 오자마자 맞이한 이는 눈
밑이 새까매진 찬영과 그에 비해선 편안해 보이는 현우였다.
“오셨군요.”
“왔어요?”
현우는 눈가를 쓱쓱 문지르며 도진을 반겼다. 그런 현우를 보며 도진은 잠
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누군가가 반겨 주는 상황이 익숙하지 않았던 탓이
다. 예원이 사라진 뒤로 그 누구도 사심 없이 그를 반겨 준 적이 없었다.
“힘들었지요?”
가까이 다가오는 현우의 모습에 도진은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
다. 그러자 그만큼 현우가 가까이 다가섰다. 다가오는 그의 얼굴에는 심술
이 서려 있었다.
“왜 도망쳐요?”
도망? 자신이 도망친 거라고?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
다.
“이리 와요. 힘들었으니 좀 쉬어요.”
그러고는 소파를 탁탁 친다. 그 손짓에 이끌려 소파에 누우니 담요를 위에
덮어 주었다. 내내 현우가 두르고 다녀서 그런지, 폭신함 속에서 그의 향이
느껴졌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찬영은 그런 둘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현우를 지켜 줄 이가
왔으니, 그는 가끔 와서 진상을 피우는 미국 길드만 상대하면 될 터였다.
‘상황이 이상해.’
선우나 도진이 눈치챈 걸 찬영이라고 몰랐을 리 없었다. 부길드장으로 지내
온 세월이 얼마던가. 그동안 늘어난 눈치가 이상함을 잡아냈다. 모든 걸 혼
자서 감당하긴 어려웠다.
‘길드장님, 빨리 돌아오세요.’
찬영은 빌고, 또 빌었다.
다행스럽게도 며칠 뒤, 이어 선우가 도착했다. 그와 동시에 찬영을 달달 볶
던 미국 길드도 더는 찾아오지 않았다. 그 때문에 끔찍한 접대로부터 해방
되긴 했지만, 이제 미심쩍은 부분을 짚어 나가야 했다.
“그럼 그동안 형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단 말입니까?”
선우는 찬영에게서 그동안 있었던 일을 전해 듣고 이마를 짚었다. 다행히
형은 무사했지만,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크게 후회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자연 찬영을 바라보는 선우의 눈이 곱지 않았다. 그도 어쩔 수 없었음을 알
지만, 그래도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피닉스 길드라.”
미국에서 가디언 길드가 정의를 뜻한다면, 피닉스 길드는 좀 달랐다. 정의
를 세우기보단 좀 더 개인적인 이익에 치우친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전체적
인 이미지는 가디언 길드가 피닉스 길드보다 훨씬 좋았다.
“찾아온 건 피닉스 길드뿐이지만, 길드 주변에서 가디언 길드와 오로치 길
드의 사람도 목격되었습니다.”
쟁쟁한 길드가 여럿 목격되었는데 그게 우연일 리는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1세대와 접촉하려는 속셈인 것이 뻔히 보였다.
“그 외에는 없습니까?”
“2팀 팀장이 그 외에도 수상쩍은 각성자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쪽은 누구인지 알아냈습니까?”
“아직 알아내진 못했지만, 추측으론 국내 사람인 듯합니다.”
그 말을 듣자 곧바로 떠오르는 단체가 하나 있었다. 헌터관리국. 떨어져 있
던 단서들이 하나로 모이기 시작했다.
‘김철수.’
지금의 국장이라면 헌터관리국, 정확히는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 외국과도
손잡을 만한 위인이었다. 케냐의 던전 건은 피닉스 길드가, 국내의 던전 건
은 헌터관리국이 주도하고 나서서 속였다면 지금까지의 일들이 모두 말이
된다.
형은 달리 큰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쉬고 싶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런 사람을 굳이 끌어들이려는 그들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그놈의 힘이 뭐
길래.
안 그래도 못마땅하던 헌터관리국인데, 이제는 악감정마저 생겨났다.
‘생각해야 한다.’
이번은 무사히 넘어갔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란 법은 없었다. 그러니 형을
지키기 위해선 좀 더 강한 힘을 가져야 했다. 그것이 무력이든 권력이든.
선우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감정을 저 아래로 가라앉
혔다. 이제 곧 형을 만날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선우야!”
반갑게 달려오는 현우를 보자마자 선우는 그를 끌어안았다.
“형.”
앞으로는 절대 옆에서 떨어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0년간 떨어
져 지낸 적이 있으니, 이 정도 기간은 괜찮으리라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보지 못하는 동안, 그립고 그리워서 미쳐 버리는 줄 알았다.
선우는 뒤에서 인사를 해 오는 도진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형제간의 해후를
즐겼다. 현우의 뒤에 찰싹 붙어서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으휴, 아직 어리다니까.”
현우는 자신보다 머리 한 개는 더 큰 동생을 붙이고 다니면서 태연하게 뒹
굴었다. 그러나 그것도 그날 하루였을 뿐이다. 선우는 할 일이 많았기에 더
는 붙어 있기만 할 수는 없었다.
“쉴 수는 없는 거야?”
안타까움에 말해 봐도 선우는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길드장이니까. 필요한 일이야.”
선우는 이 자리에서 내려갈 생각이 없었다. 형과 둘이서 오붓하게 지내면
좋기야 하겠지.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다 위험이 닥치면? 선우는 강했
으나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여럿이 있어야 해결되
는 일도 있는 법이었으니까.
“나도 아쉬워.”
애틋한 얼굴로 몇 번이나 돌아본 선우는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러니
자연 도진과 지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도진 씨도 길드장이라고 했잖아요. 여기 있어도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평소에도 제 일은 거의 부길드장이 처리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되나? 그러다 부길드장에게 길드를 뺏기면 어쩌려고. 자신이 너무
부정적인 건가? 현우는 누워서 도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말 괜찮습니다. 어차피 길드장 자리도 내려놓으려고 했습니다.”
“힘들게 세운 길드 아닌가요?”
“목적을 이루었으니 이제 필요 없습니다.”
가차 없이 말하는 모습이 어찌 보면 냉정해 보이기도 했다. 의외의 모습에
눈만 깜박이고 있자, 도진이 그를 눈치챈 듯 부연 설명을 했다.
“이제 제가 없어도 길드는 잘 굴러갈 겁니다. 한 사람의 힘으로 유지되는 길
드라면, 차라리 제가 없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아닐 것 같은데.”
도진을 알게 되면서 느끼는 건데, 그는 여러모로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선량한 사람이기도 했고. 그런데 왜 저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현우의 말에 도진이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
았다. 뭐, 본인이 그렇다니 제삼자가 끼어드는 것도 이상한 모양새겠지. 그
걸 알면서도 나가는 말은 생각과 다르다.
“예원 누나는 오빠가 참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했는데.”
“좋은 사람.”
“
도진의 표정이 흐려졌다.
“모르겠습니다. 제가 좋은 사람인지.”
“왜요?”
“예원이는 상냥하고 다정한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런 예원이에게 부
끄럽지 않은 오빠가 되고 싶어서 노력했습니다.”
“그럼 그 노력은 결과를 맺은 거네요. 예원 누나는 단 한 번도 오빠에 대해
나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요. 멋지고 다정하고 상냥하고.”
몇 번이나 말했던 수식을 다시 반복한다.
“그런 완벽한 사람이라고.”
“예원이가 그랬습니까?”
“네.”
도진은 고개를 떨구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과분한 평가군요. 저한테.”
목소리가 잠겼다. 그리고 도진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현우도 더는 말하
지 않았다. 그저 도진을 위로하듯 손을 뻗어 무릎을 어루만졌을 뿐이었다.
*
선우는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최대한 일정을 축소하여 일찍 돌아왔지만,
그를 반기는 건 산더미 같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형의 옆에
있고 싶었지만, 그 옆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일도 있었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아래층으로 내려와 있었다.
지금 이 시각에도 형은 한도진과 함께 있겠지. 그게 못마땅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최대한 빨리 일을 해치우고 다시 형 곁으로 가는 게 베스트다.
그렇게 선우가 바쁘게 일하고 있는데, 비서가 손님이 왔음을 알려 왔다.
“손님?”
지금 올 만한 손님이 없을 텐데. 설마 또 피닉스 길드에서 진상을 부리려고
온 건가. 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이 기회에 단단
히 경고를 할 셈이었다. 하지만 찾아온 손님은 선우가 생각하던 이가 아니
었다.
“최무혁.”
헌터관리국의 최무혁이었다.
“올려 보내십시오.”
─ 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최무혁이 길드장실을 찾았다.
“안녕하십니까?”
“그다지 안녕하지는 못하군요. 왜 찾으신 겁니까?”
선우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얼마 전에 일어났던 기이한 일로 의심하고 있는
헌터관리국 소속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도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고
말이다.
33.
선우는 물, 무혁은 불.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여러모로 잘 맞지 않았다.
“그야 용건이 있으니 찾아왔겠지요.”
무혁은 날을 세우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그게 무슨 용건입니까?”
“당신은 현재의 헌터관리국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걸 굳이 물어야 알 수 있나? 자기 이득 챙기기에 바쁜 쓰레기, 선우에게
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처음 세워졌을 땐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국장이 김철수로 바뀐 뒤로 헌터
관리국은 길드들을 적대하기 시작했다.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건 기본이
요, 헌터관리국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뭐든 했다. 그러니 이미지가 나쁠 수
밖에.
“그걸 굳이 물어봐야 압니까?”
“아니요. 사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긴 합니다.”
무혁은 쓰게 웃었다. 그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기에 수많은 길드의
콜을 무시하고 헌터관리국에 몸담았다. 개인의 세력인 길드가 덩치를 불려
나가면 국가가 흔들린다. 그러니 국가 기관인 헌터관리국을 키워서 길드를
견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남들과 다른 선택을 했다.
초반에는 그 생각이 옳은 줄 알았다. 헌터관리국의 국장도 각성자였고, 그
는 현 세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무리하게 나서기보단 차근차근 헌터
관리국을 키워 나가려 하고 있었다. 무혁도 그에 동의했다. 그런데 상황이
뒤집혔다.
비각성자가 관리국 국장으로 내려오고, 원래 있던 국장이 좌천당했다. 각성
자니, 비각성자니. 그건 사실 상관없었을지도 모른다. 누구든 이상이 맞기
만 하면 되었으니까.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현재 국장은 욕심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욕심은 헌터관리국을 위태롭게
합니다.”
순수하게 헌터관리국을 키우려는 욕심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선우는 조금 자세를 달리했다.
“그래서 하고픈 말이 뭡니까?”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전 위로 오르고 싶습니다.”
더는 아래에서 맞춰 주기만 하고 싶지 않았다. 원래도 남 밑에서 일할 성격
은 아니었다.
“쉽지 않을 텐데요.”
“위에 고인물이 있으니까요.”
무혁은 그 고인물을 치우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이의 도움이 필
요했다. 가능한 혼자 처리하고 싶지만, 그게 불가능함을 알았으니까.
“그러니 저와 손을 잡읍시다.”
설득력 있는 이야기였지만, 선우는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무혁의 생각은
알겠다. 지금 상황을 바꾸고 싶어 한다는 걸 말이다. 그래서 더욱더 의문이
들었다.
“왜 하필 지금입니까?”
지금까지도 나설 기회는 많았을 텐데, 인제 와서 사이도 나쁜 선우에게 협
력을 요구하는 이유가 뭘까.
“지금이니까요. 요즘 헌터관리국의 움직임이 이상합니다. 국장이 정보부와
뭔가를 하는 것 같은데, 그걸 현장직에게는 알려 주지 않고 있습니다. 정작
대부분의 일을 해결하는 건 관리부인데 말이지요.”
“이상한 움직임 말입니까?”
“네. 그래서 더는 참을 수 없다고 여기게 된 겁니다.”
“좋습니다. 그럼 손을 잡기로 하지요.”
오래 고민할 일도 아니었다. 여전히 무혁이 못마땅하기는 했지만, 이로 인
한 이득을 생각한다면 손을 잡는 게 맞았다. 그렇게 둘은 은밀한 계약을 하
였다.
*
무혁이 돌아간 뒤, 다시 일에 몰두한 선우에게 다른 손님이 찾아왔다.
“약속 지켜요!”
아윤이었다. 화사한 원피스를 입고 온 아윤은 길드장실의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는 당당하게 계약이행을 요구했다.
“좋습니다. 그럼 장소를 준비하겠습니다.”
“아니, 아니에요. 이번은 딱히 장소를 준비할 필요가 없어요.”
“그럼?”
“지선우 씨. 당신이 할 일은 딱 하루, 현우 씨를 저에게 빌려주는 거예요.”
“하루 말입니까?”
“네! 이상한 짓은 하지 않을 거예요. 맹세해요.”
그러면서 새끼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니 표정 좀 펴요.”
“뭘 하려고 하루나 필요합니까.”
“외출 좀 하려고요.”
“불가합니다.”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외출을 허락한단 말인가.
불안하면 따라오면 되잖아요. 아니면 평화 길드 길드장을 붙이던가. 그 사
람은 믿는 것 같던데.”
그야 불공정 계약을 체결한 상대니까 말이다.
“대체 뭘 하려고 합니까?”
“같이 놀 거예요.”
“네?”
“논다고요. 노는 거 몰라요?”
“뭘 하든 횟수는 차감됩니다.”
“알아요. 그래도 놀 거예요.”
아윤은 당당한 태도로 팔짱을 꼈다. 어떻게 보면 3번의 기회 중 1번을 날리
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걸 알지만, 물러날 수 없었다.
‘안전한 방 안에서 대화를 좀 한다고 해서 상대가 정보를 다 털어놓을까?’
답은 아니요. 사방이 자기편이고 안정된 상태인데, 겨우 한 번 본 상대에게
뭣 하러 진실을 뱉어 낸단 말인가. 아윤이라도 그렇게는 안 한다. 그러니 조
금 강수를 두기로 했다.
‘사람과 친해지는 건 쉽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예쁘게 생기고 활발한 아윤은 쉽게 다른 사람에게 다가
가곤 했다. 그리고 누구든 결국엔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
“
걸 노리고자 했다.
“전 바쁩니다.”
“그러면 평화 길드장을 보내라니까요.”
“평화 길드장을.”
선우는 잠시 이마를 짚었다. 형과 그, 둘만 보내기는 죽어도 싫었다. 안 그
래도 최근 도진이 형에게 편하게 굴기 시작하는 것 같아서 거슬리던 참이었
는데.
“시간을 내 보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해결.”
“하지만 외출은 형이 동의해야 합니다.”
“그건 제가 물어보면 안 될까요?”
선우가 물어봤다가는 외출을 거절할 만한 말만 늘어놓을 것 같았다. 하여간
과보호라니까. 아윤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안 됩니다.”
“이상한 말은 안 할게요.”
“이상한 말이 뭡니까?”
“그건 비밀!”
아윤이 지독하리만치 끈질기게 매달렸지만, 선우도 만만치 않았다. 형을 위
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 그였다. 이런 정도의 피곤함은 감수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외출 여부는 선우가 물어보기로 했다. 곧바로 위로 올라간 선
우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마침 현우는 거실에 있었다. 있었는데.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선우의 목소리가 불쾌함에 낮아졌다.
“응? 선우 왔어?”
“형.”
“왜?”
현우가 순진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거실 바닥의 러그 위에 누워 있는
그는 도진의 허벅지를 베고 있었다.
“옆에 쿠션 있잖아.”
선우는 부글거리는 속을 누르며 침착하게 말하려 애썼다.
“아, 그렇지.”
“그런데 왜 그러고 있어?”
“어쩌다 보니?”
처음에는 장난삼아 베고 누웠다. 근육질의 허벅지는 빈말로라도 편하지 않
아서 금방 일어나려고 했지만, 이후 도진의 반응이 제법 재밌었다. 그래서
장난치며 버티다 보니 이 시간까지 이른 것이다.
“불편하잖아.”
“딱히 그렇지도 않아.”
적어도 높은 돌 위에서 벌벌 떨며 자던 때보단 편하다.
“불편해. 목이 들렸잖아.”
선우는 누워 있는 현우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고마워. 그런데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
“급한 일은 대충 처리했어. 그리고 볼일이 있어서.”
“뭔데?”
“아윤이 찾아왔어.”
그 발랄하던 아가씨. 현우는 금방 아윤을 떠올렸다.
“같이 외출하자는데. 싫으면 거절해도 돼.”
“외출? 어디로?”
“그건 모르겠어.”
나 혼자?”
“그건 절대 아니야. 내가 따라갈 거야.”
그럼 딱히 함정은 아니라는 소리구나. 현우는 잠시 고민했다. 창밖으로 보
이는 하늘이 높고 파랗다. 외출하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그럼 한번 나가 볼까?”
“
결정하고 나자 그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옷을 입고 나오자마자 미리 준비된
것처럼 경호 인력이 붙었다.
“오랜만이죠? 오늘 잘 부탁드려요!”
그렇게 말하는 아윤의 옆에는 어느새 나타났는지 자윤도 붙어 있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무려 S급 각성자가 3명. 무슨 일이 일어나려야 일어날 수 없는 최강의 파티
가 만들어졌다.
“그 전에 잠시만.”
아윤은 먼저 후드를 눌러쓴 도진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합격.”
그다음엔 선우 앞에 섰다.
“오늘도 정장이에요? 혹시 옷 갈아입고 올 수 없어요?”
가능합니다.”
“그럼 바꿔 입고 오시죠.”
왜 그래야 하느냐는 듯한 시선에 아윤이 가슴을 펴고 말했다.
“정장 입은 상태로 마스크 쓰면 이상하잖아요! 설마 그대로 나갈 생각이었
어요? 요즘 어떤 상태인지 몰라요?”
다큐멘터리 방송 이후, 선현 길드와 각성자들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아직
도 그 열기가 식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얼굴이 알려진 선우와 현
우가 그냥 밖으로 나선다?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는 불 보듯 뻔했다.
“그러니 가립시다.”
“전부 마스크와 모자를 쓰면 그게 더 수상하지 않겠습니까?”
“전 안 쓸 거예요.”
“얼굴이 알려진 정도는 비슷할 것 같은데요.”
아윤은 어려서부터 방송물을 먹으면서 자신의 이미지를 활용하는 법을 배
웠다. 그 때문에 자신을 내놓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자윤과 아윤은 제법 얼굴이 알려진 편이었다. 지선우만큼은 아
니었지만.
“오빠는 분장할 거예요. 저는 아니지만.”
“괜찮겠습니까?”
“……
괜찮아요. 저는 각성자가 아니라서 얼굴을 알려도, 오빠만큼은 알아보지
못하더라고요. 자자, 그러니까 빨리 갈아입고 오세요!”
어쩔 수 없이 선우는 옷을 갈아입고 나와 마스크에 모자를 썼다. 그렇게 모
두 얼굴을 가리고 나란히 서니 참으로 수상쩍어 보였다. 만약에 아윤마저
가렸으면 더할 뻔했다.
“그럼 가죠!”
아윤은 씩씩하게 앞장섰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백화점이었다. VIP로 입장
한 그녀는 곧바로 가장 위층으로 갔다. 퍼스널 쇼퍼가 그들을 맞이했고, 곧
바로 많은 옷이 날라져 왔다.
“자, 그러면 옷을 갈아입어 볼까요? 누구부터 할래요?”
그 말에 현우가 냉큼 손을 들었다.
“
34.
“
도진 씨 먼저 했으면 좋겠습니다!”
“도진 씨? 그러네요. 확실히 옷이 너무 별로네요.”
암만 유행을 타지 않는 기본이라지만 너무 오래된 느낌이었다.
“……동생이 사 준 옷입니다.”
“동생이라면… 아! 제가 잘못 봤나 봐요. 다시 보니까 무척 잘 어울리는 것
같네요.”
아윤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말을 바꿨다.
“괜찮습니다.”
“네, 음. 그럼 옷을 골라 볼까요?”
“제가 직접 골라 보고 싶습니다!”
이번에도 현우가 나섰다. 저번에 점퍼를 빌려준 보답을 할 겸, 새로 옷을 맞
춰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동생이 준 용돈이었지만, 돈도 있었으니
까. 한두 벌쯤이야 사 줘도 괜찮겠지. 그런 생각이었다.
“전 괜찮습니다.”
물러나려는 도진을 현우가 잡았다.
“입을 거죠?”
이어 물어오는 말에 도진은 더 물러나지 못했다. 가끔 현우는 선이 없는 것
처럼 접근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도진은 난감해하면서도 그에 맞춰 주
었다. 혹시나 동생의 이야기를 더 들려줄까 봐, 그리고 이러는 모습에 동생
이 생각나서.
“네.”
도진의 대답에 현우는 싱글벙글 웃으며 들어온 옷을 둘러보았다. 어떤 옷이
어울릴까? 패션 쪽으로는 조예가 없다. 마계에서야 거적때기만 걸치고 있
어도 되었고, 현대로 돌아와서는 선우가 옷을 골라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래서 일단은 적당히 눈에 들어오는 옷을 꺼내 들었다. 가을에 입기 좋은 가
벼운 스웨터였다.
“이거 입어 볼래요?”
도진은 얌전히 스웨터를 받아들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갈아입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충 고른 스웨터였지만, 몸이 좋아서 그런지 생각
보다 무척 잘 어울렸다.
‘아니, 저런 몸은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지?’
현우는 저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가 도진의 상체를 만져 보았다. 허벅지가
단단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전신이 흉기와도 같다. 그런데 그게 딱히 싫지
는 않았다. 그저 부러울 뿐이었다.
‘나는 왜 이런 근육이 안 생기는데!’
잔근육이 있긴 했지만, 저런 몸과는 거리가 멀었다. 괜히 심술이 돋아 손가
락을 세워 몸을 찌르자 도진이 움찔거렸다.
와우. 생각보다 잘 어울리네요. 그런데 뭐랄까.”
어느새 옆에 다가온 아윤이 도진의 덥수룩한 머리를 바라보았다.
“머리를 손질하면 훨씬 더 나을 것 같은데요. 오늘 머리도 하러 가 볼까요?”
“그거 좋네요!”
현우는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저는 이대로가 좋습니다. 지금이 편합니다.”
“하지만 불편할 것 같은데.”
얼굴이 못난 것도 아니니 눈을 가리는 머리카락만 치워 내도 훨씬 나을 텐
데. 본인이 저렇게까지 싫다면야. 현우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뭐, 아쉬운
건 아쉬운 거고, 옷이나 좀 더 입혀 봐야겠다. 스웨터, 패셔너블한 티셔츠,
세미 정장까지. 도진은 주는 대로 입고 나왔고, 그때마다 현우는 손으로 턱
을 문지르며 패션에 정통한 사람처럼 그를 살펴보았다.
뭘 입혀도 어울리니 어느 걸 사야 할지 고민이 됐다. 다 사도 될 만큼의 돈
은 있었지만, 동생이 힘들게 번 돈을 전부 쓸 수는 없었다. 진지하게 고민하
고 있자니 내내 소파에 앉아 지켜보던 선우가 다가와 등 뒤에 매달렸다.
“형.”
나도 옷 잘 입을 수 있는데. 왜 도진에게만 신경 쓰는지 모르겠다. 선우는
떠오르려는 불쾌감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애쓰며 현우에게 어리광을 부렸
다. 그 모습을 본 아윤과 자윤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지만, 조금도 상관하
지 않았다.
“
선우에게 중요한 것은 타인의 시선이 아니었다.
“아, 선우도 옷 입어 볼래?”
현우의 말에 선우는 배시시 웃으며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도진이
입은 것과 똑같은 스웨터를 가리켰다.
“저거 입어 볼래.”
어색한 태도를 보였던 도진과 달리, 선우는 남의 시선을 사로잡는 법을 알
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 한 바퀴 도니 절로 눈이 거기로 향했다.
현우는 저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그렇게 선우는 도진이 입었던 걸 고스란히 다시 걸쳤다. 마치 시위라도 하
는 듯한 모습이었으나, 현우만 그걸 몰랐다. 그저 동생도 옷을 입어 보고 싶
어 했는데, 자신이 배려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서 조금 미안해졌을 뿐이었다.
선우 다음에는 현우가, 다음에는 아윤이 옷을 입어 보았다. 그런 후, 옷을
사서 서로 선물했다. 아윤은 현우에게, 현우는 도진과 선우에게, 선우는 현
우에게.
“잘 입겠습니다.”
“고마워, 형.”
“아니, 고맙긴.”
선물이라고 사 주긴 했지만, 그 돈은 선우의 것이었다. 현우는 그게 어색해
서 볼을 긁적였다. 그렇게 선물하는 절차가 끝나자 다시 아윤이 나섰다.
자 그럼 쇼핑도 했으니 다음은 맛있는 걸 먹으러 가죠! 식당은 제가 예약
해 뒀어요.”
아윤이 예약해 둔 식당은 외진 곳에 있는 한정식 식당이었다. 간판을 달고
있지 않아 얼핏 보면 그냥 한옥 같아 보이는데, 식당이라니. 이런 곳이 있다
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직접 와 보니 호기심이 들어 이리저리 둘러보게 되
었다.
“어서 오세요.”
부드러운 인상의 주인은 그들을 안쪽의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방에 앉아
문을 여니 잘 정돈된 정원이 한눈에 보였다. 각자 자리를 잡고 앉으니 금방
따뜻한 물수건과 차가 나왔다.
“저는 잠시만 나갔다 올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아윤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잠시 화장실에 들를 생
각이었다. 이미 여러 차례 와 봤던 곳이라 발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이제 경계심은 많이 풀린 것 같고. 이대로 가면서 슬슬 질문을 던져 보는 게
좋겠다. 뭐부터 물어볼까?’
머리를 팽팽 굴리고 있는데,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뒤를 돌아
본 아윤은 직원복을 걸친 한 남자를 보았다. 그는 아윤에게 인사를 하였고,
아윤도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아 주었다. 그리고 지나치려는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얼굴이 있었다.
‘어?’
“ ,
변한 세상에서 새로이 두각을 드러낸 각성자는 몬스터를 잡음으로써 세계
에 평화를 가져왔다. 일종의 영웅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게 어디 전
부 선량하기만 하겠는가. 선과 악의 중간에 선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자도 있었다.
몬스터를 없애기보단 같은 사람을 해치며, 사회에 혼란을 가져오는 존재.
그들을 모두 이렇게 불렀다.
빌런.
사회의 악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목에는 현상금이 걸리는 일이 종종 있었
으며, 일부에게는 이명이 붙기도 했다. 저자의 이명은.
‘폭탄마.’
능력은 사람에게 손을 대서 터트리는 기폭. 사람을 수십이나 죽이고 현상금
이 붙은 자로 악독하기 이를 데 없는 자였다. 기민하게 움직여서 아직 거처
가 파악되지 않은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가 왜 여기 있어?’
물론 폭탄마가 대놓고 얼굴을 드러낸 건 아니었다. 얼굴이 다르게 생겼으니
까. 아마 아이템을 사용한 것이겠지. 보통이라면 못 알아보고 지나쳤을 것
이다. 보통이라면. 하지만 아윤은 보통이 아니었다.
길드의 두뇌 역할을 하는 어린 여동생이 걱정되었던 자윤은, 아윤에게 여러
아이템을 건네주었다.
아이템을 다는 데 거부감을 표시하던 현우와 달리, 아윤은 그걸 모조리 달
았다. 귀걸이, 반지, 목걸이, 팔찌. 보이지 않는 데 있는 다른 아이템까지. 그
중에는 다른 아이템의 부정적인 효과를 해주하거나, 정신저항력을 높이는
것도 있었다.
그게 폭탄마의 아이템 효과를 뚫은 것이다!
‘침착하자.’
폭탄마가 등급이 높은 빌런이긴 하지만, S급 각성자 셋을 이길 정도는 아니
었다. 아니, 대놓고 말하자면 100퍼센트 진다. 아무리 빌런이 미친놈이라지
만 죽을 자리에 스스로 기어들어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
나였다.
‘노리는 게 우리가 아닐 수도 있어.’
하필 노리는 사람과 일정이 겹쳤다던가.
‘와, 재수도 없지.’
아윤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돌아섰다. 여기서 소리를 쳐도 안쪽에
는 들리겠지만, 자신이 인질로 잡힐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되돌아가서 폭
탄마의 존재를 다른 이들에게 알릴 생각이었다.
이 정도 연기는 어렵지 않았다.
‘좋아.’
돌아서는 아윤을 빌런은 잡지 않았다. 그래, 그렇다고 생각했다.
파직!
팔찌가 진동하며 몸으로 침투하려는 무언가를 막아 냈다. 이어 귀걸이가 후
속타를 날렸으나, 폭탄마는 손쉽게 그를 막아 냈다.
“이야, 이런 데서 들킬 줄이야. 재수도 없지.”
들켰다! 아윤은 들고 있던 작은 핸드백을 그에게 던졌다. 그와 동시에 핸드
백이 터져 나갔다. 강한 충격을 주면 타격을 주는 아이템이 부착되어 있었
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폭탄마는 그마저도 수월하게 넘겼다.
“오빠!”
아윤은 잠시 생긴 틈을 타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재빠르게 반지를 빼
내서 바닥에 던졌다.
샌더맨의 반지(엘리트)]
충격을 받으면 수면 연기를 한 방향으로 분출. 상대를 잠재운다. 소문으로
는 거대한 몬스터도 순간적으로 잠재울 수 있다고 한다.
[
동시에 뒤돌아서 달렸다. 신고 있는 신발도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기에 느린
속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가 나빴다. 폭탄마는 수면 연기를 헤치고 나
와 아윤에게 손을 뻗었다. 이어 몸을 보호하던 방어막 여러 겹이 차례로 깨
졌다.
‘등급이 틀렸던 건가!’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커다란 손이 비명을 지르
려는 아윤의 입을 막고 다른 손이 목을 감싸 안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아윤은 폭탄마에게 인질로 잡혀 있었고, 앞에는 자윤을
포함한 S급 각성자들이 서 있었다.
“오, 오빠.”
“아윤아!”
자윤이 분노한 표정으로 폭탄마를 노려보았다.
“아, 그러게 소리는 왜 질러선.”
폭탄마는 투덜거리며 아윤의 목을 감싼 팔에 힘을 주었다.
“가까이 오면 터집니다, 터져요~! 진짜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
나.”
한숨을 내쉰 폭탄마는 눈알을 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35.
“
!”
시발
선현 길드의 길드장, 요람 길드의 길드장, 다른 하나는 좀 헷갈리는데. 일단
느껴지는 힘으로 보아 자신의 아래는 아닌 것 같았다.
‘오늘이 죽을 날인가.’
목표에는 접근도 하지 못했는데. 폭탄마는 혀를 찼다. 원래도 높은 사람들
이 잘 찾는 곳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S급 각성자들이 모여 있을 건 뭐람.
폭탄마는 아윤을 붙잡은 채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인질을 잡고 있으니
함부로 덤비지는 않겠지만, 도망칠 길도 없었다. 끝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여기서 죽거나, 도망치다가 죽거나.
상대가 그만큼 최악이었다. 그렇지만 얌전히 죽어 줄 생각은 없었다. 죽을
땐 죽더라도 확실하게 타격은 주고 갈 생각이었다.
아윤을 잡은 폭탄마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가 능력을 발휘
하려는 순간, 기이한 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 삐이이익!
지독하게 불쾌한 소리, 그 소리는 각성자들에게는 제법 익숙한 소리였다.
포털이 열리는 소리였으니까!
“하하하, 하늘이 내 편인 모양이군.”
물론 포털이 열린다고 무조건 살아남는 건 아니겠지만, 내부가 어떤 모양이
냐에 따라 도망칠 방도가 생길지도 몰랐다. 폭탄마는 소리와 함께 현실을
뒤덮는 포털에 기꺼이 휩쓸렸다.
“아윤아!”
“형!”
그리고 그 포털은 근처에 있던 현우까지 삼켜 버렸다.
선우가 포털에 뛰어들고, 이어 자윤이 뛰쳐 들어갔다. 사람 몇을 삼키고도
포털은 점점 커지기만 했다. 주변이 소란해지며 비명이 들려왔다. 일렁이던
포털은 한옥의 절반을 넘게 삼키고 나서야 확장을 멈췄다. 그리고 이내 점
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거미덫. 사람을 삼키고 문이 닫히는 던전형 포털을 이르는 말이었다. 이 경
우 포털은 안의 사람이 다 죽거나 공략이 끝나기까지 다시 열리지 않는다.
도진은 새까만 포털을 바라보다 문득 손이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날,
1만의 사람이 사라지던 날. 도진은 예원과 같이 있었다. 그리고 예원이 포
털에 잡아먹혀 사라지는 걸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절규하며 달려들었으나, 포털은 그를 삼키지 않았다. 누군가는 운
좋게 살아남았다고 했지만, 도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사라
지던 여동생의 겁먹은 표정, 그 표정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지독
한 자책감이 가슴을 두드렸다.
그랬는데, 이번에도 구하지 못했다. 도진은 현우가 마지막으로 사라지던 순
간의 표정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사
이에도 포털의 문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도진은 이를 악물고 달려갔다.
‘이번에는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아!’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포털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입구에 선 도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먼저 들어간 사람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앞
에 여러 갈래로 갈라진 길이 보였다.
길은 전부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어디서 들어오는지 모를 희미한
빛이 내부를 밝히고 있었다. 던전 중에서도 최악이라 일컫는 미로형이었다.
이런 경우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거점을 마련하고, 주변의 안전을 확보하
는 것이었다. 그런 후에 길을 하나하나 표시해 가면서 뒤져야 했다.
그래, 그랬다.
“오빠.”
어디선가 예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예원이는 죽었는데? 현우가
그렇게 말했으니 이건 예원의 목소리가 아니다.
“오빠.”
아니, 이건 예원의 목소리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오빠.”
끊임없이 불러오는 목소리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예원이가 아니다.
예원이가 맞다.
아니다.
맞다.
그래, 어쩌면 현우가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예원이는 아직 살아 있는데. 살
아서 이렇게 자신을 부르고 있는데 말이다. 도진은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등 뒤에 찬 그의 검이 우웅거리며 울었지만, 도진에게는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다. 지금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동생이 예원이뿐이었다.
“도와줘, 오빠.”
분명 예원의 목소리가 들리는 대로 움직였는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모자란 오빠가 지켜 주지 못해서.’
심술이 나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걸까. 안 되는데. 혼자 돌아다니기에 여
긴 너무 위험한 장소였다.
‘그러니 빨리 찾아야 해.’
빨리, 빨리, 빨리.
도진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뛰었을까. 도진은
마침내 그의 동생을 발견했다.
미로네?”
현우는 갈라진 길을 보며 벽을 손으로 콩콩 두드렸다. 미로에서 길을 찾는
법이 있었던 것 같은데. 왼쪽 벽면을 짚고 따라가는 거였나? 아니면 오른
쪽? 분명 TV에서 본 것 같은데 잘 기억나지 않았다.
“으음.”
팔짱을 끼고 벽을 노려보다가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벽을 향해 힘차게 휘
둘렀다.
“
콰앙!
커다란 소리와 함께 벽이 부스스 무너져 내렸다. 사람의 주먹으로 내려쳤다
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일직선으로 가다 보면 길이 나오겠지!”
아니면 누군가를 만나기라도 할 터였다. 현우는 구멍을 통과해서 다음 벽을
후려쳤다. 다음, 또 다음. 계속 그러다가 공터를 발견했다. 미로 중간중간에
존재하는 쉼터 같은 곳인 모양이었다.
‘배려도 깊지.’
혀를 차다가 잠시 바닥에 앉아 쉬었다. 바닥이 차가워서 기분이 나빴다. 이
럴 때 담요가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쉽다. 차가워진 엉덩이를 털어 내며 자리
에서 일어나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다음 벽을 만날 무렵, 익숙한 얼
굴을 발견했다.
도진이었다.
현우는 막 벽을 부수려던 손을 거두고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설마 본 건 아니겠지?’
긴가민가해서 눈치를 보고 있자니,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부드
럽게 웃었다. 그동안 옆에서 그를 봐 왔지만, 이렇게 웃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드디어 찾았네.”
그러더니 이번에는 성큼 다가와 현우를 꽉 끌어안았다.
“걱정했어.”
걱정했다는 부분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현우는 표면적으로는 힘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다음 행동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 갑자기 끌어안는 거지? 게다가 왜 반말이야? 딱히 기분 나쁜 건 아니었
지만, 얼떨떨했다.
“다친 데는 없지?”
“네, 없어요.”
“다행이다.”
현우를 품에서 떼어낸 도진이 이번에는 커다란 손으로 머리를 쓱쓱 쓰다듬
었다. 원래 이렇게 스킨십이 많은 사람이었던가?
대체 무슨 일이람? 현우는 당황하여 도진을 바라보았다. 웃느라 접힌 눈동
자는 도통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늦어서 미안해.”
“아니, 괜찮아요.”
“왜 존댓말 해?”
순간 말문이 막혔다. 왜 존댓말을 하냐니. 그 말을 듣고 도진을 좀 더 자세
히 살펴보고 나서야 정상적인 상태가 아님을 깨달았다.
대체 누구를 나에게 비춰 보는 거지?’
답은 금방 나왔다.
한예원.
지금 도진은 현우를 예원처럼 대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지켜 줄 테니까.”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손을 잡아 온다. 당황하여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이내 다시 붙잡혔다. 그 뒤로도 빼낼 때마다 웃으며 다시 잡는 걸 보니 장난
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런 모습을 보니 예원과는 진짜 친밀한 남매
사이였던 모양이었다.
이 상황을 해결하긴 해야 하는데. 대체 어디서 어떻게 현혹에 걸린 건지 모
르겠다.
‘마법적인 부분은 약하다고.’
대부분의 저주는 기합으로 해결했으니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일단은 도진
의 곁에서 그를 지켜보면서 차근차근 해결해 보기로 하였다.
‘
그랬는데 말이지.’
해결은 하지 못하고, 시간만 흘러갔다.
“다리 아프지 않아? 업어 줄까?”
‘
괜찮아요.”
“괜찮긴.”
도진은 그대로 현우를 안아 올려 등에 업었다.
“괜찮다니까! 내려 줘요!”
당장이라도 뛰쳐 내리려는데, 갑자기 도진이 고개를 숙이며 시무룩한 목소
리로 말했다.
“그렇게 싫어?”
“싫어요. 대체 왜 업으려는 거예요?”
“내가 업어 주고 싶어서. 예전에는 업어 주는 거 좋아했잖아.”
그건 예원 누나고. 현우는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내리누르며 널찍한 등판에
몸을 기댔다. 그래, 확실히 편하긴 했다. 도진은 현우의 발이 땅에 닿지 않
게 하려는 듯 어화둥둥 모시고 다녔다. 그뿐이랴. 식사 시간이 되자 꼭꼭 식
사를 챙겨 먹이고, 간식까지 줬다.
“좀 더 먹어야지. 많이 먹어야 건강해진다고.”
그러면서 입가에 대 주는데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지내다 보니 위기감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글러 먹은 인간이 될 것 같아!’
“
던전 속인데도 말이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도진의
손길이 어색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현우의 뜻대로 따라주더
라도 그 안에 별다른 감정이 담기지 않은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애정이 넘
쳐난다.
그걸 한몸에 받고 있다 보니 가끔 죄책감이 들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것
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왜 그래? 기분이 안 좋아?”
도진의 질문에 현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왜 기분이 안 좋을까.”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보이다가 불쑥 말을 이었다.
“내가 너무 장난쳐서 그래? 하긴 원래는 이런 장난은 안 치긴 했지.”
“그랬어요?”
“응. 하지만 내가 너무 기분이 좋아서 그래. 조금만 이해해 줄 수는 없을까?
네가 사라지고 나서 많이 후회했어. 물러나 있지 말고 좀 더 제대로 오빠 노
릇을 할걸. 좀 더 많은 걸 같이 해 볼걸. 생각할수록 안타깝더라.”
현우는 입을 열려다가 도로 다물었다.
“그래서 내가 너무 달라붙은 것 같아. 하지만 만약에 네가 싫다면, 안 그럴
게.”
그러면서 잡고 가던 손에서 힘을 뺐다. 이대로라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게 내키지 않았다.
36.
동생을 둔 사람으로서 동질감을 느껴서일까.
이번에는 빠져나가려는 손을 현우가 먼저 잡았다. 얽힌 손이 가볍게 떨려왔
다.
“고마워.”
이런 걸로 고마워하지 말라고! 현우는 그리 외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다른 사람을 만날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도진에게 맞춰 주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결심하자마자
곧바로 다른 사람을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쿵!
여느 때처럼 갑자기 나타난 미노타우루스가 해머를 풍차처럼 돌리며 도진
에게 달려들었다.
“움머어어어어어!”
무시무시한 힘으로 해머를 휘두르는 탓에 바람소리까지 났지만, 도진이나
현우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다. 둘 다 미노타우루스에게 당할 정도의 실력
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현우는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조금만 움직이면 도진이 기겁하며 만류
했으니까. 도진이 손가락을 몇 번 까닥하자 바닥에서 솟아오른 그림자가 미
노타우루스를 꿰뚫었다.
“움머어어!”
고통에 찬 비명이 울려 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노타우루스는 그 자리
에 쓰러졌다. 쓰러지는 소리가 제법 요란했지만, 도진은 달리 손을 쓰지 않
았다. 소리를 듣고 다른 몬스터가 몰려와도 해치울 자신이 있었으니까. 하
지만 그 소리를 듣고 달려온 이는 평소와 같은 몬스터가 아니라 사람이었
다.
유독 새까만 흑발을 가진 실눈의 일본인 각성자. 이와모토 준이치였다
「당신이 왜 여기 있습니까?」
준이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도진과 현우를 바라보다 가까이 다가오려 했
다. 딱히 이상한 행동은 아니었다. 던전에서는 소수로 다니는 것보다는 여
럿이 다니는 편이 더 안전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몇 걸음을 채 걷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멈춰서야 했다.
갑자기 솟아난 그림자가 창살처럼 그의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무슨 짓입니까!」
“다가오지 마.”
도진이 싸늘한 표정으로 준이치를 막아섰다. 그 태도에 준이치는 양손을 들
어 보이며 말했다.
「던전 안에서까지 부딪힐 생각은 없습니다. 지금은 협력해야 할 때라고 보
지 않습니까?」
나름 이성적으로 설득하려 했으나, 도진은 더 들어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준이치가 뭔가를 더 말하기 전에 그는 단검을 뽑아 들었다.
「이렇게 나오면 저도 가만있을 수 없습니다!」
그에 맞서 준이치도 무기를 꺼내 들었다. 서슬 퍼런 윤기가 흐르는 가늘고
얇은 도였다.
“적은 아닌 것 같아요.”
현우가 도진을 만류하려고 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에게 준이치는 자신의 하나뿐인 동생을 위협하는 적으로 보였다.
“그만하세요.”
현우의 목소리 사이로 다른 목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도진이 던전에 들어와
서 처음에 들었던 목소리였다.
“적이야.”
적이라고?
“그래, 저것 봐. 동생이 위험하잖아. 지켜 줘야지.”
목소리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속닥속닥.
끊임없이 귓가에 속삭인다.
모처럼 예원이를 찾았잖아. 저 사람은 예원이를 위협하는 사람이야. 예원이
를 지켜주 기로 했잖아. 그러면 위협하는 사람을 죽여야지. 그는 적이야. 그
를 죽이지 않으면 예원이가 죽을 거야. 또 동생을 잃어버릴 셈이야? 정말
그럴 거야? 피눈물 흘리면서 후회할 텐데?
‘그래, 이번에는 동생을 지켜야 해.’
덥수룩한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던 눈동자가 새카맣게 물들며, 전신에 그림
자가 일렁였다. 그리고 손을 뻗어 발악하며 우는 단검을 잡았다.
발을 앞으로 딛는 순간, 몸이 스르륵 사라졌다. 그리고 단검으로 적의 목을
노렸다. 예원이를 위협하던 적이 그를 받아치며 뒤로 물러났다.
적이 뭐라 외치는 듯했지만, 소리는 명확히 인식되지 않았다. 아니, 인식할
필요가 있을까? 상대는 적인데. 그냥 죽이면 그만이다. 도진은 예원을 등
뒤로 두고 다시 한번 그에게 달려들었다.
준이치는 이를 악물고 단검을 받아넘겼다. 한국 소속의 평화 길드, 그곳의
길드장 한도진. 이번에 제주도에서 제법 활약했다고는 들었으나, 크게 관심
을 가지지 않았다. 한국에서 최고는 그의 라이벌인 지선우였으니까. 그랬는
데 이 힘은 뭐란 말인가!
검술과 속도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는데, 도무지 이겨낼
수가 없었다.
‘제기랄!’
피해야 하는 건 단검뿐만이 아니었다. 그림자 또한 까다로웠다. 상대는 그
림자를 수족같이 휘둘러 댔는데, 그 때문인지 여럿을 상대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미 한계까지 가속한 검은 가늘게 떨려오고 있는데, 공격
은 조금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위험해.’
마치 높은 줄 위에서 곡예를 부리는 기분이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슬아슬하게 막 아내고는 있었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머릿속에서 적색경보가 울렸다. 안 된다. 이런 데서 죽을 수는 없었다. 준이
치는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몸이 덜컥 멈춰 섰다. 그제야
발밑을 내려다보니 그림자가 그를 붙들고 있었다.
그 한 번으로 죽을 뻔했다. 간신히 위기는 벗어났지만 긴 검상을 입었다. 그
때부터 몸 상태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젠 저주까지!’
휘두르는 단검 자체의 능력인 듯했다. 위기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형
선우는 형의 이름을 부르며 미로를 헤맸다.
“여기! 여기예요!”
그러나 가장 먼저 마주친 이는 형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인질로 잡혀갔
던 아윤이었다.
“ !”
다행이다.”
손에 액세서리를 주렁주렁 들고 있던 아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혹시 형은 못 봤습니까?”
“못 봤어요. 현우 씨도 같이 휘말렸나요?”
아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그, 그럼 빨리 찾으러 가요!”
“서두를 예정입니다만, 따라올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제가 누군지 아시잖아요.”
선우의 질문에 아윤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형도 좀 더 적극적으로 아이
템을 착용했다면 좋았을 텐데. 선우는 아이템으로 도배를 한 아윤을 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네?”
이어 선우는 아윤을 쌀 포대 메는 양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그
래왔던 것처럼 빠르게 내달렸다.
“
아윤은 터져 나오려는 소리를 간신히 삼키고, 휙휙 지나가는 미로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중간중간 몬스터가 나오긴 했지만, 그는 선우가 순식간에 죽여
버렸다. 손을 뻗어 얼리고 타격을 가한다. 그 과정에서 아윤에게는 조금의
피해도 오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강한 거야?’
이런 작자가 위에서 버티고 있으니 요람 길드가 더 올라가기 힘든 거지. 아
윤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렇게 얼마나 더 이동했을까. 금속과 금속이 부
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이다!’
선우는 아윤을 내려놓고, 곧바로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미로의 작은 공동,
그곳에서 도진과 준이치가 싸우고 있었다. 선우의 눈이 빠르게 두 사람을
훑었다.
‘어느 쪽?’
도진은 당연히 아군이다. 그렇다면 준이치가 적이라는 소리였는데, 느낌이
묘했다. 거슬리고 짜증 나긴 했어도 무모한 짓을 저지를 만한 사람은 아니
었는데. 의문을 가지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우야!”
“형!”
찾았다. 선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현우에게 다가가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앞으로 몇 발자국 나가기도 전에, 다시 뒤로 물러나야 했다. 도진이
그를 향해 공격해 왔기 때문이었다.
뭐 하는 짓입니까!”
“뭐하긴.”
도진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몰라서 묻는 건가?”
잠시 허공을 바라보던 그가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너희는 적이잖아. 그러니 죽여야지.”
그러자 도진이 잠시 손을 뗀 사이에 몸을 빼낸 준이치가 신경질적인 목소리
로 말했다.
「미친 거 아닙니까!」
“한도진.”
선우가 부르자 도진이 그를 바라보았다. 얼핏 보기엔 정상 같아 보였으나,
평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선우는 곧바로 얼음꽃을 피워 내며 준이치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모른다. 갑자기 공격해 왔습니다.”
상황이 급박하니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준이치는 엉망진창
인 한국어로 간략한 상황을 설명했다.
“
정신계 몬스터군요.”
“몬스터? S급 아닙니까?”
S급 각성자는 기본적으로 저항력이 높다. 그 말은 정신공격을 받아도 어지
간한 건 버텨낸단 소리였다. 그런데 저렇게 완벽하게 지배당한다고? 그 소
리는 이 던전의 등급이 S급, 그 이상일 가능성도 있단 소리였다.
“일단은 제압해 둡시다.”
선우의 말에 준이치가 다시 검을 들었다.
「빚으로 달아 두겠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둘이서 도진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
선우와 준이치는 차륜전으로 도진을 상대했다. 어떻게든 힘을 빼서 제압할
목적인 게 보였다. 현우는 한창 싸우는 중인 그들을 바라보다가 미로 천장
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위에는 상반신이 사람의 형태인 거대한 거미 한 마리가 매달려 있었다.
그 거미는 소름이 끼치는 낮은 목소리로 연신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내용이 가관이다.
“적이야. 다 죽여야 해. 그래야 동생을 지키지. 그래, 잘하고 있어. 죽여, 다
죽여. 죽고 죽이는 거야. 안 그러면 동생이 죽어.”
험악하고 괴이쩍은 모양새와는 달리, 정신계 몬스터인 모양이었다.
이상해.’
그렇다 쳐도 이상하다. 제법 강한 축에 속하기는 하지만, 도진을 지배할 정
도는 아닌 것 같았는데. 동생 때문인 건가. 그 존재가 도진을 한없이 약하게
만들었던 모양이었다.
오랫동안 쳐다봐서였을까. 천장에 매달려 있던 몬스터가 현우를 인식했다.
기이하게 찢어진 눈이 현우를 보며 가늘게 접혔다. 이어 중얼거림이 멈췄
다.
‘
37.
“
맛있겠다.”
그러고는 키득키득 웃다가 서서히 벽을 타고 기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존재
감을 죽이는데 익숙한 건지, 아직 그를 눈치챈 이는 현우밖에 없었다.
‘어쩔까.’
현우는 아까 주워서 주머니 안에 넣어 두었던 돌멩이를 어루만졌다.
‘이대로 죽여 버릴까.’
선우도 지금은 이쪽을 보지 않고 있었으니, 몰래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돌맹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때, 현우의 뒤쪽에서 까만 털뭉
치가 느긋하게 걸어왔다.
케로였다.
“왕?”
케로는 현우를 발견하자마자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달려왔다. 마침 좋은 타
이밍이었다. 현우는 그대로 손을 들어 천장을 가리켰다. 자연 케로의 시선
이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고, 몬스터를 발견하는 건 금방이었다.
“왕왕!”
“잡아.”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케로의 몸이 부풀어 올랐다.
“케로?”
그걸 가장 먼저 발견한 이는 물러나 있던 아윤이었다. 그 목소리에 다른 이
들의 시선도 케로에게로 향했다. 이어 도진이 싸우던 이들을 내팽개치고 현
우에게로 달려왔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르르릉.”
케로는 완전한 모습이 되자마자 벽을 박차고 올라 천장을 향해 뛰어올랐다.
그런 후 서슴없이 몬스터에게 이를 박아넣었다.
“끼이이이익!”
기겁한 몬스터가 회피하려고 했지만, 케로가 좀 더 빨랐다. 둥그렇게 부풀
어 오른 배에 이가 박히고 녹색의 점액질이 튀어 올랐다. 그로 인한 지독한
통증에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고, 선우와 준이치의 공격이 그리로 향했다.
중간에 끼어든 도진이 막으려 들었으나, 전부 막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고
통에 몸부림치던 몬스터는 그대로 추락하고 말았다.
끼이익!”
바닥에 떨어져 다리를 버둥거리던 몬스터가 재빨리 몸을 도로 뒤집었다. 현
우는 그 틈을 타서 잽싸게 움직여 뒤에서 도진을 끌어안았다.
“형!”
그를 발견한 선우가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질렀으나, 현우는 못 들은 척 도진
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두 팔에 힘을 주어 그를 잡아당겼다.
“그만해요.”
“예원, 예원이를 지켜야 해.”
“예원이는 여기 없어요!”
“아냐, 있어!”
“어디에요!”
“여기, 여기 있는데.”
도진은 현우를 봤다가 이어 몬스터를 바라보았다.
“오빠, 나야. 예원이.”
몬스터가 그런 도진을 불렀다. 지금까지는 현우를 예원으로 설정하고, 도진
을 이용하여 다른 각성자를 죽이려 들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어 급해지니
이번에는 자신이 예원의 역할을 하려 들었다.
“
아닌데. 예원이는 여기 있는데.”
“아니야, 오빠. 나 여기 있어.”
몬스터의 말이 이어질수록 다른 이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징그럽습니다.」
“역겹군요.”
아윤은 진즉 입가를 가리고 멀리 떨어져 있었다. 혐오스러운 모습에 토할
것 같았다.
“저런, 저런 몬스터가 존재한다고?”
비록 던전은 들어가지 않았지만, 수많은 몬스터의 자료를 봐 왔다. 그러나
어디에도 저런 몬스터는 존재하지 않았다.
‘새로운 몬스터야!’
갑자기 예고 없이 열린 포털, 새로 나타난 몬스터, 또다시 변화가 시작되려
는가. 소름이 돋았다.
그때 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케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새까맣고 커다란 짐승이 곧바로 몬스터에게로 달
려들었다.
“
오빠!”
새된 목소리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러고는 이어 달려든 케로에게 맞서기
시작했다. 커다란 통나무 같은 다리가 벽을 찍으며 파쿠르를 하듯 사방을
누볐다. 그러면서 수시로 하얀색의 연기 덩어리를 뱉어냈다.
그게 닿자 기세등등하게 덤비던 케로가 깨갱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 잠시의 틈은 몬스터에겐 기회나 다름없었다. 그대로 케로의 등에 떨어진
몬스터가 앞다리로 목을 졸라댔다.
3개의 머리 중 둘이 으르렁대며 날뛰었으나, 등에 올라탄 거미는 쉽사리 떨
어지지 않았다. 거기에 선우가 합류했다. 미친 듯이 움직이던 거미의 다리
가 얼어가면서 점차 움직임이 느려졌다.
그와 동시에 준이치가 움직였다.
서걱.
“꺄아아아!”
날카로운 검에 반쯤 베인 다리가 덜렁거렸다. 안그래도 보기 싫던 몬스터의
얼굴이 더욱더 괴상하게 변했다.
“죽어! 죽어! 오빠, 죽여!”
그 말에 도진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잡아야 하나.’
“
현우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그 틈에 도진은 그의 손을 벗어나 앞으로 내
달렸다.
“이와모토!”
선우가 다급히 준이치를 부르고, 그는 잽싸게 몸을 피했다. 남은 건 몬스터
와 얽혀 있는 케로뿐이었다.
“크와앙!”
케로는 미친 듯이 날뛰며 등에 올라탄 몬스터를 떨어트리려고 했다. 그리고
그런 케로의 등 뒤로 그림자를 밟고 선 도진이 올라탔다.
“아하하하!”
그를 발견한 몬스터가 웃어 재꼈다. 징그러운 얼굴 위로 기쁨이 떠올랐다.
“죽여! 죽여!”
“으르르릉!”
케로의 등 뒤에서 뜨거운 핏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죽여!”
도진은 단검을 쥔 채로 몸을 움직였다.
예원이가 애처롭게 외쳤다.
“오빠, 구해 줘!”
약간의 방해는 있었지만, 도진은 예원이가 죽기 전에 지척에 다다를 수 있
었다.
“오빠!”
예원이가 환하게 웃었다. 도진은 그 웃음이 기꺼웠다. 그래, 나는 너를 지키
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그게 누구든 전부 치워 줄게. 단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걸 죽여.”
까맣고 커다란 짐승이 날뛰고 있었다.
“얼른 죽여.”
도진은 예원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단검을 휘두르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하나는 단검으로 튕겼고, 다른 하나
는 손으로 잡았다.
‘돌멩이.’
날아온 물체는 별다른 게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돌멩이였다. 그런데 왜 자
신은 고작 돌멩이에 위협을 느꼈을까. 도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죽여!”
다시 예원이 말을 걸어왔다.
‘재촉하지 않아도 네가 원한다면 뭐든지.’
정신 차려요!”
“죽여!”
“예원 누나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아요!”
“죽여!”
예원의 목소리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섞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위화감
이 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몇 번인가 더 들은 결과
알 수 있었다.
예원이가 누군가를 죽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생명은 소중하다고 말하며, 꽃
을 꺾는 것도 하지 않으려 한 아이가 그런 말을 한다고?
“오빠, 왜 내 말을 안 들어? 죽이라고. 죽여! 죽여!”
“아냐.”
도진이 아는 예원이는 누군가를 죽이라고 할 만한 아이가 아니었다. 지독한
두통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도진은 계속 뭐라고 중얼거리는 예원에게 시선
을 고정했다.
정면에서 바라보고 있는데도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지지직.
망가진 TV의 화면처럼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그리고 작게 들리던 목소리가
좀 더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
죽여!”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듯한,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도진의 귓가에 속삭였다.
예원의 목소리는 이렇지 않았다.
“죽여!”
도진은 단검을 든 손을 들어 올려 손잡이로 있는 힘껏 이마를 찍었다. 지독
한 통증과 함께 두통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한 번 더.’
어찌나 세게 내려쳤는지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주르륵 떨어진 피는 그
대로 얼굴을 타고 흘러 입술에 와 닿았다. 벌린 입술 사이로 비릿한 쇠맛이
느껴졌다. 선명해진 시야로 뭉개진 것처럼 징그러운 사람의 얼굴이 들어왔
다.
아니다, 이건 사람이 아니다. 상반신은 사람이었으나 하반신은 거미의 몸을
가진 몬스터였다. 그 순간 머릿속이 맑게 갰다.
도진은 곧바로 단검을 쥐고 눈앞의 몬스터를 향해 휘둘렀다. 새까만 단검이
시체와도 같은 색을 가진 피부로 파고들어 뼈를 끊어냈다. 끔찍한 비명이
들렸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다리를 끊어 내고, 팔을 끊어 내고, 살
을 후벼팠다.
몬스터는 버둥거리며 도망치려고 했지만, 어느새 불어난 그림자가 몸을 붙
잡았다.
“오빠!”
“
뭉개져 가는 발음으로 필사적으로 외쳤으나, 소용이 없었다. 도진은 붙잡혀
서 꿈쩍도 못하는 몬스터를 계속 공격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건 공격
이라기보단 도축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았다.
“히이이이.”
공동이 몬스터의 비명으로 가득 찼다. 아윤은 귀를 틀어막고 웅크린 지 오
래였고, 선우와 준이치는 굳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나마 멀쩡한
건 케로 뿐이었다. 케로는 몸을 푸르르 털고는 뒷발로 귀를 긁었다. 그리고
는 다시 몸을 작게 만든 뒤, 현우에게로 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케로만큼 커다랗던 몬스터의 덩치는 무척이나 작
아졌다. 그런데도 몬스터는 아직 살아 있었다.
“죽여.”
몬스터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도진에게 애원했다. 그러나 그는 애원을 들어
주지 않았다. 단검을 휘둘러 녹색의 피를 털어내고 수납한 도진은 그대로
선우에게로 걸어갔다.
“윽!”
가까이 다가오는 도진의 모습에 아윤은 저도 모르게 억눌린 신음을 내다 벽
뒤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도진은 그런 반응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담
담하게 말했다.
“처음 보는 몬스터입니다. 연구에 필요할 것 같아서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거의 시체 아닌가요.”
용기를 내어 말하던 아윤은 도진의 시선이 불에 덴 듯 팔짝 뛰었다.
“살아 있습니다.”
“그야 그렇지만.”
아윤은 슬슬 움직여 준이치의 뒤로 위치를 바꿨다. 벽보다는 S급 각성자 옆
에 붙어있는 쪽이 나으리란 계산에서였다.
그쯤 선우가 입을 열었다.
“이제는 제정신입니까?”
“네, 폐를 끼쳤습니다.”
“안다니 다행이군요.”
그렇게 말하고는 있었지만, 선우의 눈에는 아직 경계가 어려 있었다. 도진
은 그걸 감수했다. 이해 못할 행동은 아니었다. 누가 봐도 지금 그의 모습은
미친놈 같았으니까.
38.
‘
너무 흥분했다.’
동생에 대한 기억을 이용했다는 생각에 과도하게 손이 나갔다. 그래도 후회
는 없었다. 외려 속이 시원했다. 그때 도진의 눈에 한구석에 서 있는 현우가
눈에 들어왔다. 그를 보자 입가에 절로 쓴웃음이 떠올랐다.
아윤이 그랬던 것처럼, 현우도 자신을 피할 것 같았다. 아마 이제 더는 그를
지켜 줄 수 없을 테지. 동생의 죽음을 전해 듣고 자포자기하여 나선 일이지
만, 나름 보람찼는데 말이다.
도진은 답답해져 오는 가슴께를 손으로 더듬었다.
오랫동안 같이 지낸 것도 아닌데, 그래도 인연이라고 아쉬운 모양이었다.
그러고 고개를 드는데 바로 앞에 예원의 얼굴이 보였다.
‘아직 현혹이 풀리지 않았나!’
당황해서 눈을 감았다 뜨니 예원의 얼굴은 사라져 있고, 그 자리에는 현우
가 있었다.
“괜찮아요?”
“그건 제가 할 말입니다. 괜찮습니까?”
“뭐가요?”
“제가 하는 걸 보지 않았습니까.”
“아아.”
도진의 말에 현우가 입술을 끌어 올리며 웃었다.
“뭐, 사람한테 그런 것도 아니잖아요.”
“사람한테도 그럴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한테 그럴 건가요?”
그건 절대 아닙니다.”
“그러면 됐어요.”
그거면 된 건가? 도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재차 물었다.
“무섭지 않습니까?”
“뭐가요?”
몬스터를 찢어발기던 것이요. 아윤은 아직도 떨면서 도진을 피하고 있는데,
그에 비해 현우는 너무 태연했다.
‘뭐, 나도 깨끗하진 않으니까.’
현우가 마계에 있던 기간은 짧지 않았다. 수십 년. 한 명의 인간이 태어나고
죽기까지의 기간. 그 기간을 홀로 살아남아 버티면서 미친 짓을 하던 시절
도 있었다. 그땐 도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그러니 괜찮았다.
하지만 도진이 그걸 알 리가 없었다.
“
이거 아무래도 보스 몬스터 같은데요.”
좀 떨어진 곳에서 준이치를 호위로 두고 몬스터를 살피던 아윤이 몸을 일으
켰다.
“하지만 여기는 보스방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죠. 보통 보스는 보스방 밖으로 나오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그래서 사
실 저도 조금 긴가민가해요.”
“
보스라면 죽여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대부분 던전형 포털의 클리어 조건은 보스를 죽이는 거니까요. 산
채로 들고 가서 연구하지는 못하겠네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선우는 곧바로 커다란 얼음 조각을 몬스터의 머
리에 내다 꽂았다. 가늘게 내쉬던 숨이 멎고 죽음을 맞이하자, 던전에 변화
가 생기기 시작했다. 복잡하게 얽혀있던 미로가 사라지고 길이 하나로 모이
기 시작했다. 보스방, 외부로 통하는 포털이 열리는 곳을 향해서.
“이제 탈출만 하면 되겠네요. 가면서 겸사겸사 다른 사람들도 찾아보고요.”
“이동합시다.”
얼마 이동하지 않아 가장 먼저 만난 이는 자윤이었다. 그는 비각성자 몇과
같이 있었는데, 움직이면서 구해 준 사람인 듯했다.
“아윤아!”
자윤은 다급히 아윤에게 다가와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난 괜찮아. 하나도 안 다쳤어. 진짜야.”
아윤은 자꾸 살펴보려는 오빠를 말리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
다. 그제야 자윤은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들은 보스방으로 향하면서 익숙한 사람의 시체를 발견했다.
“폭탄마네.”
“
몬스터에게 죽은 것 같진 않습니다.”
던전에서 만난 몬스터가 폭탄마를 죽였다면, 시체가 이런 모양으로 남아 있
을 리 없었다.
“오빠야?”
아윤이 미심쩍은 눈으로 자윤을 바라보자 그가 다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아니야!”
차례로 선우, 도진, 준이치도 부정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폭탄마를 죽인
것일까. 의문을 가지고 살펴보는데 저편에서 사람 하나가 다가왔다. 오면서
살아남은 사람이 있나 샅샅이 살펴본 것 같은데. 어디서 나타난 걸까?
자윤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 옆에서 조용히 있던 준이치가 미간을 찌푸
리며 이름 하나를 내뱉었다.
“지크프리트.”
“아핫, 다들 여기 모여 있었습니까? 그리고 준이치. 될 수 있으면 이름을 불
러 달라고 하지 않았나. 레온이라고.”
그 말에 준이치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도 여기 있었습니까?”
“어쩌다 보니. 유명한 식당에서 접대를 해 주겠다고 해서 왔는데 던전에 휘
말렸지 않겠나.”
“
레온은 태연하게 설명했지만, 준이치는 의심을 지우지 않았다.
“그러면 저 빌런은 당신이 죽였습니까?”
“누구? 빌런? 그런 작자가 있었나? 봤다면 당연히 죽였겠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엔 내가 아니야.”
전부 자신은 빌런을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빌런이 혼자 죽었을
리는 없었다.
“어디 보자. 이 사람인 모양이군. 날카로운 것으로 단번에 목을 끊어냈는데.
제법 대단한 솜씨야. 하지만 이걸로는 누군지 알아낼 수 없겠군. 딱히 특성
이라고 할만한 게 보이지 않으니까. 흥미로운데.”
레온은 시체를 뒤적이며 혼잣말을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은 S급 각성자. 그 말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물론 현우의 귀에도 그랬다.
‘겉보기에는 태연해 보인다만.’
현우는 예전에 몰래 나왔을 때, 준이치와 레온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 때문
인지는 몰라도 두 사람이 의심스러웠다.
한 장소에 너무 많은 S급 각성자가 모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야 아윤
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곳을 찾았다지만, 준이치와 레온은 왜 거기 있
었던 걸까. 진짜 약속이 있었던 게 맞을까?
누군가를 노리고 숨어든 폭탄마도 그렇고 수많은 의혹이 생겨났다. 무엇보
다 S급 각성자인 도진이 쉽게 현혹된 것도 걸렸다.
‘몬스터는 확실히 위험했지만, 도진을 이길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뭔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옆을 돌아보다 도진과 눈
을 마주쳤다. 경직되어 있는 눈가가 그도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
알리는 것 같았다.
그 사이, 레온은 시체에서 손을 뗐다.
“뭐, 일단은 이 정도군. 더 알아보고 싶은 건 있지만, 그 전에 선량한 일반인
들부터 대피시키는 게 좋겠지. 그렇지 않습니까?”
다른 이들도 레온의 말에는 동의했다. 그리하여 폭탄마의 시체를 뒤로하고
다시 이동한 결과, 보스방에 도착했다.
당연히 닫혀 있어야 할 거대한 문은 양쪽으로 활짝 열려 있었으며, 안에는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그 거대한 거미 몬스터가 보스는 맞
았던 모양이었다.
밖으로 통하는 포털을 가장 먼저 통과한 이는 자윤, 이어서 아윤과 현우, 일
반인들이 밖으로 나갔다. 각성자들은 그다음이었다.
포털에서 나오자마자 가장 먼저 보인 사람은 무혁이었다. 아마도 갑작스레
발생한 포털 때문에 출동한 것 같은데, 딱히 반갑지는 않았다. 길드와 헌터
관리국의 사이는 물과 기름 같은지라, 그를 반기는 건 비각성자인 일반인들
정도였다.
“안녕하십니까.”
자윤은 마지 못한 표정으로 인사를 하고, 이어 나오는 아윤의 손을 잡아 주
었다.
“어라?”
아윤 또한 무혁을 발견하고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헌터관리국에서 여기는 무슨 일이래요?”
“비징후 포털 발생 신고를 받고 찾아온 겁니다.”
“아아, 그렇구나. 참 빨리 오셨네요. 그래, 포털 문제는 해결되었나요?”
“안타깝게도 방금 해결된 것 같군요.”
무혁은 아윤의 빈정거리는 말을 담담하게 받아넘겼다. 이어 현우와 다른 사
람들이 나오자, 헌터관리국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슬그머니 움직이기 시작
했다.
새로 열린 포털의 정보를 얻기 위해 일반인들을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마음
같아서는 각성자들을 붙잡아 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상대가 나빴다. 하나
같이 쟁쟁한 길드의 길드장이나 부길드장. 헌터관리국의 명령에 순순히 따
를 리 없었다.
“잠깐, 잠깐. 그분들은 어디로 데려가시는 거예요?”
하지만 그걸 아윤이 가만 보고 있지는 않았다.
“여기요!”
마침 현장에는 각 길드에서 파견된 길드원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귀신같이 요람 길드원을 발견한 아윤은 그들을 소리쳐 불렀다.
‘어디 한 것도 없이 숟가락을 얻으려고 한담?’
아윤은 엉망이 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막 나온 다른 이들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그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요람 길드가 움직이자, 다른 길드들도
함께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길드장님!”
선우가 모습을 드러내자 현장에 나와 있던 찬영이 다급히 다가왔다. 그 모
습을 보고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방금 탈출해서 힘드신 분을 어디로 데려가려 하십니까?”
웃는 낯으로 말하고 있었지만, 그 뒤에는 칼이 숨겨져 있음을 안다. 그렇기
에 헌터관리국의 직원들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글렀군.’
무혁은 뒤로 몸을 빼는 헌터관리국의 직원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누군가가 그를 믿어 주던 부하 직원들을 빼 가고 있었다. 그리고는 갓 관리
국에 들어온 파릇파릇한 신입을 떠맡기는 통에 일의 진행이 어렵게 되는 경
우가 많아졌다.
그래 놓고서 시키는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트집을 잡는다. 무혁을 길
들이려는 의도가 선명하게 보였다. 길들인다고 길들여질 무혁은 아니었지
만, 계속 그러다 보니 피곤이 쌓였다.
“이 부분은 저희가 포기하겠습니다. 대신 나중에 정보 공유 부탁드려도 되
겠습니까?”
“그건 생각해 보겠습니다.”
선우는 그렇게 말하며 무혁과 눈을 맞췄다. 입으로는 거절을 말하고 있었지
만, 이미 무혁과는 합의가 된 상황이기 때문에 따로 정보를 넘길 셈이었다.
무혁도 그를 깨닫고 그쯤에서 뒤로 물러났다.
39.
헌터 관리국이 물러나자 길드들이 나서 금방 현장을 정리했다. 포털 주변에
바리케이트를 쌓아 다른 사람의 출입을 막고, 막 나온 이들은 길드와 협력
관계인 병원으로 이송했다.
“난 다친 데 없다니까!”
그중에는 현우도 있었다.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해도 선우는 물러날 기색이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니까.”
외려 다가와 현우의 손을 잡으며 설득하려 들었다.
“형, 나는 형이 병원에 가봤으면 좋겠어. 응?”
“으으.”
동생이 눈을 반짝이며 부탁하니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각자
동생과 오빠에게 설득된 현우와 아윤은 길드원 몇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진료 결과는 현우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놀라울 정도로 건강하십니다.”
의사는 안경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던전에서 제대로 먹지 못하고 고생하셨을 텐데 대단하십니다.”
그야 고생을 안했으니까! 아윤은 몰라도 현우는 무척 편하게 던전을 돌아다
녔다.
“현우님은 퇴원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반면 아윤은 좀 더 입원해 있기로 하였다. 증상은 가벼운 피로에 불과했으
나, 자윤의 만류로 퇴원을 하지 못했다.
“나도 나가고 싶은데!”
아윤이 발을 동동 굴러보았지만, 자윤은 들어주지 않았다.
“다음에, 다음에 꼭 다시 봐요!”
병원을 나가는 현우를 붙잡으며 아윤은 몇 번이나 강조했다.
“네.”
“정말 만나는 거예요?”
“네.”
답을 해 주자 신나서 웃는 모습이 보기 좋다. 그렇게 이번 포털 사건은 끝나
는가 싶었다.
“
*
귀찮았던 일이 끝났으니, 이제 다시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
던 때도 있었다. 던전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었다는 걸 핑계로 늘어지도록
잠을 자고 일어난 날이었다. 선우는 시무룩한 상태로 일하러 갔고, 케로는
옆에서 뒹굴다가 같이 일어났다.
잠옷을 걸친 채로 휘적휘적 걸어 거실의 소파에 안착한 현우는 크게 하품을
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리모컨을 들어 TV를 켜는데, 도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셨습니까?”
귓가를 간질이듯 부드럽게 흘러나온 목소리에 현우는 저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했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흘렀다.
“점심은 무엇으로 할까요?”
사소한 질문 하나하나에도 다정함이 묻어났다.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포털에서 나온 이후 도진은 변했다.
겉모습은 예전과 다르지 않은지라 다른 사람이라면 어디가 달라졌느냐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까이서 지내는 현우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예전에도 도진은 현우에게 상냥한 편이었지만,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본인
의 감정을 담아 대하기보단, 선우를 흉내 내는 것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접
촉을 해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다. 외려 그걸 이용해서 놀리기도 했다. 그
런데 그게 하루아침에 변해 버리니 쉽게 적응이 되지 않는다.
‘으으.’
현우는 옆에서 뒹구는 케로를 끌어안고 다시 소파에 몸을 눕혔다. 그러자
가까이 다가온 도진이 자연스럽게 담요를 덮어 주고, 가슴을 토닥였다. 그
게 너무나도 어색해서 발가락이 곱아들어 갔다.
‘안 돼! 이렇게는 못 버틴다.’
현우는 태블릿을 이용해 인터넷의 바다를 헤엄쳤다.
「상대가 저에게 가진 호감이 부담스럽습니다.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요?」
마침 비슷한 고민을 가진 이가 있어, 쭉 아래로 내려보니 가장 위에 달린 댓
글 하나가 보였다.
「그게 너무 부담스러우면 호감을 깎아보는 건 어떠실까요? 무리한 요구를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에요.」
무리한 요구! 현우는 그게 무엇일지 머리를 굴려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 답
을 찾아냈다! 마침 TV에는 써먹기 좋은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요즘 영화 ‘블랙 아웃’으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배
우, 송현 씨를 모셔보았습니다!』
이어 카메라가 움직이며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잘생긴 남자를 비췄다.
세미 정장에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는 그의 매력을 더욱더 돋보이게 만들었
다.
일부러 TV 소리를 높이자, 주방에 있던 도진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저 배우 멋있네요. 맞다. 도진 씨도 이 기회에 머리를 다듬어 보는 건 어떨
까요?”
“머리를요?”
“지금은 덥수룩해서 눈을 가리잖아요. 불편할 것 같은데.”
“불편하지는 않습니다만.”
역시 저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 백화점에서 선물해 준 옷도 아예 입지를
않는데, 머리를 자르라고 한다고 듣겠는가.
“그래도요.”
현우는 그 부분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저런 머리는 어떤가요? 멋있지 않나요?”
“멋있습니까?”
“멋있죠!”
사실 남자 배우에게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고 여자 배우에게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달리느라 지쳤는데, 인제 와서 연애까지 하
면 피곤하게 지내고 싶지 않았다.
멋있다고요.”
도진은 TV 화면의 배우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흥미가 사
라졌는지 다시 식사 준비를 이어 하기 시작했다.
‘좋아, 잘하고 있어.’
이대로 가면서 호감을 깎고, 자신과 예원이 다름을 인식시켜주면 될 것 같
았다.
그랬는데.
“오늘은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도진은 반나절 정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돌아
왔을 때는 저도 모르게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왔다.
“누구세요?”
자세히 보면 뭔가 대단할 걸 한 건 아니었다. 그저 등을 쭉 펴고, 새로운 옷
을 입고 길게 내려와 있던 머리카락을 손질했을 뿐이었다. 그저 그뿐인데도
사람이 확 달라 보였다.
“이상합니까?”
도진이 자신이 입은 스웨터를 내려다보며 어색하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저
스웨터, 현우가 예전에 선물해 준 것이었다.
“아니, 이상하진 않은데요.”
“
그럼 됐습니다. 그냥 한 번쯤 이래 보고 싶었습니다. 예원이라면 제가 이러
는 걸 바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다행이다. 자신의 말을 듣고 그에 따른 건 아닌 것 같았다. 현우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게요. 제가 아는 예원 누나라면 그랬을 거예요.”
동조해 주자 도진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평소 잘 웃지 않았던 사람이, 그
것도 꾸미고 와서 웃으니 파급력이 대단했다.
고작 외모 하나가 바뀌었을 뿐인데! 고개를 끄덕이다가 뒤늦게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도진이 그렇게 생각하는 줄도 모르고 괜히 헛짓을 한 것 같았다.
부끄러움에 저도 모르게 담요를 걷어차자 졸지에 굴러떨어진 케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
처음 포털을 빠져나왔을 때는 지독하리만치 불쾌했다. 죽은 예원을 다른 사
람과 착각했다는 것에 죄책감이 느껴졌다. 비록 몬스터의 현혹에 넘어가서
그랬다고는 하나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처음에는 현우를 멀리하려고도 했다. 이미 현혹은 풀렸는데, 같
이 있으면 스르르 마음이 풀어졌다. 예전에는 살아가는 데 급급하여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왔다.
현우는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을 싫어한다. 소파에 앉아 있기보다는 기대
눕기를 즐겼다. 가끔은 그 상태에서 쿠션이나 케로를 끌어안고 있곤 했다.
는 아무거나 다 잘 본다. 저번에는 희한한 막장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먹
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너무 쓴맛은 싫어해서, 커피 종류는 마시지 않는다.
수많은 정보가 떠올랐고, 그만큼 현우가 친밀하게 느껴졌다.
‘그래, 마치 동생처럼.’
사실 동생이 맞긴 했다. 현우는 이제 스물다섯이었고, 도진은 스물여덟이었
다. 세 살 차이로 도진이 형이다.
마음이 바뀌니 태도도 바뀌었다. 현우는 그게 아직 어색한 모양이었지만.
도진은 이런 생활도 나쁘지 않다고 여기게 되었다.
‘예원아.’
처음으로 예원이 골라 준 옷이 아닌 다른 옷을 입고, 머리를 잘랐다. 좀 더
사람답게 살아 보자고 생각했다.
“누구십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선현 길드의 로비에 들어서자, 경비원이 미심쩍은 얼굴로
다가와 물었다.
“한도진입니다.”
이미 얼굴도 알고 있으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네? 정말입니까?”
TV
경비원은 그 말을 듣자마자 입을 떡 벌렸다. 뿐만이 아니었다. 지나가며 마
주치는 이마다 도진을 한 번씩 돌아보았다. 간만의 일탈이 신기한 모양이었
다.
“무슨 바람입니까?”
중간에 마주친 선우도 그러했다. 그는 불쾌한 얼굴로 도진을 위아래로 훑어
보더니 물어왔다.
“그걸 굳이 말해야 합니까?”
“그럴 의무는 없긴 합니다만 형에게도 그러고 갈 생각입니까?”
“네.”
“예전 모습이 훨씬 낫지 않을까 싶은데요.”
선우는 그렇게 말했지만, 정작 이걸 권유해 준 이는 현우였다. 하지만 그걸
그대로 말하면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아니까 입을 다물었다.
“동생이 골라 준 옷이었다면서요.”
남의 아픈 곳을 찌르면서 인정사정도 없다. 맞다. 전의 옷은 예원이가 골라
준 옷이었고, 그래서 그것만 입고 다녔다. 자신이 구하지 못한 동생을 잊지
않기 위해서. 하지만 옷을 갈아입었다고 해서 동생을 잊은 것도 아니었다.
아직도 동생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죄책감이 느껴진다. 다른 모든 사
람이 잊어도 자신만은 동생을 계속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동생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 더 늘었을 뿐이다.
길드장님!”
마침 뒤에서 찬영이 선우를 불렀다. 선우의 시선이 잠시 돌아간 틈을 타서
도진은 그 자리를 벗어났다. 과연 현우는 바뀐 모습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
일까. 그런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
그리고 지금에 이르렀다.
치이익.
계란후라이를 부치는데 뒤통수에 시선이 느껴진다. 하지만 도진은 돌아보
지 않았다. 돌아보면 현우가 다시 시선을 돌릴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다 큰
성인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이상했지만.
‘귀엽다.’
바뀐 모습에 신경 쓰더니 내내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받는 기분
이 제법 괜찮은지라. 당분간은 이렇게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40.
그는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투명한 창문 너머로 화려한 불빛에
휩싸인 도시가 보였다. 그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터였다. 자신들이 언제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하루살이 같은 인생이었다. 그러기에 밟아 주는 재미가 있는 거지만. 이어
그는 의자에 앉아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러자 책상 위에 놓였던 기계가 움
직이며 먼 곳의 소리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최근 비징후 포털이 늘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던 새로운 몬스터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직은 거대 길드와
연합하여 이 소식을 통제하고 있지만, 이게 언제 새어 나갈지 모릅니다.
─ 그걸 최대한 막는 게 임무 아닌가. 그런 불길한 소식을 곧바로 풀어놓는
건 옳지 않아. 시민들이 불안해할걸세.
─ 그러다 큰 사고가 나면 어찌합니까!
─ 안 나게 해야지.
소리치는 남자의 말에 대꾸하는 이는 계속 회피적인 발언만 해 댔다. 그에
게 있어 시민은 지켜 줘야 할 대상이 아닌, 금전을 뽑아낼 대상에 불과한 것
이다.
─ 국장님!
─ 그렇게 소리치지 않아도 들리네.
다시 손가락을 움직이니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인간은 여전하다. 이
기적이고 자신밖에 모르는 이들로 넘쳐난다. 그리고 그런 인간이야말로 그
에게는 가장 필요한 존재였다.
그는 웃으며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와인 잔을 들어 올렸다.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과연 인간들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
*
드넓게 펼쳐진 황폐한 대지. 그 대지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키르륵!”
그림자의 주인은 자르르 윤기가 흐르는 비늘로 뒤덮인 몸을 가진 블랙 드레
이크였다. 이 근처에는 그보다 강한 몬스터는 없기에 발걸음이 위풍당당하
다.
“키륵!”
게다가 요즘은 수시로 그를 불러 대던 인간도 보이지 않는다. 어찌 즐겁지
않으랴. 드레이크는 힘차게 달리며 오늘의 식사 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
러다 저 멀리 옹기종기 보여 도망치는 레드 보어 무리를 발견했다. 겉면이
다소 질기긴 하지만, 덩치가 커서 고기양이 제법 많이 나온다.
드레이크는 콧바람을 훙훙 불고는 그대로 날아올랐다. 위에서 내리꽂으며
사냥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 드레이크의 눈에 처음 보는 기이한 구멍이 나타났다.
불길한 느낌에 잽싸게 방향을 틀려고 했지만, 날아오던 속도 때문에 그대로
구멍에 몸을 처박았다. 어둡고 울렁거린다. 기분이 나쁘다. 몇 번이나 몸부
림치던 드레이크는 저 멀리 보이는 빛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그 빛의 통
과한 순간, 생전 처음 보는 풍경이 펼쳐졌다.
“끼륵?”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데 그 옆을 다른 몬스터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와 동
시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으악! 게이트다! 도망쳐!”
“어째서 여기에! 살려 줘!”
인간이 공포에 몸을 떨며 울부짖고 있었다. 다른 몬스터들은 그걸 조미료
삼아 날뛰고 있었지만, 드레이크는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그가 아는 인간
은 훨씬 무서운 존재였으니까.
드레이크는 그대로 몸을 띄워 하늘로 날아올랐다.
“
*
흔들리는 작은 화면, 그곳에는 끔찍한 영상이 담겨있었다.
『꺄악! 싫어. 죽기 싫어!』
『누가 도와줘!』
필사적으로 울부짖었지만, 몬스터에게 잡힌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현장
에도 각성자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하나같이 등급이 낮았다. 그렇기에 전
부를 지킬 수는 없었고, 그 때문에 많은 인명 피해가 일어났다.
평화롭던 거리가 피로 물들고, 절규로 가득 찼다. 처음에는 작게 흔들리던
화면이 점점 크게 떨리기 시작했다. 캠코더를 든 사람이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쯤, 구원의 손길이 도착했다.
길드와 정부가 파견한 각성자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가장 먼저 방패
를 든 탱커들이 몬스터를 막고 딜러들이 공격을 가했다. 보조 능력을 지닌
각성자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생존자를 구했다.
『여기, 여기요!』
캠코더가 그대로 떨어지며 땅바닥을 비췄다. 화면은 거기서 끝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레드튜브에 올라온 영상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처음에는
규정에 어긋난다고 삭제를 반복하던 레드튜브도 어느 순간부터는 손을 놨
다. 영상이 번지는 속도가 무시무시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이 영상을 보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 여겨질 때쯤, 뉴스에서도 이를
다루기 시작했다.
모자이크로 반쯤 가린 화면을 보여 주며, 아나운서가 말을 덧붙였다.
『이번 뉴욕에서 터진 게이트 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포털이 열리기 전 아무런 징조가 없는 상태로 터졌기 때문입니
다.』
틱. 화면을 돌려도 비슷한 영상이 나왔다.
『비징후 포털이 열리는 것은 비단 뉴욕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국내에서
도 비슷한 일이 있던 것이 밝혀졌습니다. 저희는 당시 피해자를 찾아보았으
며, 힘겹게 한 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
다.』
틱. 어디를 돌려도 비징후 포털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쯧.”
옆에서 같이 TV를 보던 선우가 혀를 찼다. 혹시 몰라 어마어마한 돈으로 입
막음을 시켜놨는데, 계약을 어긴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계약서를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건가? 걸고 넘어지면 물어낼 돈이 적지 않을 텐데.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몬스터들도 모습을 드러냈
습니다. 이번에는 그중에 하나, 블랙 드래곤이라는 이름이 붙은 몬스터의
영상을 입수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뉴욕의 소란은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지만, 아직은 불안이
전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제일 위험해 보이는 몬스터 하나가 살아남은 탓
이었다.
『보이십니까? 저 멀리 블랙 드래곤이 있습니다!』
뉴욕으로 파견된 앵커가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유독 높은 빌딩의 꼭대
기, 그곳에 커다란 덩치를 가진 몬스터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기둥에 꼬리
를 감아 고정하고서는 졸고 있다.
『몇 번이나 각성자들을 파견했지만, 아직 잡지 못했습니다.』
그건 몬스터가 지나치게 영리한 탓이었다. 누군가가 가까이 접근하기만 하
면 높이 날아올랐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쉽게 손을 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비행 능력이 있는 헌터도 동원해 보았지만, 공중전에서는 몬스터 쪽이 더
우월했다. 그래서 미국은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
전투기를 동원한 것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속도가 무척 빠른
데다가 도망다닐 때, 일부러 사람이 있는 곳으로만 이동했다. 함부로 공격
을 날릴 수 없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각성자들을 피해 다니는 것과
는 다르게 전투기에는 공격을 퍼부었다.
모든 것을 녹이는 애시드 브레스를 맞은 전투기는 아래로 추락했고 도심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사람을 전부 옮겨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지만, 반대에
부딪치고 있었다.
“그 많은 사람을 언제 다 옮깁니까!”
“그러면 저대로 둡니까? 몬스터가 언제 공격해 들어올 줄 알고! 반대하려면
더 좋은 의견이나 들고 오십시오!”
그런 이유로 뉴욕의 빌딩 위에는 아직도 몬스터가 매달려 있었다.
“블랙 드래곤이라.”
선우는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저번의 거미 몬스터도 그렇고, 이번도
그렇고 새로 나타난 몬스터들은 생전 처음 보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미
존재하는 몬스터만으로도 힘든데, 더 강한 몬스터들이 연이어 나오고 있으
니 세상이 어찌 돌아가려는지 모르겠다.
“드래곤이라.”
눈을 가늘게 뜬 현우는 화면을 노려보았다.
‘이상하다. 왜 이리 낯이 익지.’
몬스터가 꿈지럭거리며 몸의 위치를 바꿨다. 그러자 등에 난 하얀색 큰 점
이 보였다.
‘응? 점박이?’
마계에 두고 온 바이크 1호. 현우를 잡아먹으려 달려드는 걸 작신작신 패서
길들였던 블랙 드레이크. 그 점박이와 너무나도 닮았다.
‘하지만 점박이가 왜 여기 있겠어.’
요정이 그랬다. 기본적으로 마계의 생물은 지구로 올 수 없다고. 이 끔찍한
것들이 지구로 가서 선우를 해치게 되면 어쩔까, 걱정하는 현우에게 장담하
듯 말했다.
‘그게 규칙입니다. 마계와 천계의 생물은 기본적으로 타차원 출입이 금지되
어 있습니다. 그 세계를 망가트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안심하십시
오. 마계의 몬스터가 지구에 나타날 일은 없습니다!’
거짓말이었나? 아니면 그 모든 것이 진실이고 다른 일이 생겨 버린 것인가.
아직은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하나 있었다.
“선우야, 나 부탁이 하나 있는데.”
“부탁?”
처음으로 하는 부탁에 선우의 눈이 커졌다. 지금까지는 단 한 번도 먼저 부
탁한 일이 없었는데, 이제는 자신을 좀 더 믿어 주는 걸까? 가슴이 두근거
렸다.
“저기.”
현우의 손이 TV 화면을 가리켰다.
“저기 가 보고 싶어.”
선우의 시선이 화면에 닿았다가 현우에게로 향했다.
“어디, 미국? 갈 수야 있긴 하지. 뉴욕은 위험하니까 그 주변만 피하면 괜찮
지 않을까.”
“아니, 저기.”
“형.”
“뉴욕에 가서 몬스터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안 돼. 너무 위험해. 아직까지는 제대로 싸우지 않았지만, 언제 터질지 모
르는 화산같은 존재야.”
그 말에 현우가 가만히 선우를 올려다보았다.
“네가 지켜 주면 되잖아.”
“난 비행 능력이 없어. 공중전으로 들어가면 형을 지킬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할 수 없다고.”
그러자 현우의 시선이 이번에는 다른 소파에 얌전히 앉아있는 도진에게 닿
았다. 선우가 현우의 곁에 붙어 있을 때뿐이었지만, 요즘 그는 종종 자리를
비웠다.
명색이 길드장이니까 길드 관리 때문에 다니는 거겠지. 어렴풋이 그렇게 추
측하고 있었다.
41.
그림자를 통해 이동해서 등에 올라타면 될 것 같습니다만, 아무래도 쉽지
는 않겠지요.”
도진의 답에 선우가 그것 보라는 얼굴로 현우를 바라보았다. 절대 허락할
것 같지 않은 태도였다. 하지만 현우는 그를 설득해야 했다.
“대신 멀리서 보기만 할게.”
“그건 당연한 거고! 그래도 안 돼.”
“아직 커다란 인명 피해는 없었잖아. 잘 공격하지 않는다면서.”
“주변을 파악하느라 얌전할 것일 수도 있어.”
파악이 끝나고 나서 만만하다 싶으면 나서는 몬스터도 있었다. 몬스터라고
해서 전부 지능이 낮은 건 아니었으니까.
선우가 이렇게 싫어하는데 굳이 갈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
지만 만약에 정말 저 몬스터가 점박이라면?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마계가 지구와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었다는 소리였으니까.
마계의 끔찍함을 오랫동안 충분히 겪었던 현우로서는 꺼림칙한 이야기였
다. 던전 몬스터까지는 괜찮다. 지구에도 강자는 있을 테니까. 하지만 마수,
그 위의 마족까지 올라가게 되면 곤란해진다.
‘그것만은 절대 안 돼!’
현우는 절박했다. 생각해 보라. 갑자기 나타난 인간을 배척하는 강한 적들,
그들을 상대할 인재풀이 모자란 지구. 인류가 밀리면 지금껏 쌓아 온 사회
가 무너지게 된다.
“
사회가 무너지면 어찌 되겠는가! 사람들은 직장에 나가지 못할 것이고, 가
게들은 문을 닫겠지. 그 지경까지 가면 현우도 더는 가만있지 못하게 될 터
였다.
‘사실 나 강해!’
동생에게 모든 것을 고백하고, 앞으로 나서서 열심히 싸워 평화를 쟁취해야
할 것이다.
현우는 마족들의 숫자를 생각해 보았다. 죽여도 메쳐도 바퀴처럼 끊임없이
몰려오던 녀석들을! 그나마 가장 강한 힘을 지닌 마족인 알베르크와 맞짱
뜨게 되면서 자잘한 녀석들은 덤비지 않게 되었지만, 그 전에는 많이 괴로
웠었다.
그걸 다시 반복하라고?
절대 싫다. 게다가 마계에서는 마족들이 직접 찾아왔지만, 지구에서도 그러
란 법이 없었다. 어쩌면 전 세계를 돌아다녀야 할 수도 있었다.
역시 안 된다. 현우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어떻게든 선우를 설득해
야 했다.
“정말, 너무, 너무 가고 싶은데!”
현우는 선우의 손을 꽉 잡고 눈을 마주했다.
“안 돼.”
“정말로 안 돼?”
정말로 안 돼.”
이렇게 되면 신파극으로 나간다.
“사실 말이야. 저 몬스터 내가 아는 몬스터랑 닮았어. 점박이라고. 내가 힘
들 때 많은 도움이 되었었지.”
거짓말은 안 했다. 먼 거리를 달리기 힘들 때 점박이를 타고 이동하곤 했으
니까.
“케로 같은 존재야?”
“그래.”
“하지만 아닐 수도 있잖아. 마계와 지구는 막혀 있다고 들었는데.”
선우도 마계로 가서 힘을 얻고 돌아온 만큼,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
에 형의 만류하고자 했다. 닮았지만, 다른 몬스터일 확률이 더 높았으니까.
“그건 나도 아는데. 정말 닮았다니까?”
“몸통의 점 말고 다른 특징은 없어?”
“앞 발가락 발톱 중 하나가 하얀색일 거야.”
뽑았다가 다시 나니 하얀색으로 나더라.
“알았어. 그럼 내가 알아볼게.”
“고마워!”
“
아니면 안 가는 거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현우는 냉큼 대답했다. 선우는 이미 외국에 파견 나가 있는 선현 길드원에
게 연락을 넣었고, 오래 지나지 않아 답이 돌아왔다.
[앞발 왼쪽 4번째 발톱이 하얀색.]
선우는 답을 듣고 이마를 짚었다. 확실히 예전에 비해 1세대를 노리는 사람
은 줄어들긴 했다. 하지만 그건 어중이떠중이들이 포기한 거고, 그 외의 사
람들은 아직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럴 때 해외로 나간다고?
거짓말을 할까. 그러면 형은 알았다고 하며 가지 않을 것이다. 더 안전한 선
현 길드 안에 둘 수 있게 된다.
‘아냐. 이건 내 욕심이다.’
형을 좀 더 자유롭게 해 주자고 결심하지 않았던가. 선우는 작게 한숨을 내
쉬었다.
“
도진의 시선은 TV에 고정되어 있었다. 뉴스가 끝나고 드라마로 넘어간 참
이었다. 최근 현우가 흥미진진하게 보는 막장 드라마였는데, 도진은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애초에 TV 보기를 즐기지도 않았으니까.
그런데도 매번 보는 이유는 현우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얌전하던 얼굴이 드
라마를 볼 때면 여러 표정을 담는다. 지금도 그러했다.
“아니, 저걸 참아?”
현우가 씩씩거리며 감자칩 봉지를 뜯었다. 그리고 감자칩을 먹으며 화면에
몰두한다. 그 모습이 어쩐지 보기 좋았다.
이어 도진은 아래로 내려 보냈던 그림자를 거둬들였다. 그는 그림자를 이용
해서 다른 곳의 상황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림자가 보고 들은 것을 고스란
히 정보화해서 넘겨주기 때문이었다.
동생에 대한 정보를 알기 위해서 꾸준히 써 오던 능력이었다. 아직 누군가
에게 들킨 적도 없었고. 선현 길드에 와서는 내내 봉인해 두었던 능력이었
지만, 최근에는 다시 조금씩 사용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지선우는 거짓말을 할까?’
새로 들어온 정보에 망설이고 있다고 하였다.
‘확실히 지금 나가는 건 위험하지.’
그나마 국내는 선현 길드의 영향이 크다지만, 외국은 다르다. 특히 미국은
가디언 길드, 피닉스 길드가 거의 꽉 잡고 있어 크게 영향력을 발휘하기 어
려웠다.
최대한 은밀하게 출국한다고 하더라도, 들킬 위험은 존재했다. 그러니 제일
안전한 건 국내의 선현 길드에 머무르는 것이었다.
도진은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현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다 비운 감자칩 봉
지에 손을 넣고 휘적거리고 있었다. 잠시 일어나 새로운 과자 봉지를 열어
서 빈 봉지와 교환했다. 그러자 현우는 자연스럽게 새로운 과자를 먹기 시
작했다.
그때쯤, 선우가 되돌아왔다. 내내 드라마를 보던 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선우에게 다가갔다. 마침 제일 중요한 장면이 이어지고 있었으나, 저쪽이
더 급한 모양이었다.
“그래, 형. 미국에 가자.”
결국 선우는 진실을 택했다.
갑작스레 결정된 미국행에 현우를 제외한 사람들은 바삐 움직였다. 그 상황
에서 현우가 한 것이라고는 한 가지뿐이었다. 뉴욕 여행 가이드 숙지하기.
당장 위험한 몬스터를 보러 가는 사람답지 않은 태도였다.
“참, 형 이거.”
선우는 그런 현우에게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아이템을 건넸다. 화려한 문양
이 새겨진 금속 팔찌였다.
피닉스의 수호(유니크)]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공격을 3회 완벽하게 방어한다.
시동어 : 피닉스여, 영원하라!
[
회 공격을 막아줄 수 있을 거야.”
고작해야 3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횟수보다는 뒤의 문구가 더 중
요하다. 완벽한 방어.
“3
공격이라고 해도 뒷골목 불량배가 몽둥이를 내려치는 것과, 드래곤이 브레
스를 내뿜는 건 크나큰 차이가 있다. 몽둥이는 사람 몇을 해치는 것이 다지
만, 브레스는 다르다. 잘하면 도시 하나쯤은 쉽사리 날려 버릴 수도 있다.
그런 공격도 방어 가능한 것이다.
“그런 걸 나한테 줘도 돼?”
“나한테는 형이 제일 중요하니까.”
선우는 팔찌를 채워 주며 자연스럽게 답했다.
“그리고 팔찌 아깝다고 아끼지 말고 조금이라도 위험할 것 같으면 그냥 써
버려.”
다른 사람이 들으면 기겁할 소리를 태연하게 내뱉는다.
“응.”
그걸 알면서도 현우는 얌전히 대답했다. 어차피 쓸 만한 일이 생길 리가 없
다. 그렇게 생각해서였다. 곁에는 언제나 선우와 도진이 있었고, 그들이 없
더라도 뭐든 막아 낼 자신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번역 아이템도 하나 가져다줄게.”
“그건 하나 있는데?”
“있다고?”
준 적이 없는 번역 아이템이 있다는 말에 선우는 의문을 가졌다.
그 일본 사람이 줬어. 준이치라고 하던가?”
“이와모토 준이치?”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보자.”
현우는 방 한구석에 던져두었던 번역 아이템을 가져와 선우에게 보여 주었
다. 혹시나 해서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공방에서 제작된 최고급 번역 아이
템일 뿐이었다. 뭔가 특별한 장치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다른 사람이 준 걸 형이 가지고 다니는 건 내키지 않았다. 그랬기에 선우는
실수인 척 준이치가 준 번역 아이템을 부쉈다.
“아, 실수. 부실한 걸 줬나 보다. 내가 더 좋은 걸로 새로 가져다줄게.”
그러고선 부숴 버린 아이템은 쓰레기통에 탈탈 털어 넣었다. 현우는 선우가
일부러 부순 걸 알고 있었지만, 그저 작게 웃으며 넘어갔다. 질투하는 동생
이 귀여웠으니까. 동생이란 존재는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는 것 같았다.
“
그렇게 준비를 하는 사이, 시간은 흐르고 비행기를 타는 당일이 되었다.
“비행기는 처음 타 보는데.”
현우는 싱글벙글 웃으며 공항에 들어섰다.
포털이 열린 이후, 여행객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갈 사람은 간다. 그렇
기에 오늘도 공항은 붐비고 있었다.
“우리도 저기 줄서면 되나?”
“아니, S급 이상 각성자들은 따로 수속하도록 되어 있어. 여러 의미로 위험
하니까.”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들에게 공항 직원 중 하나가 붙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수속을 도와드릴 박현철이라고 합니다.”
그는 친절하게 그들을 VIP실까지 안내했다.
“여기는 S급 각성자분들만 쓸 수 있는 특별실입니다. 편히 쉬고 계시면 수
속 절차를 전부 마치겠습니다.”
그리고는 뒷걸음질 쳐 밖으로 물러났다. 그 사이 현우는 내부를 훑어보며
감탄사를 흘렸다. 한쪽에는 바가 있었고, 그 옆에는 핑거 푸드 몇 가지가 예
쁘게 놓여 있었다. 거기서 좀 더 들어가면 편히 쉴 수 있는 소파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는데, 하나같이 비싸 보였다.
“대단하네.”
“형,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원래 이런 데는 뷔페식 아냐?”
“핑거 푸드만. 그 외 음식은 주문하면 직접 만들어 줘. 안쪽에는 침대방도
있으니 혹시 피곤하면 잠시 쉬어.”
그러면서 현우에게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42.
과연. 메뉴판에는 레스토랑 뺨치는 여러 가지 메뉴가 적혀 있었다.
‘뭘 먹어야 할지 모르겠는걸?’
현우가 진지하게 메뉴판을 탐독하고 있는데,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그러
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여기서 다시 뵙는군요.”
미국 가디언 길드의 길드장, 레온이었다. 밝은 색의 정장을 걸친 그는 부드
러운 금발을 반쯤 뒤로 넘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거기가 길드 특유의 제복
을 걸치고 있으니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사람 같아 보였다.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선우가 레온을 상대했다.
“그냥 아는 사람이 있길래 반가워서 찾아와봤습니다.”
“저희가 반가워할 사이였던가요?”
“여러 번 봤으니 그래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한쪽은 웃으면서, 다른 한쪽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현우는 곧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한국어 잘하시네요?”
지금 그는 번역 아이템을 착용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레온의 말이 제
대로 된 한국어처럼 들렸다! 저번에 만났을 때만 해도 영어로만 말했던 걸
로 기억하는데.
“한국에 관심이 많아서요. 공부는 진즉 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익숙하지 않
아서 본국의 말을 더 많이 사용하긴 하지만요.”
이렇게 한국말을 잘하는 외국인은 처음 봤다. 누가 보면 한국에 몇 년 산 사
람인 줄 알겠다.
“그러고 보니 미국으로 가신다면서요?”
“그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딱히 비밀은 아니시지 않습니까?”
“소문내려는 것도 아니었지요.”
그 말에 레온이 어깨를 으쓱였다.
“비행기 시간을 기다리는 걸로 압니다만, 제가 그 쪽으로는 도움이 될 수 있
을 것 같습니다.”
“대가없는 호의는 없지요.”
“대가라. 그럼 1세대 분과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시겠습니까?”
“거절합니다.”
선우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요. 대가를 거절하시니 호의만 베풀겠습니다.”
무슨 수작인지 모르겠다. 선우는 여전히 웃는 낯인 레온을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강대국인 미국에서도 1, 2위를 다투는 길드의 길드장. 그런 그
가 굳이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 필요가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그러니 경계를 하는 것도 당연했다.
“개인 비행기를 끌고 왔거든요. 자리는 넉넉하니 같이 가시지 않겠습니까?”
듣기로는 거대 기업의 후계자였다고 했던가. 그 때문인지 엄청난 재력을 자
랑한다고 하였다. 밑바닥에서부터 기어올라 지금의 자리를 만든 선우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선우는 이번에도 필요 없다고 대답하려다가 잠시 망설였다. 자신이나 도진
은 힘들지 않겠지만, 형은 다르지 않겠는가. 아무리 좋은 자리에 앉아서 간
다고 해도 개인 비행기가 더 편할 건 뻔한 이야기였다.
“잘 모시겠습니다.”
레온은 승리한 사람처럼 웃어 보였다.
“
개인 비행기는 상상했던 것보다 안락했다. 내부만 봐서는 비행기라기보단
어느 집의 거실 같았다. 소파는 크고 멋졌고, 심심한 시간을 보낼 만한 게임
도 여럿 있었다. 뿐이랴. 개인 요리사까지 타고 있었다.
‘그나저나 신기하네.’
포털이 열린 시간이 길지 않아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만난 길드
장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이는 가준 정도였다. 그런 그도 20대였고.
“형, 왜 그래?”
생각에 빠진 사이, 선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어왔다.
“아니, 길드장이 다들 젊다 싶어서.”
그 말을 레온도 들은 모양이었다. 그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그렇게 젊어 보입니까?”
“네? 네.”
“몇 살쯤 돼 보이나요?”
“20대 중반 정도요?”
“틀렸습니다.”
“20대 후반인가요?”
아니면 더 올려야 하나? 고민하는데 레온이 말을 이었다.
“30대 중반입니다.”
“동안이시네요?”
“그렇다고들 하더군요.”
감탄사를 내뱉는데, 옆에 있던 선우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네.”
선우는 나이는 21살. 열 살 넘게 많은 사람이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걸 직접 내뱉는 건 실례지. 현우는 선우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러나 선우는 내뱉은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레온도 딱히 뭐라고 하지는
않긴 했다.
“지선우 씨는 어리군요.”
다만 가소롭다는 얼굴로 그런 말을 내뱉긴 했다. 덕분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거기에 도진이 한 술 더 떠 읊조렸다.
“한쪽은 어리고, 다른 쪽은 많으니 저는 적절한 것이겠군요.”
선량해 보이는 표정으로 한 말이었으나, 그 여파는 대단했다. 이런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종종 이런 식으로 폭탄을 던지곤 했다.
그런 사소한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비행은 편안했다. 타고 있던 직원들도
하나같이 친절했고, 음식은 맛있었으며 침대도 푹신했다. 진짜 호텔에서 푹
쉰 기분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미국, 레온의 호의는 끝나지 않았다.
“몬스터를 보러 왔다고요? 저도 마침 그곳으로 가려던 참인데 같이 가시지
않겠습니까? 더 빨리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선우는 이번에도 거절하고 싶은 걸 참았다. 그리고 레온은 자신이 말한 대
로 빠르게 몬스터를 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비록 먼 거리에서였지만 말이
다.
‘점박이 맞는 것 같은데.’
멀리서 망원경을 만지작거리던 현우는 선우 몰래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좀
더 가까이에서 자세히 봐야 알겠지만, 아무래도 점박이 같았다.
“더 가까이서 볼 수는 없죠?”
“위험하니까요. 저 근처는 사람들도 전부 대피했습니다. 당장 얌전하다고
해서 방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현우는 발치에서 뒹굴고 있는 케로를 툭툭
쳤다. 그리고 높은 빌딩 위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점박이를 가리키고, 자신
의 옆자리를 찍었다.
단순한 동작이었으나, 케로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금방 알아듣고는 토
실한 엉덩이를 쫄랑쫄랑 흔들며 밖으로 몰래 나갔다.
점박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높고 파란 하늘에 기분도 들떴다.
그는 기지개를 쭉 펴고 이어 빌딩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라졌지만, 아직 남아있는 이들이 있었다.
소위 말하는 각성자들.
사람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에 지금까지 간만 봤지만, 이제 점박이
는 확신했다. 사람은 자신보다 약하다. 마계에서 보았던 사람이 특이했던
것뿐이었다.
그렇다면 자신보다 약한 존재에게 움츠릴 필요가 있는가? 아니다.
점박이의 입이 쭉 찢어지며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다. 오늘은 근처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쓸어버릴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동을 해서 다른 사람을 찾아
봐야지.
마계의 생물은 기본적으로 어둠이 바탕이 되는 생물. 그런 이유로 언제나
난폭하며, 다른 이들을 해치고자 한다. 좀 더 강해지기 위해서, 어둠을 쌓기
위해서!
그런 이유로 점박이는 낮게 웃으며 날개를 펼쳤다. 이제 사냥의 시간이다.
어 팀장님. 블랙 드래곤이 움직입니다!”
빌딩 아래에서 점박이를 올려다보던 각성자가 말했다.
“어디로?”
“어디, 그러니까. 여기, 여기입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커다란 몸체가 바닥에 내리박혔다.
쿵!
각성자는 점박이가 착지하는 범위에서 아슬하게 벗어났다. 그 덕분에 온몸
이 욱신거렸지만,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 ,
다들 전투 준비해! 그리고 지원요청도 한다!”
팀장이 외치고 각성자들이 점박이를 둘러쌌다.
“레이드 시작!”
초반에는 당황했지만, 이들은 가디언 길드의 길드원들이었다. 미국 최고의
길드, 그 길드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은 언제나 가슴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
었다. 그러니 점박이를 정면에서 마주치고도 도망치지 않았다.
탱커가 앞으로 나서고, 딜러진들이 공격을 퍼부었다. 화려한 능력이 허공을
수놓으며 점박이에게 쏟아져 내렸다. 그러나 점박이는 코웃음을 치며 몸으
로 그 모든 것을 받아냈다.
블랙 드레이크, 그는 마법 저항력이 높으며 두꺼운 거죽을 가지고 있는 몬
스터였다. 어지간한 공격은 버텨낼 정도가 되었다. 포화를 이겨낸 점박이는
이어 묵직한 꼬리를 휘둘렀다.
그에 가장 앞에 있던 탱커가 막아섰으나,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뻔했다. 그만큼 타격이 강했다.
“키르르륵.”
점박이는 키들대면서 날뛰었다. 당장 죽일 수도 있으면서, 그러지 않고 그
들을 농락했다. 그도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잘 몰아넣고 있다면서 기뻐하고
있었다.
됐다, 됐어. 점박이는 몸을 부르르 떨며, 앞으로 다가올 살육의 시간에 기대
감을 가졌다. 그리고 가장 앞에 선 사람의 방패 아래에 발톱을 걸어서 위로
걷어냈다. 방패에 가려져 있던 사람의 표정에 당혹이 떠올랐다.
“
이어 점박이가 막 입을 벌리려는 순간, 무언가가 그의 머리 위로 가뿐히 착
지했다.
“왕왕!”
조그맣고 작은 강아지 한 마리였다.
점박이가 멈칫한 틈을 타서 잡혀있던 탱커는 뒤로 물러났지만, 놀라긴 그들
도 마찬가지였다.
“강아지?”
“포메라니안?”
“왜 여기에 강아지가?”
그런 사람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아지가 앞발로 점박이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왕왕! 아르르르륵.”
케로로서는 나름 경고를 한 것이었으나, 아직 정체를 모르는 점박이는 분노
했다. 그래서 머리를 흔들었다. 이 발칙한 생물을 떨어트려 밟아 죽인 다음
꿀꺽 삼킬 생각이었다.
43.
“
,
어어 저거 구해야 하는 거 아닌가?”
팀장이 멍하게 내뱉는 소리에 팀원이 당황했다.
“네?”
하지만 강아진데요? 강아지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외려 좋아하는 쪽에 가까웠
지만, 사람도 다치는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강아지마저 챙기긴 어려웠다. 게다
가 의외라고 해야 할지. 강아지는 몬스터의 머리 위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잡아
가며 잘 버티고 있었다.
덕분에 몬스터는 더욱더 화가 났고 말이다.
왜, 왜 안 떨어져! 처음에는 머리만 흔들던 점박이였으나 이제는 미쳐 날뛰기 시
작했다. 이리 쿵, 저리 쿵. 벽에 머리를 박고 날개까지 휘저었다. 꼬리를 휘두르
기도 했으나, 뭔가 맞는 느낌은 나지 않았다.
“끼이이이익!”
너무나도 화가 났다. 반드시 죽이고 말테다! 점박이는 그대로 하늘 높이 날아오
르기 시작했다. 높은 데서 몸을 회전시켜 떨어트릴 셈이었다. 그러나 고도가 높
아질수록 이상하게 머리가 묵직해지기 시작했다. 열심히 날개를 파닥거려 보았
지만, 등까지 묵직해지면서 점점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끼이이익!”
이러다가는 작은 생물을 죽이기 전에 자신이 다칠 것 같아서 필사적으로 버텨
냈다. 하지만 바닥에 이르러서는 결국 고꾸라지고 말았다.
뭐야? 뭐야? 점박이는 끙끙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눈앞을 가득 채우
는 까만 벽이 보였다. 이게 뭔가 싶어 시선을 천천히 올리니 그 끝에 개 머리 세
개가 보였다.
점박이와 눈을 마주친 개, 케로는 씨익 입을 끌어올렸다. 짐승의 형태인데도 웃
는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어 점박이는 힘차게 몸을 튕겨 케로를
털어냈다. 이번에는 케로도 순순히 비켜 주었다.
“끼르르르륵!”
마계에서 보던, 익숙한 얼굴에 점박이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언제나 같이 다니던 발록과 사람이 있나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그런
데 암만 샅샅이 살펴봐도 둘이 보이지 않는다. 없다.
그걸 확인하고 나자 점박이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발록과 사람은 이기기 힘
들지만, 케로베로스는 이길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애초에 딱히 급 차이가 크게 나
는 몬스터도 아니었고.
점박이는 눈을 가늘게 뜨며 케로베로스를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눈치를 보다
날갯짓을 시작했다. 원래 날 수 있는 생물이 그렇지 않은 생물과 땅에서 육탄전
을 벌이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사람들은 골려 줄 생각에 그랬다지만, 케로베로
스에게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힘차게 날아오르려 했지만, 케로베로스가 좀 더 빨랐다.
“크왕!”
달음박질쳐 순식간에 거리를 줄인 케로베로스가 날개를 물고 늘어졌다. 날개를
찢을 생각이다! 그 사실을 알아챈 점박이가 미친 듯이 몸부림치며 그의 머리를
때렸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쿵쿵!
거대한 두 몬스터가 얽혀서 거리를 나뒹구니 연신 커다란 소리가 연신 울려 퍼
졌다. 가로등이 휘어지고, 나무가 부러진다. 건물 벽에는 구멍이 뚫리고, 도로가
갈라졌다.
“일단 뒤로 물러선다!”
팀장은 다급히 외쳤다. 작고 까만 강아지가 갑자기 모습을 키우더니 블랙 드래
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다음부터는 속수무책이었다.
‘공격해야 하나?’
이를 악물고 고민하는데, 문득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한국이란 작은 나라
에서 나타난 1세대. 그 1세대가 몬스터 한 마리를 다룰 줄 안다고 하였다. 다른
1세대 가족과의 대담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고.
‘머리가 세 개 달린 거대한 지옥의 파수꾼.’
전설 속에 나오는 케로베로스. 그 모습과 똑같다고 하였다.
“공격할까요?”
“아니, 일단 지켜본다! 둘이 지칠 때까지 지켜봐!”
케로베로스가 아군이건, 적군이건 그쪽이 더 나으리라 생각했다.
팀장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에도, 전투는 연신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
이 지날수록 우위를 점한 쪽이 어느 쪽인지 드러나기 시작했다. 점박이가 날 수
없는 시점에서, 승기는 이미 케로베로스에게 돌아갔다.
필사적으로 애시드 브레스를 내뿜어 보았지만, 이어 터져 나오는 화염에 가로
막혀 버렸다. 점박이의 속성은 독, 케로베로스의 속성은 불. 불은 독을 이긴다고
하였으니 불리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아무래도 만만하다 생각했던 건 망
상이었던 듯하다.
너무 억울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이제 막 뭔가 해 보려는데 케로베로스가
나타나다니. 해가 질 때까지 열심히 버티던 점박이는 결국 바닥에 무너져 내렸
다.
언제나 자랑스럽게 여기던 반짝이는 비늘은 여기저기가 뜯어져 있었고, 날개에
는 구멍이 뻥 뚫렸다. 그뿐이라 어찌나 얻어터졌는지, 몸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
다. 그 상태로 널브러져 있자니 의기양양하게 다가온 케로베로스가 점박이를
앞발로 툭툭 쳤다.
“끼륵.”
싫다고 고개를 내저어보았지만, 주먹이 너무 가까이 있었다. 결국 점박이는 훌
쩍이면서 몸을 작게 만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자리에 남은 건 너덜
너덜해진 날개 달린 작은 도마뱀 한 마리였다.
“왕!”
어느새 다시 작아진 케로베로스, 케로는 의기양양한 태도로 그런 도마뱀을 입
에 물었다. 그러고는 당당하게 거리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붙들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오늘따라 질문이 많았다.
“누가? 네가? 그래, 정의가 불타오르는 것 같으니 임무를 하나 맡기겠다.”
“네?”
“
저 몬스터가 어디 가는지 뒤를 따라가 보도록.”
“혼자서요?”
“위험하면 튀어.”
위험하진 않을 것 같지만 말이다. 팀장은 팀원에게 일을 맡겨놓고 처참하게 망
가진 거리를 돌아보았다. 이제 이걸 복구시키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인가. 절로 한숨이 나왔다.
“
케로는 뒤에 사람이 따라오는 걸 알고 가볍게 속도를 올렸다. 작은 몸체로는 상
상할 수도 없는 높이를 뛰어올라서는 그대로 건물 옥상을 밟고 점프했다. 그 모
습이 마치 날아다니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러기를 20분,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케로가 가슴을 쭉 폈다.
‘도마뱀을 잡아 왔어요!’
날지 못하면 할 줄 아는 게 없는 멍청한 도마뱀. 케로는 현우 앞으로 다가가 입
에 문 걸 퉤 뱉어냈다
“키르르르르.”
케로에게서 벗어나자마자 점박이는 애처롭게 울었다. 20분이 넘게 매달려서 뛰
어왔더니 죽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동정심이라도 사보고자 약한 척을 해 보았
다.
“오랜만이네.”
현우에게 인사를 받기 전까지만. 점박이는 천천히 눈을 깜박이곤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현우 얼굴을 한 번 보고, 하늘을 한 번 보고. 비명을 질렀
다.
키야아아아악!”
그런 점박이의 머리를 케로의 앞발이 치고 지나갔다. 순식간에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으나, 그게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놀랐다.
‘왜 여기에 저 자가 있어?’
절로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꿈이지?’
눈을 감았다 떠보았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아까 그 몬스터인가?”
“응.”
“그런데 얘도 작아질 수 있네?”
마계에서도 상당한 힘을 가졌다고 알려진 몬스터들은 대부분 크기 조절이 가능
했다. 그렇기에 케로도 점박이도 작아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게.”
“그래서 이제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선우가 점박이를 가리켰다.
“그러게. 어쩔까?”
이야기 하는 둘 사이로 레온이 끼어들었다.
“
일단 그냥 데려가시는 건 안 됩니다.”
“왜요?”
“뉴욕에 피해를 입힌 몬스터이기에 타국 사람이 데려간다면, 다른 사람들이 가
만있질 않을 겁니다.”
“하지만 케로가 잡았는데요?”
상황이 복잡하게 되었다. 점박이는 그래도 몬스터 치곤 유순하게 지낸 편이었
지만, 그래도 그로 인한 피해가 적지 않았다. 오는 공격까지 무시할 정도로 몬스
터가 상냥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전투기가 몇 대 부서지고, 각성
자 여럿이 다쳤다. 방금 전투 때문에 거리가 엉망이 되기도 하였고.
“죄송합니다만, 일이 복잡합니다.”
레온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얘를 데려가면 어디 쓰실 건데요?”
“살아있는 희귀한 몬스터이니 여러 연구에 쓰겠지요.”
“힘들 텐데요.”
“그거야 해 보면 알지 않겠습니까?”
물러날 생각이 없는 레온을 보며 현우는 팔짱을 꼈다. 어쩐다. 교활한 녀석이니
기회만 나면 크게 난장을 칠 것인데. 그때 선우가 현우에게 물어왔다.
“형, 이거 데려가고 싶은 거야?”
“응.”
“
그럼 내가 손 써 볼게.”
선우가 자신만 믿으라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그때쯤 점박이와 케로의 뒤를 따
라오던 가디언 길드의 일원이 도착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점박이와 케로, 그
리고 자신의 길드장을 보더니 금방 자세를 바로잡았다.
“길드장님을 뵙습니다! 영광을 위하여!”
“인사는 됐습니다. 그보다 몬스터 이송차를 불러오십시오.”
“네!”
그렇게 점박이는 이송차에 실려 미국 내 연구실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선우와 현우, 도진은 뉴욕에서 좀 더 머무르며 상황을 살펴보기로 하였
다.
“
*
이게 그 몬스터입니까?”
“네, 그렇다고 합니다.”
“이렇게 작은데요?”
“몸의 크기 조절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대단하군요! 새로운 발견입니다.”
“
연구원들은 하나같이 들뜬 표정으로 거대하고 투명한 벽 너머에 갇힌 작은 몬
스터를 바라보았다. 이 작은 것이 집채만 한 몬스터였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일단 몸 상태가 너무 좋지 않으니, 조금 회복시킨 후 실험을 시작해 봅시다. 할
것이 아주 많습니다!”
내내 앞발에 머리를 묻고 있던 점박이는 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케로가 전달해 주었던 말을 떠
올렸다.
‘인간들을 질리게 만들어. 너를 통제할 수 없음을 알려 줘.’
그 정도야 쉽지. 점박이는 히죽 웃으며 다시 고개를 앞발에 파묻었다. 일단은 부
상 회복이 먼저였다.
44.
교활한 점박이는 끙끙 앓는 척을 하며 죽어가는 시늉을 하였다. 마계에서는 강
한 편이었지만, 그런 점박이에게도 어린 시절은 존재했다. 가끔 살아있는 먹잇
감만을 선호하던 몬스터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했던 위장. 그건 사람들에게도
훌륭하게 먹혀들어 갔다.
인간을 질리게 만들라고 했지만, 어떤 방식으로 하라고는 안 했으니까. 점박이
는 몸의 상태를 조절해 나갔다.
“점점 몸이 나빠져 가나 봐요.”
“죽으면 원래대로 커지나? 아니라면 저 작은 도마뱀 하나 가지고 실험을 하게
생겼는데? 그러면 재료가 너무 부족해.”
“영양분을 조금 공급해보는 건 어떨까요? 죽지 않을 정도로만.”
“그건 좀 위험하지 않나? 그 때문에 일부러 먹이도 안 주고 있는데.”
그래도 이대로 말라 죽는 것보단 낫잖아요.”
연구소장은 잠시 고민을 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조금만. 모처럼 처음 보는 몬스터가 들어왔는데, 죽이기엔 아깝지.”
“육식이겠죠?”
“아마도?”
사람들은 문을 조금 열고 고기를 밀어 넣어주었다. 그러나 점박이는 끙끙대기
만 할 뿐 거기에 입을 대지 않았다.
“먹지 않는데요?”
“그러면 다른 방식으로라도 주입해 보지.”
다음엔 보호구를 입은 각성자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니, 이런 건 직접 하라고.”
이런 상황이 될 때만 각성자가 필요하지. 밀려 들어간 각성자는 투덜거리며 연
구원들이 말한 걸 떠올리려 애썼다.
‘몸이 작으니까 등 쪽에 주삿바늘을 꽂으면 됩니다. 너무 깊이 넣지는 말고 얕
게.’
장갑을 낀 손이 축 늘어진 점박이의 몸에 닿았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 점박이가
원하던 순간이었다. 입을 쭉 찢으며 웃은 점박이는 곧바로 각성자에게 달려들
었다. 거대해진 몸이 사람을 깔아 누르고 상처 입혔다.
쿵!
“
특수 재질로 만들어진 우리에 몸이 부딪칠 때마다 커다란 소음이 울려 퍼졌다.
“마비, 마비 가스 넣어!”
곧바로 우리 안에 가스가 퍼져 나갔으나 이미 늦었다. 점박이가 미친 듯이 날뛰
는 탓에 우리에 금이 갔기 때문이었다. 영리한 점박이는 금이 간 부분에만 집중
적으로 몸을 부딪쳤다.
안에 들어갔던 각성자는 피투성이가 되어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위이이잉!
사이렌이 울리고 연구소를 지키던 각성자들이 몰려왔다. 그쯤에 점박이는 깨진
우리 밖으로 기다란 목을 빼내고 있었다.
“도망치게 둬선 안 돼!”
“잡아!”
소란스러운 가운데 점박이의 입이 열렸다. 그리고 입에서 모든 것을 녹이는 독
이 퍼져 나갔다. 미처 피하지 못한 각성자 몇이 녹아내린 신체를 붙잡고 울부짖
었고, 나머지는 뒤로 물러났다.
공격이 계속 날아오는 가운데, 점박이는 틈새로 발을 빼냈다. 빠지직 소리를 내
던 우리는 반쯤 무너져 내렸고 마침내 거대한 몸뚱이가 전부 밖으로 빠져나왔
다.
그다음은 악몽이었다. 날개를 다친 탓에 날지는 못했지만, 지상에서 날뛴다고
하여 가진 힘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당장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 많은 사람이
중상을 입었다. 특히 미처 피하지 못한 비각성자 연구원들의 피해가 가장 심했
다.
뒤늦게 가디언 길드의 1팀이 올 때까지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자신을 희생하는
것뿐이었다.
“이런이런.”
레온은 간신히 다시 잡아 둔 점박이를 보며 혀를 찼다. 당장 집어넣을 만한 거대
우리가 없기에 일단은 포박하여 바닥에 박아 놨는데, 그 상태에서도 교활하게
굴고 있다.
죽은 것처럼 늘어져 있다가 제일 먼저 접근한 각성자를 물어뜯었다. 이후 그 방
법이 통하지 않게 되자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묶어둔 끈이 당장이라도 풀
릴 듯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저거 어떻게 할 수는 없는 겁니까?”
연구소장이 안타까운 시선으로 점박이를 바라보았다.
“지금으로서는 죽이는 게 가장 나을 것 같습니다.”
“그건, 그건 안됩니다! 새로운 몬스터라고요? 그런 몬스터를 연구할 수 있는 기
회인데! 살아 있는 몬스터와 죽어 있는 몬스터. 당연히 살아 있는 쪽이 좀 더 많
은 걸 알아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안 그래도 몬스터를 잡아 온 선현 길드쪽에서 자신들의 몫을 주장하고 있는데,
연구소장은 이기적으로 굴기만 했다.
‘정말 인간은 이기적이라니까.’
하지만 그런 면이 있어서 인간이 흥미로운 것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레온은 몬
스터 못지않게 번거로운 연구소장에게 좀 더 관대해지기로 했다.
“일단 테이머를 데려와 보죠”
그렇군요. 테이머가 있었습니다! 잘만 하면 우리가 수리될 동안 버틸 수 있겠
군요!”
연구소장은 기꺼워했다.
다음날, 고르고 고른 테이머 몇이 연구소에 도착했다. 몬스터를 본 테이머 중 일
부는 테이밍을 포기했다.
“이건, 이건 무리입니다. 괴물 아닙니까? 전 최대로 테이밍한 게 레드 보어 정도
라고요.”
붉은 털을 가진 멧돼지를 닮은 몬스터 레드 보어. 제법 가죽이 두껍고 속도가 빨
라 테이머들이 애용하는 몬스터였지만, 그도 점박이에 비해선 작았다.
그렇게 일부가 빠지고 나니 이제는 거대 몬스터를 테이밍해 보고 싶은 욕망을
가진 자와, 의무를 가진 자만 남았다.
그들은 저희끼리 순서를 정하더니 한 사람씩 앞으로 나섰다.
“제가 첫 번째군요!”
제법 유명한 테이머인 닉이 양손을 비비며 나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양
손을 잃을 뻔했다. 레온이 기다리고 있다가 잡아당기지 않았으면 그대로 꿀꺽
삼켜졌을지도 몰랐다.
다른 테이머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어느 정도 시도는 해 본 이도 있었
으나, 결국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참으로 무능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제 어쩝니까?”
연구소장이 우는 얼굴을 하였다.
“
다 늙은 중년의 우는 얼굴은 보고 싶지 않은데.’
레온은 혀를 차며 생각에 잠겼다.
‘이 기회에 1세대를 실험해 볼까?’
지선우가 애지중지 감싸고 있긴 했지만, 하는 행동으로 봐선 틀림없이 여기에
관심을 가질 것 같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십시오. 다뤄볼 만한 사람을 찾아보겠습니다.”
“빨리, 빨리 부탁드립니다!”
레온은 연구소장을 뒤로 하고, 연구소를 나섰다.
‘
*
그날 오후, 현우는 레온의 방문을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그들이 머무는 호텔로 찾아온 레온은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해 왔다.
“여긴 어쩐 일입니까?”
앞으로 나선 선우가 레온을 상대하며 현우를 슬쩍 뒤로 밀자 도진이 그를 안쪽
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서로 사이도 안 좋으면서 이럴 때는 죽이 잘 맞는다.
“잠시 들어가도 됩니까?”
“그전에 용건을 알고 싶군요.”
흐음. 혹시 이번에 잡힌 블랙 드래곤에게 관심이 있지 않습니까?”
“관심은 있습니다만, 지금까지 요청을 묵살해 오지 않았습니까?”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이쪽도 이래저래 복잡해서요. 그래서 어쩌시겠습니까?”
선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들어오라는 표시였다. 레온은
태연하게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건 형님도 같이 들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제가 듣고 전달하면 됩니다.”
“이런. 제 신뢰도가 이것밖에 안 됩니까?”
가디언 길드의 레온이라면 대외적인 평이 좋은 각성자였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라면 믿어도 되는 사람이었지만, 이상하게 꺼림칙했다. 그 때문에 선우는 미국
을 몇 번 오가면서도 레온과는 공적인 관계만 유지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저번
에 레온과 같이 다니면서도 내내 형에게 붙어 다닌 것이기도 했고.
선우는 레온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할 말이 뭡니까?”
“블랙 드래곤 말입니다. 통제가 안 됩니다.”
레온은 선뜻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냈다.
“테이머들도 불러 봤지만, 테이밍을 하지 못하더군요. 그렇다고 죽일 수도 없
고. 알지 않습니까? 살아 있는 새로운 몬스터의 가치를 말입니다.”
선우는 아무런 대답 없이 레온을 바라보았다.
“
그런 이유로 형님을 빌릴 수 있을까요?”
“테이머도 견디지 못한 몬스터입니다. 제 형이 견딜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
까?”
“저는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저 몬스터도.”
레온의 손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케로를 가리켰다.
“쉽게 다루지 않았습니까?”
“케로야 사정이 있어서 다루게 된 것일 뿐입니다. 새로운 몬스터는 이야기가 다
르지요.”
아주 부정적인 반응을 아니었다. 그랬다면 지금쯤 공격이라도 하려 들었을 테
니까. 그만큼 형을 아낀다고 소문이 난 각성자니 말이다.
“원하는 게 있습니까? 저는 돌려 말하기는 싫어합니다.”
“실험에는 협조하겠습니다. 대신 그 몬스터를 저희가 받고 싶습니다. 받은 뒤에
도 필요하다면 실험 재료를 제공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거 쉽지 않은 조건이군요. 하지만 못할 조건도 아니긴 합니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레온에게는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는 단순한 길드의 길드
장이기만 한 게 아니라, 미국 재벌가의 자식이기도 했으니까. 연구소에도 상당
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전부 드리기만 하는 건 조금 불공평한 것 같군요. 그러니 하나
추가합시다.”
“뭘 말입니까?”
“
세대와의 대화. 저는 그걸 원합니다.”
레온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그의 말에 선우의 표정이 굳었다.
“해를 끼칠 만한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양손을 들어 올려 보인 레온이 이어 말했다.
“그저 궁금할 뿐입니다. 그가 본 마계와 제가 본 마계가 어떻게 다른지요.”
“그것뿐입니까?”
“그것뿐이지요. 저는 1세대와 관련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지금보다 더 강해
지고픈 욕망은 있습니다만, 그건 결국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석적인 대답이었다.
“1
45.
“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될 수 있으면 빨리 결론을 내리셨으면 좋겠군요. 연락은 여기로
해 주시면 됩니다.”
레온은 명함 한 장을 건네고는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선우
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명함을 내려놓았다. 일단 모든 건 원하는 대로 흘러갔다.
그가 형과의 대화를 원하는 것도 예상했던 범위 안이었다. 그렇지만 예상했던
것이라 하여 내키는 일인 건 아니었다.
“형, 꼭 가야 해?”
“응.”
현우는 생각을 바꿀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놈의 몬스터, 죽건 살건 무슨 상관이
라고. 괜히 심술이 돋아났지만, 결국 선우는 현우에게 약했다.
“알았어. 대신 가거든 절대로 우리에게서 떨어지면 안 돼. 돌발행동도 하지 말
고.”
“괜찮아. 여차하면 케로가 있는걸?”
현우는 케로를 두 손으로 안아서 높이 들어 올려 보였다.
“와앙.”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하는 모습에는 조금의 신뢰도 들지 않는다. 그래도 형을
잘 따르니까 괜찮겠지. 무슨 일이 생기면 형만 훌쩍 데리고 도망칠 만한 녀석이
다.
“그럼 내일 연락을 넣을게.”
상대 쪽이 좀 더 그들을 원하게끔, 시간을 끌 생각이었다.
“그런데 형.”
“응?”
“밖에는 나가 보지 않아도 돼?”
첫 해외여행인데 밖이라도 구경해 보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 마음에 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과는 달랐다.
“나가지 않아도 돼. 사람 사는 곳이야 다 비슷하겠지, 뭐. 그보다 낮잠이나 좀 잘
래. 선우야.”
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침대 옆을 툭툭 쳤다. 그러자 선우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
에 케로가 냉큼 뛰어올라 그 옆에 누웠다. 선우는 자연스럽게 그런 케로를 잡아
서 치워 내고는 겉옷을 벗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천천히 감기는 형의 눈을 보
며 자신도 눈을 감았다.
어차피 같은 룸 안에 도진도 있었으니까, 잠시 눈을 감아도 되리라. 그렇게 생각
하면서.
*
다음날 오후가 되자, 선우는 레온에게 연락을 넣었다.
─ 연락이 늦군요.
“그렇습니까? 전 나름 빠르게 한 것 같습니다만.”
─ 뭐, 현우 씨가 필요한 쪽은 저희니까 어쩔 수 없긴 합니다만. 일단 헬리콥터
를 보낼 테니 타십시오. 편안하게 연구소까지 모실 겁니다.
헬리콥터는 정해진 시각에 근처 빌딩의 옥상에 내려섰다. 그걸 타고 30분 정도
이동하자 연구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특이한 재질의 돔으로 둘러싸인 고층 건
물.
헬리콥터에서 내려 입구로 다가가니 미리 기다리고 있던 레온이 그들을 맞이했
다.
“어서 오십시오.”
건물은 하늘에서 보던 것과 다르게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그리고 겉에선 고층
으로 보이던 건물이 실상은 지상 1층인 걸 알게 되었다. 여러 개의 층 천장을 터
놓았기 때문이었다.
거대 몬스터를 수용하기 위해서인 듯했다.
“이쪽입니다. 들어가기 전에 번역 아이템은 반드시 착용해주십시오.”
아이템을 착용하고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포박당한 채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점박이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 보았던 때보다 더 너덜너덜해진 점박이는
얌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얌전하네요?”
현우의 말에 어느새 옆에 따라붙은 연구원이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얌전하다고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얼마나 교활하고 난폭한지 손을 쓰기도
어렵습니다. 저러고 있다가도 근처에 사람이 다가가면 당장 입을 벌리고 물어
뜯으려 할 겁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몇 사람을 물었는지 모릅니다. 게다가 묶어
놓은 것도 몇 번이나 풀었습니다. 크기 조절이 가능하니 대체 뭘로 묶어 둬야 할
지 모르겠더군요. 크기 조절이 가능한 구속구를 가져오기까지 정말 힘들었습니
다.”
“그럼 사람을 접근시키지 않으면 될 것 아닙니까?”
“이대로 계속 시간 낭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뭐라도 해 보려고 했던
거지요.”
연구원은 어깨를 움츠리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시간은 금이지요.”
이어 중년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 연구소장 윌슨입니다.”
“안녕하세요, 윌슨입니다.”
윌슨은 악수를 위해 손을 내밀었지만, 아무도 그걸 마주 잡지 않았다. 그러자 윌
슨은 미세하게 표정을 구기며 손을 회수했다. 지금 그에게 이들은 반가우면서
도 반갑지 않은 이들이었다. 이게 무슨 모순이냐 할지 모르지만, 사정을 들으면
이해할 것이다.
몬스터를 진정시키고 필요한 재료를 채취하기 위해서는 현우가 필요했다. 하지
만 결국 그는 몬스터를 그들에게서 빼앗아 갈 것이다. 재료를 제공해 주겠다고
는 했지만, 옆에 두고 연구하는 것에 비할까. 자연 복잡한 감정을 품게 될 수밖
에 없었다.
“어떻습니까? 다룰 수 있겠습니까?”
“네, 될 것 같네요.”
현우는 그렇게 대답하고 성큼 점박이를 향해 다가갔다. 주변에서 바라보는 시
선에 긴장감이 담기기 시작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을까요?”
연구원이 연구소장 윌슨에게 속삭였다.
“괜찮겠지. 본인도 장담하지 않았나.”
어느새 점박이의 지척에 다가간 현우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이마를 슬슬 쓰
다듬자 감겨있던 눈꺼풀이 열렸다. 파충류 특유의 길쭉하게 찢어진 동공이 현
우를 바라보았다.
“왕왕!”
“
옆에서는 케로가 늠름하게 서서 점박이를 향해 짖었다.
“크르릉.”
점박이는 목을 울리며 현우의 손바닥에 자신의 머리를 비볐다. 복종의 표시였
다.
“이건 풀어 줄 수 있을까요?”
“그건 안 됩니다. 그 끔찍한 몬스터를 풀어 주라고요?”
연구원이 손을 휘저으며 기겁했다.
“괜찮은데요.”
“아니, 위험합니다! 절대 안 됩니다.”
둘이 실랑이를 벌이는 걸 바라보던 레온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풀어 주십시오.”
“하지만!”
“무엇을 걱정하는 겁니까? 여기 S급 각성자가 몇이 있는데.”
그러면서 선우와 도진을 바라보니, 그제야 연구원이 안색이 좀 나아졌다. 그러
고 보니 오늘 방문자 셋 중 둘이 S급 각성자라고 하였다. 미국의 자랑, 레온도
S급 각성자였으니 몬스터가 풀려난다고 해도 금방 제압당할 것이다.
“그럼, 그럼 풀겠습니다.”
이어 몇 명의 각성자가 조심스럽게 점박이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몸을 감싸고
있는 구속구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자꾸 몸에 닿아오는 사람의 손길이 짜증 나
는 지 점박이가 콧김을 내뿜었지만, 그래도 공격을 하진 않았다. 바로 앞에 현우
가 있었으니까.
다른 사람들 앞에서야 흉포한 몬스터에 불과했지만, 현우 앞에서는 한 마리의
순한 양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그동안 너무 많이 처맞았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아픔을 생각하면 절로 얌전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구속구가 전부 풀려나고 점박이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몸을 일으킨 채
날개를 쭉 편 점박이는 이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쪽.”
그러다 현우가 부르자 그쪽을 바라보았다.
“이제 뭘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이어지는 현우의 질문에 레온이 대답했다.
“몬스터를 확실하게 다룰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해 주시면 됩니다.”
“그러면 손!”
점박이는 커다란 손을 현우의 작은 손 위에 살포시 얹었다.
“뒤돌아! 굴러! 만세!”
무엇을 말하건 점박이는 잘 따라왔다.
“허어. 테이머가 아니라고 했습니까?”
본인은 그렇다는군요.”
“그런데 저게 가능한 겁니까?”
윌슨의 눈이 반짝 빛났다. 몬스터도 몬스터였지만, 그걸 다루는 현우도 탐나는
실험 대상이었다. 그런 그에게 레온은 나직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하하하, 무슨 생각을 말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윌슨은 시치미를 뗐지만, 본래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는 레온은 다시 한 번
경고할 뿐이었다.
“당신은 얌전히 몬스터만 실험하면 됩니다. 아시겠지요?”
하지만 저렇게 탐나는 소재가 바로 앞에 있는데! 윌슨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현우의 증명은 끝났다. 그는 누구보다 훌륭하게 몬스
터를 다뤘다.
“그럼 점박이는 제가 데리고 가도 되겠지요?”
“그새 이름까지 지었습니까?”
“네. 잘 어울리지 않나요?”
사실 이름은 마계에서 지었다. 바이크 1호겸 점박이. 문득 바이크 2호와 3호도
떠올랐지만, 걔들까지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 현우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
좋습니다. 그러면 재료 채취는 언제쯤으로 잡으면 될까요?”
“일단 배불리 먹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상태가 영 아닌 것 같네
요.”
“그러도록 하지요. 남은 절차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갈 때도 헬리콥터로 가시
겠습니까?”
“부탁드립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윌슨이 내내 아쉬운 표정으로 몬스터와 현우를
바라보긴 했지만,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레온의 경고 때문이었다.
그렇게 넷이서 왔던 그들은 다섯이 되어 호텔로 돌아가게 되었다. 작아져서 도
마뱀의 형태로 대롱대롱 매달려 호텔방에 들어선 점박이는 작게 하품을 했다.
이어 뱃속에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연구소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먹지도, 자지도 못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거기서 밥 못 먹었어?”
현우의 질문에 점박이가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중간에 사람 몇을 꿀
꺽 삼키고 싶긴 했지만 맛만 보고 뱉어 냈다. 현우도 사람이란 걸 떠올렸기 때문
이었다.
“그럼 룸서비스를 시키자.”
현우는 선우의 도움을 받아 룸서비스로 고기류 요리 몇 가지를 시켰다. 요리가
도착하기 전까지 점박이는 깨끗하게 몸을 씻고 침대 위에서 뒹굴었다.
“
마계의 거친 흙과는 다르게 폭신한 침대의 감촉에 점박이는 스르르 잠이 몰려
오기 시작했다. 이거 생각보다 기분이 좋다. 그렇게 막 잠들려던 차에 음식이 도
착했다.
46.
“
키르륵!”
레어 스테이크를 양손으로 들고 한입 베어 문 점박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
상에! 이건 무슨 고기지? 입에서 살살 녹는다. 점박이는 누가 뺏어 먹을세라 허
겁지겁 남은 스테이크를 해치웠다.
“그륵, 그릉.”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목에서 소리가 울렸다. 옆에 동그랗게 엎어진 하얀색도
퍼먹어 보았다. 고기에 비해선 못했지만, 이것도 상당히 맛있었다.
“그르륵.”
점박이는 작은 배가 빵빵해지도록 음식을 먹어 치웠다. 대략 5~6인분쯤 시킨
것 같은데 그 많은 것이 전부 점박이 배 속으로 들어갔다.
“그륵그륵.”
음식을 다 먹어 치운 점박이는 그대로 침대 위에 올라가 네다리를 쭉 펴고 누웠
다. 그러고는 소스가 묻은 앞발을 쭉쭉 빨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케로가 못마땅하게 바라봤으나, 딱히 손을 쓰지는 않았다. 현우가 가
만있었으니까.
“이거 이렇게 보니까 제법 귀여운데?”
현우는 빵빵해진 점박이의 배를 손가락으로 슬슬 문질렀다.
프휴.”
점박이는 짧은 앞발을 몇 번 파닥이더니 이내 잠들었다.
“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천국과도 같은 나날이 흐르고 점박이는 다시 토실하게
살이 오르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되기까지 하루에 먹어 치우는 양이 어마어마
했다. 몸이 작아져도 큰 상태에서 먹는 만큼 먹어 치우는 것 같았다. 만약 선우
가 돈이 많은 게 아니었으면, 어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오싹해졌다.
푹 쉬고 잘 먹은 점박이는 연구용 재료 채취에도 관대해졌다. 물론 살점을 과도
하게 떼 가려고 했을 때는 잠시 지랄발광하려고 하긴 했지만, 그건 현우가 말렸
다. 그래서 연구소도 더는 욕심부리지 못하고 적절한 재료만 가지고 돌아갔다.
그렇게 일이 마무리되니 이제 남은 건 레온과의 대화뿐이었다. 대화 장소는 호
텔 아래층의 프라이빗한 분위기의 카페였다. 창가 자리에 레온과 현우가 자리
잡고, 조금 떨어진 곳에 선우와 도진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이야기가 시작되
었다.
“카페가 이렇게 넓은데 손님이 없네요.”
“그야 진작에 대관해 두었으니까요. 케로와 점박이라고 했던가요? 둘이 머무르
면서 아래층은 만약을 위해 전부 비워 뒀습니다.”
현우는 손해 이야기는 더 하지 않기로 했다. 혹시나 물어내라고 하면 곤란했으
니까. 대신 화제를 바꿨다.
“그래서 알고 싶은 건 무엇인가요?”
“그 전에 차를 마셔 보십시오. 여기는 홍차를 무척 잘합니다. 티푸드도 제법 세
련됐지요.”
확실히 레온의 말대로 차도, 곁들여 나온 티푸드도 맛있었다. 그걸 즐기고 나자,
그제야 레온은 본론을 꺼냈다.
“점박이는 마계에서 온 몬스터인 거지요?”
“맞습니다.”
“그러면 마계와 지구가 연결되었단 소리군요.”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겠지요.”
레온은 차에는 손도 대지 않고 손가락으로 찻잔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더니
이어 물었다.
“혹시 마계에서 마족을 만나 보았습니까?”
“마족이요?”
“네, 마족. 요정은 몇 번이나 마족 이야기를 했지만, 저희는 직접적으로 만난 적
은 없습니다.”
그 부분에서 현우는 잠시 망설였다. 사실대로 말해야 할까, 아니면 숨겨야 할까.
일단 가디언 길드의 길드장인 레온은 대외적으로 지구를 지키기 위해 앞장서는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이번 일도 그가 해결해 주지 않을까? 그러자면
어느 정도의 정보공유는 필요할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망설임이 사라졌다.
“만난 적 있습니다.”
“어떻게 생긴 마족이었습니까?”
가장 먼저 떠오른 마족은 알베르크였다. 하지만 어쩐지 곧바로 그에 대해 말하
기는 꺼려졌다. 그래서 다음으로 생각해 낸 것이 서열 9위의 마족 티아매트였
다.
보라색의 긴 머리를 가졌던 여성형 마족. 그녀는 차례로 덤비다 현우에게 깨진
다른 마족들과는 좀 달랐다. 그저 차분하게 지켜보기만 할 뿐, 현우에게 직접적
으로 손을 쓰진 않았다. 간접적으로는 손을 많이 썼지만.
현우가 마계에서 부르던 독쟁이. 그게 바로 티아매트였다.
“독을 다루는 마족이었어요.”
처음 독에 대한 저항력이 없을 때 제법 많이 고생했다. 그러면서 도망은 어찌나
잘 다니는지, 한번은 아예 작정하고 잡으려고 쫓아다닌 적이 있었다. 그때 크게
활약한 이들이 바이크 1, 바이크 2, 바이크 3이었다.
“아름답게 생겼던가요?”
“마족은 대부분 그렇지 않던가요?”
“하긴 그렇죠.”
현우는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뺄 건 빼고 더할 건 더하면서 레온에게 정
보를 전달했다. 그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들었고, 간간이 고개를 끄덕
였다.
“감사합니다. 마계에 대해 좀 더 많은 걸 알고 싶었습니다.”
“앞으로의 위험에 대비해서요?”
“아무래도 그렇지요. 마계에서 저런 몬스터가 넘어왔다는 건, 다른 것도 넘어올
수 있다는 소리니까요. 요정은 마계의 생물은 절대로 지구로 올 수 없다고 했는
데, 어쩌면 그게 거짓이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거짓말. 현우는 마계에서 헤어진 요정을 떠올렸다. 자신은 절대 거짓말은 안 한
다고 큰소리치곤 했는데. 정말 그 모든 게 거짓말이었을까. 딱히 요정을 믿는 건
아니었지만, 조금 위화감이 들었다.
“그럼 오늘의 티타임은 여기까지 가지지요. 이후엔 한국으로 돌아가실 예정입
니까?”
“아마도요.”
“안타깝군요. 뉴욕에는 볼거리, 먹을거리가 많은데 호텔에만 있다가 가신다니.”
“지금 한창 복잡할 때인데, 그게 낫지요. 즐기는 건 다음에도 즐길 수 있잖아
요?”
“하긴 그렇습니다. 그럼 출발하는 날 알려 주십시오. 공항까지 모셔다 드리겠습
니다.”
레온은 끝까지 신사적이었다. 그랬는데도 대화의 일부분이 자꾸 마음에 걸렸
다. 그렇지만 레온은 신분이 확실한 사람이다.
‘말이 헛나왔겠지.’
현우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끝났습니까?”
레온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도진과 선우가 가까이 다가왔다.
“네, 끝났어요.”
그럼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거지?”
“물론이야.”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 그리고 다시 평소와 같이 게으른 생활을 이어나
가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현우는 기지개를 쭉 켰다.
“
레온은 점박이의 출신지를 대중에게 밝히지는 않았다. 미국에서도 세력이 제법
강한 길드의 길드장을 몇 모아 그 사실을 알렸을 뿐이다. 당장 시민들에게 알려
봤자 불안만 부추길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니 대중에게 번져 나간 것은 제
한된 정보 일부분뿐이었다.
[한국의 선현 길드 지선우의 형, 몬스터를 길들이다.]
이런 정보 말이다.
*
으아!”
레온은 돌아갈 때도 자신의 개인 비행기를 빌려 주었다. 덕분에 현우는 편하게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처음 만남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좋은
사람 같았다. 푹 자고 싱글벙글 웃으며 비행기에서 내리는데, 이상하게 공항 쪽
이 시끌벅적했다.
“무슨 일 있어?”
현우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자 선우가 잠자코 자신의 폰을 건네주었다. 거
기에는 화면 하나가 띄워져 있었다.
“
「지현우, 뉴욕에서 한국인의 기상을 보여 주다.」
내가 뉴욕에서 뭘 했는데? 현우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쭉쭉 내려 보았다. 그리고
점점 얼굴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내용인즉슨, 뉴욕으로 간 선현 길드의 형제가 도심을 어지럽히는 몬스터를 잡
고, 길들이기까지 했다는 것이었다.
“너무 과장이 심한데?”
실제로 점박이를 잡은 건 케로였고, 선우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현우의
옆을 지켰다. 현우도 딱히 한 게 없었고. 굳이 말하자면 호텔에서 밥 먹고 뒹굴
거린 게 다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내내 도진도 있었는데, 그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
“아니, 그보다 이게 어떻게 알려진 거야?”
“가디언 길드의 길드장이 풀었대.”
선우는 레온의 이름도 말하기 싫은 듯 그리 말하며 이를 으득 갈았다. 딱히 없는
사실을 푼 건 아니지만, 여러모로 곤란하다.
현우는 선우의 폰을 도로 건네주고 공항 쪽을 다시 바라보았다. 연예인이라도
맞이하는 듯 인파가 출렁이고 있었다.
“일단 공항 관계자가 나서서 뒷문으로 빠져나가기로 했어.”
그야 그렇겠지. 절대 정문으로는 못 빠져나간다.
“가자, 형.”
그러나 그들은 찰거머리 같은 기자들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 그들은 어느새 뒷
문까지 침투해서 공항 경비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고, 그 때문에 일어난 소
란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맙소사!’
질린 표정을 지은 현우를 도진에게 민 선우는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형, 먼저 돌아가.”
“선우야?”
“여긴 내가 막을게.”
“그럴 거면 같이!”
현우가 그렇게 말하며 앞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주변이 어둠으로 둘러싸였다.
그리고 다시 밝아졌을 때는 이미 공항 밖이었다.
“선우는요!”
“아마 괜찮을 겁니다.”
“하지만 사람이 저렇게 모였는데요?”
그 말에 도진이 작게 웃었다. 현우 앞에서는 한없이 약한 모습을 보이는 선우였
지만, 그가 없는 곳에서는 달랐다. 그러니 현우만 빼내면 뒤는 문제없었다.
“지선우도 S급 각성자입니다. 믿으십시오.”
“그렇긴 하지만.”
형제이기에 걱정이 된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봐요,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게? 선우는 당당하게 제 발로 걸어서 공항을 나오고 있었다. 그 뒤에는 따
라붙은 기자가 하나도 없었다.
“기다렸지, 형?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선우는 생긋 웃으면서 현우를 먼저 차에 태웠다. 그러고는 도진이 타기 전에 얼
른 문을 닫았다.
“따로 오실 수 있지요?”
그럴 수야 있다만, 참으로 얄미운 행태가 아닐 수 없었다. 형이 있을 때랑 없을
때랑 너무나도 다르다.
“가끔은 평소에도 형이 있을 때처럼 굴어 보는 게 어떻습니까?”
“싫습니다.”
단호히 말한 선우는 다시 문을 열어 자신도 올라탔다. 그리고 출발하는 차를 보
며 도진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47.
선현 길드 외부홍보지원과의 전화가 쉴새 없이 울렸다.
“선현 길드 외부홍부지원과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네, 네. 아직 정확히
밝혀진 부분이 없어 그에 대한 안내는 힘들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좀 더 명
확한 정보가 나온 뒤 다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내려놓자마자 곧바로 다음 벨이 울린다.
선현 길드 외부홍보지원과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방송 출연이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답해 드릴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따르릉. 따르릉. 여기저기서 미친 듯이 전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문의에 대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현 길드 길드장인 지선우의 형 일이 뉴스를 탄 후로 선
현 길드에는 무수히 많은 전화가 쏟아지고 있었다.
방송 출연 문의 전화, 광고 문의, 또 다른 길드의 요청 등등. 일반 전화는 따로
존재하는 콜센터로 가는데도 전화가 터져 나간다.
“으아아, 더는. 더는 무리예요! 이미 목이 쉬었어요!”
미친 듯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직원들은 우는 소리를 냈다.
“보너스가 지급된다니 조금만 더 버텨 봅시다.”
“보너스 받기 전에 죽겠어요!”
“제발, 제발!”
“이제 그만!”
부장은 어색한 표정으로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았다. 원래도 선현 길드는 대
한민국에서 제일가는 길드라 문의 전화가 많은 편이었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
었다. 덕분에 며칠째 칼퇴근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빨리 열풍이 가라앉기를 바
랐지만, 과연 그렇게 될 것인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
아 쉬고 싶은데.’
‘ ,
현우는 멍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앞에는 반질거리는 대머리를 가진 중
년이 하나, 부스스한 머리를 묶어 올린 여성이 하나 앉아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
다.
“안녕하세요!”
먼저 입을 연 이는 여성이었다.
“『오늘도 도전 중!』의 작가 이혜미입니다!”
“PD 박중수입니다. 저희 프로그램을 선택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딱히 선택하고 싶어서 한 건 아니었다. 선우도 엄청 말렸다.
“형이 그런 걸 왜 해!”
방송 출연 의견을 제시한 찬영은 잽싸게 고개를 숙였다. 선우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함이었다.
“맞습니다. 굳이 방송 출연을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차라리 저번처럼 대담을
한 번 가지고 언론에 손을 대 보죠.”
도진마저 현우를 뜯어말렸다.
“하지만 필요하다며.”
그 말에 선우의 날카로운 시선이 찬영에게 닿았다.
“하면 좋다는 거지, 필수는 아니야.”
선우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현우도 바보는 아니었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
아가는지는 알고 있었다. 국뽕에 젖은 언론사들은 그들을 찬양하고 있었지만,
모두 그런 건 아니었다. 불순한 의도를 품은 기사들이 가끔 불쑥불쑥 올라왔다.
「제대로 되지 않은 각성자가 몬스터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가. 오히려 몬스터
에게 휘둘리지는 않겠는가. 특별한 제재가 없는 지금, 몬스터들이 날뛰면 어마
어마한 피해가 날 것이다.」
그런 걸 봤는데 어떻게 가만있을 수 있겠는가. 아무리 쉬고 싶고, 게으르다고 해
도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바로 하나뿐인 동생. 선우를 위해서라면 현우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나도 종종 보던 방송인걸.”
『오늘도 도전 중!』. 매주 특이한 직업군의 사람이 나와 예능인 몇과 팀을 이
루어 게임을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보는 거랑 직접 나가는 건 다릅니다. 많이 힘들 겁니다.”
도진이 말했다.
“잘할 수 있어.”
“잘하느냐, 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선우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형, 나는 형이 원하지 않는 건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기 위해 쌓아 온 권력과 힘인데. 왜 전부 뜻대로 할 수는 없는 걸까. 이번 일
만 해도 배후가 있는 걸 아는데도 당장 꼬리를 잡아내지 못했다. 아니, 잡아내더
라도 전부 몰살시킬 수 없다. 현대 사회에서 살인은 죄니까.
답답한 상황에 절로 울화가 치솟았다. 선우는 자기 자신이 원망스러워졌다.
“팬이기도 하니까.”
물론 팬이라고 해도 찾아가서 같이 방송하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자고로 방
송은 누워서 볼 때 제맛이지. 현우는 선우와 도진의 말에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상황이 되었다.
작가는 현우의 오른편, 왼편 책상 위에 퍼져 누운 도마뱀과 작은 강아지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같은 공간, 카메라가 닿지 않는 사각에 S급 각성자 둘이 있
다는 걸 아는데도 조금은 겁난다.
“그럼 인터뷰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지현우 씨, 테이머셨나요?”
“네, 테이머입니다.”
사실은 아니다. 하지만 딱히 별다른 힘이 느껴지지도 않는 현우가, 특별한 계약
없이 몬스터를 다룰 수 있다고 하면 사람들이 불안해할 것이다. 그 점을 고려하
여 테이머라고 하기로 했다.
“그러셨군요. 어쩐지. 아무리 마계에 다녀왔다고 해도 몬스터를 다루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작가가 말을 이어 나갔다. 특별히 거슬리거나,
파고드는 질문은 없었다. 미리 전해 준 질문지에 적혀 있는 것이 다였다.
“몬스터는 완벽하게 다루시는 거죠?”
모든 인터뷰가 끝난 뒤, 피디가 재차 확인하듯이 물었다.
“물론입니다.”
현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작가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러면 한번 만져 봐도 되나요?”
“네. 지금은 제가 있으니 괜찮습니다.”
“그럼 어디 한번.”
당연히 케로를 향할 줄 알았던 손가락은 점박이를 향했다. 얌전히 엎어져 있던
점박이의 눈이 세모꼴이 되었으나, 손가락을 물지는 않았다. 옆에 무서운 사람
이 앉아 있었으니까.
“으으, 너무 매끈하고 귀여워요!”
“그런가요?”
“네! 제가 파충류를 좋아하는데 이렇게 귀여운 아이는 처음이에요. 정말 촬영
날이 기대되네요.”
작가가 친근감 있게 구니 피디도 긴장을 풀었는지, 분위기가 더 유해졌다. 그렇
게 또다시 방송 출연이 결정되었다.
*
와우, 와우. 이거 눈이 호강하는데?”
『오늘도 도전 중!』의 막내 여동생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는 지수가 눈을 반짝
이며 한쪽을 바라보았다. 그쪽에는 평균보다 장신인 남자 둘이 서 있었는데, 보
기만 해도 눈이 절로 떠지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
저쪽이 선현 길드 길드장이겠고.”
머리를 뒤로 넘기고 반듯하게 정장을 갖춰 입은 청년. 올해 21살이라는데 가진
분위기가 진중하여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저쪽은 누구지?”
그 말에 옆에 있던 같은 막내 개그맨 덕만이 대답했다.
“저쪽도 S급 각성자라는데?”
“S급 각성자?”
S급 각성자는 흔한 존재가 아니다. 각성자 강국 대한민국 내에서도 양손으로
다 꼽지 못할 정도로 적은 수만 있을 뿐이었다. 그런 사람이 둘이나 있다고? 가
슴이 절로 두근거렸다.
“야, 꿈 깨라. 저 사람들은 오늘 같이 촬영하지 않는 거 알잖아.”
“알지. 아는데, 그래도 신기하잖아!”
“그보다는 처음 오는 일반인과 몬스터가 제대로 촬영을 할 수 있을지나 걱정하
라고.”
“괜찮겠지. PD님과 작가님이 먼저 미팅도 했다고 했는걸.”
“그건 그렇지만, 괜찮을지 걱정된다.”
덕만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몬스터 때문에 그러는구나? 테이머랑도 같이 게임해 봤는데, 새삼?”
“
급이 틀리잖아. 급이!”
“괜찮을 거야.”
“넌 긍정적이라 좋겠다, 그래.”
“겁쟁이 같기는!”
지수는 덕만의 등을 팡팡 치며 웃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흘러, 어느새 촬
영 시간이 되었다. 지수와 덕만, 지홍과 맏언니인 이영, 지능캐 제연. 그리고 메
인 MC인 박수광. 6명이 모이자마자 오프닝이 시작되었다.
“오늘도!”
“도전 중!”
이어 다들 박수를 치며 웃었다. 짧은 대화가 지나가고, 이윽고 오늘의 게스트 소
개 시간이 다가왔다.
“오늘은 특별한 손님이 이곳을 찾았는데요?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분이
십니다!”
“나 알아요, 알아!”
지수가 손을 들고는 펄쩍펄쩍 뛰었다.
“자, 그럼 누군지 불러 볼까요?”
“지현우 씨~!”
그 말과 동시에 하늘에서 거대한 몬스터가 등장했다. 까만색 몸체를 지닌 몬스
터는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힐 만큼의 위압감을 지니고 있었다. 몬스터는 자신
“
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을 보며 오만하게 웃었다.
당장이라도 비명이 터져 나오기 직전, 몬스터는 그대로 허공에서 회전을 하더
니 작은 날개 달린 도마뱀의 모습이 되었다.
“크르륵?”
그러고는 짧은 앞발을 양 뺨에 대고 고개를 살짝 기울여 보였다. 순식간에 사라
진 위압감 대신 귀여움이 그 자리를 가득 채웠다.
“너무 귀엽다아!”
맏언니인 이영이 제일 먼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나타
난 까만색 포메라니안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한복판에 드러누웠다.
그제야 다른 사람들도 같이 웃음을 지었다.
“소개합니다! 오늘의 게스트! 점박이와 케로입니다!”
“뭐야, 하나는 점박이인데 하나는 왜 케로야? 너무 분위기가 다르잖아!”
제연이 치고 들어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게요? 그럼 왜 그런지 한번 주인에게 물어볼까요?”
“왕왕!”
“끼르륵!”
“두 몬스터의 주인, 지현우 씨를 소개합니다!”
지현우는 카메라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천천히 안쪽으로 걸어 들어왔다. 다
큐멘터리를 이미 찍어 봐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긴장된다.
48.
5 50 .
시 분 아윤은 시계를 확인하고는 잘 튀겨 낸 팝콘과 감자튀김, 콜라를 테이
블 위에 늘어놓았다.
“오빠! 조금 있으면 시작해.”
이어 안쪽을 향해 소리치자, 자윤이 걸어와 옆의 소파에 앉았다.
“아직 시작까지는 10분이나 남았잖아.”
“10분밖에야. 기대된다.”
오늘도 도전 중! 평소에도 가끔 보던 프로그램에 오늘은 특별 게스트가 나온다.
그리고 그 특별 게스트는 아윤과 자윤도 아는 사람이었다. 바로 지현우!
“점박이란 몬스터도 같이 나오겠지?”
“아마도?”
“흥미롭네.”
그렇게 말한 아윤은 소리 내어 웃었다.
“진짜 흥미로워! 어지간한 각성자들이 전부 이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 TV 앞에
앉아 있을 거 아냐.”
수많은 길드에서 현우가 길들인 몬스터에 관심을 보였으나, 선현 길드는 따로
공개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전전긍긍하던 차에 방송에 몬스터 둘을 데
리고 나온단다. 아마 방송 원본을 구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우린 이미 방송 원본을 구했지만!”
“그럼 그걸 보면 되는 거 아냐? 게다가 우리는 만나기로 한 횟수가 아직 3회 남
아 있잖아.”
저번의 만남은 포털 때문에 엉망이 되었으니까. 횟수는 차감하지 않기로 했다.
“아니지. 편집본을 실시간으로 달리는 재미도 있는 거라고. 오빤 그걸 왜 몰
라?”
아윤은 갓 튀긴 감자튀김을 집어 먹으며 자윤을 타박했다.
“뭐, 네가 재밌다면 됐다.”
그사이 광고가 끝나고 본격적인 방송이 시작되었다.
“
『오늘도 도전 중!』
가장 먼저 이야기의 서문을 연 이는 메인 MC 박수광이었다. 여느 때와 같은 그
의 멘트와 다른 사람의 동조가 끝난 뒤,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몬스터였다.
“와, 저게 블랙 드래곤.”
덩치가 대단하다. 듣기로는 뉴욕에서 전투기를 여러 대 격추하고, 가디언 길드
의 3팀과 대등하게 맞섰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알려진 것일 뿐,
무슨 능력을 더 가지고 있을지는 몰랐다.
그런 몬스터를 마음대로 다룬다고? 등줄기로 오싹 소름이 돋았다.
“직접 보고 싶어.”
요청해 보지.”
“응.”
먹던 감자튀김도 내려놓은 아윤은 화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오늘 게임은 숨은 보물찾기! 지금 이 부지에는 힌트가 담긴 작은 공이 여러 군
데 숨겨져 있습니다. 그걸 찾아서 힌트를 조합해 보물이 있는 곳을 알아내어 여
기로 가져오시면 승리!”
박수광의 말에 제연이 물었다.
“그거야 평소 자주 하던 게임 방식이고, 중요한 건 어떻게 팀을 나누는가죠!”
“그러게요? 사람이 일곱인데 어떻게 나눠요?”
이어 지수가 손을 번쩍 들며 그 말을 받았다.
“전 지현우 씨와 팀 하고 싶은데요!”
“저도!”
“저도요!”
“아니, 이러면 팀을 어떻게 정합니까?”
“잘?”
“아하하하!”
지홍이 소리 내어 웃었다.
“
지현우 씨, 인기가 많네요. 하지만 오늘 팀은 그렇게 나누지 않습니다!”
“그러면요?”
“팀은 말입니다. 이렇게 나눕니다! 몬스터팀 대 사람팀!”
“네?”
이영이 그 말을 듣고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냥 보여 주기식인 줄 알았
던 몬스터가 게임에 참가한다니 놀란 것이다.
“지현우 씨와 점박이, 케로가 한 팀입니다!”
“어? 어?”
이거 불리하다고 해야 하나, 유리하다고 해야 하나? 다들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
었다. 상대는 고위 몬스터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이다. 그 힘을 발휘하면
이기기는 쉽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게임, 그 힘을 잘못 발휘했다가는 청소
년 관람불가 방송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힘을 발휘하지 않는 깜찍한 상태에서 싸우게 되면? 아무래도 사람이
여섯인 쪽이 유리하지 않을까? 지현우는 따로 신체 능력이 뛰어난 것 같지는 않
았으니까.
“그래도 되나?”
지수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됩니다! 지현우 씨도 동의했습니다!”
“왕왕!”
“
이런, 케로도 동의한 모양입니다.”
“키르륵.”
케로가 울자 점박이도 지기 싫다는 듯이 같이 울었다.
“오, 전의가 대단합니다!”
그렇게 어느 쪽이 유리한지 모를 게임이 시작되었다.
“
슬슬 어두워지는 사무실 안, 가준은 담배를 물며 픽 웃었다.
“웃기고 있네.”
힘을 숨기고서 저런 광대 노릇을 하는 게 웃기지도 않았다.
“그나저나 몬스터라.”
처음에는 케로 하나였던 것이 또 늘어났다. 점박이라는 이름은 촌스러웠지만,
가진 힘은 무시할 수 없다.
“지선우가 운이 좋은 건가.”
아니면 자신이 운이 나쁜 건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깨갱거리며 몸을 숙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 게임 시작합니다!”
짧고 강한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사람들은 몸을 긴장시키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
찾아, 빨리 찾아!”
“그래도 3 대 6이니까 유리한 거 아닌가?”
덕만이 그렇게 말하며 광장에 설치된 판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회수한 구슬의
수가 기록될 예정이었다.
“그건 모르지. 그러니 일단 빨리 찾자!”
그와 동시에 카메라가 다른 곳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쏜살같이 날아간
점박이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 키
보다 살짝 높은 곳에 숨겨져 있던 금색 구슬 하나를 찾아냈다.
그걸 요령 있게 문 점박이는 꼬리를 살랑이며 현우에게로 돌아갔다.
<1개>
기록판에 숫자가 기록되었다. 초반에는 다들 구슬 찾기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이 게임의 별미는 구슬을 어느 정도 모은 중반부터 시작된다.
“참가자 여러분, 이제부터는 구슬 강탈이 가능합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영과 팀을 이뤄 움직이던 지홍이 기민하게 눈을 번
뜩였다.
“뺏으러 가자.”
“현우 씨한테? 하지만 혼자인데 너무한 거 아냐?”
“어우, 말은 그러면서 입이 웃고 있지?”
“흐흐흐.”
“
이영과 지홍은 곧바로 현우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그들이 가장 먼저 마주친 이
는 현우가 아니었다.
“와앙?”
케로였다. 본래 모습을 보여 줬던 점박이와 다르게 케로는 내내 이 모습이었기
에 상대적으로 두려움이 덜했다. 게다가 겉모습이 포메라니안과 똑같아서야.
위기감을 가지라는 게 더 힘들지도 모르겠다.
“케로다, 케로!”
“왕왕!”
이름을 부르자 다른 쪽으로 가던 케로가 이쪽으로 방향을 틀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아아, 너무 귀여워!”
“정신 차려! 케로도 우리의 적이야!”
“적, 그래, 적이지! 케로를 인질로 삼을까? 그래서 구슬과 교환하는 거지!”
“멋진 방법이군.”
둘은 음흉하게 웃으며 케로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얼마 뒤, 상황은 생각과는 다
르게 돌아갔다.
“손!”
“왕!”
“세상에. 손 주는 거 봤어? 진짜 똑똑하다!”
내가 보기엔 손을 준 건 케로가 아니라 너 같은데.”
앞발을 들어 올린 케로가 가만히 바라보자 이영이 알아서 손을 움직여 대 주었
다. 그러나 이미 케로에게 홀짝 넘어간 이영에게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
이었다.
‘귀여운 나를 봐라!’
케로는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온몸에서 귀여움을 뽐내며 당당하게 가
슴을 펴는 모습에 반할 것만 같았다. 결국 버티던 지홍도 거기에 넘어가 헤실거
리며 케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때, 그들의 뒤쪽에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
다.
점박이였다.
점박이는 소리 없이 바닥을 기어 이영이 허리에 찬 가방에 접근했다. 이어 이빨
과 앞발을 이용해 교묘하게 가방을 풀어내고는 그걸 입에 물고 날아올랐다! 이
영이 텅 빈 허리를 눈치챈 건 그쯤이었다.
“악! 내 가방!”
뒤늦게 손을 휘적여 보았지만, 점박이는 이미 높이 날아오른 뒤였다.
“내려와, 내려오라고!”
한참을 허우적거리다가 뒤늦게 돌아보니 케로도 어느새 사라진 상태였다.
“이, 이런 사기꾼들!”
이영이 주먹을 휘두르며 분노했다. 진짜 어처구니없게 구슬을 전부 빼앗겼다.
“
댓글
- 점박이 너무 귀엽지 않아?
- 케로도 너무 귀여워!
- 2인조 사기꾼들! 진짜 죽이 딱딱 맞는다.
방송 게시판에 글이 주르륵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건 다른 커뮤니티도 마찬가
지였다.
댓글
- 무서운 몬스터라며~! 하나도 무섭지 않잖아!
- 어쩜 저렇게 사람 말을 잘 알아듣지? 신기하다.
- 그러게. 방금 봤어? 훔쳐온 가방 지현우에게 건네는 거?
- 악, 방금 점박이 가방 멨다. 제작진이 특수 제작했나 봐!
- 이번에는 케로가 사람을 삥 뜯고 있어. 초롱초롱한 눈으로 귀엽게 쳐다보니까
지수가 슬쩍 구슬 하나 줌. 근데 나라도 줄 듯.
- 흑흑, 방송 끝나도 케로랑 점박이를 계속 보고 싶어! 짹짹이나 별스타 해주세
요! 더 많은 사진, 더 많은 영상이 보고 싶다!
좋군, 좋아.”
“
피디는 눈을 반짝이며 손을 비볐다.
“시청률이 오른다!”
“오른다!”
옆에 있던 작가도 신난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외국에는 방송이 서비스되는 곳이 적다 보니, 이걸 보기 위해 사이트에 가입한
사람도 많더라고요. 세상에, 이번 방송은 박 터졌어요!”
그 때문에 다들 축배를 드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진짜 귀엽긴 하네요.”
“몬스터들이?”
“네, 말도 잘 따르고, 생긴 것도 귀엽고. 트렌드가 되겠는걸요?”
“확실히.”
이제 몬스터들이 사람들에게 달리 인식되기 시작할 것 같았다.
‘애초에 그걸 노린 거기도 하겠지만.’
보통은 테이밍된 몬스터도 꺼려 하는 분위기였지만, 이런 방송이 나왔으니 이
제는 달라질 터였다.
“무섭다, 무서워.”
“뭐가요?”
그런 게 있어.”
피디는 손을 휘저으며 계속 올라가는 시청률을 바라보았다.
“
49.
지수와 덕만은 케로를 쫓아 뛰어다니다가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헉헉, 안 돼. 이렇게 해서는 끝도 없어!”
애초에 인간은 달리기로는 강아지도 못 이긴다. 그런데 상대는 심지어 몬스터!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면 어쩌게? 다른 방법이라도 있어?”
그러자 지수가 음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인질을 잡자! 그리고 함정을 파는 거지.”
몬스터는 못 이겨도 같은 인간인 현우는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지수의 의견에
덕만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지현우 씨 말이지?”
“그래! 덕만이 너도 운동 제법 했잖아. 반면 현우 씨는 호리호리해 보이고! 잡아
서 몬스터들에게 구슬을 가져오게 하는 거야.”
자신이 가진 능력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각성자들은 몸이 좋다. 그
런데 현우는 호리호리한 편이니 좀 더 만만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좋아, 해 보자!”
둘은 팔을 내밀어 걸고 날카로운 시선을 교환했다. 결정한 이상 사람을 더 끌어
모을 필요가 있었다.
“어, 그건 좀 비열한 방법 아닐까?”
“언니도. 새삼 비열 따져요?”
저번 게임 때 혼자 이겨 먹겠다고 같은 팀을 밑으로 떠민 이영답지 않은 발언이
었다.
“그렇지? 나도 그냥 해 본 소리였어.”
이영이 비열하게 웃으며 두 손을 비볐다.
“좋아, 그럼 이영 언니와 지홍 오빠도 같이하는 거다?”
“다른 두 사람은?”
“두 사람은 잘 뛰니까 냅 둬. 몬스터 주의 끌 사람도 필요하잖아.”
“그도 그렇지.”
넷은 그렇게 작당 모의를 한 채 움직였다. 나눠 가진 무전기가 있으니 먼저 현우
를 발견한 쪽이 알려 주면 모이기로 하였다.
“출발!”
넷은 의욕적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홍이 언덕에서 현우를
발견했다.
“와, 여유롭네. 앉아서 햇볕 쬐고 있는걸.”
큭 저 여유 보소.”
“그런데 너무 트인 장소인데. 잡을 수 있을까?”
“네 방향에서 다가가서 몰이하면 괜찮지 않을까?”
“좋아, 오케이.”
넷은 모이자마자 언덕을 둘러싸고 천천히 포위망을 좁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가까워질 무렵, 현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이동한다. 달려!”
“와아아아아아!”
소리 지르면서 넷이 현우에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뒤늦게야 눈치챈 듯 현우가
표정을 굳혔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는 곧 사로잡힐 것이고, 몬스터들은 그들
에게 구슬을 상납하게 될 것이다. 넷은 그렇게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
는 것이 있었으니, 현우는 이미 그들이 접근하는 줄 알고 있었다.
“키르륵!”
열심히 달려가는 지수의 머리 위로 묵직한 것이 내려앉았다.
“꺅!”
당황하여 그 자리에서 멈춰 서서 머리를 털었으나 꼭 매달려 떨어지질 않았다.
“뭐야, 이거 뭐야!”
이어 다른 방향에서 달려오던 덕만의 궁둥이를 무언가가 들이박았다.
“ ,
으억!”
넘어지지는 않았으나, 균형을 잡기 위해 허우적거려야 했고 그로 인해 틈이 생
겼다. 그리고 현우에게는 그 정도 틈이면 도망치기에 충분했다. 물 흐르듯 지수
와 덕만 사이로 빠져나간 현우가 멀리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와 동시에 지수
의 머리 위에 붙어 있던 점박이와 궁둥이 어택을 날린 케로가 잽싸게 튀었다.
“아, 아앗!”
뒤늦게 그 사실을 눈치챈 이영이 손가락질을 했지만, 이미 셋은 저 멀리 뛰어가
고 있었다.
“놓쳤어!”
“으윽. 괘, 괜찮아요. 기회는 더 있을 거예요.”
지수가 엉망이 된 머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그러나 현우는 신출귀몰했다. 어쩌
다 발견해도 점박이와 케로의 방해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몬스터는 차곡차곡 구슬을 쌓아 갔고, 마침내 힌트를 알아냈다!
두구두구두구!
경쾌한 북소리가 울려 퍼지고, MC 수광이 외쳤다.
“축하합니다! 오늘의 승리자는 몬스터팀!”
“키르륵!”
“왕왕! 왕왕!”
점박이가 사람팀 팀원들의 머리 위를 돌면서 세리머니를 펼쳤다. 케로도 신나
게 짖으며 가슴을 부풀렸다.
“
졌네요, 졌어.”
제연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니, 우리 쪽이 많아서 이길 줄 알았는데!”
지홍이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몬스터들이 이렇게 똑똑해요? 몬스터는 다 이래요?”
“아닙니다. 점박이랑 케로가 유독 똑똑한 편입니다.”
그 말에 점박이랑 케로는 더욱더 가슴을 내밀었다.
“와, 진짜!”
“그럼 이대로 끝이에요? 진짜 끝?”
“너무 억울해요오! 설욕전, 설욕전 하죠!”
“좋습니다. 원래라면 그냥 끝내겠지만, 이런 기회가 어디 흔하겠습니까? 설욕
전을 하지요.”
수광은 그렇게 말하며 상자 하나를 꺼내 보였다.
“이건 뭔가요?”
“이 상자 안에는 게임이 적힌 쪽지가 여럿 들어 있습니다! 이 중 하나를 뽑아서
그걸로 설욕전을 하겠습니다. 뽑기는 진 쪽에서 뽑도록 하죠.”
“저요, 제가 뽑을게요!”
“
지수가 손을 번쩍 들었다.
“좋아, 우리 막내가 뽑아 보자. 지수가 운이 좀 좋지.”
“맞아요, 맞아!”
“그럼~.”
지수는 상자에 손을 넣고 휘적휘적 저었다. 그리고는 쪽지 하나를 꺼내 펼쳤다.
“어디 보자. 많이 먹기 대회?”
“엑? 이게 뭐예요?”
“말 그대로입니다! 많이 먹기 대회입니다! 각 팀에서 1인씩 나서서 먹으며, 힘들
면 교체 가능합니다. 그리고 가장 많이 먹은 팀이 이기는 겁니다.”
“어어.”
잠시 사람들의 시선이 점박이와 케로에게로 향했다.
“커져서 먹는 건 아니죠?”
“아닙니다!”
“그럼 해 볼 만하지 않아?”
저 작은 배에 들어가 봤자 얼마나 들어가겠는가. 사람팀 팀원들은 새로이 각오
를 다졌다.
“내가 말야, 많이 먹기 대회 3등 한 적도 있다고!”
지홍이 웃으며 첫 번째로 나섰다. 제공되는 음식은 미니 햄버거. 정해진 시간은
10분! 현우 쪽은 케로가 첫 번째로 나섰다.
“그런데 개가 햄버거 먹어도 돼요?”
“일반적인 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사람 음식을 개가 먹지 않도록 주의해 주세
요. 케로는 어디까지나 몬스터이기에 허용됩니다.”
“아하, 그렇군요.”
“그럼 많이 먹기 대회, 시작합니다!”
땡! 종소리와 함께 지홍은 빠른 속도로 미니 햄버거를 흡입하기 시작했다.
“속도는 비등비등합니다!”
케로는 입을 한 번 벌릴 때마다 햄버거 하나씩을 덥석덥석 삼켰다.
“너무 잘 먹는데? 이미 배 터졌을 양 아냐?”
“그러게. 뭔가 생각과는 다르게 돌아가는데?”
팀원들이 수군거리는 사이, 지홍이 먹은 햄버거 수가 20개를 넘겼다.
“아직, 나는 아직 할 수 있다!”
30개. 그쯤에서 지홍이 먹는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그러나 케로는 마치 티벳여
우가 생각나는 표정으로 여전히 햄버거를 꿀꺽꿀꺽 삼키고 있었다.
“나, 난 이제 더 못해.”
결국 지홍이 물러서고, 다음으로 제연이 나섰다. 그도 열심히 분발했지만, 케로
를 이기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쯤에서 케로는 점박이와 자리를 바꾸었다.
“와웅.”
딱히 배가 불러서라기보단, 질려서 양보한 것이었다. 자리를 바꾼 점박이는 앞
발을 슬슬 비비며 기대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최근 사람이 먹는 음식에 푹 빠져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점박이는 한 번에 하나를 삼키지도 않았다. 긴 주둥이를 이용해서 세 개를 문 다
음에 한 번에 씹어 삼켰다. 그런데 그 속도가 무척 빠르다.
“어쩐지 속은 기분인걸.”
다시 교체한 이영이 우는 소리를 내며 햄버거를 먹었다. 그러나 점박이는 아랑
곳하지 않은 채 자신의 접시를 다 비우고, 이영이 앞의 접시를 호시탐탐 노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햄버거가 나오는 그 짧은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슬그머니
이영이 앞의 햄버거를 먹어 버렸다.
“아앗!”
뒤에서 보고 있던 지수가 소리를 내자, 점박이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접시로 얼
굴을 돌리고는 태연한 척했다. 카메라가 없었다면 그냥 햄버거가 사라진 줄 알
았을 것이다.
“이거 반칙! 반칙!”
이영이 햄버거를 문 채 말했지만, 수광이 고개를 내저었다.
“일종의 자살골이지요. 대회는 계속 진행합니다.”
“아니, 그러는 게 어딨어요!”
여기 있습니다. 대신 덜 먹어도 되지 않습니까?”
그것도 일리는 있어 이영은 다시 입을 다물고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열심히 분
발했지만, 두 번째 설욕전도 몬스터팀의 승리로 돌아갔다. 현우는 나오지도 않
은 채 말이다.
“으아, 그래도 재밌었습니다!”
호탕한 지홍이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자, 현우도 손을 내밀며 웃었다.
“저도요.”
“다음에 또 나오실 거죠? 점박이랑 한번 놀아 보고 싶어요!”
지수도 신나서 말을 걸어 왔다.
“저는 케로요.”
거기에 이영이도 끼어들고, 망설이던 덕만이도 악수를 하였다.
“오늘 정말 즐거웠습니다. 간만에 이렇게 신나게 뛰어본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남은 팀원도 전부 인사를 마치자 MC 수광이 마무리를 지으며 오늘도 도전 중
촬영이 끝났다.
“
*
촬영에 다녀온 뒤로 현우는 축 늘어져 뒹굴고 있었다. 곁에 있는 이는 도진과 선
우, 그리고 점박이와 케로뿐. 평화로운 매일이 이어졌다.
“흐음.”
오늘도 늦잠을 잔 현우는 휘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앉았다. 선우는
형이 규칙적인 생활을 하길 바랐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선우가 있는 동안은 간신히 버텼지만, 일하러 가자마자 다시 드러누웠다. 그리
고 그런 현우를 도진은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다.
“아침은 먹고 자요.”
축 늘어진 현우를 앉히며 앞에 식사용 트레이를 놓아 주었다. 따끈따끈한 수프
에 계란, 베이컨. 한식을 좋아하긴 하지만, 가끔 먹는 서양식 식단도 나쁘진 않
았다. 반쯤 졸면서 식사를 마치자 도진이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 주었다.
처음에는 이런 행동이 많이 어색했는데, 누가 그랬던가.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
라고. 현우는 도진의 행동에 서서히 적응해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도
진의 팔에 안겨 꾸벅거리다가 소화가 될 무렵, 다시 드러누워 일어난 것이 이 시
간. 12시였다.
“점심은 1시쯤에 준비하겠습니다.”
“네.”
절로 말꼬리가 길어진다.
50.
재차 하품을 하고 멍하니 TV를 켜자 곧바로 점박이의 모습이 비친다.
‘저놈의 재방송은 대체 몇 번을 하는 거야?’
원래 재방송이란 걸 이렇게 자주 하든가? 모르겠다. 머리를 긁적이며 채널을 돌
려 아는 몬스터와 사람이 나오지 않는 걸 찾았다. 그리고 잠도 깰 겸 방송을 보
고 있는데,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가끔 반겨 주는 형이 보고 싶다면서, 선우가 벨을 누르기도 하였기에 현우는 무
거운 몸을 일으켰다. 화면을 보니 밖에서 기다리는 이는 선우가 맞았다.
반갑게 문을 열어 주자 선우가 웃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형.”
“어서 와.”
선우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고 나서야, 그 뒤에 다른 사람이 있는 걸 깨달았다.
부길드장 찬영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찬영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 말씀드릴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아직 설명도 듣지 않았는데, 선우가 선수 치듯 말했다. 찬영이 할 이야기가 못마
땅한지 벌써부터 미간을 구기고 있다. 그런 선우 탓에 찬영은 다소 주눅이 든 모
양새였다.
“뭔데요?”
현우의 물음에 찬영이 들고 있던 태블릿을 켜서 건넸다. 거기에는 별스타 화면
이 떠 있었다.
별스타?”
“이번에 점박이와 케로의 인기가 너무 좋아서요. 따로 별스타를 운영하는 게 좋
지 않나, 의견이 나왔습니다. 물론 귀찮으시다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찬영은 그렇게 말하면서 힐끔 선우의 눈치를 봤다. 사실은 현우가 별스타를 해
줬으면 좋겠다. 점박이와 케로가 방송을 탄 이후로 엄청난 전화가 들어오는 한
편, 팬레터, 선물도 쏟아지고 있었다. 이때 시류만 잘 탄다면 선현 길드의 이미
지를 끌어올리는 데 크게 한몫을 할 것 같았다.
“안 해도 된대.”
그 말을 받은 선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가끔 보기나 했지 해 본 적은 없는데.’
그래도 찬영이 저렇게 말한다면 하는 쪽이 좋다는 거겠지. 선우에게 약한 것 빼
고 찬영은 제법 유능한 인재였다.
“그냥 가끔 사진만 올려 주시면 됩니다. 힘드시다면 댓글이나 다른 관리는 저희
쪽에서 하겠습니다!”
찬영은 열심히 별스타의 좋은 점을 어필했다. 기업 이미지가 좋아지고, 시민에
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다.
“만약에 점박이나 케로가 통제되지 않았다면 추천해 드리지 않았을 겁니다. 하
지만 놀라울 만큼 잘 통제되고 있으니까요. 마스코트 느낌으로 올리는 게 어떨
까,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따로 전투에 나서는 일은 드물 테니까요.”
아예 안 싸울 수도 없으니 가끔 선우를 따라 던전형 포털에 들어가겠지만, 그게
다일 것이다. 놀려 두느니 다른 역할이라도 하게 하자, 이런 취지인 듯했다.
“
안 해도 돼.”
선우가 재차 말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도진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
고 있긴 하지만, 의견을 덧붙이진 않았다.
“할게요.”
고작해야 사진 몇 장 찍어서 올리는데 힘들까. 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이십니까?”
찬영의 표정이 활짝 피었다.
“네.”
“안 해도 된다니까.”
“괜찮아. 뭐가 어려운 일이라고.”
현우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럼 저희 쪽에서 계정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계정은 저도 만들 줄 아는데요.”
“물론 직접 하셔도 됩니다.”
찬영은 마음이 편해졌는지 한결 나아진 목소리로 답했다.
“올리기 전에 내용만 저희 쪽에 한 번씩 보여 주십시오. 혹시 모르니까요.”
“네, 그럴게요.”
“
그렇게 현우는 별스타까지 하게 되었다.
“어디 보자.”
현우는 소파에 몸을 기대고 태블릿을 조작했다. 가입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지현우
(까만색 덩어리가 흐릿하게 찍힌 사진).jpg
(흐릿하지만 털뭉치가 개인걸 알아볼 수는 있는 사진).jpg
잘 부탁드립니다
#몬스터 #점박이 #케로
간략한 소개글을 적은 다음에 점박이와 케로의 사진을 찍었다. 딱히 꾸밀 생각
도 없이 러그 위에서 뒹구는 그대로 찍어서 첫 번째 사진을 올렸다. 이건 딱히
뭔가 허락받을 만한 것도 없었기에 그냥 업로드했다.
“좀 더 소품을 쓸 걸 그랬나?”
올린 사진이 너무 단순한 것 같다. 잠시 고민하던 현우는 작은 인형을 들고 와
케로의 옆에 놓았다.
“왕?”
아무것도 없을 때보단 한결 나은 것 같았다. 점박이의 곁에도 쿠션 하나를 놓아
보았다. 어색하다. 이번에는 점박이를 들어서 쿠션 위에 놓아 보았다. 이제는 제
법 그럴싸해 보인다.
“좋아, 업로드.”
현우는 히죽 웃으며 사진을 올렸다.
직장인 A씨는 퇴근하며 인터넷 뉴스를 훑어보고 있었다. 뭔가 새로운 것이 없
을까 싶어서 보고 있는데, 갑자기 친구에게서 톡이 왔다.
야야, 너 그거 봤어?
뭐?
점박이랑 케로 별스타 생겼다!
정말?
화들짝 놀라 별스타를 열어 들어가 보니 밋밋하게 꾸며진 계정이 하나 보였다.
계정주의 사진도 없고 이름과 ‘지현우와 몬스터들’이란 짧은 소개만 달랑 적힌
계정.
거기에는 사진이 몇 개 올라와 있었는데, A씨는 그걸 보자마자 곧바로 웃음을
터트렸다.
“푸핫!”
주변에서 쳐다보는 걸 느끼고 잽싸게 입을 막았지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웃
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가장 첫 사진에는 점박이가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봐야 알아볼 수 있지 조금만
떨어져서 보면 그냥 러그 위에 있는 까만 돌처럼 보였다. 러그 위에서 뒹구는 귀
여운 모습을 찍고자 했던 것 같은데, 결과는 엉망진창이었다.
혹시나 싶어 다음 사진을 보았는데 수준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휴대폰의 기능
이 발전한 시대, 굳이 사진기를 들지 않아도 훌륭한 사진을 찍어 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발사진이라니!
안타까우면서도 너무 웃겼다. 특히 나름 노력은 한 것 같단 점에서 더욱 그러했
다. 처음에는 러그 위에서만 찍다가 그다음엔 쿠션이 생겼고, 이어 작은 인형도
추가되었다.
‘내가 사진 찍어 주고 싶네.’
A씨는 연신 키득거리며 사진을 바라보다 친구에게 톡을 보냈다.
지현우, 사진 실력 실화냐?
실화인 듯ㅠㅠ
내가 사진 찍어주고 싶다.
으앙. 내 점박이, 내 케로! 사진 보여줘어어어!
얘들은 이렇게 못나지 않았다고! 훨씬 더 귀여
운데!
다른 사람이 옆에서 사진 찍어주지 않으려나?
그러게. 댓글 달아봐야겠다.
친구는 울먹이며 톡을 이어나갔다.
이거 좀 이상한데. 고작 사진 몇 장 올렸을 뿐인데 팔로워 올라가는 수가 심상치
않다. 미친 듯이 띠링거리는 폰을 지켜보던 현우는 도진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알람을 껐다. 그리고 댓글을 읽어 보다가 크나큰 문제를 깨달았다.
‘내가 그렇게 사진을 못 찍었다고?’
옆에서 같이 댓글을 보던 도진의 어깨가 가늘게 떨려 왔다. 아무래도 웃는 것 같
았다.
“사진을 대체 어떻게 찍은 겁니까?”
“그래도 나름 잘 찍은 걸로 올린 건데.”
현우는 투덜거리며 도진에게 사진첩을 보여 주었다. 그를 본 도진은 잠시 할 말
을 잃었다. 현우가 게임기를 제외한 기계와는 그다지 친한 편이 아닌 걸 알고 있
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사진첩에는 돌멩이같이 보이는 점박이, 투턱으로 잡힌 케로, 심령사진처럼 흐
릿해 보이는 무언가가 찍힌 게 있었다.
“아무래도 연습이 좀 필요하겠군요.”
“그 정도예요?”
“일단 절 찍어 보시겠습니까?”
“좋아요!”
이번에는 잘 찍어야지. 현우는 카메라를 열고 렌즈를 도진에게로 향했다. 렌즈
를 통해 화면에 비친 도진은 참으로 잘난 남자였다. 시원시원한 눈매에 오뚝 선
코, 매력적인 입매. 원본이 이렇게 좋은데 망치기야 하랴. 현우는 곧바로 사진을
찍었다.
찰칵.
짧은 소리가 울려 퍼지고, 도진이 다시 곁에 붙어 앉았다. 그리고 사진첩을 열어
본 현우는 아연한 표정으로 사진과 도진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사진으로
도 잘생기긴 했으나, 실물에 비하면 확실히 모자라다.
“이상하다, 왜 이러지. 한 번만 더 찍어 볼게요!”
현우는 다시 도진을 향해 폰을 들이댔다.
“네.”
도진은 여유롭게 포즈를 취해 주었다. 그러나 사진이 잘 나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왜, 왜죠!”
다른 별스타의 사진들은 하나같이 예뻤는데. 왜 자신의 자신은 이렇단 말인가.
이럴 리 없었다. 현우는 입술을 앙다물고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폰을 바꿔야겠어요.”
“최신 폰 아닙니까?”
“최신 폰인가요?”
그냥 동생이 사다 줘서 몰랐다.
“차라리 카메라를 사 보는 건 어떨까요?”
“맞아요. 그 방법이 있었죠!”
현우는 카메라를 새로 사기로 했다. 선우가 준 용돈은 충분했으니까, 허락을 받
고 도진과 같이 외출 준비를 했다. 그냥 선우에게 부탁해서 사도 되겠지만, 이왕
이면 사는 김에 전문가에게 요령을 조금 배워 볼 생각이었다.
“잠시만요.”
가볍게 옷을 입고 나온 현우를 보던 도진이 미리 준비한 듯한 모자와 선글라스
를 건넸다.
“이건 뭔가요?”
“지현우 씨는 인기가 많으니까요. 좀 더 가리는 쪽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인기 있는 쪽은 몬스터들이겠지. 평범한 사람인 자신에게 그렇게까지 관심을
보일까? 연예인도 아니고 말이다. 그래도 도진이 준비한 성의가 있으니 모자와
선글라스는 사용하기로 했다. 그렇게 준비하고 입구로 나오니 찬영이 몇몇 사
람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은 둘만 나가시기엔 위험하니까요. 보이지 않게 따라다닐 테니 그 부분은
안심하십시오.”
너무 대놓고 따라다녀도 시선을 끌 테니까. 이 정도는 충분히 납득 가능한 수준
이었다. 그렇게 이번에야말로 밖으로 나서려는 순간, 이번에는 선우가 나타났
다.
51.
“
외출한다고? 뭐 필요한 거 있어?”
“카메라를 사려고.”
현우의 대답에 선우는 잠시 고민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제일 좋은 걸로 카메
라를 사 올 테니 나가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아니면 자신의 일이 끝난 뒤에 같
이 가자고 하거나.
‘하지만 그건 이기심이겠지.’
형에 한해서는 한없이 욕심이 생겨난다. 아무래도 보지 못했던 세월이 너무 길
었던 탓인 듯했다. 선우는 치밀어 오르는 욕심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
“조심해서 다녀와.”
그러면서 건네주려는 카드를 현우가 거절했다.
“돈은 충분해. 저번에도 줬잖아.”
“하지만 혹시 모르잖아. 이건 한도가 높은 거라서 사고 싶은 건 다 살 수 있어.”
모르긴 몰라도 외제차도 쉽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우는 고개를 내저으
며 선우의 손을 살며시 밀었다.
“지금도 충분하거든?”
현우는 카드를 쥔 선우의 손을 꽉 잡았다 놓으며 웃었다. 그러고 보니 10살 이
후로는 선우와 함께 사진을 찍은 적이 없었다. 사진을 찍을 만한 것도 없었고,
무엇보다 삶이 너무 힘들었다. 사는 것만으로도 바빠서 사진을 찍을 생각도 하
지 못했다. 그러니 이번에 카메라를 사 오면 선우랑 사진을 찍어 보고 싶었다.
다녀올게.”
현우는 손을 휘저으며 도진과 함께 밖으로 나섰다. 케로는 강아지용 목줄을 차
고 옆에서 종종걸음으로 걸었고, 점박이는 등에 멘 가방 속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두고 가려 했으나, 선우는 둘을 반드시 데리고 나가라 하였다. 여차하
면 크게 도움이 될 만한 몬스터들이었으니까.
“
그렇게 해서 도진과 나온 현우가 향한 곳은 커다란 카메라 매장이었다.
가지각색의 카메라들이 줄줄이 늘어선 매장 중심에서 현우는 곤란한 표정을 지
었다. 뭘 사면 좋을지 모르겠다!
“어서 오십시오. 찾으시는 게 있습니까?”
“초보자도 잘 찍을 수 있는 카메라요!”
대뜸 돌아오는 대답에 직원이 웃으면서 안내를 시작했다.
“이제 막 시작하시는 거라면 디지털카메라는 어떠십니까? 쉽게 찍을 수 있고,
찍은 사진을 카메라나 폰으로 옮기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한번 찍어 봐도 되나요?”
“그럼요.”
현우는 떨리는 손으로 디지털카메라를 들어 케로를 찍었다.
“개가 귀엽네요.”
다행히 직원은 케로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긴 그냥 보기엔
여느 개랑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으니까.
“한번 찍은 사진을 볼까요?”
상냥하게 웃은 직원이 사진을 가까이 있는 노트북으로 옮기더니 열어서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지옥에서 올라온 듯한 새까만 그림자 덩어리가 있었다.
“음?”
직원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카메라를 재차 확인해 보았다. 그러고는 난감한 표
정을 지었다. 가게 조명은 나쁘지 않았고, 개도 귀여웠는데 왜 이런 사진이 나온
걸까. 손 떨림 보정 기능도 들어가 있는데.
혹시나 싶어 다른 카메라로도 찍어 보게 했는데, 나오는 사진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직 사진에 매우 서투르신 모양입니다.”
“잘 찍을 방법은 없을까요? 더 비싼 카메라는 좀 다르지 않을까요?”
“모든 길에 지름길은 없지요. 연습, 연습이 중요합니다.”
가끔 이런 사람이 있다. 아무리 좋은 카메라를 쥐여 줘도 사진을 못 찍는 사람.
이런 경우에는 연습만이 살길이었다. 직원은 적당한 가격의 디지털카메라를 추
천해 주며, 꼭 연습을 하라고 당부에 당부를 거듭했다.
결국 현우는 카메라 상자 하나를 들고 시무룩해진 채 가게를 나올 수밖에 없었
다. 선우가 봤다면 당장 유명 사진작가를 선생님으로 붙여 주었겠지만, 지금 여
기에 그는 없었다. 대신 도진이 있었다.
카메라를 샀으니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갈까요?”
“주변을요?”
“연습이 중요하다고 했으니 이거저거 찍다 보면 좀 괜찮아지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연습!”
현우는 다시 씩씩한 자세로 돌아왔다. 그리고 둘이서 한강으로 향했다. 다행히
카메라는 어느 정도 충전이 되어 있었다.
찰칵.
현우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하늘의 구름, 멀리 보이는
빌딩, 가까이서 돌아다니는 비둘기, 그리고 그런 비둘기 사이로 뛰어드는 케로.
신나게 사진을 찍다 보니 금방 100장을 넘겼다. 그러다 문득 옆을 돌아보니 도
진이 저 먼 하늘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고 있는 게 보였다.
찰칵.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손가락이 움직였다. 뒤늦게 도진이 돌아보았으나, 그땐
이미 다른 걸 찍고 있었다.
‘뭐지, 굳이 숨길 일도 아닌데.’
왜 다른 걸 찍으며 모르는 척한 걸까. 현우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딱히 짚이는
부분이 없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여유롭게 보낸 그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
늦었네.”
소파에 앉아서 다리를 꼬고 있던 선우가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
사진 찍는 연습 좀 하느라.”
“그래?”
내 동생은 삐진 모습도 귀엽지. 현우는 슬며시 카메라를 꺼내 선우에게 초점을
맞췄다.
찰칵.
“형?”
“아니, 귀여워서.”
현우가 웃으며 말하자 선우가 와락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왜 하필이면 지금! 표
정도 별로일 텐데.
“잠시만 기다려.”
선우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러더니 다시 소파에 앉
아 자세를 잡았다. 그 모습이 마치 화보 속 모델 같았다. 누구 동생이 저렇게 잘
생겼담? 현우는 히죽 웃었다.
“이제 찍어도 돼.”
“그래, 그래.”
현우는 또다시 사진 수십 장을 찍었다. 그렇게 신나게 사진을 찍고 카메라를 내
리려는데, 도진이 손을 내밀어 왔다. 별생각 없이 카메라를 쥐여 주자 현우의 등
을 부드럽게 떠민다.
“옆에 앉으십시오. 같이 찍어 드리겠습니다.”
“
그러고 보니 선우와도 같이 사진을 찍고 싶었더랬다. 현우는 잽싸게 선우의 옆
에 가서 앉았다. 그런 모습을 빤히 보고 있던 케로가 폴짝 뛰어 두 사람의 사이
에 끼어들었고, 점박이도 가방에서 빠져나와 어깨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선우는 못마땅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몬스터들을 밀어 내진 않았다.
“웃으십시오.”
이어 사진 찍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떻게 찍혔어요?”
사진을 찍자마자 현우는 튀어 오르듯 일어나 곧바로 도진에게 다가갔다. 선우
도 사진이 궁금했는지, 그 뒤를 따랐다.
작은 화면 속에는 선우와 현우가 같이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걸 보고 있자니 가
슴 속이 울컥거렸다.
“이거 뽑을 수 있죠?”
“가능합니다.”
“그럼 뽑아서 간직할래요.”
어렸던 동생은 이미 커져 버렸고,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었
다. 둘은 여전히 가족이라는 것.
“그럼 저도 부탁드립니다.”
도진에게 부탁하는 선우를 보며, 현우는 손을 뻗어 커다란 손을 꼭 움켜쥐었다.
‘사랑하는 내 동생.’
둘은 마주 보고 소리 없이 웃었다. 마음이 통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런 둘을
바라보고 있던 도진이 잠시 씁쓸하게 웃었지만, 워낙 순간이라 둘 다 알아차리
지 못했다.
찰칵.
그 뒤로 현우는 사진 찍는 데 취미를 붙이는가 싶었지만, 잠시였을 뿐이다.
‘사진 찍는 것도 쉽지 않다.’
엄연히 노동력이 들어가는 취미였다. 포즈를 궁리하고 사진을 찍은 뒤, 그걸 보
정하고 프린트한다. 그 과정이 너무나도 귀찮았다. 게다가 이놈의 사진 실력은
도통 늘질 않아 하나같이 심령사진을 연상케 했다.
그러다 보니 현우 대신 도진이 카메라를 드는 날이 많아졌고, 도진이 찍은 사진
이 별스타에 올라가기 시작했다.
지현우
(하품하는 케로).jpg
(밥먹는 점박이).jpg
아는 형이 찍어준 사진.
#몬스터 #점박이 #케로 #별스타그램
갑자기 사진 실력이 확 늘어난 것 같지 않
아?
저번 글에서 카메라 샀다고 했잖아
그렇다고 해도 딱히 실력이 늘어난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러게? 무슨 일이지?
아, 오늘 사진에 이유가 적혀있어. 아는 형이
찍어줬대.
아는 형이라면 누구지?
평화길드의 길드장 아냐? 소문으로는 지현우
에게 거의 붙어 다닌다던데?
그건 그냥 소문 아냐? 붙어다닐 이유가 뭐가 있어?
나야 모르지
그나저나 애들 귀엽긴 하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계속 사진 찍어
주세요! 댓글 달아야겠다!
➥
앞으로도 계속 귀여운 사진 부탁드립니다!
별스타를 살펴보던 현우가 댓글을 소리 내어 읽었다.
“앞으로도 계속 사진 부탁드린대요.”
“저 말입니까?”
“네, 내 사진은 어떤지 알잖아요.”
아무리 찍어도 늘어나지 않는 저주받을 실력.
“그래도 조금은 늘던걸요.”
“조금이죠, 조금.”
과학이 발전한 시대라서 다행이었다. 옛날이었으면 사진이 더 처참했겠지. 현
우는 누워서 뒹굴며 도진을 올려다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TV에서는 이제 다가
오는 11월을 맞이하여 특집 방송을 하고 있었다. 단풍이 내려앉은 산이며, 노랗
게 물든 가로수가 참 예쁘다.
‘아, 이제 곧 그때네.’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매년 이맘때면 현우는 마계에서 미쳐 날뛰곤 했다.
‘네 생일은 언제나 내가 챙겨 줄게.’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하면서, 줄 수 없는 생일 선물을 마련하곤 했
다. 지금은 전부 마계에 두고 와서 아무것도 없지만 지금도 기억난다.
레드 드레이크의 이를 뽑아 만든 목걸이, 마족을 족쳐서 받아 낸 마정석, 발록의
날개 뼈로 만든 윷놀이 세트 등등. 그렇게 모아 둔 게 수십 개였다.
만약 요정이 조금만 더 시간을 줬으면 어떻게든 들고 오는 건데. 그러질 못했다.
그랬다. 돌아오는 11월 15일.
그날은 하나뿐인 동생 지선우의 22살 생일이었다.
52.
어릴 때는 생일을 제대로 챙겨 주지 못했다. 거창하지는 않더라도 남들만큼 해
주고 싶었는데, 그도 어려웠다. 먹고사는 것도 어려워서, 케이크는 사지도 못했
다. 간신히 빵 하나 사서 초 꽂는 게 전부였다. 선물은 공책이나 연필이었다.
선우는 그것도 좋다고 웃어 줬지만, 현우의 기억에는 서럽게 남아 있었다.
‘그러니 이번 생일은 제대로 챙겨 주고 싶다.’
남들 하는 것처럼 빵집에서 예쁜 케이크도 사 놓고, 고기도 구워 주고, 제대로
된 선물도 주고 싶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네.’
돈이 없었다. 선우가 준 카드 안에는 돈이 많았지만, 이걸 쓰는 순간 생일을 준
비한다는 걸 들켜 버릴 것이다. 게다가 생일 선물을 당사자의 돈으로 준비한다
는 것도 좀 그런 느낌이었고.
‘돈, 돈이 필요해.’
현우는 눈을 부릅뜨고 구인 어플을 설치하여 죽죽 내려 보았다. 며칠씩 단기로
하는 알바가 있다고 했는데. 선우가 혼자 나가는 걸 싫어하긴 하지만, 하루 정도
라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뒤에서 도진의 목소리가 들려왔
다.
“돈 필요합니까?”
그 말에 현우는 화들짝 놀랐다. 선우의 생일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도진이 접근
하는 걸 눈치채지도 못했다. 아니, 마계에서는 안 이랬는데. 케로가 접근을 해도
금방 눈치챘었다. 아무래도 여기 와서 많이 해이해진 것 같았다.
현우는 자기반성을 마치고, 도진에게 대답했다.
네 필요해요.”
“혹시 지선우 씨 생일 선물 때문입니까?”
“어떻게 알았어요?”
현우는 저도 모르게 도진을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미 돈이 있는데, 돈이 필요하다고 하니까요. 그리고 이쯤이 선현 길드 길드
장의 생일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네, 맞아요. 선우에게는 비밀이에요?”
“네, 쉿.”
도진은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런데 알바는 힘들 것 같습니다만.”
“왜요?”
“이미 얼굴이 많이 알려져서.”
“마스크랑 모자 쓰고 하면 되지 않을까요?”
“허락받고 나가더라도 경호원이 붙으니까, 알바하는 건 금방 들킬 텐데요?”
“가지고 싶은 게 생겨서 알바한다고 속이면 되죠.”
그걸로는 속지 않을 것 같은데. 하나뿐인 형이라고 어화둥둥하면서 모든 움직
임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데 들키지 않을 리가.
“ ,
그보다는 다른 방법으로 돈을 버는 게 어떻습니까?”
“어떤 방법이요?”
“CF를 하나 찍는다거나.”
밖에 나가는 건 위험하다. 내부에 있는 게 현우의 안전에는 좋다는 걸 안다. 하
지만 얼마 전에 카메라를 사면서 보였던 표정을 생각하면, 가끔은 나가는 게 좋
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지켜 줄 테니. 현우는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했으면 좋겠다.
“그건 너무 거창하지 않아요?”
“그쪽이 생일 준비 감추기엔 더 나을 것 같습니다.”
현우는 도진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CF를 찍기로 한 것이다. 그 소식은 가장 먼
저 선우에게로 들어갔다.
“갑자기 CF는 왜? 저번엔 귀찮다면서.”
“그냥 조금 관심이 생겨서.”
“갑자기?”
“처음엔 귀찮긴 했는데, 막상 방송 찍어 보니 재밌더라고.”
아무래도 거짓말에는 재능이 없는 모양이었다. 특히 동생에게 사실을 감추는
건 상당히 힘들었다. 하지만 다행히 선우는 꼬치꼬치 캐묻지 않아 주었다.
“알았어. 그럼 부길드장에게 말해 놓을게. 형이 하고 싶은 대로 해.”
“
고마워!”
현우는 선우를 뒤로하고 냉큼 찬영을 찾았다.
“최대한 큰돈이 되는 CF 말입니까?”
“네!”
“돈 필요한 일이 있습니까?”
찬영은 떨떠름한 얼굴로 되물었다.
“참고로 선우의 돈은 안 됩니다.”
단호한 현우의 말에 찬영이 말했다.
“지난번에 나가신 예능 방송 출연료를 대신 보관하고 있는데, 카드만 발급해서
드릴까요?”
“얼마 정도인데요?”
“이 정도입니다.”
찬영은 순순히 금액을 적어 보여 주었고, 그를 본 현우는 활짝 웃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케이크, 고기, 생일 선물을 사고도 충분할 것 같았다. 방송 출연 한 번
에 이 금액을 주다니, 방송사는 돈이 많은가?
“그럼 CF는 안 찍으실 거죠?”
“네!”
“그런데 그 돈이 왜 필요한 겁니까?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
현우는 잠시 고민했으나, 이내 부길드장인 그는 선우의 생일을 알고 있을 거란
데 생각이 미쳤다. 보니까 다른 길드의 길드장들도 생일마다 거하게 파티를 한
다는데 선우도 그러겠지. 그러면 따로 미리 말해 놓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개인
적으로 챙겨 주고 싶지만, 길드 차원에서 준비하는 것도 있을 테니까 겹치지 않
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곧 선우 생일이잖아요.”
“네, 맞습니다. 곧 길드장님 생일이죠.”
“길드에서도 준비하는 게 있겠죠?”
“아니요. 길드에서는 따로 준비하는 게 없습니다.”
“왜요?”
현우가 기겁하며 되물었다.
“왜 준비 안 해요? 다른 길드는 거창하게 파티까지 열던데!”
외곽의 건물을 빌리거나, 크루즈를 빌리거나. 어디든 넓은 장소를 빌려서 사람
을 초대하고, 생일 파티를 열었다. 그런데 선우의 길드는 그런 걸 준비 안 한다
고?
“길드장님이 싫어해서요.”
싫어한다고? 선우가 생일을 얼마나 좋아했는데. 생일이 오기 며칠 전부터 열심
히 생일을 챙겼었다. 형이 잊기라도 했을까 봐, 달력의 15일에 빨간색 색연필로
동그라미를 쳐 놓고 하루에 몇 번씩 생일 이야기를 했다.
“말도 안 됩니다.”
정말입니다. 그 때문에 길드에서는 생일을 따로 챙기지 않습니다.”
“이유는 모르나요?”
“예전에 기자가 인터뷰할 때 그걸 물어본 적이 있긴 합니다. 잠시만요.”
찬영은 자신의 사무실 한편의 책장을 뒤져 잡지 하나를 빼 주었다. 패션 잡지인
듯 세련된 옷을 입은 여성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현우는 곧바로 그 자리에서 인터뷰 부분을 찾아 넘겨 보았다.
“
이제 가을의 중심인데요. 곧 생일 아니신가요?
A. 맞습니다.
Q. 11월 15일. 이 날이죠? 자, 여기서 독자분들의 궁금증을 조금 해소해 보고
자 질문드리겠습니다. 어째서 매년 생일을 챙기지 않으시나요? 사소한 선물 하
나 받지 않으신다고 했는데, 이유가 있을까요?
A. 저에게 생일은 특별한 날입니다. 그날만은 매일 바쁘던 형이 일찍 돌아와서
생일을 축하해 주었거든요.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형이 생일을 잊을까
봐 계속 그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Q. 어릴 땐 귀여우셨군요!
A. 귀여운가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Q. 그러면 지금 생일을 챙기지 않는 이유는 형 되시는 분이 없어서인가요?
A. (지선우 씨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슬픔이 담겨
있어 보는 기자도 그 괴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Q.
잡지를 쥔 현우의 손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마계에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
다.
동생이 제가 없어도 행복하길 바랐다. 하지만 자신을 잊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
다. 그게 선우의 괴로움이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기심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었
다. 그리고 지금 선우가 생일을 챙기지 않는 이유를 보는 순간, 가슴 아픈 와중
에도 기뻤다.
‘이러면 안 되는데.’
현우는 잡지를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거 구기지 마십시오. 저도 간신히 구한 잡지란 말입니다.”
찬영이 초조해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배려를 해 줄 수 없었다. 현우는 간신히
표정을 수습하고 나서야, 잡지를 내렸다.
“생일 파티 해요.”
“네?”
“제가 선우에게 말할게요. 다른 길드보다 더 커다랗게 파티하죠! 돈이 모자라면
제가 CF를 찍을게요!”
“그 정도로 돈이 모자랄 선현이 아닙니다. 그보다 생일 파티를 하자고요? 기간
이 이제 2주도 안 남았는데요?”
“그래서 못 합니까?”
그 말에 찬영이 피식 웃었다.
못 하다니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허락만 받아 오십시오.”
돈과 사람을 갈아 넣으면 된다. 그리고 선현은 그 모든 것이 풍부한 길드였다.
초대하는 손님들이 시간이 될까,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찬영도 그동안
선우의 생일을 다른 길드처럼 챙겨 주고 싶었다. 그렇기에 현우의 말에 금방 넘
어갔다.
“그럼 제가 선우에게 허락받고 올게요!”
이미 몰래 생일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은 홀랑 날아갔다. 현우는 부길드장 사
무실을 나와 선우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힘차게 문을 열어젖히며 말했다.
“생일 파티 하자!”
“형?”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는 선우를 보며 다시 한번 외쳤다.
“생일 파티 하자!”
“무슨 생일 파티?”
“네 생일 파티!”
현우의 말에 선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나야 해 주면 좋지.”
“그렇지? 그러면 어디서 할까? 선상 파티? 외곽의 호텔? 아니면 아예 그냥 건
물 하나 빌려서 처음부터 준비를 해?”
“
부드럽게 웃던 선우의 표정에 슬며시 금이 갔다. 하지만 흥분한 현우는 미처 그
를 눈치채지 못했다.
“꼭 그렇게 해야 해?”
“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생일 파티 안 했다면서. 남들 다 하는 건데!”
그래, 남들 다 하는 거. 그 부분이 현우의 행동을 부추겼다. 이거도 하고, 저거도
하고. TV에서 보던 대로 화려한 생일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다.
“나는 작게 해도 되는데.”
“어떻게 그래. 지금까지 내가 생일을 제대로 챙겨 주지도 못했는데.”
“나는 그래도 괜찮았어.”
“거짓말.”
“정말인데.”
정말이었다. 형은 생일을 잘 챙겨 주지 못했다고 자책했지만, 선우에게는 그 모
든 것이 행복이었다. 그랬기에 현우가 사라지고 나서는 더 이상 생일을 챙기지
않았다. 하지만 현우는 다시 돌아왔고, 11월이 되었다.
다시 예전과 같은 생일을 보낼 수 있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
다. 하지만 형은 그걸로는 만족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형은 내가 남들처럼 크게 생일 파티를 했으면 좋겠어?”
고개를 끄덕이는 현우를 보며, 선우는 자신이 원했던 생일을 조용히 묻어 두었
다.
좋아. 그러면 이번에는 크게 하자.”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현우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그래, 형
이 웃으면 됐다. 앞으로도 남은 생일은 많으니까. 이번 생일만큼은 형이 원하는
대로 하기로 하였다.
“
53.
화려한 생일 파티를 만들려면 필요한 게 뭐가 있을까? 넓은 장소, 그 장소를 꾸
밀 수많은 물건, 맛있는 음식 등등 많은 것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걸 꼽으라고 한다면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손님.
격이 다른 손님. 그것이 파티의 질을 결정한다. 그렇기에 찬영은 초대장을 보낼
사람을 신중히 골랐다.
‘일단 국내 5위권 내의 길드에는 전부 초대장을 보내고.’
그 아래는 좀 더 신중하게 고른다. 이번은 생일 파티를 연다는 소문을 슬며시 흘
린 덕인지, 수많은 초대장 요청이 들어오고 있었지만 전부 받아들일 생각은 없
었다.
시간이 촉박하긴 하지만 이미 해외에도 초대장을 돌렸다.
‘될 수 있으면 대부분이 와 줬으면 좋겠는데.’
슬슬 초대장에 대한 답이 돌아오기 시작할 때가 되었다. 찬영은 그를 확인하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뭐야. 생일 파티 초대장?”
“
가준은 자신에게 도착한 초대장을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생
일 파티라고는 한 번을 하지 않더니 무슨 바람인지. 형을 찾아서 그런가? 가준
은 초대장을 꺼내 안을 들여다보았다.
장소는 도심 외곽의 한 건물. 사람이 잘 드나들지 않는 곳이지만, 주최자가 선현
이라면 제법 기대해도 될 것이다.
‘갈까, 말까?’
평소 지선우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가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려
국내 1위,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선현 길드에서 여는 파티다. 유력한 사람은 대
부분이 모일 것이 분명했다. 그런 자리에 혼자 빠진다고? 단순히 울분이 터진다
고 해서 놓치기에는 아쉬운 자리였다.
‘가야겠지.’
혜선 누님은 당연히 갈 테고, 아윤과 자윤 꼬맹이들도 갈 것이다. 한도진이야 아
예 붙어 사니 말할 것도 없고. 백호 길드만 빠지긴 좀 그렇다.
“간다고 전해.”
고민은 짧았다. 가준은 초대장을 들고 온 비서에게 그렇게 전하고 의자에 앉았
다. 그럼 이제 생일 선물을 골라야 할 차례다.
“이건 진짜 내키지 않는군.”
생각해 보니 지선우는 자신의 생일 파티에 온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어쩐지 지는
기분이 든다.
“제기랄.”
입 밖으로 절로 욕이 튀어 나갔다.
일본의 모처, 수련관에서 수련하던 준이치는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인기척에 눈
을 떴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온 보좌관에게 초대장 하나를 받았다.
“지선우의 첫 생일 파티입니까?”
“네, 듣기로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가 봐야지요. 간다고 전하십시오.”
“네,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초대 명단을 구해 보십시오. 누가 오는지.”
“일단 러시아의 이반, 미국의 레온은 승낙 의사를 보였다고 합니다. 그 외의 명
단은 최대한 빠르게 구해 오겠습니다.”
“알았습니다. 이만 나가 보십시오.”
“네.”
보좌관이 나가자 준이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어쩌면 이번에 한국으로 간다면
대련을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대부분의 나라는 국력 유출을 이유로 각성자가
대련하는 걸 싫어했지만, 준이치는 그를 상관하지 않았다. 강해지고 싶다는 열
망만으로 움직일 뿐이었다.
물론 대련을 신청한다고 전부 승낙하는 것도 아니긴 했지만, 지선우는 지금까
지 단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부터 철저히 준비를 해야 했
다.
반드시 지선우를 이기고 싶었다. 아니, 이기고 싶은 자는 지선우뿐만이 아니었
다. 러시아의 이반, 미국의 레온. 그 외에 각국의 쟁쟁한 각성자들. 그들을 전부
이겨 내고 가장 위에 서고 싶었다.
그러기 위한 수련이다. 준이치는 마침내 잡념을 지워 내고 깊은 명상에 빠져들
었다.
생일 파티?”
하얀 손이 초대장을 꺼내 보곤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파티가 열리는 곳은 작은
나라였지만, 무시할 수는 없는 곳이었다. 가장 먼저 포털이 열린 만큼 강한 각성
자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 곳이었으니까.
“그렇다면 가야겠네.”
좋은 기회였다. 하얀 손이 까만색의 수정을 쓰다듬었다.
“자, 성과를 확인할 시간이다.”
그동안 마계와의 통로를 조금씩 열어 왔다. 그리고 최근에는 블랙 드레이크를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그 결과를 바탕으로 더 크게 포털을 열 수 있게 되었
다. 더 강한 마계의 생물을 불러올 수 있단 소리였다.
그래 봤자 파티에 모일 면면을 살펴보면 금방 잡히겠지만, 노리는 건 그게 아니
었으니까. 이건 미끼에 불과했다. 더 큰 혼란을 위한 미끼.
“
생일 파티의 규모가 커지면서 대부분을 찬영이 떠맡아 현우가 할 일이 줄어들
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여유로운 것도 아니었다. 아직 선우의 생일 선
물을 고르지 못했으니까.
“으아아!”
한참 태블릿을 들여다보던 현우가 소파에서 흘러내려 러그 위를 뒹굴었다. 오
랜만에 만난 동생에게 줄 생일 선물인데 뭘 줘야 할지 모르겠다. 출연료를 넘겨
받긴 했지만, 액수가 애매하다. 평범한 선물을 사기에는 차고 넘치는 액수였으
나, 각성자 전용 물건을 사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아직 고민 중입니까?”
“네, 뭘 사야 할지 모르겠어요.”
마계에 있을 때는 환경이 그러함에도 어떻게든 선물을 준비했는데. 환경은 지
금이 더 좋은데 왜 이리 어려울까. 현우는 손을 뻗어 케로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러고 보니 케로베로스의 이빨이 제법 튼튼했는데. 아니면 드레이크의 이빨도
괜찮고.
“깨개갱!”
생각과 동시에 손이 움직여 버렸다. 그 때문에 강제로 입이 벌려진 케로가 기겁
을 하며 뒤로 펄쩍 뛰었다. 점박이는 이미 도진의 뒤쪽에 숨은 지 오래였다.
“지선우 씨는 뭘 사서 주건 기뻐할 것 같습니다만.”
그건 그렇다. 착하고 순한 동생은 형이 주는 것이라면 뭐든 웃으며 받을 것이다.
그렇지만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은 게 형의 마음인지라. 갑자기 손에 쥔 액수가
커지니 여러모로 생각이 많아졌다. 원래라면 소박하게 할 생각이었는데, 이제
는 아니니까.
“도와드릴까요?”
“뭘요?”
“지선우 씨가 무엇을 원하는지 한번 알아봐 주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건 조금 솔깃하다.
“그럼 부탁드려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도진이 웃으며 답했다.
그리고 고민과는 별개로 시간은 잘만 흘러갔다. 외곽의 낡은 건물이 모던한 분
위기의 건물로 변신하고, 거칠던 땅이 바르게 정돈되었다. 내부는 파티장에 걸
맞게 꾸며졌고, 선우의 생일을 위해 입국한 각성자들 때문에 연일 공항이 소란
스러웠다.
“백호 길드장이 파티를 열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만.”
무혁을 따라 공항을 정리하러 나온 부하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1위와 2위 길드라지만 그 격차가 크니까. 그리고 지선우는 아직 어리지.”
각성자는 어린 나이에 각성할수록 유리하다. 왜냐하면 각성한 순간부터 노력
여하에 따라 성장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치면 언젠가 지선우는 정말로 세계 1
위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이렇게 많은 각성자들이 입국하는 거군요.”
“그렇지.”
“그런데 몬스터는 왜 데리고 들어오는 걸까요?”
“그건 형 쪽이 테이머라서 그런 듯하군.”
몬스터로 환심을 사 볼 속셈인 걸까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실상 현우는 테이머도 아니고, 주먹으로 길들인 것에 불과했지만 아무도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보다 집중하도록. 이제 러시아와 일본, 미국의 각성자들이 입국한다.”
그 말에 부하도 침을 삼키며 자세를 바로 했다.
“아아, 귀찮아.”
붉은 머리를 가진 호남형의 청년이 가장 먼저 모습을 보였다. 러시아의 이반. 무
혁과 똑같이 불꽃을 다루는 각성자다. 그 때문인지 어쩐지 가슴 한쪽이 두근거
렸다. 싸워 보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어 선현 길드에서 보낸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서 오십시오.”
“아, 선현 길드?”
“네, 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쯤부터 이반은 뒤로 물러서고, 다른 이가 선현 길드의 사람을 상대했다. 이반
은 내내 하품을 하며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러다 무혁을 발견하고는 발걸음을
멈춰 섰다.
무혁이 그를 알아보았듯이 이반도 무혁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
똑같은 불이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까 싶어 긴장했지만, 그게 다였다. 이반은 그대로 선
현 길드의 안내를 따라 공항을 빠져나갔다.
이어 일본의 준이치가 도착했다. 그는 내내 단정한 태도를 보이며 순탄하게 공
항을 나섰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각성자는 레온.
지금까지의 조용함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사람이 몰리기 시작했다. 길게 늘어
트린 금발에 가디언 길드 특유의 제복. 마치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모습
에 일부 사람들이 열광했다. 그나마 한국이라서 덜한 거지, 일본을 방문했을 때
는 난리도 아니었다고 들었다.
“여기, 여길 봐 주세요!”
“아아아악!”
사람들이 열심히 손을 흔들어 댔다. 그리고 레온은 경호원들이 열심히 터놓은
길 사이로 손을 흔들며 지나갔다. 몰래 뒤로 빠져나가도 됐을 텐데, 저러는 걸
보니 쇼맨십이 대단하다 느껴졌다. 그렇게 셋이 지나고 나니 그다음은 통제가
좀 수월해졌다.
‘하지만 문제는 이다음이겠지.’
지선우의 생일이 지나는 날까지, 이들을 내내 주시해야 했다. 선현 길드가 알아
서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명색이 헌터관리국인데 한 발 뒤로 물러서 있을 수
는 없었으니까.
무혁은 남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
54.
수도에 타국의 각성자가 여럿 들어와 있다. 선현 길드가 모든 걸 책임진다고는
했지만, 그 때문에 도심에는 기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는 동
안 딱히 큰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몇몇 각성자가 부딪치긴 했지만, 발 빠르게 나선 선현 길드와 헌터관리국 덕분
에 금방 해결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당일이 되었다.
현우는 몸에 딱 맞는 정장을 입은 채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살짝 자줏빛이 도는
정장은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았다. 장인이 만들었다더니, 그만큼의 값어치는
하는 모양이었다.
“잘 어울려, 형.”
옆에서는 색만 다른 비슷한 모양새의 정장을 입은 선우가 웃고 있었다.
도진은 어디 있느냐고? 지금 여기엔 없었다. 평소 경호원처럼 현우에게 붙어 다
니긴 했지만, 그도 엄연히 한 길드의 길드장. 파티가 열리기 전에 다급히 달려온
부길드장에게 끌려 사라졌다.
그 때문에 선우는 평소보다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언제나 붙어 다니던 도진도
없고, 형과 비슷하게 맞춘 정장을 입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너도 잘 어울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그러했다. 키도 크고, 몸도 좋고 잘생겼으니 뭘 입어도 어
울린다.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딱 맞는 정장을 입혀 놨으니 무슨 말을 더하랴.
현우가 뿌듯하게 웃으며 선우를 칭찬하자 아래에 있던 케로가 왕왕 짖었다.
“그래, 너도 귀엽다.”
그러자 현우와 똑같은 색깔의 케이프를 걸친 케로가 가슴을 쑥 내밀었다. 본래
케로베로스는 난폭한 마수인데. 요즘 따라 왜 이리 귀엽다는 말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케로가 나서면 점박이도 나선다. 꼬리에 리본을 두른 점박이
가 괜히 몸을 돌려 본다.
“너도 귀여워.”
똑같은 칭찬을 듣고 나서야 점박이는 빙글빙글 도는 걸 멈췄다.
“형, 곧 파티가 시작돼.”
수많은 각성자와 정·재계의 인사들이 모였겠지. 현우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준비는 됐어?”
선우는 눈을 접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물론이지.”
현우 또한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막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전
면 유리창 너머로 익숙한 사람을 발견했다.
도진은 차 안에서 파티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겨우 2주 만에 그럴싸하게 탈바꿈
한 모습이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일반인으로는 시간을 맞추기 힘드니 각성자들
까지 고용해서 해결했다지.
“준비는 끝났습니다.”
옆에서 부길드장인 현희가 말을 걸어 왔다. 그 말에 도진은 자신의 손목을 내려
다보았다. 생전 차 본 적 없던 값비싼 시계에 반듯한 정장. 정확히 말하자면 정
장은 현우와 백화점에 갔을 때 입어 보았기에 처음은 아니지만, 여전히 조금은
어색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있지요. 평소에는 공개된 곳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으니까요. 이 기회에 제
대로 깊은 인상을 심어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현희는 제법 들뜬 모양이었다.
몇 번인가 길드를 그에게 넘기고 편하게 지내려고 했으나, 그때마다 현희는 도
진에게 끈덕지게 들러붙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길드의 힘이 필요할 거라고 그
를 설득했다. 그 말이 틀린 것 같진 않아 여기까지 왔지만, 모르겠다. 이게 맞는
길인지.
“그럼 들어갑시다.”
도진은 차에서 내려 파티장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멀찍이서 주변을 맴돌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초대받지 못한 사람이나 기자로, 안에 들어
올 수 없는 이들이었다.
“누구지?”
기자 하나가 말을 꺼내자 다른 기자가 그 말을 받았다.
“모르겠는데. 하지만 초대장을 받은 사람이면 대단한 사람이겠지.”
“그건 당연한 소리고. 봐 봐. 거리가 이렇게 먼데도 눈에 확 들어와.”
“각성 등급이 뭘까? 키도 크고 몸도 좋고 외모도 완벽하군.”
“그건 모르겠는데, 일단 사진 찍어 둬 볼까?”
아서라, 참아. 들키면 여기서도 쫓겨난다.”
“뭐라도 건져 먹을 게 있나 싶어 여기 왔는데, 이런 거라도 건져야지.”
기자는 투덜거리면서 카메라를 내리지 않았다.
“몰래몰래 조금씩 찍으면 될 거야.”
“하여간 사람하고는.”
미리 조작해 두었기에 셔터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사진 몇 개
를 찍어 낸 기자는 희희낙락하며 들고 온 노트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각성자는 사진 찍히는 걸 진작 알아차렸다. 그렇지만 굳이 다가가 카
메라를 뺏는 이는 드물었다. 이미 선현 길드에서 순찰을 돌고 있기도 했고, 거기
서 막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딱히 손해 볼 일은 아니었으니까.
“알려지면 더 좋지요.”
현희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여기 왔다는 자체가 어느 정도 알려진 각성자
라는 증명이었으니, 평화 길드로서는 나쁘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그 때문에 도진은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꾹 참고 있었다. 현우가 카메라를 들이
댔을 때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직 타인의 시선은 조금 불편하다.
“평화 길드에서 왔습니다.”
입구로 가서 초대장을 건네주자 가드들이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겉면과 마
찬가지로 안도 대단하게 꾸며져 있었다.
“
역시 선현 길드의 재력이란.”
절로 눈이 돌아가는 광경에 현희가 눈을 번뜩였다. 하지만 도진은 조금의 동요
도 보이지 않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 있지.’
현우를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파티의 주인공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쉬움에 작게 숨을 내쉬며 돌아서는데, 어떤 여성이 그에게 부딪
혀 왔다.
“앗, 죄송합니다!”
독특한 파란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은 금방 사과를 해 왔다.
“그런데 익숙하지 않은 분이시네요. 국내의 각성자분들은 거의 다 안다고 생각
했는데. 혹시 소개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는 백호 길드의 린이라고 해요. 힐러
죠.”
“평화 길드의 한도진입니다.”
“한도진, 한도진이라면.”
린이 눈을 반짝였다. 얼굴은 자세히 모르지만 이름이라면 알고 있었다.
‘평화 길드의 길드장이잖아?’
멀리서 보기에도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라 일부러 접근했는데, 대박을 건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이는 린뿐만이 아니었다.
새로이 등장한 강자를 멍하니 쳐다보던 이들 중, 그의 정체를 눈치챈 이들이 슬
슬 접근하기 시작했다. 평화 길드의 길드장은 무려 S급 각성자. 게다가 길드장
“
이라는 위치를 떼어 놓고 봐도 도진은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지선우와는 다른 매력이 있네.’
지선우보다는 좀 더 키가 크고 덩치가 있다. 게다가 외모도 뒤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강하다. 이 어찌 매력적이지 않으랴.
‘이런 사람이 지금까지 어디 숨어 있었담.’
자연 도진의 주변으로 사람이 몰리기 시작했다. 도진은 난감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몰려드는 사람을 피하지는 않았다.
“어머나?”
도진보다 먼저 도착해 있던 아윤은 그런 도진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평화 길드 길드장 인기 많네. 봐 봐, 오빠.”
오빠인 자윤의 옆구리를 찌르자 그가 잠시 도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금방 관
심을 지우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가준과 이야기를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오늘은 순수하게 파티를 즐기고 싶었는데 역시 무리였나. 아윤은 한숨을 푹 내
쉬고는,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던 도중 저 멀리서 터프하
게 술잔을 갈아 치우는 혜선을 발견했다.
“안녕~!”
얼마 지나지 않아 혜선도 그들 사이로 합류했다.
“여기는 유독 외국인이 많네.”
“무려 지선우의 첫 생일 파티잖아요.”
그래서 그런가?”
혜선은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새 잔을 들었다.
“술이 맛있긴 하네.”
“다 고급으로 채웠겠죠.”
“돈이 많다더니. 술이나 실컷 마시고 가야겠네.”
각성자가 생긴 지 10년. 외국과 교류를 게을리하지는 않았지만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없었다. 각국에서 각성자 유출에 예민하게 촉각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뜻을 다 따르지는 않는지라, 몇몇은 외국과 접촉하고 있
긴 했다. 그리고 여기 모여든 한국인 상위권 길드의 길드장들도 그런 부분을 상
세히 살피고 있었다.
‘일본에 러시아에 미국, 다른 나라 사람도 제법 많네.’
자, 오늘 뭔가를 더 얻을 수 있을까. 혜선은 술을 마시면서도 머리를 팽팽 굴렸
다.
“
위층에 마련된 대기실. 그 안에서 현우는 아래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면 유
리창은 안에서 밖을 볼 수는 있지만, 밖에서 안을 볼 수는 없는 구조였다. 그렇
기에 더욱 편히 아래층을 관찰할 수 있었다.
‘저거, 뭐야?’
평소와는 다르게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도진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
다.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각성자 몇몇이 도진에게 실수인 척 몸을 들이밀었
다. 이해 못 할 행동은 아니었다.
도진은 유능한 각성자였고, 평소에 입고 다니는 게 그래서 그렇지 잘 꾸미면 선
우 못지않은 미남자였다.
‘그래, 그렇지.’
이제 그도 여동생을 벗어나, 다른 사람과 만날 때가 되었다. 지금까지 현우에게
붙어 있던 것도 여동생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런 거였으니까.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달라질지 모른다. 그러니까 저런 모습을 응원해 줘야 하는데, 기
분이 이상하다.
현우는 손가락으로 유리창을 긁다가 깨달았다.
‘나 지금 기분이 나쁘네?’
왜 나쁘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형?”
뒤에서 선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손을 내밀어 잠시 양해를 구했다. 그리
고 차근차근 생각해 본 결과, 기분이 나쁜 이유를 알아냈다.
평소에는 안 저랬잖아. 낡은 옷을 입고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닐 때는
접근도 안 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겉모습이 말끔해졌다고 저렇게 들러붙다
니. 저런 사람들이 도진을 행복하게 해 줄 리 없었다. 나중에 도진이 다시 원래
모습대로 돌아가면 그땐 어떻게 굴겠는가.
‘같이 지낸 시간이 제법 길었지.’
가끔이지만 도진이 형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만큼 가까워진 사람인데, 다
시 힘들어지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빠르게 자기 합리화를 마친 현우는 몸을 바
로 세웠다.
“가자!”
인파 속에 파묻힌 도진을 구해 주러! 그를 구해 주고 나면 이 불쾌한 기분도 사
라질 것이다. 현우는 선우가 내민 손을 잡고 대기실을 나섰다. 케로와 점박이는
그 뒤를 쫄랑쫄랑 따라갔다.
55.
이런 관심은 낯설다. 어렸을 적에는 말을 더듬어서, 커서는 목적 외에는 아무것
도 보이질 않아서 주변을 둘러보지 않았기에. 사람들이 이렇게 몰려들어 친근
하게 구는 건 처음이었다.
“한도진 씨, 오늘 입은 옷이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예쁘게 생긴 여성이 웃는다.
“평화 길드장님. 처음 뵙는데 이리 훤칠한 분이실 줄이야.”
다들 숨긴 속셈은 있겠지만, 그래도 표면상으로 친절하게 다가오는 이들을 물
리치기는 쉽지 않다.
문득 현우가 생각나긴 했지만, 오늘은 지선우의 생일이다. 현우는 아마 그에게
붙어 다닐 것이다. 핏줄을 나눈 가족이니까.
아무런 관계도 아닌 자신과는 다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하게 가슴이 욱신
거렸다. 모르는 사이, 이렇게 정이 깊어졌나 보다.
‘하긴 동생 같긴 하지.’
저번에 환상에 걸렸던 이후로 동생같이 대해 왔다. 그러니 그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한도진 씨!”
재차 불러오는 여성의 부름에 답하며 도진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저쪽 발코니에서 보니까 풍경이 좋더라고요. 같이 가서 보지 않을래요?”
수줍게 웃으며 하는 말에 깨달았다. 이거 유혹이었구나. 그동안은 그럴 만한 일
이 없어서 뒤늦게야 눈치챘다.
‘일단은 거절하도록 할까.’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이었지만, 마음이 동하질 않는다. 도진이 막 거절을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 누군가 그의 팔을 잡아챘다.
무의식중에 힘이 들어가려던 팔이 순간 힘을 잃고 늘어졌다. 상대의 정체를 눈
치챘기 때문이었다.
“도진 씨!”
현우였다. 평소에는 대충 집히는 옷을 주워 입곤 하던 현우였으나, 오늘은 날이
날이니만큼 제대로 된 정장을 갖춰 입었다. 유독 잘록하게 허리가 들어간 세미
정장이 놀랍도록 잘 어울렸다.
내내 어색하게 굳어 있던 얼굴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오셨습니까?”
“오기야 진즉에 왔죠.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네?”
“
뭔가 잊은 일이 있던가. 기억을 되짚어 보는데 현우가 좀 더 힘을 주어 도진을
잡아당겼다. 현우보다 훨씬 큰 몸이 슬슬 끌려가기 시작했다.
“같이 있어야죠. 그래야 절 지켜 줄 수 있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현우의 표정에는 심술이 떠올라 있었다.
뭐에 이리 심통이 난 걸까.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부드럽게 뺨을 쓸어내렸다.
그동안 종종 접촉을 해 오긴 했지만, 이렇게 대한 건 처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현우는 난데없는 행동에 놀란 모양이었다. 하지만 팔을 잡은 손
을 떼지는 않았다.
“지현우 씨로군요. 그런데 도진 씨는 왜 데려가시는 거예요?”
그 말에 현우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제 경호원이니까요.”
“경호원이요?”
무려 한 길드의 길드장에게 경호원이라니. 주변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평소에
도진이 현우를 지켜 주는 걸 알고 있는 이는 5위 이내 길드의 길드장, 그리고 선
현 길드 사람들 정도였다. 그러니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아무리 그래도 한 길드의 길드장이신데 경호원이라뇨.”
누군가의 말에 도진이 대답했다.
“맞습니다. 경호원.”
본인이 인정했다. 그러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입을 딱 다물었다.
“그럼 가죠!”
현우는 도진을 데리고 사람들 사이를 벗어났다. 그러고는 가까운 발코니로 쏙
들어가 버렸다. 미련이 남은 몇몇이 힐끔거리긴 했지만, 따라붙지는 않았다. 끌
려가는 도진이 날 선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허어, 대체 무슨 관계인 건지.”
사람들은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발코니 안, 거기서는 현우가 도진에게 나무라듯 말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예요?”
“네?”
도진은 이번에도 멍하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그렇게 무방비해요?”
“제가 무방비했습니까?”
그랬던 건 아닌 것 같은데. 언제나 무슨 일이 생겨도 빠르게 대처할 수 있도록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아 왔다. 그랬는데 현우가 이렇게 말하니 의문이 들 수밖
에 없었다.
“그럼요. 아까 그 여자가 팔을 더듬어도 가만있었잖아요. 그뿐인가요? 다른 사
람이 허리에도 손을 대려고 했는데 눈치 못 챘죠?”
아니다. 그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다만 하나같이 호의적인 스킨십이라 어찌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을 뿐이다.
“그건 엄연한 성희롱이라고요. 단호하게 안 된다 말하고 피했어야죠!”
“성희롱입니까?”
“네!”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느 미친놈이 평화 길드의 길드장을 가지고 성
희롱을 하려고 한단 말인가.
“봐요. 팔을 이렇게 만지고!”
가느다랗고 하얀 손이 근육으로 뒤덮인 탄탄한 도진의 팔을 부드럽게 쓸어내렸
다. 그러더니 그대로 가슴을 지나 허리에 머물렀다. 조몰락거리는 손길에 가슴
이 간질거렸다.
“이렇게 허리도 만지려고 했을 테고!”
좀 더 만져 줬으면 좋겠다. 그 생각에 허리춤에서 떠나가는 손을 저도 모르게 잡
아챘다.
“맞아요! 이렇게 해야죠!”
도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현우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그러니까.”
이러면 안 된다. 현우는 그저 자신을 걱정해서 충고의 말을 했을 뿐이다. 그걸
알면서도 절로 손이 움직였다.
도진의 커다란 손이 현우의 팔을 붙잡았다.
“이렇게 하는 걸.”
이어 스르륵 내려간 손이 그의 허리춤을 잡아채 가까이 끌어당겼다.
“조심해야 된단 말이죠?”
도진의 가슴팍에 안기게 된 현우가 얼떨떨해 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
다. 바로 아래서 흔들리는 정수리를 보고 있자니 어떤 충동이 치솟았다.
‘입 맞추고 싶다.’
난데없이 치솟은 충동에 도진은 놀라움을 느꼈다. 여동생한테도 이런 생각을
가진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자유로운 한 손으로 자신의 입술을 문질렀다.
‘지금 내 상태가 어떻지?’
정신은 멀쩡하다. 스킬이나 다른 약물로 인한 중독 상태도 아니다. 그런데 왜 이
런 생각이 드는 걸까. 문득 고개를 들어 올리니 밤하늘을 비추는 달이 보였다.
‘모르겠다.’
그만큼 현우가 귀여워서 그런가. 하긴 여동생인 예원이도 발랄하고 사랑스러웠
지만, 현우도 그에 뒤지지 않았다. 다 큰 남자를 보고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지
만, 보고 있자면 그 귀여움에 가끔 가슴이 뛰곤 했다.
“귀엽습니다.”
불쑥 나간 말은 실수였다.
“눈이 어떻게 되신 거 아닐까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은 현우가 신랄한 대답을 되돌렸다.
“전 멋진 거라고요.”
그건 아닌 것 같지만, 굳이 부정하진 않았다. 가슴팍에 묻힌 채 뭐라고 자꾸 이
야기를 해 대니 셔츠 위로 그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간지럽지만 싫지는 않
다.
그때, 밖에서 폭죽이 터졌다. 그리고 커다란 종소리가 울려 왔다.
“가 봐야 해요!”
현우가 화들짝 놀라며 도진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인기척이 느껴
졌다.
“형.”
돌아보니 파티의 주인공인 선우가 발코니 입구에 몸을 기댄 채 이쪽을 바라보
고 있었다.
“선우야!”
“시간 다 됐는데 여기서 뭐 해.”
날카로운 시선이 도진을 찔러 왔다.
“잠시 이야기 중이었어.”
“그 이야기가 내 생일보다 중요해?”
선우가 그러면서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현우가 금방 그쪽으로 달려든
다. 비어 버린 품속이 허전하다. 역시 아무리 그래도 한 핏줄은 이기지 못하는
것인가. 도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지. 아니, 아닌 게 아니라. 중요한 이야기였지만, 나한테 네가 얼마나 중요
한데!”
“그러면 가자, 형. 곧 파티가 시작될 시간이야.”
“알았어. 도진 씨도 빨리 나와요!”
“저는 잠시 있다 나가겠습니다.”
현우는 잠시 망설였지만, 고개를 끄덕이곤 선우를 따라 나갔다. 그쪽을 향해 손
을 흔들어 준 도진은 발코니 난간에 몸을 기댔다. 고개를 뒤로 젖히니 여전히 빛
나는 달이 보였다.
“동생, 맞겠지?”
작게 중얼거리고는 눈을 감았다. 그냥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보아서, 괜히 몸을
더듬는 바람에 다른 생각이 든 것뿐일 터였다.
도진은 잠시 그대로 있다가 몸을 바로 세웠다. 안으로 들어가 현우가 원하던 경
호원 일을 이어 할 생각이었다.
선우는 시간이 되었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형의 모습에 그를 찾아 나섰다. 형을
찾아낸 건 금방이었다. 주변 사람에게 물어만 봐도 알 수 있었으니까. 그러다 보
고 싶지 않은 걸 봐 버렸다. 형이 발코니에서 도진에게 안겨 있는 모습을 말이
다.
도진은 가끔 말하곤 했다. 현우가 마치 동생처럼 느껴진다고. 저번 포털 사건에
서 정신 공격을 당한 뒤로 예원이의 대체재로 자신의 형을 택한 것 같았다. 그래
서 조금 마음을 놓은 것도 있었다.
남매는 절대로 이어질 수 없는 사이였으니까. 괜찮은 전력인 그를 형을 지키는
데 이용하면 되었다. 그러다 필요 없어지면 내쫓으면 되는 일이고.
‘그랬는데 저건 뭐야?’
어느 오빠가 여동생을 저렇게 안을까.
그동안 가끔 불안을 느끼곤 했다. 여동생에게 대하는 것 치고는 너무 친밀하게
군다. 자신도 브라콤이 대단한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것과는 결이 좀 다른 것 같
았다.
불안감에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형이 언제나 자신의 곁에 있어 줬으면 좋겠다.
어린 시절부터 그의 세계는 형이 전부라서. 이대로 죽을 때까지 같이 지냈으면
했다. 하지만 만약에 형에게 다른 상대가 생긴다면?
생각도 하기 싫었다. 어린애 같은 사고방식이라고 비난받아도 좋았다. 형의 곁
에는 자신만 있었으면 했다. 그러니 결론은 금방 나왔다.
슬슬 도진을 밀어내자. 이제는 예전보다는 상황이 좀 더 나아졌다. 곁에서 계속
지켜 줄 이라면 굳이 도진이 아니라도 나을 것 같았다. 점박이와 케로도 있었고,
선현 길드에도 실력자는 무수히 많았다.
그래도 도진의 실력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시간은 벌어 줄 수 있을 테
니까.
56.
외부에서 폭죽이 터짐과 동시에 나타난 지선우의 모습에 사람들은 감탄사를 내
뱉었다. 발코니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에서 당당함이 느껴진다.
영웅을 조명하다.
방송에서 그랬던 것처럼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리고 무
엇보다 의외였던 건, 형인 현우의 존재감도 그런 동생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것
이었다.
“형제라더니. 어느 하나 모자람이 없군요.”
“그러네요.”
그동안 방송에서 비친 모습만 보고서 현우를 우습게 여겼던 사람들은 생각을
달리하기로 했다.
“지선우는 사자와 같은 존재다. 짐승의 왕인 사자의 형제가 고양이일 리는 없
지.”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겠군.”
수군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친 선우는 현우와 함께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갔다. 그를 확인한 찬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외쳤다.
“오늘 선현 길드에서 주최하는 파티에 와 주신 귀빈들을 환영합니다. 부디 마음
껏 즐기고 가셨으면 합니다.”
그 말을 시작으로 홀에 잔잔한 음악이 깔리고, 생일 파티가 시작되었다. 거창한
인사나 환영식은 없었지만, 이리저리 섬세하게 신경을 써 놓았기에 원하는 대
로 즐기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단순히 즐기기만 하면 여기 온 목적을 이룰 수 없다. 그렇기에 몇몇 사람
들은 슬며시 자리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선우가 사람들로 둘러싸였고, 이어 현우의 주변에도 몰리기 시작했
다.
귀찮아지겠는데.’
빠져나가려고 틈을 봤지만, 그보다 약하다 해도 전부 각성자다. 이렇게 넓고 트
인 공간에서 대놓고 빠져나가는 건 무리일 것 같았다. 어쩌나 싶어 괜히 끌어안
은 케로를 간질거리고 있자니 누군가가 등 뒤에 툭 부딪혀 왔다.
도진이었다. 그가 뒤를 받쳐 주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다소 귀찮은 일도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지현우 씨.”
가장 먼저 말을 걸어온 이는 붉은 머리의 외국인이었다.
“러시아의 이반이라고 합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분을 직접 만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러면서 부드럽게 입술을 휘는데 불쾌하기만 할 뿐이었다.
눈이 웃고 있지 않았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곳은 선우의 생일 파티였다. 여기
서 나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적어도 미리 준비한 선우의 생일 케이크를 자를 때까지는 평탄하게 버텼으면
했기에 현우는 마주 웃어 주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멀리서 오신 분이셨군요.”
“미국만 할까요.”
그러면서 저쪽에서 선우 못지않게 사람을 몰고 다니는 레온을 바라보았다. 미
국의 유명 길드라서 그런지, 본인의 파티가 아닌데도 인기가 대단하다. 하지만
‘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 아닌가?
지금이야 현우에게 붙어 있지만, 방금까지만 해도 레온과 별다르지 않은 처지
였다. 왜냐하면 이 남자는 러시아 최고 길드 길드장의 아들이었으니까. 아버지
에 이어 아들이 각성자가 된 드문 케이스로, 그 힘은 러시아의 불곰이라 불리는
아버지를 능가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아, 음악이 바뀌었군요. 이건 저도 아는 거네요.”
이반은 여전히 능글맞은 태도로 현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같이 춤추시지 않겠습니까?”
순간 표정이 일그러질 뻔했다. 이반도 남자, 자신도 남자. 그런데 같이 춤을 추
자고? 안 그래도 눈에 띄는 두 사람인데 그런 짓을 벌였다가는 모든 시선이 이
쪽으로 쏠릴 것 같았다.
그래서 거절하려고 하는 순간, 뒤에서 손이 뻗어 나왔다.
크고 단단한 손은 그대로 현우의 손을 잡고 자신을 향해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얼결에 끌려가 도진의 가슴에 몸을 기대게 되었다.
“저랑 먼저 선약이 있습니다.”
도진은 조용하지만,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그렇다면 저는 그다음이어도 괜찮습니다.”
“그다음에도 선약이 있습니다.”
“그럼 그다음.”
이제 어떤 대답이 돌아갈지 아실 것 같습니다만.”
이반은 웃는 얼굴 그대로 굳었다.
‘화났네.’
현우는 도진의 품에 안긴 채, 이반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보니 조금 재밌는 것
같기도 하다.
“재밌는 분이시군요.”
“그쪽도 충분히 재밌습니다.”
도진이 이렇게까지 단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 하는 건 처음 봤다. 혹시나 무슨 일
이 벌어지지 않을까, 싶었지만 이반은 의외로 조용히 물러났다.
“이런 좋은 날 굳이 열을 낼 필요는 없지요. 다음을 기약하겠습니다.”
이반이 멀어지고 나자 도진이 자연스럽게 현우를 돌려세우며 다시 손을 잡았
다.
“그럼 춤추러 가 볼까요?”
“네?”
이 사람이 지금 뭐라고 한 거지? 그건 이반을 막기 위해 한 말이 아니었나? 이
해가 되지 않아 멍하니 서 있자, 도진이 손을 놓고 바로 앞에 서서 허리를 굽혔
다. 그러고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다시 손을 내밀었다.
“저와 춤추지 않으시겠습니까?”
“으으.”
“
마계에서 서열 1위인 마족과 싸울 때도 이렇게까지 힘들진 않았던 것 같았다.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에 호기심이 잔뜩 담겨 있다.
“정말 이러기예요?”
현우가 이를 꽉 물고 말했으나, 도진은 웃기만 할 뿐 물러나지 않았다. 그 속에
담긴 것은 약간의 심술과 장난, 그리고 진심.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었다.
‘두고 보자!’
현우는 앞으로 내민 도진의 손을 덥석 잡았다.
“기꺼이.”
둘은 홀 중앙으로 나아갔다. 그곳에는 흥에 겨운 사람들 몇이 춤을 추고 있었는
데, 그 사이로 들어갔다.
“그런데 저 춤 못 춰요. 춰 본 적이 없어요.”
현우는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이 도진의 귓가에 속삭였다.
“음, 생각해 보니 저도 딱히 춰 본 적이 없군요.”
“네?”
그럼 어쩌자고! 당황하자 절로 몸이 힘이 들어갔다. 분명 음악이 연주되고 있을
텐데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이었어요!”
주먹으로 도진의 팔을 퍽퍽 치자 그의 몸이 조금씩 밀려났다.
보기보다 힘이 세네요.”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요!”
“뭐, 일단 대충 음악에 맞추면 되지 않을까요?”
그러면서 도진이 다른 손을 현우의 허리춤에 얹었다. 이어 굳은 몸을 이끌며 발
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따라오세요.”
춤은 모른다더니, 도진은 너무나도 편안한 태도로 몸을 움직이며 능숙하게 현
우를 리드했다. 중간에 몇 번인가 발을 밟았지만,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다정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그를 계속 바라보고 있자니, 점점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내딛는 걸음이
점차 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춤은 모른다더니.”
어디 봐서 이게 춤을 모르는 사람인가. 아무래도 괜히 현우를 놀리려 했던 모양
이었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좀 더 유연하게 대처했을 텐데.
‘나도 긴장했었나.’
자신이 사라진 후, 처음 하는 동생의 생일 파티라고 해서 알게 모르게 잘해 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던 듯했다. 긴장이 풀리자마자 홀을 가득 채우는 음악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곡명은 모르지만, 참으로 듣기 좋았다.
이제는 제법 리듬을 맞출 줄도 안다. 몇 번인가 발을 놀리다가 도진의 리드대로
크게 원을 그리며 돌자,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음악이
이어지는 동안 제법 즐거웠다.
“
음악 하나가 끝나고 다음 곡이 흘러나올 무렵, 도진과 현우의 춤은 끝났다.
‘생각보다 재밌다.’
현우는 시작할 때와는 다른 표정으로 웃었다. 한 번 더 추자고 할까. 다음 음악
도 아는 건 아니었지만, 도진이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뭐.
그렇게 생각하며 재차 손을 내밀려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현우를 잡아당겼다.
“선우야?”
“다음은 나랑.”
귀여운 동생은 왜 또 이리 심술이 났을까. 선우는 자연스럽게 현우의 손을 잡고
홀의 중앙으로 나아갔다.
홀로 남은 도진이 무엇을 하나 뒤돌아보니,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고개를 든 도진은 현우를 향해 손을 흔
들어 주었다. 그 옆에는 점박이와 케로가 붙어 있었다.
선우는 도진보다 좀 더 능숙했다. 춤도 리드도 능숙해서 도진과 출 때보다 한결
편안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 자꾸 생각나는 건 도진의 얼굴이다.
“형, 무슨 생각 해?”
“우리 선우. 춤을 참 잘 추는구나, 하는 생각? 배운 거야?”
“조금.”
“조금이 아닌데?”
칭찬을 쏟아붓자 불퉁하던 선우의 얼굴이 평소대로 돌아왔다.
형도 잘하는데?”
“난 그냥 널 따라가는 거고.”
현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한 곡이 끝나도 선우는 만족할 줄 몰랐다. 어리광 많은
동생은 무려 세 곡을 추고 나서야 형을 놓아주었다.
슬슬 케이크를 자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음악 소리가 다시 나지막해지고, 홀의 불이 꺼졌다. 그러나 여기서 놀라는 사람
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미 순서를 알고 있기도 했거니와 대부분이 각성자다.
이 정도로는 동요할 리가 없었다.
“다음은 케이크 커팅식이 있겠습니다!”
이어 홀의 중앙에 선 둘의 위로 조명이 떨어져 내렸다.
“가자, 형.”
현우는 동생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
57.
파티를 즐기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왜, 왜 하필이면 가위바위보에 져서어!”
파티를 진행하는 중에도 포털은 열리고, 몬스터는 쏟아진다. 그렇기 때문에 만
약을 대비해 길드 내에 남아 있어야 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는 2팀과 6팀으로
결정되었다.
상위권 팀에서 1팀, 그 아래 중간권에서 1팀을 뽑아낸 것이다.
울지 마세요, 팀장님.”
“하지만 왜 하필! 원래 가위바위보 잘하는데! 이럴 때 져서!”
“운명이죠.”
부팀장은 허탈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금쯤 파티장은 한창 즐겁겠
지.
“선우 니이임!”
부팀장의 행동에 팀장은 다시 울부짖었다.
기본적으로 선현 길드에 들어온 이들은 비슷했다. 누구보다 강한 지선우를 동
경했다. 물론 대기업에 입사하고 싶단 생각으로 들어온 자가 없는 것도 아니었
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 생각을 달리하게 된다.
단 한 번이라도 지선우가 싸우는 모습을 보면 매료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렇
기에 2팀의 팀장인 레나가 우는 것도 부팀장은 충분히 이해했다.
“오늘 열리는 포털도 없을 거라고 했는데. 에효. 그냥 파티장에 달려가고 싶다.”
레나가 책상에 뺨을 대고 중얼거리는데, 갑자기 날카로운 알림이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레나는 벌떡 몸을 세웠고, 부팀장은 빠르게 가까운 데 위치한
버튼을 눌렀다.
─ 명동에서 거대한 포털이 열릴 조짐이 보입니다! 계측 결과, 방출형 게이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선현 길드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레나는 빠르게 일어서며 말했다.
“가자!”
“
언제 늘어져 있었냐는 듯 무기를 챙기고 입고 있는 방어구를 점검한다. 그리고
막 나서려는 순간, 또다시 알림이 들려왔다.
─ 게이트가 열렸습니다! 현재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는 중입니다. 위치는 강남!
빠른 도움 요청합니다!
갑작스러운 요청에도 레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대기하고 있는 팀은 더 있었으
니까. 하지만 알림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 게이트가 열릴 기미를 보입니다. 위치는 은평! 아니, 은평뿐만이 아닙니다!
지금 동시다발적으로 게이트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만 열 군데, 지방까지 합하면 그 수가 어마어마하다. 게다가 하나같이
방출형인 게이트였다. 레나와 부팀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길드장님께 연락 넣어! 나는 일단 가까운 곳부터 가 본다!”
요청이 들어온 곳은 선현 길드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길드들도 미친 듯이 울리
는 요청에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평소라면 충분했을 수였지만, 갑자기 다발
적으로 열린 게이트, 그리고 미처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 여러모로 최악의 조건
이 되어 가고 있었다.
*
저거 뭐야?”
갑자기 강남 한복판에 모습을 드러낸 괴이쩍은 원형의 입구에 사람들은 그 자
리에 멈춰 섰다.
“포털 아닌가?”
“
그게 왜 여기 열려? 오늘은 경고도 없었잖아.”
보기 드물게 포털 경고가 없는 날이었다.
“그러게?”
만약에 포털이 열린다면 미리 공지하고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했을 텐데. 포털
주위를 지키는 각성자도 보이지 않는다. 철없는 몇몇은 이미 그 주위에 서서 사
진이나 동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5분 뒤, 시내 한복판에 지옥
이 열렸다.
크르르륵.
입구에서 가장 먼저 튀어나온 것은 검붉은색의 늑대였다. 송아지만 한 크기의
늑대가 튀어나오자 근처에서 동영상을 찍던 사람이 굳어 버렸다. 늑대는 그런
좋은 기회를 마다하지 않고 곧바로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으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는 남자의 목덜미를 누군가 잡아당겼다. 마침 근처에서 데이트를
하던 각성자였다. 남자에게는 운이 좋았지만, 각성자에게는 나빴다. 각성 등급
이 높지 않았던 탓이었다.
“빨리 도망치세요!”
그런데도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지금 그가 도망치면 대부분의 사람이 죽게 될
것이다. 사람은 늑대의 달리는 속도를 이겨 내지 못한다.
‘하필 무기도 없는데.’
그는 한숨을 내쉬며 늑대 앞을 가로막았다.
“
빨리, 빨리 511에 전화하세요!”
포털, 몬스터가 나타날 시 긴급으로 신고하는 번호였다. 그제야 사람들이 허둥
지둥 휴대폰을 들었다.
“조금만, 조금만 버티자.”
가장 가까운 길드는 선현 길드다. 빠르게 이동하면 금방 도착할 것이다. 각성자
는 새하얘진 얼굴로 포털을 바라보았다.
“
*
케이크는 현우가 고르고 골라 준비한 것이었다. 어떻게든 기억에 남는 생일을
치러 주고 싶어서 고른 하얗고 커다란 케이크는 조명 아래 빛났다.
“초에 불을 붙이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현우는 초 하나하나에 불을 붙여 나갔다. 이제 겨우 22살. 지나온
세월보다 남은 세월이 많은 동생이 앞으로 계속 행복했으면 했다.
‘이제 마지막 초만 남았네.’
여기에만 불을 붙이면, 끝이다. 시큰해져 오는 눈가를 꾹 누르고 마지막 초를 향
해 라이터를 가져다 댔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파티장을 내리누르는 거대한 힘
이 느껴졌다.
쿵.
어디선가 묵직한 것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장의 샹들리에가 미친 듯
이 흔들리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그리고 이어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몇몇 사람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고, 이어 다른 이들도 그와 비슷한 행
동을 보였다.
마찬가지로 찬영 또한 휴대폰을 받더니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전국에 동시다발적으로 게이트가 열렸다고 합니다.”
그 말이면 충분했다. 선우는 앞으로 나서 말했다.
“오늘 파티는 취소합니다.”
“아, 젠장.”
혜선이 머리를 긁적이며 앞으로 나섰다.
“보아하니 다들 같은 소식을 받은 모양이네.”
그 말에 가준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대기팀이 전부 출동했다는군요.”
“우리도. 그쪽은 어때?”
혜선의 물음에 자윤이 답했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도 전력이 부족하다고?”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일단 호위 인력은 전부 돌려보내야겠네.”
저도 그래야겠습니다.”
혜선의 옆에 선 가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재킷에 손을 넣어 독이 든 병을 꺼냈다.
“야, 너는 파티에 뭔 독을 그렇게 많이 들고 왔어?”
“혹시나 지선우와 싸울지도 모르는 노릇 아닙니까?”
“남 생일에 깽판 치려고? 독사 같은 놈일세.”
“뭘 새삼스럽게. 그래도 다행 아닙니까? 제가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어서.”
“그도 그렇지.”
혜선이 자신의 공간 팔찌에서 방패를 꺼내 들었다. 이어 자윤도 전투 준비를 하
며 자신의 여동생에게 말했다.
“아윤아, 너도 다른 사람들 따라서 나가. 최대한 여기서 멀리 떨어져.”
아윤은 벌벌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일반인인 그녀
도, 이건 알 수 있었다. 곧 여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 지금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미루어 보면 아마 여기도 게이트가 열리려는 거겠지.
“많이, 많이 위험한 거야?”
“조금.”
자윤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조금이 아니다. 느껴지는 기운이 점점 더 강
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체 이 힘은 어디까지 올라가려는 건가. 불안한 예감
이 들었다.
그랬기에 파티장에서 상대적으로 급이 낮은 각성자들은 죄다 밖으로 내보냈다.
“
저는 남겠습니다!”
몇몇 사람이 남겠다고 했지만, 길드장들이 거절했다.
“지금 밖도 심각해. 조금이라도 전력이 필요하다. 여기는 우리들에게 맡겨.”
그렇게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나니, 텅 빈 파티장에 남은 사람은 채 열이 되지
않았다. 국내 5위권 이내 길드의 길드장들, 그리고 러시아의 이반, 일본의 준이
치, 미국의 레온.
“그쪽도 나가도 될 것 같은데.”
가준이 이죽거렸으나,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지켜보면 안 됩니까?”
준이치가 담담하게 물었다.
“안 되지. 재수 없게 어디서 보고 있으려고. 딱히 도울 생각도 없잖아?”
“그야 그렇습니다만.”
도우려고 해도 나라 간의 여러 가지 일 때문에 걸리는 게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곳을 나가고 싶진 않았다. 무언가 굉장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런 예감
이 들었으니까.
“나도 안 나갈 건데.”
옆에서 감시하던 눈길이 사라지자, 이반은 태연하게 반말을 내뱉으며 준이치의
말에 동의했다.
“후, 재수 없는 놈들. 그럼 그쪽은?”
“
가준은 애써 욕을 참으며 레온에게도 물었다.
“한국과 미국은 오랜 동맹국입니다. 도울 수 있으면 돕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레온은 그나마 낫다. 하지만 다른 둘의 대답은 마음에 들지 않는지라 혜선이 미
간을 구기며 투덜거렸다.
“우리가 구경거리인가?”
“그런데 누님, 일단 여기에 S급 각성자만 다섯 아닙니까?”
외국인들은 빼고 계산했다.
“그렇지.”
“그런데 저희가 여기 다 있을 필요가 있을까요?”
“알면서 왜 이래?”
혜선이 가준의 등을 툭 쳤다.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 않다. S급 각성자인 그들
의 등에도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야 그렇지만.”
“그럼 얌전히 기다려. 봐, 게이트가 열린다.”
허공에 작게 생겨난 균열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사람 머리만 균열이 순식간
에 자동차가 통과할 만한 크기가 되고, 그로도 모자라서 덩치를 더욱더 불려 나
갔다.
“형. 형도 나가.”
선우는 아직 남아 있던 찬영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찬영은 서슴없이 나서 현
우를 쌀 포대처럼 안아 들었다.
“뭐? 야! 잠깐!”
현우가 몸을 빼려고 했지만, 찬영이 단단히 틀어잡더니 달리기 시작했다.
“키르륵!”
포털이 나타나는 순간부터 내내 목을 울리던 점박이와 케로가 그 뒤를 따르려
했으나, 현우가 손을 내저었다.
“너넨 거기 있어! 선우, 선우를 지켜!”
순식간에 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크게만 보이던 파티장이 점점 작아졌다.
먼저 떠났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찬영은 멈추지 않았다.
58.
계속 달리던 찬영이 멈춘 것은 앞서 나간 일행 중에 아윤과 선현 길드 사람들을
발견한 뒤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현우를 내팽개치듯 내려놓은 찬영이 뒤돌아섰다. 본인은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
갈 셈인 듯했다. 바닥에 내려선 현우가 그에게 손을 뻗었지만, 이미 그는 저 멀
리 달려가고 있었다.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 거지.’
현우는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트리며 왔던 방향을 바라보았다. 지금 저
기에 지구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강렬한 힘이 도래하고 있었다.
돌아가야 해.’
동생만 저런 곳에 남겨 둘 수 없었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현우에게는 그저
하나뿐인 동생이다. 그 생각을 하며 발을 앞으로 내딛는데 누군가가 그의 팔을
잡아 왔다.
“안 돼요.”
아윤이었다.
“저희는 물러서 있는 게 도와주는 거예요.”
아니다. 힘만 제대로 발휘한다면 현우가 곁에 있는 게 훨씬 도움이 된다. 그동안
여러 이유로 힘을 내보이지 않았지만, 이제는 됐다. 동생이 더 중요하니까.
현우는 아윤의 손을 떼어 놓고 성큼성큼 앞으로 향했다.
“안 됩니다!”
선현 길드의 사람들이 앞을 가로막았으나, 현우를 잡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빠
른 것 같지도 않은데 교묘하게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간다. 다른 각성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체력이 달리는 테이머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돌아와요!”
뒤에서 아윤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하고 달렸다. 한동안 사용하지 않아
무겁던 몸이 점차 가벼워졌다. 되돌아가던 찬영을 따라잡는 것도 금방이었다.
인기척에 뒤돌아본 찬영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왜 따라옵니까!”
‘
동생을 어떻게 혼자 둬요!”
“혼자가 아닙니다! 돌아가세요.”
찬영이 멈춰 서서는 다시 한번 현우를 가로막았다.
“당신이 있으면 길드장님도 신경이 쓰여서 제대로 싸우지 못합니다!”
이 사람은 왜 제대로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할까. 찬영은 솟아오르는 화를 내리누
르며 파티장과 현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길드장을 도와
야 하는데, 되돌아오다니.
도로 보내고 오면 시간을 맞출 수 있을까. 이를 악물고 고민하던 찬영은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아니, 다시 떼어 놓고 오기엔 시간이 촉박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는 근처에 있는 커다란 벽 뒤로 현우를 밀어 넣으며 말했다.
“죽기 싫으면 여기서 움직이지 마십시오.”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현우가 피닉스의 수호를 가지고 있는 건 찬영도 알고 있
었다. 그 아이템은 상대방의 공격의 크기와 상관없이 무조건 3회를 막는다. 그
거라면 현우를 혼자 둬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그렇게 말한 찬영은 몸을 돌렸다.
그 사이 파티장을 한계까지 내리누르던 힘이 개화했다. 무시무시한 크기로 불
어난 균열은 파티장을 거의 다 무너트리고 나서야 확장을 멈췄다.
그리고 지금까지 느껴지던 힘의 주인, 그 주인이 균열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크르릉.
짐승이 목을 울렸다. 그저 그뿐이었는데도 등줄기로 오싹 소름이 돋는다. 가장
먼저 튀어나온 건 길쭉한 주둥이였다. 반짝이는 까만 비늘로 덮인 입이 벌어지
자 보기에도 괴악한 이빨이 드러났다. 이어 기다란 혀가 날름 허공을 훑고 들어
가더니 포효하기 시작한다.
크롸롸롸롸!
그 소리에 점박이는 긴장한 듯, 꼬리를 바짝 세웠다. 얼핏 보면 점박이의 원래
모습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저건 자신과 종이 다르다. 절로 몸이 굽어 가며 식은
땀이 흘렀다.
그나마 나은 건 케로였다. 케로는 어느새 본 모습으로 돌아가 네 다리로 단단히
땅을 디디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상대였다. 케로나 점박이가 전력을 다해도 이길 수 있을지 알 수 없
다.
그걸 느낀 건 여기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내내 멀쩡한 기둥에 몸을 기대
고 바라보기만 하던 준이치가 검을 잡았다. 이반의 손에서도 불꽃이 피어오르
기 시작했으며, 레온 또한 전투 준비에 나섰다.
“와아, 미치겠네.”
탱커인 혜선이 방패를 가지고 가장 앞에 나서자, 자윤이 바람을 조종하기 시작
했다. 가준은 거기다 독을 풀어 버렸다.
“네 쫄따구는?”
가준이 물어보기 무섭게 찬영이 안으로 뛰어들어 와 선우의 옆에 섰다.
뭐 대충 준비된 것 같네.”
준비된 건 그들만이 아닌 것 같았지만. 긴장을 풀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어느덧 짐승의 머리가 게이트 바깥으로 나왔다. 이어 목이, 단단한 가슴팍이, 날
카로운 발톱이 달린 앞발이 나왔다.
“진짜 드래곤인가?”
가준의 말에 다른 이들이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점박이에게 블랙 드래곤이라는
개체명이 붙긴 했지만, 아무래도 진짜 드래곤은 저쪽인 것 같았다.
“끔찍하네.”
혜선은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잘하면 여기가 무덤이 되겠는데.’
갑자기 저런 끔찍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낼 게 뭐람. 여기 있는 인원들의 면면을
보면 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 자신은 어찌 될지 몰랐다. 일단 방패를 든 그녀가
가장 앞에 나설 게 뻔했으니까.
‘그렇다고 도망갈 순 없지.’
주먹을 쥐고 방패를 두드렸다. 혜선의 능력은 받는 데미지 감소, 그리고 근력 강
화다. 따로 도발 능력은 없었지만, 소란으로 주의를 끄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자, 여길 봐라.’
커다란 노란 눈이 혜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씨익 웃는다. 파충류의 얼굴
인데도 그를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 ,
느릿하게 빠져나오던 몸이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끝이 없을 것 같이 빠져나
오던 몸체가 마침내 모습을 다 드러냈다.
“저 크기는 사기 아닙니까?”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던 자윤이 말했다.
“사기네.”
“사기지.”
가준과 혜선이 대답했다.
반면 선우는 침착하게 허공에 물방울을 띄워 올리고 있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무기였으나, 옆의 찬영이 힘을 불어넣는다면 더 무시무시해질 것이다.
키륵키륵키륵.
몸을 전부 빼낸 드래곤이 기이한 소리를 냈다. 웃음소리인 것 같았다. 점박이는
더욱더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케로는 그쯤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여
전히 드래곤은 그보다 강하게 느껴지고, 무섭다. 그런데 어쩐지 낯이 익다.
“크릉?”
왜 낯이 익을까. 케로가 눈을 가늘게 뜨는데 드래곤이 먼저 공격을 해 왔다. 단
독주택만 한 크기의 몸을 돌리며 꼬리를 휘두르자,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났다.
가장 먼저 혜선이 그를 막아 내고, 이어 공격이 가해졌다.
전격을 머금은 물의 채찍이 몸을 휘감고, 바람에 섞인 독이 주변을 맴돌았다.
“질 수 없지.”
이반이 손에서 피워 올린 불꽃을 드래곤에게 쏟아내고, 준이치와 레온이 검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덩치가 너무 크고 단단해서 비늘을 뚫기는 쉽지 않았지만,
최선을 다해 움직였다.
전격이 튀고, 얼음이 폭파하며, 그 자리에 떨어진 불꽃이 모든 것을 태울 듯 날
름거렸다. 보기에 장관인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걸 드래곤은 움직이지도
않고서 고스란히 맞았다. 무사할 것 같지 않았다.
“해치웠나?”
가준이 긴장한 표정으로 그런 말을 내뱉자, 혜선이 눈을 세모꼴로 뜨며 말했다.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
“왜요?”
“그건 필패하는 마법의 단어라고!”
“그런 게 어딨습니까?”
“여기 있지!”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드래곤은 멀쩡하게 몸을 일으켰다.
“너 때문이야!”
혜선은 그렇게 말하며 재차 떨어지는 드래곤의 꼬리를 막아 냈다. 어찌나 묵직
한지 절로 몸이 뒤로 밀린다. 그렇게 공격을 쏟아 부었는데 비늘만 좀 그슬렸을
뿐 큰 상처가 없다.
공략법이라도 있으면 좋은데, 생전 처음 보는 몬스터였다.
건물이 무너진 공터 위로 수많은 힘이 쏟아져 내렸다. 그중 단연 눈에 띄는 건
선우의 능력이었고, 그다음은 케로였다. 세 개의 머리에서 쏟아져 나오는 화염
은 이반의 능력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크르륵.
처음에는 귀찮다는 듯이 대응하던 드래곤의 동작이 서서히 어지러워지기 시작
했다. 보아하니 전투에는 그리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패턴이 단순하다.
캬오오오!
그쯤 되니 점박이도 용기가 생겼는지, 공격을 보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게
드래곤의 화를 돋우었다.
‘감히, 감히!’
마계에서는 피해 다니기만 하던 드레이크가 덤벼드니 부아가 치민다. 드래곤의
속이 부글부글 끓으며 입이 벌어졌다. 브레스를 쏠 셈이었다. 그러나 그걸 가만
보고 있을 이들이 아니었다.
공격이 쏟아지며, 혜선이 위치를 바꾸었다. 점박이가 머리에 달라붙었으며, 케
로가 혼신의 몸통 박치기를 하여 브레스의 방향을 바꾸어 냈다. 조마조마한 순
간이었다.
그리고 좀 떨어진 곳에서 끼어들 틈만을 노리며 그걸 보고 있던 현우는 문득 한
가지를 깨달았다.
‘저 드래곤 낯이 익은데?’
과거 현우가 마계에 살 적에 바이크가 셋 있었더랬다. 그중 1호가 처음 굴복시
킨 점박이요, 2호는 마계에만 서식하는 거대한 뱀이었으며, 3호는 그중에서 가
장 큰 드래곤이었다. 그래 봤자 어린놈이라서 다른 드래곤에 비하면 작은 편이
었지만.
현우는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그때 보았던 그 어린 드래곤의 크기를 좀 더 키워
보았다. 보통 해츨링 시기를 지나면 한 번에 확 자란다고 했지? 긴가민가하긴
하지만, 많이 닮기도 했고.
사실 블랙 드래곤은 그놈이 그놈 같았지만, 시도해 봐서 나쁠 건 없을 테니까.
현우는 슬금슬금 앞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은 싸우느라 바빠 그런 현우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바이크 3호의 이름이 뭐였더라.
“아! 기억났다.”
두눈박이.
점박이와 달리 딱히 생각나는 이름이 없어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을 잡아 이름
을 지어 주었다. 물론 대부분의 생물체가 눈이 두 개이긴 했지만, 걔가 유독 크
긴 했으니까.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다른 이가 그를 눈치챘다. 레온은 현우를 바라보곤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가 눈치채자 다른 이들도 현우를 알아차리는 덴 오래 걸리지
않았다.
59.
각성자들이 눈치챈 것을 몬스터라고 모를 리 없었다. 내내 적들을 바라보던 커
다란 눈동자가 데굴 굴러 새로 등장한 인간에게로 향했다.
샛노란 파충류의 눈이 길게 찢어졌다. 이어 거대한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익숙한 얼굴이다.’
과거 그의 어린 시절은 완벽했다. 그는 누구보다 강했으며, 무서운 존재였기 때
문이었다. 그 어떤 몬스터라도 감히 덤벼들지 못했고, 덤벼들더라도 한 끼 식사
가 되었을 뿐이다.
부모님은 세상에는 조심해야 할 존재란 게 있다고 했지만, 아직 그를 만나 본 적
이 없던 어린 드래곤은 의기양양하게 주변을 누볐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보다 유독 멀리 외출을 한 날이었다.
그는 희멀겋고 약해 보이는 특이한 생물을 발견했다.
‘아아, 저게 마족이란 것인가.’
단 한 번도 마족을 보지 못했기에 호기심이 들었다.
‘마족은 조심해야 한단다. 대부분은 우리보다 약하지만, 손가락 하나로 우리를
굴복시킬 수 있는 자도 있단다.’
그런 말을 들었지만, 눈앞의 존재는 손가락 하나로 드래곤을 굴복시킬 것처럼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태연하게 접근했다. 잡아다가 마족에 대해 연구도 좀 하
고 놀려 먹을 생각이었다.
‘그게 실수였지.’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낸 그를 본 마족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내뱉었다.
‘이건 또 뭐야.’
‘끼에에엑!’
‘
뭐긴, 위대한 드래곤이시다! 크게 소리친 그는 당당하게 마족에게 덤벼들었고,
이후 고통이란 단어를 이해했다. 죽도록 처맞았다는 소리였다. 평소에 자랑하
던 강인한 비늘도, 끈질긴 생명력도 그저 더 맞을 수 있도록 해 주는 비료에 불
과했다.
‘좋아, 넌 이제부터 바이크 3호. 이름은 두눈박이다.’
그렇게 위대한 블랙 드래곤 족의 하르모니아는 두눈박이가 되었다. 얻어맞고
너무 분해서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하기도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상대는
마계의 서열 1위와도 쌈박질을 하는 무시무시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마
족이 아닌 인간이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그 뒤로 한동안 지옥이었다. 부르면 부르는 대로 달려가 바이크가 되었다. 바이
크가 대체 뭐길래! 심지어 1호도, 2호도 아닌 3호였다!
‘내가 누군데!’
두눈박이는 분노에 떨었지만, 한번 잡힌 이상 벗어날 수 없었다. 앞으로도 인생
은 이렇겠구나. 내키는 대로 몬스터들을 패고 다니던 과거는 다시 돌아오지 않
으리라.
그렇게 생각할 때, 그가 사라졌다.
다시 활개를 치기 시작해도 그를 제지할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남은 것
은 행복뿐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 또 다른 존재를 만났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족이었다. 두눈박이는 치열하게 싸웠지만, 그 마족을 이길
수는 없었다. 부모님은 드래곤이 위대한 존재라고 말했는데, 왜 여기저기서 터
지기만 하는가. 억울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여기로 들어가라.’
승자인 마족이 원하는 것은 정체 모를 입구로 두눈박이가 들어가는 것이었다.
입구는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포털이었지만, 다소 마법적 소양이 떨어지는 두
눈박이는 그걸 알 수 없었다. 그저 밀리듯 그 안으로 들어설 수밖에.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포털을 통과하니 다른 세상이 나왔다. 심지어 그곳에는
사람이 많았다. 마족보다 강하던 무시무시한 사람 말이다!
두눈박이는 잠시 눈치를 봤다. 그러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예전에 만난 사람에
비해 약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 정도는 이길 만하다. 절로 히죽 웃음이 지어졌
다.
사람들이 공격을 퍼붓긴 했지만, 화려한 효과에 비해 크게 아프지도 않다.
‘좋아, 내 위엄 있는 모습을 보여 주도록 할까.’
두눈박이는 슬슬 포털에서 몸을 더 빼내었다. 되돌아가 봤자 만나는 건 그 마족
일 테니, 당분간은 여기 머무르는 것도 괜찮겠지.
그 생각이 깨진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새로 나타난 사람의 얼굴이 이상하
도록 눈에 익었다. 드래곤은 머리가 좋은 종족으로, 한 번 본 것은 쉽사리 잊지
않는다.
‘왜 당신이 여기 있어!’
두눈박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
는 여전히 눈앞에 서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두눈박이는 겁에 질린 표정
으로 슬슬 고개를 낮췄다. 그리고 바닥에 머리를 딱 붙이고 나서야 다시 눈을 데
굴데굴 굴렸다.
“형!”
그사이 싸우던 놈들 중에 제법 괜찮았던 놈 둘, 더 약한 놈 하나가 그에게 달라
붙었다.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몸을 의탁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 자신들을 보
호해 달라고 매달리는 모양이었다.
‘재수도 없지.’
두눈박이는 그대로 얌전하게 눈을 깜박였다. 복종의 표시였다.
형 왜 돌아온 거야! 미쳤어?”
선우가 무섭도록 화를 냈다.
“당장 나가십시오.”
도진은 현우의 손을 잡아당기며 자신의 품에 넣었다. 그리고 당장 이동하려 하
기에 현우가 다급하게 외쳤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기다리긴 뭘 기다립니까!”
도진도 평소와 다르게 잔뜩 긴장한 채 현우를 나무랐다.
“겁이 없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러면 안 됩니다.”
“저길, 저길 보세요!”
현우는 잽싸게 드래곤을 가리켜 보였다. 당당하게 몸을 들고 오만하게 주변을
내려다보던 드래곤이 얌전한 강아지처럼 몸을 낮추고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노란 눈을 굴리는데 그 모습이 기묘하게 순해 보인다. 공격 의사가 없어 보였다.
“ ,
쟤 왜 저러는데?”
잔뜩 긴장한 채 혜선이 말을 내뱉자, 가준이 받았다.
“모르겠습니다. 왜 저럴까요?”
“제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싸울 의사가 없어 보입니다.”
자윤이 말에 사람들도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전까지만 해도 사람
들을 찢어발길 듯이 노려보고 있었는데 말이다.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이유가 뭘
까? 고민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새로 나타난 현우에게로 향했다.
“형.”
선우가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그러더니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점박이와 비슷한 경우야?”
현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것 같은데?”
그 말은 다른 각성자들 귀에도 들어갔다. 이반과 준이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
고, 레온은 팔짱을 낀 채 몬스터와 현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테이밍이 가능한 겁니까?”
실상은 테이밍이 아니었지만, 현우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
게 앞으로 나섰다. 그 옆을 선우와 도진이 지켰다.
“두눈박이?”
“
이름을 부르자 몬스터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일단 나올 수 있나?”
그렇게 말하자 두눈박이가 슬며시 앞으로 몸을 빼내기 시작했다. 기다란 목, 단
단한 가슴팍, 이어 몸통이 이어지는데 상당히 길고 크다. 점박이와는 비교도 되
지 않는 덩치였다. 온전히 밖으로 빠져나온 몸에 파티장이 흔들렸다. 이대로 있
다가는 곧 무너질 것만 같았다.
“밖으로 나갈까요?”
현우의 말에 다들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파티장 밖으로 모두 나가자 두눈박이
가 몸을 쭉 폈다. 부서진 파티장과 조명을 배경으로 서 있는 그 모습은 마치 일
본 전대물의 괴물같이 보였다.
“고질라 같네.”
이반이 휘파람을 불며 하는 말에 준이치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
보았다.
“생긴 게 똑같단 소리는 아니고.”
“그 정도는 저도 압니다.”
두눈박이는 기지개를 켜고는 다시 몸을 낮췄다. 하는 행동이 잘 길든 개 같았다.
“몸 작게 할 수 있어?”
현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빛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 빛이 사라졌을 때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은 흑발에 노란 눈을 가진 미청년 한 명이었다.
이건 또 뜻밖의 일인지라. 현우는 멍하니 미청년을 바라보았다.
아니, 드래곤인 건 알고 있었지만.’
드래곤이면 성인이 된 뒤에 폴리모프가 가능하다. 다른 블랙 드래곤에 비해 몸
집도 작고 애가 덜 떨어져서 몰랐는데, 이제 성인이 되었구나. 현우는 나름 감탄
하며 재차 그의 이름을 불렀다.
“두눈박이?”
“네.”
말도 할 줄 안다.
“몬스터가 사람이 됐네?”
혜선은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으로 두눈박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만 보십시오, 누님.”
보다 못한 가준이 혜선의 눈을 가렸다.
“아, 왜! 몬스터잖아!”
“제 눈엔 벌거벗은 청년으로 보입니다. 우리 체통은 지킵시다.”
“제기랄.”
혜선은 투덜거리면서도 얌전히 눈을 가렸다.
“그나저나 이번 일은 특이한 케이스로 남겠군요.”
‘
자윤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몬스터가 등장하더니, 이젠 사람으로 변했다. 지금
이야 현우 덕분에 전투가 중단되었지만, 만약에 계속 싸웠다면 어떻게 됐을지
는 예측할 수 없었다.
“특이한 케이스기만 하겠냐.”
혜선은 한숨을 폭 내쉬더니 뒤돌아섰다.
60.
“
그럼 나는 이만 가 본다.”
“벌써요?”
“어차피 돌아가는 걸 보니 당장 손댈 일도 아닌 것 같고, 다른 지역이나 도
와주러 가야지.”
S급 각성자 하나가 뛰어다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 자신
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비열한 짓도 마다치 않지만, 한편으로는 정의로운 면
도 있다. 그렇기에 혜선이 자신의 길드원으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는 것이리
라.
“그럼 나도.”
가준도 손을 들고 물러섰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달라붙어서 몬스터에 대
한 지분이라도 주장하고 싶었지만, 통하지 않겠지.
무엇보다 지금까지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저 두눈박이란 녀석도 점박이나
케로처럼 현우의 힘이 될 것이다. 뭐, 두눈박이가 마음을 바꿔 먹고 인간을
공격할 수도 있겠지만, 현우가 곁에 있으니까. 가준은 현우의 힘을 알고 있
었다.
‘괴물 곁에는 괴물만 모여드는가.’
끔찍하다. 가준은 혜선을 따라 바깥으로 몸을 움직였다. 좀 더 걸어 나가면
멀쩡한 차가 있을 테고, 그를 잡아타고 움직일 생각이었다.
“같이 가도록 하죠.”
자윤도 그들에게 합류했다.
남은 이는 선우와 도진, 현우, 찬영. 그리고 외국인 세 명뿐이었다. 몬스터
가 사라지자 멀리 서 있던 사람들이 서서히 접근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저희도 빨리 움직이는 게 낫겠군요.”
도진이 그리 말하며 현우를 감싸 안았다.
“일단, 형은 나랑 움직이자.”
선우라고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다른 길드장들처럼 움직여야 했는데,
형을 놔두고 가기엔 너무 불안했다. 지금 당장은 가만히 있지만, 몬스터가
변심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럼 저도 같이 움직이겠습니다.”
선우는 그를 거절하지 않았다. 두눈박이의 힘을 확실하게 느꼈으므로. 여차
하면 하나보다는 둘이 나을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나도 따라가도 됩니까?”
이반이 은근슬쩍 붙으려 했다.
“대가 없이 말입니까?”
“보아하니 전국이 난리인 것 같은데 힘을 보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반이 귓가의 통역 기기를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통역 외에 통신의 기능
도 있으니 여러 가지를 전해 듣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됩니까?”
“안 될 건 뭡니까? 러시아는 한국의 친구죠.”
뻔뻔스럽다. 하지만 같이 가면 도움이 되리란 건 확실했다.
“저도 가겠습니다.”
레온도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둘이 합류하자 준이치도 미간을 찌푸리며 말
했다.
“저도 돕겠습니다.”
일본과 한국의 관계를 생각하면 물러날 것도 같았지만, 그보다는 두눈박이
가 더 궁금한 모양이었다.
“좋습니다.”
선우는 그들의 도움을 거절하지 않았다. 이용할 수 있다면 이용하는 게 맞
았으니까.
“그럼 일단 옷부터 입혀야겠는데.”
현우가 두눈박이를 보며 말했다.
“옷은 못 만들어?”
“아직.”
“그렇구나. 그럼 이거 입어.”
“
재킷을 벗어 주었으나 턱없이 작다. 키만 2미터가 넘어 보였으니 당연한 일
이었다.
“더 못 줄이나?”
“무리.”
이번에는 도진이 나서서 재킷을 벗어 주었다. 그의 옷은 덩치가 있어서인지
생각보다 잘 맞았다. 문제는 하의였는데. 그건 일단 굴러다니는 찢어진 커
튼을 묶어서 가려 주었다.
“이상한 모습이네.”
“옷은 따로 가져오라고 할게.”
그전까지만 이런 모습으로 버티면 될 듯했다. 찬영이 다른 길드원에게 연락
을 넣고, 남은 이들은 조금 걸어 차를 타고 이동했다.
차에 탄 채로 방송을 틀자 대국민방송이 흘러나왔다. 어느 채널이나 마찬가
지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현재 전국적으로 게이트형 포털이 동시다발적으로 열렸습니다. 시민 여
러분은 집에서 나가지 마시고 문단속을 단단히 해 주십시오. 밖에 계시는
분은 가까운 대피소로 대피해 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그래도 도심에서 터진 게이트는 낫다. 길드가 도심에 몰려 있어 출동이 빠
른 편이었으니까. 문제가 되는 곳은 외진 곳에 있는 지역이었다. 그런 곳은
길드와도 거리가 멀었고, 대기하고 있는 각성자가 없는 곳도 흔했다.
정부에서 헬기를 지원한답니다.”
정부에서도 발 빠르게 나서고 있었지만, 각성자들로서는 선뜻 나서기도 어
려웠다. 비행형 몬스터라도 만나면 헬기에서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으니
까. 헬기로 이동하려면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각성자를 반드시 태워야 했
다.
“긴 밤이 되겠군요.”
그 말대로였다. 그날 밤은 여기저기서 터진 게이트형 포털 때문에 모두 잠
들지 못했다. 간신히 급한 게이트를 정리했을 때는 이미 하루가 꼬박 지나
간 상태였다.
“와나, 씨발!”
이동하던 중간에 한 번 마주친 혜선은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아무리 각성
자가 체력이 튼튼한 편이라고 해도 한계는 존재한다. 그런데 하루 동안 잠
도 자지 않고 내내 싸웠으니 지치는 것도 당연했다. 문제는 그래도 아직 끝
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한국은 처음 포털이 열린 곳이라서 그런지, 좁은 땅에 비해 각성자들의 수
가 많고 강하다. 그들이 전부 나서서 간신히 사태가 더 악화되는 건 막았으
나, 아직도 깊은 산속에서는 풀려난 몬스터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모든 걸 해결할 때까지는 쪽잠을 자면서 뛰는 수밖에 없었다.
“듣자 하니 외국에서는 이런 일이 없는 모양입니다.”
“왜 한국만 이 지랄이냐!”
“
그러게 말입니다. 그 때문에 외국에서는 관심이 많은 모양입니다만.”
“자기네들도 같은 일 생길까 봐 지레 겁먹은 거지.”
혜선과 가준이 주거니 받거니 정보를 털어놓았다. 그는 이미 선우도 아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과의 이야기가 도움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
었다.
“그런데 이런 소문도 있습니다.”
그 사이에 자윤이 불쑥 끼어들었다.
“뭡니까?”
“이번 포털이 자연발생적인 게 아닐 수도 있단 이야깁니다.”
요람 길드는 유독 정보에 밝았다. 그 말에 길드장들의 표정이 구겨졌다.
“목격자가 몇 있습니다. 포털이 열린 자리에서 이상한 짓을 하는 사람을 봤
다더군요.”
“이 와중에 정보도 찾아봤어? 대단하네.”
혜선이 감탄사를 내뱉자, 자윤이 당연하다는 듯이 씩 웃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포털 열리는 기준을 아직도 명확히 정의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이번 일은 좀 그렇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지선우 씨. 같이 다니던 외국인 3인은 어디 갔어?”
“
근처 게이트로 보내 놨습니다.”
“와우, 찰싹 달라붙어 다니지 않았어?”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적당히 달래서 근처 게이트로 나눠 보냈다. 이 정도 힘을 가진 S급 각성자
가 몰려다니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낭비다.
“그럼 그 몬스터는?”
그러자 내내 평온하던 선우의 표정에 금이 갔다. 두눈박이라고 불리던 몬스
터는 어느새 형에게 두눈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래도 사람 모양인데 두눈박이는 좀 그렇잖아?”
그게 이유였다.
“두눈 좋다.”
좋긴 뭐가 좋단 말인가. 선우는 두눈을 볼 때마다 속이 들끓었다. 그를 못마
땅하게 여기는 건 도진도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사람으로 변한 뒤 내내
현우에게 붙어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우!”
이름까지 불러가면서 말이다. 몬스터 주제에. 선우의 입가가 삐뚜름하게 올
라갔다.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
지금도 두눈은 현우와 함께 있다. 도진이 곁에 있긴 하지만 안심할 수 없었
기에 오래 이야기할 틈이 없었다.
“어어, 그래. 우리 힘내자!”
혜선의 파이팅을 마지막으로 그들과 헤어진 선우는 가까이 설치된 막사로
돌아갔다. 그 안에는 현우가 도진의 허벅지를 베고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배 위에는 점박이가 찰싹 붙어 있었다.
케로는 괜찮은데 점박이는 새로 나타난 몬스터가 두려운지 유독 현우에게
더 붙어 다녔다.
“어, 왔어?”
“응.”
“다음은 어디래?”
“강원도 횡성.”
“또 헬기?”
“응. 곧 보낸대.”
“그럼 너도 조금 쉬어.”
현우는 일어나며 선우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자신이 누워 있던 침대
위에 눕혀 주려 하였다. 그 모습에 도진은 자연스럽게 옆으로 빠졌다. 선우
도 도진의 허벅지를 베고 잘 생각은 없었다.
이거 맛있어!”
그때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로운 몬스터 두눈이었다. 그는
손에 커다란 과자 봉지를 들고 있었는데, 기름 범벅이 된 손으로 열심히 먹
어 치우고 있었다.
보면 묘하게 순수해 보이는 구석이 있다. 그래도 마음에는 안 들었지만. 선
우는 현우의 허벅지를 베고 잠시 눈을 감았다.
이마를 쓸어 주는 손에 기분이 나아졌다.
“그러고 보니 생일을 제대로 못 치렀네.”
“괜찮아.”
“난 괜찮지 않아. 하필이면 이때 포털이 열려서.”
현우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형과 같이 있으면 그걸로 만족해.”
“그래도.”
“아니면 이번 일이 끝나면 다시 할까?”
“그것도 괜찮지.”
“일단 자자.”
현우는 선우의 눈가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
61.
오랜 시간을 자지는 못했다. 아직도 전국적으로는 도움을 요청하는 지역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선우는 눈을 뜨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과 몬스터
들은 졸고 있었고, 깨어 있는 이는 도진뿐이었다.
“슬슬 깨우셔야 할 것 같습니다.”
더 재우고 싶은데, 여건이 따라 주질 않는다. 선우는 앉아서 졸고 있는 현우
의 어깨를 흔들었다.
“형, 이제 일어나야 해.”
“일어났어. 일어났어. 그런데 넌 좀 잤어?”
현우가 하품을 하며 선우에게 물었다.
“응, 잘 잤어.”
“더 자야 하는데.”
아쉬운 듯 말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는 상황이란 걸 둘 다 알고 있
었다.
“헬기가 도착했습니다!”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고 선우와 현우, 도진은 밖으로 나갔다. 가장 먼저
현우가 헬기에 올라타고 몬스터와 선우가 올라타자, 뒤늦게까지 남아 있던
도진이 말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같이 안 가요?”
“네, 당분간은 떨어져서 다녀야 할 것 같습니다.”
도진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 상황을 생각하면 이해 못 할 상
황은 아니었다. S급 각성자는 대부분 몬스터보다 강하다. 그런 이들이 여럿
붙어 있는 것보다는 각자 떨어져서 다니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될 터였다.
“그럼 나중에 다시 만나죠.”
이어 도진은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다가 말을 꺼냈다.
“다음에 만날 땐 형이라 불러 주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헬기의 문이 닫혔다.
‘어. 어?’
나중에야 말의 의미를 이해한 현우의 표정이 멍해졌다.
“형은 무슨 형.”
선우가 기분 나쁘다는 듯이 투덜거렸지만, 그 말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헬기는 허공에 떴고, 강원도 횡성을 향해 날아갔다.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횡성 읍장이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도심을 우선으로 각성자를 파견한
탓에 횡성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황급히 대피시켜 인명 피해는 크지 않았
지만, 방치된 시간만큼 몬스터가 흩어졌다. 원래 이 지역에 살던 각성자들
“
이 샅샅이 수색하고 있긴 했지만, 원래 수가 적은 데다 팀을 이루어야 했기
에 효율적이지 못했다.
“그럼 우리도 흩어져야겠네.”
횡성읍 근처의 지도를 보던 현우가 말했다.
“안 돼.”
곧바로 부정적인 답변이 돌아왔으나, 현우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 상황에 S
급 각성자가 자신과 붙어 다니는 것은 낭비였다. 그렇기에 처음으로 선우의
보호를 거절했다.
“케로랑 점박이, 그리도 얘가 있으니까 괜찮아.”
현우는 두눈을 가리켜 보였다.
“아직 안정성을 입증하지 못했어.”
“괜찮다니까. 얘는 나를 해치지 못해.”
왜냐하면 현우가 더 강하기 때문이었다. 현우가 눈짓을 하자 과자 봉지를
끌어안고 있던 두눈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즈가 맞는 옷을 구해다 입혀
놓았더니 겉보기에는 멀쩡한 미청년처럼 보인다. 과자에 집착하는 면이 다
소 애 같긴 했지만.
“그걸 어떻게 장담해.”
“지금까지 얌전했잖아.”
그렇게까지 말해도 선우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현우도 한 고집을 하는
지라, 결국은 싸움까지 번졌다. 읍장이 물러난 자리, 둘 사이로 찬바람이 감
돌았다.
“왜 말을 안 듣는데!”
“위험하니까.”
“점박이랑 케로가 있다고 했잖아! 그리고 다른 사람이 이러는 걸 보면 뭐라
고 생각하겠어.”
“다른 사람의 생각은 중요치 않아.”
“중요해!”
선우는 지금까지 현우와 떨어져 지냈다. 그 때문에 생기는 불안감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지만, 정도가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아무리 게으르고 일
하기 싫어하는 현우라도 현재의 심각성은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다.
일손이 부족하다. 여기서는 흩어지는 게 맞는데, 문제는 동생이 현우를 놔
주기 싫어하고 있었다.
“흩어져!”
현우는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돼.”
둘은 고집스럽게 서로를 노려보았다.
“형.”
선우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는 형이 걱정돼. 이러다 형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를 원망하게 될 거
야.”
애처롭게 말해 오는 동생을 바라보니, 마음이 흔들려 왔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지금 현우는 훌륭한 전력이다. 그런 그가 같이 다니는
것이 오히려 선우의 평판에는 나쁘게 작용할 수 있었다.
“그럴 일은 없어.”
“또 드래곤 같은 존재가 나타나면 어떡해.”
“두눈이 있잖아.”
“더 강한 존재가 나타나면.”
“선우야. 그럴 일 없는 거 알잖아.”
현우는 손을 뻗어 선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무사히 돌아올 거니까. 보내 줘.”
현우는 끈질기게 선우를 설득했다. 그리고 마침내 원하던 답을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
무전기 꼭 챙기고.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야 해. 마음 같아서는 다른 사람
이라도 붙여 주고 싶은데.”
선우는 끝까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멀어지는 현우를 바라보았다.
“너무 과보호가 심하다니까.”
현우는 투덜거리며 안내인 한 명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D급 각성자라
는 그녀는 텔레파시 사용이 가능한 이로, 전투에는 재능이 없다 하였다. 하
지만 특유의 능력을 사용하여 몬스터가 지나간 흔적은 귀신같이 찾는 사람
이었다.
“점박이랑 케로를 실물로 보다니 감격이네요!”
더불어 점박이와 케로의 골수팬이기도 했다. 그녀는 내내 점박이와 케로를
힐끔힐끔 바라보며 깊은 산속으로 현우를 안내했다.
“이쪽으로 일련의 몬스터 무리가 지나갔어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케로가 몸을 키워 나갔다. 커다래진 몸이 킁킁
거리며 흔적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아, 맞다. 생각해 보니 케로는 개였군요!”
수진은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정확히는 케로베로스가 종 이름이었지만, 겉
보기엔 개랑 비슷하게 생겼으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케로는 그대로 몬스터
무리를 따라잡았고, 붉은 황소를 닮은 몬스터들을 전부 구워 버렸다.
점박이가 나서기도 전의 일이었다. 이어 흔적을 찾는 일은 수진에게서 케로
에게로 넘어갔다.
“
너무 편하니까 어쩐지 다른 동료들에게 미안해지네요.”
수진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산길을 걷느라 본인도 고생하는데 남을 걱
정하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선량한 사람인 것 같았다. 현우는 씩 웃고는 소
소한 이야기를 해 가며 함께 움직였다.
그러기를 반나절쯤. 제법 깊은 어느 산속에서 현우는 익숙한 얼굴을 만났
다.
“어라?”
당신이 왜 여기 있어? 현우는 눈을 깜박이며 바로 앞에 선 남자를 살펴보았
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그 사람이 맞았다. 미국 가디언 길드의 레온.
“안녕하십니까?”
먼저 인사를 해 온 건 레온이었다.
“아직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나요?”
“네, 아직입니다. 동맹국이 피해를 입는 걸 외면할 수가 없어서요.”
말하는 것만 보면 정의로운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바로 옆에 서 있는 수
진은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슬며시 현우의 옷자락을 잡아당기
며 귓가에 속삭였다.
“갑자기 텔레파시가 전해지지 않아요. 이런 적은 없었는데.”
“그런가요?”
“
네 게다가 이 근방은 미리 경로가 겹치지 않도록 각성자들끼리 이야기를
끝내 놓은 상태예요. 타국의 각성자가 여기 있는 건 이상해요.”
현우는 수진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 고개를 바로 세웠다. 텔레파시가 전해지
지 않는 원인을 그는 알고 있었다. 레온을 만난 순간부터 텔레파시를 차단
하는 기운이 산을 덮어 나가기 시작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둘이 귓속말을 하는 도중에도 레온은 웃는 낯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딱히 공격하려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현우는 일단 그냥 넘어
가 보기로 하였다.
“그럼 저희는 저쪽으로 가 보겠습니다.”
그러면서 이동하려고 하니 레온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저쪽은 제가 해결하고 왔습니다. 그보다 잠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괜찮
으실까요?”
“저는 딱히 할 이야기가 없는데요.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선현 길드
를 통해서 전해 주십시오.”
“저도 그러고 싶지만, 그러면 중간에 가로막히지 않습니까?”
이건 할 말이 없다. 선우라면 그러고도 남을 테니까. 현우가 잠시 입을 다물
자 레온이 말을 이었다.
“당신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고는 수진에게로 손가락을 까닥 움직였다. 이어 그녀가 눈을 감으며 그
자리에서 스르르 쓰러졌다. 수작을 막을 수도 있었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
“ ,
었고 그녀가 잠드는 게 자신에게도 유리하기에 방치했다.
“크르르릉.”
케로베로스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이어 점박이도 불쾌한 듯 고개
를 흔들며 날개를 파닥였다.
“목숨에 지장은 없습니다. 그냥 잠시 기절시킨 것뿐이니까요.”
현우는 좀 더 편안한 태도로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목적이 뭡니까?”
“별것 아닙니다.”
레온이 한 손을 내밀며 말했다.
“저랑 손을 잡지 않으시겠습니까?”
“뭘 하는 줄 알고요?”
“당신에게도 나쁜 제의는 아닐 겁니다. 현우 씨. 저는 세계 평화를 지키고
싶습니다. 그 일에 당신이 필요합니다.”
“그런 것 치고 하는 짓은 악당 같은데요?”
그 말에 레온이 처음으로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때로는 정의를 위해서 굽혀야 하는 것도 있지요.”
그게 다른 각성자를 기절시키는 일이고요?”
“그녀에게는 충분히 보상하겠습니다. 이야기를 들어 주십시오.”
어디 말해 보라는 듯이 턱을 치켜들자, 레온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번에 한국에서 일어난 일로 미국도 포털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조사에 들
어갔습니다. 그리고 알게 되었죠. 인위적으로 포털을 여는 자가 있음을 말
입니다.”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죠?”
“아직 그에 대해는 아는 게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을 막아서야 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희는 인재가 더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그 첫
번째로 현우 씨를 영입하고자 합니다.”
“저는 평범한 테이머인데요?”
“그럴 리가요. 점박이, 케로도 대단하지만 그보다 위대한 존재를 손에 넣지
않았습니까?”
두눈박이. 레온이 접근한 건 두눈박이 때문이었다.
“
62.
레온의 목적을 알게 되니 마음이 편해졌다. 단단히 준비를 하고 나타난 것
같긴 하지만, 애초에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자라는 생각은 안 들었기 때문이
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만난 이 중에서 자신을 능가하는 이는 없었다.
인간이 아닌 마족까지 가면 자신만 한 강자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애초에 그
들은 이곳으로 넘어오질 못하니 예외다.
“거절합니다.”
그렇기에 태연하게 거절했다.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권력과 부를 가질 수 있는데도요?”
“딱히 필요 없어서요.”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들려오는 것이라고는 두눈이 과자를 와삭대는 소
리뿐이었다. 당연히 진지한 분위기가 될 리 없었다. 현우는 저도 모르게 손
을 들어 두눈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조용히 먹어!”
갑작스러운 행동에 두눈의 눈이 길게 찢어지며 부들부들 떨려 왔다. 그러나
그는 현우에게 대드는 대신 과자를 더 먹는 걸 택했다. 이번에는 오물대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뭐, 좋습니다. 싫다는 사람을 강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레온은 생각보다 순순히 물러났다. 대체 여기엔 왜 나타났는가 싶을 정도였
다. 현우는 수진을 데리고 자리를 떠나며 계속 주변을 경계했지만, 딱히 아
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상한 사람.’
싸우게 될 줄 알았는데. 현우는 입맛을 다시며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멀어져 작아진 현우를 보며 레온은 물었다.
“어때?”
“잘 모르겠습니다.”
소리는 허공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만나기만 하면 알아볼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그렇습니다만, 제가 아는 그와 너무 달라서요. 그라면 지금쯤 주먹을
쥐고 덤벼들었을 겁니다. 무엇보다 그는 테이머가 아닙니다.”
“흐음.”
레온은 손가락으로 턱을 톡톡 두드렸다.
“제가 한번 쫓아가서 감시해 볼까요?”
“아니, 됐다. 괜히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겠지. 그이건 아니건 어차피 언젠
가는 만나게 될 테니까.”
레온은 그대로 등을 돌려 걸어갔다. 외곽으로 빠져나가면 그를 위해 미리
준비된 헬기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럼 다음은 그 일이군요.”
“그래, 슬슬 세계 각성자 연합이 필요할 때가 되었지.”
지금까지는 각국의 이익 때문에 제대로 뭉치지 못했으니까요. 그런데 너무
뭉쳐도 안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럴 일은 없다. 설사 세계 각성자 연합이 생긴다고 해도, 각자 속내가 있
을 테니. 생각하는 것처럼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렇군요. 인간들이란 언제나 어리석습니다.”
“그러니 인간이겠지.”
레온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
*
시간이 어느 정도 소요되자, 게이트형 포털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들도 거진
정리되었다. 사람이 드문 곳에 숨어든 몬스터들은 아직 처리하지 못했지만,
그도 열심히 찾고 있으니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피해가 없
는 것은 아니었다.
대비하지 않고 있던 재난이기에 인명과 재산 피해가 제법 컸다. 각지에서
수습하기 위해 애쓰고 있긴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다른 나라는 한국을 주시하게 되었다. 갑자기 전국에 동시다발
적으로 열린 게이트형 포털이 자신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인식하
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한국은 국토가 작고 그에 비해 각성자가 많기에 어떻게든 해결되었
지만, 같은 일이 미국에서 일어난다면?
분명히 수습이 어려울 것이다. 그 때문에 지원을 대가로 한국에 조사원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조금이라도 아는 것이 늘어난다면 앞으로 다가올지 모
를 일을 막아 낼 수 있을 테니까.
더불어 새로운 조짐도 보이고 있었다.
세계 각성자 연합.
자국의 이익을 위해 각성자를 유출하지 않으려던 움직임을 멈추고, 세계적
으로 연합을 구축하자는 의견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 주축은 미국의 가디언
길드. 그 길드의 길드장 레온에게서 비롯되었다.
“지금이야말로 세계 각성자 연합이 필요합니다.”
그 말에 기자가 물었다.
“굳이 세계적인 연합을 만들지 않아도 지금까지 필요에 의해서 모이지 않았
습니까? 그걸 굳이 이름까지 걸고 만들 필요가 있습니까?”
“있지요. 필요에 의해서 모일 때, 저희가 어땠는지 아십니까? 자국의 이익
을 위해 정보를 감추고 서로의 힘을 가늠하려고 애썼습니다. 이기적이었단
소리지요. 하지만 계속 그렇게 해서는 세계의 평화를 지킬 수 없습니다. 그
렇기에 저는 과감하게 말하고자 합니다. 세계 각성자 연합은 필요합니다.”
레온은 말했다. 상대적으로 각성자가 적은 나라를 지원하며, 서로 정보를
공유한다. 이기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마음을 넓게 가지고 뭉치자.
처음에 사람들은 생각했다. 아무리 강대국인 미국이 추진하는 일이라도 원
한다고 해서 이뤄질 수는 없을 거라고. 그러나 한국, 러시아, 일본, 영국 등
다른 나라들이 합류를 약속하면서 상상은 현실이 되어 가고 있었다.
물론 다들 감춰진 속내가 있겠지만, 표면적으로는 일이 잘 굴러가는 듯했
다.
*
으아, 집이다아!”
현우는 만세를 부르며 집에 들어섰다. 미친 듯이 돌아다닌 결과, 현우는 자
신의 앞으로 배당된 일을 모두 해내었다. 여기까지 며칠이 걸렸는지 모른
다. 마지막에는 무리하게 움직인 탓에 수진이 반쯤 시체 같은 몰골이 되었
지만, 이제 쉬면 되니 괜찮을 것이다.
아직 선우와 도진이 돌아오지 않은 집은 썰렁하다. 듣기로는 새벽쯤에 돌아
올 거라고 했으니까, 아직 시간은 있다. 현우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몬스터
들을 밀어 넣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곁에는 마찬가지로 조금 더 일찍 들어
온 찬영이 붙어 있었다.
“너무 늦었나.”
헐레벌떡 가까운 제과점에 들렀으나, 이미 문을 닫았다.
“가까운 호텔을 수배해 볼까요.”
“그 사람들도 쉴 시간 아니에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돈이면 다 해결되지요.”
찬영이 속물적인 소리를 하는 사이, 현우의 눈에 가까운 편의점이 들어왔
다.
“
저기 한번 가 볼까요?”
편의점에서 조각 케이크를 팔던 게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냉장 코너에는 조각 케이크 두 조각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여럿인데 두 조각은 좀 부족하겠지.
현우는 케이크를 계산한 뒤, 다시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렇게 여러 군데의
편의점을 돌길 몇 시간. 마침내 케이크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조각 케
이크 모음이라 크기가 제각각이긴 했지만, 들쑥날쑥해도 일단은 원형이니
까!
초도 어찌어찌 구하고 나니 제법 케이크다워졌다.
“선물은 준비하신 겁니까?”
“원래 파티장에서 주려던 게 있어요.”
그때 두눈이 등장하는 바람에 주지 못했는데, 그걸 이제 주면 될 것 같았다.
생일 선물까지 꺼냈으나, 어딘가 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제 방에 크리스마스 전구가 있습니다.”
그게 왜 길드 내 방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조금은 분위기가 화사
해졌다. 그리고 그쯤에서 찬영은 빠졌다. 비록 일을 마치고 길드로 돌아왔
지만, 아직 해야 하는 서류가 많이 남아 있는 탓이었다.
‘그리고 길드장님은 가족과 파티를 하고 싶을 것 같으니까.’
나름 배려를 해 준 것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기다림뿐이었다. 현우는 두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케이크 앞에 앉아 동생을 기다렸다. 그러기를 얼마나
“
지났을까? 현관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선우였다.
삐리릭.
문이 열리며 익숙한 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녀왔어.”
현우는 미리 준비해 둔 축하의 말을 건넸다.
“생일 축하해!”
그와 동시에 잽싸게 버튼을 눌러 크리스마스 전구를 반짝이게 하였다. 막
입구에 들어서던 선우는 그 모든 걸 보고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이내 활짝 웃으며 안으로 들어서 케이크 앞에 섰다.
“잠시만!”
초에 불을 붙이고 들어 올리자 선우의 코앞에서 불빛이 일렁였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동생의 생일 축하합니다!”
박수와 함께 노래가 시작되자 구석에 숨어 있던 점박이와 케로가 튀어나와
빙글빙글 돌았다. 둘 다 어설프게 만든 뾰족한 생일 모자를 쓰고 있었다.
“왕, 왕왕!”
“키르르륵!”
다행히 두눈은 이 자리에 없었다. 과자 봉지를 쥐여 주고 다른 데 잠시 박아
두었다. 생일 파티를 시작하기도 전에 케이크를 먹으면 곤란하니까 말이다.
선우는 힘차게 촛불을 껐다.
“생일 축하해! 생일이 그렇게 끝나 버려서 이렇게라도 다시 축하해 주고 싶
었어.”
“고마워.”
선우의 입가에선 웃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모두 형이 준비한 거야?”
“찬영 씨의 도움도 좀 받았고.”
현우가 배시시 웃었다. 사실 사람을 더 초대해서 그럴싸한 파티를 준비하고
싶었지만, 다들 너무 바빠서 그냥 소박하게 하기로 했다. 선우도 그걸 더 좋
아할 것 같았고.
“그리고 이건 선물.”
현우는 선우에게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도진의 도움을 받아 고른 선물이었
다.
‘하지만 그건 말하면 안 되겠지.’
선우가 조심스럽게 포장을 뜯어 보니 그 사이에서 넥타이핀과 그 세트인 커
프스가 나왔다. 대단한 아이템이거나 엄청 비싼 명품도 아니었다. 하지만
선우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가슴 벅찬 선물이었다.
형
이 모든 것을 준비해 준 사람이 형이었기에.
“왕왕!”
“키르르륵.”
대충 분위기를 읽은 케로와 점박이가 얌전히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럼 케이크를 먹을까? 어느 것부터 먹을래? 종류별로 다 있어.”
“난 그럼 생크림 케이크.”
“그럼 난 초코로 먹어야지.”
현우는 미리 준비해 둔 접시 위에 케이크를 하나씩 올리고 포크를 건넸다.
비록 편의점 케이크이긴 했지만, 둘이 같이 먹어서 그런지 무척 맛있게 느
껴졌다.
“정말, 정말 고마워. 형.”
선우가 재차 고마움을 표시하자 현우가 쑥스러운 듯 웃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는걸.”
그렇다 해도 기대하지 않았던 생일 파티는 즐거웠다.
“다시 하기로 한 생일 파티는 건너뛰기로 하자.”
“ .”
그래도 돼?”
“응, 난 지금으로도 만족스럽고, 다시 파티를 하느니 그 돈으로 이번에 피해
입은 분들에게 기부하는 게 나을 것 같아.”
현우는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어쩜, 내 동생 너무 착해!’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케로가 케이크를 탐내며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지만,
감동받느라 그도 눈치채지 못했다. 결국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케이크
위로 선명하게 핥은 자국이 지나간 뒤였다.
“
63.
간만에 평화로운 밤이 지났다. 잠자리에서 일어난 선우는 거실에서 형이 준
선물을 내려다보며 히죽 웃었다. 형에게 종종 여러 가지를 받긴 했지만, 커
서 생일 선물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 의미가 컸다.
선우는 조심스럽게 넥타이핀과 커프스 버튼을 쓸어 보곤 자리에서 일어났
다. 당장 급한 일은 해결했지만, 산적한 문제는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 때
문에 이른 아침부터 회의가 예정되어 있어 참여를 위한 준비를 해야 했다.
그는 옷 방으로 들어가 평소보다 신중한 태도로 정장을 골라 들었다.
넥타이와 셔츠를 고르는 과정은 더 길었다. 직접적으로 액세서리와 닿기 때
문에 색의 조화에 신경 써야 했기 때문이다.
의식을 치르듯 셔츠를 걸치고, 넥타이를 맨 뒤 선물 받은 것을 착용했다.
‘멋지네.’
또다시 웃음이 새어 나온다. 생일을 맞아 여러 곳에서 어마어마한 가격대의
선물을 잔뜩 받았지만, 그 무엇도 형이 준 걸 능가하지는 못했다.
‘여기엔 형의 마음이 담겨 있으니까.’
고르는 내내 자신만을 생각했을 것 아닌가. 괜히 마음이 들떴다. 그래도 곧
진지한 자리에 가야 했으니 어떻게든 기분을 가라앉혀 보려 했지만, 딱히
소용은 없었다.
선우는 그런 상태로 회의실에 들어섰다.
길드장님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1팀의 팀장 아인의 말에 레나가 대답했다.
“급한 일이 끝나서 어제 쉬셨잖아. 그래서 그런 거 아닐까?”
“하긴 그동안 바쁘게 돌아다니셨지.”
물론 바쁘게 돌아다닌 건 선우뿐만이 아니었다. 선현 길드 내의 모든 길드
원이 잠도 자지 못하고 미친 듯이 움직였다. 그렇기에 어제 반나절 주어진
휴식은 꿀맛 같았다.
“자, 그럼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찬영이 나서 외치며 가장 앞에 섰다. 그리고 지금까지 해치운 몬스터의 수
와 분포도, 포털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선우를 동경해 선현 길드에 들어
와 아무것도 모르던 그가 지금은 어엿한 부길드장의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찬영을 동생같이 생각하는 레나는 그를 보고 있자니 괜히 뿌듯해졌다.
“
그런데.”
뒤에 서 있던 부팀장이 레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길드장님 오늘따라 평소와 좀 다르지 않으십니까?”
그 말에 선우를 바라보니 확실히 평소와는 좀 달랐다. 그런데 그 다른 것이
무엇인지 딱 꼬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 그저 긴가민가하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레나는 오기가 생겨 선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눈을 마주치고 말았
다.
‘아, 한소리 듣겠네.’
찔끔하며 어깨를 움츠리는데, 그가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손으로 턱을 문질
렀다. 그 탓에 슬쩍 내려간 소매 사이로 유독 반짝이는 커프스 버튼이 보였
다.
뭔가 대단한 아이템인가 싶어 바라보았으나, 그건 아닌 듯했다. 그래도 이
왕 눈이 마주친 거 뭐라도 말해야겠다 싶어서 입을 열었다.
“커프스 버튼이 멋지네요.”
그 말에 옆에 앉아 있던 아인이 이마를 찌푸렸다. 진지한 회의 시간에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선우는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형이 선물해 준 겁니다. 옷에 딱 어울리지 않습니까?”
“
그러면서 가슴을 앞으로 내미는데 넥타이핀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리 보아
도 커프스 버튼과 세트 같다.
“넥타이핀도 잘 어울리네요!”
대충 상황을 파악한 레나가 찬사를 퍼부었다. 어쩜 이렇게 고급스럽고 실용
적인 선물을 하셨을까요. 역시 현우 님은 보는 눈이 좋으십니다. 그녀의 말
이 들려올 때마다 선우의 어깨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다.
그쯤 되니 다른 팀장들도 상황을 파악했다. 여기 모인 팀장들은 하나같이
선우에게 호감을 가지고 들어온 이들이었다. 게다가 대부분 선우가 미성년
자일 때부터 함께해 오다 보니 절로 우쭈쭈 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상황이었으나, 현우가 귀환하고 나서는 종종 이런
상황이 오곤 했다.
“선물 받으셔서 좋았겠네요! 너무 부럽습니다.”
“그러게요. 어떻게 고르셨는지 정말 길드장님과 딱 어울리네요!”
선우의 표정이 환해졌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니 찬영은 자신도 뭔가 말해
야겠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미 다른 이들이 어지간한 말은 다 한
지라,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야 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현우 님이 근처 백화점에서 도진 님과 같이 선물을 고
르는 걸 봤습니다.”
뒤늦게야 아차 싶었지만, 이미 흘러나간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한도진과요?”
선우의 어깨가 내려가고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아, 화나셨다.’
팀장들이 눈치를 보는 가운데, 선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회의 마저 진행하죠.”
지옥 같은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꼼꼼하게 따지고 되묻는 선우 때문에
팀장들은 하나같이 파김치가 된 상태로 회의실을 나섰다. 그중에서도 특히
상태가 안 좋은 사람은 찬영이었다.
“눈치가 있었어야죠.”
레나가 원망하듯 말하자 찬영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하필 그때 그런
말이 튀어 나간 걸까. 후회해 보아도 이미 늦었다.
*
우으으.”
잠에서 깨어난 현우는 괴상한 신음을 내며 소파에 다시 누웠다. 부엌에서는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동생이 점심을 차리고 있었다.
‘이게 진정한 평화지.’
이제 다시 게으름을 부릴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선우가 준비하던
걸 멈추고 가까이 다가와 뒤에서 현우를 끌어안았다.
“
형
“왜?”
오늘따라 왜 이리 어리광이람. 실실 웃으며 대답하는데, 선우가 물었다.
“내 선물 누구랑 같이 가서 샀어?”
도진과 함께 선물 사러 간 이야기를 누군가에게서 들은 걸까? 하지만 섭섭
해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아, 도진 씨.”
그러고 보니 도진 씨는 새벽에 들어온다더니, 아직 소식이 없다. 하긴 따로
길드가 있으니 바쁘기도 할 것이다.
“흐음, 그렇구나.”
선우의 목소리가 기이하게 내려갔다. 그쯤 되자 현우도 선우가 기분이 좋지
않음을 눈치챘다.
“왜?”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점심 먹고 갈 데가 있어.”
“어딘데?”
현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창고.”
“ .”
창고? 거긴 왜 가는데?”
“선물 확인하러.”
동생이 자기 생일 선물을 확인하는데 굳이 자신이 따라갈 필요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현우는 얌전히 따라 움직였다.
“
그들은 서울시 외곽의 어느 산 밑에 위치한 건물에 도착했다. 선우는 창고
라고 불렀지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외부에는 철책이 둘려 있고 그 주변으로 여러 경비원이 단단하게 무장한 채
개와 함께 경비를 서고 있었으며, 내부 건물도 여러 차례 인증을 하고 나서
야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들어간 지하실에는 수많은 아이템이 전시되어 있었다. 선우는
건성건성한 태도로 아이템을 대충 둘러보고는 다시 다른 창고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현우는 수많은 몬스터를 만날 수 있었다.
“이건 뭐야?”
몬스터 연구실인가? 여기저기 단단한 철창에 수많은 몬스터가 갇혀 있었
다.
“형 선물.”
“뭐?”
“다른 나라에서 형에게도 선물을 보냈어.”
나한테는 왜 보내는데?”
“테이머라니까 잘 보이려고 보낸 것 같아.”
곤란하다. 실제로 현우는 테이머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점박이와 케로, 두
눈이까지 전부 주먹으로 굴복시킨 것에 불과했다.
“뀨?”
토실토실한 토끼같이 생긴 분홍색 몬스터가 고개를 기울였다. 미치도록 귀
여운 외모였다.
“귀엽지?”
“그, 그렇긴 하지만.”
저런 애를 두들겨 패서 말을 듣게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케로도 점박이도
처음 만났을 때는 크고 무시무시한 몬스터였다고! 만약에 처음부터 저런 귀
여운 모습이었으면 때리는 걸 조금 망설였을지도 모른다.
“테이밍은 못 할 것 같은데.”
“그래?”
뜻밖에도 선우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드래곤 정도 되는 존재를 테이밍했으니, 다른 몬스터를 테이밍하는 건 더
는 어려울 것 같긴 했어.”
“
잘은 모르지만 다른 테이머들은 한계에 따라 몬스터를 테이밍할 수 있는 수
가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그럼 얘들은 어떡할 거야?”
“돌려보내야지. 아니면 실험실로 보내거나.”
불쌍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결국 여기 있는 것들은 몬스터다. 작고 귀여
운 모습을 가져도 사람을 해칠 수 있는 존재란 말이다. 현우도 그걸 알고 있
기에 측은한 마음을 억누르며 발길을 돌렸다.
“형.”
앞서가던 선우가 현우를 부르며 뒤돌아섰다.
“형은 언제나 내 곁에 있어 줄 거지?”
“당연하지!”
현우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어떤 일이 생겨도?”
“물론이야. 우리는 가족인걸.”
그렇게 말하자 그제야 선우가 웃었다.
“아마 앞으로는 형을 노리는 사람이 늘어날 거야. 뭐든 해 줄 테니 자기 나
라로 오라는 이들도 있겠지.”
두눈이 때문에?”
두눈이는 지금 다른 몬스터 철창 앞에 서서 침을 삼키고 있었다. 아무래도
몬스터들을 잡아먹고 싶은 모양이었다.
“왕왕!”
케로가 그걸 말리려는 듯 짖으며 두눈의 옷을 물어 당겼다. 점박이는 그런
둘과 멀찍이 떨어져서 경계하고 있다. 겉보기에는 촌극 같아 보이지만, 하
나같이 힘을 무시할 수 없는 몬스터들이다. 다른 이들이 탐내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그래. 드래곤은 어디서건 탐내는 존재지.”
문득 중간에 나타났던 레온이 떠올랐다.
“괜찮아. 내가 다른 데 갈 일은 없으니까.”
현우는 발돋움을 하여 선우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러니 불안해하지 마.”
아무래도 계속 기분이 안 좋았던 건 이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오해를 한 현
우는 선우를 달랬다.
“계속 함께할 테니까.”
“한도진이 오라고 해도?”
그 말에 현란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현우의 손이 멈췄다.
“
64.
여기서 도진의 이름이 왜 나오는 걸까? 현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선우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도진하고는 친하다. 이 세계로 와서 이렇게 가
까이 지낸 사람은 선우를 제외하고는 도진이 유일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동생보다 도진을 선택할 이유는 되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러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조심스러운 현우의 질문에 선우는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그리고 몇 번인가
입을 벙긋거리다 다물었다. 형이 자꾸 도진과 가까이 지내니까. 그러니까
속상하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현우가 다시 손을 움직여 선우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아까보다 손길이
좀 더 부드럽고 다정하다.
“우리 선우, 질투했구나?”
선우는 대답 없이 형이 쓰다듬기 좋게 고개만 좀 더 숙여 주었다.
“그래도 내 최우선은 선우니까.”
불안해하지 말라고 도닥여 주었다. 선우는 그제야 평소대로의 표정으로 되
돌아왔다. 아무리 유능해도 아직 어리니까, 여러 가지가 불안했던 모양이
다.
그렇게 납득한 현우는 선우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현우 씨.”
돌아온 집의 문 앞에는 도진이 서 있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눈을 접으며 환하게 웃는 모습에 절로 눈이 부셨다.
“어서 오세요.”
똑같이 웃으며 답하고 나서야 옆에 선우가 서 있음을 깨달았다. 뒤늦게 당
황하여 눈치를 보았으나, 선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긴 그냥 인사
를 한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넘어가려는데, 도진이 현우의 앞으로 다가오며 재차 입을
열었다.
“저번에 드린 말은 기억합니까?”
현우의 눈동자가 데굴 굴러갔다. 기억하고 있었다. 도진은 다시 만날 때 자
신을 형이라 불러 달라고 하였다. 하지만 도진도 아직 자신을 편하게 부르
지 않는데.
“기억이야 나지만 도진 씨도 절 편하게 부르진 않잖아요.”
“제가 먼저 편하게 부르면 됩니까?”
옆에서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표정으로 서 있던 선우가 결국 입을 열었다.
“편하게 부르긴 뭘 편하게 부릅니까?”
그 말에 현우는 선우의 손을 잡으며 달래 주었다. 이제 알게 된 지도 오래됐
는데, 그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도진은 선우가 옆에서 계속 방해하는데도 꿋꿋하게 버티고 서서 현우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현우야.”
그저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현우야.”
도진은 재차 현우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 물러날 곳은 없었다. 현우는 선우
의 손을 꽉 잡은 채 그를 불렀다.
“도진 형.”
도진의 표정이 환해졌다. 어쩐지 그게 보기 좋아서 현우는 잠시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옆에서 선우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
빛이라고는 한 점도 없는 공간, 누군가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슬 때가 되었지.”
각성자를 신인류라고 믿는 인간, 권력을 쥐고 싶은 인간, 인생을 바꾸고 싶
어 하는 인간. 삐뚤어진 생각을 지닌 이들을 모아서 물밑으로 움직여 왔다.
그리고 얼마 전에 노력해 왔던 결과는 빛을 보았다.
마계와 인간 세상을 잇는 인공 포털을 대량으로 열 수 있게 된 것이다.
“생각보다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한국에 각성자들이 모이는 걸 노려 포털을 열었지만, 커다란 성과를 거두지
는 못했다. 일단 제일 신경 써서 끌어들인 드래곤이 금방 제압당했고, 국토
가 적고 각성자가 많은 탓에 다른 몬스터들도 금방 제압된 탓이었다.
“그래도 인공포털을 대량으로 여는 데 성공하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오늘
하는 실험. 이것만 성공한다면 앞으로 저희의 앞길은 밝을 것입니다.”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처음 목소리와는 다르게 좀 더 높
고 여린 목소리였다.
“이걸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지. 눈물이 앞을 가리네요.”
여성은 그렇게 말하며 바로 앞에서 점점 커지고 있는 포털을 바라보았다.
포털은 한국에서 선우의 생일 때 열렸던 것보다 더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확장을 멈췄을 때 그 사이로 새빨간 눈동자 하나가 드러났다.
“아아, 드디어!”
여성은 아코디언을 연주하듯 양팔을 펴고는 한쪽 팔을 접어 가슴에 올렸다.
“어서 오십시오. 위대하신 마계의 용, 티아매트 님.”
용으로 태어나 최초로 마족 서열 9위에 오른 자, 미쳐 버린 블랙 드래곤. 그
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깜박이던 붉은 눈동자는 이내 점점 작아졌고, 거대한 포털에서 걸어 나온
건 알몸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번쩍이는 눈으로 주변을 바라보다 작게 하품
을 하였다.
“귀찮네.”
그 말을 했을 뿐인데 강력한 압력이 주변을 짓눌렀다. 환영하던 여성 또한
그 압력에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이 자리에서 멀쩡히 서 있는 건 처음
목소리의 주인과 티아매트, 그리고 그녀의 뒤를 따라 나온 남성 하나뿐이었
다.
“넌 왜 멀쩡해?”
티아매트는 어둠 속에 서 있는 남자를 보며 물었다.
그러다 문득 이 어두운 공간에도 창문이 있음을 깨달았다. 창문을 내다보니
밖은 달빛으로 밝은데도 안은 이상하리만치 어둡다. 그건 밤의 어둠이 아닌
바로 앞에 선 인물이 태생적으로 가진 어둠이었다.
“아, 아아.”
눈을 깜박이며 감탄사를 내뱉은 티아매트는 이내 그를 알아보았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
“필요하니까.”
“필요하다고?”
티아매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사이 뒤에 있던 남자는 앞으로 슬쩍 나
서며 그녀의 몸에 까만색 천을 둘러 주었다. 그 천은 꿈틀거리더니 이내 그
녀의 몸에 들러붙어 까만색 드레스의 형태로 변하였다.
“그래.”
“그런데 나는 왜 불렀어?”
“너도 필요하니까.”
“뭘 하려고?”
“뭘 하려는 것 같아?”
티아매트는 볼을 부풀렸다.
“넌 언제나 모든 걸 너무 어렵게 말해.”
“네가 너무 단순한 거겠지, 티아매트.”
“왜?”
“내 일을 도와라. 그 대가로 네가 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하게 해 주마.”
“내가 하고 싶은 것?”
붉은 눈동자가 데굴 굴러갔다. 가장 원하는 것은 파괴와 다른 생명체를 죽
임으로써 얻는 쾌감.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마계에서조차 날뛸 수 없게 되었
다. 서열 1위가 된 마족 알베르크가 그런 행동을 저지하였기 때문이었다.
길쭉하고 하얀 손이 어둠 속에서 바들바들 떨렸다.
“주, 죽여도 돼? 부숴도 돼?”
“물론.”
“아아!”
하얀 얼굴이 황홀함에 젖어 갔다.
“그런데 그 전에, 옆에 그건 뭐지?”
“아, 내 장난감? 카이야. 최근에 얻었어. 부숴도 부숴도 원래대로 돌아와.”
“히드라로군.”
머리가 9개 달린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뱀. 제대로 성체로 자라나면 드래곤
과 맞서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맞선다고 이길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제법
대단한 몬스터란 소리였다.
“카이라고 합니다.”
청발의 뱀같이 생긴 남자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일에 방해되진 않겠지?”
“안 될 거야. 만약에 방해되면 죽이면 돼.”
자신에게 충성하는 이에게 하는 말 치곤 너무하다. 하지만 여기 있는 그 누
구도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럼 티아매트, 계약을 하자.”
“좋아!”
“우로보로스에 온 걸 환영한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두 존재는 계약했다.
“
며칠 뒤, 전 세계에 새로운 단체가 이름을 알렸다.
우로보로스.
꼬리를 문 뱀을 상징으로 내세운 단체. 그 단체는 본인들이 무엇을 원하는
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본인들이 해 온 일들에 대해서는 거리낌 없이 공
개했다.
“미친놈들 아냐?”
대놓고 신문에 실린 광고를 보던 가준이 혀를 찼다.
“정말 돌았네?”
최근 여러 문제로 백호 길드와 자주 만나게 된 혜선도 그 말에 동의했다.
“그러니까 이놈들이 지금까지 강제로 포털을 열어서 테러를 해 온 놈들이란
말이지?”
“자기네 말로는 위대한 대업이지만요.”
혜선의 말에 가준이 대꾸했다. 여기 실린 대로라면 우로보로스는 최악의 테
러 단체다.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벌인 일을 생각하면 여기 소속
된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되려는지.”
“미쳐 돌아가겠지요. 더불어 지금 진행되는 일은 더 빨라지겠지요.”
“세계 각성자 연합 말이지.”
“네.”
그 말은 맞아떨어졌다. 협회를 세우는 일에 대해 부정적으로 굴던 일부 나
라도 완전한 합류 의사를 표명했고, 일은 급류를 탄 듯 더욱더 빠르게 진행
되었다.
협회의 뼈대가 세워지고, 살이 덧붙여진다. 거기에 협회장으로 몇몇 인물이
추대되었다. 러시아의 각성자 이반의 아버지 표드로, 그리고 미국의 레온,
바카디가 그 주인공이었다.
“바카디면 술 이름 아냐?”
아윤의 말에 자윤이 답했다.
“피닉스 길드 길드장의 이름이기도 하지.”
미국 내에서는 무려 2위 길드이다. 미국의 규모를 생각하면 무시할 수 없는
자이다.
“일이 금방금방 진행되네. 그런데 좀 아쉽다.”
뭐가?”
“우리나라에서도 한 명 나섰으면 좋았을걸.”
“지선우?”
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선우는 너무 어리지.”
“그래도 강하잖아.”
투덜거리며 입술을 쭉 내밀자, 자윤이 그를 손으로 꼬집었다.
“무엇보다 본인이 원하지 않잖아.”
“악!”
비명을 지른 아윤은 오빠의 손을 떼어 냈다.
“협회장이 되면 미친 듯이 바빠질 테니까.”
“그도 그렇지.”
아윤은 입술을 매만지며 답했다.
“
65.
상황은 대충 알고 있지만, 역시 아쉽다. 아윤은 기괴한 소리를 내며 사무실
소파에 엎어졌다. 그리고 다음 용건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래서 미국 갈 거야?”
미국에서는 세계 각성자 연합의 장을 뽑기 위해 각국의 중요한 각성자들을
초대했다. 비용은 전부 그쪽 부담이다.
“역시 스케일이 남다르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지만, 지금 나라를 비우기는 찝찝하다. 막 새로이 일
어선 빌런 단체 우로보로스, 그들이 열 수 있다는 인공 포털. 어느 하나 걸
리지 않는 점이 없다.
“미국에 각성자들이 모이면 또다시 포털 여는 거 아냐?”
“어디에?”
“나 같으면 각성자들이 빠져나간 나라에 열겠어. 그 전에 각성자들이 모인
곳에 열었을 때는 잘 안됐으니까. 생각을 바꾸겠지.”
사실 그때 현우가 드래곤을 처리하지 않았으면, 상황은 악화되었을 것이다.
그가 드래곤을 테이밍한 덕분에 상황은 훨씬 나아졌고, 그로 인해 테이머들
의 인기도 올라갔다.
‘실제 테이머들은 한계가 명확하지만.’
현우란 사람은 대체 뭘까. 아무리 테이머가 강해도 그런 몬스터를 테이밍하
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본인도 몬스터들을 죄다 알고 있다고 했지.’
미국에서 있었던 일은 아윤의 귀에도 들어왔다.
케로는 처음부터 데리고 있었고, 점박이는 아는 몬스터. 아마도 뒤에 나타
난 드래곤도 점박이와 같은 케이스겠지.’
덕분에 포털의 일부가 마계와 연결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그럼 이번 초대는 거절하는 게 낫겠네?”
“그렇지. 하지만 전부 거절할 수는 없을 거야. 일부는 가야만 해. 세계 각성
자 연합은 우리에게도 도움이 되는 거니까.”
각성자 연합의 목적 중에는 각 나라가 어려울 때 서로 돕자는 항목이 있었
다. 그 하나 때문에 사람들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아마 5위 이내 길드 중 절반 정도 보내면 되지 않을까?”
“흐음.”
자윤이 짧게 앓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아윤의 말은 맞아떨어졌다.
다만 아직 아윤이 모르는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미국에서 초대한 각성자
중에 현우가 있다는 것이었다. 초대된 각성자 여럿 중에서도 굳이, 미국은
콕 집어서 그만은 반드시 보내 주길 바란다고 적었다.
“안 됩니다.”
선우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야만 합니다.”
“싫습니다.”
‘
뭐라고 이야기해도 철벽같이 굳건한 선우를 상대하며, 무혁은 머리를 쓸었
다. 뭘 말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다 똑같았다.
“미국에서는 지현우 씨가 오기를 원합니다.”
“그게 제 형을 탐내서 하는 행동임을 알지 않습니까.”
처음으로 선우의 입에서 다른 대답이 나왔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의 요청을 거절할 수는 없습니다.”
각성자가 나타난 이후로 대한민국의 위상은 올랐다. 하지만 미국을 이겨내
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랬기에 요구를 무작정 거절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그건 곤란합니다. 아직 나라가 어수선한 걸 알지 않습니까. 우로보로스가
게이트라도 다시 연다면 큰일입니다. 적어도 지선우 씨는 남아 주셔야 합니
다.”
“과연 그런 목적으로 남으라 하는 것입니까?”
선우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그 말에 무혁은 다시 한숨을 쉴 수
밖에 없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뒤에서 오는 요청들에 담긴 의도가 순수한
것이 아니라는 걸.
무혁도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했지만, 아직은 무리였다. 김철수는 비각성자
라도 인맥이 많으며 그를 자유자재로 써먹을 줄 아는 자였다. 그런 자를 끌
어내리기란 쉽지 않았다.
지원해 드릴 테니 최대한 빠르게 권력을 잡으십시오.”
“노력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많이 나아졌다. 헌터관리국 내에서 무혁이 내는 목소리도 점차 커져
가고 있긴 했다.
“더 노력하시란 말입니다.”
무혁의 속도 부글부글 끓었다. 하지만 여기서 예전처럼 선우와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라 애써 화를 내리눌렀다.
“더 노력하겠습니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현우 씨
를 미국으로 보내야 합니다. 정 불안하면 언제나 같이 다니는 평화 길드장
을 보내면 되지 않습니까.”
그 말에 선우의 표정이 더 험악해졌다. 그게 싫어서 내내 무혁과 실랑이를
벌이는 거였으니 말이다.
“한도진 씨를 두고 제가 대신 가면 안 됩니까?”
확실히 요즘 떠오르는 도진의 실력을 생각하면 그게 차라리 마음 편할지도
몰랐다. 정치인들과 미국의 뒷공작만 아니라면 말이다. 다시 이야기가 처음
으로 돌아간 느낌에 무혁은 뒷목을 잡았다.
“
기나긴 시간 선우와 대화를 마친 무혁은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헌터관리국
으로 돌아왔다. 슬슬 쉬고 싶었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아 있기에 국장 사무실
로 발걸음을 옮겼다.
똑똑.
“들어오게.”
무혁이 들어서자 국장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나?”
“지선우는 형이 가지 않고 남아 있거나, 아니면 같이 가는 조건 외에는 수락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무혁의 말에 힐끔 시계를 본 국장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아니, 가서 몇 시간이나 있었는데 설득을 못 했나?”
니가 해 보든가. 그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다.
“본인이 싫다는데 제가 어떻게 설득합니까?”
“그럴 때는 동생 말고 형에게 말해 봐야지!”
선우가 쉽게 형을 만나게 해 줄 리 없었다.
“그도 쉽지 않습니다.”
“말세다, 말세야. 나라를 위해 뭘 좀 하라는데 다 싫다고만 하니 발전이 없
어. 발전이!”
국장은 불만스러운 듯 표정으로 일장 연설을 토해 냈다. 역시 이 작자는 불
쾌하다. 이런 사람이 국장 자리에 앉아 있으니 헌터관리국도 발전이 없는
것이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더 설득해 보도록 해. 나도 따로 손을 더 써 볼 테니.”
국장은 혀를 차면서 무혁을 보내 주었다. 무혁은 국장 사무실을 나서 습관
처럼 이마를 문지르며 한숨지었다.
“피곤하군.”
그래도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무혁은 다시 몸을 세우고 복도를 걸어 나
갔다.
*
도진은 손에 든 태블릿을 바라보다 문득 생각난 기억에 작게 웃었다.
‘도진 형.’
현우가 처음으로 그를 형이라 불러 주었다. 그 생각만 하면 가슴 한편이 간
질거리며 기분이 들떴다. 형이란 말을 현우의 목소리로 좀 더 많이 들어 보
고 싶었다.
‘이제 끝.’
빠르게 할 일을 마친 도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전에 회의도 했고, 남은
서류도 전부 봤으니 이제 현우에게로 돌아가도 될 터였다.
가볍게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부길드장 현희와 마주쳤다.
길드장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무슨 손님? 오늘 오기로 되어 있던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예고 없이 한
방문이라는 소린데, 그런 불청객을 굳이 만나야 할까? 답은 금방 나왔다.
“예고 없는 방문자는 만나지 않습니다.”
평화 길드도 엄연히 손꼽히는 길드이다. 그런 길드에 찾아와서 꼬장을 부릴
손님은 없기에 할 수 있는 소리였다.
“그건 저도 알지만, 정부 관계자입니다.”
“정부 관계자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진의 태도가 바뀌지 않자 현희가 초조함을 내비쳤다.
“한 번만 만나 주시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중요한 용건인 것 같습니다.”
“아는 사람입니까?”
“아니, 아닙니다. 그저 꼭 만나 보셔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현희의 변명에 도진은 잠시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거절하고서 조금
이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다. 근처 디저트 가게에서 신상을 출시했는데, 생
김새와는 다르게 너무 단 걸 싫어하는 현우에게 딱 맞았다. 씁쓸한 다크 초
콜릿을 베이스로 한 미니 케이크는 출시되자마자 인기를 끌어 늦게 가면 품
절이 될지도 몰랐다.
그걸 생각하면 이대로 나가는 게 맞았지만, 현희가 너무 애처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길드를 세우고서 많이 신세 진 사람이기도 했다. 결국 도
“
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10분만입니다.”
“네, 네! 모시겠습니다!”
현희를 따라간 곳에는 정장을 걸친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비각성자지만
출신은 헌터관리국이다. 남자는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다. 간단한 인사를 거
치고 나자 빠르게 본론에 들어갔다.
“이번에 긴밀하게 부탁드릴 게 있어 방문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지현우 씨에게 저희의 말을 전해 주지 않겠습니까?”
도진은 뒤늦게 후회했다.
‘이야기를 들을 필요도 없는 일이었군.’
현우에게 무언가를 전달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지선우나 선현 길드
를 통하면 된다. 그런데도 굳이 자신을 찾았다는 이야기는 그 둘이 차단할
만한 이야기라는 것일 테고. 그런 이야기라면 자신도 굳이 현우에게 전달할
생각이 없었다.
다시 한번 시계를 힐끔 바라보자 정부 관계자는 애가 타는 모양이었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일단 들어 보기라도 해 주십시오. 이번에 미국에서
우리나라 각성자들에게 초대장을 보낸 일은 아시지요?”
모를 리가 있나. 도진도 그 초대장을 받았다. 현우가 어찌할지 알 수 없기에
아직 답장은 보내지 않았지만 말이다.
“네, 그렇습니다. 미국은 우방국으로서 저희에게 호의를 표시하는 것입니
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아니요.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렇습니다. 타국보다 우리나라에 온 초대장이
더 많거든요.”
남자는 뿌듯하다는 듯이 가슴을 폈다.
“그런데 그것과 현우는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도진의 질문에 남자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미국이 현우 씨를 원합니다.”
“스카우트입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 그냥 순수한 의도로 대단한 몬스터를 테이밍한 현
우 씨를 만나 보고 싶어 할 뿐입니다.”
그럼 결국 출국하게 되는 것인가. 지금 상황에서 자신과 현우 그리고 선우
까지 빠져도 되는지 생각해 보았다. 다른 각성자들이 나서지 않는다면 가능
할지도 모르겠다.
66.
‘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가 끝일 리는 없겠지.’
그렇다면 지선우가 가로막았을 리 없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아직 국내 상황이 여의찮다는 것입니다. 많은 각
성자를 보낼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테러 조직이 급부상한 이상 만약
의 경우를 대비하여 각성자 일부는 대기해 주셔야 하니까요.”
“그리고 그 사람이 지선우 씨란 거군요.”
남자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높은 분들은 지선우 씨가 국내에 남아 주시길 원합니다.
갑자기 게이트형 포털이 다시 터지면 어떡합니까?”
도진은 이유가 그것뿐만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렇군요. 그럼 용건은 끝났습니까?”
“네?”
“저는 대신 의사를 전달해 줄 생각이 없습니다. 직접 해 보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도진은 방 밖으로 나섰다. 문 앞에는 현희가 초조해 보이는
얼굴로 서 있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음부터는 약속 없이 저런 사람은 들이지 마십시오.”
아마 현희도 이런 일을 아예 예측 못 한 것은 아닐 터였다. 도진의 말에 그
의 어깨가 아래로 축 처졌다.
굳이 정치인과 엮이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더 애써 보겠습니다.”
예전에는 평화 길드를 떠나고 싶었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생각이 좀 달
라졌다. 그렇기에 좀 더 노력해 보고자 했다.
도진은 그 말만을 남기고 평화 길드가 위치한 건물을 나섰다. 길드를 좀 더
끌어올리기 위해 뭔가 해 보려는 건 좋다. 하지만 저런 식으로 권력자의 손
을 빌리는 건 좋지 않다. 나중에는 자신들을 자기 입맛에 맞게 휘두르려 들
테니까.
도진은 무심코 구겨지는 미간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디저트 가게에 들어섰
다. 현우에게 줄 디저트와 내키지는 않지만 선우에게 줄 것까지 샀다.
‘요즘 조금 약삭빨라지는 것 같군.’
현우에게만 케이크를 줘도 된다. 그래도 그는 기뻐할 테고, 즐겁게 먹을 것
이다. 하지만 선우에게도 준다면? 선우는 탐탁지 않아 하겠지만 현우는 그
도 좋아할 것이다. 사랑하는 동생이니까.
“사랑하는 동생.”
작게 중얼거려 보던 도진은 도로 입을 다물었다. 사실 도진도 선우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동생을 위해 살았고, 동생을 잃자 그 생을 포기하려 한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여전히 동생을 잃은 건 슬펐지만, 따라 죽고 싶진 않았다. 동생 외에 지켜
주고 싶은 사람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은 무척이나 귀엽고, 사랑스
럽다. 미심쩍은 부분도 존재했지만 캐내진 않기로 했다. 이대로 신뢰를 쌓
아 가다 보면 언젠가는 말해 주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
선현 길드의 까다로운 인증 절차를 거치고 위층에 올라가 현관문 벨을 눌렀
다.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이내 문이 열렸다. 현우였다.
“다녀왔어.”
도진은 빙그레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디저트 박스를 앞으로 내밀었다.
“어서 오세요!”
비록 여기가 자신의 집은 아니었지만, 반겨 주는 목소리에 하루의 피로가
녹아내리는 듯했다.
“왜 그래요, 형?”
곧바로 따라 들어가지 않고 버티고 있자 현우가 도진을 불러 왔다. 그 호칭
을 듣고 나서야 도진은 느긋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 저 말이 듣고 싶었
다.
디저트 박스를 여는 현우에게 조곤조곤 말을 걸었다.
“초콜릿 케이크가 네 거고, 다른 건 지선우 씨 거.”
“초콜릿 케이크? 안 달아요?”
“달지 않고 적당히 쌉싸름한 게 맛있대.”
“와, 그럼 먹어 볼까요?”
“내가 차릴게.”
도진이 다시 디저트 박스를 받아 들자 현우가 그걸 도로 빼앗았다.
“사 온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일까지 시켜요. 내가 차릴 테니 옷 갈아입고
와요.”
“그럼 빨리 나올게.”
도진은 손님방으로 들어섰다. 처음에는 임시로 지내던 방이었는데, 어느 순
간부터 그의 물품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원래 지내던 집보
다 여기가 더 집 같은 느낌이었다.
“준비 다 됐어요!”
밖에서 외치는 소리에 나가니 식탁에 얌전히 앉아 있는 현우가 보였다. 그
리고 점박이랑 케로, 사람 형태인 두눈까지 그 옆 바닥에 앉아 식탁을 올려
다보고 있었다.
몬스터면서 사람이 먹는 음식을 참으로 잘 즐긴다. 케이크를 넉넉히 사 와
서 다행이었다.
삐리릭.
“형, 나 왔어!”
얼마 지나지 않아 선우도 도착했다. 일하던 도중에 다급히 달려온 모양이었
지만, 알게 뭔가.
선우는 잔뜩 심통 난 얼굴로 식탁에 앉았다.
“저는 단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그래서 일부러 가장 달아 보이는 걸로 골랐다.
“저런, 몰랐습니다.”
“선우야, 케이크 사다 준 사람에게 그러면 안 되지.”
현우가 선우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하자,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
만 그도 잠시, 이내 다시 표정을 펴고는 케이크에 포크를 푹 찍었다.
“그러네요. 사 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마주 보고 웃고 있지만, 둘 다 속내는 다르다. 만약에 현우라는 접점이 없었
으면, 가까이 지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즐거운 간식 타임이 흘러갔다.
평화롭다면 평화로운 시간이 지나가고 사건이 터진 건 그로부터 며칠 뒤였
다. 현우가 따로 몬스터를 물리치러 다녔던 날 이후로 선우는 예전보다 외
출에 간섭을 덜 하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경호원이 붙지 않는단 소
리는 아니었다.
오늘 모처럼 일이 없었던 팀장 레나와 아인은 현우와 함께 외출을 했다. 외
출 이유는 사소했다. 근처에 유명 레스토랑이 문을 열었고, 그를 맛보고 싶
었던 것뿐이었다.
원래는 선우가 시간이 나면 같이 가려고 했으나, 요즘 따라 일이 몰려들어
시간을 쉽게 빼지 못했다. 하지만 무려 선현 길드의 팀장 둘이 붙었다. 조만
간 S급으로 올라설 거란 평가를 받고 있는 둘이었기에 선우도 안심하고 현
우를 내보냈다.
안 그래도 도진을 떨어트려 놓자고 생각했으니, 다른 길드원과 좀 더 친해
지게 하는 것도 괜찮을 터였다.
“와아, 저 거기 꼭 가 보고 싶었어요!”
“네가 가 보고 싶지 않은 식당이 존재하긴 하나?”
“뭐래?”
레나는 아인의 등을 팍 치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겉으로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지만, 지금 최대로 긴장하고 있는 상태였다. 바로 옆에 점박이와 케로,
두눈까지 붙어 있는 탓에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조합이면 어딜 가도 눈에 띄겠지.’
그렇기에 더욱더 긴장해야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할 뿐
선뜻 다가오지는 않았다. 고작해야 여고생 무리 하나가 다가와 현우의 사인
을 받았을 뿐이었다.
“와와, 사인이다, 사인!”
“케로 발 도장도 받고 싶은데요!”
“나 물감 있어! 물감!”
“왕왕!”
키르르륵.”
여고생들은 기어코 케로와 점박이의 발 도장을 받은 뒤 손을 흔들며 멀어졌
다. 그다음부터는 별일 없이 걷기만 했다. 날도 좋고, 그 때문인지 모처럼
공기도 좋았다. 좋은 날이었다.
“그런데 왜 쥐새끼가 따라다닐까.”
누군가 따라오지만 않았으면 말이다. 레나는 건틀릿을 손에 끼며 뒤돌아보
았다. 사람을 상대론 함부로 무기를 사용하기 어려워 가볍게 따로 챙겨 온
보조 무장이었다.
아인도 이미 준비가 됐다는 듯이 레나가 바라보는 방향을 정확히 응시하고
있었다.
“오해입니다.”
그쪽에서는 양손을 든 남자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어쩐지 익숙한 느낌인데?”
레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헌터관리국 사람입니다.”
“연락 없는 약속은 받지 않습니다.”
아인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내 얌전히 현우를 따라가던 몬스터들이
슬그머니 방향을 바꾸었다. 그쯤 되자 남자도 긴장되는 모양인지 목소리가
떨려 왔다.
“
나쁜 의도는 조금도 없습니다.”
“무슨 소리예요? 스토킹은 훌륭한 범죄인데. 안 그래요?”
“맞아.”
아인이 레나의 말에 맞장구쳤다.
“말만, 말만 잠시 들어 주십시오! 현우 씨!”
“아니, 듣지 마세요. 무시하세요.”
남자가 처절하게 현우를 불렀으나, 레나는 깔끔하게 무시하라고 일렀다.
‘정부가 이렇게 나서는 것 치고 괜찮은 일인 적이 없었으니까.’
오죽하면 정부를 무능이라고 부르겠는가. 레나가 손을 휘휘 젓는데 남자가
크게 외쳤다.
“이번에 세계 각성자 연합에서 현우 씨를 특별히 초대했습니다! 초대장이
전달되었습니까?”
전달되지 않았다. 간단한 회의 결과, 개소리 낭낭하다고 판단되어 현우에게
는 전달하지 않았다.
“미국은 현우 씨를 뵙고 싶어 합니다!”
“왜요?”
“
현우가 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걸 대화의 신호로 여겼는지 남자가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오려 했으나, 아인과 레나에게 가로막혔다.
“더 다가오면 찌릅니다.”
“저 사람도 잘 쳐요. 맞아 보실래요?”
결국, 남자는 좀 떨어진 거리에서 상황을 이야기해야 했다. 그리고 모든 이
야기를 들은 현우는 결론을 내렸다.
“안 가요.”
“네?”
“강제로 참석해야 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저번에야 점박이 때문에 미국에 갔었지만, 한 번 여행해 보고 깨달았다. 여
행은 피곤하다. 비행기 내에서 몇 시간을 보내야 했으며, 이리저리 돌아다
니는 건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 그야 그렇지만.”
“게다가 선우도 못 간다면서요.”
“그건 아직 나라가 위태롭기 때문에!”
“이상한 핑계네요.”
현우는 픽 웃고는 레나와 아인에게 말했다.
예약 시간 다 돼 가네요. 레스토랑에나 가죠.”
“그럴까요?”
레나가 실실 웃으며 손을 내리고, 아인도 이어 무기를 회수했다. 남자가 뭐
라도 해 보려고 앞으로 나섰지만, 순간 노려보는 노란색 눈에 그 자리에 멈
춰 서 버렸다.
“방해.”
두눈이었다. 사람의 형태를 지녔음에도 가지고 있는 본성은 사라지지 않는
지라, 남자는 갑자기 돋는 소름에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사이 일행
모두가 나란히 레스토랑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따라 들어갈 수도 있었지
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제길.”
남자는 욕설을 내뱉으며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
67.
보고를 들은 국장 김철수는 혀를 찼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된다. 아
무래도 방법이 너무 온건했던 모양이었다.
“전부 나라를 위한 일인데.”
못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자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팬다. 그 상태로 국장
은 정보부의 류영진을 불러들였다.
“부르셨습니까?”
불렀지, 불렀어. 그래, 요즘 돌아가는 일은 알고 있나?”
“정보부인데 모를 리가 없지요.”
“그럼 지현우의 일도 알고 있겠군.”
“대충은 압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실제로는 좀 더 많은 것을 상세하게 알고 있을 것이다.
영진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최무혁에게 맡겨 봤는데, 제대로 처리 못 하더라고.”
“그는 온건파니까요.”
“그래서 이번엔 그쪽에 맡겨 보고 싶어. 비용과 인력은 지원을 해 주지.”
“어떤 방식을 원하시는지 알겠군요.”
“그래, 이렇게 눈치가 빨라야지!”
국장은 표정을 펴고 웃었다.
“
그 뒤부터 선현 길드에는 집요한 간섭이 시작되었다. 사소한 감사부터 세금
문제까지 정부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선현 길드를 달달 볶았다. 평소에는 감
히 발을 들이지도 못하던 이들이 이리 구니 그 이유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지간히 형과 나를 갈라놓고 싶은 모양이군.’
선우는 서늘한 눈으로 파견된 정부의 인사들을 바라보았다. 옆에서는 찬영
이 잔뜩 불만을 품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참고는 있지만, 곧 터질 것 같은
모양새였다.
“이게 나랍니까?”
결국 참지 못해 한마디를 내뱉었다.
국내의 인력을 지키지는 못할망정 내보내려고 이 난리라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아무리 뒤져 봐도 책잡힐 부분은 없을 테지만, 이런 행위를 보고 있
는 것만으로도 열받는다.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더 발악하는 겁니다. 일단은 두고 봅시다. 형은
잘 지키고 있지요?”
“네, 지금은 집에 계십니다. 그리고 문밖을 레나와 아인이 지키고 있으니 괜
찮을 겁니다.”
그럼 됐다. 선우에게 제일 우선인 건 형인 현우였으니까. 그렇게 감사를 하
는 정부의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을 때,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 헌터관리
국의 사람이었다. 마른 듯한 몸매에 안경을 쓴 그는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
왔다.
“안녕하십니까, 헌터관리국의 류영진입니다.”
그가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이번에 정부와 헌터관리국의 협조 아래 통과될 법안을 미리 알려 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선우가 느긋하게 되묻자 영진이 징그럽게 웃으며 답했다.
“몬스터 관리법이라고요. 아무리 테이머라고 하나 몬스터를 데리고 다니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정부에서 따로 관리하는 게 낫지 않을
까 싶어 만들어진 법입니다.”
찬영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소리를 삼켰다.
‘뭔 개소리야!’
각성자에게서 무기를 뺏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저는 처음 듣는 소리입니다만.”
선우의 말에 영진이 능숙하게 대답했다.
“정부에서 추진하는 일입니다. 관련자가 아니면 모를 수도 있지요.”
모를 도 있다고? 각성자를 때문에 만들어지는 법인데? 기가 막힌 소리였
다.
선현 길드는 국내에서의 영향력이 대단하고, 그 영향력은 국회의원들한테
도 통했다. 즉, 정부 소속이면서 이쪽 편을 드는 이들이 있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이런 소리는 들어 보지 못했으니, 지금 하는 말은 거짓일 확률이 높
았다. 아니면 선현 길드에 호의적인 사람을 빼고 교묘히 날치기 통과를 노
리고 있는 거던가.
“
속을 긁어내리는 솜씨가 일품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던 어린 소년이 선현
길드를 세우고 여기까지 왔다. 선우도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보다 미국의 초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셨습니까?”
“제 생각은 변하지 않습니다.”
가려면 전부 가거나, 아니면 전부 가지 않는다.
“현우 씨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텐데 아쉽군요.”
영진은 그렇게 답하고 물러섰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란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아마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선현 길드를 압박하려 들 터였다.
그리고 한창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선현 길드의 사무실 위쪽 천장. 작은
생물체 하나가 입에 무언가를 물고 찰싹 붙어 있었다.
점박이였다.
현우의 방, 그곳에는 케로와 두눈이 얌전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침대 위에
다리를 꼬고 앉은 현우의 손에는 작은 기기가 들려 있었는데, 거기서 소리
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랄 염병하네.”
대화를 들은 현우의 입에서 험악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주 미국에 자신을
가져다 바칠 기세가 아닌가.
“남의 동생은 왜 괴롭혀.”
그뿐만 아니라 선우를 지독하게 괴롭히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참을 수 있
으랴. 현우의 표정이 점차 험악해졌다.
“잠시 나갔다 온다.”
현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적어도 열받게 하는 상
대를 몇 대 패 주기라도 해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마침 그들의 일부가 밖
으로 이동하는 듯했으니, 만나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옷을 갈아입고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그런 뒤 밖으로 열리는 문을 통해 몸
을 빼냈다. 사람들 몰래 건물을 타고 내려가 바닥에 발을 내디뎠다. 마침 선
현 길드 빌딩 입구로 상자를 든 사람 몇이 나오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마
지막에는 영진이 서 있었다.
물론 목소리만 들었기에 현우는 그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아는 건 그
들이 정부의 사람들이라는 것뿐이었다.
‘좋아.’
현우가 근질거리는 주먹을 움켜쥐고 막 앞으로 나서려던 순간, 뒤에서 인기
척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놀란 건 아니었다. 그는 움켜쥔 주먹을 인기척의
주인에게 휘둘렀을 뿐이다.
“악! 잠깐!”
익숙한 목소리였다. 도가준, 그였다. 잽싸게 팔을 들어 올려 막았으나 주먹
은 고스란히 팔 한가운데 꽂혔다. 그나마 힘을 조절했기에 뼈에 이상은 없
었지만, 가준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일반인이었으면 뼈가 쪼개졌을 거야!”
괜찮아.”
“난 괜찮지 않아! 아니, 그보다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거야?”
아무래도 가준은 현우를 금방 알아본 모양이었다.
“잠깐 볼일이 있어서.”
“무슨 볼일!”
“너야말로 여기엔 무슨 일이야?”
“지선우를 만날 일이 있어서 왔지!”
그 말에 현우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네가 왜?”
“요즘 정부 움직임이 이상해서 경고나 해 줄까 했지.”
사실 경고를 핑계로 약을 올려 주려고 왔다. 하지만 그걸 당사자 형 앞에서
고스란히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곧바로 의심스러운 시선이 돌아왔지
만, 가준은 시치미를 뗐다.
“자, 나는 사실대로 말했어. 그쪽은?”
현우는 눈을 데굴 굴렸다.
“잠시 외출.”
“
외출을 그렇게 살기등등하게 해?”
“모르겠는데.”
현우 또한 시치미를 뚝 떼었다.
“모르긴. 보아하니 정부 인사들을 쥐어 팰 생각인 것 같은데.”
기절시킬까. 증거 인멸을 고민하는데 가준이 말을 이었다.
“그거 재밌겠는데.”
그러면서 히죽 웃는다.
선현 길드만 감사에 들어가는 건 이상하기에 다른 길드들도 크든 작든 감사
에 들어갔다. 거기에 백호 길드가 속한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가준도 조금은 뿔이 난 상태였다. 아니라면 굳이 이 일을 지선우
에게 알려 주러 오지도 않았겠지.
“같이 할까?”
태연히 들어오는 제의에 현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여기선 안 돼. 선현 길드 앞이잖아? 패기 시작한 지 10초도 안 돼서
경비원이 출동할 거라고.”
“그럼 어디서?”
“
집을 오래 비우는 건 곤란하다. 두눈이 침대 위에 누워 자는 척 위장하고 있
지만, 선우가 이불을 들춰 보면 눈치챌 것이다.
“어디 보자. 멀리 가기는 힘들지? 그럼 일단 이 동네만 벗어나서 습격하자.”
“그래도 돼?”
“되게 만들면 되지.”
그러면서 품에서 눈과 코만 뚫린 모자를 꺼내서 내민다. 그걸 물끄러미 바
라보고 있자니, 솔선수범해서 먼저 뒤집어썼다. 그런 후 대충 걸친 정장 재
킷을 벗고 소매를 둘둘 만다. 그 모든 게 끝나고 나니 남은 건 훌륭한 강도
하나였다.
“수가 적은 편이긴 하지만, 대한민국에도 빌런이 있긴 하거든.”
빌런. 각성하였으나 능력을 몬스터를 잡는 데 쓰지 않고, 범죄에 쓰는 이들.
지금 가준은 그런 이들을 흉내 내자고 한 것이다.
“좋아.”
현우는 모자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30분 뒤, 헌터관리국의 차량
은 생전 처음 보는 빌런 둘에게 습격당했다.
“으아아아악!”
그중 키가 좀 더 작은 빌런에게 잡힌 영진은 진짜 하얀 살을 찾는 게 더 힘
들 정도로 처맞았다.
“그러게.”
퍽! 작은 주먹이 그를 야무지게 때렸다.
“마음을.”
퍽! 뼈가 무사한 게 다행이다.
“곱게.”
이제는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썼어야지.”
조곤조곤 말하며 두들기는데 어찌나 무서운지 오금이 달달 떨렸다. 다른 빌
런은 그 모습을 히죽거리면서 지켜보기만 했다.
그렇게 얼마나 맞았을까. 다른 사람이 필사적으로 누른 긴급 호출 벨 덕에
각성자들이 출동했고, 빌런은 포위당했다. 그제야 살았다고 생각했으나, 빌
런은 포위망을 교묘히 피해 가며 영진을 5분여간을 더 때리고, 훌쩍 사라졌
다.
으하하하!”
가준이 숨넘어갈 듯 웃었다.
“뭐가 그렇게 웃겨?”
현우가 으르렁거리며 묻자 가준이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넌 지금 누굴 팬지 모르지?”
“
모른다. 그저 목소리가 익숙했기에 특별히 더 팼을 뿐이었다.
“헌터관리국 정보부의 류영진이다. 능글거리는 뱀 같은 녀석이지. 아마 이
번 일도 그 녀석 머리에서 나왔을 확률이 높을 거야. 나도 한 대 패 주고 싶
었는데 어찌나 야무지게 때리는지.”
그러면서 다시 큭큭거리며 웃는다.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겠군.”
“많이 봐줬어.”
“알아.”
각성자가 마음먹고 일반인을 치면 뼈를 으스러트리는 것도 가능하니까.
68.
복면을 벗고 다시 본래 차림을 한 가준은 현우에게 말했다.
“야, 타!”
날렵한 표범처럼 잘 빠진 까만 바이크가 제법 멋지다.
“바이크도 몰 줄 알아?”
“가끔 하는 취미지.”
가준은 히죽 웃으며 현우의 머리에 헬멧을 씌웠다. 하지만 자신은 쓰지 않
는다.
“너는 왜 안 써?”
“S급 각성자가 헬멧이 무슨 필요야. 차랑 부딪쳐도 나보단 바이크가 망가질
걸.”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치면 현우도 S급 각성자 수준을 넘어
서니 헬멧이 필요 없다. 도로 벗으려는 걸 가준이 말렸다.
“넌 써.”
“왜?”
빤히 바라보니 가준이 손으로 볼을 긁적였다.
“그게 안전하니까?”
뭐라는지 모르겠다. 예전에 맞아 봤으니 자신의 실력도 알 텐데. 현우가 기
가 막혀 그를 바라보았지만, 가준은 자신이 내뱉은 말을 철회하지 않았다.
그렇게 바이크를 타고 다시 선현 길드로 돌아왔다.
갑자기 나타난 빌런 때문에 중간중간 경찰차가 서 있었지만, 아무도 가준을
잡지 않았다. 그가 얼굴이 알려져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의심을 안 하네?”
그 말에 가준이 악동같이 킬킬 웃으며 대답했다.
“어느 미친 길드장이 정부 인사를 공격해.”
여기, 여기 이 미친놈이요.
그래도 덕분에 편하게 돌아왔다. 선현 길드 빌딩 뒤쪽, 잘 안 보이는 곳에
바이크를 댄 가준이 현우에게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나온 거야?”
평소 지선우가 하는 꼴을 보면 정상적인 방법으로 나오긴 힘들었을 것 같은
데. 가준의 말에 현우가 픽 웃더니 벽에 한쪽 다리를 올렸다. 그러고는 조금
씩 돌출되어 있는 벽을 타고 순식간에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가준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그도 하자고 마음먹
으면 할 수 있는 재주였으니 현우도 할 수 있는 게 당연하다. 그걸 알고 있
음에도 어쩐지 위태로워 보이는 모습에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리고 그때,
선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긴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아무래도 근처를 순찰하던 경비원이 가준을 발견하고 알려 준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굳이 나와 보지 않았을 텐데. 왜 하필 이럴 때 나오는지 모르겠다.
현우는 아직 벽을 타고 있었고, 바로 앞에는 그런 형을 아끼는 동생인 선우
가 서 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가준은 자꾸 위로 올라가려는
시선을 내리며 답했다.
“그냥 산책 겸 돌아다닌 거지.”
“그게 왜 저희 길드 빌딩인 겁니까?”
“근처를 지날 수도 있지.”
다 올라갔나? 아니면 시간을 더 끌어야 하나? 자신은 남이니 현우가 들키
건 말건 상관도 없을 텐데 이상하게 신경이 쓰인다.
“그렇습니까?”
선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섰다. 그리고 그가 돌아서자마자 잽싸게 위를
확인해 본 가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벽에 붙어선 현우의 모습이 보
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사히 안으로 들어간 듯했다.
그걸 확인하고 나서야 가준은 다시 바이크를 출발시켰다.
왔어?”
침대에 누워 속 편히 자고 있던 두눈이 물어왔다.
“응.”
“
현우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대답했다. 간만에 주먹을 휘두르니 속이 시원했
다.
“재밌었어?”
여기 살면서 두눈도 빠르게 말이 늘고 있었다.
“나름?”
옷을 갈아입은 현우는 작게 하품을 하고는 두눈을 밀치고 침대에 누웠다.
슬쩍 TV를 틀어 보니 곧 미국에서 열릴 협회장 선거에 대한 토론이 한창이
었다. 과연 어떤 각성자가 남고, 어떤 각성자가 갈 것인가. 누가 뽑힐 것인
가. 우리나라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몇몇 전문가들이 격렬하게 토
론했다.
혹시나 싶어 다른 채널도 돌려 보았지만, 어디에도 긴급 뉴스는 없었다. 빌
런이 나타나 정부 쪽 인사를 두들겼다는 소식을 전하는 방송은 존재하지 않
았다.
‘굳이 알릴 생각이 없나?’
그럼 몇 번 더 패 줄 수 있는 걸까. 현우는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며 눈을 감
았다.
이후로도 가준은 몇 번인가 더 현우를 호출했다. 호출 방법은 별다른 게 아
니었다. 두 번째는 외부에서 힘을 조금씩 방출하여 현우를 불러냈고, 그다
음부터는 건네준 호출기로 불러냈다.
매번 야근을 하는 동생이 애처로웠던 현우는 얌전히 불러내는 대로 나가 빌
런 역할을 했다. 그 와중에 다른 각성자와 마주치기도 했지만, 이쪽이 누구
던가.
하나는 S급 각성자요, 다른 하나는 그 S급 각성자를 쥐어 팬 사람이었다.
회피를 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문제는 다섯 번째쯤에서 일어났다.
“이만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들을 막을 사람으로 도진이 나타났다!
‘형이 여기서 왜 나와?’
현우는 처음으로 당황하며 멱살을 잡고 있던 정부 인사를 떨어트렸다.
“괜찮아.”
옆에서 지켜보던 가준이 말했다. 복면은 완벽했다. 이걸 뒤집어쓰고 있는
한 얼굴을 들킬 일은 없었다.
대도의 복면(엘리트)]
과거 대도가 썼다던 복면. 어떤 수단을 써도 얼굴을 인식할 수 없다.
[
도진이 손을 뻗자 그림자들이 넘실거리며 정부 사람들을 잡아당기기 시작
했다. 일단 인질부터 치우고 싸울 셈인 듯했다. 그걸 막고자 현우가 가장 가
까운 정부 사람을 덥석 잡았다.
그림자가 몇 번 용을 쓰긴 했지만, 더 잡아당겼다가는 사람의 몸이 분리될
것 같았던 모양이다. 포기는 제법 빨랐다.
인질을 잡는 겁니까?”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진의 얼굴 위에는 귀찮음이 떠올라 있었다. 그
도 내켜서 나온 자리는 아닌 것 같았다. 하긴 정부가 달달 볶는 게 어디 선
현 길드뿐일까. 그러고 보면 도진도 최근에는 얼굴을 거의 보지 못했다.
도진은 내내 미적지근하게 대처했고, 덕분에 눈치를 보던 현우와 가준은 무
사히 몸을 빼낼 수 있었다.
“잡아, 저놈들을 잡으라고!”
아직 정신을 차리고 있던 정부 쪽 사람이 도망가는 두 사람을 보고 악을 썼
으나, 도진은 여전히 느릿하게 움직였다.
“왜 빨리 쫓아가지 않는 건가!”
도진을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현우가 외려 더 욱했다. 하지만 도진은 시선
을 돌려 천연덕스럽게 대답할 뿐이었다.
“정말 가도 됩니까? 그러면 당신들을 지켜 줄 사람이 없는데요?”
그 말에 사람들이 얌전해졌다. 그런 그들을 뒤로하고, 가준은 현우를 집어
들고 날았다.
‘들키지 않은 건가.’
현우는 뒤늦게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하지만 무심결에 돌아봤다가
본 도진의 눈빛이 묘하다.
‘설마.’
“
눈치챈 건가 싶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와, 이거도 슬슬 그만둬야겠는데? 이제 S급 각성자를 동원하네?”
안전한 곳까지 와서 투덜거리던 가준이 여전히 멍한 표정을 하고 있는 현우
를 툭 쳤다.
“왜 그래?”
“아니, 아니야.”
들킨 것 같다는 소리는 할 수 없었기에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갔다. 가준도
더는 묻지 않았다. 그리고 빌런 짓을 그만두기로 한 지 며칠 뒤, 정부와 헌
터관리국이 반응을 보였다.
*
정부는 끈질기게 선현 길드를 압박했지만, 원하는 답을 들을 수 없었다.
“결국 지선우도 같이 보내야 하는 건가.”
국장은 골치 아프다는 듯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의 충실한 손발이 되었
던 류영진은 입원한 상태였고, 다른 이들도 정상은 아니었다. 빌런의 습격
이 몇 차례 더 이루어졌던 탓이다.
“빌런은 무슨!”
세간에서는 우로보로스 탓이라고들 했다. 그들이 새로운 이들을 받아들이
겠다면서, 또다시 신문 광고를 실었기 때문이었다. 신문사를 추궁해 보았지
만, 자기네들은 모르는 이야기라고 했다. 뒤늦게 신문을 회수해 보았지만,
이미 늦었다.
신문에 실린 내용은 이러했다. 자기네와 이상이 맞는 이들을 가벼운 테스트
후 받아들이겠다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빌런이 날뛰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니 이번 일도 그들 때문이 아니냐는 것이었는데, 국장은 그렇게
믿지 않고 있었다.
“제길.”
보나 마나 길드에서 벌인 일이 틀림없을 텐데 증거가 없다. 증거 없이 몰아
가면 외려 역풍을 맞을 수 있기에 선뜻 나설 수도 없었다. 그렇게 망설이는
사이, 다른 이들도 당했고 남은 이는 최무혁이 속한 관리부뿐이었다.
“그쪽 부서는 전원 각성자잖아. 그러니 빌런도 손을 못 대는 거 아닐까?”
누군가는 그렇게 말했지만, 국장은 달리 생각했다. 최무혁이 딴마음을 품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게 아니라면 저렇게 행동할 리 없다. 편협한 마음이 말
도 안 되는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나를 몰아내려는 거지.”
절로 이가 갈렸다. 국장은 절대 이 자리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이번만 넘어가는 것이다.’
다음에는 절대 이리 쉽게 넘어가지 않으리라. 국장은 그렇게 생각하며 선현
길드에 답을 했다.
지현우의 미국행에 지선우가 동행해도 상관없다고 말이다.
생각보다 오래 못 버텼네?”
가준은 피식 웃었다. 선현 길드에 시비를 걸던 깡이라면 더 버틸 줄 알았는
데, 빌런에게 습격 몇 번 당했다고 무너져 내렸다.
덕분에 이번 미국행은 지선우, 지현우, 그리고 한도진, 도가준이 가게 되었
다. 이렇게 된 이상 한도진이라도 붙잡아 두려고 했던 모양이지만, 그쪽도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원하는 건 하나도 못 해내고, 각성자들의 미움만 산
셈이었다.
“얘네는 머리가 없나?”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치 다툼하느라 바빠서 정상적으로 사고할 뇌가
없나, 하는 생각 말이다.
“뭐, 그래도 즐거웠지.”
자신을 죽어라 팼던 사람과 함께 하는 일이었는데도 제법 즐거웠다. 정부
인사를 골탕 먹인 것 때문인지, 아니면 의외로 마음이 맞아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
69.
처음 만났을 때 두들겨 맞은 일을 잊은 건 아니다. 내내 앙심으로 품고 있었
고, 기회만 된다면 갚아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당하고 살기 싫다. 당하느니
먼저 치겠다. 그것이 도가준, 그란 사람을 이루는 원동력이었다.
‘그랬는데 말이지.’
슬슬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시하다가 나중에는 슬며시 올라
와 하이파이브 하던 손을 기억한다. 정부 인사들을 패며 열심히 들썩이던
작은 머리통도 제법 귀여웠다. 실상은 흉악한 존재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인간은 보이는 걸 무시하지 못하니까.
같은 핏줄인 지선우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가까워지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그만큼 강한 위인이었으니까.
“좋아.”
어느 정도 결론을 내린 가준은 다가올 여행을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
좋은 아침!”
선글라스를 쓴 가준은 느긋하게 걸어오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를
본 선우는 딱딱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내뱉었다.
“저 사람도 같이 가는 겁니까?”
“저 사람도 같이 가냐니. 내가 가는 건 이미 알지 않았어? 아니면 선현 길드
의 소식이 느린 건가?”
가준이 대놓고 긁어내리자 점점 주변 온도가 내려갔다. 당장이라도 싸움이
일어날 듯 분위기가 경직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까맣고 작은 강아지가
우렁차게 짖으며 나타났다.
“왕왕!”
“
케로였다. 케로가 짖으면서 끼어들자 이어 점박이가 날개를 파닥이며 둘 사
이를 가로질렀고, 마지막으로 두눈이 떡하니 사이에 자리 잡았다.
“아침 무엇?”
두눈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아, 이게 그거?”
처음 인간의 형태가 되었을 때와는 달리 많이 세련되어졌다. 깔끔한 니트와
바지를 걸쳤으며, 머리도 다듬은 상태라 그냥 보기엔 잘생긴 남자 같았다.
실상은 어마어마한 덩치를 가진 드래곤인데도 말이다.
“두눈입니다.”
어느새 나타난 현우가 이름을 말해 주고는 선우에게로 걸어갔다. 기막힐 정
도로 얌전한 얼굴이다. 실제로는 좀 더 얼굴을 구기고, 욕설도 내뱉을 수 있
으면서. 존대보다는 반말이 훨씬 잘 어울린다.
‘어쩐지 아쉽네.’
가준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마지막 탑승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도진이
었다. 그 또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구부정하게 몸을 구부
리고 낡은 옷만 걸치고 다니더니, 지금은 완전 다른 모습이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냐. 늦지 않았어요, 형.”
그사이 호칭도 변화한 모양이었다. 자신도 나이로 치면 형인데? 누구는 형
이고, 누구는 호칭도 안 부르나. 괜히 심술이 돋아났다.
그렇게 넷은 정부 관계자와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가는 도중에는 딱히 이
렇다 할 일이 없었다. 두눈이 기내식을 혼자 거덜 내려 해서 현우가 혼낸 일
외에는 말이다.
도착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어서 오십시오. 제시카라고 합니다.”
미국 측에서 붙여 준 안내인은 한국말에 무척 능숙했다.
“지나치게 친절한데?”
“중요한 손님이라고 하셨으니까요.”
가준의 도발에도 제시카는 시종일관 웃었다.
“관광을 하고 싶으시면, 따로 안내인을 붙여 드리겠습니다. 물론 안내인이
필요 없으시다면 일행끼리 편히 다니셔도 됩니다.”
제시카는 딱히 뭔가를 하려는 것 같지 않았다. 그저 여느 여행의 길잡이가
그렇듯이 그들의 편의만을 위해 움직일 뿐이었다.
“이상한데.”
가준이 현우에게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뭐가요?”
너무 친절하잖아.”
“친절할 수도 있지요.”
“그렇지. 그건 그런데 예감이 안 좋아.”
선우는 자연스럽게 둘 사이에 다가와 붙어 선 가준을 밀어 냈다. 그러자 가
준은 히죽거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미국에서 싸울 생각은 없는 모양
이었다.
그런 가준을 도진은 유심히 지켜보았다. 한때 현우를 납치하려고 했던 가준
이기에 경계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기묘한 점이 하나 있었다.
‘지나치게 친근하게 군다.’
현우를 몇 번이나 봤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가준이 현우에게 다가갈수록
기분이 나빠졌다.
‘무슨 일을 저지를지도 모르니까.’
도진은 현우에게 가까이 붙었다.
“
숙소에 도착하고 현우가 짐을 풀고 뒹굴려던 순간, 누군가 방문을 쿵쿵 두
드렸다.
“관광지에 왔으면 둘러봐야지!”
방문자는 가준이었다. 현우가 어처구니없단 표정으로 거절하려 했지만, 가
준도 나름 믿는 구석이 있어 찾아온 것이었다. 현재 현우의 비밀을 알고 있
는 이는 그뿐이었으니까.
“그렇게 나오면 재미없을 텐데?”
능글맞게 웃으며 해 오는 말에 현우는 더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휘둘
리는 것 또한 적성은 아니다.
“이번 한 번만. 다음에도 이러면 알죠?”
까맣게 반들거리는 눈동자에 가준은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러나 그것도 잠시였을 뿐이다. 그는 곧 평소대로 돌아왔다.
“참, 당연히 너도 갈 거지?”
도발로 선우를 끌어내고, 이어 방에서 나온 도진도 합류했다. 이렇게 넷이
모이니 분위기가 좋아지려야 좋아질 수가 없다. 신나는 건 가준뿐인 듯했
다.
“심심한 사람들 같으니. 모처럼 외국에 왔는데 즐겨야지!”
“난 침대 위가 제일 좋은데요.”
“나도 침대 위는 좋아해.”
그러면서 가준이 윙크를 하자, 선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붙어 보시겠습니까?”
“내가 뭘 했다고?”
저질스러운 말을 내뱉지 않았습니까?”
“그냥 침대가 좋다는 말이었는데.”
가준은 능구렁이처럼 슥 피해 갔지만 선우는 참을 생각이 없었다. 곧바로
손을 들어 올리려던 순간, 현우가 선우를 말렸다.
“여기서는 말고.”
다른 데서는 괜찮단 소리였다.
“와, 너무하다.”
그 말을 엿들은 가준이 투덜거렸지만, 현우는 그보다 선우가 훨씬 더 소중
했다. 그랬기에 가준의 말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어디 나중에 좀 맞아 보라
지.
물론 그게 가준의 기를 꺾지는 못했다.
“어디부터 가 볼까? 식사? 아니면 쇼핑?”
“어디든.”
현우가 발을 질질 끌면서 걸어가는데, 반대편에서 키가 큰 여성 한 명이 걸
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두눈이 걷는 방향으로 오고 있었는데, 딱히 피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쿵.
그러니 둘이 부딪히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
뭐야, 왜 안 비켜!”
고혹적으로 생긴 여성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뜻밖에도 어설픈 한국어였다.
“나, 피했다. 너도 피했어야지.”
만만치 않게 서투른 한국어로 두눈이 화를 냈다.
“뭐야? 지금 화내는 거야?”
독특한 색의 눈동자가 사나워졌다. 두눈과 여성은 본격적으로 서로 노려보
기 시작했다.
“그만해.”
뒤늦게야 그를 눈치챈 현우가 두눈을 말리기 시작했고, 여성 쪽에서도 보호
자로 보이는 사람이 그녀를 말렸다. 장신인데다 힐까지 신고 있는 여성에
못지않은 키를 가진 남자였는데, 묘하게 인상이 뱀 같다.
“아가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너도 봤지, 카이!”
“도심에서 소란은 피우지 않기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알 게 뭐야!”
아가씨라 불리는 여성은 참으로 천방지축인 모양이었다. 카이란 청년이 달
래는데도 화를 가라앉힐 생각을 하지 않는다. 반면 두눈은 현우가 건네주는
과자에 이미 차분해져 있었다.
“
똥 밟았네.”
가준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자.”
도진 또한 의견을 내었다. 그렇게 넷은 슬며시 아가씨를 피해 자리를 옮겼
다.
“
그래서 말야!”
한창 폭주하던 아가씨는 이제 카이의 머리털을 쥐어뜯고 있었다. 그러다 뒤
늦게야 시비가 걸렸던 이가 사라진 걸 깨닫고 발을 쾅쾅 굴렀다.
“뭐야, 얘네들 어디 갔어!”
“진작에 사라졌습니다.”
“그걸 왜 말하지 않았어!”
그야 상대 쪽이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자들이었으니까. 아니, 정확히는 그
안에 괴물도 하나 끼어 있었다. 지현우.
과거 카이도 현우에게 당해서, 끌려다니던 적이 있었다. 작고 야들야들해
보이는 몸이 먹음직스러워 덤벼들었다가 실컷 두들겨 맞고 바이크 2호가
되었다. 이후 무슨 일만 있으면 끌려가서 그를 태우고 다녀야 했다.
그러던 현우가 어느 날인가부터 자취를 감췄다. 처음에는 좋아했으나, 그도
얼마 가지 못했다. 언제 그가 다시 나타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
두려움을 극복해야 해.’
그때쯤 만난 드래곤이 티아매트였다. 과거 함께했던 드래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던 티아매트. 그런 그녀와 함께라면 모든 걸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난 언젠가 마계의 1위, 알베르크도 뛰어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곁에서 모시게 해 주십시오.”
다른 강한 존재의 비호 아래 있으면 현우가 나타나도 아무렇지 않을 줄 알
았다. 그랬는데 아니었다.
카이는 벌벌 떨리는 손을 꾹 쥐었다 폈다.
‘무서워.’
여전히 무섭고 가슴이 뛴다. 티아매트가 과연 지현우를 이길 수 있을까? 티
아매트의 무섭도록 빠른 성장을 알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좀
더 강한 상대에게 붙었어야 했나. 하지만 당시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알베르크는 만나기도 힘든 자였고, 다른 마족들은 몬스터를 우습게 여긴다.
그나마 나은 건 같은 몬스터 계열인 티아매트뿐이었다.
“뭐야, 왜 그래?”
카이의 이상한 상태를 눈치챘는지 티아매트가 물어왔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
아닌 것 같은데?”
둔한 것 같으면서도 이럴 땐 눈치가 빠르다.
“정말 괜찮습니다. 그보다 지금 쇼핑을 서두르지 않으면, 저녁 약속에 맞추
기 어려울 겁니다.”
“맞다.”
티아매트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당당하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두눈 같은 특이 케이스가 아닌 한 그 위엄 있고 당당한 걸음에 알아서 전부
길을 비켜 주었다.
카이도 그런 티아매트의 뒤를 따랐다. 어차피 언젠가는 다시 그를 만나게
될 수도 있다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다.
‘이겨 낸다.’
그리고 그를 넘어선다. 그게 카이의 목표였다.
“
70.
‘
어쩐지 익숙한 느낌인데.’
인상은 여자 쪽이 더 강했으나, 현우의 시선은 그녀가 아닌 다른 남자에게
로 향했다. 그런 얼굴을 본 적이 없는데 어쩐지 낯설지 않다. 그 생각은 그
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핫도그 트럭 앞에 설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뭐 먹을래?”
여전히 가준은 친근한 척 붙어 다니고 있었다. 현우는 메뉴판을 가리키며
말을 잇는 그를 바라보다가 발을 콱 밟았다.
“악!”
여기서 뼈를 부러트리면 곤란하니 세게는 밟지 않았다.
“시끄럽습니다.”
가준의 비명에 도진이 싸늘한 목소리로 타박을 했다. 원래도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보니 제법 심각해 보인다.
“내 입으로 내가 비명도 못 지르나?”
“쓸데없이 지르니 문제인 겁니다.”
“쓸데없는지 아닌지 네가 어떻게 알아?”
“그보다 몇 번이나 봤다고 반말입니까?”
“내가 연장자잖아. 억울하면 너도 말 놔!”
“그러지.”
대체 왜 저리 사이가 나쁜 걸까. 이유를 생각해 보고 있자니, 어느새 옆에
선우가 섰다. 현우를 빼면 유일하게 둘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이나, 그럴 생각
이 없어 보였다. 하긴 선우도 피곤할 테니까.
“형은 뭐 먹을래?”
난 기본으로 먹을래.”
“나는 이거.”
그 사이로 두눈이 끼어들어 가장 두툼해 보이는 핫도그 사진을 가리킨다.
“그럼 주문할게.”
선우가 핫도그를 주문하는 사이에도 가준과 도진은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과열되기 직전, 현우가 그들을 불렀다.
“안 먹어요?”
“먹어!”
“갈게.”
먼저 이쪽으로 걸어오던 가준이 갑자기 비틀거렸다. 그 틈을 치고 나선 도
진이 빠르게 걸어와 현우의 옆에 자리 잡았다.
“치사하게!”
나름 몰래 한다고 한 모양이긴 했지만, 현우는 전부 봤다. 도진이 그림자로
가준의 발을 건 걸 말이다. 그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양념이 묻은 현우의
뺨을 닦아 주며 말했다.
“저런 위험한 사람과는 어울리지 마.”
“누가 위험해!”
“
당신.”
“너도 처음엔 나랑 같이 손잡았었잖아!”
억울한 가준이 그리 외쳤지만, 도진은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이러다가는
끝도 없이 싸울 것 같았다.
“싸우려면 나 없는 데서 해요.”
“싸우는 거 아냐.”
“싸우는 거 아니다.”
둘은 금방 부정하고는 뒤늦게 핫도그를 주문해서 먹기 시작했다. 며칠간은
그저 그렇게 흘러갔다.
도진과 가준이 수시로 싸우고, 가끔 선우도 참전한다. 그걸 현우가 말리면
다시 얌전해지는가 싶었지만, 틈만 생기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차라리
한국에 있을 때가 더 편했던 것 같았다.
“
*
현우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는 무렵, 미국 내에 들어온 각성자들도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멀리서 눈치만 보던 이들이 슬슬 그에게 접근
해 왔다.
“안녕하십니까? 현우 씨.”
제일 먼저 접근한 이는 러시아 사람이었다. 호텔 로비에서 멍하니 차를 마
시고 있던 현우에게 다가온 그녀는 웃으며 인사를 했다.
“러시아 각성자 관리국의 미샤라고 합니다.”
각성자치고는 작은 체구에 여린 인상을 지닌 여자는 제법 미인이었다.
“안녕하세요?”
여긴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미샤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뉴욕은 전부 즐기셨나요?”
“네.”
가준은 작정하고 여행을 온 사람같이 굴었다. 덕분에 현우는 끌려다니고 있
었고, 본의 아니게 대부분 유명한 곳은 전부 돌아보았다.
“미국도 볼 곳이 많지만, 러시아도 그래요. 모두들 러시아를 추운 나라로만
생각하지만, 실상 볼만한 게 얼마나 많은데요.”
미샤는 자연스럽게 말하며 현우의 곁에 앉았다.
“그리고 능력자에 대한 대우도 대단하답니다.”
“네?”
“현우 씨, 지금의 대한민국에 만족하시나요?”
그럴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스카우트였다.
딱히 다른 나라에 갈 생각은 없는데요.”
“조건이 월등히 좋아도요?”
“네.”
지금 나라에는 동생인 선우가 있다. 현우는 선우를 버리고 다른 나라로 갈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미샤도 그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럼 동생분과 같이 오시는 건 어떠세요? 지금의 선현 길드, 이 이상으로
키울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사실상 더 자랄 수 있는 한국의 길드들
이 이 정도에서 멈춰 선 건 한국의 정부 때문이에요. 그들은 각성자들을 자
신 멋대로 휘두르기를 원하죠. 하지만 러시아를 보세요. 저희는 그러지 않
습니다. ”
미샤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떠한 정치적 압박도, 불리함도 없을 거예요.”
그런 후, 자신들이 줄 수 있는 걸 제시했다.
“던전 클리어 시 내야 하는 세금을 10%까지 줄여 드리겠습니다. 몬스터 부
산물은 정부가 우선 구입하며 반드시 정가 이상으로 구매하겠습니다. 그 외
따로 한국 돈 수백억에 달하는 영토와 건물을 드릴 수 있습니다.”
현우가 아니라면 제법 끌릴 만한 조건이었다. 그사이 잠시 자리를 비웠던
다른 일행들이 돌아왔다. 가준은 투덜거리며 옷깃을 털고 있었고, 도진은
태연한 표정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온다. 그 뒤에서 선우는 못마땅한 표정
을 짓고 있었다. 그만 싸우라고 했더니 어디서 서열 정리라도 하고 온 모양
이었다.
“
뭐야?”
미샤를 발견한 가준이 험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러시아 각성자 관리국의 미샤라고 합니다.”
그에 비해 미샤는 여전히 느긋하다. 하지만 이어지는 행동에는 표정이 미묘
해질 수밖에 없었다. 도진이 현우를 들어다가 다른 자리에 앉히고 선우가
그사이에 앉았다.
선우의 브라콤이야 유명하다지만, 다른 이들은 왜 저런담? 미샤는 살살 눈
치를 보았다. 그리고 이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을 좋아하는 건 성별을 가리지 않지.’
의무 때문에 나온 일에 재미가 붙었다.
“제가 여기 온 건 스카우트 때문입니다. 그 외의 나쁜 목적은 없어요.”
양손을 들어 보이며 말하자 기세가 조금 누그러든다.
“오늘은 이만 물러갈게요. 그래도 생각은 한번 해 보세요. 좋은 조건이잖아
요?”
미샤는 윙크를 하고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는 선우 씨도 같이 이야기했으면 좋겠네요.”
그런 뒤 미련 없이 떠나갔다.
“
무슨 이야기 했어?”
선우의 물음에 현우는 들었던 걸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휘유. 조건 좋은데?”
전부 들은 가준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작정하고 밀어주겠단 소리 아냐. 하긴 나 같아도 그러겠다. 이런 테이머가
어디 또 있나.”
무려 드래곤을 테이밍했다. 심지어 그 드래곤은 S급 각성자 여럿을 상대한
전적도 있었다. 이 정도면 탐이 날 만도 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 나라는 러시아뿐만이 아니었다. 러시아를 시작으로
여러 나라가 조건을 제시하며 현우를 끌어들이고자 했다.
아무 말 없이 지켜보던 도진은 어느 날 현우에게 불쑥 물었다.
“다른 나라로 갈 거야?”
“아니요.”
오늘따라 둘 다 왜 이런담. 현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착실하게 대
답해 주었다.
“난 아무래도 괜찮아.”
그런 현우에게 도진이 의외의 답을 돌려주었다.
“
뭐가요?”
“네가 한국에 있건 어디에 있건 따라갈 거니까. 원하는 대로 해.”
“네?”
왜 따라와요? 현우는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형 길드는 어떻게 하고요? 요즘 한창 규모 키우는 중 아니었어요?”
“그건 그런데. 나는 네가 더 소중해.”
도진의 말에 가슴이 간질간질해져 왔다.
“그러니까 어딜 가던 날 떼어 놓고 가지 마.”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현우는 손가락으로 가슴을 긁어내려 보았다.
그래도 간질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도진은 그런 현우를 바라보다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는 커다란 손이 기분 좋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 사람
도 어느새 문을 열고 내 안으로 들어왔구나. 지금까지는 선우만이 가장 소
중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도진 또한 그 범주에 들어가게 되었다.
“어디 갈 땐 반드시 이야기할게요.”
“그래.”
부드럽게 웃은 도진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점점 커지는 심장의 울림이 그
에게도 들릴 것 같았다.
“
쿵쿵쿵.
격렬한 심장의 울림에 저도 모르게 눈을 감은 순간,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여기서 뭐 해?”
가준이었다.
“오후에는 미술관 가기로 했잖아.”
저놈의 여행광. 저도 모르게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어쩐지 좋은 기회
를 놓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선우는?”
“안에 있어요.”
“그래? 얼른 데려와. 두고 가면 삐질라.”
애초에 미술관 정도는 혼자 다녀오지. 꼭 다 같이 가려고 든다. 현우는 투덜
거리며 선우를 부르러 안쪽으로 들어갔다.
“눈치가 없네.”
도진이 짜증이 담긴 목소리로 가준에게 말했다.
“내가 뭘?”
가준은 히죽거리며 답했다.
눈치가 없다니. 눈치 하면 난데.”
알고 망쳤단 소리였다.
“아직 덜 맞았나 보군.”
“어쩌다 이긴 걸로 의기양양하기는.”
가준이 고개를 들고 도진을 마주 보았다. 도진의 발밑에서 그림자가 일렁이
기 시작했고, 가준은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다시 싸워 보면 알겠지.”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텐데.”
“해 봐야 알 거 아냐?”
가준은 끝까지 지지 않으려 들었다.
“둘 다 꺼져 버렸으면 좋겠군요.”
어느새 객실 밖으로 나온 선우가 그사이에 끼어들었다. 현우는 몬스터를 챙
기느라 아직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세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형성되
었다.
“
71.
“
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제일 먼저 타깃이 된 이는 가준이었다. 원래도 사이가 나빴기에 선우는 더
욱더 그를 경계했다. 자신을 이길 수 없으니 형을 노리는 건지도 모른다. 그
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뭘 어쨌다고?”
가준이 어깨를 으쓱이며 되물었다.
“자꾸 형에게 접근하지 않습니까. 그런다고 형이 백호 길드에 갈 것 같습니
까?”
그 말에 가준은 선우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지금 가준이
현우의 능력을 탐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뭐, 이전이라면 그랬겠지만.’
지금 그를 움직이는 건 현우에 대한 호기심과 같이 돌아다니면서 생긴 호
감, 그게 다였다. 선우의 생각처럼 드래곤을 테이밍하는 능력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그보다 이거 재밌는데?’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하나만 물어보자.”
“뭡니까?”
“저쪽은 형님을 왜 따라다니는 건데?”
가준의 물음에 선우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예전에 빚진 걸 갚는 겁니다.”
“우리랑 편 먹고 형님을 납치하려 든 거?”
노골적인 말에 도진과 선우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래도 가준의 말은 거침없
었다. 애초에 이런 성격이다. 앞에 누가 있다고 하더라도 바꿀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니, 그건 이상하잖아. 딱 한 번 그런 걸로 누가 지금까지 봉사해?”
“그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큰 빚을 졌습니다. 그걸 모두 갚기 전에
는 떠날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도진이 묵직한 목소리로 반발했다.
“알았어. 그러니까 지금 그쪽은 과거 빚을 갚기 위해 옆에 있다는 거지? 그
래서 지선우, 너도 가만있는 거고?”
사실 선우도 가만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걸 가준이 알 수는 없었다.
어느 호구가 빚진 걸 갚으려고 지금까지 쫓아다닌단 말인가! 게다가 도진은
누구한테든 호구처럼 휘둘릴 사람이 아니었다. 같이 납치를 계획해 놓고 양
해도 없이 멋대로 뛰쳐나간 놈 아니던가.
이걸 모를 리가 없을 지선우가 입을 다물고 있는 걸 보면 그보다 더 숨기고
싶은 것이 있는 거다.
지금까지 파악한 사실을 조합해 보면 어떤 상황인지는 명백했다. 이렇게 되
면 이야기가 다르지.
“
일단 나는 능력을 탐내서 쫓아다니는 게 아냐.”
“그럼 뭡니까?”
가준은 능글맞게 웃으며 대답했다. 형님바라기인 지선우를 좀 놀려 줘 볼까
싶은 마음도 있었다.
“좋아해서.”
“……어떤 의미로 말입니까?”
“몰라서 묻는 거야?”
말을 내뱉고 얼마나 지났을까. 굳어 있던 선우의 손이 움직이며 그 위로 얼
음 창이 떠올랐다. 이어 인정사정없이 가준을 공격했다.
공격할 것 같아서 대비를 하고 있었기에 당하지는 않았지만, 이마에 핏대를
세우고 득달같이 덤벼드는 사나운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진정해. 진정하라고! 여긴 호텔 안이야.”
다른 곳이라면 가준도 신나서 맞섰겠지만, 그들은 외국에 초대받은 손님인
데다 이곳에는 다른 유력 인사들도 머물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 선우를 설
득해 봤지만 통하지 않았다. 어느새 복도는 얼음 창으로 가득 채워졌다.
“죽어 버리십시오.”
“아니,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게 죽을 일이야?”
“당신은 죽어도 됩니다.”
“
가준은 필사적으로 얼음 창을 피해 몸을 굴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회전하는
물방울이 총탄처럼 쏟아졌다. 대충 복도에 놓여 있던 화분을 던져 급소 부
위는 막았으나, 문제는 이후로도 쏟아지는 물방울의 양이었다. 여기서 버틴
다면 일부는 고스란히 맞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제기랄!”
결국 어쩔 수 없이 벽에 주먹을 내질러 무너트린 뒤, 옆 공간으로 피했다.
그렇게 공간이 트이자 회피는 좀 더 수월해졌지만, 그게 다였다. 눈이 돌아
간 채 덤비는 선우에게서 피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 좀 말려 보라고!”
이러다가는 위층을 전부 무너트릴 것 같아서 도진에게 소리쳐 보았지만, 고
민하는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환장할 상황이었다. 원거리
공격이 잘 먹히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선우는 그대로 돌진해 와 가준의 멱
살을 잡았다.
‘평소에 이런 건 내 역할인데!’
사고 치는 역할 말이다. 가준은 한탄을 하며 미친 듯이 덤벼 오는 선우를 막
아 냈다. 그리고 마침 그때, 현우가 방 안에서 나왔다.
뭐 해?”
케로를 안고 나온 현우는 바닥을 뒹구는 가준을 한 번, 그 위에 올라타서 주
먹질을 하는 선우를 한 번 바라보고는 눈을 깜박였다.
“싸워?”
“
호텔 벽은 무너져 있고, 어느새 나타난 직원이 안절부절못하며 멀리서 지켜
보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도 선우는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형, 잠시만 기다려. 곧 처리할게.”
“뭘 처리하는데?”
“개새끼 하나.”
아무래도 선우가 말하는 개새끼는 가준 같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케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현우는 고개를 갸
웃거렸다. 일단은 동생부터 말려 봐야겠다. 선우가 괜한 짓을 저질렀을 것
같지는 않지만, 장소가 건물 내부다. 자칫 잘못하다가 무너지기라도 하면
인명 피해가 적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싸우면 안 돼. 싸우려면 나가서 싸워.”
차분하게 달래자 선우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나가서 죽일게.”
그러더니 가준의 멱살을 잡고 호텔 창문가로 다가간다. 그대로 밖으로 뛰어
내릴 셈인 듯했다. S급 각성자라 그래도 죽지는 않을 테니.
“잠깐! 어이, 지금 나를 죽인다잖아! 왜 안 말려!”
“말렸는데요.”
“그게 말린 거야?”
나름?”
가준이 필사적으로 발버둥 쳐서 선우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선우가 다
시 그의 멱살을 잡아채려고 했으나, 현우의 옆으로 물러서는 가준이 좀 더
빨랐다.
“들어 봐. 난 억울하다고!”
“형, 듣지 마.”
“아니, 그러니까!”
가준이 하소연을 하려는 순간, 뒤에서 까만 것이 뻗어 나와 그의 입을 틀어
막았다.
“읍읍!”
입술이 붙었으니 말을 할 수가 없다. 가준이 답답함에 몸부림치다가 몸을
돌려 입을 막은 당사자를 후려쳤다. 하지만 당사자인 도진은 여유롭게 공격
을 피하고, 그대로 가준을 붙잡더니 호텔 창문을 깨고서 밖으로 훌쩍 뛰쳐
나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미처 손을 써 볼 틈도 없었다.
“뭔데?”
현우가 멍하니 서 있다 선우에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단호했다.
“형은 몰라도 돼.”
“
그와 동시에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직원이 비명을
질렀다.
“악!”
아무래도 오후에 관광을 나가는 건 무리일 것 같았다. 현우는 머리를 긁적
이며 돌아서 잔뜩 겁을 먹은 직원을 달래기 시작했다.
쿨럭쿨럭!”
그림자에 의해 폐허로 끌려온 가준은 미친 듯이 기침을 했다. 어찌나 꽉 묶
어서 끌고 오는지 미처 반항할 틈도 없었다.
“아니, 진짜 이 미친 새끼들이.”
아무래도 이들은 자신을 동네북으로 아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그 생각
을 바꿔 줘야겠지. 안주머니에 있는 독병을 쥔 가준은 침을 퉤 뱉고는 몸을
일으켰다.
“지선우야 그렇다 치자, 넌 또 왜 이 지랄이십니까?”
독병을 저글링하며 묻자 도진이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가준을 빤히 바라보았
다. 그러더니 입을 열었다.
“현우를 좋아하십니까?”
“그렇다면?”
“좋아한다는 의미가 제가 생각하는 의미가 맞습니까?”
“
연애의 의미라면 맞지.”
실상은 아직 그 정돈 아니었지만, 이왕 저지른 거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
다. 말하다 보니 나쁜 생각도 아닌 것 같았고 말이다. 여자를 더 좋아하긴
하지만, 현우라면 남자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마침 도진이 그에 대해 물어
왔다.
“둘 다 남자 아닙니까.”
가준은 여기서 명대사를 내뱉었다.
“나는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아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마침 남자였을 뿐이
지.”
소설에 흔히 나오는 대사였다. 하지만 그걸 들은 도진은 다시 생각에 잠겼
다. 그렇게 한참을 가만있으니 공격할 의욕도 사라졌다. 가준은 더러워진
옷을 탈탈 털며 한숨을 쉬었다. 뭔가 찝찝한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다.
“계속 생각할 거면 나 먼저 간다.”
그러고 나가려는데, 무언가가 덜컥 발을 붙잡았다.
“아씨!”
도진의 그림자였다.
“또 왜!”
“좋아한다는 건 뭡니까?”
“
좋아하는 게 좋아하는 거지! 뭘 그런 걸 물어.”
“누군가를 계속 보고 싶고, 가슴이 뛰고. 그런 감정이 좋아하는 겁니까?”
“알고 있네!”
알면서 왜 물어! 가준이 신경질을 내며 답하자,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런 거였습니다.”
뭔가를 납득한 듯한 표정이다.
“됐지? 그럼 놔.”
“아뇨. 그럴 순 없습니다.”
“뭐?”
“아무래도 저도 현우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 좋아합니다.”
그걸 이제 안 게 더 신기하다.
“그래서?”
“경쟁자는 적은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도진은 빙긋 웃었다. 어딘가 찝찝하다 했더니 이걸 예고한 모양이
었다.
“시발.”
“
가준의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주변에 왜 이리 미친놈이 많은지 모르겠
다. 그는 다시 작은 독병을 손가락 사이에 쥐었고, 물밀듯이 밀려오는 도진
의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상성이 나쁜데.’
원거리 공격이 잦은 선우보다 도진과의 상성이 더 나빴다. 그림자는 이쪽을
공격할 수 있는데, 이쪽은 그림자를 공격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저번에도
허무하게 졌는데, 또 이렇게 되어 버리다니.
가준은 이를 악물고 도진을 노려보았다.
72.
도진은 심장 위에 손을 얹었다. 뒤늦게 알게 된 감정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
었다. 그동안은 동생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 왔다. 무슨 행동을 하든 사랑스
러워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여겼었다.
가준이 거슬리는 건 동생에게 해충이 붙었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떼어 놓기 위해 애썼는데 모두 아니었다.
‘왜 몰랐을까.’
깨닫고 나니 몰랐던 게 신기할 정도로 세상이 달리 보인다. 폐허의 구멍 뚫
린 건물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유독 맑아 보였고, 멀리서 들려오는 소음마
저 감미롭다.
‘그래, 사랑이었구나.’
이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도진은 웃으며 자유로운 손을 휘둘렀다.
악 저 미친 새끼!”
가준이 욕설을 내뱉으며 몸을 굴렸다. 하지만 그림자는 끈덕지게 그에게 달
라붙으며 공격을 가했다. 필사적으로 피하면서 맞서 공격을 날리긴 했지만,
그도 한계가 있는 모양이었다. 결국 먼저 손을 든 건 가준이었다.
“포기, 포기!”
악을 쓰는 가준에게 도진이 부드럽게 물었다.
“뭘 포기하는 겁니까?”
“지현우!”
그제야 도진은 그림자를 거둬들였다.
“그 말 지키는 겁니다?”
“내가 진짜 더러워서! 누가 경쟁자를 이렇게 죽이려 들어!”
“저요.”
“미치겠네.”
가준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옷을 털었다. 시계를 보니 시간이 제법 흘렀다.
“그럼 저는 돌아가 보겠습니다.”
외출하기로 했으니, 현우가 아직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시간이 제법 지났
으니 잔뜩 심통이 났을 테고, 가서 얼른 달래 줘야 할 것 같았다.
“ ,
참 도가준. 당신은 오지 마십시오.”
“뭐? 그럼 나는 어디서 지내?”
“명색이 백호 길드의 길드장 아닙니까? 호텔 하나 못 구합니까?”
“야!”
뒤에서 뭐라고 외치는 가준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도진은 깔끔하게 무시했
다.
“왔어요? 가준 씨는요?”
“다른 호텔에서 묵겠대.”
“어디요?”
“그건 듣지 못했어.”
도진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선우에게 기대 소파에 늘어져 있던
현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호텔 옮기래요. 그래서 다른 데 가야 하는데.”
이제 절대 싸우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미 저지른 일이 있다. 그 때문에 호텔
관계자는 불안해했고, 결국 숙소를 옮기게 되었다.
“귀찮게 됐네요.”
현우가 투덜거리자 도진은 그를 달래 주었다.
“ ,
도가준이 다른 데로 갔으니 이제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거야.”
“정말요?”
의심하는 듯한 시선이 와 닿았지만, 도진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당연하지.”
“일단 믿어 볼게요.”
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날의 일은 그렇게 해프닝으로 지나
가는 듯했다. 다음 날, 다시 도가준을 만나기 전까지는.
“
*
세계 각성자 연합의 장을 뽑는 자리. 그 자리는 뉴욕 외곽의 거대한 건물에
서 진행하기로 하였다. 그 때문에 현우와 선우 그리고 도진은 정장을 차려
입고 그 건물로 향했다.
“정식 명칭은 세계 각성자 협회가 될 것입니다. 오늘 뽑히는 분이 협회장이
되시는 거죠.”
안내인으로 붙은 여성이 능숙한 목소리로 설명을 덧붙였다.
“투표는 각 나라에 배정된 표를 함에 넣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혹시 모를
부정을 방지하기 위해 각 함은 각성자들이 지키고 있고, 함 자체도 몬스터
부산물을 이용해 만들었습니다.”
“그럼 한국에는 몇 표가 배정된 겁니까?”
세 표입니다. 표는 직접 가서 받으셔야 합니다. 혹시 더 질문이 있으신가
요?”
“없습니다.”
그걸 끝으로 안내인은 새로운 사람을 안내하기 위해 사라졌다.
“세 표면 인원수가 딱 맞네.”
선우의 말에 현우가 되물었다.
“우리 쪽에 1명 더 있지 않아?”
“그쪽은 덤인가 보지.”
말투가 신랄하다. 어제 그 일 이후로 가준에 대한 선우의 평가가 확 내려간
모양이었다. 욕설은 하지 않았지만, 그게 다였다.
“누가 덤이야?”
거기에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도가준이었다.
선우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고개를 돌렸고, 도진 또한 표정을 굳혔다.
“왜? 나도 여기 초대받은 몸이라고.”
가준이 비아냥거리며 초대장을 흔들어 보였다.
“약속은 지키지 않는 겁니까?”
“
도진의 말에 가준이 이죽거리며 대답했다.
“그래서 다른 호텔에서 묵었잖아?”
“그런 의미가 아닌 걸 아시지 않습니까?”
“아니, 포기해도 친구로는 남을 수 있지.”
그걸 또 능글맞게 받아넘긴다. 이대로면 여기서도 뭔 일을 벌일 것 같은지
라 현우가 피곤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여기서는 싸우지 말죠.”
“말은 바로 해야지. 내가 먼저 싸움 걸었나?”
그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제도 먼저 죽이려고 덤빈 건 선우였으니까. 그
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현우는 선우의 편이었다.
“화나게 했으니까 그랬겠죠.”
“와, 와!”
가준이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를 높였다. 그래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선뜻 손을 쓰려 들지는 않았다. 쓴다고 해도 선우와 도진을 이길 수 없기도
했고 말이다. 그렇게 넷이서 투덕거리는데 갑자기 거구의 남자 하나가 접근
해 왔다.
“여어, 한국의 여러분. 반갑습니다!”
존재감이 대단한 남자인지라 자연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리로 쏠렸다.
피닉스 길드의 바카디다.”
“야, 네 친구냐? 좀 더 제대로 불러.”
몇몇이 그를 알아보고 숙덕거리다 몸을 움츠렸다. 그 덕분에 현우도 그의
정체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미국 2위 길드인 피닉스 길드의 길드장, 바카디. 성격이 거칠고 난폭한 남
자로 알려져 있으며, 미국 내 평판은 좋은 편이 아니다. 정의를 앞세우며 일
을 가려 하는 가디언 길드와는 다르게 더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는 탓에 이
미지가 나쁘기 때문이었다.
레온이 정의를 위해 길드를 세웠다면, 바카디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 길드를
굴린다.
바카디가 눈동자를 굴리다가 현우를 바라보았다. 어딘가 끈적하고 집착이
느껴지는 눈동자에 기분이 더러워졌지만, 애써 내리눌렀다.
“이쪽이 지현우?”
“네.”
“와우, 반갑습니다! 드래곤을 길들인 테이머라고 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
습니다.”
바카디는 태연하게 손을 내밀며 웃었다. 악수하자는 것 같았지만, 어쩐지
내키지 않는다. 망설이는 사이, 가준이 앞으로 나서서 그 손을 대신 잡았다.
“와우! 저도 피닉스 길드에는 관심이 많았습니다. 반갑습니다!”
“
어찌나 너스레를 떠는지 바카디가 불쾌함을 표시할 틈도 없었다.
“당신은 백호 길드의 도가준이지요?”
“네, 맞습니다.”
가준이 맞잡은 손에서 점점 힘이 느껴졌다.
‘내가 동네북인가. 개나 소나 만만하게 보네.’
바카디의 손을 잡은 가준의 손에도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돌아오
는 힘이 점점 더 커졌다. 힘 하나는 미국 최고라더니, 무식할 정도로 강하
다.
하지만 가준도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는 한국의 각성자였고, 그중
에서도 무려 2위인 백호 길드의 길드장이었다. 여기서 물러났다가는 한국
과 백호 길드가 웃음거리만 될 뿐이었다.
‘씨발, 그런데 버티기 쉽지 않네.’
서서히 웃는 낯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선우와 도진도 그걸 눈치챘지만, 끼
어들 수가 없었다. 인제 와서 사람을 교체하자고 하기도 우스운 꼴이니까.
절로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아무리 밉상이라도 같은 나라 사람이니까.
분위기가 험악해져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쯤, 현우가 앞으로 나섰다. 그
는 태연하게 바카디와 가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리며 말했다.
“계속 악수하실 겁니까? 저랑도 하시죠?”
그러면서 눈웃음을 쳤다.
와왕.”
“끼르륵.”
그 눈웃음을 본 케로와 점박이가 남들 몰래 슬며시 뒤로 물러났다. 두눈박
이 또한 둘을 따라 몸을 움직였다.
‘화났네.’
‘화났다.’
‘화났어.’
지금 이 순간, 세 몬스터의 마음은 하나로 모였다.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
가 좀 더 거리를 벌렸다.
“
쪼그만 게.’
바카디는 말린답시고 눈웃음치며 끼어든 현우를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이
제 즐거워지려는 참인데 방해라니. 아무래도 쓴맛을 보지 못하고 자란 모양
이었다. 급 흥미의 대상이 바뀌었다.
도가준보다는 이 쪼그만 녀석을 혼내 주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마음을 정
한 이후 가준의 손을 놓으려 했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다음에 일어
날 일을 그도 예측한 모양이었다.
‘그래 봤자지.’
한 번 더 힘을 주자 가준이 밀려났다.
‘
저야 좋지요. 악수할까요?”
바카디는 현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말 작고 가느다란 손이다. 야들야들해
보이는 것이 힘을 조금만 줘도 부서질 것 같았다.
비열한 웃음이 바카디의 입가에 떠올랐다.
“형!”
지선우가 다급히 말리려 들었고, 그 옆에 있던 한도진도 가만있지 않았다.
어느새 자신의 주특기인 그림자를 불러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바카
디도 아니었다. 그는 힘으로 그 모든 걸 받아치고, 현우의 손을 잡았다.
역시 부드럽고 연약한 손이다. 이런 고생도 해 보지 않은 손은 짜증 난다.
저지르고 나서 수습이 귀찮아지겠지만, 어떠랴. 마음대로 움직여라! 그게
바카디였다. 그걸 위해 쌓아온 권력, 힘인데 새삼 피하고 싶지 않았다.
울부짖으며 괴로워해라. 바카디는 맞잡은 손에 인정사정없이 힘을 주었다.
우드득.
꽉 잡힌 여린 손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
일 것이다. 바카디의 입이 쭉 찢어졌다.
“
73.
‘
이 새끼가 미쳤나?’
자기 손이 으스러지고 있는데 왜 쪼개는지 모르겠다. 혹시 변태인가? 현우
는 기겁한 표정으로 슬슬 손을 뺐다. 그리고 그쯤 바카디가 자신의 손을 바
라보며 고함을 내질렀다.
아악!”
변태가 아니라 이제야 자기 손이 망가진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이어 살의
가 담긴 난폭한 주먹이 날아들었다.
‘이건 들키겠는데?’
한국으로 돌아온 김에 쉬고 싶었고, 동생도 뭐라 하지 않았기에 힘을 쓰지
않았다. 그 때문에 다들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그 오해를 지키고자
맞아 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렇기에 태연히 그 자리에 있었으나, 다른 이들의 눈에는 그게 무척 위태
로워 보인 모양이었다.
“말려!”
기겁하며 몇몇 각성자들이 둘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그중 가장 빨랐던 사람
은 선우와 도진, 그리고 바로 옆에 있던 가준이었다.
“와악!”
가준이 소리를 지르며 현우를 낚아챘고, 선우가 현우의 앞에 얼음으로 장벽
을 만들었으며, 도진의 그림자가 바카디의 주먹을 막아 냈다.
그리고 그게 바카디의 화를 돋웠다.
“죽어!”
특유의 초재생 능력으로 순식간에 주먹을 회복시킨 바카디는 현우에게로
돌진했다.
“
물론 선우나 도진이 그를 가만둘 리가 없었다. 바카디가 쿵쿵거리며 달려오
는 길목에 그림자가 깔려 그를 붙잡았다. 이어 곧바로 회전하는 물방울이
탄환처럼 바카디에게로 쏟아 내렸다.
“와오.”
서로 싫어하면서 궁합 하나는 찰떡이다.
도진이 묶으면 선우가 공격하고, 선우가 묶으면 도진이 공격한다. 바카디는
그 자리에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실컷 공격을 처맞았다.
언제 이런 모습을 또 보겠는가. 달려오던 각성자들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멍하니 그를 구경하였다. 그러다 몇몇은 박수를 치기도 했다.
‘쟤 더 빡치겠는데?’
어찌나 환상적으로 쥐어 패는지 보고 있는 가준도 감탄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럴수록 바카디는 점점 더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 갔다.
“이제 더 못 참겠다!”
“언제는 참았다고?”
가준이 무심결에 내뱉은 말을 들은 바카디가 눈을 사납게 떴다. 이어 근육
을 불끈거리며 키워 가기 시작했다.
“야야! 저거 봐!”
“미쳤어? 여긴 건물 안이라고!”
바카디는 초재생으로 몸을 회복시켜 가며 힘으로 몬스터를 굴복시키는 각
성자였다. 거대한 몬스터도 쉽게 이겨 내는 그 힘을 여기에 퍼부으면 건물
이 멀쩡하게 버틸 리 없었다.
“다 뒈져 버려!”
“뒈지는 건 그쪽이겠지요.”
선우는 모처럼 험악한 말을 쓰며 허공에 거대한 얼음 창을 만들어 내기 시
작했다. 순식간에 모양을 갖춘 거대한 얼음 창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
다. 거대 몬스터를 상대할 때 주로 쓰는 기술인데, 지금 그걸 바카디에게 쏟
아부을 속셈이었다.
그걸 깨달은 도진은 곧바로 그림자로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물론 그러면
서 바카디를 그 자리에 못 박아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가! 이 바카디가! 이 정도도 못 이겨 낼 것 같은가!”
상황이 개판이 되었다.
“야, 저거 어떻게 해?”
가준이 질린 표정으로 셋을 바라보며 물었다.
“뭘 어떻게 해?”
현우가 하품을 하며 되물었다.
“진짜 죽일 것 같은데? 오늘 여기가 뭐 하는 곳인지 잊었어? 그리고 바카디
가 아무리 개차반이라도 일단은 미국놈에 협회장 후보다?”
알 게 뭐람.”
“아니! 그러면 안 되지!”
가준은 답답함에 가슴을 두드렸다. 하지만 현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
금 그에게 중요한 건 동생과 도진이 바카디를 죽이느냐 마느냐가 아니었다.
‘저거 좀 이상한데?’
바카디에게서 익숙한 느낌이 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뭔지 금방 떠오르질
않았다.
현우는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팔을 툭툭 두드렸다. 점차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난 저 힘을 어디선가 봤어. 잊었을 리가 있나.’
마계. 그곳의 마족들이 저런 힘을 썼었다. 그를 떠올린 현우의 눈이 반짝였
다. 아무래도 바카디는 여기서 죽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묻고 싶은 게 생겼
기 때문이다.
“케로.”
이름을 부르자마자 찰떡같이 뜻을 알아들은 케로가 몸을 크게 부풀렸다. 그
러고는 곧바로 바카디와 선우 사이로 뛰어 들어가 바카디를 왕 물었다.
‘이런 지저분한 근육질 아저씨 물고 싶지 않아!’
그렇지만 주인이 시켰으니까! 케로는 그대로 바카디를 그림자에게서 뜯어
내 선우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났다. 물론 계속 물고 있는 건 찝찝하니까 곧
“
바로 뱉어 냈다. 침도 뱉었다.
“이 개새끼는 뭐야!”
바카디가 길길이 날뛰고, 선우는 잠시 공격을 멈춘 채 상황 파악에 들어갔
다. 케로는 절대로 혼자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모든 건 현우가 명
령했다는 소리였다.
선우는 미친 듯이 회전하던 얼음 창을 손을 휘저어 부숴 버리고는 현우의
곁으로 다가갔다.
“형, 괜찮아?”
혹시라도 다쳤을까 손을 잡고 꼼꼼하게 살펴보았지만, 멀쩡하다.
“응, 괜찮아.”
현우는 손을 흔들어 보이며 자신의 무사함을 증명해 보였다.
“형 상처부터 봤어야 하는 건데.”
순간 분노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선우는 반성하는 태도로 어깨를 축 늘어
트린 채 고개를 숙였다.
“괜찮다니까.”
현우는 아직 어린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사이 바카디를 다시
묶어 둔 도진이 가까이 다가와 재차 현우의 손을 잡았다. 조심스럽게 손바
닥을 문지르던 손가락이 슬금슬금 움직여 서로 얽혀 들었다. 그저 상처를
걱정하는 행동일 터인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손에 땀이 차는 것
같기도 했다.
“다친 데는 없어?”
“네, 없어요.”
현우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선우는 자신이 어떠한 존재라도 사
랑해 줄 사람인 걸 알고 있다. 세상에 단 둘뿐인 가족이니까. 하지만 도진
은? 다른 사람에게는 태연히 본색을 드러내면서도 그에게는 저도 모르게
감추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좋은 사람을 속인 건가?’
그런 생각을 하니 가슴이 쿡쿡 아파 왔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도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놀랐을 현우를 보듬어 주고자 했다.
“많이 놀랐을 거야.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쉬는 게 어떨까?”
걱정이 담긴 표정으로 부드럽게 달래 주는 모습이 달콤하다. 그 말을 듣고
있자니 절로 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현우는 저도 모르게
‘네! ’하고 대답할 뻔한 입을 틀어막았다.
‘아니, 아니지.’
아직 할 일이 많은데 벌써 돌아가서는 안 된다.
쉬어야지.”
안 되는데 몸이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럼요. 쉬어야죠.”
현우가 헤실거리면서 대답하자 옆에서 가준이 기가 찬 표정으로 태클을 걸
어 왔다.
“다들 정신 차려! 쉬러 가긴 뭘 쉬러 가! 지선우, 우리가 나라 대표로 온 거
잊었어? 한도진, 이 난장을 쳐 놓고 뭘 쉬러 가!”
“저는 충분히 제정신입니다.”
“현우는 좀 쉬어야 합니다. 얼마나 놀랐을까.”
“아니, 아니! 지금 일부터 해결해 놓고 가야지! 그리고 지현우는 멀쩡하거
든? 엄청 멀쩡하거든?”
“몸만 멀쩡하지, 마음은 그렇지 않을 겁니다.”
다들 말이 통하질 않는다.
‘나만 여기서 정상인인 거야?’
언제나 미친놈이라는 소릴 들었는데, 이들 사이에 끼니 자신이 정상같이 느
껴졌다. 가준은 침착하려고 애쓰며 그들을 설득했다.
“일단 조금만 기다려 보자. 곧 책임자가 나올 테니까 사정을 설명하고오오!
어디 가!”
“
돌아갑니다. 애초에 외국에서 초대한 손님에게 이리 무례하게 군 건 이쪽
이니까 저희가 이렇게 나와도 할 말은 없을 겁니다. 목격자도 많으니까요.”
선우는 그 말을 끝으로 현우의 앞에 등을 돌리고 앉았다.
“형, 업히자.”
“그 정돈 아닌데? 걸을 수 있어.”
현우가 손을 내저으며 거절하는 틈을 타 도진도 슬쩍 그 옆에 앉으며 등을
내보였다.
“내 등이 더 편할 거야.”
결국 가준은 그들을 설득하는 걸 포기했다.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래, 굳이 외국까지 나와서 숙이고 들어갈 필요가 있겠는가. 가준은 슬슬
걱정을 내려놓기로 했다. 그쯤 저 멀리서 새로운 사람이 나타났다.
평소와는 다르게 냉엄한 표정을 지은 금발의 남자, 그는 레온이었다. 몇몇
사람을 거느린 채 이쪽으로 다가온 그는 케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바카디
와 두 남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현우를 보더니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바카디, 자네 미쳤나?”
“누가 미쳤다고?”
“자네 말이야, 바카디. 피닉스 길드의 길드장.”
“
미친 건 저쪽이겠지! 감히 날 이 꼴로 만들어?”
“이미 말은 다 전해 들었어. 먼저 시비를 건 쪽도, 그런 주제에 바닥을 추하
게 나뒹구는 것도 그대라고.”
레온은 싸늘한 표정으로 인정사정없이 바카디를 비난했다.
“이 일은 이대로 넘어갈 순 없어. 그 정돈 알겠지?”
“하, 넘어가지 않으면 어쩔 건데?”
“일단 협회장 후보 자리 박탈 건을 회의에 올릴 거야.”
“누구 맘대로!”
바카디는 어느새 풀린 몸을 벌떡 일으켰다.
“협회를 만들려는 의의가 전 세계가 공조하여 세계 평화를 지키기 위함인
데, 자네는 그와 맞지 않아 보이는군. 그리고 벌은 협회장 후보 박탈로만 끝
나지도 않을 거야. 무고한 사람을 난데없이 공격한 것도 대가를 받아야 하
지.”
“내가 왜!”
“애인가? 떼쓴다고 모든 게 해결될 줄 아나?”
“난 억울하다고! 손이 으스러진 건 내 쪽이거든?”
그 말에 주변 각성자들의 표정이 똑같이 일그러졌다.
“
그를 상대하던 이는 작고 여려 보이는 테이머 계열 각성자다. 테이머 계열
은 다루는 몬스터의 힘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당사자는 힘이 약한
경우가 많았다. 힘으로 몬스터를 두들겨 패는 바카디와는 비교도 할 수 없
단 소리였다.
일부는 바카디의 말을 듣고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확인해 봤지만, 무척이나
멀쩡해 보였다.
“와, 양심도 없어.”
“원래 없었잖아.”
자연 나오는 소리가 곱지 않았다.
74.
바카디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공간에 그의 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게다가 가디언 길드의 길드장인 레온까지 있었으니. 아
무리 미친 멧돼지라 불리는 막 나가는 그라도 더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
다.
“두고 봐라. 다음에는 이렇게 끝내지 않을 거다.”
악당 같은 대사를 내뱉으며 바카디가 끌려가자 레온은 그를 보며 혀를 찼
다. 협회장 후보에 오르기 위해 그리 애를 쓰더니, 결국 자기 손으로 모든
걸 망치지 않았는가.
불쾌함이 치솟았지만, 레온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잊지 않았다. 그는 현우
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잘못은 다른 사람이 했는걸요.”
현우는 손을 내저어 보이며 웃었으나, 레온은 쉽게 고개를 들지 않았다.
“힘들게 오셨는데 불쾌한 일을 겪으셨지 않습니까. 거기에는 제 책임도 있
습니다.”
반듯한 레온의 모습에 주변의 사람들은 감탄했다.
“그렇지, 저게 정상이지. 역시 가디언 길드의 레온님.”
자연스럽게 찬사가 나온다. 이미 알고 있긴 했지만, 대단히 평판이 좋은 남
자였다. 이런 사람이 몰래 찾아와 자신을 꼬셨단 말이지. 그만큼 드래곤의
가치가 큰 모양이었다.
“이런 걸로 보상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보상안을 준비하겠습니다. 보시
고 원하시는 걸 고르십시오. 아니면 먼저 제시해 주셔도 됩니다. 기다릴 수
있으니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죄송스럽지만, 피해자 쪽의 증언도
필요하므로 한 분은 남아 주셨으면 합니다.”
현우는 당연히 제외되었고, 남은 이는 선우와 도진, 가준이었다. 하지만 선
우와 도진은 아직도 등을 보인 채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었기에 가준이 앞
으로 나섰다.
“제가 남겠습니다.”
가기 싫다고 더 버텼다가는 나라 망신만 될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
아닙니다. 그럼 지현우, 다녀올 테니 그 전에 저거부터 해결해.”
가준은 고집스럽게 버티는 두 남자를 가리키곤 레온과 함께 자리를 떴다.
그렇게 일은 거진 다 해결되었지만,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또 다른 구경거리가 있었으니까.
“테이머는 누굴 선택할까?”
“그야 오른쪽이지. 더 듬직하게 생기지 않았나?”
“하지만 왼쪽도 만만치 않아. 별 차이가 안 난다고. 무엇보다 왼쪽은 친형제
잖아?”
“형제라고? 맙소사. 지금 동생이 형을 업어 주겠다고 버티고 있는 거야? 그
런 형제가 존재하긴 해?”
구경하던 이가 놀란 눈으로 외쳤다.
“내 동생은 내가 업어 달라고 하면 날 죽이려 들 거야!”
“너 같은 돼지는 나라도 업어 주기 싫을 것 같은데.”
“아니야, 아니라고! 그게 바로 형제라고!”
그 소란 속에서도 선우는 차분하게 현우를 불렀다.
“형. 현우 형.”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절로 몸이 선우 쪽으로 기울었다. 이렇게 귀여운
어리광을 어찌 외면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업혀 줘야지. 부끄러움은 현우
“
의 몫이었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그렇게 현우의 몸이 자신 쪽으로 기우는 게 느껴지자, 선우의 입가가 위로
올라갔다.
‘이겼다!’
그리 생각하며 도진을 비웃는 얼굴로 바라보았으나, 그도 만만치 않은 사람
이었다.
“현우야.”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문을 연 도진은 현우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지선우 씨는 방금 전까지 싸웠잖아. 피곤하시지 않을까?”
선우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도진을 쏘아보았다. 같이 싸워 놓고서 자기만 쏙
빠져나가려는 모습이 기가 차다. 처음에는 이런 위인이 아니었던 것 같은
데, 갈수록 능글맞아진다.
“그러네요.”
선우 쪽으로 향하던 현우의 몸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난 멀쩡해. 별로 힘도 안 썼는걸.”
“아니지요. 다리가 떨리고 있지 않습니까?”
도진은 멀쩡한 다리를 보며 진지하게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머뭇
거리던 현우의 몸이 도진에게로 기울었다.
저 여우 새끼!’
절로 이가 으득 갈렸다. 형이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을 이용하다니. 속에서
천불이 치솟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일어나서 도진과 싸우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형이 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현우야.”
“형!”
둘은 간절히 현우를 불렀다. 이쯤 되자 현우도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뭐든
선택을 해야겠다는 위기감이 들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싸는 사람들의 수
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으니까.
현우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선우의 등을 살짝 두드렸다.
“형!”
자신을 선택했나 싶어 좋아하는 순간, 앞으로 돌아온 현우가 선우의 손을
잡아서 일으켜 세웠다. 그런 후에 도진에게도 가서 똑같은 행동을 했다.
“난 걸을 수 있으니 그냥 가죠.”
“하지만!”
“하지만.”
“자꾸 이러면 혼자 갈 거예요.”
‘
그게 현우가 내린 결론이었다. 애초에 다치지도 않았으니 굳이 업힐 필요도
없었다. 그런 현우를 보며 선우와 도진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잠깐이었지
만, 서로의 의중을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럼 번갈아 가면서 업을게.”
“그게 좋겠어.”
이어 현우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선우가 그를 들어서 덥석 업었다.
“선우야!”
당황해서 이름을 불렀지만, 못 들은 척하며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긴다. 그
뒤를 도진과 다시 작아진 케로, 점박이, 두눈박이가 쫄래쫄래 따라갔다.
‘이것도 부끄러워!’
둘은 자신들이 한 말을 착실하게 지켰다. 숙소로 돌아가기까지 번갈아 가며
현우를 업고 걸은 것이다. 그나마 선우에게 업혔을 때는 괜찮았지만, 도진
에게 업혔을 때는 동요를 감추느라 힘들었다.
이상하게 심장이 자꾸 뛰어서, 얼굴이 붉어져서 괴로웠다. 그 모든 것이 말
하는 건 단 하나였으나, 마계에서 오랜 시간을 지내 온 현우는 그 정체를 알
아차리지 못했다.
*
바카디가 협회장 후보자 자리를 박탈당했다. 그 때문에 투표 날짜가 새로
잡히고, 미국에서 지내는 시간이 연장되었다.
이게 다 나의 현란한 말발 덕분이지.”
뒤늦게 돌아온 가준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나저나 미국도 생각보다 나쁘진 않더라? ‘바카디한테 제대로 벌을 줄
까? ’싶었는데 주더라고.”
“그 점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가준은 선우의 말에 대답하며 슬그머니 소파에 앉았다. 그런 그에게 도진의
시선이 와 닿았다.
“뭐? 왜? 뭐?”
“따로 숙소가 있지 않습니까?”
“아, 거긴 불편해서 여기로 옮기려고.”
가준이 시선을 돌려 현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런 면에서 둔한 현우는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괜한 기대를 한 모양이었다. 가준은 한숨을 푹 쉬고는 선우와 도진에게 말
했다.
“좀 봐주라. 내가 대신 이번 일 다 처리했잖아.”
어디 가서 아쉬운 소리 하고 산 적이 없는데, 여기서는 그게 안 된다.
“
도가준 가오 다 죽었네.’
슬슬 비비댄 결과, 같은 숙소에 머무르는 걸 허락받았다. 이걸 허락까지 받
아야 하나 자괴감이 들었지만, 어쩌랴.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것을.
“그나저나 레온. 실제로 이야기해 보니 사람이 참 괜찮더라.”
“그렇기에 그를 뽑기로 했던 것 아닙니까?”
동맹국인 미국 사람인데다가, 본인도 정의를 내세우고 있었다. 투표 전에
발표한 공약도 나쁘지 않았고, 인물도 번듯하다. 러시아의 표드로도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레온을 넘어서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야 그렇지.”
가준은 순순히 수긍했다.
“그나저나 저녁은 뭐 먹을래? 나가서 먹을까? 안에서 먹을까?”
“같이 저녁 먹을 예정이 없습니다만.”
“냉정해!”
시답잖은 말을 떠드는 가준을 선우가 상대하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삐이이이익!
도심에 울려 퍼지는 익숙한 음색에 넷은 벌떡 일어났다.
‘
포털이 열렸다.”
이 소리는 대비하지 못한 포털이 열릴 시, 시민들의 대피를 재촉하는 소리
였다.
“우로보로스인가?”
“그럴 수도 있습니다.”
“와, 진짜 그렇다면 놀랍겠는데. 협회장 투표로 각성자들이 다 모인 자리에
서 포털을 연다고?”
“저번에도 그러지 않았습니까?”
커튼을 걷고 창밖을 바라보니 거리가 소란스럽다.
“끼어들 거야?”
“도움 요청이 들어오면 움직여야지요.”
마음 같아서는 당장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이곳은 타국이었다. 먼저 마음대
로 움직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일단은 대기입니다.”
“알았어. 그럼 TV라도 좀 볼까.”
포털이 열리는 순간, 방송은 모두 재난방송으로 바뀐다. 그래서 상황이라도
파악하고자 켠 것이었는데, 뭔가 이상하다.
“
뉴스가 방송되어야 할 화면이 새까맣다. 그리고 그 새까만 화면 중심에는
은색으로 원이 그려져 있었고, 중앙에는 뱀의 머리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우로보로스입니다.』
로고와는 어울리지 않는 명랑한 목소리가 인사를 했다.
“방송을 탈취당한 모양인데?”
가준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 와중에도 명랑한 목소리는 계속 말을 이어 나
가고 있었다.
『이번에는 신문이 아닌 방송으로 데뷔를 했는데요.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
어가기 앞서 우로보로스의 취지를 설명해 주고자 합니다.』
내용은 이러했다.
세상은 변했다. 몬스터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그를 막기 위해서 각성자가
나타났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몬스터를 막아 내며, 사람들을 지켜 주었다.
하지만 그래서? 돌아오는 대가는 합당한 것인가?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각성자면 돈도 많이 벌고, 권력도
쥘 수 있지 않느냐?’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각성자가 가져야
할 것의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명랑한 목소리는 말했다.
『각성자는 더 많이 가져야 합니다.』
75.
각성자 우월주의자로군.”
먼저 입을 연 이는 가준이었다.
“그게 뭔데?”
현우가 묻자 가준이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말 그대로야. 각성자들이 일반적인 사람보다 우월한 신인류라고 여기는 이
들이지.”
각성자들이 나타나면서 시대가 변했다. 강한 힘을 가진 그들은 세상의 평화
를 유지하는 데 일조하며, 서서히 권력을 손에 넣어갔다.
하지만 이미 존재하고 있는 기득권자들은 자신이 손에 쥔 걸 넘기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법으로 각성자들을 제재하며 그들에게 일정 이상의
권력을 넘기지 않으려 했다.
그런 상황을 참고 넘어가는 이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도 있었다. 그들
은 자신들이 더 많은 걸 가져야 한다고 여겼으며, 시대가 각성자에게 발맞
춰 바뀌어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사회는 각성자들을 대놓고 견제하고 있어. 선현 길드를 봐도 알 수
있지. 정부와 기업이 하는 게 다 그렇지만, 나라에서 제일가는 길드의 권력
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게 이상하지 않아? 헌터 관리국이 수시로 태클 거
는 것도 그렇고. 이번만 해도 포털이 예고 없이 터지지 않았으면 협회는 훨
씬 더 늦게 생겼을 거야.”
그런 상황 때문인지 각성자 우월주의자 중에는 유독 빌런이 많았다.
“
그래도 이렇게 크게 일을 저지르며 등장한 이들은 우로보로스가 처음이
다.”
이걸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우로보로스가 이런 식으로 세
상을 흔들면 그에 넘어가는 각성자나 빌런이 늘어날 것이다.
“혼란스러워지겠네.”
가준이 귀찮다는 듯이 혀를 찼다.
“자리만 제대로 지킨다면 혼란스러울 일은 없을 겁니다.”
도진이 단호하게 말하며 가준의 말을 막았다.
“글쎄, 과연 그럴까. 이런 상황에서는 끼어들고 싶지 않아도 휘말리게 된다
고.”
잠시 방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깨트린 건 급히 달려온 가
디언 길드의 사람이었다.
“도와주십시오.”
청년은 숨을 헐떡이며 도움을 요청했다.
“동시다발적으로 게이트형 포털이 터져서 각성자가 부족합니다!”
저번에는 한국의 전역에서 포털이 터졌다. 그 때문에 이리저리 흩어져서 그
를 수습하기 위해 애썼는데, 이번에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문제가 생긴 모
양이었다.
“
작정하고 뉴욕에만 집중해서 포털을 열었습니다. 대피하지 못한 사람도 많
은데 몬스터가 쏟아져 내리니 수습이 안 됩니다.”
청년은 이를 악물었다. 그 때문에 미리 단단히 대기하고 있던 미국 쪽 각성
자들도 당황했다. 멀리 흩어진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으는 데는 시간이 필
요했으니까.
“도와주십시오.”
“물론입니다. 진 빚은 갚아야지요.”
선우와 도진이 앞으로 나서자 가준도 합류했다.
“나도!”
거기에 현우도 끼어들었다.
“그래, 형도 가자.”
선우는 창밖을 힐끔 보면서 대답했다. 이미 도심이 엉망이 된 상황이라 현
우를 두고 가기보다는 옆에 두는 게 더 안전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셋은 청년의 말을 듣고 뉴욕 한편에 자리 잡았다. 멀지 않은 곳에는
다른 나라의 각성자들도 보였다.
“여어, 안녕?”
포털이 열리는 걸 기다리고 있자니, 까무잡잡한 피부의 남자 하나가 손을
들어 올리며 다가왔다. 가슴에는 화려하게 비상하는 붉은 새가 그려진 배지
를 달고 있었다.
“
피닉스 길드.”
그 때문에 정체를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오, 맞아! 피닉스 길드지. 다른 나라 사람에게 부탁만 하는 건 좀 그래서 도
우미로 길드원들을 붙이기로 했거든. 저기 저 애송이랑 같은 역할이란 말이
지.”
“애송이가 아니라 가디언 길드의 존입니다.”
“그래, 그래. 존. 나는 애쉬라고 불러 줘.”
애쉬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자, 그럼 뉴욕을 지켜 보자고!”
기이하리만치 높은 텐션으로 말하며 애쉬는 존의 옆에 섰다.
“어쩐지 기분 나쁜 남잔데?”
가준이 툭 뱉어 내듯 말하자, 선우와 도진도 동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똑같
이 도우미 역할을 자처하는 존과는 느낌이 상당히 달랐다.
“아무래도 조심해야겠어.”
가준이 그렇게 말하자 도진이 뒤로 살짝 물러나며 현우의 옆에 섰다. 지금
셋이 생각하는 건 같았다.
‘피닉스 길드의 길드장 바카디.’
“
그가 뭔가 손을 썼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었다.
“아, 터진다.”
애쉬가 눈가에 손을 대고 외치자마자 포털이 열리며 수많은 몬스터들이 쏟
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오자마자 흩어지려는 몬스터를 도진이 붙잡고, 선
우가 공격했다. 선우가 몬스터들의 발을 얼리고, 가준이 독살시키기도 했
다. 그 사이로 몸집을 키운 케로와 점박이가 날뛰었으며, 두눈도 끼어들었
다.
“방해되게!”
같은 편에게 독이 미칠 수도 있어 가준이 발을 동동 구르다 결국 머리를 쓸
어 올리며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육박전으로 싸울 셈인 모양이었다. 애송이
라고 불린 존도 검을 들고 몬스터를 베어 갔다.
죽이고, 또 죽이고. 죽여도 끊임없이 밀려 나오는 몬스터는 마치 개미 떼 같
았다.
“장관이네.”
애쉬는 이런 상황에서도 태연하게 싸워 나갔다. 그가 손을 뻗을 때마다 몬
스터가 죽어 나갔다. 그럼에도 주변 사람들의 불안은 점점 고조되어 갔다.
크아아앙!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해 케로와 점박이가 더 멀어졌다. 도진은 여전히 현우
의 곁에 있었지만, 여기저기 능력을 펼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 손이 근질거리네.’
현우는 주먹을 쥐었다 펴며 고민에 잠겨 있었다. 처음에는 게으르게 지내고
싶어서 능력을 말하지 않았다. 이후에는 시간이 흐르면서 중간에 밝히기 애
매해져서 미루게 되었고.
그 결과, 선우는 아직도 현우가 연약한 줄 안다. 도진은 저번에 무언가를 눈
치챈 것 같았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마 현우가 직접 말해 주기를 기
다리는 것 같았다.
‘어쩔까?’
현우가 직접 끼어들면 몬스터들은 금방 쓸어 버릴 수 있었다. 아무리 훼까
닥 돌아서 인간을 공격하는 몬스터라도, 절대적인 힘과 공포 앞에서는 얌전
해지기 마련이었으니까.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근방은 그래도 몬스터를 잘 막아 낸 탓에 사람
들이 거의 대피를 한 상태였다. 하지만 조금만 더 움직이면 도망치지 못해
공포에 울부짖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그래, 움직이자.’
선우에게는 차근차근 사정을 설명하면 이해해 줄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움
직이려는 순간, 무언가가 현우의 뒤쪽에서 날아왔다. 빠르게 손으로 쳐내려
는데, 도진이 좀 더 빨랐다.
보이지 않는 공격을 쳐낸 도진이 애쉬에게 이를 드러내며 물었다.
“무슨 짓이지?”
“무슨 짓이긴.”
애쉬가 혀를 날름 내밀었다.
“이런 짓이지.”
그가 품에서 꺼낸 유리병을 바닥에 던졌다. 그러자 유리병이 깨지면서 그
안에서 까만 연기가 솟아오르더니, 이내 새로운 포털이 생겨났다.
“하나 더?”
히죽거리는 애쉬를 곁에 서 있던 존이 막으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안 돼!”
발악하는 존을 밀어 찬 애쉬는 기어코 포털을 하나 더 열었다.
“이쪽은 지금보다 좀 더 귀찮을 거야. 하지만 여기서 그만둘 거면 시작도 안
했지. 카이 님~! 나와 주세요!”
그러면서 뒤로 물러나는 순간, 허공에서 인영 하나가 뚝 떨어져 내렸다.
장신에 호리호리하며, 뱀같이 생긴 인상의 남자였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
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떴다.
“어?”
현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기울였다. 저번에 본 적 있던 남자였다. 그때는
예쁘게 생긴 다른 여성을 에스코트하고 있었더랬지.
“오랜만입니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 안에 담긴 것은 두려움과 공
포였다. 가진 힘은 상당한 것 같은데 저리 무서워하다니. 더욱더 의아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만큼 당신은 두려운 존
재니까요. 하지만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수도 없단 걸 깨달았습니다. 아직
인력이 부족해서 저라도 와야 하더군요.”
남자는 현우를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날 알아?”
“이런 순간에도 당신은 절 알아보지 못하시는군요.”
남자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제 이름은 카이.”
이름을 다시 들어도 모르겠다. 그런 현우에게 도움의 말을 건넨 건 두눈이
었다.
“현우, 쟤 두 번째 바이크.”
“뭐?”
“바이크.”
“아니, 그건 알아들었는데.”
그러니까 저 앞의 훤칠한 청년이 두 번째 바이크였던 징징이라고? 따로 이
름이 있었어? 아니, 그 전에 말을 할 수가 있었다고?
현우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어, 그러니까 징징이?”
“제 이름은 카이입니다.”
카이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물러
나 있던 애쉬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카이 님, 아는 사람입니까?”
오만하게 인간 따위에겐 관심도 없다던 마계의 주민이 갑자기 수줍은 신부
처럼 몸을 사리니 이상했다.
“그래.”
“그래도 죽일 순 있지요?”
애쉬가 되묻자 카이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미쳤냐?”
“네?”
“저 사람을 어떻게 죽여.”
카이가 여기 온 목적은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 보고자 한 것이었다. 그가
아는 현우라면 자신들이 벌이려는 계획을 중간에 방해할 수도 있으니까.
뉴욕에 포털을 열긴 했지만, 그들의 목적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더 원대
한 목표가 있기에, 몇몇 위험한 각성자들에게는 실력자를 붙여 그 자리에
묶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여기가 가장 위험한 자리였다.
76.
카이는 애쉬를 상대하는 걸 그만두고 손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바닥이 흐
물흐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히드라 종족의 주특기로 일정 지역을 늪지대
로 만드는 기술이었다. 바닥을 딛지 못하게 하고, 특유의 끈질긴 재생력으
로 상대를 농락해 왔다.
‘이 능력이 처음 깨진 게 저 괴물을 상대할 때였지.’
그때 카이는 처음으로 처절한 패배감을 맛보았다.
‘괜찮아.’
현우를 이기고자 함이 아니다. 그저 시간만 끌면 된다. 그러니 할 수 있을
것이다. 카이는 스스로 마음을 다지며 인간의 모습을 벗어던졌다.
고오오오!
머리가 아홉 달린 괴물 히드라가 울부짖었다.
“와우.”
가준이 휘파람을 불었다. 바닥이 늪같이 변했지만, 곤란해하는 이는 없었
다. 선우는 특유의 능력으로 바닥을 얼렸으며, 도진은 현우를 끌어안은 채
그림자를 밟고 섰다.
외려 곤란한 쪽은 몬스터들이었다. 날지 못하는 일부 몬스터들이 그대로 늪
에 끌려가듯 가라앉으며 울부짖었으나, 카이는 그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
다.
“이건 나만 불리하잖아?”
기울어져 가는 가로등 끝에 선 가준이 투덜거렸지만, 그게 다였다. 그도 이
런 상황을 대비할 만한 능력은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늪과 같이 가라
앉으려는 존까지 낚아채서 구해 준 상태였다.
문제는 바로 앞의 몬스터가 만만치 않다는 건데. 그도 금방 해결되었다.
“내가 할게. 괜찮지?”
두눈은 앞으로 나서며 현우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
자마자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목이 길어지며, 기둥 같은 다리가 뻗어 나왔다. 활짝 펼친 날개는 몸을 뒤덮
을 정도로 거대해 순간 일대를 어둡게 만들었다.
거대한 드래곤이 기지개를 켜자, 까만 비늘이 반짝 빛났다. 덩치만 봐서는
히드라보다 드래곤 쪽이 좀 더 컸다.
“그래, 한 번쯤은 너를 이겨 보고 싶었지.”
카이는 크게 소리치며 앞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원래 늪지대에 사는 몬스
터답게 움직임이 자연스럽다. 반면 두눈은 거치적거린다는 듯 발을 흔들고
있었다. 처음부터 날아올랐어야 했는데, 미처 그걸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
다.
“뭐, 상관없어.”
두눈이 씨익 웃으며 돌진하는 카이에게 맞섰다.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커다
란 울음과 함께 거대한 몸이 격렬하게 엮여 들어갔다. 날카로운 이로 물어
뜯고, 단단한 꼬리로 내려친다. 그때마다 굉음과 함께 피가 튀어 올랐다.
“비현실적이군.”
마치 과거 유행하던 거대 괴수 시리즈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저거 괜찮은 거야?”
거대한 몸 두 개가 서로 맞부딪치니 근처 건물도 같이 파괴되고 있다. 철저
히 교육받은 적이 있는 두눈은 그래도 좀 조심하는 모양이었지만, 카이는
인정사정없었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선우가 그리 말하며 시선을 멀찍이 떨어진 애쉬에게로 옮겼다. 그도 시선을
느꼈는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어.”
“당신은 피닉스 길드가 아닙니까? 길드 차원에서의 배신입니까?”
“그걸 내 입으로 말할 순 없지.”
그럼 입을 열게 만들어야겠군요.”
꽝꽝 얼어 버린 늪지대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인 선우가 곧바로 애쉬에게 접
근했다.
“좋지. 나도 너와 싸워 보고 싶었다고!”
애쉬는 양손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이어 보이지 않는 압력이 선우의 몸을
짓눌렀다.
‘중력계 특성!’
몸을 일으켜 세우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빠르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지금
까지 본 사람들 중에 중력을 가장 잘 다루는 것 같았다. 기이할 정도의 강함
이었다.
“강하군.”
“강해야지! 그걸 위해 희생한 게 얼만데!”
애쉬가 피식 웃으며 다음 공격을 위해 손을 휘저었다. 하지만 선우는 딱히
긴장하지 않았다. 강하긴 하지만 상대하지 못할 강함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쪽은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어느새 뒤로 돌아간 가준이 독으로 물든 손을 뻗어 애쉬의 등을 눌렀다. 간
발의 차로 피해 내긴 했지만, 그로 인해 생긴 틈을 선우가 파고들었다. 얼음
송곳이 회전하며 애쉬의 주변을 에워싸고, 어느새 생겨난 그림자가 그의 발
을 묶었다.
“와, 치사하게!”
“
원래 악당을 상대할 때는 정의롭게 다굴 치는 거야!”
가준이 이죽거리며 필사적으로 얼음 송곳을 막아 내는 애쉬의 팔을 잡았다.
일단 살갗이 닿으면 독에 중독되는 건 금방이다.
“비열하다!”
애쉬는 화가 난 사람처럼 머리를 흔들더니, 고개를 들었다. 잠깐 사이에 몸
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도 숨겨 둔 수 정도는 있었다.
갑자기 애쉬를 붙잡아 둔 그림자에 강한 압박이 느껴졌다. 그의 몸이 점점
부풀더니 두 배도 넘게 커지며 피부가 회색으로 물들어 갔다. 이어 반들거
리던 이마가 갈라지며 그 틈 사이로 뿔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얘도 인간이 아니었나 본데?”
뒤로 물러난 가준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심각한 문제로군요.”
몬스터들이 카이나 애쉬처럼 형태를 바꿀 수 있다면, 도심에 몰래 숨어드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위험한 소식이
었다.
“일단 잡고 보자.”
“그러는 게 낫겠습니다.”
선우와 가준이 다시 앞으로 나섰다.
“
다 죽여 주마!”
“그건 제가 할 소립니다.”
선우는 다시 애쉬와 격돌하였고, 가준은 틈을 엿보기 시작했다.
“돕지 않아도 돼요?”
그 상황을 지켜보던 현우가 도진에게 물었다.
“둘이면 충분히 이길 것 같은데.”
정확한 예측이었다.
“그래도 셋이면 더 빨리 이길 수 있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겠지.”
“그럼 가세요.”
“널 두고?”
도진의 말에 현우는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사실 알잖아요.”
“뭘 말하는지 모르겠어.”
“모르긴요. 내가 약하지만은 않다는 걸 알잖아요.”
현우는 그냥 대놓고 말했다.
“
숨기고 싶던 거 아니었어?”
“반쯤은 그랬죠.”
그래야 편하게 게으름 부리며 살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걸 어쩌겠는가.
“그럼 더 숨겨. 도와줄게.”
“나한테 왜 이리 잘해 줘요?”
그 말에 도진이 눈을 접으며 웃어 보였다.
“왜일까?”
내내 얌전하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맞춰 봐.”
도진은 그대로 고개를 숙여 현우의 뺨에 입을 맞췄다.
“이건 힌트.”
그런 다음 곧바로 앞으로 나서 애쉬와 싸우는 이들과 합류했다. 뒤에 남아
있던 현우는 뺨에 손을 대 보았다. 순식간에 열이 오른 뺨은 뜨끈뜨끈했다.
“뜨거워.”
기분이 이상하다. 이런 감정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현우는 그 자리에 멍하
니 서서 도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자아, 준비 끝!”
티아매트는 거대한 마법진 앞에 서서 이마를 훔쳤다. 땀은 나지도 않았지
만, 요근래 보고 배워 온 사람의 행동을 흉내 내 보았다. 하지만 표정이 적
절하지 않아 어색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럼 다음은!”
티아매트는 명랑하게 웃으며 뒤돌아보았다가 손으로 자신이 이마를 탁 쳤
다.
“맞다. 도와줄 사람이 없네.”
티아매트가 이 공간에 들어서며 전부 죽여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중에는 아
군도 있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사람은 그 정도의 가치였기 때
문이었다.
“그럼 혼자 해야겠다.”
다시 앞을 바라본 티아매트의 앞에는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
고 그 위에는 포털의 소환을 위한 제물이 존재했다.
“정말 재밌다니까.”
자신을 여기 불러낸 존재는 마족, 그리고 지금 불러낼 존재도 마족이다. 소
환에 성공만 하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고위 마족이 둘이 되는 것이다. 티아
매트까지 포함한다면 셋이고.
“
딱히 궁금하지는 않았지만 예의상 물어보았다. 마족의 꿈이라니. 뻔하지,
뭐. 강자가 되어 약자를 짓누르거나, 세계 정복을 한다거나, 피에 젖고 싶다
든가.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마족들을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살게 하는 것이지.’
‘뭐 하러?’
진짜 의외의 답에 티아매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글쎄. 그저 하고 싶어서. 그런 이유는 안 되나?’
이상한 녀석이다. 티아매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마계는 메마른 나무와도 같지. 솔직히 생명체가 살 만한 환경은 아니야. 그
렇기에 지구가 탐나.’
그는 그렇게 말했다.
“진짜 별난 녀석이지.”
모든 준비를 마친 티아매트는 마법진에 마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태어날
때부터 어마어마한 마력을 품고 태어나는 드래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력이 스며든 마법진이 빛나며 허공에 작은 점이 생겨났다. 그 점은 회오
리치며 점점 커져 갔고, 마침내 거대한 공동을 가득 메웠다.
“자, 그럼 넘어오라고.”
티아매트는 포털에 대고 속삭였다.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포
털의 중앙에서 하얀색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오래도 걸리네.’
투덜거리면서도 마력을 퍼부었다. 그 노력 덕분인지 몸은 느리지만 꾸준히
포털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 누구길래 이리 오래 걸려?”
미치지만 않았다면 티아매트도 서열이 더 높았을 것이다. 그런 그녀이기에
은근히 자신의 위에 있는 다른 마족을 우습게 보는 마음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존재감을 가진 마족이 누구인가, 궁금증이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족이 머리를 밖으로 내밀었다. 그와 동시에 티아매트는
일이 틀어졌음을 깨달았다.
“설마.”
빠르게 마법진의 마력을 끊었지만 포털은 금방 닫히지 않았다. 여는 데 걸
린 시간만큼 느리게 닫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사이에도 마족의 몸은 꾸준히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안 돼!”
부르려던 마족이 아니었다.
티아매트는 황급히 본체로 돌아와 브레스를 내뿜을 준비를 하였다. 이렇게
된 이상 포털을 파괴하는 수밖에 없었다.
77.
그르르륵.
단단한 뼈로 감싸인 가슴이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이어 깊이 머금은 숨
이 가득 차올랐을 때, 티아매트는 서슴없이 브레스를 내뱉었다.
초록색의 브레스가 스치는 자리에 있던 것은 지독한 독성에 모두 녹아내렸
다.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는 하얀 팔 또한 녹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야.’
물론 모든 건 망상에 불과했다. 하얀 팔의 주인은 지독하리만치 강한 마족
인지라, 이 정도는 쉽게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브레스는 느릿하게 움직이는 하얀 팔에 닿은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
렸다. 그와 동시에 무리해서 브레스를 내뱉은 몸에 통증이 밀려왔다.
“큭!”
티아매트는 신음을 내뱉으며 그대로 앞으로 돌진했다. 브레스로 안 된다면
몸으로라도 마법진을 깔아뭉개서 지울 생각이었다.
“꺼져 버려!”
쿵쿵! 거대한 몸이 돌진하자, 반쯤 녹아내린 주변 건물이 형편없이 흔들렸
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앞으로 나아가면 마법진을 지우고 포털을 닫을 수 있을 것 같았
다. 티아매트는 이를 악물었다. 그렇지만 다시 한번 하얀 손이 느릿하게 움
직이는 순간, 잠시 기억이 끊겼다.
으 으으.”
티아매트는 숨을 몰아쉬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마지막에 공격을 당
한 것 같은데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상하리만치 무거운 고개를
간신히 들어 올려 포털을 바라보았다.
“어?”
포털은 이미 닫혀 있었고, 그곳에 하얀 손의 주인은 없었다. 남아 있는 것이
라고는 처참하게 녹아내린 인간의 시체와 건물의 잔해뿐이었다. 티아매트
는 일단 몸 크기를 다시 줄이기로 했다. 인간의 형태로 변한 그녀는 자리에
서 일어나며 코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훔쳤다.
일어나니 머리가 울려 왔다. 몸에서 멀쩡한 부분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소환이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 당장 몸의 상처보다 중요한 건 그것이었
다.
“제기랄!”
안 된다. 이 일을 시킨 ‘그’가 그랬다. 다른 마족은 몰라도 하얀 팔의 주인,
마계 서열 1위 알베르크만은 이 세계로 넘어와선 안 된다고!
“ ,
대부분이 미쳐 돌아 버린 강한 괴물만이 존재하는 세계에서도 그는 규격 외
의 괴물이었다.
‘그런 괴물이 지구로 넘어오면, 지금까지 가만있던 놈들도 움직이게 될 거
야.’
그렇게 되면 일이 복잡해진다. 더는 지구와 마계와의 일이 아니게 되는 것
이다. 천계가 움직일 수도 있고, 그에 더해 세계의 균형을 담당하는 요정들
도 움직일 수 있었다.
“아아, 미치겠네!”
그뿐만이 아니다. 알베르크가 마계에 떨어진 인간 하나를 유독 아꼈다는 걸
티아매트는 알고 있었다. 그가 혹시라도 인간 편을 들면 곤란하다. 힘의 추
가 기울어지는 것이다.
“어쩌지. 어쩌지.”
티아매트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생각해 내,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 할
지 생각해 내!
“일단 알베르크를 찾는다.”
그런 후 돌려보낸다.
“돌려보낼 방법은?”
한 번 부르는 데도 엄청난 마력이 필요한 마족이다. 게다가 지금 이 마법진
에 들어간 재료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당장 다시 마련하기 힘들 것이란 소
리도 들었다.
잠깐만.”
티아매트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대었다. 그 속에는 드래곤에게만 존재하는
마나의 결정체, 드래곤 하트가 존재했다. 드래곤 하트 하나가 있으면, 그 외
의 필요재료가 대폭 줄어든다. 원래 중간계에는 드래곤이 없지만, 지금은
다르다.
“덜떨어진 녀석 하나가 있잖아?”
인간에게 들러붙은 멍청한 드래곤.
“이름이 뭐였더라. 하르모니아였나?”
그래, 그 드래곤의 드래곤 하트를 뽑아내자. 그리고 알베르크를 찾아서 최
대한 빠르게 돌려보내는 것이다. 그러면 된다. 티아매트는 정신을 집중하여
카이의 위치를 찾았다. 어쩌면 아직 카이가 그 녀석을 상대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으윽!”
몸 상태는 엉망이었지만, 이 정도는 마법을 쓰면 해결된다. 블랙 드래곤은
치유 마법에는 약한 편이었지만, 움직이는 데 필요한 부분만 대충 기워 두
면 된다.
티아매트는 맨발로 훌쩍 자리에서 뛰어올랐다. 거의 무너져 내린 건축물을
밟고 툭툭 뛰어 그 장소를 벗어난 그녀는 곧이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뛸
때마다 아픔이 느껴졌지만, 그 정도는 무시했다.
다행히 카이가 전투하는 장소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
*
하늘 위로는 비행형 몬스터들이 날아가며 빌딩을 공격하고, 땅에선 지상형
몬스터들이 사람을 짓밟는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다른
나라의 각성자들까지 동원했음에도, 거대한 도시를 전부 커버하는 건 불가
능한 일이었다.
“살려, 살려 줘요!”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고 살기 위해 도움을 구했다. 일부 사람들은
발악하며 총을 들었으나, 몬스터에게는 먹혀들지 않았다. 하늘에서 떨어진
전투기가 터져 나가며 폭발을 일으켰다. 아수라장이었다.
그 사이를 기묘한 분위기를 가진 미형의 소년이 걷고 있었다.
“하아.”
소년은 양팔을 벌리며 깊게 숨을 들이켰다. 매캐한 공기가 코끝을 찔러 왔
다. 그가 아는 마계의 공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래, 여기가 현우의 고향이구나.”
보랏빛 눈동자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현우는 언제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
다 말했다. 그곳은 평화로운 곳이라 마계처럼 매일 싸우지 않아도 되고, 맛
있는 것도 먹을 수 있다고 말했다. 가기만 하면 끝없는 게으름을 부리며 하
루의 절반 이상을 잠만 잘 거라고 야무지게 다짐하기도 했다.
“그런데 딱히 마계랑 달라 보이지 않는데?”
소년, 알베르크는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말했다. 이런 곳이 고향이라면 마
계도 괜찮지 않았을까. 그리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는데, 미친 듯이 날뛰
고 있던 몬스터 하나가 그를 발견했다.
레드 보어. 빳빳한 붉은 털을 가진 멧돼지를 닮은 거대한 몬스터. 그 몬스터
가 알베르크를 보며 콧김을 씩씩 뿜었다. 앞발을 땅에 긁어 대는 것이 당장
이라도 돌진하려는 모양새다.
“도망쳐요!”
누군가의 외침이 들리고, 그와 동시에 레드 보어가 알베르크에게 달려들었
다. 하지만 막 머리를 들이박으려는 순간, 오싹한 공포가 레드 보어를 감쌌
다. 들이박으면 죽는다. 그걸 깨달은 레드 보어가 방향을 틀어 빌딩에 머리
를 처박았다.
“걸어가기도 귀찮은데 잘됐네.”
알베르크는 빌딩 벽에 머리를 처박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는 레드 보어에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뀌, 뀌이익.”
트럭만 한 크기의 레드 보어는 얌전하게 알베르크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
다. 평소에는 뻣뻣하게 세우고 다니던 털도 전부 누운 상태였다.
알베르크는 레드 보어의 머리를 밟고 올라서 등 뒤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가 자리를 잡자마자 머리를 든 레드 보어가 조심스럽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 어?”
주변의 사람들이 자신의 눈을 의심하였지만, 보이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테이머인가?”
“그럼 각성자란 소리잖아? 그럼 잡아야지!”
기겁한 몇이 살려 달라고 달려왔지만, 알베르크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
버겁다.’
히드라의 재생력은 무시무시하지만, 그도 한계가 있다. 이 정도로 상처를
입으면 재생력도 느려지기 마련이었다. 하늘에서는 점박이가 머리를 노렸
고, 케로는 껑충거리며 발목을 물어뜯었다. 거기에 정면에서는 드래곤인 두
눈박이까지 덤비고 있었으니 버티기 힘든 것도 당연했다.
“개새끼들이!”
혹시나 싶어 애쉬 쪽을 힐끔 보았지만, 곤란에 처한 건 그쪽도 마찬가지였
다. 아무리 힘을 받았어도 본래는 사람인지라 마족만큼의 능력은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상대도 나쁘다.
‘슬슬 물러나야겠는데.’
이쯤이면 마족 소환 의식도 거의 끝났을 것이다. 카이는 공격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며, 도망칠 틈을 엿보았다.
‘
그걸 눈치채기라도 한 듯 두눈박이가 더욱더 집요하게 붙어 왔다. 하지만
카이에겐 아직 감춰 둔 한 수가 남아 있었고, 그를 이용하여 몸을 빼낼 생각
이었다. 아직 싸우지 않고 한편에 서 있는 현우가 걱정되었지만, 살펴보니
끼어들 것 같진 않았다.
‘그래, 당신은 언제나 그랬지.’
카이는 이를 갈았다. 그리고 슬슬 도망을 위해 늪지대를 폭파하려는데, 갑
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더 버텨.】
한창 마족을 소환하고 있을 티아매트였다.
【드래곤이 다른 곳을 보지 못하게 만들어!】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카이는 고통을 감수하고 앞으로 뛰어들며 아홉 개의
목을 휘둘렀다.
“크롸롸롸!”
그에 맞서 두눈박이가 피어를 내질렀다. 마력이 담긴 목소리에 모든 생물체
가 움찔하는 순간, 헐벗은 여자 하나가 빠르게 뛰어들었다.
‘티아매트!’
티아매트는 빠른 속도로 두눈박이의 가슴팍에 들러붙어 살을 후벼 파며 팔
뚝을 밀어 넣었다.
“캬아악!”
두눈박이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으나, 티아매트는 떨어지지 않고 버
텼다. 조금만, 조금만 더. 그녀는 상처를 벌리며 상반신을 안으로 밀어 넣었
다. 몸이 피범벅이 되었지만, 그에는 익숙했기에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덤벼든 결과, 마침내 드래곤 하트를 발견했다!
“미안, 원한은 없어.”
티아매트는 가벼운 사과를 하고 하트를 후벼 파내기 위해 몸을 더 밀어 넣
었다. 하지만 몸은 더 나아가지 않고 덜컥 멈춰 섰다. 무언가가 발목을 잡고
더 나아가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그로도 모자라 무시무시한 힘으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악!”
순식간에 도로 끌려 나온 티아매트는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워낙 세게 던
져진 탓에 몸을 바로 하지도 못했다.
“넌 뭐야?”
두눈박이의 비늘에 매달려 있던 현우가 티아매트에게 물었다.
“아하하.”
일이 이렇게 된다고? 드래곤 하트만 빼고 도망치려고 했는데. 티아매트는
이를 악물며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78.
“
어디서 봤나 했더니. 그때 봤던 그 여자네? 너도 마계의 주민이냐?”
“뭐야.”
이어 현우를 확인한 티아매트는 입을 벌렸다.
“왜 네가 여기 있어?”
아니, 현우가 여기 있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그의 고향이었으니까. 그보다
현우는 자신의 본체밖에 보지 못했을 텐데 언제 봤다는 거지? 고개를 기울
이고 있자니 어느새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카이가 설명을 덧붙였다.
“저번에 시비가 일어났을 때 보지 않았습니까.”
“난 못 봤는데?”
“그때는 시비 걸린 다른 사람만 보고 계셨으니까요.”
“그랬나?”
“그랬습니다.”
티아매트는 피범벅이 된 얼굴을 닦아 내며, 이를 드러냈다.
“그럼 자기소개를 해야겠네.”
무릎을 살짝 굽힌 티아매트가 한 손을 우아하게 펼치며 말했다.
“안녕? 내 이름은 티아매트.”
인사를 듣던 현우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독쟁이.”
마계 서열 9위의 미친 드래곤, 티아매트. 싸움과 피에 미친 마계에서 서열 9
위란 건 대단한 강자란 소리였다. 더한 강자도 이겨 본 현우였지만, 그렇다
고 해서 그녀의 힘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었다.
“차암. 독쟁이는 아닌데.”
주 능력이 독이긴 했지만, 그 외에도 쓸 수 있는 능력은 많았으니까.
“나에겐 독쟁이야. 그런데 마족이 중간계에는 무슨 일이지?”
티아매트의 등장 이후로 모두 싸움을 멈춘 상태였다. 그렇기에 현우의 말을
선명하게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다들 굳은 표정으로 티아매트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걸 말해 줄 의무는 없지 않아?”
티아매트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대답했다.
“그래, 대답해 줄 의무는 없지.”
현우는 두눈박이의 비늘을 놓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 모습에 기겁한 선우
가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형!”
걱정이 담긴 외침이 무색할 정도로 현우는 가뿐하게 바닥에 착지했다. 그는
자신을 부른 선우를 돌아보며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속여서 미안해, 선우야.”
좀 더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서. 더는 싸우기 지겨워서. 평화롭게 살고 싶어
서 자신의 힘에 대해 제대로 말하지 않았다.
“알아, 알고 있었어.”
선우는 그런 현우의 사과에 씁쓸하게 웃었다. 내내 곁에 붙어 있는데, 뭔가
감추고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그걸 캐내려 하지 않았다. 혹시
라도 전부 알아내려 들면 형이 자신을 옆을 떠날까 봐, 그를 싫어하게 될까
봐. 이유는 많았다.
“형. 나는 형이 어떤 사람이건 상관없어. 그냥 내 곁에 있어 준다고, 그것만
약속해 주면 돼.”
그제야 현우는 표정을 풀고 마주 웃어 주었다.
“뭐야, 그건 어려운 것도 아니네. 난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야. 내 사랑스러
운 동생 옆에.”
잠시지만 분위기가 훈훈해졌다.
“악!”
그걸 망친 건 말라붙은 핏자국을 손으로 벅벅 긁어 내던 티아매트였다.
“이런 분위기는 질색이야!”
“맞다. 할 일이 있었지?”
현우는 시선을 돌려 티아매트를 바라보았다. 번들거리는 눈동자에 담긴 살
의가 그녀를 따갑게 찔러 왔다. 몸이 오싹거리며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그
렇지만 그녀도 쉽게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드래곤 하트!’
그게 필요했으니까. 지금 놓치면 언제 다시 기회를 잡을지 알 수 없었다. 그
사이 이곳으로 넘어온 알베르크가 깽판이라도 치면 모든 게 엉망이 된다.
그러니까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지금은 덤비는 게 맞았다.
‘딱히 전력이 밀리는 건 아냐.’
현우를 뺀다면 말이다.
‘내가 얼마나 붙잡아 둘 수 있을까.’
살아오면서 이런 고민을 몇 번이나 해 봤던가. 기가 막혔지만, 이게 현실이
었다.
“티아매트 님.”
티아매트는 가장 먼저 카이에게 명령했다.
“카이, 너의 의무를 다해.”
“힘을 많이 소진했습니다.”
“그래도 할 수 있잖아?”
“해야만 하는 일입니까?”
“그래.”
그 말에 카이는 한숨을 쉬며 다시 원래의 몸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멀쩡
한 머리로 아직 상처가 덜 회복된 머리를 물어뜯었다.
우적우적.
커다란 입이 물어뜯은 자신의 머리를 씹어 삼키기 시작했다.
“으엑!”
지쳐서 바닥에 퍼져 있던 존이 기괴한 소리를 냈다.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
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아는 건 단 하나, 어떻게든 저들을 막아야 한다는 것
뿐이었다.
“와오! 내가 이래서 몬스터들이 좋다니까. 화끈하잖아!”
애쉬가 킬킬거리며 근처에 흩어진 몬스터의 심장을 후벼 파내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아직도 녹색 피가 주르륵 떨어지는 심장을 입 안에 욱여넣었다.
“미, 미쳤습니까?”
“미치긴 진작 미쳤지.”
존의 말에 웃으며 대답한 애쉬가 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2차전인가?”
가준이 질렸다는 표정으로 애쉬를 바라보았다.
“이번에야말로 결판을 내 보자고?”
그런 상황에서 한편에 얌전히 서서 뚫어져라 현우만 바라보던 도진이 입을
열었다.
“이쪽은 한 명만 있는 게 낫겠습니다.”
“제가 형에게로 가죠.”
“보조는 제가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저도 보조는 잘합니다.”
선우도, 도진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둘은 누가 현우에게로 가느냐
를 두고, 진지하게 토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를 지켜보고 있던 현우는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였다.
‘사실 아무도 안 와도 되는데.’
심지어 다른 몬스터들을 저쪽으로 붙여도 된다. 그러나 그 사실을 말하기엔
저쪽에 과하게 불이 붙은 것 같았다.
‘지금!’
티아매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순식간에 몸을 부풀린 그녀가 곧바로
숨을 들이켰다. 처음부터 브레스를 날려 약한 것들을 싹 치워 버릴 생각이
었다.
“허튼짓!”
어느새 달려온 케로를 발판 삼아 뛰어오른 현우가 티아매트의 주둥이를 주
먹으로 후려쳤다. 가죽 주머니를 주먹으로 후려치는 소리와 함께 티아매트
는 브레스를 도로 삼켰다.
“켁켁!”
독성이 담긴 브레스가 속을 뒤집어 놓았다. 본래 독에 강한 몸체라 그 이상
상처를 입지는 않았지만, 괴로웠다.
“죽어!”
티아매트의 눈에 독기가 올랐다. 다시 몸을 작게 만든 그녀는 손톱을 길게
세우고 현우에게 달려들었다.
원래부터 브레스를 뿜은 후에는 작은 몸으로 싸울 예정이었다. 드래곤의 몸
은 튼튼하긴 했지만, 피격 면적이 넓다. 자신보다 빠르고 강한 존재와의 싸
움에선 차라리 몸을 줄이는 게 낫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티아매트가 다리를 내려찍었다. 현우를 향한 공격이
었으나, 그를 막은 이는 다른 사람이었다.
“형?”
현우의 앞을 가로막은 도진은 저릿하게 울려오는 팔을 털어 냈다. 쉽지 않
을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강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러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내가 보조할게.”
도진은 그리 말하며, 그 자리를 지키고 섰다.
“괜찮겠어?”
물론이지.”
현우는 고개를 끄덕이곤 앞으로 나서며 티아매트에게 달려들었다. 도진이
그림자로 마법과 독을 막아 내며 그녀의 움직임을 방해하면, 현우가 주먹을
휘둘렀다.
‘몸이 흉기!’
막아 내도 아프고, 막아 내지 못하면 끝장이다. 티아매트는 이를 득득 갈며
필사적으로 움직였으나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다가올 결
과는 뻔했다.
‘적어도 저 인간만이라도 치웠으면 좋겠는데.’
티아매트는 짜증 나는 표정으로 도진을 노려보았다. 처음에는 다소 힘들게
막아 내더니, 이제는 마법이 발동하기도 전에 방해를 하고 있다. 싸움 중에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래서 인간이 싫어!’
가진 것도 없이 태어난 미약한 존재 주제에 드래곤만큼 강해지기도 한다.
‘더 능숙해지기 전에 죽이자.’
티아매트는 공격의 주체를 현우가 아닌 도진으로 바꿨다. 현우가 형이라 부
른 걸 보니 친밀한 관계 같은데, 죽이면 동요는 줄 수 있겠지. 현우의 공격
을 몸으로 막아 낸 티아매트는 처음으로 도진에게 몸을 날렸다.
검처럼 날카롭게 솟아오른 손톱이 도진의 급소를 향해 돌진했다. 현우가 깜
짝 놀라 대응하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
난 만만한가 보네.”
도진은 잽싸게 카라를 꺼내 티아매트의 공격을 막아 냈다. 무지막지한 힘에
몸이 뒤로 밀리긴 했지만, 공격은 어찌어찌 막아 냈다.
“쳇.”
공격이 막힌 걸 확인하자마자 티아매트는 몸을 뒤로 날렸다. 아니나 다를
까. 피하자마자 그 자리에 현우의 다리가 떨어져 내렸다.
‘생각했던 건 이게 아닌데.’
상황이 꼬여 가고 있었다. 케로베로스와 블랙 드레이크가 제법 잘 싸우고
있었다. 그 때문에 카이는 움직일 수가 없다. 그렇다면 다른 쪽은 어떤가 싶
어 봤는데, 그쪽도 막막하다.
도진에게 밀린 선우가 가준과 함께 애쉬를 압박하고 있었다. 화가 난 선우
는 평소보다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애쉬는 상처투성이가 되었
다.
상처 입은 상태에서도 미친 듯이 날뛰고 있긴 했지만, 밀리고 있는 게 확연
히 보였다. 게다가 상처 입은 하르모니아는 보이지도 않았다. 잠시 신경이
다른 데 쏠린 사이 숨어 버린 모양이었다. 덜떨어진 녀석이라도 마력을 감
추는 방법은 익혔는지 위치를 찾을 수도 없었다.
‘쓸모 있는 녀석들이 없네!’
티아매트는 계획을 수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물러나자.】
“
카이에게는 그 의사를 전달했다.
‘다른 녀석은 뭐, 알아서 하겠지.’
마족이 아닌 녀석은 전부 소모품이다. 어찌 되건 알 게 뭔가. 사로잡힌다고
해도 그에 대한 장치는 해 뒀으니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지금!”
티아매트는 시간을 끌며 모은 마력을 이용해 마법을 퍼붓고 뒤로 몸을 뺐
다. 이제 여기서 현우가 자신을 따라오느냐, 아니면 남아서 마법을 막느냐
에 따라 다음 대응이 결정된다.
다행히 현우는 마법을 막는 쪽을 택했다.
“다음에 또 봐~!”
티아매트는 손을 흔들며 작아진 카이의 목덜미를 잡고 냅다 뛰었다. 뒤에서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으나 깔끔하게 무시했다. 일단 살아 있어야 뭐라
도 할 게 아닌가.
79.
냅다 튀어 버린 두 몬스터 때문에 졸지에 혼자 남아 버린 애쉬는 손쉽게 붙
잡혔다. 이어 주변 몬스터들까지 죄다 정리하고 나니 좀 여유가 생겼다.
“하아, 다행입니다.”
가슴을 쓸어내린 존은 곧바로 무전기를 들어 올렸다. 갑자기 나타난 마족도
문제였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피닉스 길드 소속인 애쉬가 그들의 편을 들었다는 것. 이게 그만의 일탈이
라면 다행이지만, 아니라면 큰일이다.
무려 미국 내 2위 길드인 피닉스 길드가 인류를 배신했다는 소리였으니까.
최대한 빨리 그 소식을 다른 이들에게 전달해야 했다. 그렇기에 빠르게 움
직였지만, 아무리 불러도 상대 쪽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연락이 안 됩니까?”
선우가 존에게 물었다.
“네? 네. 안 됩니다. 아무래도 전파 방해인 것 같습니다.”
“다른 연락 수단은 없습니까?”
그 말에 존은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있습니다. 저에게는 없지만 몇몇 중요 인물들에게는 전파 방해가 통하지
않는 무전기를 나눠 주었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그 중요 인물은 미국 전역에 흩어져 있고, 그 때문에 뉴욕에
는 해당 무전기가 몇 개 없다는 것이다.
“그럼 본부 위치는 아십니까?”
“압니다.”
이런 일이 생길 걸 대비해서 가디언 길드는 미리 길드원들을 교육해 놓았
다. 그 때문에 존도 뉴욕 지리는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혹시 하늘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까요?”
중간에 불쑥 끼어든 현우가 점박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굳이 걸어갈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요.”
점박이는 두눈박이에 비해서는 한참 작았지만, 성인 남성 여섯은 충분히 태
울 수 있었다.
“왜 여섯이야? 저 녀석도 태우게?”
가준이 애쉬를 가리키자 현우는 방긋 웃으며 냉정하게 말했다.
“아니, 인질을 뭣 하러 곱게 대해 줘. 타는 건 두눈박이야. 상처 입었잖아.
회복까지 좀 걸릴걸.”
“그럼 쟤는?”
“점박이가 발로 잡으면 돼.”
대우가 너무하다. 하지만 애쉬가 저지른 죄가 있기에 모두 그 의견에 동의
했다.
“그럼 가 볼까?”
현우가 점박이의 등에 올라타자마자 선우가 잽싸게 먼저 몸을 날렸다. 하지
만 도진이 치사하게 그림자를 써서 선수를 쳐 버렸다. 평소 써먹던 대로 그
림자를 통해 순간이동을 해 버린 것이다.
“한도진 씨.”
“왜 그러십니까? 지선우 씨.”
선우는 이를 갈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더는 다투지 못하고 포기했다.
그렇게 6명이 다 타자마자 점박이는 곧바로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랐다.
뀌이이익!”
현우가 떠난 자리, 거대한 레드 보어가 숨을 몰아쉬며 나타났다.
“늦었네.”
레드 보어를 최대한 재촉했지만, 결국 원하는 이를 따라잡지 못했다. 돌진
할 때를 제외하고는 느릿한 레드 보어 탓이었다.
“갈아타야겠네.”
하지만 주변은 이미 정리된 터라 다른 몬스터가 보이지 않는다. 될 수 있으
면 날아다닐 줄 아는 녀석이 좋겠는데. 알베르크는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했
다. 얼마간은 더 레드 보어를 타고 다녀야 할 모양이었다.
“가자.”
알베르크는 다시 레드 보어를 출발시켰다.
“
음
“ ?”
허공을 날던 현우는 이상한 느낌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보이는 것
이라고는 엉망이 된 거리에서 몬스터를 상대하는 사람들뿐이었다.
‘착각인가.’
현우는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몬스터가 몇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점박이를 보고 알아서 몸을 사렸기에 이동 속도는 빨랐
다. 가끔 덤벼드는 몬스터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 정도는 위에 탄 사람들
이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정도였다.
“곧 본부입니다!”
존이 외쳤다.
본부는 도심 중앙에 있는 가디언 길드의 건물 중 하나였다. 보통은 정부 건
물을 사용할 텐데, 여기서 가디언 길드의 힘을 엿볼 수 있었다.
“여기예요!”
점박이는 지정한 위치에 조심스럽게 착지했다. 주변이 엉망이긴 하지만 열
린 포털도, 싸우는 사람과 몬스터도 없다. 이미 정리를 한 다음인 것 같았
다.
“들어가지.”
점박이의 꼬리 쪽에 매달려 타고 있던 가준이 먼저 미끄러지듯 내려섰다.
이어 차례로 존, 선우가 내리자 도진 또한 현우를 끌어안고 내렸다.
“혼자 내릴 수 있는데.”
현우가 불만을 표시했지만, 도진은 웃음으로 때울 뿐이었다.
“그런데 분위기 이상하지 않아요?”
한창 바쁘게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어야 할 텐데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다. 안
으로 들어서자 로비는 폭풍이 지나간 듯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몇 안
되는 사람은 전부 쓰러져 있었다.
“유리!”
경악한 표정으로 로비를 둘러보던 존이 갑자기 쓰러진 사람에게 달려갔다.
까만 머리를 가진 여성은 천천히 눈을 깜박이더니, 그를 바라보았다.
“존?”
당장이라도 꺼질 것 같은 희미하고 작은 목소리였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유리가 몸을 작게 들썩일 때마다 입에서 튀어나온 피가 옷을 적셨다.
“피닉스… 피닉스 길드가 배신했어.”
그런 상황에서도 유리는 목소리를 쥐어 짜내 상황을 전달했다.
“마, 말하지 마!”
존이 말렸지만, 말을 멈추지 않았다.
“바카디가, 그가 여길 습격, 쿨럭.”
또다시 붉은 피가 새어 나왔다. 상처 입은 사람을 응급조치하는 법은 기본
적으로 길드에서 가르치는 것이었지만, 동료가 이런 모습이 되니 몸이 굳어
버렸다.
“휴우.”
그 모습을 보던 가준이 앞으로 나서 유리의 상태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다
리가 부러진 상태에서 배를 강하게 맞았다. 그 때문에 내장이 상한 모양이
었다.
“병원이나 힐러가 필요해. 여기서는 해결 못 해.”
일단 가지고 있는 포션을 부어 보긴 했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유리,
그녀는 죽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끝끝내 상황을 전부 설명해 주
었다.
“아직, 여기 있어.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야 해. 무전기는 상황실에 하나.”
“그만, 그만하라니까!”
내내 멍한 눈으로 상황을 말하던 유리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정의를 위하여.”
그 말을 들은 존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가디언 길드는 정의
를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졌다. 그리고 유리 또한 그런 사람 중
하나가 되고 싶어 했다.
“유리, 넌 정의로워.”
약한 자를 보호하고, 옳은 일을 위해서라면 강자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다.
“고마워.”
내내 끊어질 듯 이어지던 목소리가 처음으로 또렷하게 들려왔다. 이어 숨소
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게 유리의 끝이었다.
“유리, 유리!”
이름을 불러도 유리는 더 이상 눈을 뜨지 않았다.
“죽었어.”
가준이 현실을 말해 주자, 존은 이를 악물었다.
“위로 갑시다. 그녀의 말이 맞다면 거기에 아직 범인이 있겠지요.”
“네.”
존은 유리를 똑바로 눕히고, 움직이는 그들의 뒤를 따랐다. 엘리베이터는
망가져 있었기에 직접 걸어 올라가야 했다. 바로 위층도 로비와 상태는 크
게 다르지 않았다. 몇몇이 바카디를 막으려고 한 모양이었지만, 실패한 듯
했다.
“7층. 거기에 상황실이 있을 겁니다.”
한 층씩 오를수록 분노만 더해졌다.
“대체 같은 인간이 왜!”
존은 울분을 토했다.
“기분이 나쁘네.”
가준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사람이 죽는 모습은 수없이 많이 봐 왔지
만, 그렇다고 해서 익숙해지지는 않았다.
“동감.”
현우도 가준의 말에 동감했다. 바카디란 녀석은 그냥 사람을 죽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더는 움직이지 못하게 된 사람들을 농락하듯 가지고 놀았
다.
절로 쥐어진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현우야.”
도진은 그런 현우를 걱정했다. 마음 같아서는 현우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
주기 싫었다. 언제나 좋은 것만 보여 주고 싶었는데. 그렇지만 이렇게 분노
한 현우를 막을 수도 없었다. 도진은 그 사실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선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계속 안절부절못하며 현우의 상태를 살피고 있
었다.
“형, 괜찮아?”
“응.”
벌써 10번도 넘게 같은 것을 물었지만, 현우는 얌전히 대답해 주었다. 자신
을 걱정하는 동생의 마음을 알고 있었으니까.
*
바카디는 도심 여러 곳을 비추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비치는 모습은 하나같
이 끔찍해서 마치 세상의 종말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흐흐흐.”
그게 좋았다. 이제 각성자들을 묶어 두고 싶어 하던 어리석은 사람들도 깨
닫는 게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 그리고 강
자의 힘을 말이다.
“이해가 안 된단 말이지. 왜 각성자가 아무런 힘도 없는 버러지 같은 인간들
을 지켜야 하는 거지? 스스로 몸을 낮춰 가면서?”
바카디는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여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여성의 이름은
앰버. 상황실의 수장이었다. 각성을 하긴 했으나 관련 능력은 텔레파시. 다
른 이에게 말을 전하는 데 특성화된 능력으로 그 외의 힘은 약한 편이었다.
그 때문에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그걸 모르는 한은 당신은 짐승과 다르지 않습니다.”
앰버는 싸늘한 목소리로 답했다.
“짐승. 짐승이라.”
킬킬대며 웃은 바카디는 앰버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그래, 짐승 한번 해 보지, 뭐.”
혐오스럽다는 듯 일그러진 얼굴이 보기 좋았다. 평소에는 단정하던 앰버였
기에 더 그랬다.
“자, 앰버.”
“제 이름 부르지 마십시오.”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한다.”
“싫습니다.”
“그러면 네 소중한 부하들이 죽어 갈 텐데?”
바카디는 한구석에 모아 둔 다른 직원들을 가리켰다.
80.
앰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가 상황실을 맡게 되면서부터 함께한 이들이
었다. 같이 하는 동안 쌓이고 쌓인 정은 가족이 없는 그녀에게는 더없이 소
중한 것이었다. 저들은 단순한 부하가 아니었다.
바카디가 원하는 걸 들어주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당분간 목숨을 보전할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러면 밖의 사람들은? 죄 없이 죽어갈 시민들은 어
쩐단 말인가.
기로에 선 앰버가 괴로워하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앰버! 저희는 괜찮습니다!”
“옳은 선택을 하세요!”
앰버는 틀리지 않았어요!”
그 목소리가, 앰버의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 주었다.
“바카디. 저는 당신의 말을 듣지 않겠습니다.”
앰버의 말에 바카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하, 다들 목숨이 여러 개라도 되나 봐?”
“아니요. 목숨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하나지요.”
“그런데 왜 이래? 죽인다니까?”
바카디가 제일 어려 보이는 여성 하나를 끌어내 목을 잡아 들어 올렸다.
“끄윽!”
여성은 바카디의 손을 긁으며 괴로움에 버둥거렸다.
“리사!”
“당장 그만둬!”
다른 사람들이 바카디에게 덤벼들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가 다른 손을
휘두른 것만으로도 밀려나 도로 구석에 처박혔다.
그를 바라보던 리사는 버둥거림을 멈추고 앰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눈
을 보는 순간, 앰버는 깨달았다. 리사는 지금 자신의 목숨을 포기했다. 앰버
“
를 위해서, 얼굴도 모르는 다른 시민들을 위해서. 가만히 죽음을 맞이하려
는 것이다.
앰버는 심장이 찢기는 것 같은 괴로움에 헐떡였다.
‘다 내가 부족해서.’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적어도 다른 직원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 수 있을 만
큼만 강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리사의 숨소리가 잦아들고 있음에도 아
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약함이 원망스러웠다.
“미안해.”
할 수 있는 것은 사과뿐이었다.
【괜찮아요.】
머릿속에 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 또한 각성자. 그중에서도 앰버와
같은 계열로 텔레파시를 사용할 수 있었다.
【앰버는 최선을 다했어요.】
최선. 그 말을 듣자 번개를 맞은 것 같았다. 자신은 정말 최선을 다했는가?
아니, 아니다. 시민들을 위한다는 핑계로 바카디와 싸워 보지도 않고 굴복
했다. 여기 프로그램을 누구보다 잘 다루는 건 자신뿐이었으니까.
합리적인 선택이나 최선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지금이라도 최선을 다해 보
고 싶어졌다. 앰버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신계 능력으로 남을 공격했다.
그 대상은 바카디였다.
하하하, 이게 뭐야. 간지럽지도 않다고!”
리사를 내팽개친 바카디가 시선을 앰버에게로 돌렸다. 그러나 엠버는 눈에
핏줄이 서고 코피가 흘러내리는 와중에도 공격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현명한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멍청하네.”
공격에도 불구하고 바카디는 태연하게 앰버에게 다가와 손을 뻗었다. 그리
고 커다란 손바닥이 그녀에게로 향하는 순간, 열렸던 문 사이로 무언가가
뛰쳐 들어왔고 바카디는 바닥에 처박혔다.
쿠궁.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앰버는 흘러내리는 피를 훔치며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괜찮아요?”
무언가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예쁘장하게 생긴 어려보이는 동양계 청년. 그
청년은 엎어진 바카디를 두고 앰버에게 괜찮느냐고 물었다.
“괜찮아요. 그보다 당신은 누구.”
앰버의 질문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바카디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 없이
청년의 뒤에 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뒤!”
놀라 소리치자 청년이 웃으며 돌아섰다. 그리고는 빠른 속도로 공격하는 바
카디의 주먹을 맞받아쳤다.
“
소용없어!’
바카디는 누구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를 정면으로 상대하다
니. 이후 일어날 일은 뻔했다. 청년은 바카디에게 쓰러지겠지. 도와주러 온
사람인데 그렇게 놔둘 수는 없었다.
앰버가 어떻게든 돕기 위해 다시 정신을 집중하려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
다.
“어. 어?”
바카디의 주먹이 청년의 손바닥에 가로막혀 있었다. 부들부들 떨면서 어떻
게든 주먹을 내지르려는 모양이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밀리고 있었다.
이어 청년이 여유로운 다른 손을 들어 바카디를 후려쳤다. 가벼워 보이는
공격인데도 어마무시한 소리가 났다.
퍽!
물이 가득 찬 가죽 주머니를 몽둥이로 후려치는 듯한 묵직한 소리였다.
“씨발.”
바카디가 갑자기 주먹을 떼고 뒤로 훌쩍 물러났다. 하지만 청년은 그를 쉽
게 놓아주지 않았다. 그대로 그를 따라잡아서는 다리를 휘둘렀고, 그에 맞
은 바카디는 처음처럼 바닥을 굴렀다.
“지현우!”
‘
분노에 찬 바카디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청년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이
번에 한국에서 온 테이머 지현우. 그가 청년의 정체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럼 이야기가 이상한데?’
지선우의 강함은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형인 지현우는 그렇지 않았다. 몬
스터를 다룰 줄만 알지 본신은 약한 걸로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
다.
“왜 불러, 미친 새끼야.”
예쁘장한 입에서 험악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리고는 바닥에 쓰려진 바카
디를 향해 인정사정없이 다리를 내리찍었다. 굴러서 피한 바카디가 자리에
서 일어나려 했지만, 그때마다 방해받았다.
“이리 오십시오.”
구석에서 눈치를 살피던 직원들은 어느새 나타난 다른 사람들에 의해 방 밖
으로 빠져나갔다. 이제 남은 건 바카디와 지현우, 앰버뿐이었다.
“그쪽도 이리 오십시오.”
밖에서 지현우와 마찬가지로 동양계로 보이는 남자가 손짓했다. 하지만 앰
버는 쉽사리 물러날 수 없었다.
“밖에서.”
아직 할 말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밖에서 싸워야 해요! 여기는 전자 기기가 많아요!”
앰버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지현우는 바카디의 머리채를 움켜쥐더니 그대로
벽을 부수고 사라졌다. 이어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들려 따라가 보니 아무
도 보이지 않았다.
창밖으로 바카디를 끌고 뛰어내린 모양이었다. 이어 훤칠해 보이는 남자 둘
이 나타나 태연하게 건물 아래로 뛰어내렸다. 지현우를 뒤따라가는 모양이
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멍하니 뚫린 창문을 바라보고 있자니, 처음 앰버에게 손짓한 남자가 다가왔
다.
“그런데 저거 죽여야 해요? 아니면 살리는 게 낫나?”
“네?”
상대는 무려 그 바카디인데. 생사여부를 결정하라는 소리를 너무나도 쉽게
한다.
“빨리빨리. 그 전에 패 죽이겠네.”
그 말에 슬쩍 벽을 잡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바카디가 신나게 처맞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찌나 터프하게 두들겨 패는지 보기만 해도 속이 시원했다. 바카디는 그렇
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씨이바아아알!”
바카디가 욕설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살리는 게 낫겠네요. 알아야 할 정보가 많아요.”
“오케이. 현우야! 살리란다!”
옆에 있던 남자는 크게 소리를 지르고 뒤로 물러났다.
“이젠 죽이지 않을 겁니다.”
“네.”
머리가 멍하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앰버는 이마를 꾹꾹 누르며 몸
을 물렸다. 그리고 또다른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미국뉴스에서도 가끔
나오던 인물, 지선우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앰버는 먼저 몸을 깊숙이 숙여 인사를 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남자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겉보기에는 안 그래 보였는데, 정의로운 사람인
모양이었다.
“앰버님!”
이어 존도 만났다. 존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앰버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 모든 걸 듣고 나니 머리가 아찔해졌다. 바카디를 봐서 짐작하긴 했지만,
피닉스 길드가 인류에게서 등을 돌렸다니.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정보 전달 감사합니다.”
앰버는 황급히 상황실로 돌아와 기기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얼른
다른 이들에게도 알려야 했다.
“여기는 상황 본부. 경보 발령. 갱신된 정보를 전달합니다. 피닉스 길드가
배신했습니다.”
이로써 지금 뉴욕에 없는 자들도 피닉스 길드의 배신을 알게 되었다. 가장
급한 일을 마치고 나자, 저절로 몸에 힘이 빠졌다.
그렇지만 아직 쓰러져서는 안 된다. 이 모든 것은 이제 시작이었으니까.
현우는 묵묵히 바카디를 뭉개 나갔다. 손가락을 부러트리고, 팔을 부러트렸
다. 혹시나 도망갈까 봐 나뒹구는 무기를 집어 들어 다리를 땅에 박아 넣었
다. 그냥 깔끔하게 자를까도 생각했지만, 포기했다.
남들 보기에 좋지 않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여기는 마계가 아니었으니까.
“흐익. 차라리 죽이지 그래?”
몸이 차근차근 망가져 가는 와중에도 바카디는 입 놀리는 걸 멈추지 않았
다.
“그건 안 되지. 넌 살아서 더 고통받아야 해.”
고통을 줄 수는 있고?”
바카디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저러는 걸 보니 자진할 가능성은 없을 듯했
다. 현우는 손바닥을 쫙 펴서 그의 뺨을 후려쳤다.
한 대, 두 대, 세 대. 횟수가 수십 번을 넘어가니 그제야 좀 조용해진다. 원래
몸이 튼튼한데다가 재생력이 대단하니 때리는 맛이 제법 괜찮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바카디는 답 없이 현우를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눈에 시퍼런 불꽃이 타오르
는 게 의지는 꺾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도 시간 문제였다.
“현재 여기 와 있는 마족은 누구누구지?”
“몰라.”
아직 덜 맞았네. 다시 손을 들어 올리자 바카디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리고
본인도 그런 자신을 깨달은 듯 버릇처럼 또다시 욕설을 내뱉었다.
역시 말 안 듣는 미친놈에게는 폭력이 효과적이다. 현우가 뒤로 물러서 손
의 피를 털어 내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도진이 달려와 물었다.
“힘들지 않아? 힘들면 교대해 줄까?”
“아니요. 이 정도는 괜찮아요.”
현우가 대답하자 선우가 슬며시 끼어들었다.
“형, 나도 잘 때리는데.”
“
괜찮아. 나도 여기까지만 할 거야.”
이미 바카디는 곤죽이 된 상태였다. 재생력이 발휘되고는 있었지만, 한계를
넘어선 모양인지 속도가 느려졌다.
“
81.
바카디를 제압하긴 했지만, 이후도 문제였다.
“가둬 둘 장소요?”
앰버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하층에 관련 장소가 있긴 하지만, 힘들지 않을까요.”
상대는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였다. 임시로 만들어 둔 감옥 따위 소용없
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은 지키는 사람이 필요한데, 여기서 그럴 수 있으신 분은 몇 없
으니까요.”
여차했을 때 바카디를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여기서 셋뿐이었다. 게다가
셋 다 미국 시민이 아니다. 차후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럼 팔다리를 뜯어 버릴까요? 그러면 회복 시간이 좀 늦어지겠지요.”
먼저 현우가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잘못하다가 쇼크사 할 수 있다하여
그 의견은 기각되었다. 그렇게 시간만 보내고 있는데, 위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적의는 없는 것 같은데.”
그러게.”
이윽고 인기척은 문 앞까지 당도했다. 혹시 모르니 다들 싸울 준비를 하는
순간,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레온 님!”
앰버가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
“앰버.”
안을 둘러보던 레온의 시선이 바닥에 널브러진 바카디에게로 향했다. 일순
표정에 안타까움이 스쳐 지나갔다.
“어째서 인류를 배신한 건가.”
“배신했다니. 애초에 왜 인류를 편들어야 하는 거지?”
레온의 질문에 바카디는 되레 반문했다.
“우리의 뿌리가 그곳에 있으니까.”
“개소리!”
바카디가 몸을 뒤틀며 웃었다.
“나약하고 시끄럽고 주제도 모르는 버러지랑 내가 동급이라고? 아니지, 아
니야.”
“자네 정말 미쳤나?”
“
미쳤다면 미친 거겠지.”
그걸 끝으로 바카디는 입을 다물었다. 레온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몸을
돌려 현우에게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반드시 기억해두도록 하겠습니다.”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레온은 꿋꿋하게 모인 인원 전부에게 허리를 굽
혀 가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정의를 추구하는 가디언 길드의 수장다운 행
동이었다.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조금 더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레온의 말에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우가 그러니 선우는 당연히 찬성이
었고, 도진도 마찬가지였다.
“빚을 지워 두는 것도 나쁘진 않지.”
거기에 가준까지 합류했다.
“앰버, 계속할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거기에 앰버와 직원들도 분주하게 움직여 자리를 잡았다.
“바카디는 제가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사태가 가라앉는 대로 그는 빌런들
을 수감하는 감옥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
레온은 단호하게 말하였다. 그리고 이후는 앰버가 통신방해를 해결하고 나
자, 예전 한국에서와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앰버가 위급한 장소를 알려주면 현우의 일행들이 쪼개져서 그쪽으로 달려
가 도움을 주었다. 듣기로는 일본과 러시아, 영국 등등 다른 나라의 각성자
들도 발 빠르게 움직이며 손을 보탰다고 한다.
빌런이 되어 버린 피닉스 길드의 길드원들은 대부분 사로잡혔다. 그들도 죽
음은 두려운 모양인지 조금만 불리하다 싶으면 항복을 외쳐 댔다. 그런 이
를 죽이는 건 쉽지 않은 노릇이었다.
물론 현우는 항복을 외쳐도 죽어라 패 주긴 했다.
“항복했잖아!”
“그래서 죽이진 않잖아?”
현우는 항의하는 빌런들에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그쯤 바쁘게 뛰어다
니는 각성자들 사이로 소문 하나가 돌기 시작했다.
레드 보어를 타고 다니는 까만 머리의 소년.
빌런인 것 같지는 않지만, 아군인 것 같지도 않다. 어느 쪽도 돕지 않고, 그
냥 질문만 던진 후 이동한다. 그리고 그 질문 때문에 그 소식은 현우에게 전
달되었다.
‘지현우라는 사람을 아나?’
그게 소년이 한 질문이었다.
아는 사람입니까?”
안내를 위해 다시 이쪽에 붙은 존이 물어 왔다.
“아니, 모르는데.”
현우는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이며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어렴풋이 생각나
는 이가 하나 있긴 했지만, 그는 마계 서열 1위의 마족이다.
예전에 호기심에 물어봤을 때, 요정이 그랬다. 그는 다른 세계로 쉽게 넘어
갈 수 없다고 말이다.
‘너무 강하니까요. 세계의 균형을 위해 강자들은 다른 영역으로 쉽게 넘어
가지 못합니다. 현우 님은 원래 지구 태생이라 상관없지만, 알베르크 님은
온전한 마족이시니까요. 넘어가면 큰일납니다.’
그랬으니 알베르크는 아니지 않을까? 현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또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중간계의 시간으로 10년을 마계에서 보냈다. 상대가 소년이라는 건 과거에
는 어린애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아는 어린애는 없었는데.’
중학생 때는 학교와 알바, 집만 오갔다. 아는 어린아이가 있을 턱이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번은 만나보는 게 좋겠군요.”
“그럼 또 만나면 붙들어 두라고 할까요?”
“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만나 보면 누군지 알 수 있을 터였다.
“
*
우유라도 마실래요?”
미사는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는 소년을 보고 상냥하게 물었다.
“아니면 주스도 있어요.”
“주스 쪽이 낫겠군.”
소년은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오만한 태도로 말했다. 보통은 기분이 나빠야
정상이나, 압도적인 미모가 그런 생각을 싹 지워 주었다.
“네, 곧 가져다 드릴게요.”
미사는 날 듯한 발걸음으로 문밖을 나섰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뒤에서 지
켜보고 있던 소년, 알베르크는 작게 하품을 했다.
현우를 만나게 해 준다, 하여 얌전히 따라오긴 했지만, 수틀리면 전부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헤실거리는 걸 보고 있자니, 기분
이 이상했다.
“인간은 다 저런가?”
“
하나같이 헤벌죽 웃으며 어떻게든 잘해 주려고 애를 쓴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약하면 약한 만큼 몸을 사려야 하는 것 아닌가?
아름다울수록, 상냥할수록 독을 품고 있는 마계에서는 그게 당연한 법칙이
었다.
“사과 주스예요.”
얼마 지나지 않아 알베르크의 앞에는 사과 주스가 놓였다.
“마시면서 들어 주세요.”
“그러지.”
“혹시 현우 님과는 무슨 관계인지 알 수 있을까요?”
“관계?”
현우와 자신의 관계라. 깊이 생각해볼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곧 반려가 될 사이지.”
내내 웃고 있던 미사의 얼굴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반려요?”
“그래.”
“어, 그러니까.”
미사가 말을 더듬었다.
“반려가 제가 알고 있는 그 뜻은 아니겠지요?”
알베르크가 더 말해 보라는 듯 쳐다보자 망설이며 입을 연다.
“제가 아는 반려는 평생을 같이 할 배우자를 말하는 거라서요. 아무래도 단
어의 뜻을 착각한 모양이에요.”
“맞는데?”
“네?”
“맞다고.”
이어지는 답에 미사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다시 소
년을 힐끔 바라보았다.
겉보기에는 10대 중후반으로 보였는데 사실 나이가 더 많았던 걸까? 하지
만 그렇다 쳐도 20대 초반이다.
그리고 문제는 하나 더 있었는데.
“남자 아닌가요?”
“성별이 중요한가?”
중요하다. 물론 소년의 나이에 비하면 덜 중요하긴 하다.
“혹시 나이 물어봐도 되나요?”
음 살을 넘어가면서부턴 세지 않았다.”
“네에.”
아무래도 소년은 정신에 조금 문제가 있는 모양이었다.
‘사람은 1000살이나 못 살아!’
미사는 그렇게 외치고 싶은걸 꾹 눌러 참았다. 괜히 잘못해서 소년이 충격
받을까, 싶어서였다.
“그럼 이름은요?”
“알베르크.”
이번에는 정상적인 대답이 나왔다. 미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
름을 칭찬했다.
“멋진 이름이네요.”
“그래, 내가 지었지. 원래 내 아버지는 내 이름을 알로하로 지으려고 했다는
군. 그게 마음에 안 들어서 그를 죽이고 내가 새로 지었다.”
틀렸다. 미사는 다시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애써 미소 지었다.
알베르크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으나, 미사에겐 황당한 소리로 들릴 뿐이
었다.
이제 무슨 말을 더 해야 할까, 고민하는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 , 1000
현우 님, 오셨어요?”
그 말을 듣자마자 미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냥 들어오게 하는 것
보단 미리 소년의 상태를 알려주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현우 님을 모시고 올게요!”
그러고 방 밖으로 뛰쳐나오자마자 현우와 그의 일행이 보였다.
“오셨어요?”
“네, 그런데 그 소년은요?”
“안에서 기다려요. 그런데 말이죠.”
미사는 목소리를 낮췄다.
“아무래도 조금 정신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에요.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거든
요. 혹시 모르니 조심하셔야 할 것 같아요.”
“어떤 소리요?”
“나이가 1000살이 넘었다거나, 아버지를 죽이고 이름을 자신이 새로 지었
다거나 하는 이야기요.”
그 말을 듣고 있던 현우의 표정이 굳었다.
‘요정 새끼, 알베르크는 이 세계로 못 넘어올 거라더니.’
“
순 거짓말이었던 모양이다. 이제 어찌해야 하나, 생각하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는 기다란 까만 머리의 미소년 하나가 뛰쳐나와 현우에
게 안겼다.
“현우!”
영롱한 보랏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아니었으면 했는데, 진짜 알베르크였다.
82.
“
,
현우 현우!”
황홀한 외모의 미소년, 알베르크가 현우를 꼭 끌어안고 가슴팍에 얼굴을 비
볐다. 그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웠으나, 상대의 실체를 알고 있기에 슬며시
밀어 냈다.
“일단 좀 떨어지지?”
“싫다!”
알베르크가 현우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절대로 떨어질 기색이 아니
었다.
“와우, 미인인걸. 자라면 더 예뻐지겠는데.”
옆에서는 가준이 남의 속도 모르고 휘파람을 분다.
‘낯설다.’
유독 자신을 쫓아다니긴 했지만, 이런 식의 스킨십을 하려 든 적은 거의 없
었는데. 만나지 못한 시간 동안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걸까? 현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떨어져, 떨어져서 말하자.”
“나는 이대로도 말할 수 있는데?”
“내가 불편해.”
“그래? 그러면 자세를 바꿔 볼까?”
알베르크는 그대로 몸을 돌려 뒤에서 현우를 끌어안았다. 지금은 키가 그보
다 작은 탓에 자세가 미묘하다.
‘앞이나 뒤나 불편해!’
마족이란 존재는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도발하지 않
으려 애쓰고 있었지만, 점점 본래 성격이 비집고 나오려 한다.
현우는 길게 흘러내린 알베르크의 머리카락을 쭉쭉 잡아당겼다.
“내가 방금 뭐라고 했지?”
“못 들었다.”
못 듣긴 뭘 못 들어. 멀리서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도 들을 놈이.
현우는 자신의 배 앞에서 깍지 낀 가늘고 하얀 손가락을 하나씩 힘주어 떼
어 냈다. 알베르크는 그것이 장난같이 느껴지는지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그게 내내 지켜보고 있던 다른 이들의 질투심을 폭발시켰다.
꼬마 도련님.”
먼저 나선 이는 선우였다. 호칭에서부터 상대의 속을 긁으려는 의지가 느껴
졌다. 원래 10대 소년들은 어리게 보이는 걸 싫어하는 법이었으니까.
“상대가 싫어하는 행동은 하면 안 된다고 배우지 않았습니까?”
“배우지 못했는데.”
알베르크는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그리고 다시 현우와 손가락 놀이를 하는
데 집중했다.
“그럼 지금 배우십시오.”
선우가 알베르크의 목덜미를 잡아당겼다.
겉보기에는 호리호리해 보였는데, 실제로 만지니 몸이 묵직하다.
게다가 목덜미를 잡는 순간 느껴진 살기는, 오랜 시간 몬스터를 상대로 싸
워 온 선우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퍽!
순간 현우가 몸을 돌리며 알베르크의 머리를 인정사정없이 때렸다.
“왜, 왜 때리나!”
“몰라서 물어? 내 동생 건드리지 마. 건드리면 죽여 버릴 거야.”
현우가 으르렁거리며 알베르크에게 경고했다.
“
먼저 건드린 건 저쪽이다!”
“알 게 뭐야. 내 동생 건드리는 순간, 너 죽고 나 사는 거야.”
“허어.”
알베르크도 현우에게 동생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마족과 달리
인간에게 핏줄은 애틋한 존재라는 것도 알았다.
그렇기에 현우의 동생이라는 걸 아는 순간, 선우를 해칠 마음은 접었지만
억울함은 별개였다. 절로 시무룩해질 수밖에 없었다.
“동생이 그렇게 소중해?”
“당연하지.”
“나보다 더?”
“당연한 소리를.”
알베르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서럽다는 감정을 느꼈다. 강한 마족의 자식
으로 태어나 부모를 삼키고, 강한 힘을 손에 넣었다. 그렇기에 그를 무시하
는 자는 단 하나도 없었는데, 현우는 달랐다.
“알았어. 동생은 건드리지 않도록 하지.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그러면서 슬쩍 손을 잡으니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가만히 있는다. 동생을 해
치지 않는 대가로 이 정도는 허용해 주겠단 소리였다.
혹시나 싶어 아까처럼 다시 안기려 했지만, 그건 몸을 움직여서 피한다.
“
무려 이름까지 걸고 약속했는데 허용된 건 손 하나다. 알베르크는 고개를
숙인 채 현우의 손을 조물조물 만졌다.
“또!”
이번에도 선우가 끼어들려고 했지만, 현우가 말렸다.
“그냥 둬.”
“하지만 형.”
선우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알베르크를 노려보았다.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현우야.”
그런 상황에서 도진의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는 사이야?”
“네.”
“여기? 아니면 다른 곳?”
이번 질문은 목소리가 작아 현우만 알아들었다. 아무래도 도진은 알베르크
가 인간이 아니란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하는 행동도 이상하고, 10대 소년치고는 힘이 너무 강하니 의심할 만도 하
다. 게다가 이번 일로 마족이 이세계로 넘어올 수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까.
현우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그 행동만으로도 도진은 모든 걸 이
해했다.
“둘이 아는 사이가 맞나보네요.”
둘의 조우를 바라보고 있던 미사가 손뼉을 치며 끼어들었다.
“네, 아는 사이입니다.”
“그럼.”
미사가 슬쩍 알베르크의 눈치를 보며 현우에게 물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아무래도 정상이 아닌 것 같으니까.
현우의 일행은 타국의 각성자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렇기
에 이쪽에서도 할 수 있는 한 보답을 해 주고 싶었다. 지금 상황에서 정신과
의사를 데려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필요하다면야.
“아니요. 괜찮습니다. 조금 공상이 많은 아이라 그래요.”
조금이 아닌데요. 미사는 목구멍까지 치솟아 오른 말을 도로 삼켰다.
“나중에라도 도움이 필요하시면 꼭 알려 주세요.”
“물론입니다. 배려 감사합니다.”
“아니요. 저희 쪽이 더 감사하죠. 제가 너무 붙잡아 두었네요. 그럼 쉬세요.”
미사는 웃으며 물러났다.
“일단 장소를 옮기죠.”
멀어지는 미사를 확인하자마자 현우가 말을 꺼냈다.
“어디로?”
“외곽, 될 수 있으면 사람이 없는 곳이 좋겠네요.”
“얼마 전에 그런 곳을 보긴 했어. 위치는 내가 기억하니까 가자. 이동은 뭘
로 할 거야?”
“점박이요.”
도진과 현우 사이에 빠르게 대화가 오갔다. 그쯤 되니 선우와 가준도 뭔가
이상함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가준이 혀를 차며 말했다.
“하여간 하루라도 평온하게 넘어가질 않지.”
“형, 나도 갈 거야.”
“그래. 너도 같이 가자.”
“나는?”
이어 가준이 물었다.
따라오려면 오던가요.”
“가야지.”
이리저리 돌아다닌 몸은 휴식을 요구했지만, 호기심을 이기지는 못했다.
그렇게 넷은 옥상으로 올라갔다. 휴식을 취하고 있던 점박이가 그들을 발견
하고 몸을 일으켰다.
“키르르륵.”
“반갑네. 블랙 드레이크. 네가 데리고 다니던 애지?”
“그래.”
현우는 짧게 대답하고 알베르크를 드레이크의 등에 태웠다. 그러자 그의 정
체를 눈치챈 점박이가 짧게 몸을 떨었다.
“괜찮아. 해치지 않는다.”
“키륵.”
이어 현우가 그의 뒤에 올라탔다. 선우나 도진이 못마땅하게 바라보긴 했지
만, 이게 제일 안전했다.
그렇게 알베르크 포함 다섯을 태운 점박이는 도심 외곽의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날아갔다.
“
이쯤이 좋겠네.”
“
점박이를 착지시킨 현우가 아래로 뛰어내렸다.
“너도 내려와, 알베르크.”
“알베르크? 이름이 알베르크야? 특이하네.”
가준이 말하자 알베르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본명은 더 길다.”
“뭔데?”
“아무에게나 알려 줄 수 없는 이름이다.”
알베르크는 오만한 표정으로 가준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현우, 그립고 그리웠다. 너는 그립지 않았는가?”
“아니, 나는 그립지 않았어.”
마계의 생활을 생각하면 이곳은 천국이다. 끔찍한 기억만 남아 있는 곳이
그리워질 리가 없었다.
“그런가. 아쉽군.”
알베르크는 현우와 함께한 나날이 즐거웠기에, 지나간 나날이 그리웠다.
“그보다 알베르크. 네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현우가 물었다.
흠 궁금한가?”
“궁금해. 요정은 네가 이쪽 세계로 오지 못할 거라고 했거든.”
“요정이 그랬나.”
“그래.”
알베르크는 눈을 접으며 웃었다.
“솔직하군. 나는 그래서 네가 좋아.”
숨 쉬듯이 플러팅을 하고 있다. 그를 모르는 건 이 자리에선 현우뿐이었다.
“맘에 들지 않아.”
“동감입니다.”
간만에 선우와 도진의 마음이 맞았다.
“그럼 일단 날 모르는 이도 있을 테니, 내 소개부터 다시 하지. 내 이름은 알
베르크. 마계의 제일 높은 자리에 있는 마족이로다.”
“마족이 넘어온 거였다고?”
가준이 기가 차다는 듯 혀를 찼다.
“그렇다. 나는 마족. 원래라면 너희 같은 것들은 감히 말을 놓을 수도 없는
존재지만, 기뻐하라. 너는 특별히 허용해 주마.”
“ .
그러면서 가리키는 사람은 선우였다.
“특별한 존재가 되었네?”
가준이 놀리듯 말하니 선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나도 기쁘지 않습니다.”
마족이 저렇게 나오는 이유를 알기 때문이었다.
“형과는 무슨 사이지?”
선우의 물음에 도진이 귀를 기울였다.
“미래에 반려가 될 사이지.”
알베르크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아냐!”
현우가 다급히 끼어들며 알베르크의 답을 부정했다.
“우리가 언제 그런 사이였어!”
그냥 마주치면 치고 박고 가끔 소식이나 주고받는 사이가 아니었던가. 왜
반려라는 단어가 나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제부터 그런 사이가 될 거다. 네가 없는 동안, 나의 마음을 깨달았다. 그
렇다. 나는 널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착각이야!”
“아니다. 착각 일수가 없다. 왜냐하면 너를 만난 지금, 내내 죽어 있던 심장
이 격렬하게 뛰고 있기 때문이다. 보라.”
알베르크는 현우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격렬한
심장의 두근거림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져, 놀라 손을 떼어 냈다.
“원래 이렇게 뛰는 건 아니고?”
마족은 인간과 다를지도 모르니까.
“아니다.”
돌아 버리겠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니, 머리가 아파왔다.
“누가 반려입니까!”
참고 참던 선우가 다시 폭발했다.
“현우, 네 동생은 성격이 이상한 것 같구나.”
“이상한 건 그쪽입니다. 제 형은 그 누구의 반려도 아닙니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 마계에서의 형은 모르지 않는가.”
알베르크는 약 올리듯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
83.
“
아니면 들은 이야기라도 있던가?”
들은 이야기는 없다. 마계에서 돌아온 형은 선우에게 아무것도 이야기해 주
지 않았다. 그래서 선우 또한 형에게 묻지 않았다.
자신도 마계의 혹독함을 겪어 보았기에 형의 지나간 고통을 되살리고 싶지
않아서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그리고 형에게 있어 괴로웠던 나날을 있게
해 주기 위해 애썼다.
당연히 했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후회가 되기도 했
다. 사실은 캐내서라도 더 많은 이야기를 들어야 했던 것 아닐까.
그렇기에 알베르크의 말은 선우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선우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그만해.”
현우는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나섰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알베르크가 그리 말했지만,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내 동생을 도발했잖아.”
“조금 심술이 나서. 고작 한 핏줄이라는 이유로 뭐라도 된 것처럼 굴지 않
나.”
“고작이 아니야. 내 소중한 동생이야.”
“알아. 그러니까 심술 정도로 그치는 거잖나”
정말이지 마족은 심보가 고약하다. 그는 알베르크도 다르지 않았다.
“심술도 안 돼.”
“좋아. 참아 보지.”
현우의 단호한 말에 알베르크는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모처럼 그를 만나러
다른 세계까지 왔건만, 거슬리는 게 옆에 붙어 있으니 기분이 나쁘다. 인간
사이에서는 한 핏줄끼리 반려가 되는게 불가능하니, 동생이야 그렇다 치지
만.
어느새 현우의 옆에 붙어서 경계하듯 이쪽을 바라보는 남자는 또 뭐란 말인
가.
“저쪽도 네 핏줄인가?”
“누구? 도진 형? 아니, 이쪽은 아니야.”
“그러면.”
“안 돼. 도진 형도 나에게는 소중한 사람이야.”
현우의 말에 알베르크가 투덜거렸다.
“넌 소중한 사람이 너무 많다.”
“몇 안 되는 데.”
“둘이나 되지 않는가.”
그건 보통 적다고 하는 거야.”
둘이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가준이 슬쩍 끼어들었다.
“소중한 사람에 나는 미포함인거냐?”
“포함되길 바라는 겁니까?”
현우가 혐오를 담은 눈으로 가준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처맞고도 이러는 걸
보면 그도 보통은 아니다.
“포함되면 좋긴 하지.”
“꿈 깨십시오.”
“아하, 그럼 이쪽은 아무것도 아니란 소리군.”
알베르크가 가늘게 눈을 뜨고 가준을 바라보았다.
“화풀이는 안 돼. 내가 아는 사람은 죽이지 마. 아니, 그냥 사람은 전부 건드
리지 마.”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은데.”
“싫으면 말든가.”
대신 자신도 더는 알베르크를 상대하지 않겠다. 현우는 팔짱을 낀 채 그를
바라보았다.
“알았다. 결국 더 좋아하는 쪽이 지는 거로군.”
“
아니, 그거 말인데.”
현우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네가 날 좋아했다고?”
“그래. 그러니 그렇게 자주 찾아갔지.”
“올 때마다 싸웠잖아.”
“가벼운 인사였다.”
“그게?”
기가 차지만 알베르크의 말은 사실이었다. 만약 본격적으로 싸우려고 들었
으면 현우도 매번 멀쩡하게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나마 좋아하는 사람
이니까 어느 정도 힘을 조절했기에 멀쩡할 수 있었다.
“알았어. 일단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고 치자니. 중요한 이야기인데.”
“난 반려가 될 생각이 조금도 없으니까 중요하지 않아.”
“왜!”
알베르크가 실망한 표정으로 현우를 바라보았다.
“반대로 왜 반려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데?”
“
맞습니다. 상대의 동의를 구하지 않는 구애는 폭력일 뿐입니다.”
도진이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우린 잘 맞았잖아.”
“아니거든? 난 싸우는 거 별로 안 좋아해.”
“그럼 뭐가 좋은데?”
“평화롭게 낮잠 자는 거.”
“그건 나도 좋아한다.”
알베르크의 말에 도진 또한 입을 열었다.
“나도 좋아해.”
“형, 나도 낮잠은 좋아.”
“낮잠? 그거 좋지.”
거기에 선우와 가준까지 말을 보탠다. 선우야 그렇다치지만 가준은 또 왜
끼어든단 말인가. 현우는 그에게 손을 휙휙 휘저어 보였다.
“그쪽은 좀 조용히 하고.”
“나만 구박하는 거야?”
가준이 시답잖은 소리를 내뱉었지만, 깔끔하게 무시했다.
“
반려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어떻게 이쪽으로 오게 되었는지나 털어 놔
봐.”
“네가 원한다면야.”
알베르크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아까 하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
현우가 사라진 마계. 그리움에 미친 알베르크는 미친 마족처럼 날뛰었다.
마족의 특성상 미친놈이 한둘이겠냐마는 날뛰는 이가 마계 서열 1위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상황이 그러하니 요정도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마지막 남은 사람인 현우
도 원래 세계로 돌려보냈고, 마계와의 계약도 마무리 지었으니 환상계로 돌
아간 것이다.
“하아.”
그렇게 세계와 세계를 잇는 재능을 지닌 요정마저 사라졌으니, 남은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제물과 마력을 이용해서 포털을 여는 것. 문제가 하나 있
다면 알베르크는 현우가 있는 세계의 좌표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알베르크는 시름에 찬 매일을 보냈다.
거기까진 쓸데없는 이야기 같은데.”
이야기를 듣던 현우가 혀를 찼다.
“더 들어봐라.”
“
어느 날, 평소와 같이 날뛰던 알베르크는 어둠의 숲 깊숙한 곳에 위치한 고
목 아래 열린 포털을 발견했다.
“알베르크 님?”
그 앞에는 서열 8위의 마족, 카니아가 서 있었다.
“이건, 그러니까!”
포털 앞을 막은 카니아는 어떻게든 알베르크의 접근을 막아보려고 몸부림
쳤지만, 가능할 리 없었다. 결국 그녀는 다리가 부러진 채 내팽개쳐졌고, 알
베르크는 포털 앞에 섰다.
“이건 어디와 통하는 포털이지?”
카니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말하기 싫다면 하지 않아도 좋다. 어차피 남아도는 게 시간이니까.”
알베르크는 그 자리에서 카니아를 고문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고위 마족
이기에 어려서부터 강했던 그녀는 고통에 내성이 없었다. 그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포털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지구, 지구와 통하는 포털입니다!”
“지구.”
현우가 살던 세계. 그는 종종 지구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다.
곧바로 그는 포털로 몸을 밀어 넣으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포털이 허용
하는 힘이 너무 작았던 것이다. 카니아라면 아슬아슬하게 통과할 수 있겠지
만, 알베르크는 불가능했다.
강하기에 원하는 이를 만나러 갈 수 없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도 알
베르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뒤늦은 깨달음을 얻었다.
‘힘이 넘치면 줄이면 되잖아?’
지금이야 다른 세계와의 통로가 막혔지만, 예전에는 출입이 자유로웠던 시
기도 있었다고 한다. 그때 마족들은 다른 세계로 가기 위해 자신의 힘을 나
눠서 마계에 두고 떠났다.
일종의 분신인 것이다.
그래도 되나?”
기이한 이야기였다.
“보통은 나눈 힘을 숨겨 두고 이동하지. 하지만 나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
다. 나눠도 어지간해서는 다른 마족에게 지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이렇게
힘을 나누면 중간계 외의 세계 주민에게 존재를 들키지 않을 수 있다.”
요정이나 천족이 이 사실을 알고 따지면 골치 아플 테니까. 알베르크는 당
당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일단은.”
현우의 말을 도진이 이었다.
“
누군가 지구에서 포털을 열었단 소리네.”
그 말을 다시 현우가 받았다.
“원래 넘어오려던 마족 대신 알베르크가 넘어왔고.”
“어쩐지 기분이 나쁘다.”
알베르크가 그 모습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포털을 여는 게 쉽나?”
“넘어갈 존재에 따라 다르지. 내가 본체 그대로 넘어갈 포털을 만드는 건 어
렵다.”
“아니, 지구에서.”
“인간 좀 죽이면 될걸?”
“몇 명 정도?”
손가락을 든 알베르크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최소 만 단위.”
“포털 여는 자의 마력이 강하다면? 그러니까 드래곤 정도?”
“그럼 천까지 떨어지지.”
“
골치가 아프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티아매트가 또 언제 마족을 불러내려
들지 몰랐다. 물론 도심에서 사람을 천 단위 죽이는 게 쉽지 않음을 안다.
마력 또한 무한정으로 끌어다 쓸 수 있는 게 아니었고.
그렇지만 만약 도심이 아닌 전쟁 중인 다른 나라에서 학살을 시작한다면?
그걸로 새로운 포털을 만든다면. 그걸 막을 수 있는가?
“네가 막을 순 없어?”
“포털을 여는 자를 죽여서?”
“아니. 일단 마계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잖아.”
“말하면 좀 듣기야 하겠지만, 글쎄. 신념이 다르면 불가능하지 않을까? 게
다가 카니아가 주동자는 아닌 것 같거든. 그럼 더 높은 마족이라는 건데. 마
계에는 능력이 있음에도 나서지 않고 사는 마족들도 있어.”
예전엔 마계에는 마신이 지정한 마왕이 있었다. 마족들은 신의 뜻을 받들어
그를 모시고 따랐다. 하지만 천계와의 전쟁 중에 마왕과 천왕이 둘 다 죽게
되었고, 그에 따라 신들도 잠들면서 더 이상 왕이 탄생하지 않았다.
새로운 질서가 생긴 것이다.
“맞아. 요정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었지.”
다급해지니 금방 생각나지도 않았다.
“그래도 네가 원한다면야, 나는 뭐든 할 수 있다.”
알베르크가 현우에게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가 방심한 사이
그 위에 입술을 댔다. 도진이 기겁하며 현우의 손을 잡아 뺐지만, 이미 늦었
다.
알베르크는 그런 도진을 웃으며 바라보았다. 하지만 곱게 접힌 보라색 눈에
담긴 것은 명백한 살의였다.
‘거슬리는데 죽일 수가 없네.’
현우가 안 된다고 했으니까. 그게 불만이었지만, 당장은 그의 말을 어길 생
각이 없었다.
‘일단 반려가 되는 것이 우선이니까.’
그렇기에 그저 웃었다.
84.
알베르크의 무해함을 확인한 그들은 다시 본부로 돌아왔다. 레온이 그들을
호출했기 때문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제가 직접 찾아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바쁘실 텐데요.”
“그래도 은혜를 입은 분들을 왔다 갔다 하게 하는 건 아니지요.”
레온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바카디가 빠져 나간 자리를 메우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노력하는 모습이 대단하다. 그가 세운 길드에서 내세
우는 정의, 그를 지키고자 하는 모습이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선우의 물음에 레온이 태블릿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인터넷에 나돌고 있는 영상입니다.”
“
시작은 부서진 건물 사이에서 시작된다. 기기를 들고 있는 주인이 겁에 질
렸는지 화면도 흔들렸다. 이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착했어. 이 근처는 가디언 길드의 빌딩이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
그때 쿵! 하는 소리가 들리며 화면이 휙 돌아간다.
『봤어? 고층빌딩에서 뛰어내렸어! 맙소사!』
이후 화면은 고정된 채 빌딩에서 뛰어내린 남자 둘을 담기 시작했다.
한 명은 확실히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피닉스 길드의 바카디잖아.』
또다시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런데 상대는 누구지?』
얼굴이 명확히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그는 바카디보다
강하다. 왜냐하면 시종일관 바카디가 두들겨 맞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상은 거기서 끊어졌다.
선우는 영상을 보는 내내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벌렸다.
“바카디와 형이군요.”
“네, 아직 피닉스 길드의 배신은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
런 상황에서는 더한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영상이 풀리면서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레온의 입가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피닉스 길드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게 아니냐고 말이지요. 게다가 지현우 씨
의 얼굴은 흐릿하긴 하지만, 일부 알아보는 사람이 나오고 있습니다.”
현우에게는 여러모로 곤란한 이야기였다.
“지선우 씨. 저는 지현우 씨가 왜 힘을 감추려 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힘에 대한 것이 알려지면 그가 곤란해질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도 미국도 힘든 일을 겪었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강한 힘
을 지닌 각성자였으니. 현우의 힘에 대해 밝혀지면 어째서 그동안은 전력을
다해 나서지 않았는지에 대해 비난이 나올 수도 있었다.
“형은 언제나 최선을 다해 몬스터를 사냥했습니다.”
선우가 말리는데도, 떨어져 쉬지 않고 몬스터를 사냥했다. 그런데 힘을 감
췄다는 이유로 비난받을지도 모른다니.
“저희도 최선을 다해 영상을 회수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회수에
성공했습니다만, 이미 너무 퍼졌더군요.”
아무리 미국 최고인 가디언 길드라고 해도 이미 퍼진 영상을 전부 막아 내
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단은 바카디에 대한 건 며칠 뒤에 정식으로 발표할 예정입니다.”
“그렇습니까.”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적극적으로 나서겠습니다. 지현우 씨는 우리
나라의 영웅이니까요.”
“감사합니다.”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
인간이란 참으로 알 수 없구나.”
선우의 말을 모두 들은 알베르크가 말했다.
“힘을 숨기고 있었다. 그게 뭐가 문제란 말이지? 그렇다고 해서 해야 할 일
을 소홀히 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 세계는 숨어 지내는 실력자가 없는
가?”
“없는 건 아니지. 하지만 그들은 외부의 관심이 싫어서 숨어든 만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현우랑은 상황이 다른 거지.”
가준이 알베르크의 말에 답을 해주었다.
“
복잡하군.”
“아무래도. 그래서 이제 어쩔 거야?”
“방법은 이제부터 생각해 봐야지요.”
선우와 도진, 현우는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나눴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
도 딱히 괜찮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시간만 흐를 뿐이었다.
“이런 건 어떠냐?”
그런 그들 사이로 과자를 다 먹어치운 알베르크가 쑥 끼어들었다.
“무엇 말입니까?”
선우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알베르크를 바라보았다. 그는 도진도 다르지 않
았다.
“마계에서는 가끔 있는 일인데. 원래 힘이 없던 이나, 또는 봉인되어 있던
이가 각성하여 힘을 발휘하는 일이 있다.”
“아하! 알 것 같은데.”
“현우 또한 그런 상황이라고 말하면 되지 않는가.”
“그건 그럴듯한 이야기군요.”
그동안 선우는 밖에서도 알 수 있게 현우를 감싸고 돌았다. 나갈 때마다 호
위 인력을 붙이는 건 이미 국민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이야기였다.
“
미국에 와서 본격적으로 힘을 각성한 걸로 하면 될 것 같습니다.”
머리가 모여 이야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멋진데? 영웅 기믹 같아.”
가준까지 거기 끼어들어 신나게 이야기의 비어 있는 부분을 채워 나갔다.
문제가 해결되고 있는 건 참으로 기쁜 일이었으나, 갑작스런 힘의 각성이라
니. 현우는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하였다.
“위기의 순간, 마계에서 얻은 힘이 다시 튀어 나온 거지!”
“좋습니다. 나쁘지 않은 의견입니다.”
“확실히 현우에게도 어울립니다.”
부끄럽다. 부끄러워 미치겠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몸을 뒤틀고 있자니, 소
파 맞은편에 앉아있던 알베르크가 슬금슬금 자리를 옮겨 현우의 옆에 자리
잡았다.
“현우, 이 모든 건 내가 생각해 낸 것이다.”
그러면서 반짝이는 눈으로 현우를 바라보았다. 뭔가를 원하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뭘 원하는 건데?”
“입맞춤은 어떤가?”
“
워낙 미형의 얼굴인지라 입 맞추는데 거부감은 생기지 않을 것 같았지만,
싫었다.
“싫거든?”
“왜?”
“왜냐니.”
“나는 제법 아름답게 생기지 않았나?”
마계에서는 알베르크를 보고 상사병을 앓다 죽는 마족도 있었다.
“그걸 보통 자기 입으로 말하나.”
“자신의 장점인데. 말하지 못할 건 뭐지?”
알베르크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모습이 어려지니 행동마저 따라가는 모
양이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선우와 도진이 발견했다.
“무슨 짓입니까?”
“현우야, 이리 와.”
도진은 현우에게 다가와 그를 들어다가 다른데 앉혔다. 그러자 알베르크도
일어나서 현우를 따라 이동했다.
“현우가 싫다하지 않았습니까?”
현우가 싫다고 한 건 입맞춤이다. 다른 건 싫다고 한 적이 없어.”
날 선 말에도 알베르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얄미운 말을 하면서 참으로
당당하다.
“그리고 그대야말로 선을 넘는 건 아닌가? 현우의 반려도 아니지 않은가.
참견이 지나쳐.”
“참견이라니요. 현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
입니다.”
둘은 잠시 싸늘한 시선을 나누었다. 당장이라도 칼부림을 할 듯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나는 처음 볼 때부터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같은 생각이시군요.”
“마음 같아서는 죽이고 싶다만.”
“죽일 수는 있습니까?”
“있다마다. 하지만 현우가 싫어하니까 참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선우는 도진을 응원했다. 도진도 딱히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
만, 적어도 아예 통제가 되지 않는 알베르크보단 나았다.
‘싸우다가 둘 다 죽어 버리면 좋을 텐데.’
험악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현우가 끼어들어 둘을 말렸다.
“
그만해!”
말리는 얼굴이 빨갛다.
“어, 그러고 보니.”
가준이 손바닥을 주먹으로 탁 내려쳤다. 지금 도진은 대놓고 현우에 대한
마음을 표현했다. 그 때문에 현우도 저러는 것이었고.
‘어쩐지 현우에게 많이 집착하더라.’
대충 짐작을 했지만, 직접 들으니 또 색달랐다. 그리고 기분이 이상해졌다.
다들 어디에 그렇게 끌려서 부족한 것 없는 놈들이 목을 매는 걸까.
생각해 보면 가준도 처음부터 그에게 눈이 갔다. 같이 있으면 재미있었고,
안 보이면 몸이 근질근질해서 과보호를 뚫고 쫓아오곤 했다. 이 정도로 수
고를 들여 본 상대가 없었다.
‘내 취향은 부드럽고 풍만한 여성인데.’
가준은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현우를 바라보았다. 작은 키에 몸도 말랐다.
얼굴은 제법 예쁘장하게 생겼지만, 저 정도 예쁜 여성은 생각보다 많다.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은 결국…….
‘취향을 따질 정도는 이미 지나쳤다는 거 아닌가?’
“
애초에 현우에게 붙어 있고자 도진과 싸울 때부터 이런 마음이었던 거다.
가준은 깊이 숨을 몰아쉬었다 내뱉었다.
“나도 현우, 너를 좋아한다.”
나름 결심하고 내뱉은 말이었으나, 돌아오는 건 살벌한 시선 여럿이었다.
“하하, 도가준 씨, 미쳤습니까?”
존대를 쓰는데 말투가 살벌하다. 그리고 실내의 기온이 점점 내려가고 있었
다.
“아무래도 잠시 정신이 이상해진 모양입니다.”
발밑의 그림자가 일렁이기 시작한다. 아니, 고백은 다 똑같이 했는데 왜 자
신한테만 이러는지 모르겠다.
“난 멀쩡한데!”
“아니요. 과로로 미친 것 같습니다.”
선우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현우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을까 싶어 바라보았지만, 그 기대
는 곧 깨졌다.
“장난은 그만해.”
그러면서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가준을 바라보고 있는데, 방금 한 말을 진심
으로 받아들인 기색이 아니다.
“왜, 왜 안 믿는데!”
“본인의 신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도진이 단정한 말투로 가슴을 찔렀다. 그래도 한국에서는 제법 알아주는 백
호 길드의 길드장인데 대우가 너무하다.
가준은 구석에 틀어박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
그 시각, 바카디는 엄중한 감시 아래 육지를 떠나고 있었다. 바다 저편에 존
재하는 작은 섬, 각성자들의 전용 감옥에 갇히기 위해서 말이다.
“날씨가 심상치 않은데?”
“일기 예보는 좋았는데 말이지.”
배에 올라탄 선원 몇이 대화를 나누다가 힐끔 간판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그 바카디가 감옥이라니.”
“그러게 말이지. 그 많은 권력과 재산을 마다하고 뭘 원했기에 미국을 배신
했던 걸까?”
의아함이 담긴 말에 금방 답이 돌아왔다.
힘 아닐까?”
“이미 충분히 세잖아?”
“욕망은 원래 커지기만 할 뿐이지, 줄어들진 않아.”
“철학적인 말이군.”
그사이에도 배는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알지 못한 채 말이다.
“
85.
‘
.’
왔다
내내 바닷속을 유영하고 있던 티아매트는 그대로 솟구쳐 올랐다. 목표는 바
로 위에 존재하는 배 한 척. 그녀의 존재를 느낀 건지 다급히 회피 기동을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쿵!
굉음과 함께 배가 크게 흔들렸다.
이어 반대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카이가 몸을 한 번 더 부딪치며 시선을 끌
었다.
“몬스터다!”
고함이 들려오며 사람들의 시선이 그리로 몰렸다. 그 틈에 티아매트는 인간
의 모습으로 변해 배 위에 올랐다.
“어디 보자, 위치가.”
그냥 배를 가라앉히고 전부 죽이면 해결될걸, 이리 복잡하게 해야 하나 싶
기도 했지만 어쩌랴. 필요한 걸 얻기 전까지는 얌전하게 굴 필요가 있었다.
뉴욕의 소요가 가라앉고, 각성자들이 다시 모여든 이상 바다 한가운데라도
상대쪽 인원이 충원될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일단 아이템부터 손에 넣자.’
지금 바카디를 구속하고 있는 아이템.
용사의 사슬 (유니크)]
목표로 한 대상 하나를 구속하여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만든다. 언젠가 드래
곤을 잡는데 쓰였다.
[
그게 필요했다. 겸사겸사 같은 편인 바카디도 구하고 말이다. 약해빠진 인
간을 구해서 어디다 쓰냐 싶기도 했지만.
미리 전달받은 장소에 티아매트가 도착하자 커다란 문이 보였다. 더불어 대
기하고 있던 다른 인간이 그녀를 반겨 줬다.
“역시나 침입자로군.”
작은 책을 읽고 있던 남자는 긴장된 표정으로 티아매트를 바라보았다. 아무
리 구속구로 묶어 두었다 하더라도 상대는 인간 축에서는 강자인 바카디다.
감시인이 없을 수가 없었다.
“뭐, 그런 셈 치지.”
티아매트는 손톱을 빼내 들고 감시인에게 덤벼들었다. 그는 무기를 꺼내 들
고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그녀를 이겨 낼 수 없었다. 결국엔 무기를 든 팔
을 잘린 채 정신을 잃었다.
“아차!”
피에 심취해 있던 티아매트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봉인되어 있는 문을
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에도 아이템이 사용되었지만 급이 낮다. 우악스
럽게 뜯어내고 들어서니 사슬에 묶인 바카디가 보였다.
구하러 왔나?”
바카디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그래.”
“그럼 빨리 사슬을 풀어 줘. 거슬린다고.”
약해서 붙잡힌 주제에 입만 살았네. 티아매트는 짜증을 내며 손을 휘둘렀
다. 날카로운 손톱이 살을 가르고 파고든 사슬을 떼어 낸다.
그 탓에 약해진 몸에는 피가 줄줄 흘렀지만, 바카디도 티아매트도 전혀 신
경 쓰지 않았다.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된 바카디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이번에는 지지 않는다! 복수할 것이다!”
그 사이 사슬을 챙긴 티아매트는 바카디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현우
한테 일방적으로 맞았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복수를 할 셈인가? 그 시선을
느낀 듯 바카디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난 힘이 좋다. 약한 것들을 억누를 수 있으니까. 하지만 힘만이 능사가 아
닐 때도 있지.”
“오호?”
겉보기엔 무식하게 생겼는데 제법 머리는 돌아가는 모양이다.
“
지선우, 그를 노린다.”
“그도 강한데?”
“그래도 지현우, 그 녀석만큼은 아니겠지.”
제대로 된 판단이었다.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재밌게 돌아가겠는데? 티아
매트는 혀로 입술을 날름 핥았다.
쿵!
그때 또다시 배가 흔들렸다.
“이제 나가야겠네.”
“사람들은?”
“간판 위에.”
“내가 다 죽여도 되나?”
“필요한 건 챙겼으니까.”
이제는 죽여도 된다. 다른 인원이 충원된다고 하더라도 그 전에 튈 시간도
충분했다. 티아매트가 어깨를 으쓱하자 바카디가 광소를 터트렸다.
“그럼 먼저 가 보지.”
바카디가 천장을 뚫고 위로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닷바람
소리 대신 비명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
인간치곤 별나다니까.”
보통 인간은 같은 동족을 아끼지 않던가. 그런데 그러지 않는 걸 보니 자신
과 비슷한 과인가 싶었다. 그나저나 비명을 듣다 보니 피가 고파졌다. 티아
매트는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는 감시인을 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
*
큰일 났습니다! 바카디, 그가 탈출했습니다!”
바카디의 탈출 소식은 오래지 않아 레온에게도 흘러들었다.
“탈출이요?”
“네! 주기적으로 배에서 오던 연락이 오지 않아 출동했으나 이미 늦은 상태
였습니다.”
그 자리에 남은 건 바다 위에 떠다니는 파손된 배의 파편과 시체뿐이었다.
레온은 손으로 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제 실수입니다. 호위인력을 더 보냈어야 했는데.”
남들 모르게 움직인다고 배 한 척만을 보낸 게 후회되었다.
“하지만 후회하고 있을 시간은 없겠지요.”
그보다 다른 문제를 생각해야 했다. 몰래 띄워 보낸 배 한 척이 습격을 당했
다. 그 말은 어디선가 내밀한 정보가 새어 나갔다는 뜻이었고, 어쩌면 배신
“
자가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기도 했다.
그를 눈치챈 건 레온뿐만이 아니었다. 정보를 들고 온 앰버도 이미 알고 있
었다.
“어째서!”
앰버는 울분을 토해 냈다.
“같은 인류를 배신하는 거지요?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국에 이런 끔찍한 짓
을!”
“앰버.”
“레온님,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저희는 움직여야 합니다. 아직 남아있
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네, 그렇지요. 제가 너무 흥분했습니다.”
입술을 깨문 앰버는 감정을 가라앉혔다.
“괜찮습니다.”
“바카디의 탈출 사실은 어떻게 할까요?”
“몇몇 사람들에게는 알려 줘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아는 바카디라면 위험
한 일을 저지를 테니까요.”
당한 만큼 갚는다. 바카디는 그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런 만큼 자신을
이렇게 만든 자들을 찾아가 보복할 위험이 높았다.
“지현우에게도 알려야 할까요?”
“네, 알려 주십시오.”
레온은 단호하게 말했다.
*
얼마 뒤, 아직 뉴욕내의 호텔에 머물고 있던 현우는 익숙한 손님을 맞이했
다.
“안녕하세요.”
앰버는 선우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앰버? 여기까진 무슨 일입니까?”
“급히 알려드려야 할 일이 있어서 잠시 들렀습니다.”
“일단 들어오세요.”
선우는 앰버를 안으로 들였다. 꼭대기 층을 차지한 일행은 하나같이 느른하
게 널브러져 있었다. 현우는 소파에 앉아 멍하니 TV를 보고 있었고, 그 옆
에는 도진과 알베르크라는 소년이 찰싹 붙어 있었다. 사실 앰버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녀가 찾아오기 전엔 그사이에 선우도 끼어 있었다.
가준은 왼편의 다른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테이블 위에 태블릿과 서류를
늘어놓은 채 손을 바삐 움직였다.
“앰버?”
“안녕하세요, 지현우 씨.”
“무슨 일로 찾아오셨어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어오는 현우의 모습에 앰버는 죄책감을 느꼈다. 그
렇게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은인을 위험하게 만들다니. 좀 더 주의했어야
했다.
“죄송합니다!”
앰버는 허리를 굽혔다.
“앰버?”
“바카디가 탈출했습니다.”
“네?”
“뭐?”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게 저희 잘못입니다. 일단 바카디의 행적을 추척하고 있지만, 사건이
벌어진 곳이 바다라서 조사가 늦어지고 있습니다. 중간에 다른 이의 개입을
발견했습니다만,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상태입니다.”
앰버는 숨을 몰아쉬고는 말을 이었다.
“바카디는 사악한 사람이에요. 지현우 씨에게도 보복을 하려 들지 모릅니
다. 정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대책은 있습니까?”
선우가 물어오자 앰버는 미리 생각해 두었던 걸 차근차근 풀어놓았다.
“일단 호위 인력을 붙여 드릴 생각입니다. 마침 대부분의 각성자가 돌아오
기도 했고, 이제는 뉴욕도 정리에 들어갔으니까요.”
사실 아직 사람이 모자라다. 그렇지만 자신들로 인해 피해를 입게 된 이들
에게 그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엠버는 인력을 어떻게든 차출
해 내 이들을 지킬 생각이었다.
“당장은 많이 붙여드리긴 힘들겠지만, 서서히 늘려나가겠습니다.”
“그럴 인력이 됩니까?”
“됩니다.”
앰버는 속내를 감춘 채 대답했다.
“거짓말.”
그런 앰버에게 알베르크가 한마디를 툭 던졌다.
“저 인간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거짓말이라는데요?”
“네?”
엠버로서는 황당한 상황이었다. 거짓말인 건 사실이었지만, 그걸 지적한 이
가 어린 소년이다.
테이머 계열 능력자로 알고 있었는데, 정신계 능력도 가지고 있었던가? 그
렇다고 하더라도 앰버는 정신방벽이 강한 편이었다. 어지간한 초능력자는
앰버의 생각을 읽어 낼 수 없었다.
머뭇거리는 사이, 현우가 말을 꺼냈다.
“호위 인력을 많이 붙여 주기 어려운 거지요?”
“그, 그게.”
앰버는 처음으로 말을 더듬었다.
“그렇다면 최소로 붙여 주셔도 괜찮습니다.”
다소 귀찮아지긴 했지만, 위험할 리가 없었다. 일단 이중에 힘이 제일 약한
가준만 해도 한국에서 손꼽히는 각성자였다. 거기에 도진, 선우는 두말할
것도 없고. 알베르크도 약해지긴 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점박이나 케로, 두눈은 또 어떻고. 지고 싶어도 질 수 없는 구성원인 것이
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요. 저희 때문에 피해를 입으셨는데.”
“
피해라니요. 당연히 도와야 할 일이었을 뿐인걸요.”
“지현우 씨.”
앰버의 눈동자가 글썽거렸다. 어쩜 이리 좋은 사람이 있단 말인가.
“
86.
앰버가 돌아가고 일행에게는 각성자 몇이 붙었다. 그중에는 텔레파시 사용
가능한 각성자도 있었는데, 만약에 바카디가 나타나면 빠르게 본부로 연락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뛰어난 이가 A급 각성자인 엘리샤였다. 그녀는 땅에 관
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 흙이 있는 곳에서 강해지는 특성이 있다 하였다.
‘음,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처음에는 문 밖에서 지키고 서 있던 그녀였으나, 중간부터는 안쪽으로 들어
와 소파에 앉게 되었다.
“계속 지키고 있으면 힘드시잖아요.”
지현우의 권유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몇 번이나 거절했지만, 잠시 차라도
한 잔 하라는 말에 결국은 들어오고 말았다.
‘저쪽은 지선우.’
지현우와의 동생인 지선우는 원래도 유명한 각성자였다. 작은 나라에서 태
어나 미국에 있는 각성자들만큼 강한 힘을 손에 넣은 사람. 성인이 된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는데 겉보기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대단한 사람이다.
저리 비켜.”
엘리샤에게 정중하게 찻잔을 건넨 지선우는 반대편 소파에 늘어져 있던 소
년을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내가 왜?”
“원래 내가 앉았던 자리잖아.”
“자리에 임자가 어디 있나.”
“여기 있지.”
상대는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소년, 알베르크였다. 알베르크는 지현우의
곁에 찰싹 붙어서 그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었다.
‘그래도 또래라 그런가, 반말도 하네?’
대부분의 사람에게 존댓말만 한다고 들었는데, 예외는 있는가 보다. 엘리샤
는 찻잔을 비스듬히 들고 그들을 몰래 힐끔거렸다.
처음에는 말로 하던 지선우는 이제 아예 알베르크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잡아당기고 있었다.
너무 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 상황에서도 알베르크는 꿋꿋하게 자리에
누워 버티고 있었다. 게다가 동요하는 이가 하나도 없는 걸 보니 수시로 이
랬던 모양이다.
“그냥 비켜 줘.”
“
지현우가 알베르크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찰싹 때렸다.
“싫다! 왜 매번 나만 비켜 줘야 하지?”
“그야 네가 매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그렇지.”
“저쪽 소파도 비어 있다!”
“거기엔 형이 없잖아.”
지선우는 태연한 얼굴로 그리 말하더니 알베르크의 머리카락을 다시 잡아
당겼다.
“흥! 그래 봤자 소용없다. 내 몸에서 난 건 털 하나도 강인할지니.”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그래, 아무리 어른스러워 보여도 지선우도
아직 어리구나. 그러니 저렇게 싸우는 거겠지.
엘리샤가 웃음을 꾹 억누르고 있자니 옆의 다른 소파에 앉아 있던 도가준이
말을 걸어왔다.
“웃기죠?”
“아니, 아니에요.”
“아니긴요.”
도가준이 피식 웃으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빨리 비켜!”
싫다니까! 소파 팔걸이에 앉던가!”
지선우의 얼굴에 심술이 걸렸다. 그리고 막 무언가를 더 하려던 찰나, 외부
로 통하는 문이 열리며 한도진이 안으로 들어섰다.
잠시 뭔가를 사러 나갔는지 팔에는 커다란 종이봉투를 들고 있었다. 그와
함께 다녀온 각성자는 문밖에서 헤어진 모양이었다.
“현우야, 떡볶이 사 왔어.”
“형!”
지현우는 실랑이를 벌이는 알베르크와 지선우를 내버려 두고 자리에서 일
어났다.
‘닭 쫓던 개가 되었네.’
유일하게 알고 있던 동양 속담을 떠올리며 엘리샤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어떻게 사 온 거야?”
“한인 타운에 다녀왔지. 아직 따뜻해. 지금 먹을래?”
“응!”
“알았어. 그럼 상 차릴게. 그런데 손님이 와 계시네?”
“아, 앰버가 보내 준다고 하던 각성자분이셔.”
“엘리샤라고 합니다.”
“
반갑습니다.”
“저야말로요.”
지선우도 그렇지만 이쪽도 제법 근사하다. 아니, 오히려 어린 느낌이 나지
않는 것까지 치면 이쪽이 더 취향이다. 동양인임에도 불구하고 쭉 뻗은 키
에 군더더기 없이 붙은 근육질의 몸매. 까만색 눈동자가 매력적이다.
‘하지만 듣기론 그도 지현우에게 푹 빠져 있다지.’
저리 잘난 남자들이 그에게 목을 매는 걸 보면 불가사의한 매력이 있는 모
양이었다.
“같이 드시겠어요?”
“아뇨. 괜찮습니다. 저는 차로도 충분해요.”
“알겠습니다.”
한도진은 두 번 권하진 않았다. 그는 곧바로 테이블 위에 떡볶이와 순대라
는 걸 차려 냈고, 일행들은 모여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매워!”
알베르크가 짜증을 내자 지현우가 그 앞에 물 컵을 내려놓았다.
“먹여 줘.”
보라색 눈을 반짝이며 애교를 부려 봤지만, 그는 곧 지선우에게 차단되었
다.
“
내가 먹여 주지.”
“됐거든!”
둘이 또다시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한도진은 떡볶이를 포크로 찍어서 지현
우의 입에 넣어 주고 있었다.
“어때? 맛있어?”
“맛있어요.”
“다행이다.”
하는 행동만 봐서는 이미 연인이다. 참으로 재밌는 일행이었다. 적어도 여
기서 있는 동안은 심심하지 않을 것 같았다.
“
식사가 끝난 뒤, 엘리샤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게 주변을 둘러보는 데 더
편하단 이유에서였다. 이후 선우도 나갈 준비를 하였다.
“어디가?”
“길드 일. 이제 여유가 좀 생겼으니 원래 뉴욕에 오면 하려고 했던 일을 마
무리 해야지.”
“나도 같이 갈까?”
“그럴까?”
선우는 순간 혹했지만, 마음을 바로잡았다.
아니, 생각해 보니 괜찮을 것 같아. 금방 다녀올 테니 형은 여기서 기다려.”
여기저기 다녀야 하는 일이라서 제법 힘들 것 같았다. 이미 현우가 강하다
는 건 밝혀졌지만, 아직도 선우는 예전의 감각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 탓에
힘든 일에는 현우를 움직이게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럼 조심해서 다녀와.”
“응, 다녀올게. 형.”
선우는 알베르크를 한 번 노려보고는 방밖으로 나섰다. 밖에는 뉴욕으로 파
견되어 온 선현 길드의 길드원 몇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중 2팀 팀장인 레나가 발랄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찬영도 무척 오고 싶어 했지만, 길드장이 없는데 부길드장마저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기에 레나가 오게 되었다.
그녀도 각성하기 전에는 제법 공부를 했던 터라, 다른 길드와의 일을 조율
하는 자리에서는 자기 역할을 훌륭히 해내었다.
“오랜만입니다.”
“그러게요. 뉴욕에서 사건 터진 거 듣고 저희도 같이 움직일걸, 하고 후회했
다니까요. 그래도 잘 마무리된 것 같아 다행이네요.”
“그럼 갈까요?”
“
네
기다리고 있던 엘리샤가 다른 정신계 각성자 하나를 붙여 주었다.
“만약을 대비해서요.”
그렇게 선현 길드 사람은 호텔을 나서 바빠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할 일이 많네요. 일단 가디언 길드를 들렸다가 미국 내 대장장이 길드
에도 들릴 거예요. 최근 몬스터의 재료를 이용해서 새로운 무기 제작에 성
공했다는데. 기대가 무척 큽니다.”
레나는 옆에서 재잘거리며 해야 할 일에 대한 브리핑을 이어나갔다. 할 일
을 다 끝내고 나서야 그녀는 따라붙은 각성자에 대해 물어 왔다.
“그런데 따라붙은 저 사람은 누구예요?”
“안전을 위해 미국에서 붙여 준 사람입니다.”
“딱히 강해 보이지는 않는데.”
“정신계 각성자라 그렇습니다.”
“아아.”
그래도 무성의하다. 호위 인력이라면서 저런 사람 하나 붙여 주는 게 다라
니. 아무리 인력이 부족해도 이건 아니지. 한국에서 선우 일행의 활약상을
들어 온 레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다 문득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포털은 정리되었다고 들었는데, 저희 위험한가요?”
“ !”
피닉스 길드의 배신과 바카디가 잡힌 건 알음알음 알려지고 있긴 했으나,
바카디가 탈출한 건 아직 미공개 정보였다. 그런 이유로 레나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고 있었다.
“그렇진 않습니다.”
전부 설명하고 싶지만, 지금은 미국 쪽 사람이 붙어있었다. 엘리샤나 앰버
는 호위 인력이라고 했지만, 선우는 그 말을 전부 믿지 않았다.
“당장 말하지 못할 이야기군요?”
레나는 눈치가 빨랐다.
“네.”
“그럼 이야기 해 주실 때까지 기다릴게요.”
일단 레나는 넘어가기로 했다. 이후 그들은 가디언 길드에 들러 레온을 만
나 길드 간의 협약에 대해 공고히 하고, 그 다음은 외곽에 위치한 대장장이
길드로 향했다.
“그래도 그 난리가 난 것치곤 양호하네요.”
레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노력을 많이 했으니까요.”
“그렇군요. 진짜 세상이 어찌 되려는지. 걱정되네요.”
그 말을 끝으로 레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자동차는 한참을 달렸다.
대체 대장장이 길드는 왜 이리 외곽에 자리 잡은 건지 모르겠네요.”
길도 험해서 차가 흔들렸다. 그렇게 한참을 내달리고 나서야 저 멀리 대장
장이 길드의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착했어요!”
사람이 드나들기 힘든 곳에 지어진 건물치고는 규모가 무척 크다. 그리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 때문에 레나
는 앞서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안내 창구에 있던 여성이 웃으며 레나를 반겼다. 어디로 보나 평범해 보이
는 사람이었다.
‘괜한 걱정이었나.’
머쓱함에 머리를 긁은 레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오늘 방문하기로 한 선현 길드인데요.”
“확인되었습니다. 3층으로 올라가세요.”
확인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그래도 명색이 대장장이 길드 본부인데 이렇게
확인이 간단하게 이루어져도 되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레나는 허리춤에 참 무기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그러고 보니 무기도 내버려두네?’
“
가디언 길드야 신뢰가 있어 내버려 두었다지만, 여기는 다르다. 오늘 처음
만나는 자리인 데다가 상대는 다른 나라의 길드원이다. 그런데 이렇게 무방
비하다고?
‘미국의 대장장이 길드는 정부와도 끈이 닿아 있다.’
그 말은 이곳을 지키는 이 중에는 정부 관련 각성자도 있단 소린데. 레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뒤돌아섰다.
“길드장님~.”
아무래도 이야기를 좀 더 해 봐야겠다.
87.
‘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리 생각하며 로비를 가로지르는 레나의 등 뒤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쓸데없이 눈치가 빠르네.”
여성은 천천히 창구에서 걸어 나왔다. 그런데 그 모습이 기이하다. 상반신
은 인간이었으나, 하반신이 짐승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몬스터?”
레나가 묻자 여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아니거든?”
아무리 봐도 몬스터인데?”
“닥쳐!”
염소를 닮은 두 다리가 땅을 박차며 레나에게 달려들었다.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나타난 해머가 레나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렇지만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대비를 하고 있기에 첫 공격
을 피하는 건 수월했다.
“틀린 말도 아닌데.”
레나는 여성을 비웃으며 자신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혹시나 싶어 바깥을
살펴보니 그쪽에서도 이미 전투가 시작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내 할 일만 하면 되는군.’
바깥에선 길드장인 선우가 있었다. 레나는 그를 절대적으로 믿고 있기에,
당장 눈앞의 전투에 집중하기로 했다.
“자, 덤벼 보렴.”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도발하자 다시 한번 짐승의 다리가 땅을 박차고 달려
들었다.
“
쿵!
건물 로비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다고 느낀 직후, 차 위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별다른 조치를 해 두지 않은 일반적인 차는 금방 그 자리에
서 주저앉았고, 제 기능을 잃었다.
제법 깊숙한 숲속인데 귀찮게 되었다.
선우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웅크리고 있던 몸을 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바카디.”
“바카디 님이라고 불러라. 어디 애송이가!”
그와 동시에 단단하던 바닥이 녹아내리며 익숙한 결계가 주변을 둘러쌌다.
“혼자가 아니군.”
“싸우는 건 혼자다. 이건 네가 도망칠까 봐 대처한 것뿐이고.”
바카디가 이죽거리며 대답했다.
“바깥과 연락이 되지 않아요!”
미국에서 붙여 준 각성자가 외쳤다. 정말 애송이를 붙여 준 모양인지 당황
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에 비해 선현 길드의 길드원들은 이상함을 느끼자마
자 대열을 맞춰 싸울 준비를 끝마친 뒤였다.
“오, 대단히 큰 사람인걸.”
“그런데 저 사람 어딘지 낯익지 않아? 방금 이름이 뭐라고 했지? 바카디?”
“그 사람이라면 피닉스 길드의 길드장이잖아!”
긴장으로 온몸이 조여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조금도 무너지지 않
은 채 상황을 대비했다. 상대가 바카디라지만, 이쪽에는 대한민국 최고의
각성자 지선우가 있다. 그들은 선우가 바카디에게 질 거라고 생각지 않았
다.
“귀여운 부하들이네?”
“듬직한 부하들입니다.”
“듬직하다고?”
바카디가 킬킬 거리며 발을 굴렀다.
“손가락 까닥하면 죽을 것 같은데?”
“해 보십시오.”
“아니, 됐다. 오늘 내 목표는 너니까. 쟤들은 다른 애들이 상대할 거야.”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갑자기 몇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 모습이 기
괴하다. 마치 사람과 몬스터를 섞어 두기라도 한 모양이다.
선현 길드의 길드원들은 곧바로 그들과 전투를 시작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여유로운 건 바카디와 선우뿐이었다.
“목표가 저란 말입니까?”
“그래, 지현우의 동생 지선우.”
선우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이내 지금 상황을 전부 이해했다. 바
카디는 일대일로 형을 이기지 못하니까, 자신을 인질로 잡으려고 일을 꾸민
것이다.
“흠.”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강한 형으로 인해 이런 취급을 받아 볼 줄이야. 형을
높이 평가하는 건 기분이 좋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낮은 평가를 바
란 건 아니었다.
“그럼 싸워 보자!”
바카디가 차 위에서 뛰어내려 불붙은 멧돼지처럼 선우에게 돌진했다. 바닥
이 늪처럼 변했음에도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딱!
손가락을 튕기자 늪이 얼어붙으며 바카디의 다리를 붙잡았다.
“이 정도쯤이야!”
우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얼음이 깨져 나갔다. 하지만 이미 선우는 다음
공격을 준비한 상태였다. 허공에 떠오른 물방울들이 미친 듯이 회전하며 바
카디의 몸으로 쏘아져 갔다.
가죽 북을 망치로 두드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바카디의 살이 여기저기 움
푹 패였지만 돌진을 멈추지 않았다.
선우가 방향을 틀어 피했으나, 바카디는 그 커다란 몸집을 가지고도 수월하
게 따라붙었다. 공격을 퍼붓고, 피하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둘은 한 가
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대로라면 언제 전투가 끝날지 알 수 없다. 둘의 실력이 비슷했기 때문이
었다. 미친 듯이 주먹으로 얼음벽을 두드리던 바카디는 어느 순간, 제자리
에 멈춰 섰다.
날카로운 얼음 때문에 피투성이가 되었던 손은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뭐, 이 정도는 예측했지. 의외긴 하지만 인정할 건 해야지. 넌 강하다. 지현
우란 놈보단 못하지만.”
“비열한 수를 쓰려는 자에게 칭찬받아 봤자 기쁘지 않습니다.”
“비열하다니.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리고 이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바카디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꿀꺽 삼켰다. 얼핏 봐서는 알약같이 보였
다.
“으아아아아!”
고함과 함께 바카디의 몸이 점점 더 크게 부풀었다. 그러면서 구리빛의 피
부가 점점 어둡게 물들기 시작했다. 붉고 파란 혈관이 두꺼워지며 피부 위
로 뱀이 기어간 흔적처럼 도드라졌고, 머리 위에는 뿔이 여럿 돋아났다.
“괴물이군.”
“괴물이라니이! 하하, 이거 기분 좋은걸.”
기괴한 몰골이 된 바카디는 히히 웃으며 제자리에서 뛰어올랐다. 커다랗게
부푼 몸은 더 빨라졌다.
그럼 이제 2차전이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카디의 모습이 사라졌다. 갑자기 능력이 더 생겨
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빨라졌을 뿐이었다.
그걸 깨닫자마자 선우는 물방울을 주위에 좌르륵 깔아 놓았다. 그리고 물방
울의 떨림을 통해 바카디가 어디 있는지 알아냈다. 지금, 그는 바로 선우 뒤
에 있었다.
“길드장님!”
떨어진 채 싸우고 있던 길드원들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선우는 곧바로 얼음을 사용해 등 뒤에 벽을 세우고 바카디에게 공격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공격을 맞아야할 그는 어느새 다른 곳으로 이동한 상태였
다.
“좋아, 좋아. 바로 이거지!”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바카디는 손을 뻗었다.
“켁!”
그 손에 잡힌 이는 레나였다. 로비에서 여성을 상대로 싸운 끝에 승리한 그
녀는 바카디의 뒤를 노렸다.
“싸우는데 방해는 하지 말아야지, 응? 모처럼 딱 맞는 상대를 줬는데 말이
야.”
“
선우는 회피하던 걸 멈추고 곧바로 바카디에게 공격을 쏟아부었다. 수없이
많은 물방울과 얼음 조각이 허공에 떠올라 바카디를 노렸으나, 곧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그가 레나를 앞세웠기 때문이었다.
“이러면 재미없는데.”
바카디는 투덜거리며 레나를 집어 던졌다.
그녀는 곧바로 다시 일어나려고 했지만, 이내 그 자리에서 굳을 수밖에 없
었다. 그 앞을 가로막는 다른 이 때문이었다.
“자자, 너도 여기서 나랑 같이 구경하자고?”
어느새 나타난 까만 머리의 여성이 레나를 내려다보며 히죽거렸다.
“끼어들지 마라.”
“봐서. 너무 오래 걸리면 끼어들 수도 있고.”
티아매트는 긴 머리를 손가락으로 돌돌 감았다. 사실 너무나도 끼어들고 싶
다. 그리고 지선우의 사지를 찢어 놓고, 고문하며 피를 보고 싶었다. 아니,
그게 안 된다면 다른 이들이라도.
날카로운 동공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번들거렸다.
‘피를 보고 싶어.’
실컷 피를 볼 수 있다는 말에 이쪽에 붙었는데, 생각보다 많이 싸우지 못하
고 있었다. 그 때문에 화풀이로 아랫사람을 잔뜩 갈아 버렸지만, 그 정도로
는 만족이 되지 않는다. 좀 더 강한 인간과 싸우고 싶다.
정작 현우에게는 덤빌 생각도 못하면서, 강자를 갈구한다. 지나치게 모순적
인 모습이었다.
지현우 같은 규격 외의 괴물은 제외하고.
“티아매트 님.”
카이가 티아매트의 이름을 불렀다.
“알아, 알아. 나도 참을 땐 참을 줄 안다고.”
티아매트는 침을 삼키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사이 바카디는 지선우를 구
석에 몰아넣고 있었다. 꾸준히 마기를 받아들이고, 그를 촉진하는 약까지
먹은 바카디는 본래의 힘의 두 배가 넘는 괴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러니
지선우가 이길 리 없다.
‘어차피 끝이 정해져 있다면 그냥 빨리 해치우고 데려가는 편이 낫지 않나.’
왜 굳이 자기가 싸운다고 나서서는. 티아매트는 밀려오는 욕망에 입술을 깨
물었다.
“큭!”
지선우는 강한 각성자지만, 그래도 힘에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그 한계가
다가오는 것 같았다. 끊임없이 쏟아져 내려던 물과 얼음의 비가 점점 줄어
들고 있었다. 그 사이 선현 길드의 다른 길드원들은 전부 쓰러진 상태였다.
일부는 죽었고, 일부는 크게 다쳤다. 그리고 슬슬 전투의 끝이 다가오고 있
었다.
*
소리 없이 움직이는 시계 바늘을 보며 현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선우가 늦네.”
“일이 바쁜 거 아닐까?”
“그래도 저녁엔 들어오겠다고 했잖아요.”
“이제 6시인데?”
가준이 어처구니없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6시나 된 거지요.”
“지선우만 브라콤인 줄 알았는데, 이쪽도 만만치 않구먼.”
그리 말하는 가준을 흘겨본 현우는 다리를 끌어당겨 팔로 끌어안았다. 그
탓에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누우려던 알베르크가 밀려났지만, 신경 쓰지 않
았다.
“초조한가?”
“응. 예감이 안 좋네.”
“흐음.”
“일단 도진 형이 엘리샤한테 물어본다고 하긴 했는데.”
그때, 문가에서 인기척을 느낀 현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진 형!”
“현우야.”
“물어봤어요?”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물어보니 도진이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물어보긴 했는데.”
“뭐래요?”
“30분 전부터 연락이 끊겼대. 지금 상황을 알아보고 있는 모양인데, 전화나
무전기도 되지 않는 다나 봐.”
도진의 말을 들으니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88.
“
마지막 일정이 어디라고 했었죠?”
“대장장이 길드에 들린다고 했던 것 같은데.”
확인해 보니 도진의 말이 맞았다.
“그럼 거기로 가요.”
마침 연락이 끊어진 곳도 그쯤이라 하였다. 현우가 나서자 계속 누워 있던
알베르크도 슬그머니 일어나 붙었다.
나도 같이 가지.”
상황의 심각성을 알기에 이번에는 도진도 가만히 있었다. 겉보기엔 저래도
강하다 했으니 무슨 일이 생기면 제법 도움은 될 터였다.
“나도 갈게.”
거기에 가준도 합류했다. 매번 붙어 다니다보니 이제는 떨어져 있는 게 어
색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넷은 엘리샤 일행과 함께 대장장이 길드로 향했
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차로 올라가는 내내 현우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무
거운 분위기 속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건 엘리샤와 그 일행뿐이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대장장이 길드에 연락을 넣고, 주변 길드에 도움을 청했다. 그리
고 마침내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럴수가!”
엘리샤는 차 문을 열자마자 밀려오는 비릿한 냄새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틀림없는 피냄새였다. 아니나 다를까. 차가 멈춰 선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시체가 몇 널브러져 있었다.
“선현 길드.”
입고 있는 옷에 새겨진 로고를 봐선 선현 길드의 길드원인 것 같았다. 이어
구르듯이 차에서 내려선 현우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손에 피가 묻
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체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적어.”
“
분명 현우가 보았던 길드원들은 이것보다 많았다. 혹시나 싶어 주변을 둘러
보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샤는 그런 현우를 말리려는 듯이 손을 뻗
었지만, 그는 도진에게 제지당했다.
‘그래, 저들은 피해자야. 나는 말릴 권한이 없어.’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저들의 입장도 생각해 주어야 했다. 엘리샤는
도로 손을 내리며 깊은 한숨을 삼켰다.
레나.”
현우는 로비를 훑어보았다. 있는 거라곤 바닥에 쓰러진 기괴한 모양새의 시
체 하나, 그리고 엉망이 된 자재들뿐이었다. 하지만 남은 흔적만으로도 누
가 싸웠는지 알 수 있었다.
‘여기서는 레나가 싸웠다.’
편히 말을 놓으라고 말하던 발랄한 성격의 여성. 그 흔적을 쓸어보던 현우
는 이번에는 계단 쪽을 바라보았다.
‘저 위로 가진 않았어.’
레나는 이곳에서 기괴한 인물을 죽이고 도로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따라
나서니 다른 곳과 색이 다른 흙이 보였다. 발로 밟아 보니 쑥쑥 잘도 들어간
다.
그를 보자 떠오르는 건 히드라의 결계였다. 주변을 늪지대로 바꾸고 결계를
치는 능력이라면 저번에도 보았다. 여기서도 그것과 같은 능력이 사용된 것
이다.
“
그 흔적을 더듬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거대한 천이 나무에 매달려 흩날리
고 있었다. 이런 걸 왜 이제야 발견했을까.
현우는 자리에서 뛰어올라 천을 낚아챘다. 천에는 붉은 피로 글자가 쓰여
있었는데, 제대로 읽기 어려웠다.
“알베르크.”
현우는 곧바로 알베르크를 불렀다. 그라면 이걸 읽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알베르크는 군말 없이 다가와 천에 적힌 글씨를 읽어 내려갔다. 그렇다. 이
글씨는 마계에서 쓰이는 언어였다.
“그는 우리가 데리고 있다. 아래의 장소로 혼자 와라.”
“그만.”
현우는 일단 알베르크의 말을 막았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가준과 도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도진은 현우 자신을 무척이나 아껴 주고, 사랑해 주었다. 그라면 위험한 장
소에 현우를 혼자 보내려 할 리 없었다.
정도가 다르지만 가준도 마찬가지였고.
“나중에 나한테만 알려 줘.”
“알았다.”
알베르크도 현우를 사랑했지만, 그라면 가겠다는 걸 막지 않을 것이다. 그
는 현우의 힘을 믿고 있었으니까.
뭔가 찾았어? 이건 뭐야? 이상한 글자네?”
가준이 알베르크에게서 천을 건네받아 펼쳐보곤 혀를 찼다.
“영어도 아니고, 한글도 아니고. 그쪽은 알아?”
“저도 모릅니다.”
도진 또한 고개를 내저었다. 엘리샤와 그녀의 일행 또한 이런 글자는 본 적
이 없다 하였다.
“본부에 보내서 분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천을 받아 든 엘리샤는 그를 뒤따라 온 차량에 실어 본부로 보냈다.
하지만 거기 적힌 것은 마계의 언어인지라 언제 해석이 될지는 모른다. 그
리고 그건 현우에게 시간을 벌어 줄 것이다.
“일단 근처 길드의 도움을 받아 주변을 샅샅이 뒤지고 있습니다. 지선우 님
을 발견하면 최우선으로 알려 드릴 테니 잠시 쉬시는 게 어떠실까요? 안색
이 너무 안 좋아요.”
“그럼 잠시만 쉴게요.”
현우는 느릿한 발걸음으로 근처에 설치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에
도진이 따라 들어가려고 했지만, 알베르크가 앞을 가로막았다.
“잠시 혼자 두는 게 낫지 않을까?”
“
도진은 알베르크를 노려보긴 했지만, 얌전히 물러났다. 그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충격을 크게 받았으니 잠시 생각
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저쪽 천막도 비어 있어요.”
엘리샤가 다른 천막을 가리켰지만, 그는 거절했다.
“아뇨, 저는 여기 있겠습니다.”
“그럼 의자를 가져다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도진은 현우의 천막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그는 가준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둘을 바라보던 알베르크는 돌아서 근처를 배회하던 두눈을 붙잡아 그
귓가에 속삭였다. 이후 두눈은 케로를 붙잡고 같은 행동을 하였고, 이후 케
로는 종종걸음으로 현우의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도진도 그걸 보았지만, 케로는 평소에도 현우가 자주 끌어안고 있던 터라
막지 않았다.
“아르르르르.”
안에 들어선 케로는 작게 울더니 몇몇 단어를 뱉어냈다. 원래 이 상태로는
말을 못하지만, 알베르크에게 그걸 가능케 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
현우는 말을 전부 전해 들은 뒤, 평소대로 돌아온 케로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고는 의자 위에 케로를 올려놓고 뒤쪽 문을 통해 천막을 나섰다. 이후
엔 존재감과 기척을 죽이고 산길을 내달렸다.
그렇게 얼마나 내달렸을까. 산길을 벗어난 현우는 케로에게 들었던 장소에
도착했다.
“키륵?”
그곳에는 작은 몬스터 하나가 풀숲에 숨어 있었다. 몬스터는 현우를 보자마
자 꼬리를 살랑이며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를 따라 한참을 달리고, 또 달
렸다.
“꺙!”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은 외진 곳에 있는 낡고 커다란 창고 앞이었다.
*
촤르륵.
무언가가 쏟아져 내린다. 소리를 들어봐선 금속인 것 같았다. 선우는 천천
히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깼어?”
바로 앞에는 다리를 꼬고 의자에 앉은 여성 하나가 있었다.
“마족.”
메마른 목소리로 말을 내뱉자 그녀가 나지막이 웃으며 손에 든 걸 다시 한
번 쓸어내렸다. 그건 금색의 사슬이었는데 길이가 무척이나 긴지 의자 아래
에 몸을 꼰 거대한 뱀처럼 쌓여있었다.
“티아매트. 티아매트라고 불러 줘.”
“나에겐 마족일 뿐이다.”
굳이 이름을 불러 주고 싶진 않았다.
“뭐, 마음대로 하던가.”
티아매트는 다시 사슬을 좌르륵 떨어트리고는 바닥에 닿기 전에 낚아챘다.
그러고 보니 사슬의 모양새가 어딘지 낯이 익었다.
“용사의 사슬?”
“딩동댕동!”
“그건 미국 소유일 텐데.”
“우리가 손에 넣었지!”
티아매트가 뿌듯하게 웃으며 자랑하듯 사슬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용사의 사슬은 1인에게만 사용가능한 단점이 있었지만, 그걸 무시할 수 있
을 만큼 효용성이 큰 아이템이었다. 각성자의 힘을 전부 봉인하는 것이 가
능하므로.
누구의 힘을 봉인할 셈이지?’
마족으로서 우리 편을 들고 있는 알베르크? 아니면 도진? 가준은 아닌 것
같고. 가준이 들었으면 억울해할 생각을 하며 선우는 멍한 머리를 굴리려
애썼다.
‘그도 아니면.’
지현우. 선우의 하나뿐인 형.
“형은 아니겠지?”
“지현우? 빙고! 맞췄습니다!”
어째서 봉인 대상이 형인가. 힘이라면 마족인 알베르크가 더 강할 텐데.
생각을 정리해 보자. 먼저 저들이 알베르크가 이쪽에 합류한 걸 아직 모를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높지 않다. 피닉스 길드조차 배신한 상황이었다. 아직
찾진 못했지만 선우, 레온을 비롯한 길드 수뇌부들은 다른 스파이도 있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알베르크의 존재를 눈치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럼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 보자. 알베르크는 여기 오지 않는다. 그러면 다
음가는 강자는 형이다.
‘하지만 왜?’
‘
자신을 사로잡았음을 형에게만 알렸으니까. 어떤 수단을 사용했는지는 모
르지만… 형은 무조건 이곳으로 올 것이다.
“안 돼.”
선우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흘렸다. 형이 여기 와선 안 된다. 용사의 사슬
에 걸리면 아무리 형이라도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어두운 탓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거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깼나?”
“그래. 좀 자니까 훨씬 낫군.”
바카디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본래 능력이 초재생인만큼 선우가
입혔던 상처는 모조리 사라져있었다.
“형은 안 돼.”
선우는 이를 악물고 재차 말했지만, 바카디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 생각보다 멀쩡해 보이는데.”
“그야 이쪽을 묶고 있는 건 용의 사슬 하위 호환 아이템이니까. 이것만큼의
효과는 없다고. 그나마 이렇게 늘어져 있는 것도 약물을 사용한 덕이고.”
“그렇군.”
관심 좀 가져. 이 멧돼지!”
티아매트가 악담을 퍼부었지만, 바카디는 귀를 긁적이며 무시했다.
“
89.
그 모습에 약이 올랐지만, 지금 티아매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거슬린
다고 죽이기엔 강자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저번 포털로 고위 마족이 하나 더 건너 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렇기에 저런 무식한 멧돼지라도 나름 소중한 전력인 것이다.
‘아니었다면 진작에 죽였다.’
언제나 멋대로 살던 티아매트로서는 이리 자제하는 게 낯선 일이긴 했다.
하지만 그가 약속했다. 나중에는 실컷 날뛰며 피를 보게 해 주겠다고 말이
다. 그러니 지금은 참아 본다.
“그래서 지현우는?”
“여기로 오고 있어.”
그 말에 선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형에게 무슨 짓을 할 셈이지.”
“간단해. 복수지.”
바카디는 킬킬거리며 선우의 앞에 주저앉았다.
“너도 잘 보고 있으라고. 지현우가 망가지는 모습을 말이야.”
이를 악물어 보아도 지금 당장 선우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
창고는 조용했지만, 그 안에 있는 인기척을 느끼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걸
알면서도 현우는 망설임 없이 문에 손을 댔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기에 수
월하게 열렸다.
“지현우!”
커다란 목소리에 잠시 신경이 쏠린 사이, 금빛으로 빛나는 쇠사슬이 살아
있는 것처럼 뛰쳐나와 현우에게 쏟아졌다.
이것이 저들이 파놓은 함정인 모양이었다. 잽싸게 몸을 뒤로 뺐지만, 사슬
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뱀처럼 미끄러지는 사슬을 후려쳐 보았지만, 되레 역효과였다. 몸에 닿자마
자 찰싹 붙어서는 떨어지지 않으며 그대로 손목을 조여 왔기 때문이었다.
손목에 사슬이 닿는 순간, 덜컥 힘이 빠졌다. 사슬의 효과를 눈치채는 건 금
방이었다.
‘디버프!’
사슬은 힘을 깎아 내리며 봉인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저 손목을 잡혔
을 뿐인데도 이런데, 전신을 구속당하면 어떤 상황이 될지 뻔했다. 그렇기
에 몸을 빼려고 했지만, 갑자기 뛰쳐나온 바카디가 그를 방해했다.
“오랜만이군!”
바카디가 공격을 쏟아붓자 사슬을 피하기 어려워졌다. 이내 다른 손목마저
봉인되고 다리까지 붙잡혔다. 전신이 전부 묶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힘이 빠져나간다.’
현우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싸워볼 만한 상태가 되었겠는데?”
히죽거리는 바카디의 뒤로 티아매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죽이지는 마, 살려서 데려오라고 했으니까.”
“노력은 해 보지.”
“말을 하면 좀 들으라고! 이 멧돼지야!”
도움닫기를 한 바카디가 커다란 주먹을 휘둘러 현우를 쳐냈다. 양팔을 가로
질러 막기는 했지만, 몸이 버티질 못했다. 그에 비해 작은 몸이 뒤로 붕 날
아가 나무에 부딪쳤다.
“윽!”
오랜만에 느껴지는 통증은 생소했다.
“호, 이걸 버티네?”
“네가 약하니까.”
약하다는 말에 바카디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이어 달라붙은 그가 주먹과 다
리를 휘두르며 연신 공격을 이어나갔다. 대부분을 피하고, 막았으나 몸에는
차근차근 피해가 쌓여 갔다.
‘마치 마계에 끌려간 지 얼마 안 됐을 때 느낌인데.’
몸이 물을 먹은 듯 무거워졌다. 그래도 그 와중에도 선우의 안전은 확인했
으니 되었다.
“이제 누가 약할까?”
시퍼렇게 멍이 든 팔을 보며 바카디가 조롱했다.
“아이템을 쓴 주제에 말이 많네.”
“형!”
바카디의 뒤쪽에서 선우의 애절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 맞다. 이런 방법도 있었지.”
바카디가 창고 안으로 들어가 선우를 끌고 나왔다.
“동생이 죽는 걸 보기 싫으면 그대로 맞아라.”
“와우!”
그 모습을 보던 티아매트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쩜 저렇게 더러울 수가!
같은 편이지만 부끄러울 정도였다.
헛소리하지 마!”
선우가 이를 으드득 갈며 외쳤지만, 바카디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어쩔 거야?”
현우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는 더 이상 도망치기를 멈추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바카디의 입꼬리가 길게 찢어졌다.
“그럼 먼저 한 대!”
아무런 방어도 하고 있지 않은 현우에게로 주먹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막
그에게 닿으려는 순간, 땅에서 솟아난 그림자가 주먹을 집어 삼켰다. 뒤늦
게 그걸 깨달은 바카디가 방향을 바꾸려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그림자는 인정사정없이 주먹을 삼켰고, 억지로 빼냈을 때는 살갗이 너덜너
덜해진 뒤였다. 그나마 뼈는 보이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시발, 내가 혼자 오라고 했지.”
“혼자 왔잖아.”
현우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이게 혼자라고?”
사슬에 묶인 현우의 오른쪽 옆에 도진이 내려앉았다.
“혼자 온 건 맞잖아? 그 뒤에 누가 따라오는지는 나도 모르는 일이었어.”
“
사실 아주 짐작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도진이라면 빠르든 늦든 자신의 부
재를 눈치 채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알베르크가 자신을 몰래 빠져나가게 도
와준 것도 알아냈겠지. 이후는 도진의 몫이었다.
현우는 도진이 추적술에 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알베르크가 장소를 가르
쳐 주지 않아도 결국은 도우러 나타날 것이다. 현우가 함정에 걸리면 이후
는 누가 쫓아오건 감시가 느슨해질 것도 예측했다.
‘그래도 타이밍이 좋았다.’
현우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험이 성공했다.
이제 문제는 잡혀 있는 선우를 구해 내는 것이었는데, 그것도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바카디의 뒤쪽에서부터 바닥이 새카맣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
고 그 새카맣게 물든 바닥은 선우를 집어삼켰다.
“지선우!”
당황한 도진이 외쳤지만, 현우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공간의 일부를 마기로 물들여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건 현우도 익히 아는 자
의 기술이었다.
“알베르크!”
티아매트가 기겁한 표정으로 훌쩍 뛰어 까맣게 물든 공간을 벗어났다. 바카
디 또한 간발의 차로 발을 빼는데 성공했다.
제길. 복수 좀 해 보나 했더니.”
그들에게는 놀랄 만한 상황인데도 바카디는 조금의 동요도 내비치지 않았
다. 그는 기겁해서 비켜난 티아매트도 마찬가지였다. 알베르크를 보면 도망
칠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았다.
“그래도 기회는 사라지지 않았잖아? 어차피 넌 저들을 상대해야 해.”
“일방적으로 두들겨 팰 수는 없잖아.”
“기회가 생긴 것만으로도 고마워 해야지.”
티아매트는 혀를 차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어느새 그녀의 옆에는 히드라인
카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
“티아매트, 티아매트. 제법 간이 커졌는걸?”
까맣게 물든 공간 사이로 알베르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알베르크 님이야말로 많이 변하셨군요. 설마 인간을 위해 여기까지 올 줄
은 몰랐는데요.”
“모든 게 사랑 탓이지.”
“로맨틱한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하지만 어쩌면 그 사랑 때문에 여기가 알
베르크 님의 무덤이 될지도 모 르겠는데요?”
티아매트는 고혹적으로 웃으며 손에 들린 작은 용기를 깨트렸다. 이후 허공
에 점이 생겨나더니 이내 점점 부피를 키워 나갔다.
“
그리고 그게 사람 크기만 해졌을 무렵, 그 안에서 장신의 남자 하나가 걸어
나왔다. 하얀색 정장을 입고 반들거리는 가면을 쓴 남자였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예의라고는 모를 것 같던 바카디가 고개를 숙였다.
티아매트는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자세가 좀 더 공손해졌다.
“안녕하십니까?”
남자에게서 변조된 듯한 기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로보로스의 수장을 맡고 있는 리비라고 합니다.”
“우로보로스?”
알베르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현우가 간단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이 세계의 빌런 단체야.”
현우와 같이 머무르는 동안 알베르트도 나름 이 동네의 소식은 챙겨보았다.
그래서 그를 떠올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빌런이라. 그런데 너 마족이잖아?”
“마족은 빌런 일을 하면 안 됩니까?”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규칙이란 게 있잖아. 다른 세계에서 지나치게 분탕을
치면 안 된다. 그러면 귀찮은 존재들이 참견하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천족 말입니까? 괜찮습니다. 모종의 방법으로 그들의 눈과 귀를 막고 있으
니까요. 나중에 눈치채더라도 그때는 이미 저희가 이 세계를 정복한 뒤 일
겁니다.”
알베르크가 혀를 찼다.
“인간 세상을 먹어서 무엇하게?”
“무엇하다니요. 아시지 않습니까. 이곳은 무척이나 살기 편합니다. 오염이
어느 정도 진행되어 있기는 하지만, 마계보다는 낫지요. 탐나지 않습니까?”
“별로.”
“당신이라면 그렇게 말하겠지요. 그래서 저는 당신이 싫습니다. 마계의 서
열 1위. 그건 마왕이 사라진 세계에서는 왕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그
왕은 아래를 살피지 않지요. 제멋대로 살아가고 움직입니다. 저는 그게 마
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말이 길다.”
알베르크의 손 위로 까만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비록 이곳에 넘어오
면서 힘이 줄어들었다고 하나, 그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 대다수의 마
족에게 그는 여전히 강자였다.
“역시 당신은 저의 생각을 이해해 주지 않는군요.”
“이해를 바라면 정체부터 제대로 밝히고 다시 이야기 하던가.”
“그건 싫습니다. 아직 정체를 감출 필요가 있거든요.”
리비는 허공에서 거대한 검을 꺼내 들었다. 흔히 투 핸드 소드라고 부르는
검이었으나, 그는 그걸 한 손으로 들고 있었다.
티아매트, 알베르크는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애초에 그걸 상정하고 계획을 짰다.
“좋아. 그럼 나는 남은 이들을 상대하지!”
티아매트는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
90.
“
그럼 넌 잠시 피해 있어.”
알베르크는 빼돌렸던 선우를 밀어 냈다. 묶여 있던 사슬은 어느새 풀려 있
었기에 선우는 비틀거리면서도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런 그를 따라 티아매트가 몸을 날렸다. 이어 바닥이 늪처럼 변하며 결계
가 나타났다. 카이는 티아매트를 따라가는 대신, 결계를 치는 걸 택했다.
“천족이 두려운 모양이군.”
“그들이 끼어들면 귀찮아지니까요.”
리비는 그렇게 말하며 검을 앞세웠다.
“그건 그렇지. 좋아, 이 정도는 맞춰 주지.”
천족은 알베르크에게도 귀찮은 존재였다. 적어도 현우를 마계로 다시 데려
가기 전까지는 그들이 모르는 게 좋았다.
“감사합니다.”
“그럼 싸워 볼까?”
알베르크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죠.”
먼저 공격을 시작한 이는 리비였다. 그는 거대한 검을 능숙하게 휘두르며
알베르크의 급소를 노렸다. 그러나 검은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알베
르크가 손을 뻗어 검을 잡아챘기 때문이었다.
날카로운 검날을 잡았는데도 하얀 손에는 조금의 상처도 없다.
“만만치 않으시군요.”
가진 힘을 모두 가지고 오지 못했는데도 강하다.
‘그래, 이러니까 마계에서 최강이 될 수 있었던 거겠지.’
하지만 승산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리비는 전력을 다해 부딪쳤다.
카이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이 보였지만, 재생력이 강한 히드라니 제법 오
랜 시간 결계를 유지하며 버틸 것이다. 그 안에 알베르크와 결판을 내야 했
다.
선우야!”
현우는 달려오는 선우를 와락 끌어안았다. 헤어진 지 하루도 되지 않았건만
얼마나 힘들었는지 마른 것 같았다.
‘저 망할 놈들!’
“
이를 아드득 갈아보지만, 당장은 보복할 방법이 없다. 일단은 몸을 감싼 사
슬부터 뜯어내야 했다. 하지만 뜯어내려고 손을 대면 극심한 고통이 몸을
관통했다. 살을 같이 떼어 내지 않는 이상은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형.”
선우가 현우를 마주 안으며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미안해.”
“왜 사과해?”
“다쳤잖아.”
힘이 봉인된 상태로 바카디를 상대하다 멍이 좀 들긴 했다. 그래도 그건 선
우의 잘못이 아니다.
“왜 피해자가 사과해. 사과해야 할 놈은 저기 있는데.”
그런 현우의 말을 들었는지 바카디가 피식 웃었다.
“뭐야, 사과를 원해?”
현우는 잠자코 중지를 들어서 보여 주었다. 평소라면 좀 더 이미지 관리를
했겠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좋아, 마음에 드는군!”
웃어 제끼는 바카디의 옆에 티아매트가 내려섰다.
뭘 처웃고 있어?”
티아매트는 바카디에게 핀잔을 주며 손톱을 길게 뽑아냈다. 그와 동시에 바
카디의 몸이 시커멓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전력으로 간다!”
그 말에 현우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도진이 혼자서 둘을 상대할 수 있
을까. 가준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필이며 이럴 때 없다.
실상은 만약을 대비해 몬스터들과 후방에 남았다가 갑자기 나타난 다른 적
을 상대하고 있었지만, 현우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괜찮아.”
도진은 그런 현우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앞으로 나섰다. 먼저 나선 건 바카
디였다. 쿵쿵거리며 돌진한 그가 그대로 도진을 들이박았다. 그러나 정직한
공격은 먹히지 않는 법이다. 도진은 맞서는 것보단 힘을 흘리는 걸 택했다.
그림자에 비스듬히 튕겨져나간 바카디가 나무를 꺾으며 저 멀리 나동그라
졌다. 이어 카라를 역수로 쥔 도진이 그에게 다가서려 했으나, 티아매트의
공격에 물러서야 했다.
바카디가 정직하게 도진을 노린다면, 티아매트는 좀 더 지능적으로 공격했
다. 도진보다 무기력해진 현우와 선우를 집요하게 노렸다.
“하하하, 나랑 싸우자!”
바카디는 미친 멧돼지처럼 연신 들이박고, 주먹을 휘둘렀다. 그때마다 땅이
패이고, 나무가 부러졌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티아매트는 그 뒤에 숨어 손
“
톱을 휘둘렀다.
도진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티아매트는 만만한 적이 아니었다. 지
금도 본인의 힘을 전부 쓰지 않으며 틈을 노리고 있었다.
‘뭔가 해야 해.’
선우는 어떻게든 형을 지키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지금은 현우가 나서는 게
나았다. 힘은 사라졌어도 싸움의 기술마저 사라진 건 아니었으니까.
현우는 선우를 뒤쪽으로 밀면서 숨어서 공격해 오는 티아매트의 손톱을 팔
뚝으로 막아 냈다. 몸이 뒤로 쭉 밀리기는 했지만, 팔에 휘감긴 사슬 덕에
구멍이 뚫리는 건 피했다.
“형, 형!”
도진이 뒤늦게 티아매트를 공격해서 떼어 놓았지만, 한순간일 뿐이었다. 그
녀는 답지 않게 끈질기고 기민하게 현우만을 노렸다. 그러다 현우가 멀어지
면 선우를 공격하는 척해서 다시 끌어들이곤 했다.
그런 공격이 반복되니 현우도 점점 지쳐 갔다.
‘오랜만이네.’
마계에서 힘을 얻게 된 뒤로는 이런 무기력함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상처
를 입어 가며 막아 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진저리치도록 싫었다.
‘그래도.’
자신은 처음부터 강하게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기억해라. 힘을 가지기 전,
악만 가지고서 마계의 몬스터를 상대하던 때를. 현우는 도진의 짐을 덜어주
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윽.”
선우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떨리는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 주먹으로 다리
를 내려쳤다.
‘움직여라, 움직여!’
아이템은 떼어냈으니, 약 기운만 풀리면 싸울 수 있다. 하지만 포션을 써 보
아도 별다른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다. 절망이 몸을 잠식했다.
형이 돌아오기만 하면, 뭐든 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현실은 냉정하
기만 했다.
“형.”
선우는 이로 입 안을 물어뜯었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맑게 유지하기 위함이
었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몸이 좀 더 잘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때, 뒤쪽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힘겹게 고개를 돌려보니 처음 보는 몬스터가 이쪽을 향해 느릿하게 기어 오
고 있었다. 선우는 힘겹게 손을 뻗으며 능력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몬스터
가 좀 더 빨랐다. 갑자기 튀어오른 몬스터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선
우에게 달려들었다.
“선우야!”
그걸 발견한 현우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티아매트는 그 빈틈을 놓치지 않
았다.
날카로운 손톱이 단단한 몸을 꿰뚫고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현우도, 선우
도 아니었다.
현우가 위험한 걸 보고 서슴없이 몸을 날린 도진이었다. 길고 단단한 손톱
이 뱃속을 휘젓고 빠져나갔다. 티아매트는 몸을 절단하고 싶었던 모양이지
만, 도진의 맹공에 다시 몸을 물려야 했다.
“흐응.”
티아매트는 손톱에 맺힌 핏방울을 혀로 핥았다. 신선한 인간의 피는 참으로
달았다.
현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선우는 무사했다. 뒤늦게 나타난 케로가 선우에
게 달려들던 몬스터의 목덜미를 물어 챈 덕분이었다.
“워, 괜찮아?”
이어 가준과 점박이, 두눈도 모습을 드러냈다.
“참 빨리 온다?”
존대를 하는 것도 잊은 현우가 이죽이며 말하자, 가준이 억울한 표정을 지
었다.
“나도 몬스터를 상대하다 왔다고? 지금 뒤쪽도 난리야. 포털이 열려서 엘리
샤와 파격된 각성자들도 싸우고 있더라고.”
정말 단단히 작정하고 온 모양이었다. 현우는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고
는 명령했다.
“당장 저걸 치워.”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케로와 점박이 두눈이 적에게로 달려갔다.
“쉽지 않아 보이는데?”
가준의 말에 현우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케로가 바카디를, 점박이와 두
눈이 티아매트를 상대하며 접근을 막고 있었다.
“아악!”
짜증을 낸 티아매트가 변신을 풀었다. 그러자 그 자리에 거대한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에 질새라 두눈도 원래의 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두
드래곤의 힘 싸움이 시작되었다.
두눈은 필사적으로 덤비고 있었지만, 보기에도 티아매트가 더 크고 강해 보
인다.
“크르르르!”
계속 밀리던 두눈이 티아매트에게 목을 물렸다. 점박이가 그런 티아매트를
떼 내기 위해 돌진했지만, 큰 효과는 없어 보였다.
“저리 꺼져!”
바카디는 케로의 세 개의 목 중 하나를 잡아 졸랐다.
케겡!”
다른 두 개의 목이 인정사정없이 바카디를 물어뜯으며 버둥거렸다.
상황이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람.”
가준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지금 넌 못 싸우는 거지?”
“사슬 때문에.”
“봉인 계열이냐.”
가준이 현우에게 얽힌 사슬을 뜯어내려 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됐어. 나보단 도진 형을 봐 줘.”
“누군 형이고 누군 아니고.”
가준은 투덜거리면서도 포션을 꺼내 들어 도진에게로 향했다. 현우는 잠시
선우의 상태를 확인한 후 그 뒤를 따랐다.
“형.”
“현우야.”
“
도진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속상하게 웃긴 왜 웃어. 현우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옷자락을 들어 올렸다. 관통상을 입은 배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포션!”
“나에게 포션 맡겨 놨냐?”
가준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가지고 있던 포션을 건네주었다. 현우는 선우의
곁에 도진을 앉히고서는 포션을 상처에 들이부었다.
“아파도 참아요.”
“응.”
포션을 붓자 흘러내리는 피는 줄어들었으나, 상처는 여전히 벌어져 있었다.
혹시나 싶어 하나를 더 부어도 그 이상 아물지는 않았다.
“포션이 만능은 아니지. 괜히 힐러가 있는 게 아니라니까.”
“그럼 힐러를 불러와.”
“그쪽도 전투 중이라 정리되어야 데려올 수 있을 텐데. 우리 쪽에서 가는 게
빠를 거다.”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이었다.
91.
현우는 눈앞이 까마득해짐을 느꼈다. 어떻게든 상황을 벗어나려고 해도 쉽
지 않았다. 티아매트와 바카디는 지독하리만치 집요했다. 전투가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알베르크가 있는 쪽에서 카이의 커다란 울음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
에 티아매트는 그 자리에서 멈칫했다.
‘기회다!’
기회를 잡은 두눈이 티아매트의 목을 물고 늘어졌다. 그녀는 몸부림쳐서 두
눈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점박이의 방해가 더해져 쉽지 않았다.
티아매트가 간신히 그들을 떼어 냈을 때는 목에 커다란 상처를 입은 뒤였
다. 그녀는 몸을 다시 인간의 형태로 되돌렸다. 줄줄 흘러내리는 피에 목을
손으로 막아 보았지만, 지혈이 잘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안색이 창백하다.
‘후퇴 신호가 올 걸 알고 있었는데도.’
순간 방심한 탓에 상처를 입었다.
이를 아드득 갈던 티아매트는 바카디에게 외쳤다.
“후퇴다, 멍청한 멧돼지 새끼야!”
“하하! 지금 한창 재밌는데?”
“그럼 혼자 남던가!”
작은 구를 깨트리자, 허공에 작은 점이 나타나 점점 덩치를 키워 나갔다. 그
리고 그게 사람 크기가 되자마자 티아매트는 안으로 몸을 날렸다. 케로의
목을 조르던 바카디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엔 티아매트의 말을 따
랐다.
다음에 보자고!”
“꺼져! 다음에 보긴 뭘 봐!”
가준이 몸서리를 치며 외치고, 그렇게 현장이 정리되었다. 현우의 사슬이
남아 있긴 했지만, 그는 그걸 지금 당장 푸는 것보단 도진의 상태가 더 중요
하다고 판단했다. 그렇기에 도망치는 이들을 쫓지 않았다.
“점박아!”
적이 사라지자마자 현우는 점박이를 불렀다. 이어 가준에게 말했다.
“선우 좀 챙겨 줘.”
“어, 음.”
가준은 못마땅한 표정을 짓긴 했으나, 선우에게 다가서 그를 안아 들려고
했다. 물론 선우는 질겁하며 그를 거부하려 했다.
“선우야, 이번만.”
하지만 애처로운 형의 부탁을 어찌 거절할 수 있으랴. 결국 선우는 가준의
도움을 받아 점박이에게 올라탔다.
아직 알베르크가 남아 있었지만, 어차피 여기 있는 이들은 전력이 되지 않
는다. 자리를 비워도 상관없는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두눈과 케로는
그 자리에 남겨두었다.
“
*
힐러! 힐러를 부탁드립니다!”
빠르게 중독을 해결한 선우와는 다르게, 도진은 결과가 좋지 않았다.
“저주와 독이 상처 회복을 막고 있어요. 포션도 잘 통하지 않았죠?”
“네.”
현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일단 제가 할 수 있는 처치는 다 했어요. 이 이상은 다른 분께 보여야 할 것
같습니다. 미리 본부에 연락을 넣어 뒀으니 산하 병원에 가면 치료를 받으
실 수 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병원의 이동은 걱정 마세요. 헬리콥터
가 준비되었어요. 그리고 제가 곁에서 계속 회복을 돕겠습니다.”
도진은 지속적인 치유를 받으며 빠르게 병원으로 이동했다. 거기에는 좀 더
등급이 높은 힐러가 기다리고 있었다.
A급 각성자, 힐러 안나. 전투 능력은 거의 없지만, 회복 능력만큼은 다섯 손
가락에 꼽히는 여성이었다. 정말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를 보인 것이다.
그 때문에 희망을 가졌으나, 그 희망은 오래지 않아 꺾였다.
“죄송해요.”
병실에서 나온 안나가 한 첫말이었다.
“
독은 어느 정도 해독했으나, 저주가 지독해요. 이건 제 힘으로는 풀 수 없
어요. 혹시 몰라 해주가 가능한 각성자를 불러 봤지만, 그도 힘들다 하더군
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현우의 질문에 안나는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다.
“
미칠 것만 같았다. 되는대로 힐러를 불러 보았지만, 전부 다 고개를 내저었
다. 힐을 쏟아부어도 버티는 것이 고작이라 하였다. 아무리 주렁주렁 링겔
을 달고 수혈을 해 보아도, 지혈을 해 보아도 피가 지속적으로 새어 나온다.
새하얘진 도진의 얼굴은 마치 석고 같아 보였다. 그 앞에서 현우는 가학적
으로 입술을 물어뜯었다. 너덜너덜해진 입술에서는 피가 흘러내렸지만, 아
랑곳하지 않았다.
선우는 이미 회복되어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현우의 사슬도 미국 정
부가 도움을 주어 제거하였다. 하지만 도진만은 어떻게 하지 못하고, 죽어
가는 걸 바라보고만 있다.
가까이 다가가 떨리는 손으로 도진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도진이 눈을
천천히 떴다.
“현우야?”
까슬한 목소리가 현우를 불러 왔다.
“형.”
묻고 싶은 건 많았다. 하지만 물을 수 없었다.
“괜찮아? 입술이 엉망이네.”
본인은 더 아프면서, 왜 이런 사소한데 신경을 쓴단 말인가. 속에서 무언가
가 울컥 솟아올랐다. 현우는 거칠게 머리를 헝클어트리고는 도진의 옆에 앉
았다.
“형, 지금 환자는 형이야.”
지금 이 순간은 존대를 하는 것도 잊었다.
“이제야 말을 놓네? 기쁘다.”
현우는 입술을 달싹이다 다물었다. 그리고 늘어져 있던 도진의 손을 조심스
럽게 잡았다.
“기다려. 어떻게든 살릴 거니까.”
“기다릴게.”
도진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지친 듯 다시 눈을 감았다.
어느덧 어둠이 내린 병실, 등을 켜지 않아 사방이 어둡다. 그 속에서 알베르
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 있다 이제 와?”
“어디 있다 이제 오냐니. 날 잊고 있었으면서.”
알베르크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됐어. 그보다 형의 상태를 좀 봐줘.”
“봤어.”
“저주와 독을 풀 방법이 있을까?”
“없진 않지.”
그 말에 현우의 시선이 알베르크에게로 향했다.
“어떻게?”
“그걸 왜 내가 알려 줘야 해?”
알베르크가 뽀로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알베르크.”
“내가 널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게 모든 걸 양보해 주겠단 소리는 아
냐.”
“알고 있어.”
“알면 대가를 제시해.”
어떤 대가를 제시하건 현우는 도진을 살리고 싶었다.
“뭘 원해?”
너라면 알 것 같은데.”
알고 있다. 현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의사와 힐러가 말하길 이대로라면
도진은 일주일도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 하였다. 그나마 그 정도 버티
는 것도 S급 각성자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몸의 관계 같은 걸 원하는 건 아니지?”
“그런 걸로 만족할 수 있을까.”
알베르크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꼬며 답했다.
“내가 원하는 건 네가 내 반려가 되는 거야.”
그래, 그런 걸 원할 줄 알았다. 마족은 이런 때를 놓칠 종족이 아니었으니
까. 현우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자신에게 도진은 어떤 사람일까? 현우는 마음을 더듬어 보았다. 그를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나오고 심장이 뛴다. 은근히 애정을 표현해 오는 행동이 좋
았다.
‘좋아해.’
그래, 자신은 도진을 좋아하고 있었다. 아직 사랑이 뭔지는 모르지만, 세간
에서는 이걸 사랑이라 부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게 사랑이 맞을까?’
사랑이라 하기엔 걸리는 게 너무 많다.
“
선우야.’
하나뿐인 동생. 형을 기다리며 힘든 세월을 기다려온 그 아이를 생각하면,
쉽게 입을 열기 어려웠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어지러웠다.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겠군.”
그 말과 함께 인기척이 사라졌다.
이어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선우였다. 현우는 다시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자 선우가 초
조한 얼굴로 서 있는 게 보였다.
“형.”
걱정 어린 표정으로 선우가 말했다.
“간호도 좋지만, 형도 좀 쉬어. 잠도 안 잤지?”
“난 괜찮아.”
“괜찮긴. 이러다 환자보다 형이 먼저 쓰러지겠어.”
“……그건 안 되지.”
“그럼 조금만 쉬자. 한도진은 내가 대신 살펴보고 있을게.”
‘
옆에 서 있던 가준이 선우의 말을 거들었다.
“그래, 좀 쉬어. 내가 또 환자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보잖아. 지선우를 못
믿으면 나를 믿어!”
가준이 가슴을 탕탕 쳤다. 그리고는 현우를 슬쩍 끌어다 등을 떠밀었다. 평
소라면 못마땅해할 선우도 그런 가준을 말리지 않았다. 그저 현우 대신 도
진을 간호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을 뿐이었다.
“일단 뭐 좀 먹자.”
어디서 구했는지 컵에 담긴 수프를 내민다. 그걸 받아들자 그제야 안심한
표정을 짓는다.
“그거 꼭 다 마셔라.”
“응.”
현우는 따끈한 컵을 양손으로 감싸고 조금씩 수프를 삼켰다. 빈속에 먹을
게 들어가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 봐. 배고팠네. 더 있으니까 마음껏 마셔.”
가준은 눈치를 보며 현우의 옆에 앉았다.
“혹시 몰라서 한국 내의 힐러들도 불렀어. 곧 도착할 거야.”
“고마워.”
“고맙긴. 한도진이 일어나면 힐러 소환 비용 전부 받아먹을 거다.”
툴툴대긴 해도 도움이 되고자 움직인 건 사실이었다. 선우라면 몰라도 가준
까지 이럴 줄은 몰랐는데. 현우는 수프를 마시다 말고 가준을 빤히 바라보
았다.
“형을 싫어하는 거 아니었나?”
“좋아하는 건 아니지.”
“그런데 왜 도와?”
“내가 착해서.”
그건 아닌 것 같은데. 현우는 가준에게 의심의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가준
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 시선을 흘렸다. 사실은 달랐지만, 그걸 전부 밝히기
엔 자존심이 상했다.
‘이대로 한도진이 죽으면 그나마 있던 기회도 사라질 것 같으니 그렇지.’
때로는 죽은 사람이 산 사람보다 많은 걸 쥐고 있기도 한다. 그렇기에 도진
은 아직 죽어선 안 됐다.
“참, 알베르크는 돌아왔어?”
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베르크한테도 한번 보일 거라고 했잖아. 뭐래?”
“방법은 있대.”
“그럼 다행이네! 그래서 그 방법이 뭐래?”
알려 줄 수 없대.”
“왜!”
가준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알베르크는 사람이 아냐.”
“동정심 같은 걸로 움직이진 않는단 소리군.”
“그래, 그는 지금 대가를 바라고 있어.”
더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냥 봐도 알베르크는 현우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러니 원하는 대가도 그쪽일 것이다.
“
92.
“
뭔지 물어봐도 돼?”
가준의 물음에 현우가 대답했다.
“반려가 되어 달라는 거지.”
“그래, 그러고 보니 그게 궁금했어. 반려가 뭐야? 결혼해 달라는 거야?”
“대략적으로는. 다만 반려는 일반적인 부부관계랑은 좀 달라. 좀 더 깊게 얽
어매는 거지. 반려가 되면 수명을 나누거든. 그래서 비슷한 때에 죽게 돼.”
“그런 게 가능하다니. 신기하네. 그래도 할 건 아니지?”
“모르지.”
현우는 남은 수프를 단숨에 마시고, 입을 다물었다.
*
악 악! 악!”
요정은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넘었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를 돌아도 마음이 안정되질 않았다.
“미친 짓 그만하고 임무나 받아.”
옆에서 그걸 지켜보고 있던 다른 요정이 한심하단 표정으로 잔소리를 뱉었
지만, 그도 들리지 않았다.
“대체 왜! 뭐가 부족해서! 마계 서열 1위가 인간계로 간 거야!”
“인간을 사랑해서 간 거라며.”
“그래, 그게 이상해! 왜 인간을 사랑해?”
“내가 알 바냐? 빨리 임무나 받고 꺼져.”
“흑흑, 내가 어떻게 거기서 벗어났는데.”
요정은 눈물을 흘리며 임무가 적힌 종이를 받아들었다.
「인간계로 가서 알베르크를 마계로 돌려보낼 것.」
“무슨 임무가 이래. 내가 마계로 가란다고 가겠냐고!”
“ !
안 가겠지. 힘내라. 최대한 빨리 해결하고, 아니면 천계에서 난리 칠 거야.
그쪽도 슬슬 인간계에 범상치 않은 일이 생겼다는 걸 깨닫고 있거든.”
다른 요정은 혹시라도 얽힐까 봐 임무를 넘겨주자마자 빠르게 튀었다.
남은 요정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허공에 손을 내저어 포털을 생성했다.
요정은 세계를 넘나드는 자, 타 차원으로의 이동이 제법 수월한 편이었다.
“그래, 가자. 가서 해결하자.”
요정은 굳은 표정을 짓고 포털 너머로 몸을 던졌다. 인간계는 넓지만, 알베
르크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가장 강한 마족의 기운을 찾으면 되기 때문
이었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알베르크 외에도 그를 찾아 낼 수 있는 인물이 있었다
는 것이었다.
덥석.
가늘고 하얀 손이 허공에서 뛰쳐나온 요정을 붙잡았다.
“갸악!”
당황한 요정이 뒤를 돌아본 순간,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니가 왜 여기서 나오세요?’
지현우, 요정이 인간계로 보낸 괴물이 그를 붙잡고 있었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
미간을 구긴 현우가 험악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아무래도 좋은 시기를 함
께 한 게 아니다 보니,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난 많은 배려를 했는데!’
억울해해도 현우는 그걸 알아주지 않았다.
“또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손아귀에 점점 힘이 들어간다.
“터져요, 터져! 내 몸이 터진다아아아!”
“터지라지.”
“이 잔인한 사람!”
“됐고. 여긴 무슨 일이야?”
“임무예요, 임무. 이건 현우 님에게도 좋은 소식일걸요!”
그제야 손아귀에 들어간 힘이 조금 빠진다.
“무슨 임무인데?”
“알베르크 님을 마계로 되돌리는 일입니다!”
“그게 나에게 왜 좋은데?”
“그야 현우 님은 알베르크 님의 반려가 될 생각이 없으시잖아요?”
그건 그렇지.”
현우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그러고 보니 네가 그랬었지. 요정은 그 누구보다 깊고 넓은 지식을
가졌다고.”
“그, 그랬었던가요?”
요정은 괜히 휘파람을 불며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현우에게는 소용없는 짓
이었다. 그는 그대로 요정을 손에 쥔 채 발걸음을 옮겼다.
불안함에 작고 작은 요정의 심장이 콩닥거렸다. 그러나 이후 벌어진 일은
생각과는 좀 달랐다.
“이 사람을 치료할 방법이 있을까?”
현우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이런 풀죽은 목소리는 처음 들어보는
것 같았다.
“일단 저는 인간 세상에 함부로 참견해서는 안 되는데요.”
“치료할 방법이 있을까?”
다시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요정은 현우의 손등을 필사적으로 탁탁 쳤
다.
“있어요, 있어!”
일단 사는 게 더 중요했다.
“
뭔데?”
물어오는 목소리가 다급하다.
“그게.”
요정이 막 말하려는 순간,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게 뭐?”
알베르크였다.
“알베르크.”
“응, 현우야.”
현우는 손에 쥔 요정을 자신의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와 동시에 요정
의 등줄기로 오싹 소름이 돋았다. 분명 알베르크는 웃고 있는데, 분위기가
살벌하다.
“손에 쥔 건 뭐야?”
“너도 알지 않나?”
“그래, 알지. 요정이지?”
요정은 손으로 목덜미를 쓸었다. 하필이면 괴물 사이에 낄 게 뭐람. 이 자리
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이 슬펐다.
“요정은 변덕스러운 존재지. 저 존재가 진실을 말할 거라고 믿어?”
“
믿어. 그러니 이번은 네가 물러나.”
현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내내 날카롭던 분위기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어 알베르크의 표정도 바뀌었다. 똑같은 웃는 얼굴이지만, 살기가 느껴지
지 않는다.
“아아, 진짜. 이번엔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나 싶었더니 요정이 나타나다니.
운이 나빴네. 그래, 내가 졌어. 치료 방법을 알려 줄게.”
“요정에게 물어보면 돼.”
“그래도 나한테도 듣는 게 낫지 않아?”
“그렇긴 하지.”
마찬가지로 날카롭던 현우의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그리고 요정은 다시 달
랑 들려 알베르크와 함께 휴게실로 돌아갔다.
“자, 이제 말해.”
“저주를 건 자는 드래곤이죠?”
“그래.”
“마법에 능숙한 드래곤의 저주를 풀 만한 존재는 딱 둘이죠. 비슷한 능력을
지닌 드래곤이거나 천족.”
“맞아?”
“
현우가 알베르크를 바라보며 물었다.
“맞아.”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있습니다.”
요정의 말을 알베르크가 이었다.
“드래곤이나 천족이 보기 드문 종족이라는데 있지. 보아하니 티아매트가 상
처 입힌 것 같은데, 그녀는 미치긴 했어도 상당히 강한 드래곤이거든.”
“두눈이로는 안되나?”
“힘들지. 걔는 같은 드래곤이라도 덜떨어졌다고 소문났다고. 특히 마법적
소양이 형편없어. 암만 애를 써도 안 될걸.”
그 말에 현우는 엉망이 된 입술을 다시 잘근 깨물었다.
“그래도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요정이 말했다.
“사실 인간계에는 몇몇 이종족이 숨어 삽니다. 들키면 원래 세계로 끌려가
기에 힘을 감추고 살긴 합니다만, 그런 이들을 찾아서 도움을 요청하면 될
겁니다.”
“숨어 사는데 어떻게 찾아.”
“그건 알아서 생각하셔야죠.”
아니면 다른 방법도 있어.”
알베르크가 웃으며 말하자, 요정이 발발 떨며 물었다.
“그 방법이 제가 생각하는 방법은 아니겠죠?”
“내가 힘을 터트리면 돼.”
괜히 리비가 카이를 이용해서 결계를 친 게 아니었다. 일정 이상의 힘을 발
휘하면 천계에 들킬 수밖에 없으니까.
“안 됩니다아악! 지금도 간신히 천계에게 감추고 있는데, 그러면 틀림없이
들킵니다! 천계에서 난리 칠 거라고요! 지상으로 내려온다고요? 천계와 마
계 사이에 전쟁이라도 일으킬 생각입니까?”
그 말에 현우가 알베르크를 바라보았다. 아까는 조건을 들어주기 전까진 도
와주지 않을 것처럼 굴더니,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는지 모르겠다.
“왜 도와주냐는 표정인데? 염려 마. 이번엔 순수한 의도에서 도와주려는 거
니까.”
“정말이야?”
“마족은 거짓말을 안 해.”
“하지만 감추거나 돌려 말하긴 하잖아.”
“뭐. 그렇긴 하지. 하지만 지금은 정말이야.”
“
어차피 감추려고 해도 요정이 있으니 소용없다. 요정이란 놈들은 자기 입이
무겁다 떠들어 대지만, 목숨 앞에서는 뭐든 술술 불어 댄다.
알베르크도 그걸 알기에 먼저 털어 놓는 걸 택했다. 어차피 알게 될 거라면
자신이 알려 주는 게 호감을 사기엔 좋을 테니까.
“안 됩니다! 안 돼요!”
요정은 엉엉 울며 외쳤다.
“제발 그만두세요! 그런다고 천족이 인간을 돕겠습니까?”
“내가 도와 달라고 한다면?”
“마족으로서 자존심도 없습니까?”
“사랑 앞에서는 자존심도 굽히는 게 마족인걸.”
저 미친 종족! 요정은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버둥댔으나, 현우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럼 할까?”
“적어도 장소라도 바꿔 주십시오! 어디 한적한 곳에서!”
“그래, 여긴 병원이니까.”
“알았어.”
알베르크는 창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현우 또한 그 뒤를 따랐다. 마
침 가준이 잠시 자리를 비웠으니, 그사이에 해결하고 오면 될듯했다.
알베르크와 현우가 작정하고 달리니 시가지를 벗어나는 건 금방이었다.
“우에에엑!”
억지로 끌려 온 요정이 토악질을 했지만, 둘 다 요정의 인권은 배려하지 않
았다.
“그럼 한다?”
알베르크는 작은 몸에 가두어 두었던 마기의 통제를 놓아 버렸다. 순식간에
퍼져 나간 마기는 주변을 둘러싼 생명체들을 죽여 나갔다.
“미쳤어, 미쳤다고!”
마기를 퍼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고작해야 30초 정도. 하지만 그 짧
은 시간만으로도 제법 커다란 공원이 전부 망가졌다.
“이제 끝!”
알베르크는 마기를 도로 거둬들였다. 주변을 바라보았지만, 공원이 망가진
것 외에 다른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이걸로 된 거야?”
“응.”
“흑흑, 난 이제 글렀어.”
요정은 축 늘어진 채 울기만 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하늘 저편에
빛이 떠올랐다. 벌써 날이 밝은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달이나 별의 빛
도 아니었다.
하늘의 일부가 열렸다. 빛은 거기서 새어 나온 것이었다. 빛은 허공에서 땅
으로 천천히 내려앉으며 크기를 줄여 나갔다. 그리고 인간 정도의 크기가
되어서야 멈췄다.
93.
빛이 사그라지고 나서야 현우는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를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등 뒤에서 펄럭이는 커다랗고 새하얀 날개 두 쌍, 바람에 흩날리는 은발의
머리카락 뒤로는 후광이 비친다. 사람들이 흔히 상상하는 천사의 모습이었
다.
자애롭게 웃던 미청년이 이내 입을 열었다.
“고개를 조아려 경배하라!”
맑고 청량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알 수 없는 위압감이 어깨를 내리눌렀
으나, 그도 잠시였다. 어깨를 터니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멀쩡해졌다.
그나마 인간인 현우는 잠깐 영향이라도 받았지, 알베르크는 평소와 다를 바
가 없었다.
그 모습에 천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확실하게 들렸다.
“건방진 인간이로군.”
콧방귀를 뀐 천사는 날개를 펄럭여 아래로 내려섰다. 그리고는 현우와 알베
르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마도 마기를 분출한 상대를 찾으려는 모양이
었다. 그러다 현우가 야무지게 쥐고 있는 요정을 발견했다.
“요정이 왜 여기 있지?”
경계를 하는 듯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그제야 요정은 정신을 차린 듯 고개
를 들었다.
“왜 여기 있냐고요?”
요정은 간신히 빼낸 한 손으로 자신 이마를 콩콩 쥐어박았다. 마음 같아서
는 가슴을 두드리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후우.”
깊게 한숨을 쉰 요정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두 분 다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세요! 마계도 천
계도 다른 세계에 함부로 간섭해선 안 됩니다.”
“마계?”
깊게 한숨을 쉰 요정은 알베르크를 자그마한 손으로 콕 집어 가리켰다.
천사가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알베르크를
보더니 손가락으로 턱을 쓸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아!”
뒤로 훌쩍 물러난 천사는 등에 차고 있던 걸 꺼내 양손으로 조립했다. 장난
감을 조립하는 것 같이 보였는데, 완성되어 나온 건 멋들어진 창이었다.
저도 모르게 신기함에 박수를 치니 쑥스러운 듯 웃어 보인다. 그러나 그도
잠시, 시선이 알베르크에게로 향했다.
“네가 바로 마기를 퍼뜨린 원흉이로구나!”
“그렇다면?”
“네 녀석을 물리치겠다!”
“할 수 있으면 해 보던가. 애송이가 제법 용감하네.”
“누가 애송이라는 거냐!”
알베르크가 천족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는 애송이가 아니다!”
그걸 지켜보고 있던 현우가 슬쩍 요정에게 물었다.
“저 천족 아직 어려?”
“갓 성인된 정도입니다.”
겉보기에는 성숙해 보이는데 요정과 알베르크의 눈에는 그게 보이는 모양
이었다.
“그럼 덤벼라, 애송이.”
알베르크의 도발에 천족의 창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싸우면 안 됩니다!”
요정은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리며 둘을 말리려 들었다. 하지만 몸이 구속되
어 있으니 쉽지 않다.
“현우 님, 이제 놓아주시면 안 됩니까?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요정은 현우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하지만 현우가 요정에게 가지는 신뢰도
는 워낙 바닥인지라 주먹은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티그리스 여왕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결국 요정은 울면서 하나뿐인 여왕님까지 걸었다.
“믿어도 돼?”
현우의 표정에는 여전히 의심이 서려 있었지만, 알베르크가 어쩐 일로 요정
을 도왔다.
“요정들은 전부 여왕의 자식 같은 존재라서, 그 이름을 건 거라면 믿어도
돼.”
“흐음.”
그제야 현우의 손아귀에서 힘이 빠졌다. 요정은 내내 잡혀있어 저릿한 몸을
주무르며 재차 한숨을 쉬었다.
“마족, 너를 처단해 주겠다!”
그 사이 천사는 격분한 채 알베르크에게 창을 겨누고 있었다.
날개가 두 쌍, 거기다 저정도의 힘이라면 천계에서도 유망한 앞날을 가진
천족일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마계에서 서열 1위를 찍으신 분이라. 천사장
이 오지 않는 이상, 상대도 되지 않을게 뻔했다.
“죽이시면 안 됩니다.”
일단은 그나마 말이 통해 보이는 알베르크에게 애원해 보았다. 그러나 돌아
온 대답은 서글플 정도로 처참했다.
“왜?”
“상대는 아직 어리지 않습니까. 그런 천족을 죽였다가는 천계에서 난리가
날 것입니다.”
“딱히 상관없는데.”
“아니요, 상관있지요!”
요정은 기겁하여 외쳤다. 그리고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시지 않습니까!”
천계에서 난리가 나면 다른 세계가 끼어들 빌미가 생긴다. 뿐이랴, 원래 천
계와 마계는 지독히도 사이가 나쁜 종족. 수습을 잘못하면 제1356회 천마
전쟁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요정으로서는 기겁하며 말려야 할 일이었다.
“현우 니이임! 어떻게든 해 보세요!”
결국 요정은 현우에게 매달리기까지 이르렀다.
“알베르크.”
현우는 망설임 없이 알베르크의 이름을 불렀다.
도와주겠다고 천족을 불렀으면서, 죽일 생각은 아니겠지? 아까는 자신을
위해선 천족에게 부탁도 하겠다고 했으면서.
그런 의미를 담아 바라보자 알베르크의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미안, 워낙 천족과는 사이가 나쁘다 보니까.”
알베르크는 얌전히 사과했다. 그리고 천족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마계의 알베르크다.”
“알베르크? 익숙한 이름이도다.”
그 옆으로 날아간 요정이 약간의 도움을 주었다.
“마계 서열 1위요!”
천족이 몸을 움찔하더니 뒤로 한발자국 물러섰다.
마계에서 가장 강한 자가 어째서 여기 있는 거지? 무슨 음모를 꾸미는 거
냐, 마족!”
“딱히 음모는 없고, 반려를 찾으러 온 것뿐이다.”
“마족의 반려를 왜 여기서 찾는가!”
“반려가 인간이거든.”
천족의 하늘색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 커졌다.
“고약한 취향이로다.”
“쉿쉿!”
요정이 기겁하여 천족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찰싹찰싹 쳤다.
“마족이 반려에 미치는 거 알잖아요!”
지금 둘 중 더 강한 건 알베르크였다. 요정으로서는 아직 어린 천족이 나대
다 죽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야 그렇지만.”
천족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알베르크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그는 딱히 화가
나보이진 않았다.
“괜찮다. 아직 어린 아이가 헛소리 좀 할 수 있지.”
알베르크가 관대하게 대답했다.
“
그래서 네 이름은?”
“나는 천계의 미리엘이다.”
“좋아. 미리엘. 부탁이 하나 있는데.”
“마족이 천족에게 부탁이 있다고?”
미리엘은 뚱한 표정으로 알베르크를 바라보았다.
“인간 하나를 치료해 줬으면 한다.”
“내가 왜?”
“천사는 인간을 자애롭게 보듬어 주는 존재 아니던가.”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이 마족에게 붙는 걸 막기 위해, 꾸민 대외적인 이미
지였다.
하지만 그걸 대놓고 말하기엔 여기에도 인간이 있었으니.
미리엘은 몇 번인가 입술을 달싹이다 입을 다물었다.
“부탁드립니다. 도와주세요.”
현우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현우 님!”
요정이 놀란 표정으로 현우를 쳐다봤다.
“
현우도 이게 자기답지 않은 행동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도진을 낫
게 하기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었다.
“부탁합니다!”
미리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아직 무슨 상황인지 전부 이해하지도 못했
다. 다른 세계를 지켜보다 마기를 느꼈고, 그 때문에 이쪽으로 넘어왔다. 그
런데 여기 있는 마족은 무려 서열 1위의 알베르크였다. 거기다 중립인 요정
도 하나 있고, 인간도 있다.
어느 쪽도 딱히 적의는 보이지 않는다. 희한한 상황이었다.
‘어쩌지.’
다른 천족이 내려오는 걸 기다려야 하나. 아니면 일단 이들의 이야기를 듣
는 게 나을까. 하지만 상대는 마족과 그와 관련되어 보이는 인간인데?
마족은 무조건 죽여야 한다고 배웠다. 마족에 홀린 인간도 살려 둬서는 안
된다. 속이 복잡했다.
미리엘은 잠시 자신이 든 창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인 천사장으로부터 받은
창은, 마족을 상대하기에 최적화되어 있는 무기였다.
‘생각하지 마라.’
과거 아버지가 말했다.
‘마족은 적이다.’
그러니 이유를 찾으려 들지 말라 일렀다. 미리엘은 그걸 잠시나마 잊고 있
었다. 그는 다시 창을 치켜세웠다.
“마족은 처단해야 함이 옳다.”
“처단할 실력은 있고?”
알베르크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실력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나는 물러나지 않는다.”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졌다. 그 사이에서 요정이 안절부절못하며 둘을 말려
보려 했다.
“안 됩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안 돼요! 다른 세계에서 사고를 일으키는 건
정해진 규칙을 어기는 것입니다!”
“싸우고 싶은 건 나보다 저 애송이 같은데.”
“미리엘 님!”
“요정의 말은 이해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로 앞에 있는 마족을 두고
무기를 내리는 건 해선 안 되는 행동이다.”
차라리 나이 든 천족이 내려왔으면 말이라도 통했을 텐데. 요정은 머리카락
을 쥐어뜯었다.
요정이 그러고 있는 사이, 창을 든 미리엘이 알베르크에게 득달같이 달려들
었다. 어린 나이에도 날개를 두 쌍 만든 천족답게 몸놀림이 범상치 않다. 비
슷한 나이대의 마족과 싸웠으면 당연히 그가 승리했을 것이다.
상대가 저 알베르크만 아니었다면!’
알베르크는 히죽거리며 미리엘의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무척이나 여유로
워 보이는 태도였다. 파괴되는 건 인간들의 공원뿐이었다.
“말려야해요오.”
요정을 울면서 현우에게 매달렸다. 현우 또한 굳은 표정으로 그들이 싸우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알베르크는 당장 천족을 어떻게 할 생각은 없어 보였지만, 그렇다고 내내
공격을 피하기만 할 수도 없었다.
천족을 설득시켜야 했다.
현우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
94.
이미 좋게 좋게 이야기하기는 글렀다. 알베르크가 이쪽 편인 시점에서 미리
엘이 이야기를 들어줄 가능성은 한없이 낮아졌다.
그렇다면 차라리 강경하게 나가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알베르크!”
현우가 부르자 알베르크가 돌아본다. 미리엘이 공격하는 와중인데도 행동
에 망설임이 없었다.
“잡아!”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알베르크가 씩 웃었다.
“분부대로.”
둘의 대화에 미리엘이 분노하기도 전에 빠르게 움직인 알베르크가 찔러오
는 창을 잡아챘다. 이어 창대를 타고 올라간 손이 그대로 미리엘의 복부를
후려쳤다.
“큭!”
미리엘은 어떻게든 피하려고 했지만, 결국엔 목까지 내줘 버리고 말았다.
알베르크는 목을 잡았다 놓았는데 그 잠깐 사이에 목둘레에는 기이한 문신
이 남았다
“잡았다.”
허무하리만치 짧은 전투였다.
이게 무슨!”
미리엘이 뒤늦게 목을 긁었지만 문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차피 지워지지 않으니까 괜히 긁지 마.”
“이게 대체 뭐냐!”
“가벼운 구속 마법이지.”
“거짓말!”
미리엘이 이를 이득 갈았다. 문신은 그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었다.
“정말인데. 내 부탁을 조금만 들어주면 풀어 줄게.”
“마족의 말을 따를 수는 없다. 풀어라!”
“풀어 주겠냐?”
알베르크는 미리엘을 한심스러운 눈으로 보다가 다가오는 현우에게 안겨
들었다.
“현우! 원하는 대로 잡았어!”
칭찬해 줘, 예뻐해 줘! 알베르크는 그런 눈빛으로 현우를 바라보았다.
“고마워.”
“
현우는 손을 뻗어 알베르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덕분에 천족을 사로잡았
다. 이제는 그를 설득하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일단 자리를 이동하자.”
“들었지? 따라와.”
“내가 왜!”
미리엘은 분한 표정을 지었다. 중간에 몇 번인가 반항했지만, 아무래도 그
고통이 심한 모양이었다. 결국은 포기하고 얌전히 현우의 뒤를 따랐다.
좀 더 저항이 심할 줄 알았는데. 그런 현우의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이 알베르크가 웃으며 답했다.
“아직 어리니까.”
실전도 몇 번 겪어 보지 않은 것 같다고 하였다. 현우는 일단 숙소로 미리엘
을 데려갔다.
“어디 다녀왔어? 어라? 뒤의 저 미인은 누구야?”
숙소에는 가준만이 남아 있었다.
“선우는?”
“약 구한다고 돌아다니고 있어. 난 병원에 있다가 온 거고. 그래서 뒤는 누
구야?”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날개는 집어넣게 했지만, 생김새부터 입고 있는 옷
까지 평범한 것이 없다. 심지어 한 손에는 창까지 들고 있지 않은가.
“말하자면 긴데.”
“나 시간 많아.”
가준이 능글맞게 웃으며 답했다.
“알았어.”
현우는 시간이 촉박한 만큼 빠르게 설명하기로 했다.
“이쪽은 미리엘. 천족이야.”
“천족이면, 천사?”
“인간 기준에선 그런 셈이지.”
“호오?”
가준이 미리엘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봤다.
“무례하다!”
“네, 네.”
미리엘이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외쳤지만, 가준은 웃음으로 때워 넘겼다.
그리고 현우는 거실의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미리엘과 마주 앉았다. 알베르
크는 태연하게 그런 현우의 옆에 앉아 그의 팔을 감싸 안았다.
난 커피라도 내올게.”
가준은 흥얼거리며 주방으로 향했다.
“마족과 결탁한 인간이 내주는 걸 마실 것 같으냐!”
미리엘은 신경질을 부렸지만, 가준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저 태연하
게 커피를 내릴 뿐이었다. 말을 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자, 그는 씩씩거리
다가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듣지 않겠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서는 곤란하다.
현우는 깊은 한숨을 삼키고는 말을 꺼냈다.
“미리엘.”
“내 이름 부르지 마라.”
“부탁입니다. 도와주세요.”
“내가 도와줄 이유는 없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전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옆에 앉은 알베르크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현우를 가로막진 않았
다.
“이야기라도 들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듣고 싶지 않다.”
“
그 사이 가준이 완성된 커피를 세 잔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현우에게 한
잔, 미리엘에게 한 잔, 나머지 한 잔은 자신의 것인 모양이었다. 알베르크만
쏙 빼놓았다.
“나는!”
알베르크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으나, 가준은 커피를 더 내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싸우다니. 현우는 일단 자신의 커피를
알베르크 앞으로 밀어주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현재 이쪽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 그 때문에 다치게 된 소중한 사람. 혹시
라도 미리엘이 마음을 바꿀 수도 있으니 신중하게 하나하나 말을 이어 나갔
다.
“마족들이 일을 꾸미고 있다고?”
이야기를 전부 들은 미리엘이 그제야 눈을 떴다.
“그 때문에 제 소중한 사람이 다쳤죠.”
“...그건 나에겐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 말하긴 했지만, 처음보다는 말투가 누그러졌다.
“저에겐 중요합니다.”
현우는 애타는 목소리로 재차 부탁했다.
“도와주세요.”
미리엘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목이 타는 듯 앞에 놓인 커피잔에 손을
가져갔다. 그를 보는 가준이 슬쩍 웃었지만, 눈치채지 못하고 커피를 한 모
금 마셨다.
그와 동시에 미리엘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떠졌다.
“이건 무슨 차지?”
“커피. 맛있지?”
가준이 대답했다. 미리엘은 찝찝하다는 표정으로 가준을 바라보다가 다시
커피잔에 입술을 댔다.
“맛있나?”
자신의 앞에 놓인 커피를 보던 알베르크가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가준을
쳐다보았다. 확실히 가준은 커피를 잘 내리는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애송이 천족이 저리 빠져들 만한 건 아니었는데. 자신의 것이 없어서 투정
부리긴 했지만, 적어도 알베르크의 입맛에 커피는 맞지 않았다.
“맛있지.”
가준은 소파에 몸을 기대며 대답했다. 특별히 천족의 커피에는 우유와 연유
를 넣었기 때문이었다. 가끔 사귀는 사람에게 해 주던 것인데, 특별히 이번
에도 해 보았다. 전부 현우에게 도움이 되기 위한 행동이었다.
미리엘은 우아한 태도로 커피 한 잔을 전부 비워 냈다. 그리고는 슬며시 입
맛을 다셨다.
“더 줄까?”
작은 머리가 미세하게 앞뒤로 끄덕 움직였다. 그를 본 가준은 승리자의 태
도로 주방으로 돌아갔다.
단 것이 들어가서였을까? 미리엘의 태도는 한결 유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치료해 주겠다고 나서진 않았지만 말이다.
“일단은 가서 한번 보는 건 어떨까?”
가준이 새로운 커피를 내밀며 슬쩍 말을 보탰다.
“우리야 모르지만 천족의 눈에는 뭔가 보일지도 모르잖아? 너도 정확히 상
황을 알고 있는 게 좋지 않겠어?”
“그런가?”
얌전히 커피를 받아든 미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지. 그러니 한번 같이 가 보자.”
가준은 미리엘을 살살 꼬셨다. 도진을 딱히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동
안 옆에서 현우가 괴로워하는 걸 봐 왔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현우가 망가
져 가는 걸 보면서 깨달았다.
도진은 아직 죽어서는 안 되는구나. 원래 죽은 놈이 산 놈보다 이기기 힘든
법이다. 그러니 도진은 살아야 했다.
“좋다.”
그 결과, 가준은 미리엘의 입에서 일단 도진을 한번 보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그리 결정되었으니 이제 남은 건 움직이는 것뿐이었다.
잠시만!”
가준은 보온병 가득 커피를 채워 넣어 챙겼다. 이후 엘리샤의 도움을 받아
헬기로 빠르게 이동했다.
“여깁니다.”
현우는 초조한 마음으로 미리엘을 안내했다. 도진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여
러 의사와 각성자들이 매달렸지만, 천천히 죽어 가고 있었다.
“일단 모두 나가라고 해.”
미리엘의 말에 따라 병실에서 대기하던 인원들을 전부 내보냈다. 미리엘은
사람들이 전부 물러나고 나서야 도진에게 다가가 살펴보기 시작했다.
“저주 맞네. 블랙 드래곤이 건 저주라고 했지? 마계에 사는 블랙 드래곤은
지독하지. 이건 쉽게 풀릴 게 아냐.”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방법, 살려 낼 방법은 없나요?”
현우는 저도 모르게 미리엘에게 매달려 애처롭게 물었다.
“방법?”
인간이 달라붙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혐오스럽지 않았다. 미리엘은 고민에
빠졌다. 아버지는 말했다. 마족과 결탁한 인간은 쓰레기라고. 그러나 소중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매달리는 인간을 보고 쓰레기라고 해도 되는 걸까?
알 수 없었다.
“
제발 부탁입니다. 뭐든 하겠습니다.”
“무엇이든 하겠다고? 그럼 목숨을 달라고 해도 줄 건가?”
입에서 엉뚱한 소리가 튀어 나간 건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무슨 미친 소리를!”
옆에 있던 가준이 먼저 반발했다. 알베르크 또한 눈을 날카롭게 뜨며 미리
엘을 노려보았다.
“애송이 천족 주제에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구나.”
하지만 현우의 반응은 달랐다.
“살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까만색 눈동자가 강렬한 의지를 담아 빛나고 있었다. 이건 진짜로 목숨을
내놓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미리엘의 마음이 흔들렸다. 그는 죽어 가는 인
간을 바라보다가 재차 현우를 바라보았다.
“애송아, 헛수작 부릴 생각하지 마라.”
알베르크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
95.
“
헛수작이라. 부리면 어떻게 할 건데?”
미리엘은 날카롭게 대답했다.
‘역시 마족은 싫다.’
어려서부터 마족은 혐오스러운 종자들이라고 배워 왔는데 인제 와서 생각
이 바뀔 리 없었다.
“끔찍한 고통을 안겨 주마.”
“흥, 고통 앞에서 무릎 꿇을 것 같더냐!”
그러자 알베르크가 주먹을 쥔 손을 들어 올렸다. 그에 맞서 미리엘 또한 방
어 태세를 취했다. 내내 조용하던 병실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만!”
둘 사이로 끼어든 현우가 손바닥을 들어올렸다.
“여긴 병실이야. 그만해, 알베르크.”
“하지만 저게 헛소리만 늘어놓았는걸!”
“헛소리 하는 건 그쪽이겠지!”
“미리엘도 그만두십시오. 여긴 환자가 있습니다.”
미리엘은 불퉁하게 나오긴 했지만, 먼저 전투 태세를 거둬들였다. 그제야
알베르크도 주먹을 내리긴 했으나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저 애송이가 필요한 존재만 아니었으면 진작 죽였을 거다.”
“내가 할 소리를 하는 군.”
다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그리고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현우의 귀에 들
려왔다.
“현우야.”
도진의 목소리였다.
“도진 형!”
현우는 뒤돌아서 도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런 그를 본 도진이 눈
을 접어 웃어 보였다. 다정하고 상냥한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를 보고 있자
니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울컥 무언가가 솟아 나왔다.
“웃긴 왜 웃어.”
현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를 보니 좋아서.”
이렇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 왜 이 사람은 이리 베풀기만 하는 걸까. 현우
는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괜찮아.”
그런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도진은 현우를 위로해주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다 죽어가면서!”
“그래도 난 후회하지 않아.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가도 똑같이 행동할걸.”
그 상황으로 돌아가면 둘 다 살아남을 생각을 해야지. 왜 똑같이 행동해!”
“그러네.”
거기까지 말한 도진이 기침을 했다.
“의사, 의사 부를까?”
도진은 현우가 팔을 뻗어 벨을 누르려는 걸 말렸다.
“아니.”
“하지만 이렇게 기침을 하는데!”
“이 정도는 괜찮아.”
기침은 한참 뒤에야 간신히 가라앉았다.
“현우야.”
“말하지 마. 이제 쉬어.”
“아니, 이 말은 해야 해.”
“무슨 말.”
“나에게 목숨을 걸지 마.”
그 말을 하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단호해서 현우는 속이 뒤틀렸다. 자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목숨을 내던져놓고서. 왜 자신은 그러면 안 된다는 거지?
“
싫어!”
자연 나오는 대답이 고울 리 없었다.
“현우야.”
“싫어, 싫다고!”
“현우야, 들어!”
현우를 따라 도진도 같이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너를 잃고 싶지 않아.”
“그건 나도 그래.”
현우의 말에 도진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어쩐지 서글퍼 보이는
웃음이었다.
‘죽고 싶지 않다.’
살아서 현우의 곁에 남고 싶었다. 자신이 죽은 뒤, 현우는 다른 사람을 만날
지도 모른다. 다른 이와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살갗을 맞대겠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지만, 도진은 그 감정을 전부 토해 낼 생각이 없었다. 왜
냐하면 현우가 언제나 행복하길 바랐으니까.
‘그러니까 너는 살아.’
“
현우의 목숨을 바쳐 살아남는 건 원하지 않았다. 도진은 떨리는 손을 뻗어
현우의 뺨을 쓰다듬었다. 매끄럽던 뺨이 젖어서 축축했다. 소리 없이 서럽
게 우는 현우의 모습에 가슴이 아파 왔다.
울리고 싶지 않은데 울려 버렸다.
“울지 마.”
현우는 대답 없이 눈물을 뚝뚝 떨궜다.
“안 울어.”
먹히지도 않을 거짓말을 하며 도진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여전히
손은 커다랬지만, 힘이 느껴지질 않았다.
‘망할 천족!’
치료할 수 있다며. 그럼 치료해 주면 되잖아. 마족이건 천족이건 그게 그렇
게 중요해?
현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리고는 도진의 손을 조심스럽게 침대 위
로 올려 주었다.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쉬고 있어.”
그렇게 말한 현우는 미리엘에게 다가가 그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손을 낚아
챘다.
“따라오십시오.”
당황한 미리엘이 손을 빼내려 했으나, 현우를 이겨낼 수는 없었다. 그야 마
계에 있을 때는 알베르크와 쌈박질도 했던 몸이다. 그보다 아래 급인 미리
엘 정도야 손쉽게 다룰 수 있었다.
“야!”
가준이 따라가려 했지만, 몸을 찌르는 살기에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알베르크도 따라오지 마.”
돌아보는 눈동자가 사납다. 알베르크는 어깨를 으쓱하곤 양손을 들어 보였
다.
“따라가야지!”
답답한 가준이 주먹으로 가슴을 쳤으나, 알베르크는 태평스러워 보였다.
“현우가 천족한테 무슨 소리를 할 줄 알고!”
“아마도 목숨을 줄 테니 한도진을 치료해 달라고 하겠지?”
“그걸 알면서 왜 안 따라가?”
“그야 애송이가 거기까지 원할 것 같진 않으니까.”
“원하지 않는다고? 대놓고 목숨을 내놓으라 했는데?”
가준의 말에 알베르크가 피식 웃었다.
보아하니 아직은 천족의 사상에 덜 물든 것 같거든. 더 묵은 천족이었으면
나도 말렸지.”
“확실해?”
“확실하다.”
그제야 가준은 몸에서 긴장을 풀었다. 그 사이 도진은 까무룩 다시 정신을
잃었다. 아니었다면 그가 가장 먼저 일어나 현우를 따라갔겠지.
“그나저나 너에게 한도진은 경쟁자 아닌가? 굳이 살릴 필요가 없을 텐데?”
“그러는 너야말로. 한도진을 살릴 이유가 없지 않아?”
“그래, 그렇지.”
알베르크는 손으로 턱을 쓸었다.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군.”
가준은 머리를 손으로 긁적였다. 이놈도 저놈도 전부 바보다. 사랑 때문에
모든 걸 내주면서 본인도 왜 내주는지 모른다.
“모르면 됐다.”
의자를 끌어당겨 앉은 가준은 그대로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
이게 무슨 짓이냐!”
“
본의 아니게 옥상 구석으로 끌려온 미리엘이 화를 냈다. 그러자 현우가 그
를 안쪽으로 밀어 넣더니 손을 들어 벽을 후려쳤다.
쾅!
도무지 사람이 냈을 것 같지 않은 엄청난 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옥상에
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미리엘.”
“왜?”
현우의 박력에 미리엘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몸집도 작고 강해
보이지도 않은데, 묘하다.
“제 목숨을 준다면 그를 치료해 준다고 했지요?”
“그랬었지.”
“그렇다면 지금 드리겠습니다.”
가슴을 펴고 다가오는 모습에 미리엘은 기겁하며 몸을 젖혔으나 더 이상 뒤
로 물러날 곳이 없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현우의 눈을 마주 바라
보았다.
“그렇게 그 인간이 소중한가?”
“네.”
“목숨을 버려도 괜찮을 정도로?”
네
미리엘은 차분하게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가 말하길 인간은 나약하여 쉽게
악에 물든다고 하였다. 이 인간도 그러하다 여겼다. 마족인 알베르크와 가
까이 지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생각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나약한 인간이 남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가.’
의문이 들었다. 그렇기에 시험하고자 했다. 과연 그는 끝까지 자신의 의견
을 관철할 수 있는지.
미리엘은 현우와 거리를 두고 창을 꺼내 들었다. 악한 것을 물리치라 말하
며 선물해 주신 소중한 창. 그 창으로 그의 목을 겨눴다.
“고통스러울지도 모른다.”
“괜찮습니다.”
미리엘은 힘을 끌어모으며 창을 내질렀다. 빠른 속도로 뻗은 창은 현우의
목을 향했다. 그리고 그의 목을 약간 파고든 채 멈춰 섰다.
피하거나, 울거나, 떨거나, 살려 달라고 하거나. 수많은 상상 중 어떤 것도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저 웃으며 서 있을 뿐이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가?”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 .”
그런데 왜?”
미리엘의 물음에 현우는 눈을 데굴 굴리더니 대답했다.
“여기서 말해야 합니까?”
“그래.”
“아직 도진 형에게도 제대로 말하지 않았는데.”
“나랑은 상관없는 이야기다.”
“좋습니다. 말하겠습니다.”
현우는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말했다.
“제가 도진 형을 좋아하니까요.”
“좋아한다고?”
“네, 저는 한도진을 좋아합니다!”
크게 소리친 현우는 후련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마 저 뒤쪽에서
그를 바라보는 다른 인간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알았으면 소리를 낮췄겠
지.
“알겠다.”
미리엘은 창을 거둬들였다. 그 와중에 현우의 목에서 피가 났지만, 그도 현
우도 신경 쓰지 않았다.
“
네가 원하는 사람을 치료해 주겠다.”
“정말입니까?”
“진실이다.”
“그렇다면 대가는?”
“목숨은 됐다. 그냥 시험해 보기 위해 한 소리니까. 대신 마족을 감시하기
위해 나도 같이 다니겠다.”
미리엘의 말에 현우의 표정이 활짝 피었다.
“감사합니다!”
“좋아. 그러면 도로 돌아가도록 하지.”
잠시 모습을 비췄던 다른 인간은 어느새 사라진 상태였다. 인간치고는 제법
대단한 실력을 가진 모양이었다. 딱히 적의를 보이는 것 같진 않았으니 적
은 아닌 것 같은데.
미리엘은 그가 사라진 자리를 힐끔 바라보다가 현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뭐, 상관없겠지.’
지나가던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그럼 가죠!”
“
일단은 이쪽부터 해결해야 할 것 같았다. 미리엘은 다시 손을 잡는 현우를
떨쳐 내며 말했다.
“혼자서도 갈 수 있다!”
“네, 알겠습니다!”
우울하던 얼굴보다는 이쪽이 훨씬 보기 좋다. 미리엘은 그런 생각을 하며
현우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96.
한참을 달리고 나서야 선우는 그 자리에서 멈춰섰다. 이미 병원은 벗어났
고, 어딘지 모를 공원 한복판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형이 모르는 남자의 손을 잡고 달리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서 따라가 보았을
뿐인데.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들어 버렸다.
‘저는 한도진을 좋아합니다!’
형이 그렇게 말했다. 형이 말하는 ‘좋아’가 물건을 좋아하는 의미의 ‘좋아’가
아닌 건 알고 있다.
‘알고 있어.’
형은 언제나 자신의 곁에 있어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이 영원하기
힘들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세상에는 단 둘뿐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존재
했고, 그중에 형의 마음을 끄는 자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각오하고 있기로 했는데, 막상 닥치니까 가슴이 아파서 견디기 어
려웠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좁은 방안에서 자신을 안아 주던 형이 생각나는데. 언
제나 둘이 같이 할 거라던 약속이 생각나는데.
“어떻게 그래.”
형이 원망스러웠다.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 사이 다른 사람에게 빠
졌나. 아니, 어쩌면 애초에 헤어져 있던 세월이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계속
같이 있었더라면, 그렇다면 달랐을지도 모른다.
이미 지나간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걸 알면서도 지나간 과거가 아쉽다.
“형.”
선우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
미리엘은 약속을 지켰다. 혹시라도 중간에 다른 말을 하지 않을까, 조마조
마했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그는 도진에게서 저주를 거둬 냈다.
“천족은 쉽게 해 내는 걸 넌 왜 못해?”
가준의 심술이 담긴 질문에 알베르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속성의 궁합 때문이지.”
저주를 해주하거나, 독을 해독, 상처를 치유하는 방면에서는 천족이 손꼽힌
다 하였다. 일단 저주에서 해방되자 도진의 숨소리가 한결 편안해졌다.
저주에 당한 동안 깎여 나간 체력과 건강이 문제긴 했지만, 원래 바탕이 튼
튼한 만큼 빨리 회복될 것이라 하였다.
“고맙습니다!”
현우는 미리엘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됐어.”
미리엘은 손을 휘저으며 대충 인사를 받았다.
일단 현우의 부탁을 받아서 저주를 해주하긴 했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움
직인 결과였다.
하지만 찝찝함은 계속 남아 있었다. 상대는 무려 마족이 따라다니는 인간이
었으니까. 그래서 조금 거리를 두자고 생각했다.
재차 절이라도 할 것 같은 현우를 밀어 내며, 미리엘은 병실을 나섰다. 그러
다 어두운 표정으로 이쪽을 향하는 인간 하나를 발견하였다.
“넌 누구지?”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누구십니까?”
“그쪽은 지선우. 현우의 동생이지.”
어느새 뒤따라 나온 가준이 짧게 설명했다.
“동생이라고?”
저쪽이 훨씬 큰 것 같은데? 미리엘은 고개를 갸웃거리긴 했지만, 그 이상
참견하진 않았다.
“어디 갔다가 이제 왔냐?”
“혹시나 해서 힐러들을 알아보러 다녔다.”
“아하! 그런데 이제 힐러는 필요 없을 것 같아. 저쪽 천족 양반이 저주를 풀
어 줬거든. 의사가 다녀갔는데 이제는 자연스럽게 자가 회복을 기다리면 된
대.”
“잘됐군요.”
“표정은 그렇지 않은데.”
가준의 말에 선우가 새삼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저놈의 브라콤. 가준은 혀를 차고는 선우를 내버려 둔 채 멀어지는 미리엘
의 뒤를 따랐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지금 저 천족을 감시할 사람이 그뿐이
었다.
“어이, 같이 가!”
“싫다! 내가 왜 너 같은 인간과 같이 가야 하지?”
“여기 지리는 하나도 모르잖아!”
후다닥 따라잡자 미리엘이 대놓고 미간을 찌푸린다. 하지만 가준은 그에 굴
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그의 곁에 붙어 섰다.
알베르크와 적인 천족이긴 했지만, 어딘가 이용해 먹을 수 있는 부분이 있
을지도 모른다.
‘친하게 지내서 나쁠 건 없지.’
그렇기에 가준은 친절함을 가장하며 미리엘을 병원 내 카페로 이끌었다.
선우는 병실 문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이윽고 문을 열었다. 언제나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침대 위에 누워 있던 도진이 몸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그 옆에 붙어 있던 형을 돌아보았다. 내내 어둡던 표정이 밝다.
“여어, 왔냐?”
선우를 먼저 반겨준 이는 알베르크였다.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다시
형을 바라보았다.
도진과 속살거리며 웃는 모습이 햇살 같다. 하지만 그 햇살은 지금 그를 비
춰 주고 있지 않았다.
속이 뒤틀린다. 부글부글 끓는 새카만 것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다. 선
우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목을 긁었다. 그러나 손톱에 걸리는 건 아무것
도 없었다.
“형.”
뒤늦게 형을 부르자, 그가 뒤돌아보았다.
“선우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형이 그에게 다가왔다.
“어떻게 된 거야?”
“그게 말이지.”
현우는 흥분한 태도로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알베르크
의 도움으로 천족이 내려온 일, 그 천족이 도진을 치료한 일 등등.
“그럼 아까 봤던 사람이 천족인가?”
“미리엘? 맞아! 아마 가준이 따라갔을걸.”
“도가준이?”
“응!”
언제부터인가 가준과 형의 사이에 있던 벽도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모양이
었다. 그게 아니면 이리 편하게 말할 리가 없었다.
마음이 깊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알베르크가 선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아는 눈이다.
“현우야, 한도진이 물 마시고 싶다는데?”
“뭐? 그럼 줘야지.”
형은 몸을 돌려 도진에게로 걸어갔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렇기에 선우
는 몸을 돌려 병실 밖으로 나섰다.
가는 거야?”
“할 일이 많아서.”
그게 끝이었다. 형은 선우의 뒤를 따라오지 않았다. 선우는 그대로 계속 걸
어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차라리 죽어 버리지.’
형이 마음을 깨닫기 전에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지. 끔찍한 생각이 머릿
속을 차지했다.
고층에 머문 엘리베이터는 쉽게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참다 못
해 계단으로 향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어두운 계단이 마치 제 마음 같았
다.
“
흐음.”
병실을 나선 선우를 보는 알베르크의 눈이 반짝였다.
‘일이 재밌게 돌아간다.’
형에 대한 독점욕이 강한 동생은 점점 어둠에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천족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
인간은 나약하여 쉽게 물들고 망가진다. 그건 몸이 약하단 소리가 아니었
다. 그렇다면 S급 각성자는 망가질 일이 없을 테니까. 그들이 말하는 건 마
음이었다.
“
집착이 심해지더니 한계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과연 망가지기 시작한 마음
은 얼마나 버틸까.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예전보다 마기를 접하기 한결 쉬워졌다. 마족의
일부가 침투하여 수시로 포털을 열어 대기 때문이었다. 마기는 약한 마음을
정말 쉽게 파고든다.
‘원인은 한도진이겠지.’
조금 망설이긴 했지만, 한도진을 살린 건 잘한 일인 모양이었다. 잘하면 한
도진과 지선우를 붙여 둘 다 사라지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도덕적인 선택은 아니었지만, 어쩌랴. 마계에서 태어나 이렇게 자라난 것
을. 집착할 모든 것이 사라지면, 그땐 현우도 태어난 곳을 버릴 수 있겠지.
알베르크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
도진이 깨어난 걸 알게 된 시점에서 선우는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급히
거래처와의 일을 해결하고, 미국이 건네준 감사의 선물을 받았다.
그 사이, 미국에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바카디가 범죄자로 낙인찍히고 불사조 길드원의 대부분이 수배지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틈을 타 레온이 세계 각성자 협회의 협회장이 되었다.
바카디가 일을 벌인 걸 대부분 수습한 이였던 지라 별다른 반대도 나오지
않았다.
“축하드립니다.”
협회장 선출 축하 파티는 소소하게 열렸다. 호텔의 홀을 하나 빌려 중요한
인원만을 초대하여 가볍게 식사를 했다. 원래 예정하고 있던 규모에 비해서
는 초라할 지경이었다.
“감사합니다.”
한국의 대표로 나선 선우의 인사를 받으며, 레온 또한 답례를 했다.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당연히 도와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그걸 실천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요.”
레온은 씁쓸하게 웃었다. 한국에 이어 미국의 뉴욕이 엉망이 되었다. 자연
다른 나라들도 각자의 일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등급이 높은
각성자를 도로 불러들였다.
한국도 최근 선우에게 귀국할 것을 요청했다. 더는 불안해서 버티기 힘든
모양이었다. 다행히 도진도 많이 회복되었으니 돌아가도 될 것 같았다.
“언젠가 도움이 필요하면 불러 주십시오.”
레온은 그 말을 남기고 다른 사람을 상대하러 몸을 돌렸다. 신념이 대단한
이다 보니, 자신이 한 말을 어기진 않을 것이다.
미국에 와서 힘든 점도 있었지만, 그만큼 수확도 많았다. 이를 바탕으로 선
현 길드는 더욱 더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갈 것이다.
귀국은 전세기를 이용했다. 공항에 몰래 착륙하였는데도, 이미 기다리고 있
는 사람이 잔뜩이었다. 어디서 소식이 새어 나간 모양이었다.
“지선우 씨! 뉴욕에 포털이 열렸는데요. 그에 대해 정확히 들을 수 있겠습니
까!”
“활약이 대단했다고 들었습니다! 알려 주십시오!”
수많은 기자부터 시작해서.
“현우야아악! 다치지 않았어?”
“우윷빛깔 지선우! 국위선양!”
형제에게 붙은 팬들까지. 공항은 난리가 났다.
97.
미리 대기시켜 두었던 경호원들이 아니었으면 공항에서 빠져나오지도 못했
을 것이다.
“예전 생각나네.”
현우는 선우를 보며 해실 웃었다.
“그러게.”
선우는 그리 답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요즘 동생이 멀게 느껴졌다. 예전 같
았으면 당장이라도 달라붙어 무슨 일인지 캐 냈을 텐데. 하도 회피하는 통
에 그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
그렇게 먼저 성큼성큼 걸어가 버리자, 남은 이는 현우와 그가 밀고 있던 휠
체어에 탄 도진뿐이었다. 빠른 회복세를 보이긴 했지만, 아직은 불안했던지
라 억지로 휠체어에 태웠다.
“괜찮아?”
표정이 가라앉은 선우를 보며 도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어 왔다.
“괜찮아.”
현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도진의 어깨를 툭툭 쳤다. 다시 앞을 보라는 소리
였다.
“인간이 많군.”
“사람이라고 해.”
“인간이건 사람이건 비슷한 뜻 아닌가?”
“여기서 대놓고 천족이라고 말할 건 아니지? 그러면 어느 정도 말투를 고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뒤에서는 미리엘과 가준이 투닥투닥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둘이 제법 친
해진 모양이었다.
알베르크는?”
도진이 물었다.
“잠시 미국에 더 머무른대. 마족의 흔적을 잡아 보겠다고.”
“웬일로?”
그런데 신경 쓰고 움직일 위인 같지는 않았는데. 도진은 의심을 품었다. 반
면 현우는 그를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부탁한 게 있거든.”
당했으면 복수를 해야지, 얌전히 있는 건 맞지 않았다. 언제나 그쪽에서 먼
저 쳐들어 왔으니 한 번은 반대로 해 줘야지.
그 이유로 현우는 알베르크를 미국에 남겨두고 왔다. 알베르크는 싫다고 발
버둥을 쳤지만, 나중에 원하는 걸 하나 들어주기로 했다.
알베르크가 원하는 거라니 좀 불안하긴 했지만, 본인이 큰 걸 요구하지는
않을 거라 장담했다.
“무슨 부탁인데?”
“그건 비밀.”
“난 알고 싶은데?”
“그보다 형은 좀 더 쉬어야 해. 다른데 신경 쓰지 말고 요양에만 집중하자.”
“
현우는 단호하게 말하며 이야기를 끊었다. 도진이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바
람에 마음이 약해질 뻔했지만, 어떻게든 극복해 냈다.
‘복수할 땐 혼자 간다!’
알베르크와 미리엘은 어쩔 수 없이 데려가야겠지만, 그 외의 사람은 데리고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보통 위험한 자리여야 말이지.
같이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이제는 가준에게도 정이 들었다. 그렇다
보니 다치는 사람이 느는 건 원치 않았다.
공항을 빠져나와 차 앞에 선 현우는 곧바로 도진을 번쩍 안아 들었다.
“이건 좀 부끄러운데.”
도진이 부끄러워했지만, 상대는 환자다. 조금의 부담도 얹어주고 싶지 않았
기에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를 차에 태우고 나서 휠체어도 정리해서 실었
다.
그런 다음에는 차를 나눠 타고 선현 길드에서 따로 준비한 안가로 향했다.
원래 지내던 곳에 돌아갈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당분간은 이러는 쪽이 나으
리라 판단했다. 미친 듯이 달려드는 기자들은 도진을 제외한 셋이 나눠서
상대하기로 했다.
“괜찮다니까.”
도진이 끝끝내 괜찮다고 주장해 보았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일단 쉬어. 다 회복된 다음에는 얼마든지 굴려 줄 테니까.”
그건 그것 나름대로 무섭네.”
현우의 말에 도진이 웃음 지었다.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회복에 전념
한 탓에 다시 살이 좀 붙었다. 하지만 여전히 예전보단 말랐다. 저주가 몸을
좀먹었기 때문이었다.
“자.”
현우는 가지고 있던 가방을 뒤져 에너지바를 꺼냈다.
“아까 아침 먹었잖아.”
“이건 간식.”
도진은 저항 없이 얌전히 에너지바를 받아들어 물었다. 각성자들이 포털에
들어갈 때 식사 대용으로 가지고 들어가곤 하는 것이라 금세 포만감이 든
다.
그렇지만 현우는 손을 쉬지 않았다. 에너지바를 다 먹으면 사탕, 사탕을 다
먹으면 초콜릿. 가방에서 뭔가가 계속 튀어 나왔다.
그 와중에 목마를까 봐 음료도 건네준다.
“이러다 살찌겠어.”
“안 쪄, 안 쪄.”
현우는 그리 말하며 계속 도진에게 무언가를 떠넘겼다. 그러는 사이 차는
안가에 도착했다. 개인 소유의 산에 위치한 제법 규모 있는 별장이었다.
“
괜찮네.”
그리 말한 가준이 미리엘을 데리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이어 현우는 다
시 휠체어를 펴고 도진을 앉혔다.
도진은 난감해하면서도 그 모든 걸 받아들였다.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 적
극적으로 나오는데 어찌 거절하랴.
휠체어에 탄 채 안으로 들어가니 넓은 거실이 보였다. 그 사이 미리엘과 가
준은 이미 방을 정한 모양이었다.
“넌 어느 방에서 지낼 거야?”
“제일 큰 방.”
현우는 그리 말하고 여기저기 문을 열어보았다. 그리고는 가장 큰 방에 도
진의 휠체어를 밀어 넣고 자신도 들어왔다.
“내 방은?”
도진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어보자 답이 돌아왔다.
“환자에게 개인 방이 어딨어. 같이 써야지.”
“같이?”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좀 난감한데.’
“
도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현우를 바라보았다.
좋아하는 사람과 같은 방을 쓰게 되다니.
거기다 여기는 방해할 만한 사람이 없다. 알베르크는 미국에 남았고, 선우
또한 중요한 일이 있다 하여 빠졌으니 남는 건 가준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천족인 미리엘을 쫓아다니느라 바쁘다. 미리엘은 성스러워 보
이는 외모와는 달리 가끔 나사 빠진 것 같은 행동을 하거나 사고를 쳤다. 자
연 가준이 붙을 수밖에 없었다.
‘의외로 이종족의 보모가 적성에 맞는 모양이지.’
가준이 알았더라면 분노에 차 소리를 지를 생각이었지만, 지금 그는 여기
없었다.
“현우야, 그래도 방은 따로 쓰는 게 낫지 않을까.”
일단 도진은 이성적으로 현우를 설득해 보기로 했다.
“그러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안가에서 무슨 일이 생기겠어.”
“몰라. 하여간 안 돼. 여기서 지내.”
도진은 몇 번인가 더 현우를 설득하려 했지만, 결국 그에게 졌다.
그렇게 짐을 정리하고 일단 식사를 하자는 생각에 거실로 나서자 가준이 소
리를 높였다.
왜 둘이서 같은 방에서 나와!”
그러자 현우가 도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환자.”
“그럼 너는?”
“나는 간병인.”
뭔가 좋으면서도 싫은 느낌이다. 이왕이면 연인으로서 같은 방을 쓰면 좋겠
는데. 도진은 아쉬움에 마른 입술을 핥았다.
“정말 간병만 하는 거야?”
“간병 외에 뭐를 하는데?”
“아니, 그럼 됐다.”
가준은 그리 대답하며 먼저 주방으로 들어선 미리엘을 따라 움직였다. 식사
는 미리 준비된 재료로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의외로 요리를 잘하는구나, 인간.”
가준은 의외로 요리를 잘해서 거의 대부분을 그가 하였다.
“이름 말해 주지 않았던가?”
“알게 뭔가. 나에겐 다 비슷해 보인다.”
“
알았다, 천족. 너는 이만 먹으면 될 것 같구나.”
접시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고 나서야 미리엘은 가준의 이름이 생각난 모양
이었다.
“이제 기억났다. 도가준.”
“그래, 잘했어.”
가준은 음식이 담긴 그릇을 도로 내려놓았다. 겉보기에는 그가 천족을 조련
하는 것처럼 보였다.
“형도 많이 먹어.”
“응.”
도진의 앞에 있는 앞 접시에 음식이 산처럼 쌓여 갔다. 현우는 도진의 배가
빵빵해질 때까지 밥을 먹였다. 만약 그가 튼튼한 S급 각성자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탈이 났을지도 몰랐다.
식사를 하고 나서는 시간이 남았다. 안가에는 딱히 준비된 놀거리가 없었
다.
“난 발코니에서 경치를 즐기겠다.”
미리엘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
“난 그럼 쟤 감시.”
“
가준은 그런 미리엘을 따라 올라갔다. 그러고 나니 아래층에는 둘만 남게
되었다.
“뒷정리는 내가 할게.”
“나도 도울게.”
“환자는 저리 가.”
“이제 환자가 아니라니까.”
도진은 툴툴대며 마른 행주를 집어 들었다. 현우가 설거지를 해서 그릇을
넘기면 도진이 물기를 닦았다. 그러다 보니 주방에는 물 떨어지는 소리만
들려왔다.
“설거지 끝!”
“나도 끝. 그럼 이제 뭐할까?”
“그러게.”
둘은 잠시 눈을 마주치고 있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잘까?”
간만의 평화가 기꺼웠다.
“좋지.”
둘은 다시 방으로 이동했다. 천천히 휠체어를 미는 손길에 도진은 가볍게
눈을 감았다. 내내 과한 보호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
았다.
방에 도착하자 도진은 현우에 의해 얌전히 침대 위에 눕혀졌다.
“잘 자.”
그리고 나가려는 현우를 도진이 붙잡았다.
“너는 어디서 자게?”
“방이 많으니까 어디서 자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침대에 공간이 남는데?”
“그렇긴 하지만.”
현우는 눈만 깜박이며 얌전히 서 있었다. 그러더니 도진이 한 번 더 잡아당
기자 그대로 딸려오더니 얌전히 가에 눕는다.
“자자.”
“응.”
빳빳하게 굳은 몸이 마치 강시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도진은 눈을 감았
다. 지금은 눈을 감는 게 현우를 위하는 일일 것 같아서였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현우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조금씩 다가온 현우는 어느새 도진의 바로 곁에
다가와 있었다.
이어 무언가가 눈 위에서 왔다 갔다 움직였다. 손을 움직여서 잠든지 확인
하는 모양이었다.
98.
그런 간단한 행동마저 귀엽게 느껴지는 걸 보니 정말 자신이 깊이 빠지긴
빠진 모양이었다. 도진은 자꾸 실룩거리는 입꼬리에 힘을 주며 계속 잠든
척을 했다.
현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손을 흔드는 걸 멈췄다. 도진이 잠든 걸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 반대이거나.그건 다음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
다. 그리 생각하며 가만있자니 팔뚝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았다.
무언가 했더니 부드러운 살결이었다. 그걸 깨닫자마자 심장이 크게 내려앉
았다. 정말 현우가 맞나? 눈을 떠서 그걸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도망가리라.
아니, 이미 도망가고 싶어 하는지도 몰랐다. 심장이 이리 격렬하게 뛰는데
그걸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상상과 달랐다. 현우는 도망가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옆에
누울 뿐이었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고른 숨소리가 들려 왔다. 잠든
모양이었다.
도진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러자 이쪽을 향해 누운 현우가 보였다. 닿
아 있는 곳이라고는 어색하게 내뻗은 손끝뿐이었지만, 도진을 흥분시키기
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진짜 자는 걸까?’
아니면 자신처럼 자는 척하는 걸까. 도진은 팔뚝에 와 닿은 현우의 손끝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그래도 감은 눈은 열리지 않았다.
조금 욕심을 부리고 싶어졌다. 도진은 시트를 움켜쥐고 천천히 당겼다. 그
러자 현우가 좀 더 가까이 끌려왔다.
들킬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에 잠시 여유를 두자 그가 그대로 굴러와 도진의
가슴팍에 걸려서야 멈춰 섰다.
얼결에 끌어안은 모양새가 되었다. 들어 올린 손은 허공을 헤매다 현우의
등에 내려앉았다. 사랑스러운 마음이 넘쳐흘러 밖으로 새어 왔다.
“현우야, 좋아해.”
눈을 감은 현우에게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지만, 또다시 말해본다. 너를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현우야, 사랑해.”
기분 탓인가? 작은 몸이 움찔거린 것 같았다.
“진짜 자는 거야?”
물음에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걸 확인하고 나서야 도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행복한 오후였다.
‘
으아아아!’
‘
현우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걸 꾹꾹 눌러 참았다. 지금 소리를 높이면 도진
이 잠에서 깨게 된다.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도진이 자신을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노골적인 고백을 듣게 되니 가슴이 술렁였다. 얼굴에 열이 오르고, 심장이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자신의 마음은 얼마 전에 깨달았다. 그렇기에 고백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
만, 누군가에게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
서 미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동안 도진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랬는데, 도진은 손쉽게 사랑을 말한다. 어쩐지 진 것 같은 기분이다. 현우
는 약간의 심술을 담아 단단한 가슴팍에 이마를 퍽 박았다.
“그래, 자자.”
잠결에 물든 목소리가 현우를 토닥여 주었다.
‘그게 아닌데.’
뭐라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래, 일단은 쉬자. 당분간은 쉬기로 했으니 말
을 꺼낼 기회가 생기겠지. 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
그 무렵, 선우는 수많은 일정을 소화해 내고 있었다. 부길드장인 찬영을 남
겨 두고 갔지만, 그가 모든 일을 처리할 수는 없었다. 돌아오자마자 일거리
가 넘쳐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네, 그럼 이 건은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와중에 다른 길드의 길드장도 만나야 했다. 미국에서 알게 된 사실의 일
부를 공유하기 위함이었다. 정보는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큰 가치를 지니
지만, 때로는 풀어야 할 때가 있었다. 지금이 그때였다.
“마족이라고?”
이야기를 전해 들은 혜선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안 놀라게 생겼어? 우리가 마계에서 지낸 적이 있긴 하지만, 그때 마족은
단 하나도 보지 못했잖아. 그런데 지금 지구에 마족이 있다니.”
“맞습니다. 그 건은 확실히 놀랄 만한 일입니다.”
자윤이 혜선의 말에 자신의 의견을 보탰다.
“그럼 지금 이 난리를 치는 우로보로스가 마족이 관련된 단체라는 소리네.”
“그런 셈이죠.”
자윤을 따라온 아윤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알베르크나 미리엘의 존재는 밝히지 않았다. 일단 아군으로 분리된 이들이
지만 좀 더 감추어 둘 생각이었다. 미리 알베르크와도 이야기해 두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 마족은 좀 세지 않나?”
“상대가 강하건 그렇지 않건 어차피 해치워야할 적입니다. 자신 없습니까?”
“아니, 그런 소리는 아니고!”
혜선이 버럭 소리를 높였다.
“그럼 상관없지 않습니까.”
“그런 셈인가.”
“그런 셈입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일어나?”
“아직 할 일이 많습니다.”
“하긴. 선현 길드는 지선우 위주로 돌아가는데 한참이나 자리를 비웠으니
바쁘기도 하겠지.”
“그러게요. 그런데 현우 씨는 어디 있어요?”
뒤늦게 아윤이 현우를 찾았다.
당신이 형을 왜 찾습니까?”
“그, 그야 친구니까요?”
선우의 표정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평소에도 형과 가까이 하는 사람을 싫
어하긴 했지만, 오늘따라 유독 반응이 날카롭다.
“지선우.”
자윤이 앞서 나서며 아윤을 자신의 뒤로 밀어 냈다.
“과한 대처군요. 일단 저희는 아군입니다. 저는 아군에게 해를 끼치지 않습
니다.”
그건 자윤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는 이성적이고 냉철한 사람이었고, 감정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형이 나타나고 나서 변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본성
이 어디 가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이 움직였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선우는 결국 현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가 회의실을 나선 뒤에야
아윤은 자윤의 뒤에서 빠져나왔다.
“내가 뭐 실수했나?”
“아니, 내가 보기엔 실수한 거 없는데.”
혜선이 그리 말하며 준비된 커피를 한 번에 마셨다.
“그냥 브라콤이 브라콤 한 거 아냐?”
“
그런가요? 하지만 예전보다 더 심해진 느낌인데.”
“미국에서 좀 힘들었나 보지.”
“으음.”
아윤은 팔짱을 끼고 고민해 봤지만, 그런다고 해서 풀릴 일은 아니었다.
“불안한데.”
“지선우를 좀 더 지켜보도록 할게.”
자윤은 아윤의 말에 냉큼 대답했다. 동생의 감이 얼마나 맞아떨어지는지 알
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여기서 그나마 태평해 보이는 이는 혜선 뿐이었다.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그래, 그럼 그렇게 해 둬. 그나저나 도가준 이 새끼는 왜 안 나온 거람.”
“그러게요? 이런데 빠질 사람이 아닌데. 백호 길드에도 아직 복귀하지 않았
다고 하더라고요.”
원래는 선우가 가준에 대한 이야기도 했어야 했는데, 그냥 가 버린 것이다.
그렇기에 남은 사람들은 도가준의 행방에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
*
악
가준은 갑자기 간지러운 귀를 탁 치며 소리를 질렀다.
“시끄럽다. 음료는 아직인가?”
“내가 아주 지 하인이지.”
“틀린 말은 아니군.”
미리엘은 그리 잡하며 가준의 손에 들린 음료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의자
에서 일어나 몇 발자국 걸어오는 것도 귀찮은 모양이었다.
“으휴.”
마음 같아서는 한 대 패 주고 싶었지만, 상대는 천족이다. 이용가치가 얼마
나 많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호감을 사 두는 편이 나으리라. 가준은 그
렇게 생각하며 오늘도 참을 인을 마음에 새겼다.
“자, 드십시오. 주인님.”
“오냐.”
미리엘은 태연하게 음료를 마시며 발코니에서 밖을 바라보았다.
“여기 경치가 좋아.”
“그래. 참 좋지.”
“ !”
가준은 그렇게 대답하며 이를 으득 갈았다. 경치가 너무 좋아도 문제다. 이
놈의 천족은 경치 좀 보겠다고 내내 발코니에 틀어박혀 있고, 그 때문에 뒤
치다꺼리를 하는 가준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덕분에 현우가 도진과 둘이서만 다니는 걸 방치해 둬야 했다. 지금도 보라.
별장 앞의 풀밭에서 돗자리를 펼쳐 두고 둘이서 소풍을 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에게는 오라는 소리도 한 번 안했다.
‘억울하다!’
지선우는 뭐하느라고 아직 별장에 코 끝도 안 보이는지 모르겠다. 그만 오
면 미리엘을 대신 맡겨 버리고 나가 버릴 텐데. 휴양도 좋지만, 그것도 길어
지니 한계가 왔다.
내버려 둔 길드도 걱정되었고. 가끔 별장을 벗어나 부길드장과 통화를 하곤
했지만, 그래도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애초에 백호 길드도 선현 길드
와 다르지 않았다.
도가준이 있어야 길드가 수월하게 돌아간다. 그걸 생각하며 한숨짓고 있는
데 차가운 뭔가가 볼에 와 닿았다. 뭔가 싶어 돌아 보니 텅 빈 유리컵이었
다.
“다 마셨다.”
“또 달라고?”
“그래. 그리고 초조해하지 말아라. 어차피 인생은 길지 않은가. 조금 쉰다고
어떻게 되진 않아.”
애송이 천족에게 마음이 읽힐 정도였나. 가준은 머쓱한 표정으로 볼을 문질
렀다.
“그보다 염력도 쓰네?”
“기본이지.”
소리 없이 유연하게 움직이는 걸 보니 보통 실력이 아니다.
“천족의 소양이다.”
“별게 다 소양이네.”
“흥, 인간이 뭘 알까.”
“흥, 천족이 뭘 알까.”
가준이 이죽이며 말을 따라하자 미리엘의 고운 이마에 주름이 생겼다.
“기분 나쁜 녀석.”
“그런 기분 나쁜 녀석이 주는 음료는 잘 마시고?”
“그나마 유일한 네 장점이 아닌가.”
그리 말하며 손을 휘휘 젓는데 이게 칭찬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가준은
다시 컵을 채우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99.
“
날씨가 좋네.”
그러게.”
현우는 돗자리 위에 누워 기지개를 쭉 폈다. 샌드위치를 잔뜩 먹었더니 배
가 부르고 나른해졌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는 도진의 시선이 어쩐지 간지럽다. 기분 탓은 아닐 것
이다. 낮잠 사건 이후 둘의 사이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이러다 언젠가는 고백을 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 그
땐 뭐라고 대답해 줘야 할까. 아직 오지도 않은 일이건만 상상만 해도 즐겁
다.
괜히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손으로 슬쩍 누르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주변을
둘러싼 초록빛의 나무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도진이 하는 말에 금방 답하지
못했던 것은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현우야, 좋아해.”
현우는 천천히 눈을 깜박이다 고개를 돌려 도진을 바라보았다. 마주친 눈이
둥글게 접혔다. 웃는 것을 제외하고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얼굴이라, 방금
들은 말이 진짜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그런 말을 듣고 싶은 자신이 환청을 들은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래서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는데, 재차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우야, 좋아한다니까?”
도진이 손을 뻗어 현우의 뺨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리고 현우의 손을 잡
아당겨 자신의 가슴에 얹었다.
“
쿵쿵.
심장의 격렬한 움직임이 손바닥 아래에서 느껴진다.
“현우야. 내가 너를.”
한마디 한마디가 귀에 쿡 박혀 들었다.
“사랑해.”
얼핏 붉어진 도진의 귀가 보였다. 담담한 듯 보였지만, 그도 용기를 내고 있
었다.
“너는?”
도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왔다. 그 안에 담긴 불안감과 긴장감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나는.”
처음에는 동정심에서 도진을 거둬들였다. 그의 동생인 예원과의 인연 때문
이었다. 하지만 같이 지내면서 점점 마음이 변해 갔다. 그가 편하게 느껴지
고, 옆에 없으면 안 될 존재가 되어 갔다.
마계에서 힘겹게 살아남으면서 느낀 게 있었다.
‘앞으로 사랑은 하지 못하겠구나.’
괴로움에 마모된 감정을 앞에 두고 그렇게 생각했다. 이 가슴 속에 들어오
는 건 앞으로 만날 동생이 전부일 것이라고. 다른 이를 더는 사랑하지 못할
거라고 믿었었다.
하지만 마모된 감정은 되살아났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꽃을 피워 냈다.
“나도 좋아해.”
도진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어 그는 손을 뻗어 현우를 꽉 끌어안았다. 덕분
에 돗자리에서 뒹굴게 되었지만, 어떤가. 기분이 이렇게 좋은데. 현우는 자
신을 단단하게 끌어안은 도진의 등에 팔을 둘렀다.
“사랑해, 사랑해. 현우야.”
귀에 박힐 듯이 반복하여 말하는 사랑의 말도 제법 좋았다.
“나도.”
두 사람의 마음이 통한 날이었다. 그리고 둘은 그걸 감출 생각이 없었다.
“뭐어?”
막 저녁 준비를 하던 가준이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떨어트렸다.
“사귀기로 했다고.”
“누구랑 누가?”
“나랑 도진이 형이.”
“언제?”
오늘.”
“왜!”
가준이 절규하듯 물었다.
“그야 서로 좋아하니까?”
“언제부터 그랬던 거야!”
“그건 아까 대답했잖아?”
“그 언제랑 이 언제는 다르잖아!”
“아, 귀찮아.”
현우는 손을 팔랑팔랑 흔들고는 바닥에 떨어진 칼을 주워 들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해. 뭐 그리 궁금한 게 많아?”
“그야 나도 널 좋아하니까! 제길. 이렇게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어?”
이번에는 현우가 칼을 떨어트릴 뻔 했다.
“날 좋아한다고? 정말?”
“그래! 아니면 내가 왜 네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고 생각한 거냐!”
“그야 길드에 이득이 되니까 따라다니는 줄 알았지.”
“
그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따라다니진 않아. 내가 누군 줄 알아? 도가준이라
고!”
한국 서열 2위 백호 길드의 길드장. 현우보다 힘은 약했지만, 그건 그가 규
격 외라서 그렇고 부족한 거 하나 없는 몸이었다. 권력, 돈, 여자. 지금까지
부족했던 적이 없었다. 그런 모든 걸 던져 두고 따라다녔는데 돌아오는 답
이 이런 거라니.
가준은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미안해?”
현우는 도마 위에 칼을 올려놓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어디 가?”
“빨래라도 하려고.”
“그건 아까 내가 해 놨어.”
“그럼 빨래 널게.”
“아직 빨래 끝나려면 더 있어야 해.”
더는 도망칠 핑계가 없었다. 그리고 가준이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미리엘
이 나타났다.
“저녁은?”
“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저리 태연자약할
수 없는 노릇일 테니 말이다.
“지금 준비 시작했어.”
“뭔데?”
“된장찌개.”
“그게 뭔데?”
“있어. 맛있는 거.”
가준이 그렇게 답하자 미리엘은 당당하게 걸어와 식탁 의자에 앉았다.
“냄새는 이상한데? 설마 이걸로 만드는 건 아니지?”
그리고는 된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건 눈치가 없는 건지, 멍청한 건지.’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말투도 너무 편해졌다. 가준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그걸로 만드는 거야.”
“그럼 싫은데. 저번에 먹었던 스파게티를 해 주면 안 돼?”
“천족은 원래 이렇게 먹성이 좋냐?”
있으니까 먹을 뿐이다.”
아닌 걸 알고 있는데 튕기기는. 이런 상황인데도 미리엘의 행동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물론 그건 잠시였을 뿐이다.
“도망쳤네.”
현우가 주방에서 도망친 걸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가준은 칼을 물로 재차
씻고 야채를 썰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을 것 같았다.
“너 아까 걔 좋아해?”
양파에 이어 애호박을 썰고 있는데, 미리엘이 대뜸 물어왔다. 하마터면 애
호박 대신 손가락을 썰 뻔했다.
“들었냐?”
“들었지. 천족은 귀도 좋다고.”
“들었으면서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고?”
“그러면 안 됐나?”
미리엘이 태연스럽게 물어왔다.
“안 되지!”
“왜?”
“
그야.”
“내가 끼어들지 않았어도 딱히 달라진 건 없었을 것 같은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멍청하다 한 것치곤 지나치게 예리한 말이 가슴을 찔
렀다.
“넌 오늘 저녁 없다.”
“왜!”
“스스로 생각해 봐.”
가준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요리에 몰두했다. 그러나 마음이 다른 데 가 있
는데 요리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완성된 된장찌개는 평소보다 짰다.
사라졌던 현우는 저녁식사 시간에는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 옆에는 도
진이 함께 서 있었다.
“뻔뻔하긴.”
“대신 설거지는 내가 할게.”
“아냐, 내가 하도록 하지.”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죽이 잘 맞는다.
“그런데 찌개가 너무 짠 것 같은데. 넌 먹지 마. 계란말이라도 할 테니까.”
“형도 먹지 마. 아직 환자인데 짠 건 몸에 안 좋아.”
“
그놈의 환자, 환자! 이미 다 나았는데 아직도 환자라 말하는 걸 보니 속이
답답했다. 하지만 가준이 끼어들만한 틈이 보이지 않았다.
“진짜 난 안 줄 거야?”
“안 줘!”
“이건 화풀이 아냐?”
그리고는 뭐라 더 말하려는 미리엘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대로 뒀다가는 무
슨 말이 나올지 모른다. 가준은 결국 미리엘에게 밥을 내줘야 했다.
“짜!”
“불만이면 먹지 마!”
“그래도 맛있어.”
“짜다며!”
“그것도 그렇지.”
미리엘은 불평불만을 내뱉으면서도 밥을 두 그릇 먹어 치웠다. 더불어 도진
이 만드는 계란말이도 얻어먹었다.
‘이게 천족인지 돼지인지.’
가준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거지는 너네가 한댔지?”
그래.”
“그럼 난 산책이나 다녀온다.”
“나는!”
중간에 미리엘이 끼어들었지만, 이번에는 떼어 놓았다. 잠시 혼자서 머리를
식힐 시간이 필요했다.
“너는 하고 싶은 거 해.”
가준은 그대로 밖으로 나섰다. 그러다 막 안으로 들어오려는 선우를 만났
다.
“이제야 오냐?”
“일처리를 하느라 바빴습니다.”
“나도 할 게 많은데 말이지. 그래도 지금이라도 와서 다행이네. 이제 천족
뒤치다꺼리는 네가 해라.”
“형은 어디 있습니까?”
“주방에 있을 거야.”
곧 죽어도 자신이 천족을 보겠다는 소리는 하지 않는다. 그게 또 얄미웠다.
“나 이제부터는 천족 안 본다?”
“
마음대로 하십시오. 천족이 아이도 아닌데 자기 몸은 자기가 추스르겠지
요.”
그걸 못하니까 말이지. 일단 성인이라고는 들었는데 하는 행동이 손가락 하
나 까닥하지 않고 자라 온 도련님 같다.
“냉정하긴.”
가준은 안으로 들어가는 선우의 등을 보며 혀를 찼다.
“참, 너 그거 아냐?”
“뭘 말입니까?”
길어지는 대화가 귀찮은지 선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너희 형, 한도진과 사귀기로 했단다.”
“……네?”
순간 주변의 기온이 내려갔다. 영상이던 온도가 영하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
간은 길지 않았다. 이어 흙바닥이 얼어붙고, 나무에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야, 야! 너 지금 능력 쓰고 있어!”
기겁한 가준이 선우를 말리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선우의 주변에 물방
울이 맺히더니, 하얗게 변해 갔다. 그리고 점점 그 범위를 넓혀 나갔다.
각성자의 폭주 현상이었다.
“
보통 각성자는 정신력과 힘이 비례한다. 그렇기에 자신의 힘을 가누지 못하
고 폭주할 염려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거의 없다는 거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가끔 드물게 등급이 높은 각성자가 폭주할 때가 있었다. 감정이 이성을 뛰
어넘을 때. 더 이상 능력이 통제되질 않는다.
‘아니, 그건 알지만.’
보통 형에게 연인이 생긴 걸로 폭주하나? 상대가 남자라서 그런가? 호모
포비아라든가.
가준은 여러 가정을 세우다가 이내 포기했다. 이유가 뭐건 어떻단 말인가.
일단은 선우를 안정시키는 게 중요했다.
‘할 수 있을까?’
가준은 단 한 번도 지선우에게 이겨 본 적이 없었다.
100.
소리쳐 안에 있는 사람을 부를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가는 선우를 흥분시킬
수도 있다.
‘어차피 알아서 눈치채고 나올 테고.’
그보다 더한 힘을 가진 현우나 도진이 이를 눈치채지 못할 것 같진 않았다.
‘그나저나 당장이 문제인데.’
폭주한 각성자는 몬스터와 다르지 않다. 좀 더 본능적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람을 상대로 큰 상처 없이 폭주를 가라앉혀야 한다.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해내고 싶었다. 가준은 품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건 그가 가진
수면제 중 가장 강한 것으로 살갗과 닿기만 해도 효력을 발휘한다. 그 때문
에 몬스터를 생포할 때 쓰곤 했지만, 사람에게도 통한다. 써 본 적이 있기에
양을 적절히 조절하는 법도 알고 있었다.
‘문제는 어떻게 다가가냐는 건데.’
가준은 원거리 계열 각성자가 아니다. 그런 탓에 어려운 몬스터를 만날 채
비를 할 때는 바람계열 각성자를 반드시 동반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없지.’
손을 우득 꺾은 가준은 선우를 노려보았다.
“선우야!”
안에서 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선우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
다. 기회를 붙잡은 가준은 곧바로 선우에게 달려들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
아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바닥에서 날카롭게 솟아난 얼음송곳 때문이었다.
“인정사정없네.”
얼음송곳은 그 자리에 멈춰 서지 않고 계속해서 범위를 넓혀 나갔다.
지선우!”
재차 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음송곳을 피해가며 기회를 노리는 가준
과 다르게, 현우는 대놓고 박살을 내며 달려오고 있었다. 다리가 바닥을 지
날 때마다 살벌한 얼음송곳이 부서져 내렸다.
그러나 상대가 친동생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적극적으로 덤벼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현우를 바닥에서 솟아난 그림자가 감싸 안았다. 그러더니 바로 선우의
옆까지 날라 놓았다.
“……형.”
폭주로 맛이 간 상태에서도 최소한의 이성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가준이
접근할 때와는 다르게 곧바로 공격하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현우는 선우의 팔을 붙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건 거
기까지였다.
울상이 된 얼굴로 선우를 바라보던 현우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다 다
리를 들어 올렸다. 복부를 차올려 기절시킬 생각인 모양이었다.
‘아이고.’
가준은 혀를 차며 재빠르게 외쳤다.
“계속 붙잡고 있어!”
“
다행히 현우는 가준의 말을 그대로 따라 주었다. 그는 몸부림치는 현우를
꽉 끌어안고 버텼다. 이어 도진이 가준을 선우의 바로 옆으로 이동시켜 주
었다.
하지만 얼음송곳을 치우는 배려는 현우 한정인 모양이었다.
정강이가 얼음송곳에 긁혔다.
‘재수 없는 놈.’
가준은 이를 악물고는 선우의 드러난 목에 수면제를 뿌렸다. 그러나 순식간
에 몸을 낮추고 회피한 탓에 마취제는 허공을 가로 지르는 걸로 그쳤다. 폭
주한 탓에 넘쳐나는 힘으로 형인 현우까지 같이 끌어당겼다.
“더 세게 잡아!”
이번에는 도진도 선우를 묶기 위해 움직였다. 밑에서 솟아난 그림자가 슬그
머니 선우의 다리를 묶기 위해 움직였다. 선우는 이번에도 현우를 안아 든
채 그를 회피했다.
“힘을 써, 쓰라고!”
“어떻게 선우한테 힘을 써!”
“그래도 써! 폭주가 더 심해지면 위험하다고!”
눈을 질끈 감았다 뜬 현우는 그대로 선우의 다리를 걸고 바닥으로 몸을 던
졌다. 그 와중에 동생이 다치는 건 싫은지 본인이 아래다. 그걸 도진이 그림
자로 받아 냈다.
가준은 우박처럼 몰아치는 얼음송곳을 피해 선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드
러난 목덜미에 수면제를 부었다.
“성공.”
날아다니던 얼음송곳이 그대로 스러졌다.
“뭘 뿌린 거야?”
현우의 질문에 가준은 병을 들어 보이며 답했다.
“수면제.”
그게 코끼리만 한 몬스터도 잠재울 양이라는 건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S급
각성자쯤 되면 어지간한 몬스터보다 강하다. 그러니 별일은 없을 것이다.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나서야 위층에서 미리엘이 사뿐히 날아 내려왔다.
“야만스럽긴. 이 밤에 무슨 소란인지.”
“무슨 소란은. 아니, 잠깐. 그보다 너 계속 보고 있었지? 그러면서 도와줄
생각이 안들던?”
“내가 왜 인간을 도와야 하지?”
“식사를 얻어먹었잖아! 밥값은 해야지!”
“흠, 그런가?”
미리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돕도록 하지.”
미리엘은 현우의 품에 쓰러져 있는 선우에게 다가가 손을 얹었다.
“뭐 하는 거야?”
“폭주하는 기운을 잠재운 거다.”
“그런 재주도 있었네?”
“천족은 치유 계열에는 특화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임시적인 조치에 불과
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소용없을 거다.”
“근본적인 문제?”
그 말에 가준은 저도 모르게 현우와 도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문제는 바
로 눈앞에 있었다.
“이걸 해결할 수 있나?”
차인 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연달아 사건이 일어나니 그를 신경 쓸 틈도
없었다.
“일단.”
가준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한숨지었다. 별장은 이미 반파되어 멀쩡한 부분
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도 안쪽을 들여다보니 주방은 쓸 수 있을 것 같았
다.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
안에 있다가 무너져 내린다고 도망치지 못할 위인들도 아니었으니까. 그래
도 밖에 있는 것보단 낫겠지. 가준의 말에 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는 내가 데려갈게.”
현우는 자기보다 큰 덩치의 선우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그 모습이 마
치 공주님 같아 보여 조금은 우습다. 그래도 지금 웃으면 안 되겠지. 가준은
필사적으로 웃음을 내리누르며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현우는 그나마 멀쩡한 소파를 끌어당겨 선우를 거기 눕혔다. 워낙 장신인
탓에 다리가 삐져 나왔지만, 그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감사합니다.”
미리엘은 현우가 하는 인사를 태연하게 받아쳤다.
“밥값을 했을 뿐이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정 그렇다면 받아들이지.”
인사가 끝난 후 남은 이들은 멀쩡한 식탁에 나눠 앉았다.
“이제야 묻는 거지만,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현우의 물음에 가준이 대답했다.
“각성자의 폭주 현상이지.”
각성자가 폭주도 해?”
“하지. 사례도 몇 되지 않고 있어도 파묻어 버린 탓에 일반인은 잘 모르지만
말야.”
“왜 폭주하는데?”
가준은 폭주의 이유를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보통 감정이 극에 치달으면 폭주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추측하더군.”
“감정의 문제라고.”
짚이는 구석을 찾아보려고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으니까.
“지선우의 경우는 형에게 많이 집착하고 있지.”
“너 설마.”
“그래, 내가 이야기했어. 네가 한도진과 사귀게 되었다고. 어차피 언젠가는
알려야 할 일이었잖아?”
“그건 그렇지만.”
현우는 마른 세수를 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 생각이지만 형에게 연인이 생기면 자신의 우선순위가 밀려날까 봐 그런
거 아닐까? 싶기도 해.”
“
그럴 리가. 선우는 내 하나뿐인 동생이야. 내가 물론 형을 좋아하긴 하지
만, 선우도 그 못지않게 사랑해. 우선순위를 매길 수 없다고.”
“그럼 그걸 나 말고 지선우에게 말해 봐.”
“해야지. 해야 하는데.”
도진이 손을 뻗어 현우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괜찮아. 이야기해 보자. 이해해 줄 수도 있잖아.”
“내 생각은 다른데.”
가준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그는 지나치게 올곧은 사람이었다. 어릴 적에 헤어진 형을 위해 길드를 세
우고, 권력을 손에 넣었다. 그에게 다른 사람은 중요치 않았다. 갈구하는 이
는 단 하나, 형뿐인 것이다. 유일한 가족이니까.
“뭐, 알아서 해 봐. 난 딱히 지선우를 좋아하지도 않고, 도움 줄 수도 없을
테니까.”
그리고는 도로 밖으로 나갔다. 갑자기 담배를 피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미련하긴.”
가족이 뭐라고 저렇게 된담. 대충 멀쩡한 난간을 찾아 엉덩이를 걸치고 담
배를 꺼내 물었다. 간만에 마시는 연기는 참으로 달면서도 썼다.
“
내 잘못이다.’
가준에게서 폭주의 이유를 듣는 순간, 떠오른 생각이었다. 소중하고 소중한
동생인데. 불안한 마음이 들게 만들어 버리다니.
마계에서 결심하지 않았나. 동생을 위해 돌아가겠다고. 분명 그랬는데 너무
많은 행복을 가지게 된 탓에 동생의 외로움을 읽지 못했다.
‘내가 그래선 안 되는데.’
도진이 옆에서 위로해 주려 했지만, 지금은 그 소리도 들어오지 않았다. 현
우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선우의 곁에 앉았다.
“선우야.”
자고있는 모습이 참으로 예쁘다. 반듯한 이마 하며, 오똑한 코, 불그스름한
입술까지. 미인의 조건은 전부 갖췄다.
“내 귀여운 동생.”
그러고 있자니 선우의 손끝이 작게 꿈틀거렸다.
“선우야?”
깨어나려는 모양이었다.
“형?”
“응, 선우야.”
‘
이상한 꿈을 꿨어.”
“무슨 꿈을 꿨는데?”
선우가 인상을 찌푸리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형이 한도진과 사귄다는 거야.”
가준을 좀 때려 줄 걸 그랬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그냥 넘겼지만, 애초에
원인은 그였던 것 같았다.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게 싫어?”
“싫어.”
선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
101.
“
형이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우선하는 게 싫어. 형만은 내 곁에 있어 주겠다
고 했잖아. 무엇도 우리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을 거라고.”
어린 자신은 너무나도 약했고, 무능력했다. 수시로 아팠기에 돈을 벌어오지
도 못하고,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집안일을 잘했냐면 그도
아니었다. 그래서 가끔은 무서워졌다.
쓸모없는 자신을 형이 버릴까 봐. 형이 그러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불안
은 떨어지지 않았다. 주변의 어른들은 그랬다. 형이 고생하는 건 몸이 약하
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 때문이라고.
그랬기에 죽도록 노력했다. 형이 사라진 뒤에도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언
젠가는 다시 돌아와서 약속을 지킬 걸 알았으니까. 선우는 그렇게 현우를
믿었다.
“형, 아니지?”
선우가 현우의 손을 잡아 뺨에 가져다 댔다. 어느새 열이 오르기 시작했는
지 뺨이 뜨끈하다.
“선우야? 괜찮아?”
당황한 현우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너 열나!”
“이 정도는 괜찮아.”
이보다 아프고 괴로운 일은 훨씬 많이 겪었다. 든든했던 유일한 보호자가
사라진 자리는 싸늘하고 무서웠다. 하지만 형을 믿고 있었기에 버티고 버텼
다.
그러니 형은 그를 버려선 안 된다. 그건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보다 답해 줘, 형. 아니지?”
“선우야.”
현우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고민이 있을 때 하는 행동이었다. 평소라
면 아플 테니 입술을 깨물지 말라고 했을 테지만, 지금은 말리지 않았다. 좀
더 고민하고, 괴로워하면서 결국엔 자신을 택해야 했으니까.
형
선우는 이마에 올려진 선우의 손을 잡고 거기에 뺨을 비볐다. 어릴 적에 그
랬던 것처럼 어리광을 부렸다.
몇 번인가 현우의 입이 벙긋거렸다.
“내가.”
괴로운 듯 표정을 일그러트린 현우가 말을 이었다.
“내가 너를 어떻게 버려.”
“형.”
이겼다. 역시 형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핏줄을 나눈 자신뿐이다.
“약속할게. 내 최우선은 너야. 언제나 그래 왔듯이. 하지만 선우야.”
“응.”
“나는 말이지. 도진 형도 좋아해.”
“아니야. 그건 착각이야.”
위험한 상황에서 대신 몸을 던져, 착각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흔들다리 효
과. 선우는 형이 가진 감정을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기에 관련하여 차근차
근 설명해주었다.
“ .”
아니야. 죽음의 위기가 이번만 있었을까. 마계에 있었을 때는 더 많이 죽을
뻔했어.”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는 나날 속에서 필사적으로 버티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현우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한예원과
서로 기대면서도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진 않았다.
괴로웠던 순간을 선우가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 힘을
감췄다. 결국엔 모든 걸 드러내게 되었지만 아직 깊은 곳에 품고 있는 기억
이 있었다.
가끔 악몽으로 찾아오는 끔찍한 기억. 지금이 그 기억의 일부를 꺼내야 할
때인 것 같았다.
“형, 형이 괴로웠을 걸 알아. 그렇지만 그래서? 나를 두고 한도진을 선택할
거야? 그건 아니잖아.”
“선우야.”
“나를 설득하려 하지 마. 그냥 이해해 줘.”
선우의 볼이 축축하게 젖어 들기 시작했다. 설득은 요원해 보였다. 포기하
고 싶었지만, 동생의 닫은 마음을 어떻게 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일단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자. 너 열이 너무 높아. 병원부터 가자.”
“알았어.”
불만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선우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
도가준!”
소리쳐 부르자 가준이 고개만 내밀어 안쪽을 들여다본다.
“담배 그만 피우고. 운전할 줄 알지?”
“당연히 할 줄 알지.”
“그럼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가자.”
그리 말하며 선우를 안아 드는데 잠자코 지켜만 보던 도진이 말을 걸어 왔
다.
“여긴 외곽이라서 내려가는 데 오래 걸릴 거야. 그보다 헬기를 부르는 쪽이
빠를 테니 조금만 기다려 봐.”
도진은 전투 중에도 무사히 살아남은 휴대폰을 들어 어디론가 연락을 넣었
다. 방금 대화를 모두 들었을 텐데도 행동이 평소와 다르지 않다.
“미안해.”
현우는 그런 도진에게 사과를 했다.
“사과하지 마. 원래 사랑에는 고난이 있는 법이잖아? 처남이 방해할 건 예
상했어.”
그러면서 작게 웃었다. 그 모습에 어쩐지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지금은 동생을 제대로 치료하는 것만 생각하자고.”
“
응
도진이 부른 헬기는 오래지 않아 도착했다.
“뭐야, 헬기 불렀어?”
“병원이 급해서.”
“왜?”
초조한 현우 대신 도진이 가준에게 대답해 주었다.
“열이 너무 올랐어.”
“폭주 부작용인가?”
“수면제 탓은 아니고?”
“S급 각성자가 그 정도 수면제로 어떻게 될 리 없다는 건 알잖아. 이렇게 빨
리 깨어나기도 했고.”
몬스터도 한참은 못 깨어나는데 말이다.
“길드장님!”
헬기에서 뛰어내린 자는 몇 번이고 스치듯 본 평화 길드의 부길드장 박현희
였다.
“의료진은 준비되었습니다. 이동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대체 누가 아픈 겁
니까?”
“ .”
으음. 선현 길드의 길드장이요?”
도진의 말에 현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선현 길드는 국내 1위의 길드다. 헬기를 부르는 것도, 뛰어난 의료진을 준
비하는 것도 그들이 하면 더 쉬울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굳이 자신을 부르
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단 점수 따기 정도로 생각하십시오.”
“점수 따기요?”
무슨 오해를 한 건지는 모르지만 현희의 표정이 진지하게 굳었다.
“그렇다면 최선을 다해 수행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네! 일단 얼른 이동하도록 하죠.”
먼저 도진이 올라타고, 현우의 품에서 선우를 받아들었다.
끙끙대는 와중에도 형의 품이 아닌 걸 알아챘는지 표정이 험악해진다. 하지
만 도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 선우까지 헬기에 태웠다. 그러고 나니 자
리가 다 차 버렸다.
“잠깐, 나는!”
“
그를 눈치챈 가준이 소리를 높였지만, 도진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운전하실 줄 아시지 않습니까?”
“할 줄 알기야 하지만. 너, 너! 설마!”
“그럼 뒷정리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헬기의 문이 닫혔다.
“야, 야!”
가준이 화를 내며 방방 뛰었지만,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에 묻혀 잘 들리
지 않았다.
“저래도 돼?”
“돼.”
천족이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가준이 버리고 올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야
무지게 챙겨 오겠지.
어쩌면 독점하려 들 수도 있지만, 그것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간이 배 밖
으로 나와 있지 않은 한은 허튼수작을 부릴 리 없었다. 이미 이쪽의 힘을 알
고 있으니까.
커다란 프로펠러 소리와 함께 헬기가 이륙했다. 헬기는 새까만 밤하늘을 날
아 헬기 착륙장이 있는 제법 큰 병원에 착지했다. 규모가 있기에 각성자들
을 위한 의사와 힐러도 대기하고 있었다.
헛
B급 각성자라는 힐러는 선우를 알아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것도 잠시, 본래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의사 몇이
달라붙어 검사를 시행했다.
“다행히 큰 이상은 없습니다. 그냥 열이 오른 것뿐입니다.”
“원인은 뭘까요?”
“감염 쪽은 아닌 것 같고, 다른 원인도 보이지 않으니 아마도 스트레스 같습
니다.”
그 말을 들은 현우의 표정이 굳었다. 아침 방송에서 병의 원인을 모를 경우
스트레스를 원인으로 들먹이는 걸 자주 봤기 때문이었다.
그런 현우를 위해 도진이 말을 덧붙였다.
“외곽 쪽 병원에 계시긴 하지만, 이 분야에선 유명하신 의사분이셔.”
그제야 현우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난 진짜 스트레스가 원인 같은데.”
선우가 가진 형에 대한 집착을 생각하면 불가능하진 않을 것 같았다.
“하긴 미국에서 돌아온 뒤에도 쉬지 못했으니.”
“그렇지.”
“ !”
과거에도 선우는 여기저기 잘 돌아다녔다. 그렇기에 그게 원인 같지는 않았
지만, 그걸 굳이 들춰내지는 않았다. 일단은 동생에게 신경이 쏠린 현우를
살살 달래야 했으니까.
“그보다 너도 놀란 것 같은데 좀 쉬지그래?”
“어떻게 그래.”
“일어났는데 형의 안색이 나쁘면 동생은 더 불안해하지 않을까?”
“그렇게 안색이 안 좋아?”
현우가 손으로 얼굴을 더듬었다.
“응. 그러니까 조금 쉬자. 선우는 내가 살펴볼게.”
“선우는 그걸 더 싫어할 텐데?”
“그럼 선우가 깨어나면 너도 깨워 줄게.”
“응.”
도진은 현우를 소파에 눕히고 담요를 덮어 주었다. VIP실 소파라서 그런지
푹신함도 남다르다. 거기에 불까지 끄니 완벽한 잠자리가 되었다.
‘잠이 오지 않아.’
현우는 몇 번인가 뒤적거리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잠이 오질 않아서. 그냥 선우 옆을 지킬래.”
자리에서 일어난 현우는 선우의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이불 밖
으로 드러난 선우의 손을 꼭 쥐었다.
“지선우, 어릴 땐 어땠어?”
그런 현우에게 도진이 물음을 던졌다.
“작고 여리고 귀여웠지. 지금도 그렇지만.”
아니, 그건 아닌데. 도진은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선우도 브라콤이
심한 편이었지만, 현우도 만만치 않았다. 저 덩치가 작고 여리고 귀엽게 보
일 수 있다니.
‘예원이라면 모를까.’
그 아이는 정말로 작고 여리고 귀여웠으니까. 선우와 비교 대상이 되지 않
았다. 도진은 본인도 시스콤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채 속으로 그리 생각했
다.
“그래서 지켜 주겠다고 생각했는데. 마계로 끌려가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
어.”
“그래도 돌아왔잖아.”
“그렇지. 결국은 돌아왔지.”
현우는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웃었다. 잠든 선우의 옆에서 둘은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의 반은 동생 자랑이었고, 반은 시답잖은 이야기였
“
다. 그래도 이상하게 대화가 즐거웠다.
102.
이대로 밤이 계속 이어져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밖에
그림자가 어른거리기 전까지는.
기척을 느끼자마자 도진이 그림자로 선우가 누워 있는 침상을 감싸고, 현우
가 튀어 나갔다. 그리고 막 창문을 깨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야, 나!”
알베르크였다. 현우는 급작스럽게 멈추느라 그대로 벽을 들이받을 뻔했다.
“윽!”
어떻게 멈추긴 했으나, 조금만 더 힘을 줬으면 벽에 구멍을 뚫었을지도 모
른다. 현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창문을 열었다.
“알베르크?”
평소보다 몸을 조금만 키운 점박이가 알베르크를 태운 채 허공에서 파닥이
고 있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해도 될까? 더 있으면 누군가에게 들킬 것 같은데?”
“……들어와.”
현우가 창문에서 비켜 서자 허공에서 뛰어오른 알베르크가 자연스럽게 창
문 사이로 들어왔다. 이어 몸을 작게 만든 점박이가 따라 들어 왔다. 그런
점박이의 꼬리에는 케로와 요정이 매달려 있었다.
으아아악!”
“왕왕!”
케로는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꼬리를 맹렬하게 흔들었다. 과거의 무시무시
한 몬스터 케로베로스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죽을, 죽을 뻔했습니다! 현우님, 글쎄요. 알베르크 님이 무슨 짓을 저질렀
는지 아십니까?”
요정이 열심히 하소연을 했지만, 아무도 그걸 들어주지 않았다. 몇 번인가
더 소리쳐 보던 요정은 시무룩해진 표정을 지은 채 구석으로 향했다. 지금
그는 케로만도 못한 존재였다.
“두눈이는?”
“이야기하자면 긴데.”
“급한 일이 생긴 게 아니면 시간은 많아.”
“그럼 천천히 이야기해볼까? 어? 그런데 지선우는 왜 이 꼴이래?”
“……그럴 일이 있었어.”
손가락으로 지선우를 쿡쿡 찌르던 알베르크가 눈을 반짝 빛냈다. 하지만 그
건 지나치게 짧은 순간이라 아무도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손가락 부러지고 싶지?”
“아니.”
“
알베르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지선우에게서 손을 뗐다. 그리고는 우
아하게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목이 마른데.”
현우는 말없이 비치된 작은 냉장고를 열고 음료수 하나를 꺼내 던져 주었
다.
“난 따뜻한 게 좋은데.”
“아무거나 마셔.”
“너무해. 내가 현우를 위해 중요한 정보를 알아 왔는데.”
알베르크는 투덜거리면서도 음료수의 뚜껑을 땄다.
“뭔데?”
“티아매트의 행방.”
“찾기 힘들 거라고 하지 않았어?”
“보통은 그렇지. 하지만 내가 현우를 위해서 알아내 왔지!”
그러면서 의기양양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티아매트나 리비라는 녀석, 그리고 히드라는 마계에서 오래 지낸 녀석들이
라서 마기를 잘 다루더라고. 덕분에 흔적이 거의 없어서 그들을 찾는 게 어
려웠어.”
그래서?”
“하지만 그중에 그렇지 않은 이도 하나 있잖아? 바카디란 녀석이었던가. 그
녀석은 인간인 주제에 마기를 받아들여 반마족화가 되었지. 그러니 본래 마
계의 주민보다는 마기를 형편없이 못 다루더라고. 티아매트가 나름 흔적을
지운다고 노력은 한 모양인데 나까지 속일 수는 없었지. 아, 이 음료수 맛있
는데? 더 있어?”
“여기.”
“고마워.”
윙크를 한 알베르크는 두 번째 음료수의 뚜껑을 땄다.
“바카디의 마기는 고약하긴 해도 추적할 만하더라고. 그 뒤부터는 뭐.”
알베르크가 발을 까닥였다.
“쫓아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지.”
두눈이와 점박이를 번갈아 가며 타고서 날아 이동했다. 그 과정에서 다소
혹사시키긴 했지만, 원래 몬스터는 튼튼하니까. 알베르크는 쉽게 자기합리
화를 했다.
“그래, 거기까진 알겠어. 그런데 왜 여기 있어?”
미국에서의 일을 끝마친 우로보로스는 이번에는 강대국의 손이 잘 닿지 않
는 나라부터 망가트리고 있었다. 새로 생긴 협회에서 도와준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지만, 쉽지 않다 들었다.
“
아무리 이권을 넘어 서로 돕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라도, 고국이 존재하는
한은 한계가 있으니까.
“흔적이 이어진 곳이 여기서 멀지 않은 곳이었거든. 그래서 그 근처를 살펴
보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마기가 느껴지더라고.”
정확히는 케로가 점박이를 타고 날아가다 근처를 지나간 헬기에서 냄새를
잡아낸 것이었다.
“왕왕!”
케로는 칭찬해 달라는 듯이 팔딱팔딱 뛰었다.
“그래, 그래.”
현우는 케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배를 보이며 발랑
드러눕는다. 이건 또 어디서 배워 왔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알베르크가 양손을 활짝 벌렸다.
“바카디는 찾아냈고, 그 근처에 다른 이들도 더 있는 것 같더라고. 일단 덜
떨어진 드래곤은 감시를 위해 두고 왔어.”
두눈이 과연 제대로 감시를 할 수 있을까?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어지
는 알베르크이 말에 그를 믿어보기로 했다.
“덜떨어진 드래곤이라도 존재를 감추는 건 제법 잘 해 내더라고. 어디 숨어
지낸 적이라도 있었는지. 어느 정도 거리도 있고, 조용히 있으면 들키진 않
을 거야.”
“그래. 그럼 됐어. 안내해.”
“지금? 네 동생 아픈 거 아냐?”
“아픈 거 맞아. 나도 두고 가고 싶진 않지만.”
이번은 두고 가야 했다. 지금부터 이어질 건 일방적인 폭력일 테니, 아직 상
태가 불안정한 선우는 데리고 갈 수 없었다.
“도진 형, 선우를 부탁해.”
“나보단 알베르크가 보살피는 게 낫지 않을까?”
선우가 깨어나면 가장 먼저 죽이고 싶은 사람이 누군지, 도진은 알고 있었
다.
“선우, 알베르크도 싫어해. 둘 다 싫어한다면 믿음이 가는 쪽에 맡기는 게
낫지.”
“뭐야, 나는 못 믿는 거야? 바카디도 찾아 줬는데?”
“넌 마족이잖아.”
“종으로 차별하면 쓰나.”
그러나 현우는 콧방귀로 응수했다.
“마족을 믿느니 천족을 믿지.”
안 돼. 천족도 마족과 다르지 않다고. 그냥 진영만 다를 뿐이야. 그들도 인
간을 유혹하고 타락시키는 건 마족과 다르지 않아.”
“그렇진 않던데.”
“미리엘이라는 녀석은 아직 애송이라서 그래. 좀 더 나이든 천족을 만나면
생각이 바뀔걸. 그러고 보니 그 애송이가 없네?”
“가준이 돌보고 있어.”
정확히는 떠맡긴 거지만 아무려면 어떨까. 가준은 제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
고 있었다.
“흠. 하긴 그 녀석이 은근히 보모 재질이긴 하지. 그럼 저 녀석이 남기로 했
으면 내가 안내하면 되나?”
“너도 여기 있어.”
“왜?”
“내가 사고 칠 생각이라서.”
그걸 부추길 만한 알베르크는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 대신 현우는 구석에서
훌쩍거리고 있는 요정을 집어 들었다.
“머리, 머리 아픕니다! 끄아악! 다른 데를 잡아 주세요!”
“아무 데나 잡으면 어때.”
“머리통 떨어져요!”
“
그렇게 쉽게 죽을 몸은 아니지 않아?”
“죽어요, 죽습니다!”
요정은 우는 소리를 해 가며 간신히 현우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너 위치는 알고 있지?”
“알고야 있죠.”
그러면서 힐끔 알베르크의 눈치를 본다.
“그럼 네가 안내해.”
“제가요?”
알베르크 때문에 이쪽 세계로 밀려 나온 것만 해도 억울한데, 이제는 사고
칠 장소로 안내해 달란다.
현우는 인간이지만, 상대는 분명 마족과 관계된 이 일터였다. 아니, 관계만
됐으면 다행이지. 예전에 보았던 마족이나 티아매트가 모습을 드러내면 큰
일이다. 싸우면서 사방팔방 마기를 뿜어 내겠지.
상상만 해도 위장이 살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흑흑. 내 팔자야.”
“네 팔자는 알고 싶지 않고. 안내할 수 있어? 없어?”
“할 수 있습니다.”
“
요정은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트리며 발을 끌며 걸어갔다.
“제대로 날아. 불편하게 가고 싶지 않으면.”
“넵! 제대로 날겠습니다!”
요정은 다시 허공으로 떠올랐다. 창문이 열리고 먼저 밖으로 뛰쳐나간 점박
이가 덩치를 키웠다. 현우는 창문을 훌쩍 넘어 점박이의 등 위에 착지했다.
“왕!”
야무지게 요정을 입에 문 케로도 창문을 넘어 점박이 등에 매달렸다.
“현우야!”
걱정하는 도진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흔들어 주었
다.
“혼자 가면 위험해! 같이 가!”
“나는 괜찮으니 만약을 대비해서 선우를 지켜 줘!”
어둠 속에서도 떨리는 도진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지금 갈등하고
있었다. 선우를 지킬지, 아니면 현우를 따라올지.
“조금, 조금만 기다려. 따라갈 테니까.”
아마도 선우를 맡길 만한 다른 사람을 부르려는 모양이었다. 도진이 창문
너머로 모습을 감추자마자, 점박이는 곧바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유선형의
아름다운 까만 몸이 어두운 밤하늘을 유영했다.
*
와 치사하다. 치사해!”
현우가 떠난 자리, 미리엘과 단둘이 남은 가준은 불평을 내뱉었다.
“누구는 헬기 못 부르는 줄 아나?”
그리 말하며 품에서 휴대폰을 꺼내는데 상태가 이상하다. 무언가에 후려맞
은 듯이 움푹 패여 있었다. 너무 급하게 움직인 탓에 예민한 전자기기인 휴
대폰을 배려하지 못했다.
가준은 멍하니 서 있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다시 별장에 들어가 보았지만,
연락할 만한 게 없었다. 그나마 있던 전화기도 이미 파손된 모양이었다. 어
떻게든 살려 보겠다고 만져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괜히 시간만 버린 모양새
가 되었다.
“되는 일이 없네.”
결국 자신이 운전을 해야 할 모양이었다. 가준은 일단 차고로 향했다. 다행
히 차고는 좀 떨어져 있던지라 차는 멀쩡했다. 문제가 하나 있었지만.
“ ,
103.
“
차 키가 없네?”
선우가 타고 온 차였기에, 가준이 키를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대신 차고
밖에 세워진 파란색의 트럭에는 키가 꽂혀 있었다. 별장을 관리하던 사람이
키를 뽑는 걸 깜박하고 가 버린 것 같았다.
그래, 이거라도 어디냐.”
힘들 때는 이거보다 더한 차도 타봤다. 가준은 종종걸음으로 따라온 미리엘
에게 손짓했다.
“타라.”
“저게 더 멋진데?”
“저건 못 타.”
“왜?”
“그런 게 있어. 자꾸 말대꾸하지 말고 빨리 타.”
그제야 미리엘은 조수석에 올라탔다. 다행히 트럭의 상태는 제법 좋았다.
평소 타고 다니던 차량에 비하면 조금 부족한 면이 있었지만, 속도도 나쁘
지 않았다. 밤인 데다가 산길이라 다소 험하긴 했지만, 운전자가 S급 각성
자다. 무슨 일이 생기는 쪽이 이상하다.
“날아가는 게 더 빠르겠는데.”
미리엘이 중간에 불평을 내뱉었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그는 날아간다고 치
더라도 가준은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나아갔을까. 마
침내 산을 벗어나 아스팔트 도로 위로 접어들 수 있었다.
“어디 보자.”
일단은 가장 가까운 백호 길드 지점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가서 부길드장
한테 연락을 넣고 차를 가져오라 하면 되겠지. 이 트럭만 아니라면 뭐든 괜
“
찮을 것 같았다. 다행히 가장 가까운 지점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도착!”
번듯하게 세워진 3층 건물 앞에 선 가준은 기지개를 쭉 폈다.
“집에 도착한 건가?”
“아니, 여긴 집은 아니고.”
“그럼 여긴 어디지?”
“잠시 신세 질 곳?”
그리 말하고는 늦은 밤인데도 신경 쓰지 않고 닫힌 문을 두드렸다.
“대체 이 늦은 밤에 누구야?”
불만스러운 얼굴로 건물을 지키던 경비가 나섰고, 그는 곧바로 가준을 알아
보았다. 국내의 S급 각성자들은 대부분 방송에 얼굴이 팔린지라 따로 신분
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었다.
“길드장님!”
기겁한 경비가 빳빳하게 굳어 있다가, 다급히 무전기를 들어 올렸다. 그러
기를 10여분. 멀리서 살이 붙은 중년 남자 하나가 다급히 달려왔다.
“길드장님? 길드장님 맞으시죠?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가준을 맞이하러 나온 지점장은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무려 길드장이나 되
는 존재가 이유 없이 지점을 찾을 것 같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의 우려와는 다르게 가준은 정말 순수하게 전화를 빌리고자 하는
목적으로 들렸다.
‘뭐, 겸사겸사 대접받는 것도 나쁘지 않고.’
그동안 다른 이들 뒤치다꺼리만 하다 보니 좀 피곤했다.
‘내가 원래 그런 성격은 아닌데 말이지.’
성격 많이 죽었다.
“일단 안으로 드십시오.”
지점장은 굽신거리며 가준과 미리엘을 접대실로 안내했다. 둘이 자리에 앉
자마자 미리 대기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커피 두 잔이 앞에 놓였다.
“일단 필요한 건.”
가준은 망가진 휴대폰을 탁자 위에 내려두었다.
“새 휴대폰과 차인데.”
“차라면 자동차 말입니까?”
“그럼 다른 차가 있습니까?”
“아니, 아닙니다. 차라면 얼른 준비하겠습니다.”
제가 주로 타는 차는 아시죠?”
그래, 이게 바로 도가준이다. 가준은 히죽 웃으며 지점장에게 이것저것을
부탁했다.
어차피 그 정도는 뜯어가도 나중에 되돌려줄 수 있다. 그렇기에 양심의 가
책은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 늦은 밤이라 휴대폰 가게는 닫았을지도 모르지
만, 그것도 알아서 해 올 것이다.
“금방,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지점장이 두툼한 뱃살을 흔들며 사라지자, 옆에 서 있던 다른 직원이 자연
스럽게 비워진 커피잔을 채웠다.
“흐음?”
그런 가준의 모습을 미리엘은 기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는 것만 봐서는
일행 중 가장 바닥인 것 같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다른 인간들이
대하는 걸 봐서는 제법 사회적 지위가 있는 듯했다.
‘하긴. 일반적인 인간과 비교하면 강한 편이다.’
다만 더한 강자들과 함께 있었기에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었다. 벽에 걸린
시계의 분침이 천천히 움직이며 시간이 흘러갔다.
“개통하러 가서 만들어 오나.”
30분가량이 지나자 가준이 따분하다는 듯이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얼마
후,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
거긴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됩니다!”
“대체 누구십니까?”
밖에서는 막으려고 애쓰는 모양이었지만, 소용없었다. 느껴지는 힘을 봐서
는 저들은 그를 막을 수 없었다.
“하아. 귀찮게 됐네.”
가준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문밖을 나섰다.
“그만해. 한도진.”
그러자 다른 사람들을 몰아치던 그림자가 잦아들었다. 그러나 그림자가 잦
아들어도 거기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속이 뒤틀린다.’
그 사이 한도진은 또 발전한 모양이었다. 본인은 오지 않고 그림자만 보냈
다.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림자를 이 정도 떼어서 보낼 수 있다니.
“대체 무슨 짓이지? 싸우자는 건가?”
말투가 절로 험악하게 나갔다.
“그건 아닙니다.”
중앙에서 솟아난 어린아이 크기만 한 그림자가 입을 열었다. 마치 그림자가
말하는 것 같은 기괴한 모습이다.
“
그런데 왜 백호 길드에 와서 행패야?”
“지점 아닙니까?”
“지점도 백호 길드야.”
그 말에 새로 받아온 휴대폰을 들고 바들바들 떨던 지점장이 감동에 찬 표
정을 지어 보였다. 가준은 그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볼일은? 이 난리를 친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잠시 이쪽으로 와 줄 수 있습니까?”
“이쪽이 어딘데?”
“한빛 종합병원입니다.”
“그게 어딘데?”
어처구니가 없어 되묻자, 지점장이 끼어들어 설명해준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병원입니다!”
“거긴 왜?”
“당신과 가장 가까운 곳 중 유일하게 헬기가 착륙 가능한 곳이라서요.”
“날 헬기에 태워서 어쩌려고.”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
이야~.”
가준은 박수를 짝짝 쳤다.
“요즘은 협박을 부탁이라고 읽나?”
“협박이라뇨. 이런 작은 그림자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수 없습니
다. 말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니까요.”
“좋아, 그래. 일단 그 부탁이 뭔지 들어보자.”
“지선우를 지켜 주십시오.”
이게 미쳤나. 입 밖으로 험한 소리가 튀어 나갈 뻔했다.
“나랑 지선우 사이 개판인 거 알지 않나?”
“그래도 최근엔 잘 지내지 않았습니까?”
“서로 소 닭 보듯 한 게 잘 지낸 거라고?”
“부탁입니다. 이대로라면 현우가 위험합니다.”
“현우가 왜?”
그 말이 가준의 마음을 돌렸다.
“일단 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림자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힘이 다한 모양이었다.
“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가준의 곁에 커피잔을 든 채 다가온 미리엘이 말을 얹었다.
“가야지. 넌 현우란 인간을 좋아하지 않나?”
“그걸 알고 있었어?”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다.”
“아, 그래.”
미리엘은 당당하게 말했지만, 정말 눈치가 있는 타입 같지는 않았다. 가준
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좋아. 가 보자.”
한도진이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휴대폰.”
가준이 그리 말하며 손을 내밀자, 지점장이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냉큼 얹
어 주었다.
“여기 있습니다! 완벽하게 개통해서 가져왔습니다.”
제법인데? 이 시간에는 개통도 불가능할 텐데 대체 어떻게 해 왔는지 모르
겠다. 하긴 뭐든 능력이 있으니 지점장 자리를 꿰찼겠지.
“차는?”
“
준비해 뒀습니다! 급하게 준비하느라 국산밖에 준비 못 했지만, 상태가 좋
으니 맘에 드실 겁니다.”
“뭐, 상관없나.”
가준은 차 키를 넘겨받고 건물 밖으로 걸어나갔다.
“잘 마셨다.”
커피잔을 근처에 있던 경비원에게 넘긴 미리엘이 그 뒤를 따랐다.
“아까 것보다는 낫군.”
“낡은 트럭보다야 뭐든 낫지.”
가준은 그대로 한빛 종합병원으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
는 듯이 달려온 사람이 그를 옥상으로 안내했다. 거기에는 이미 헬기가 준
비되어 있었다.
그걸 타고 목적지로 이동하고 나니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현우 혼자 복수한다고 갔단 말야? 그걸 왜 안 말렸어?”
환장하겠다.
“동생을 지켜 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요.”
“아니, 멀쩡히 누워서 쉬고 있는 지선우가 위험할 일이 뭐가 있다고!”
“혹시 모를 일이니까요.”
“
아이고.”
머리가 아파 오는 것 같았다.
“그러니 도와주십시오.”
“내가 왜! 다른 사람 불러! 요람 길드와도 사이 좋잖아.”
“하지만 요람 길드는 아직 모르는 것이 많지 않습니까.”
이미 마족에 관해서는 선우가 털어놓았지만, 도진과 가준은 그걸 모르는 상
태였다.
“그럼 차라리 내가 갈게. 네가 지선우를 지켜.”
“그건 안 됩니다. 당신은 저보다 약하지 않습니까?”
“와, 대놓고 긁네?”
가준이 사납게 웃으며 도진을 노려보았다.
“사실이니까요.”
사실이면 다 말해도 되는 줄 아나. 처음 만났을 때는 얌전한 줄 알았는데,
그 모든 게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도진의 본성은 이쪽이다.
“시발, 그렇게 약한 나한테 믿고 맡길 수는 있냐?”
“네.”
“
그건 또 왜 믿는데?”
“그동안 같이 지내는 동안, 적어도 뒤통수 칠 사람은 아니란 판단이 들었습
니다.”
아닌데? 예전에도 몇 차례 지선우의 뒤통수를 치려던 가준으로서는 어처구
니없는 이야기였다.
가준이란 인간이 원래 그렇다. 뒤통수 맞고 뒤통수 치는 세계 속에서 살아
왔다. 정직과는 거리가 멀고, 비열과는 가깝다.
‘그런데 말이지.’
도진의 말을 듣다 보니 가슴이 울컥했다.
“
104.
‘
,
아니 이게 아니지.’
상대는 현우를 앗아간 라이벌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자의 말에 흔들리다니.
가준은 혀를 찼다.
“부탁드립니다.”
도진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가준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지나치게 올곧고
깊어, 거부할 수가 없었다.
“손해 보는 역할은 질색인데. 그러고 보니 너 저번에 나한테 반말 쓴다며?”
“그건 관두기로 했습니다. 똑같은 인간이 될 수는 없지요.”
부탁하는 주제에 말 한 번 곱게 한다. 주먹이 절로 드릉드릉 울렸지만, 지금
은 참기로 했다. 가준도 현우가 걱정되긴 했으니까.
“나중에 이 빚은 받아 낼 거야.”
“얼마든지요. 그리고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도진은 가준에게 무전기를 건네주었다.
“휴대폰보다는 튼튼할 겁니다.”
“그래, 튼튼해 보이기는 하네.”
“그럼 알베르크?”
“내가 안내해 줘야 하는 건가?”
“지금 여기서 위치를 아는 건 당신뿐이지 않습니까.”
도진은 소파에 몸을 기댄채 늘어져 있는 알베르크를 재촉했다. 그러나 그는
쉽사리 몸을 일으키려 들지 않았다.
“현우를 못 믿는 거야?”
“믿습니다. 믿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내가 보기엔 별일 없을 것 같은데.”
마계에서의 현우를 알고 있는 알베르크는 시종일관 태연했다. 저번에는 희
한한 사슬에 걸려 제힘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그런 게 또 있을 것 같지는 않
았다.
그리고 설사 있다 하더라도, 이미 당했던 것에 또 당할 현우가 아니었다.
‘상대방에겐 인질도 없고.’
현우가 날뛰기엔 딱 좋은 환경이었다.
‘날뛰어라.’
미친 듯이 날뛰다 보면 자신이 여기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란 걸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그는 마족과도 잘 어울렸다. 그러니 홀로
살아남아 모든 위험을 물리치고 살아갔겠지.
그런 이유로 알베르크는 도진을 현우에게로 안내할 생각이 없었다.
“알베르크!”
“그렇게 부르지 않아도 알베르크가 내 이름인 건 알아.”
“당신은 현우가 걱정되지도 않습니까?”
“응. 뭐가 걱정돼? 현우는 냉정하고 강해. 그리고 원래 이쪽 세상 사람이라
나와는 다르게 모든 힘을 가지고 여기로 돌아왔어. 그런 그를 위험하게 만
든다고? 그게 쉬울 것 같아?”
틀렸다. 알베르크의 눈을 보니 알 수 있었다. 이 마족과는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
“좋습니다. 그럼 혼자 찾아가도록 하죠.”
혹시 몰라 점박이에게 그림자를 붙여 두었다. 알베르크를 데려가려던 건 만
약의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선우의 곁에 없는 쪽이 더 안심되
기도 했고.
“다녀와.”
알베르크는 느긋하게 소파에 누워 한들한들 손을 흔들었다. 도진은 그런 그
를 노려보다 문밖으로 나섰다.
*
두눈은 수풀 속에 숨어 저 멀리 있는 건물 하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건물은
평범하게 생겼으나, 그 안에 있는 자들은 범상치 않다. 일단 얼굴을 확인한
자로는 바카디가 있었다.
그리고 후드티를 깊게 눌러쓴 여자 하나, 그 뒤를 따라다니는 모자 쓴 남자
하나. 바카디와는 다르게 얼굴을 확인하는 게 쉽지 않았다.
“티아매트.”
하지만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후드티를 눌러쓴 여자는 티아매트였다.
그렇다면 그 뒤를 따라다니는 남자는 히드라일 테고.
그들이 어째서 여기까지 와서 건물에 틀어박혔는지는 모른다. 그러니 그걸
판단할 다른 사람이 오기까지 여길 지켜야 했다.
어쩌면 조금 지루하기까지한 시간이었다. 그래도 두눈은 졸지 않고 제대로
감시를 했다. 그렇게 지켜보는 동안 남자 하나가 더 안으로 들어갔다.
그 또한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좀 더 가까이에서 지켜봐야 할까? 고민을
하는데 남자가 도로 나와 저 멀리 사라져 갔다. 아무래도 고민할 필요는 없
었던 듯하다.
그 순간, 갑자기 등줄기가 시렸다.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걸 느
끼자마자 두눈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툭.
뒤돌려는 순간, 가벼운 손길이 두눈의 등을 두드렸다.
“잘했어.”
익숙한 목소리를 들으니 그제야 긴장이 사그라들었다.
“안에는 몇 명?”
“셋. 남자 둘, 여자 하나. 남자 하나가 조금 전에 밖으로 나갔어.”
“아는 얼굴이 있어?”
“바카디. 그리고 티아매트. 히드라.”
“다른 하나는?”
“모르겠어.”
두눈은 고개를 내저었다.
“뭐, 상관없겠지.”
현우는 그대로 훌쩍 뛰어 건물로 향했다. 그동안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몬
스터를 해치울 때도 가진 힘을 전부 발휘하진 않았다. 다른 사람 눈에 띄기
라도 하면 곤란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런 제한을
모두 벗어 던지기로 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정정당당하게 1:1로 교환할 생각은 없지만 말이다. 현우는 그대로 문을 열
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이게 뭐야. 맛없어!”
티아매트는 카이가 내 온 감자튀김을 한입 베어 물고는 도로 뱉었다.
“무슨 감자가 이렇게 얇아? 뭔 맛인지도 모르겠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햄버거 껍질을 벗겼다.
“맛있다며! 맛있을 거라면서!”
“시끄러워! 그냥 먹어!”
“너야말로 시끄러워, 멧돼지!”
“지는 살찐 도마뱀이면서.”
바카디의 말에 티아매트의 눈 색이 짙어졌다. 살찐 도마뱀. 그건 오래전부
터 다른 종족이 위대한 드래곤을 깎아내릴 때 쓰곤 했던 단어였다. 말이라
“
도 그렇게 하면 드래곤이 약해지기라도 할 줄 아나. 건방지고 재수 없는 것
들.
티아매트는 이를 으드득 갈며 햄버거를 바카디의 뒤통수에 집어 던졌다. 물
론 바카디는 그걸 태연하게 잡아 자기 입속으로 쑤셔 넣었다.
“그래, 주제 모르는 인간은 교육이 중요하지. 슬슬 길들일 때도 되었어.”
“길들일 수는 있고?”
“리비가 조용히 지내라고 하지만 않았으면 내가 니 건방을 참아 줬을 것 같
아?”
“안 참으면 어쩔 건데? 리비의 명령을 어기고 싸우려고?”
그건 안 될 말이다. 아무리 앞뒤 모르고 날뛰는 티아매트라도 리비의 말을
맘대로 어기기에는 다소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결국 티아매트는 빼내던 손
톱을 도로 갈무리했다.
“정말 볼수록 맘에 안 들어. 카이!”
“네, 티아매트 님.”
“뭔가 먹을 만한 걸 가져와 봐. 이런 쓰레기 말고.”
“이 시간에는 문 연 곳이 거의 없습니다.”
“편의점이란 데는 연다면서?”
“그건 그렇습니다만.”
카이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편의점에서 티아매트가 만족할 만한 음식을
찾는건 쉽지 않은 일일 터였다. 잘못하다가는 분노만 살지도 몰랐다.
“햄버거도 못 먹으면서 편의점 음식은 어떻게 먹겠다는 거야?”
“먹을 수 있지. 왜 못 먹어?”
“닥쳐.”
“너나 닥쳐!”
둘은 계속 티격태격 싸우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이대로라면 리비의 명령이
라도 어기고 싸울 기세였다. 카이만이 곤란해하는 가운데, 한창 서로 비난
하던 둘이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 동시에 1층, 건물로 들어오는 문이 있는
부분을 바라보았다.
“누가 오네?”
“또 누구? 동네 주민?”
“뭐래. 이 멍청이가. 어느 동네 주민이 이런 기운을 가지고 있어?”
이리도 오싹한 기운을 말이다. 티아매트는 잔뜩 긴장한 채로 아래를 주시했
다. 침입자는 기척을 숨길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발소리를 내면서 천천히
위로 향하고 있었다.
“적이야?”
바카디가 두 주먹을 마주 대면서 히죽 웃었다.
저 바보가!’
깊이를 알 수 없는 살기가 티아매트를 옥죄어 왔다. 그런데 바카디는 그걸
전부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느낄 수 있었으면 저런 멍청한 행동도 하
지 않았을 테니.
티아매트의 눈동자가 데굴 굴러갔다. 발소리는 그들이 머무는 2층 방 앞에
서 멈춰섰다.
“리비야?”
혹시나 싶어 아는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거참, 감질나네.”
바카디가 주먹을 흔들면서 문으로 다가갔다. 평소 그의 행동거지를 생각하
면 저대로 문 너머의 침입자를 후려칠 생각인 듯했다.
“하지 마.”
티아매트가 경고를 했지만, 소용없었다. 바카디는 씩 웃어 보이며 그대로
문으로 주먹을 날렸다.
쾅!
‘
주먹이 내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굉음이 들려왔다. 저 정도의 힘이면
평범한 인간은 으스러져 곤죽이 되었으리라. 벽이 무너지면서 솟아오른 먼
지가 시야를 가렸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말이지.’
티아매트는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일단 결계를 치겠습니다.”
그래, 그게 맞다. 리비가 어느 누구에게도 들키지 말고 여기서 대기하라고
했으니까. 그렇지만 모르겠다. 리비의 말을 따라야 하지만, 본능이 경고를
울리고 있었다.
도망가, 라고.
쿵!
재차 굉음이 들려오며 바카디가 뒤로 날아갔다. 카이가 친 결계가 아니었더
라면, 벽도 뚫었을지도 모른다. 커다란 몸이 결계에 부딪쳐 바르르 떨려왔
다.
“하?”
새로이 솟아오른 먼지는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가라앉았다. 티아매
트는 그제야 침입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현우.”
“안녕.”
까만색 장갑을 낀 현우가 눈을 접으며 웃어 보였다.
“다시 보네, 티아매트.”
“그러네. 딱히 다시 보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안타깝네. 난 보고 싶었는데.”
오싹. 소름이 돋았다.
도망가고 싶다. 도망가기 싫다.
싸우고 싶다. 싸우기 싫다.
상반되는 감정이 몸을 불태웠다.
“아하하.”
티아매트는 손톱으로 자신의 뺨을 긁어 내렸다. 화끈거리는 통증과 함께 피
비린내가 느껴지자 기분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105.
“
보고 싶었다니. 그래, 이제 봤으니까 뭘 할 셈이야?”
“알면서 묻는 거야?”
현우가 한 발자국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티아매트는 물러나는 대신, 자신
도 똑같이 앞으로 나아갔다.
“모르니까 묻는 거지.”
모르다니, 생각보다 머리가 나쁘나 보네.”
“지금까지 머리 나쁘단 소리는 들어본 적 없는데.”
티아매트는 웃음으로 응수했다. 두 명이 서로 상대를 향해 걸어가니, 금방
가까워졌다. 이제는 현우의 표정이 선명하게 보였다. 웃음 뒤에 감춰진 것
은 끝없는 분노였다.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손톱을 길게 빼낸 티아매트가 현우를 찔러
들어감과 동시에 그가 몸을 움직였다.
‘방심하면 안 돼.’
저번에는 사슬이 있었으니 대등할 수 있었던 거다. 지금은 그 사슬이 없으
니 더욱더 집요하게 조심해서 공격해야 했다.
순식간에 몇 번이 공격이 오가고, 티아매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뒤로 물
러났다. 너무 신경을 곤두세워서 그런가, 얼마 싸우지도 않았는데 지치는
느낌이었다.
그때 뒤에서 거친 목소리가 욕설을 내뱉었다. 잠시 정신을 잃었던 바카디가
깨어난 것이다.
“또 처맞았네.”
목을 우두둑 소리 나게 꺾은 바카디는 몸을 튕기며 일어났다. 그리고는 노
골적으로 마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내가 말야, 지고는 못 살거든.”
“
저런. 그러면 이제 못 살겠네.”
현우는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시발, 그게 아니지!”
말려든 바카디가 화를 내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지지 않는다.”
“오늘은 사슬이 없지 않아?”
“그딴 거 없어도 괜찮아!”
“그럴 리가. 도구 없으면 넌 그냥 나약한 인간일 뿐인데?”
“개소리!”
바카디는 스탭을 밟으며 대차 현우에게 돌진했다. 그 틈에 티아매트는 바카
디의 그림자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는 예전처럼 현우를 공격할 기회를 노렸
다.
“정말 지겨울 정도로 똑같은 행동이네.”
현우는 손을 털고는 정면에서 바카디의 주먹을 받아쳤다.
“맞아도 학습 능력이 없으니 어쩔까.”
상대적으로 작은 주먹이 후려치는데도 몸이 울릴 정도로 아프다. 이를 악물
고 덤벼 보아도 유효타는 단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다. 바타디가 신나게 처
“
맞기만 하다 보니 티아매트 또한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하필이면 이때!’
예전과는 상황이 다르다. 지금 티아매트는 다른 인간들에게 들켜서는 안 된
다. 그러니 본체로 돌아갈 수도, 이 이상 힘을 발휘할 수도 없었다.
“죽어!”
필사적으로 덤벼 보아도 제자리걸음일 뿐이었다. 아니, 제자리걸음이 아니
다. 탱커의 역할을 하는 바카디가 사라지면 오롯이 혼자 현우를 상대해야
했다. 마계에서도 손꼽히는 마족인 알베르크와 수시로 싸우던 그와!
‘리비!’
지금은 잠시 자리를 비운 리비가 다시 돌아오길 기다리며 시간을 버는 수밖
에 없었다.
“악!”
먼저 바카디의 다리가 부러졌다. 그는 기어서라도 공격하려고 했지만, 걷지
못하는 맷돼지는 쓸모가 없었다. 이어 팔이 부러지고 사지를 쓰지 못하게
되었다.
티아매트는 자랑하던 손톱을 생으로 뽑혔다. 고통을 참으며 필사적으로 덤
벼 보았지만, 손끝도 닿지 않았다. 그저 농락당할 뿐이었다.
“아직 부족해.”
“뭐가!”
알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지선우에게 저주를 걸지 말걸 그랬나. 그런 멍청한 생각
까지 들었다. 아무래도 바카디랑 같이 다니면서 멍청함이 옮은 것 같았다.
“카이, 카이이!”
티아매트는 카이를 소리쳐 불렀다. 결계를 칠 때는 움직일 수 없다는 걸 알
지만, 그래도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아, 맞아. 카이. 너도 있었지. 너는 조금 더 기다려.”
현우는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얀 피부에 튄 피가 유독 붉어 보였다.
“다음은 어디가 좋을까? 네가 말해 볼래? 티아매트.”
“알게 뭐야! 맘대로 해 보라고!”
“그래, 그럼 손가락부터 갈까.”
고통은 제법 겪었다고 생각하는데도 두려웠다. 왜냐하면 이 끝에 다가올 게
뭔지 알고 있었으니까.
“너. 날 살려 둘 생각이 없지?”
현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알 것 같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면 되는데.’
“
과연 리비가 돌아올 때까지 자신은 버틸 수 있을까? 미친 드래곤이라 불리
던 티아매트였지만, 죽기는 싫었다. 그렇기에 더욱 악을 쓰고 버텼다. 그렇
게 한 손이 끝났을 때, 그토록 원하던 이가 돌아왔다.
리비가.
“리, 리비.”
티아매트는 리비의 이름을 불렀다.
“아, 저런.”
리비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티아매트를 내려다보았다.
“도와줘.”
“잠깐 사이에 이게 무슨 일입니까?”
“도와줘.”
“대체 사고 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하는 겁니까?”
“도와 달라고!”
티아매트가 소리를 높이자 리비는 손가락을 들어 입가에 가져다 댔다.
“쉿.”
그제야 티아매트는 입을 다물었다.
지현우였던가요?”
“넌 리비고.”
현우는 볼에 묻은 피를 문질러 닦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제법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던 것 같군요. 하지만 그들은 제 동료들이니 이
만 놓아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동료들이라. 그럼 너도 이들과 같은 쓰레기란 소리네?”
저번 싸움 때 현우는 리비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렇기에 어찌 보
면 오늘 처음 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매끄럽게 생긴 남자의 얼굴은 조각
상 같았으나 보고 있자니 구역질이 났다.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습니다. 이번은 그냥 넘어가지 않겠습니까? 어차
피 언젠가는 다시 만날 텐데요.”
“아니, 다음은 없어.”
현우는 그대로 리비를 공격했다. 리비는 그를 흘려내며 뒤로 훌쩍 물러났
다. 그리고는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나뒹구는 소파 위에 고이 올려놨다.
“알베르크와 몇 번이고 싸웠단 소문을 들었습니다. 당신은 그보다 강합니
까? 아니면 약합니까?”
“그게 중요해?”
“나름 중요하지 않을까요?”
“
리비는 바닥을 쓸어오는 다리를 피해 몸을 띄웠다. 하지만 그건 현우가 그
를 좀 더 편하게 공격하기 위해 했던 행동에 불과했다. 곧바로 허공에서 날
아온 주먹이 리비를 후려쳤다.
“큰일날 뻔했습니다.”
리비는 그를 손바닥으로 막아냈지만, 제법 얼얼한 모양이었다.
“그냥 큰일 나지 그랬어.”
“그건 안 됩니다. 저에게는 아직 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딴 사명 알게 뭐야.”
“저에게는 소중합니다만.”
“목숨보다 소중하진 않을 텐데? 마계로 꺼져!”
현우는 연신 리비를 공격해 나갔다. 카이의 결계 안이라 그도 힘을 조절하
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알 수 있었다. 이 남자는 티아매트보다 싸움에 능숙
하다.
천년을 넘게 살아온 드래곤보다 싸움에 능숙하다니. 그게 가능한 이야기인
가?
마족이라면 가능하다. 그들은 드래곤 못지않게 긴 삶을 살며, 전투를 사랑
하는 종족이었으니까. 그러니 이 정도로는 안 된다. 이 정도로는 리비란 마
족을 쓰러트릴 수 없었다.
“좀 시끄러워지겠네.”
현우는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리비를 바라보았다.
“그게 내키지 않으면 조용하게 끝낼 기회도 있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어요.”
“늦었다니까.”
힘과 힘이 오가면서 커져 나갈수록 카이의 결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위험합니다.”
카이의 말에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티아매트가 물었다.
“뭐가?”
“결계를 더 유지하는 게 힘들 것 같습니다.”
“어차피 죽지 않는 한 버틸 수 있잖아? 더 버텨.”
조금의 온정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렇지만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
는 것이 있다. 이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버텨도 누군가에게는 들킬 겁니다. 본체로 돌아가면 더 오래 제대로 버틸
수 있습니다.”
“안 돼. 커다란 몸체가 드러나면 들켜.”
“하지만 티아매트 님.”
티아매트는 카이의 말을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았다. 원하는 바가 있어 모
시는 주인이었지만, 이럴 때면 가슴이 아파 왔다.
왜 자신은 어느 곳에 있어도 존중받을 수 없는 걸까. 카이는 울컥 솟아오르
는 피를 삼키며 온 힘을 다해 버텼다.
“흠, 알베르크와 싸웠다고 해서 좀 더 기대했는데. 생각보다는 강해 보이지
않는군요.”
“그야 힘을 전부 쓰지 않았으니까. 너도 그렇잖아?”
“그렇습니까.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카이!”
“네.”
“결계를 거둬라.”
뜻밖의 명령이었다.
“무슨 소리야!”
티아매트도 그 명령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어차피 더는 결계가 못 버텨. 이대로면 들킨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화려하
게 저지르고 달아나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실수하면 천족에게 들킨다고 했잖아!”
그래서 저번에 알베르크와의 전투도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어차피 시간만
끌면 이 세상은 자신들의 손아귀에 들어올 테니까. 진지하게 알베르크를 상
대할 생각은 없었다. 알베르크도 그걸 알고 적당히 놀아 줬던 것 같았다.
“잠깐이면 괜찮을 겁니다.”
그럴 리가 있나!”
티아매트는 어떻게든 리비를 말리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
106.
“
.
티아매트.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결계를 거두고 당신도 날뛰어 보는 겁니
다 저번에 그러지 않았습니까. 직접 많은 인간을 죽여 보고 싶다고요.”
그 말에 내내 반대하던 티아매트가 멈칫했다.
“……그래도 돼?”
“안 될 건 뭡니까?”
“티아매트 님!”
당황한 카이가 티아매트의 이름을 불렀으나, 이미 그녀는 거의 넘어간 것
같았다. 너덜해진 손을 가지고도 눈은 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런 상태가 되
면 더는 말릴 수 없다. 카이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지랄 났네.”
그 사이로 험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내가 그걸 보고만 있을 것 같냐?”
현우는 삐딱하게 서서는 리비를 노려보았다.
“물론 그러지야 않으시겠죠. 하지만 이쪽은 하나가 아닙니다. 조금 궁금해
지는군요. 과연 당신이 어떻게 우리 둘을 막을지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카이의 결계가 걷혔다.
“크르르륵!”
내내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던 티아매트는 그 즉시 본체로 돌아갔다. 그 과
정에서 건물이 무너지긴 했지만, 기절해있는 바카디를 제외하곤 그에 영향
을 받은 이는 없었다.
“의리가 없네.”
빠져나온 형우가 그렇게 말하자 리비가 웃으며 답했다.
“저 정도로 죽으면 쓸모가 없지요. 쓸모없는 인간은 필요 없습니다.”
“푸하! 뭐야, 뭐야!”
바카디는 쓸모없는 인간은 아니었는지 자력으로 건물 잔해에서 기어 나왔
다. 부러진 사지도 어느 정도 회복된 모양이었다. 비틀거리긴 하지만, 몸을
세우고 있었다. 이어 카이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거대한 덩치 둘이 앞을 가로막으니 위압감이 대단하다. 그런 둘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 사이로 리비가 걸어 나왔다.
“자, 그럼 싸워 봅시다.”
자신이 유리한 걸 안다는 듯 느긋한 태도였다. 현우는 그걸 보며 웃음을 터
트렸다. 그러더니 물었다.
“넌 가진 힘을 전부 가지고 넘어왔냐?”
그게 궁금합니까?”
“그래.”
“굳이 말해 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는데요.”
“다 못 가지고 왔네.”
현우는 단정 지었다. 중간에 생겨난 포털을 이용해서 넘어온 알베르크는 많
은 힘을 두고 이곳에 넘어왔다. 그에 비해 준비를 철저히 했을 리비는 더한
힘을 가지고 왔겠지만, 두렵지 않았다.
“일부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현우, 자신은 마족인 저들과는 달리 힘을 온전하게 보존한 채 이
리로 넘어왔으니까. 마족 중에는 그가 알베르크와 싸운 걸 믿지 않는 이들
도 제법 있었다. 그들에게 최고는 알베르크였으니까. 하지만 실제로 현우는
싸웠고, 지지 않았다.
“그래, 싸워 보자.”
가장 먼저 움직인 이는 티아매트였다. 그녀는 커다란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
려 하였다. 날개를 공격당하면 소용없을 일이나 아래에선 히드라인 카이가
지키고 있었다.
현우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마계에서의 나날들을 떠올려 보자. 끔찍했던
투쟁의 시간을 거쳐 그는 새로운 힘을 손에 넣었다.
그건 어떻게 보면 바카디가 가진 힘과 다를바가 없었다. 차이가 있다면 바
카디는 노력 없이 얻었고, 현우는 노력하여 얻었다는 정도였다.
“
현우의 그림자가 흔들거리며 부피를 키워 나갔다. 아니, 자세히 보면 그건
그림자가 아니었다.
“호오?”
리비가 신기하다는 시선으로 현우를 바라보았다.
“마기입니까? 결국 당신도 바카디와 비슷한 종류의 인간이었던 겁니까?”
“마음대로 생각해.”
어느새 새까만 연기에 전신이 가려진 현우가 대답했다. 순수한 인간의 힘으
로는 마계에서 살아남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살기 위해 받아들였다. 그리
고 싸우면서 마기의 양을 점점 늘려나가는 요령을 배웠다. 방향성을 정하고
마기를 다듬어 나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알베르크와 싸울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손에 넣었다.
“크르르릉.”
부피를 늘려나간 연기 속에서 짐승의 울음이 들려왔다.
“아하하하!”
누군가의 웃음이 들려왔다.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발소리가, 금속 소리
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이내 모든 소리가 뚝 그쳤다.
그걸 보고 있자니 어쩐지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티아매트는 자신이 할 일
을 잊지 않았다. 그녀는 침묵을 틈타 하늘로 날아올랐다. 거대한 몸체가 빠
른 속도로 허공으로 떠올라 갔다.
그때였다. 연기 속에서 무언가가 뻗어 나오더니 티아매트를 향해 날아왔다.
가장 먼저 그걸 눈치채고 앞에 나선 이는 카이였다. 그는 자신의 목을 휘둘
러 공격을 막아 내고자 했다.
히트라는 특성상 튼튼하고 재생력도 빠르다. 그렇기에 그걸 믿고 막아섰으
나 결과는 처참했다. 히드라의 목을 뚫고 지나간 기다란 까만 창은 티아매
트를 꿰뚫었다. 마지막 순간에 몸을 뒤틀어서 몸에는 맞지 않았지만, 날개
의 피막에 구멍이 뚫렸다.
시작은 크지 않은 구멍이었지만, 날개짓을 할수록 상처는 더 커져 갔다.
“크르륵!”
티아매트는 그 자리에서 땅으로 추락했다.
쿵! 어떻게 착지는 제대로 했지만, 땅이 흔들리며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
다.
“이익!”
몸을 바로 세운 티아매트가 이를 갈았다. 그러나 공격은 거기서 멈추지 않
았다. 현우가 팔을 휘두르자 재차 새카만 창이 날아들었다.
“막아!”
티아매트의 외침에 또다시 카이가 나섰다. 그래 봤자 공격의 속도를 늦추는
정도였지만, 그것만으로도 티아매트가 피할 시간은 충분했다. 처음에는 몰
라서 맞아 주었지만, 알면 어떻게든 피할 수 있다.
“하나는 잘 피하네? 그럼 이건 어떨까?”
허공에 수십 개의 창이 생겨났다. 그를 본 카이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하나를 막는데 목 하나씩을 희생했다. 그런데 그런 창이 수십이다. 막을 수
있을까?
아니, 막지 못한다. 어쩌면 오늘 이 자리가 무덤이 될지도 모른다. 카이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현우에 대한 공포를 이겨 내고자 티아매트에게 붙었
는데, 결국은 어느 것도 극복해 내지 못했다.
수십의 창이 날아오고, 카이는 죽음을 예상한 채 눈을 꾹 감았다. 그러나 한
참이 지나도 새로운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제야 눈을 떠보니 리비가
앞에 서 있었다.
“아직 필요한 존재들인데 죽이면 안 되지요.”
리비는 어느새 커다란 방패를 꺼내 들고 있었다. 마계의 신물로 그가 애용
하는 무기였다.
“그나저나 이런 공격을 본 적 있습니다. 서열 12위인 이프리콧. 그의 기술
아닙니까? 그는 창술의 천재였습니다. 창도 잘 다뤘지만, 마기를 이용한 원
거리 공격이 일품이었지요.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는다 했는데 그에게서
뭔가 배운 겁니까?”
“배웠다고 해야 하나?”
현우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리고 물었다.
“내가 그걸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나?”
“없지요.”
리비는 방패를 내려놓으며 답했다.
“하지만 궁금하긴 합니다.”
“그러면 궁금한 채로 죽어.”
현우는 재차 공격을 시작했다. 리비는 그런 현우의 공격을 능숙하게 받아쳤
다. 강하긴 했지만, 막아 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창은 계속 현우의 근처에서만 생성되고 있었다. 그걸 깨닫자마자 티
아매트는 다시 앞으로 튀어 나가려고 했다.
“안 됩니다!”
이상함을 느낀 카이가 뒤늦게 말렸지만, 이미 늦었다. 처음으로 창이 현우
의 근처가 아닌 다른 곳에 생성되었다. 티아매트의 머리 뒤.
“뒤!”
카이의 외침에 티아매트는 얼른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창은 그
녀의 머리 위를 허무하게 지나갔다.
“뭐야.”
등줄기로 오싹 소름이 돋으며,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조금만 변신이
늦었어도 죽을 뻔했다. 그 뒤부터 창은 이곳저곳에서 생성되며 그들의 목숨
을 노렸다.
‘속였어!’
대부분의 공격은 리비가 막아 주었지만, 일부 공격이 그들에게도 떨어졌다.
모든 게 악몽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내내 공격을 막기만
하던 리비가 방패를 내렸다.
“계속 막기만 하자니 지루하군요. 이 외에 다른 공격은 없는 겁니까?”
“다른 걸 원해?”
“그렇다면요?”
“그럼 보여 주지, 뭐.”
갑자기 발밑이 서늘하다. 티아매트는 자리에서 뛰어올라 히드라인 카이의
몸통 위로 올라갔다. 감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어느 순간, 피어난 새카만
가시덩쿨이 티아매트의 발을 잡아채려 했다.
창을 피하는 와중에 발목을 잡히면 끝장이다.
“오호, 이건 또.”
리비가 발목을 파고드는 넝쿨을 보며 감탄사를 흘렸다.
“마이아.”
티아매트는 잇새로 신음을 흘렸다. 마계 서열 18위였던가? 식물을 자유롭
게 다루는 능력을 지닌 마족이 있었다. 이프리콧과는 다르게 그녀와는 약간
의 교류를 하고 있었다.
‘최근에 그녀를 본 적 있던가.’
그렇게 묻는다면 아니요, 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마이아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마이아? 아는 마족입니까?”
“식물을 다루는 능력을 지닌 마족이야.”
단순히 식물을 다룬다, 로 정의하기에는 다재다능하긴 했다. 넝쿨을 이용하
여 상대를 포박하는 건 물론이고, 식물의 독을 사용하여 중독시키기도 했
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독을 사용하는 티아매트와 교류했던 것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마이아의 힘까지 사용하다니. 뭔가 이상했다.
107.
“
,
당신 그들을 삼켰군요.”
리비의 말에 현우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최악의 맛이었지.”
살기 위해서 마족의 기운을 삼켰다. 그 맛이 얼마나 역겨웠던지 토할 것 같
았지만, 참았다. 그래야 힘을 얻어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특이한 재능이네요.’
요정도 그렇게 말했었다. 다른 이의 힘을 삼켜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
다니. 괴물 같은 능력이 아닌가.
“상대하기 까다롭겠는데요.”
까다롭기만 해?”
티아매트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리비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태연했다. 믿고 있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건 힘일 수도 있고, 또
는 다른 조력자일 수도 있다. 아니면 도망가려는 것일지도 모르지.
‘어느 것이든 가만 놔두지 않을 거지만.’
일단은 티아매트부터 조지고 생각하자. 현우는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쉽게 당할 줄 알고!”
앙칼지게 소리친 티아매트가 다시 몸을 원래대로 돌렸다. 리비가 공격에 익
숙해진 것 같으니, 그가 막는 동안 마법이라도 날릴 셈이었다.
“
으아.”
남자는 작게 소리를 냈다가, 기겁하곤 스스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의 이름
은 이한일. 요람 길드의 최정예 중 하나로 추적, 은신에 특화된 능력을 지닌
정보 요원이었다.
‘미치겠네.’
처음부터 지현우를 쫓은 건 아니었다. 원래의 목표는 지선우였다. 하지만
그는 모종의 이유로 병원에 입원한 상태였고, 그래서 그의 추적도 잠시 멈
췄다. 그 상황에서 지현우가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건 뭔가 있다!’
“
그런 생각에 한일은 지현우의 뒤를 따랐다. 그쪽은 하늘을 날아가는 터라
따라잡기 무척 힘들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뒤를 쫓는 데 성공했다! 성공이야
했는데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저 거대한 드래곤은 본 적 있다.’
뉴욕의 무작위 포털 사건 때 모습을 드러냈던 드래곤이었다. 워낙 덩치가
큰 탓에 생존자가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인류의 적. 당연히 흥미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길드장인 자윤도 여
차하면 스스로 판단해서 움직이라 했으니, 한일은 여기 남아서 저들을 지켜
보기로 했다.
‘그랬는데 이게 무슨 일이람.’
드래곤은 포효하고, 히드라가 울부짖는다. 그리고 처음 보는 인간이 방패를
들어 지현우의 공격을 막고 있었다.
‘단순한 테이머는 아닐 거라고 판단했지만.’
테이밍 된 몬스터 없이도 강하다. 거리가 어느 정도 있음에도 느껴지는 힘
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사용하는 힘도 범상치 않다.
‘우리 편 맞겠지?’
그런 의문이 들 정도였다.
‘가만있어선 안 된다.’
지금은 지현우가 우위에 있었지만, 상대는 여럿이다. 하나라도 빠져나갔다
가는 큰일이 생긴다. 여기서 전속력으로 달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이
많이 사는 도심이다.
생각을 정리한 한일은 허리춤에 찬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요람 길
드에 도움을 요청했다.
*
도진이 병실을 떠나고, 가준은 가장 우려했던 상황을 맞이했다. 선우가 눈
을 떠 버린 것이었다. 눈을 뜬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주변을 둘러보는 것
이었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사람은 지금 여기 없었다.
“당신이 왜 여기 있습니까?”
선우는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여기 있냐니. 병실에 있으면 당연히 그거지.”
대충 둘러대려고 했지만, 닿아오는 시선이 따갑다.
“그게 뭡니까?”
“간호.”
순간 병실에 정적이 흘렀다.
“풉.”
이어 알베르크가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리 웃긴지 연신 큭큭거린다. 그
에 비해 미리엘은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뚱한 얼굴로 서 있기만 할 뿐이었
다.
“당신이 제 간호를요?”
“왜 할 수도 있지!”
“헛소리 말고 형은 어디 있습니까?”
“잠시 화장실 갔어.”
“화장실요?”
선우의 시선이 병실 내부의 화장실로 향했다. S급 각성자인 그는 그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감방 알아차렸다.
“아니, 외부의 화장실. 부끄럽다나, 뭐라나.”
시선의 온도가 점점 더 내려갔다. 이제는 실제로 추운 것 같기도 했다. 가준
은 어색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그러니까 말이지.”
“알베르크.”
가준이 제대로 답을 하지 않자 선우가 이번에는 알베르크에게 물었다.
“현우는 티아매트를 잡으러 갔어.”
알베르크는 선뜻 진실을 알려 주었다.
“야!”
가준이 버럭 소리를 질렀으나 알베르크는 태연했다.
“그걸 왜 말해!”
“비밀로 해 달라는 소린 안 했잖아?”
“안 해도 척하면 척이지!”
저놈의 마족. 틀림없이 일부러 말했다.
“에이, 어떻게 거짓말을 해? 마족은 진실된 종족이라고.”
알베르크의 말에 이번에는 미리엘이 기가 차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헛소리!”
“정말인데.”
“네가 거짓말을 잘하건 말건 상관없어. 그보다 형은 어디로 간 거지?”
선우는 서슴없이 링겔 바늘을 뽑아 내고는 침상에서 내려섰다.
“야, 너 아직 환자야!”‘
가준이 외쳤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대로였다.
“전 멀쩡합니다.”
폭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멀쩡하대! 미리엘, 너도 말해 봐.”
그러자 미리엘이 귀찮다는 듯이 말을 내뱉었다.
“당분간은 쉬는 게 좋을 거다. 임시로 눌러 놓은 거니 언제 또 폭주할지 몰
라.”
“들었지? 널 치료한 사람이 한 말이다. 들어, 좀!”
“난 사람이 아닌데?”
“적당히 넘어가!”
“그걸 어떻게 적당히 넘어가? 천족 보고 인간이라고 하는데.”
“아오, 융통성 없긴.”
가준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 와중에 선우는 환자복 차림새로 창문에 다가갔다.
“이리로 나갔군.”
“그래, 그건 맞는데. 어디 있는지도 모르잖아. 한도진이 데리러 갔으니 일단
넌 쉬어.”
“한도진?”
뒤늦게야 가준은 아차 싶었다. 안 그래도 한도진 때문에 폭주했는데, 다시
그 이름을 입에 담다니. 실수했다.
“
어디야.”
“내가 알려 주지.”
아까는 귀찮다며 뒹굴던 녀석이 갑자기 생각을 바꿨다. 아마 흥미를 느꼈기
때문일 테지. 가준은 머리가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알베르크와 지선우만 보낸다고?’
그런 끔찍한 일은 두고 볼 수 없었다. 분명히 큰 사고를 칠 게 틀림없었다.
가준도 종종 사고를 치곤 했지만, 저들은 그 정도로 멈출 리 없었다. 처음으
로 사고를 치는 입장에서 말리는 입장이 되니 너무 힘들다.
과거에 부길드장이 말릴 때 좀 더 얌전히 말을 들을 걸 그랬다. 새삼 부길드
장에게 미안함을 느끼며 가준은 손을 들었다.
“그래, 갈 거면 차라리 다 같이 가자.”
그게 나을 것 같았다.
“좋아. 그럼 지금 출발해 볼까?”
느긋하게 누워있던 알베르크가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그리고는 열린 창문
너머로 훌쩍 뛰어내렸다. 이어서 선우가 뛰어내리고, 미리엘이 그 뒤를 따
랐다.
“시발, 문이 있는데 왜 다 창문으로 나가고 지랄이야.”
가준은 욕을 하면서 창문을 넘었다. 바닥에 내려서니 이미 셋은 저 멀리 이
동하고 있었다.
“
차 차가 있잖아!”
욕을 하면서도 가준도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S급 각성자쯤 되면 자
동차보다 빨리 달리는 것도 가능했다. 장시간 달리기엔 수지타산이 안 맞아
서 그렇지.
‘그러니까 차를 타지!’
왜 다들 달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분위기상 같이 달리고 있었지만, 절로 한
숨이 나왔다.
“ ,
*
그렇게 넷이 병원을 출발할 무렵, 도진은 현장에 도착했다. 어두웠던 밤은
하늘에 뜬 헬기의 빛으로 밝아져 있었고, 주변에는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었
다.
“주민분들은 대피하시길 바랍니다! 위험하니까 그리로 들어가지 마세요!”
대피하는 와중에도 호기심이 왕성한 사람들이 들러붙었으나, 경찰은 단 한
명도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각성자는 들여보내 주는 모양이었지만, 확인에
시간이 걸린다.
그걸 확인한 도진은 그림자를 타고 바리케이트를 뛰어넘었다. 그리고 좀 더
달리자 거대한 몬스터가 보였다. 그 앞에서 몬스터와 마족을 막아서는 현우
도!
당장이라도 이름을 소리쳐 부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자칫 잘못하다
가 외려 다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대신 도진은 현우를 보조하는 걸
택했다.
밤이라 더욱더 강해진 그림자가 주변을 물들이며 번져나갔다. 무시무시하
게 크기를 부풀린 그림자는 곧바로 티아매트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거
대한 드래곤을 묶어 두기는 쉽지 않을 일이었지만, 그래도 해내야 했다.
‘하나씩 수를 줄여야 해.’
“크르르륵!”
열심히 공격을 피하며 마법을 날리던 티아매트가 멈칫했다. 그리고 하필 리
비와 카이가 막지 못한 공격이 그녀의 목덜미를 스쳐 지나갔다.
“캬아악!”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허공에 피가 튀었다. 이어진 공격은 히드라가 자신의
머리를 희생해서 막았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히드라는 머리가 반도 남아 있
지 않았다.
“와오.”
어둠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을 뻔했네.”
내내 쓰러져 있다가 이제야 몸을 전부 회복한 바카디였다.
“오랜만이야?”
바카디가 도진에게 손을 들어 보이곤 돌진했다. 지금 상황을 보니 도진이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 같았기에, 그를 막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도진은 바
카디의 공격을 피하면서 집요하게 티아매트만을 노렸다.
아무리 강해도 바카디는 인간이다. 그들 선에서 정리를 할 수 있다는 소리
였다. 하지만 티아매트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걸어 다니는 재앙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도심에서 구르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피해를 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 현우가 티아매트를 죽이길 바라는 것도 있었으니.
도진은 그에 따라 움직일 뿐이었다.
108.
‘
죽는다.’
이대로라면 죽는다. 티아매트는 생전 처음,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현우의 공격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중간부터 다른 이의 방해가 들
어오고 있었다. 그 때문에 수시로 몸이 덜컥덜컥 멈춰 섰다.
히드라인 카이가 방어해 주는 것도 이제 한계다.
‘이대로 끝낼 순 없어!’
위기에 처한 건 티아매트뿐만이 아니었다. 내내 여유롭던 리비의 태도도 변
했다.
“이거 생각보다.”
리비가 혀를 찼다. 그는 방패를 내려놓더니 자리를 이탈했다. 그리고는 곧
바로 멀리 떨어진 수풀을 향해 달려갔다.
설마!”
도망치는 건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 현우는 잽싸게 그의
뒤를 따랐다. 다리에 마기를 두르고 속도를 높여 간신히 따라잡을 수는 있
었으나, 리비는 이미 목적지에 도착한 상태였다.
“잡았다.”
리디는 숨어 있는 사람을 그대로 공격했다. 내내 가만 놔두길래 신경 쓰지
않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현우는 필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여기서도 마기를 쓰면 행동은 좀 더 쉬워
지겠지만, 잘못하다가는 사람이 다친다. 그렇기에 힘을 억누르고 몸으로 때
웠다.
그 탓에 팔꿈치에 길게 그인 상처가 생겼다. 그래도 사람은 살렸으니 다행
이다. 물론 그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리비의 공격이 현우를 스치고 그
에게도 닿았기 때문이었다.
현우는 정신을 잃은 사람을 뒤에 두고 숨을 몰아쉬었다.
‘곤란하네.’
현우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뭐, 상관없나.’
마계에 있을 때도 방해라면 질릴 정도로 받았다. 이정도로는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다시 티아매트를 공격하려 했지만, 하지 못했다. 갑자기
리비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
능글맞은 얼굴이 흘러내리듯 사라지고, 단정한 얼굴이 드러났다. 반짝이는
금발에 깊은 파란색의 눈동자, 조각상 같은 얼굴은 무척이나 익숙했다.
“레온!”
“기왕이면 계속 리비로 상대하고 싶었지만, 변장한 상태로는 조금 버거워서
요.”
레온은 가볍게 숨을 내뱉고는 웃어 보였다.
“이제 편하네요.”
그리 말하며 다시 방패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현우는 그처럼 태연할 수가
없었다.
레온, 그는 가디언 길드의 길드장으로 현 세계 각성자 협회의 협회장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말했다. 혼란의 시대, 그는 인류의 희망이라고. 그가 정의를
내세웠기에 다른 이들도 그 뒤를 따를 수 있었던 거라고 하였다.
그런 이가 어째서?
“어째서?”
의문이 소리가 되어 나갔다.
“그렇게 물으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어째서, 어째서냐. 그건 제
가 처음부터 마족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 레온은 가상의 인물에 불과한 것
이죠.”
일부러 레온으로 변장해서 인간들 틈에 혼란을 일으키려는 속셈일 수도 있
잖아. 내가 널 어떻게 믿지?”
“진실입니다.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하진 않습니다.”
그러면서 어디선가 검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레온이 주로 사용하는 무기였
다.
“믿지 못하겠다면 레온의 기술이라도 보여 드릴까요?”
검이 빙그르르 돌더니 환한 빛을 뿌렸다. 거기까지만 해도 알 수 있었다. 리
비는 레온이다.
“그래, 그렇다 치자. 이제 와서 정체를 밝히는 건가?”
“아까도 말했지 않았습니까? 싸우는데 버거워졌다고요. 리비라는 껍질은
단순히 외모만 바꾸는 게 아니거든요. 힘의 파장까지 바꾸기에 이만저만 불
편한 게 아닙니다.”
“아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그런 게 아냐.”
현우는 레온을 가리켰다.
“내가 네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건 어떻게 수습할 셈이지?”
“그 문제는 간단합니다. 자, 반대로 묻겠습니다. 당신이 제 정체를 알았습니
다. 정확히는 저기 있는 한도진도 알아차렸겠군요. 그래서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이 사실을 협회에 알리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겠지.”
“
다른 사람들이 믿어 줄 것 같습니까?”
그제야 레온의 뜻을 알아차린 현우는 이를 아득 물었다. 지금까지 세상의
평화와 정의를 위해 앞장서 온 레온이 마족이라니. 대부분은 듣자마자 농담
하지 말라고 웃어넘길 것이다. 어쩌면 화를 내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
“제가 쌓아 온 신뢰는 대단히 두텁습니다. 그게 겨우 인간 둘의 증명으로 깨
질 것 같습니까?”
레온도 믿는 바가 있으니 본래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보다 언제까지 말싸움만 하고 있을 겁니까? 2차전을 시작해야죠. 이번
에는 쉽지 않을 겁니다.”
자신만만한 모습의 레온이 앞으로 나섰다.
“그건 이쪽이 할 말이야.”
정체를 증명할 수 없다면 이 자리에서 그대로 죽여 버리는 게 낫다. 그렇게
생각한 현우 또한 사나운 표정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
*
진짜 여기까지 달렸네, 미친놈들.”
가준은 바리케이트 앞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미친놈들은 이미 바리케이트
를 넘어 안쪽으로 달려갔다. 남은 건 도가준과 당황한 경비원뿐이었다.
‘이미 주변 통제는 들어갔고.’
“
바리케이트 안쪽에서 각성자들이 모이고 있었다.
‘저기 있는 드래곤을 죽이기 위함이겠지.’
하지만 저기엔 이미 현우가 버티고 있을 것이다.
‘보자, 어떻게 하는 게 제일 좋은가.’
오래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현우는 그들 중에서도 가장 강했다. 거기에 알
베르크, 천족인 미리엘, 조금은 못미덥지만 지선우가 있다. 여기서 사람이
더 붙는 건 오히려 방해만 된다.
‘만약 그때 봤던 마족이 있다면 알베르크가 상대할 테니까.’
다른 이들이 현장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게 나을 것이다. 그렇기에 가준
은 경비대에게 물었다.
“여기 책임자가 누구지?”
“누구십니까?”
“나 몰라?”
가준은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 가준 님!”
“그래, 도가준이다. 그래서 여기 책임자가 누구라고?”
“접니다.”
지키고 서 있던 사람의 뒤쪽에서 자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는 혼
자가 아니었다. 언제나 같이 다니는 아윤을 제외하고도 한 명이 더 있었다.
“최무혁.”
“오랜만입니다.”
헌터관리국의 최무혁이었다.
“정부에서 여긴 무슨 일이실까?”
“시민의 안위를 위협하는 일이니 당연히 정부가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드래곤의 시체가 탐난 건 아니고?”
그 말에 무혁은 가준을 불쾌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답이 없는 걸
보니 그 비슷한 명령을 받고 여기 있는 모양이었다.
“일단 자윤. 나랑 잠시 이야기 좀 하자.”
“네.”
가준은 사람이 드문 곳으로 자윤을 이끌었다. 아윤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
뒤를 따랐다.
“상황이 어떻게 된 거냐?”
“그걸 제가 굳이 알려 줘야 합니까?”
그 정도는 알려 줄 수도 있지! 어차피 지금 드래곤과 싸우는 사람이 너네
길드 사람은 아니잖아.”
“알고 계셨습니까?”
“뻔하지, 너네 길드 사람이었으면 이렇게 돌입 시간을 길게 잡을 리가 없지.
너네 누군지도 알고 있지?”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이 녀석들 지금 드래곤과 싸우는 사람이 현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일단은 사람 하나를 보내서 지켜보는 중이에요.”
아윤이 말했다.
“어떻게 돼 가고 있대?”
“격렬하게 전투 중이랍니다. 그런데 저희 쪽 사람도 중간부터 연락이 끊겨
서 타이밍을 보던 차였습니다.”
“돌입은 됐어.”
“네?”
“이미 그쪽으로 지선우가 갔다. 더 사람을 붙였다가는 되레 방해만 될 거
다.”
“
그걸 어떻게 압니까? 지선우는 병원에 입원했다고 들었는데, 지금 그런 사
람이 간다고 크게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건 또 언제 조사했대?”
기가 차다는 듯이 묻자 자윤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저흰 요람 길드입니다.”
“누가 몰라?”
상황이 골치 아프게 돌아간다. 자윤의 얼굴을 보니 쉽게 설득이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시간이라도 끌어 볼까? 아니면 전부 재워 버릴까? 고민
하는데 갑자기 귀가 아플 정도로 커다란 비명이 들려왔다.
“뭐야!”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니 드래곤이 몸부림치고 있는 게 보였다.
“가 봐야겠습니다!”
가준이 미처 잡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오.”
앞서 달려 나간 자윤을 잡기 위해 가준도 달려 나갔다. 이런 역할은 정말 싫
지만, 그래도 현우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러자면 지금 다른 각성자들
의 돌입을 막아야 했다.
“내가 미쳤지.”
“
사람에 빠져 이렇게 변할 줄은 몰랐다.
‘일단은 시간을 벌자.’
가준은 달리는 속도를 좀 더 높였다.
*
헌터 관리국과 요람 길드는 상황이 급박함을 깨닫고 힘을 합치기로 하였다.
그렇게 하여 모인 각성자들을 이끌고 자윤과 무혁은 드래곤이 보이는 방향
으로 향했다.
“난 최선을 다했다.”
너덜너덜해진 가준은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사이에 다른 이들
이 현우를 도와 상황을 해결했으면 했다. 그러나 상황은 생각과는 다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드래곤은 사라진 상태였다. 대신 그 자리에는
바카디의 시체와 죽어가는 히드라 하나가 남아 있었다. 드래곤은 깊은 상처
를 입긴 했지만, 살아서 도망갔다 하였다.
자윤은 안도인지, 아쉬움인지 모를 숨을 내뱉고는 현장에 남은 사람에게 말
을 걸었다.
“그나저나 대단하십니다. 겨우 네 명이서 드래곤을 상대하셨으니까요.”
지현우와 지선우, 한도진 그리고 한 사람이 더 있었다.
과찬이십니다.”
레온. 가디언 길드의 길드장이었다. 어째서 이 시간에 한국에 와 있느냐는
의문은 남아 있었지만, 그마저도 금방 사라졌다.
그만큼 레온은 신뢰가 가는 사람이었으니까.
“
109.
바카디의 시체를 수습하고, 빈사 상태에 빠진 히드라를 구속했다. 거대한
몬스터를 구속할 만한 도구가 없기에 일단은 각성자 여럿이 지키고 있기로
했다. 그 사이 관련 아이템을 날라 올 생각이었다.
다행히 상황을 전해 들은 헌터 관리국은 적극적인 협조를 약속했다. 거기에
요람 길드의 길드원들이 더해지니 상황은 빠르게 수습되었다. 그러나 움직
이면 움직일수록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게 느껴졌다.
지현우, 지선우, 한도진, 레온. 같이 힘을 합쳐 적을 상대했다고 보기에는
특유의 느낌이 나지 않는다. 그보다는 무리가 나뉜 느낌이었다. 지현우와
한도진, 지선우가 뭉쳐 레온과 대치하는 듯 보였다.
그걸 알아본 이는 무혁뿐만은 아닌 듯했다.
“하, 씨발.”
현우는 평소와 다르게 사나운 표정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도진은 담요를 받
아가 그런 현우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그리고는 달래듯 등을 토닥인다. 그
래도 화가 가라앉지 않는지 간간이 욕설이 튀어나왔다.
선우는 그런 둘을 보며 기이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그가 가진 형제에 대
한 집착을 생각하면 그 또한 이상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둘을 갈라 놓을
줄 알았는데.
“제가 도와드릴 건 없습니까?”
자윤과 이야기 중이던 레온이 무혁에게 물어왔다.
“배려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혹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들을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그 정도는 어렵지 않지요.”
레온은 눈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무혁이라고 방금 전투를 마친 사람들을 붙
잡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일은 벌어졌고, 도망친 적이 있는 이상 이
야기는 미리 들어 둬야 했다.
그렇기에 현장에 급하게 세워진 천막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각자의 이야기
를 듣고 대조해 볼 생각이었다.
먼저 지현우. 그는 이제야 좀 안정이 됐는지 차분해 보였다. 이야기를 못할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도진이 앞서 그를 가로막았다.
“현우는 아직 여파가 남은 듯하니, 대신 제가 이야기 하겠습니다.”
그 말에 무혁은 저도 모르게 선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
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현우의 이야기는 건너뛰게 되었다. 도진은 차분하게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한밤중에 바카디가 그들을 불러냈다. 그를 알게 된 현우가 가장 먼저 현장
으로 달려왔고, 이어 도진이 도착했다.
적은 넷. 바카디와 히드라, 그리고 드래곤. 거기에 한명이 더 있었다고 한
다.
“하나 더 있었다고요?”
“네.”
“인간 형태였습니까?”
“네.”
“누군지 짐작 가는 게 있습니까?”
그 부분에서 도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짐작 가는 부분은 있지만, 말할 수 없습니다.”
이후 나온 답은 그게 끝이었다. 그 사이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뭔가 싶어 살
펴보려는 순간, 도진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따라 나가니 레온의 멱살을 잡
고 있는 현우가 보였다.
“현우야!”
도진이 급히 달려가 현우와 레온을 떼어 놓았다.
“이런다고 언제까지 감춰질 것 같아?”
현우의 말에 레온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신사라고 불리곤 하는 그답지
않은 웃음이었다. 그 외에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너
다시 튀어 나가려는 현우를 한도진이 붙잡았다.
“무슨 일입니까?”
“아무 것도 아닙니다.”
레온은 옷깃을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아직 전투의 흥분이 덜 가라앉으신 모양입니다. 곧 괜찮아지시겠지요.”
그 말에 현우가 발을 굴렀다.
쿵.
커다란 소리와 함께 바닥이 울렸다.
“두고 봐.”
그 말을 끝으로 현우는 돌아섰다.
“영문을 모르겠네.”
가까이에 서 있던 자윤이 말했다.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입을 열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무혁이 도진과 이야기 하는 사이, 그도 나름대로 움직였나 보다.
“손댈 수 있는 상대도 아니고. 난처하군요.”
“ !”
그래도 동맹 상태 아닙니까? 저보단 알아보기 편하시겠지요.”
“그럴까요?”
자윤이 사람 좋은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어 부른 사람은 선우였다.
그는 평소보다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질문을 던져 보았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그게 다였다.
“지선우 씨. 나름 손을 잡은 사이 아닙니까? 일부라도 말씀해 주실 수는 없
습니까?”
그제야 선우의 입이 다시 열렸다.
“보이는 것과 진실은 다릅니다.”
“다르다고요?”
지금 이 상황이 보이는 것과 다르다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른가.
그게 궁금했지만, 선우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나마 대화 중 가장 많이 말한 건 레온 정도였다.
“뭐든 물어 보십시오.”
그는 넷 중 가장 적극적으로 나섰다.
“네, 일단 처음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십시오.”
“
알겠습니다.”
레온은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미국에서 사라진 바카디를 쫓아서 한국
으로 온 일, 한국에서 그의 흔적을 찾았으나 혼자라 난처해하던 상황에서
현우가 난입한 일 등을 듣기 좋은 목소리로 풀어나갔다.
“상대가 여럿이라 곤란했는데, 지현우 씨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예상했던 이야기, 그 이상은 없었다.
‘정말로 우연히 만나서 도움을 받은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았지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적은 몇 명이었습니까?”
“셋.”
순간 무혁은 표정이 변하는 걸 막지 못했다.
“아니, 넷입니다.”
“어떤 적이었는지 설명이 가능하십니까?”
“바카디와 히드라, 드래곤. 그리고 사람 형태의 적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협조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
여기까지 이야기는 일치했다. 미심쩍은 부분은 있었지만, 그것 가지고 레온
을 심문할 순 없었다. 그의 국적 때문이었다. 이후는 자력으로 알아내야 할
것 같았다.
다시 천막 밖으로 나온 무혁은 자윤을 찾았다.
“누구 찾아요?”
그런 무혁에게 아윤이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이자윤 씨는 어디 계십니까?”
“응급으로 실려 간 한일 씨를 보러 갔어요. 마침 백호 길드원들도 하나둘씩
도착하니 잠시 자리를 비워도 괜찮다고 판단하신 것 같아요.”
분홍빛 입술이 종알종알 떠들어댄다.
“한일 씨라면?”
“현장에서 지켜보던 저희 길드원이요. 목을 졸린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
외의 상처는 없는데 이상하게 눈을 뜨질 않는대요.”
“그걸 저에게 말해 줘도 됩니까?”
“그야 그쪽도 저희 편이잖아요?”
마지막 말은 고의적으로 작게 말했다.
‘더 조심해야겠군.’
정확히는 지선우의 편이다. 그에게 도움을 받고 있단 걸 요람 길드가 알아
낸 모양이었다. 하지만 무혁은 그 말에 섣불리 긍정하지 않았다. 아직 돌아
가는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요람 길드가 자력으로 알아낸 정보로 일부러 친근하게 접근하는 거일 수도
있었으니까.
무혁은 눈을 반짝이는 아윤을 무시했다.
뻔뻔한 녀석.’
현우는 이를 으득 갈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레온의 머리통을 부숴
버리고 싶었지만, 그래선 안 된다. 오랜만에 힘을 쓴 탓인지 술렁이는 마음
을 가라앉히기는 쉽지 않았다.
‘설마 그 상황에서 자기편을 죽일 줄이야.’
레온은 누군가가 접근 하는 걸 알자마자 히죽거리며 물었다.
“다 죽일까요? 아니면 넘어가 볼까요?”
“그렇게 놔둘 것 같아?”
“물론 그렇게 놔두진 않겠지만, 다 막지도 못하겠죠.”
레온은 평소 쓰는 정중한 말투로 현우를 조롱했다. 그러더니 바카디를 죽이
고, 티아매트를 도망시켰다. 그런 뒤, 태연하게 닥치는 다른 각성자들을 맞
이했다.
‘
다른 이들은 그런 레온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명성을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오늘의 일이 아니었으면, 현우도 그렇게 생각했을
테니까.
“후우.”
분노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레온에게 부상을 입은 사람이 걱정되기 시작했
다. 그런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걸까? 레온이 현우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러고 보니 중간에 끼어든 벌레 하나가 있었죠.”
“벌레는 너고.”
“지금 병원에 실려 갔다는데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더군요.”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냥 머리에 마기를 조금 심었을 뿐입니다. 약하기도 하지.”
말 하나하나가 짜증났다. 현우는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당신이 머리에 스민 마기를 빼낸다면 다시 일어날 수 있겠지만요. 그러진
않겠지요?”
“어째서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그야 그는 많은 걸 목격하지 않았습니까?”
“제 정체도, 당신의 힘도.”
그가 깨어나면 곤란해지는 건 자기뿐만은 아닐 거란 소리였다.
“그리 쉽게 알아차릴 수는 없어.”
“알아요. 그러니 지켜보는 눈이 있단 걸 알면서도 가만 뒀던 거겠지요. 하지
만 의심이란 건 조금만 불을 붙이면 커지는 것도 순식간이랍니다.”
레온은 그 말을 남기고는 정부에서 나온 사람을 따라 장소를 이동했다. 이
제 그는 국빈 취급을 받으며 고급호텔에서 편하게 쉴 것이다. 실상 이 일을
벌인 사람은 그인데도.
속이 답답했다.
“현우야.”
“알아, 형. 아는데.”
현우는 애써 분노를 억눌렀다. 그리고 저 멀리서 서 있는 동생을 바라보았
다.
‘선우에게 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분노가 앞을 가리는 바람에 늦게 알아차렸다. 현우는 나눠 주는 담요를 하
나 더 받아들고 선우에게로 다가갔다.
“선우야.”
“형.”
돌아보는 얼굴이 창백하다.
더 쉬어야 하는데 왜 나왔어.”
“쉬라고?”
선우의 목소리가 날카롭다.
“형이 이러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쉬어?”
“선우야?”
“형은 언제나 그래. 내가 형에게 소중한 존재가 맞긴 해?”
“당연히 소중하지. 너는 내 하나뿐인 가족인 걸.”
“그러면 이래선 안 되지.”
단정하던 얼굴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를 보는 현우의 가슴도 같이 무
너져 내렸다.
“
110.
선우는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 넘겼다. 급히 달려오느라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무리를 해서 그런가 가슴이 조여 왔다.
“내가 잘못했어.”
떨리는 목소리로 현우가 잘못을 빌었다.
“형이 뭘 잘못했는데.”
“네 곁을 떠나선 안 되는 거였는데.”
그거뿐이라고 생각해?”
그러자 현우는 입술을 꾹 깨물며 입을 다물었다. 선우는 방법을 조금 달리
하기로 했다.
“형.”
선우는 현우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손을 자신의
가슴에 댔다.
“나 아파.”
“많이, 많이 아파?”
당황한 현우가 조심스럽게 선우의 가슴을 더듬었다. 어디가 아픈지 알아내
려는 것처럼 섬세한 손놀림이다. 선우는 그게 기꺼웠다. 다른 이들 앞에서
는 무너져 내릴 수 없었지만, 형 앞에서는 가능했다. 그 모습이 다른 이들의
눈에 어떻게 보이건 상관없었다.
‘나는 이렇게 형을 생각하는데.’
형은 왜 그러지 못하는 걸까.
동그란 머리를 내려다보는 선우의 시선이 들끓었다.
“내가 살펴볼게.”
그러기를 잠시, 조금 떨어져 있던 도진이 끼어들었다. 선우는 표정으로 그
에게 자신의 의사를 표시했다.
“
꺼져.’
더는 형과 자신의 사이에 끼어들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도진은 꿋꿋하게
접근해 왔다.
“이런 쪽은 내가 더 잘 알아.”
“정말?”
“부모님이 의사셨거든.”
부모님이 의사지, 당사자가 의사인 것도 아니지 않은가. 뻔한 이야기인데도
현우는 뒤로 물러났다. 도진을 믿어도 단단히 믿는 것 같았다.
“난 형이 봐 줬으면 좋겠는데.”
“제가 더 잘 볼 겁니다.”
“의사 면허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차라리 진짜 의사에게 보이고 말지
요.”
둘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도진은 어떻게든 성질을 억누르려는 게 보였지
만, 선우는 자신의 감정을 망설임 없이 표현했다.
“선우야, 그럼 의사 선생님 불러올까?”
이런 사고가 벌어지면, 가장 가까운 병원에서 구급차와 의사가 차출된다.
그 의사가 마침 현장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아니, 오시게 만드는 건 좀 그렇지. 나랑 같이 가자, 형.”
‘
그래.”
현우는 선우가 내민 손을 덥석 잡았다. 순순히 의사에게 가서 진료를 받으
려는 동생이 기특한 것이었다. 보지 않아도 그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나 날 소중히 여기면서.’
왜 저런 이상한 남자와 사귀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떼어놓아야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 올리는데, 레온과 눈을 마
주쳤다. 그는 선우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어딘지 음험한 기색이 느껴
지는 웃음이었다.
‘수상한 작자.’
뒤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상황을 제대로 알지는 못했지만, 현우의 행동으로
인해 레온이 수상하단 건 알고 있었다. 아무 이유 없이 다른 사람의 멱살을
잡을 그가 아니었으니까.
레온에게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그건 형에게 물어보면 되니까.’
일단은 형이 다른데 신경을 돌리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
현우는 선우를 의사 앞으로 데리고 갔다. 각성자가 많아서 그런지 의사 또
한 각성자 전문 의사였다.
피로하신 것 같습니다. 큰 이상은 없어 보이지만 혹시 모르니 검사는 필요
할 것 같습니다.”
의사의 진단은 그러했다.
“가까운 병원에 자리가 있을 겁니다. 미리 연락해 둘까요?”
“이미 머무르고 있는 병원이 있습니다. 혹시 전화를 빌려도 될까요?”
현우의 폰은 싸움 통에 부서졌다. 그래서 빌린 전화로 원래 있던 병원에 연
락을 넣었다. 그쪽에선 갑자기 사라진 환자 때문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일단 사정을 설명하고 다시 돌아가겠노라 이야기했다. 가는 길에는 구급차
를 탈 예정이었다.
“형, 먼저 타.”
현우가 타자마자 선우가 이어 탔다. 그러고는 그대로 구급차 문을 닫아 버
렸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할 일이 있을 거야. 지금은 우리끼리 가는 게 나아.”
그러고 보니 가준도, 도진도 각 길드의 길드장이다. 선우의 말이 맞는 것 같
았다. 현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선우를 침상에 눕혔다. 미리엘이 걱정되긴
했지만, 알베르크가 알아서 데리고 다닐 것이다. 그 정도 눈치는 있을 테지.
“
현우는 선우와 함께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의사와 간호사가 사나운 시선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환자가 뛰쳐나가면 어쩝니까?”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중간에 뛰쳐나가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원래 있던 병실로 둘을 안내했다. 다시 선우가 자리에 눕고,
링거를 꽂았다.
“형, 손잡아 줘.”
선우는 서슴없이 어리광을 부렸다. 그리고 현우는 그를 전부 받아들여 주었
다. 동생을 속상하게 한 만큼 애정을 쏟아부었다.
그렇게 하룻밤이 지나고, 다시 아침이 되었다.
“와, 우리 버리고 가니 좋았어?”
알베르크가 심술궂은 얼굴로 현우의 볼을 찔렀다.
“손가락 부러지고 싶지?”
“그건 아니고.”
손가락을 회수한 알베르크는 소파에 늘어졌다. 이어 창문으로 들어온 미리
엘은 눈살을 찌푸리며, 반대쪽 소파에 앉았다.
내가 저 멍청한 천족을 데리고 다니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누가 멍청하다는 건가! 멍청한 건 그쪽이겠지!”
미리엘은 사납게 눈을 치뜨고는 알베르크를 타박했다.
“여전히 시끄럽구만.”
마지막으로 가준이 합류했다. 그는 둘과는 다르게 제대로 문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오나?”
“그럼?”
현우의 단호한 태도에 가준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상처 받겠네.”
“도진 형은?”
“아직 현장 마무리 중. 그보다 TV를 틀어 봐. 지금 한창 뉴스를 할 시간이니
까.”
그러면서 본인이 리모컨을 사용해 TV를 튼다.
『속보입니다! 어젯밤 12시경, 드래곤으로 분류된 몬스터가 도심에 나타났
습니다. 몬스터는 미국에서 지명 수배된 바카디와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
다른 채널로 돌려보아도 똑같은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현재 바카디는 사망한 상태이며, 히드라는 사로잡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드래곤의 행방은 아직 묘연합니다.]
『대한민국도 더는 빌런의 공격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
해 관련 논술을 쓰신 박사님과 이야기 나눠 보겠습니다.』
『드래곤은 사라졌다고 하는데요. 지금도 찾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그 커
다란 드래곤을 어째서 아직 찾지 못하는지 의문이 듭니다.』
난리가 났다.
TV, 신문, 인터넷. 모든 곳에서 간밤에 있었던 일을 떠들고 있었다.
“원래 이렇게 소식이 빨리 퍼지던가?”
“외곽이라도 일단은 도심이었으니까. 게다가 공로를 세우신 레온 님께서 여
기저기 인터뷰를 해 대고 계셔서 말이지.”
가준이 현우의 물음에 답했다.
“레온이?”
“그래, 그러고 보니 묻고 싶었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바카디는 죽
어 있지, 히드라는 반 죽어 가지, 드래곤은 사라졌지. 그런 상황에서 적도
하나 더 있다며. 누구야?”
“리비.”
저번에 만났던 마족?”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맙소사. 다친 데는 없어?”
“인제 와서? 염려 마. 다치진 않았으니까.”
문제는 부상 여부가 아니었다. 레온의 정체였다.
“만약에 말이지.”
“만약에?”
“레온이 적이라면 어떻게 할래?”
“그 레온이 적이라고?”
가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한참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좀 곤란한데? 일단 적이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은 적은 거지?”
“손에 꼽을 만큼.”
“그러면 대적하기 힘들어. 그동안 레온이 쌓아 온 일을 생각하면 그를 빌런
으로 몰기만 해도 공격당할 거다.”
정의를 내세운 가디언 길드를 세우기까지, 레온은 사회에 수많은 공헌을 했
다. 그 때문에 그가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 받은 상만 해도 수십 개.
그만큼 그에 대해 호의를 가진 사람이 많다는 소리였다.
“
그렇겠지?”
“그렇지. 이거 큰일이네.”
“넌 이런 말을 믿는 거야?”
“네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까. 아, 한도진이 왜 현장에서 벗어나지 않으
려고 했는지 이제 이해되네.”
가준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레온의 곁에 붙어 있으려는 거다.”
그 말에 현우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감시하려는 거지.”
“위험한데.”
“위험하지. 일단은 나도 뭔가 해 봐야겠네.”
“뭘 하려고?”
“대한민국은 대한민국대로 뭉쳐야 하지 않겠어? 일단 지선우는 아직 환자
인 것 같으니 다른 길드라도 모아 봐야지.”
가준이 대답했다.
“말하려고?”
“
아니, 그건 아직 말하지 말아야지. 괜히 말했다가는 역효과만 일어나. 그럼
난 나가 본다.”
가준은 그말만을 남기고 바람같이 사라졌다. 현우는 선우의 손을 잡은 채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현장 인터뷰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인터뷰 대상 중에는 도진도 있었다.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모습이 피곤해 보인다. 그도 쉬게 해 줘야 하
는데. 안타까움에 가슴이 일렁였다.
“
111.
레온은 호텔의 최고층 방을 통째로 차지하고서 느긋하게 움직였다. 그 과정
에서 그가 홀로 있음을 확인한 헌터관리국에서 경호원을 붙여 주겠다 했으
나 거절했다.
“제 한 몸 추스르긴 어렵지 않습니다.”
“그건 압니다만, 경호원이 있는 편이 움직이기 편하실 겁니다.”
이미 레온의 일은 뉴스를 탔다. 그 때문에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기자들이
호텔 밖에서 카메라를 쥔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한번 들러붙으면 얼
마나 거머리 같은지 무혁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레온은 그 호의를 끝끝내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한국에 있는 동안엔 평화 길드에 도움을 받기로 했거든요.”
그러면서 태연하게 저 멀리 서 있는 도진을 가리켰다.
“그렇습니까?”
“네, 미국에서 인연이 있었으니 저도 이쪽이 편할 것 같습니다.”
레온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 말을 전부 듣고 있던 도진은 어두운 표정
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약속은 한 적 없었다. 모든 것은 레온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떠들어 대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도진은 레온의 말을 부
정하지 않았다.
이건 어떻게 보면 기회였다. 레온을 바로 옆에서 지켜볼 기회 말이다. 도진
은 표정을 바꾸고 레온에게 다가가 옆에 섰다. 입매를 느슨하게 하고 순하
게 눈을 뜬다. 예전의 그처럼 말이다.
레온 씨의 말이 맞습니다. 모든 건 평화 길드가 책임지기로 했습니다.”
“그렇습니까?”
대답은 그리 했지만, 무혁도 쉽게 물러날 수는 없었다. 원래라면 레온의 경
호는 선현 길드가 맡았어야 했다. 그래야 물밑에서 지선우와 손을 잡기로
한 무혁에게도 이득이 생긴다. 그런데 지선우가 입원하면서 일이 꼬였다.
무혁은 도진과는 아무런 선이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없으리란 법도 없지.’
요즘 정보부의 영진과 국장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 그렇기에 아군은 많을수
록 좋았다.
무혁은 부드럽게 웃고 있는 도진을 바라보았다. 일단은 그와 대화할 틈을
잡아야 할 것 같았다.
“
무혁은 잠시 외부를 정리한다며 나갔다. 그러자 1층의 넓은 홀에는 레온과
도진, 그리고 일을 위해 간간이 돌아다니는 직원만 존재하게 되었다.
“무슨 속셈이지.”
도진은 웃는 얼굴 그대로 싸늘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뭘 말입니까?”
“날 가까이 두는 이유.”
아하, 그게 궁금했습니까?”
레온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마 눈치 챘을 것 같지만 애매하게 위협적인 적은 옆에 두는 편이 나으니
까요.”
옆에 두고 살펴보겠단 소리였다. 불쾌한 소리였지만, 도진이 여기 있는 이
유도 레온과 같았다.
발과 연결된 그림자가 스물스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빠른 속
도로 레온의 그림자로 넘어갔다. 지금 레온의 몸을 여기에 묶어 둔 것이다.
“이러면 그쪽도 곤란해지지 않습니까?”
레온은 이런 상황에서도 유들유들하게 말했다.
“그렇지.”
도진은 그림자를 다시 거둬들였다. 그 과정에서 일부는 노골적으로 남겨 두
었다. 레온에게 자신이 지켜보고 있음을 잊지 말라고 경고하기 위함이었다.
“그럼 저는 슬슬 자야겠군요. 인터뷰는 날이 밝으면 더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레온이 방으로 돌아가고, 도진은 아래층을 빌렸다. 더불어 평화 길
드의 길드원 중 일부도 오라고 일렀다. 이번에도 현희가 길드원을 이끌고
바람같이 달려왔다.
“레온 씨의 경호를 하게 되었단 말입니까?”
“
네
“세상에. 이건 좋은 소식이군요.”
현희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당연히 선현 길드가 나설 것으로 생각했는데 자
신들이 맡게 되었으니 그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평화 길드가 세계 각
성자 협회의 협회장인 레온을 경호하게 된다면 국내외적으로 더욱 입지를
다질 수 있을 것이다.
‘실상은 저리 기뻐할 일이 아니지만.’
현희에게도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그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욕심이
많다, 그러니 비밀을 제대로 지킬지 장담할 수 없었다.
경호 인력의 배치를 끝낸 도진은 방으로 들어갔다. 혼자 남게 되어서야 생
각을 정리할 시간이 생겼다. 그림자는 여전히 레온에게 붙어 있었다. 떼낼
생각조차 하지 않는 듯했다.
‘자만심인가, 자신감인가.’
아마 자신감 쪽이겠지.
‘더 강해져야 한다.’
조금이라도 더 강해져야 현우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테니까. 도진은 마른
세수를 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쪽 편도 더 늘려야 한다.’
“ .”
국내의 5위권 내 길드가 모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더 많은 힘과 결속력
이 필요하다. 적어도 국내의 사람들은 하나로 뭉쳐야 했다.
5위권까지의 길드야 이미 안면이 있으니 뭉치는 건 어렵지 않겠지만, 문제
는 그 아래의 길드들이었다. 평소 그들은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높은 길
드들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어떻게 설득시켜 합류시킬
것인가.
‘뿐만 아니다. 헌터 관리국도 이대로 놔둬선 안 돼.’
현재 국장은 욕심이 많다. 그러면서 각성자와 포털에 대해 더 알아볼 생각
은 하지 않는다. 현상유지를 하며 각 길드들을 갈라놓는 게 그로서는 이득
이 더 크기 때문이었다.
‘국장을 바꿔야 한다.’
마땅한 인물은 생각나지 않았다.
‘최무혁을 설득해 볼까.’
내부의 사정은 그가 더 잘 알 것이다. 선현 길드와 손을 잡은 것 같긴 했지
만, 잘 설득하면 이쪽에도 손을 내밀지 않을까.
고민이 많은 밤이었다.
*
어디 가는 거지?”
“
깊은 밤, 밖으로 나서는 알베르크에게 미리엘이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질
문을 들은 알베르크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내가 어디 가는지도 네게 보고 해야 하나?”
미리엘에게 가까이 다가간 알베르크가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동안 내가 너무 상냥했지? 그러니 이렇게 기어오르는 것이겠지.”
“헛소리.”
미리엘은 인상을 찌푸리며 알베르크의 손을 뿌리쳤다. 태연하려 애쓰고는
있었지만, 지금 알베르크는 평소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외양은 같았
지만, 이상하게 무섭게 느껴졌다.
“내가 무엇을 하건 신경 쓰지 마. 너는 그냥 평소처럼 잠드는 거다.”
속삭이는 목소리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려 했지
만, 쉽지 않았다.
“자, 이제 잠들렴.”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미리엘은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알베르크
는 그런 미리엘을 잡아서 복도의 의자에 앉혔다.
간단한 암시였다. 만약에 미리엘이 조금만 더 강하거나, 나이가 많았으면
통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이제 그는 적당히 자고 일어나면 병실로 돌아갈
터였다.
“그럼 나는 내 일을 해 볼까?”
알베르크는 복도에 난 창문을 열었다. 몸이 하나 빠져나갈 정도의 크기는
된다. 거기로 몸을 꺼내 그대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가준이 봤다면, 또
문을 두고 창문을 쓴다고 뭐라고 했을 모습이었다.
사뿐히 바닥에 내려앉은 알베르크는 그대로 느긋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목적지는 여기서 멀지 않았다.
목적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났다. 커다랗고 고급스러운 모양의 호텔이
었다. 외부에는 내부에도 사람이 많았으나, 그를 피해 움직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알베르크는 호텔 최고층에 도달했다.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어두운 방 안에 서 있던 남자가 친근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하지만 알베르
크는 그에 맞춰 줄 생각이 없었다.
“용건.”
그러자 남자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와 달빛이 흘러들어오는 창가에 섰다.
그 모습은 여러 번 봐서 익숙했다.
레온, 그였다.
“성미도 급하십니다. 천천히 이야기해도 좋지 않습니까?”
“아하, 그럼 정말로 느긋하게 이야기해 볼까?”
알베르크는 레온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그에게 익숙한 녀석의 그림자가 붙
어 있음을 말이다. 더불어 그 그림자가 엿듣는 걸 막기 위해 결계도 쳐져 있
었다. 그런 상황에서 천천히 이야기하자니. 농담도 정도가 있는 것이다.
“저런.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럼 용건만 빠르게 이야기하지요. 알베르크 님.
저희와 손을 잡지 않으시겠습니까?”
“미쳤냐?”
알베르크는 기가 찬 표정으로 레온을 쳐다보았다. 공원에서 그가 숨어 있던
곳을 지나치며 나중에 한번 만나자고 하여 호기심에 찾아왔다. 그런데 괜히
찾아온 모양이었다.
“아니요. 저는 정상입니다.”
“아니, 아무래도 미친 모양이다. 인간 세상을 정복하자 할 때부터 알아봤
다.”
알베르크의 말에 레온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말을 돌렸다. 그 부분에 대해
서는 더 말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알베르크 님은 지현우란 인간을 사랑하시지요?”
“그래서?”
알베르크는 삐딱하게 서서 레온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방해되는 인물이 많지 않습니까? 저희가 방해되는 이들을 전부 처
리해 드리겠습니다. 대신 알베르크 님은 저희에게 조금의 도움만 주시면 됩
니다.”
싫다면?”
“하하, 그럴 리가요. 비록 별종이라는 소리를 들어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
서 마족의 심리를 모르진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희생을 할 수
있는 게 마족이지만, 반대로 모든 것을 빼앗을 수도 있는 것도 마족이 아닙
니까?”
천천히 작은 머리가 기울었다.
“인간은 오래 살지 못합니다. 마계에서야 마기 때문에 늙지 않았다고 해도,
여기는 인간 세상입니다. 함부로 마기를 꺼내서 사용할 수 없지요. 그는 금
방 늙어갈 테고, 젊음을 사라질 겁니다.”
“늙어도 현우는 귀여울 거다.”
“그래도 이왕이면 한창 때 데려가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제가 세상이 그
를 미워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모두가 그를 경원시하고 싫어하게끔요.
이 세상에 어떤 미련도 남지 않게.”
말이 길다. 그렇지만 그 말을 들은 알베르크는 평소와 다르게 망설였다.
“
112.
레온의 말에 끌리는 자신을 느낀다. 확실히 그가 제시한 방법은 효율적이
다. 지금 이대로 현우를 설득하여 마계로 데리고 가기엔 얼마만큼의 시간이
소모될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망설여진다.
‘어째서?’
그는 알 수 없었다.
뭘 망설이시는 겁니까?”
그러게 말이다. 지금 뭘 망설이고 있는 것인가. 지금 이렇게 좋은 기회가 왔
는데 말이다. 나락으로 떨어진 인간만큼 설득하기 좋은 존재는 없다. 그건
현우도 다르지 않으리라.
처음에는 원래 살던 세상과 사람들을 그리워하겠지만, 그도 잠시일 것이다.
알베르크는 마계에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고, 그걸 아낌없이 쏟아부을 생
각이었다.
“좋아. 그렇다면 이름을 걸고 맹세하도록 하지.”
이름을 건다는 건, 목숨을 건다는 것과 같다. 절대로 어길 수 없는 계약이
되는 것이다. 아직 레온에 대한 신뢰가 없으니 이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았
다.
“기꺼이.”
그걸 알면서도 레온은 웃으며 그를 받아들였다. 족쇄는 자신만 차는 것이
아니기에.
“
*
요람 길드와 협력 관계인 병원. 그 가장 위층의 병실에는 한일이 묵고 있었
다. 외상은 별로 없는데 아직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걸 보니 무언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어느 의사도 헌터도 원인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한일 씨는 어때?”
아윤이 병실에서 나오는 자윤에게 물었다.
“여전해. 혹시 몰라 치유 계열, 저주 계열 힐러를 전부 불렀지만, 일어날 생
각을 하지 않아.”
“유능한 사람이었는데, 안타깝다.”
“그러게.”
한일은 요람 길드에서 밀어주던 신예였다. 그만큼 추적과 은신에 특출난 재
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다니,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지현우를 만나 봐야 할 것 같은데.”
“이미 진술은 헌터관리국과 협상해서 전해 받았잖아. 혹시 뭔가 더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게 나만은 아니지 않아?”
자윤은 새침을 떠는 동생의 코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악! 아프다고!”
“살살했어.”
“그래도 아파! 하여간 지 씨 형제를 만나야 하는 건 맞아. 난 그들이 헌터관
리국에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을 거라고 믿지 않아.”
“그럼 그렇지.”
아윤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만 믿을 것 같진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너무 궁금하네.”
“하지만 그쪽 병원은 지선우가 출입을 막아 놨어. 가도 만날 수 없을 거다.”
“어휴. 우리 동맹 같은 거 아니었나? 어째 매번 모르고 넘어가는 것 같은 기
분이 드네.”
아윤의 투덜거림에 자윤도 동의했다. 그렇게 둘이서 조곤조곤 의견을 나누
고 있는데, 갑자기 길드원 한 명이 다급히 달려왔다.
“무슨 일 있습니까?”
자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어보니 길드원이 헐떡거리며 말했다.
“레온, 레온 님이 병원에 방문하셨습니다!”
“네? 설마 가디언 길드의 레온이요?”
“네! 지금 입원해 있는 한일 씨를 만나고 싶으시답니다.”
자윤과 아윤은 순간 서로 마주 보았다. 접근이 어려워서 포기하긴 했지만,
현장에 있었던 건 지현우와 지선우뿐만이 아니었다. 레온도 있었다.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아니다. 제가 모시러 갈게요.”
아윤이 잽싸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어찌 보면 이건 기회였다. 새로운 정
보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 기회 말이다.
둘은 빠르게 움직여 레온을 마중 나갔다.
“안녕하십니까?”
하얀색 제복을 걸친 금발의 청년은 무척이나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때맞춰
쏟아지는 아침 햇살 아래 그의 모습은 마치 마왕을 물리치러 가는 용사처럼
보였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고 나서야 레온은 본론을 이야기했다.
“여기 이한일 씨가 입원해 있다고 들었습니다.”
“한일 씨를 아시나요?”
아윤의 질문에 레온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조금 압니다. 누군가를 추적하길래 잠시 대화를 나눴거든요. 그 과정에서
이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아윤은 레온의 안색을 조심스럽게 살피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어떻
게 하면 그에게서 정보를 이끌어 낼 수 있을까.
“그런데 입원 이야기는 어디서 들은 겁니까?”
헌터관리국에서 들었습니다.”
최무혁인가? 아니, 그는 아니다. 그는 헌터관리국의 정보를 함부로 밖에 내
돌릴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답은 뻔했다.
‘국장.’
그가 강대국의 헌터에게 잘 보이기 위해 모든 걸 내주었겠지. 하여간 쓸모
없는 작자다.
“지금 그는 어떻습니까?”
사실을 말할까? 감출까? 자윤이 고민하는 사이, 아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원인 불명의 이유로 깨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아윤은 레온의 명성을 생각해 보았을 때, 돌려 묻는 건 효과가 없다고 여겼
다. 그래서 직설적으로 말을 꺼냈다.
“혹시 짚이는 부분이 없으신가요?”
“으음.”
레온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없지는 않습니다만, 일단 그건 이한일 씨가 일어나야 확실하게 말할 수 있
을 것 같습니다.”
역시나! 레온은 뭔가 알고 있었다. 아윤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이제 문제
는 한일을 어떻게 깨우느냐인데. 다른 길드에도 도움을 요청해 봐야 할 것
“
같았다.
“안타깝네요.”
“그렇지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괜찮다면 제가 그 부분을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
“마침 제 친우인 아나이스가 일본에 있다는군요. 일본에서 비행기를 타면
한국은 가깝지 않습니까?”
아나이스. 백의의 천사. 세계에서 손꼽히는 힐러로 다소 독특한 이력을 가
지고 있었다. 그녀는 좀 더 많은 사람을 제대로 치료하고 싶다는 이유로 각
성 후 의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그 능력을 가지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많
은 사람을 돕고 있었다.
더불어 가디언 길드의 길드원이기도 하다.
“그녀를 불러오겠습니다.”
지나칠 정도의 호의였다. 수상한 구석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 그렇게 해 주시면 감사하죠!”
“아닙니다. 이 정도쯤이야.”
레온은 태연한 표정으로 겸양을 표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아나이스가 한
국에 도착했다.
안녕하세요오!”
아나이스는 말끝을 늘어트리며 인사를 했다. 곱슬곱슬한 적색의 머리카락
에 얼굴에 콕콕 박힌 주근깨가 인상적이다. 외모만 봐서는 백의의 천사라기
보단 말괄량이처럼 보였다.
“여기 환자가 있다면서요?”
“그래요, 아나이스. 다른 의사와 힐러가 치료를 해 보았지만, 차도가 없다고
합니다.”
레온의 말에 아나이스가 소매를 돌돌 걷어붙이며 주먹을 쥐었다.
“염려 마세요! 제가 치료할 테니까요!”
그리고 레온과 아나이스는 한일의 병실로 들어갔다. 혹시 몰라 자윤이 따라
들어갔지만, 아나이스는 착실하게 치료를 할 뿐이었다.
“휴우. 나쁜 기운이 머리에 침투해 있었어요. 그걸 몰아냈으니 곧 깨어날 거
예요.”
아나이스의 말대로 한일은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떴다. 그녀가 물러난 자
리를 메운 의사들이 그에게 달려들어 상태를 확인했다.
“더 이상 손댈 필요 없이 완벽한 상태입니다.”
입원도 더는 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역시 아나이스!’
“
뒤늦게 합류한 아윤이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멍하니 눈을 깜박거리던 한일
이 다급히 말을 꺼냈다.
“말, 말해야 하는 게 있습니다.”
“완치됐다지만, 혹시 모르니 조금 더 쉬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게 있습니다.”
“뭔가요?”
한일은 메마른 입술을 축이고서는 말을 이었다.
“그날 밤.”
“그날 밤 뭔가를 보았나요?”
“제가 본 걸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진중한 태도로 몸을 바로 세웠다.
‘지금?’
아윤은 곤란해졌다. 왜냐하면 지금 이 병실에 있는 건 아윤과 자윤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저희는 돌아갈까요?”
아나이스가 레온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도와준 사람에게 이리 대하면
섭섭할 만도 한데 여전히 말투가 발랄하다.
다른 길드의 일을 엿들을 수는 없지요.”
“그래요. 그게 맞는 거죠.”
너무나도 산뜻한 태도였다. 그 때문에 외려 아윤이 당황해 버리고 말았다.
“그,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아요.”
아무런 대가 없이 도와주고 돌아선다. 그러고도 아쉬워하지 않는다. 아윤이
라면 절대 하지 못할 행동이었다. 그녀는 그제야 사람들이 아나이스를 백의
의 천사라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니, 저는 제 이야기를 전부 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막 돌아서려는 레온과 아나이스를 한일이 잡았다. 평소 그라면 생각지도 못
할 행동이었다. 요람을 위해 만들어져, 요람을 위해 일하던 그가 아니었던
가.
“이건 모두 알아야 하는 이야깁니다.”
한일은 단호하게 말했다.
“모두 알아야 하는 이야기라고요?”
“네.”
그렇게 대답한 한일은 자윤이 말리기도 전에 이야기를 시작했다.
“
그날 밤, 저는 지선우를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일은 현우가 병원에서 빠져나가는 걸 보았고, 그를 따라가다
가 레온과 만나 합류하게 되었다. 둘은 드래곤 가까이 접근하는 데 성공했
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 사람은 지현우였다.
“드래곤 쪽의 일행은 넷이었습니다. 바카디, 히드라, 드래곤, 그리고 정체
모를 사람 하나. 반면 반대편에는 지현우 씨 혼자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지현우를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드래곤이 주는 공포에
몸이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레온이 나서서 바카디를 다른 곳으로
유인했다.
그래도 남은 적은 셋이다. 게다가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존재였다. 한일은
어떻게 해야 할까 망설였다. 전투 쪽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지현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테이밍한 몬스터는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지현우는 지지 않았다. 외려 이상한 힘을 사용해 가며 적을 압박
해 나갔다.
“이상한 힘이요?”
“네, 무척이나 이상했습니다. 그걸 보고 있자면 마치 누군가가 영혼의 밑바
닥을 들여다보는 느낌이 났습니다. 공포에 잡아먹히는 기분.”
“
한일은 몸을 바르르 떨었다.
“레온 씨는 그걸 목격하지 못했습니까?”
“저는 떨어진 곳에서 바카디와 싸우느라 보지 못했습니다.”
“그건, 그건 정말 이상한 힘이었습니다. 마치. 마치!”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한일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람보다는 몬스터에 가까워 보였어요. 뭐라고 해야 하나.”
“마족처럼.”
레온이 속삭이듯 말했다.
“맞습니다. 마족처럼!”
허황된 이야기였다.
113.
마족이라니. 지현우를 만난 시간이 길진 않았지만, 그런 기색은 조금도 보
이지 않았다. 어쩌면 한일이 뭔가 착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자윤과 아윤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어쩌지?’
‘당장은 묻어 두는 게 나을 것 같아.’
눈빛만으로도 뜻은 통했다. 적어도 지현우와 만나 사실을 확인하기 전까지
이 이야기가 새어 나가선 안 됐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지금 이 이야기를 들은 게 그들뿐만이 아니
라는 것이었다.
먼저 입은 연 이는 자윤이었다.
“아무래도 사건 직후라 한일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치료까지 해
주셨는데 이런 말은 죄송스럽습니다만.”
“한일 씨는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저희는 나가서 이야기할까요?”
자윤의 말을 아윤이 이으며 자연스럽게 아나이스와 레온을 밖으로 밀어 냈
다. 하지만 레온과는 달리 아나이스는 그 자리에서 버티고 서 있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한일 씨의 이야기를 더 들어 보고 싶은데요.”
“아나이스 님.”
자윤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건 내부 사정입니다.”
“내부 사정인 건 알고 있지만, 때로는 더 많은 사람이 알아야 하는 일도 있
답니다. 그리고 한일 씨의 지금 상태는 완벽해요. 저는 제가 치료한 환자의
상태를 명확히 알 수 있어요.”
아나이스의 주장에 레온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이런. 아나이스가 그렇다고 이야기한다면 저도 물러날 수는 없겠군요.”
처음 둘이 선뜻 물러나려고 했을 때, 한일의 입을 막았어야 했다. 자윤과 아
윤이 난처해하는 상황에서도 한일은 끝도 없이 떠들어 댔다. 흥분한 듯 두
서없었으나 중요한 내용만은 명확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는 마족의 힘을 사용합니다!”
현우는 마족의 힘을 사용한다. 마치 바카디처럼 말이다. 모든 이야기를 들
은 레온은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말했다.
“이거 심각한 이야기군요. 일단은 현우님 에게도 이야기를 들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레온 또한 자윤들이 생각했던 것과 똑같은 결론을 내렸다. 합리적인 판단이
었다.
‘그걸 아는데도 왜 불안한 거지?’
아윤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손으로 누르며 레온을 바라보았다. 그는 정의로
운 사람이다. 현우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합당하면 그에 맞게 행동할 것이
다. 그걸 아는데도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
*
늦은 아침, 현우는 보호자 침대에서 눈을 떴다. 선우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
져 있었다. 그래도 얌전히 쉬어서 그런지 어제보다는 안색이 나아졌다.
현우는 잠든 선우의 뺨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최근 이런저런 일에 치이면
서 동생에게 많은 관심을 주지 못한 것 같았다. 이해심 많고 착한 아이였는
데.
도진과의 관계를 납득시키려면 좀 더 천천히 접근해야 할 것 같았다.
“당분간은 좀 쉴까.”
의사가 말하길 폭주의 후유증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한동안
은 요양을 해야 된다고 했으니, 이번 일만 수습하고 동생과 쉬러 가자.
다른 사람은 전부 떼어 놓고 둘이서만 편안하게 지내는 것이다. 커다란 별
장도 필요 없다. 자그마한 펜션이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선우의 얼굴을
매만지고 있자니, 그가 눈을 떴다.
“형.”
“그래, 선우야.”
“옆에 있었구나.”
“아픈데 옆에 있어야지.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 먹고 싶은 건?”
“황도 캔.”
선우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요구했다. 선우가 더 작을 때 가끔 열이 많이 오
르면 슈퍼에서 황도 캔을 사 와서 따 주곤 했다. 예전에 부모님이 그러했듯
이.
현우는 추억을 되새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 사 올게.”
황도 캔이라면 병원 내 편의점에 있을 것이다. 이렇게 둘 사이에 추억이 많
은데 어째서 선우는 불안해하는 걸까.
현우는 황도 캔을 사서 병실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병실에 딸린 작은 주방
에서 캔을 따고 그릇을 꺼냈다.
“형.”
먹기 편하게 백도를 조각내고 있자니, 선우가 현우를 불렀다.
“왜?”
다정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내미니 선우가 TV를 가리켰다.
“뉴스.”
“뉴스?”
현우는 잠시 그릇을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갔다. 계속 같은 소식만 반복하기
에 꺼 뒀는데, 선우가 다시 켠 모양이었다.
『새로운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곧바로 현장과 연결하겠습니다.』
이어 화면이 바뀌고 기자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여러분, 얼마 전에 있었던 드래곤과의 전투 목격자가 나타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한일. 요람 길드의 길드원이라고 합니다. 지금 인터뷰를 위해 나
와 계시는데요. 직접 이야기를 들어 보겠습니다.』
“
그러면서 그는 환자복을 입고 선 남자에게 마이크를 들이댔다.
『안 됩니다! 지금은 인터뷰를 할 수 없습니다!』
몇몇 사람이 나와 기자들을 막아섰지만, 그들은 절대 비켜서지 않았다. 마
치 먹이를 노리는 피라냐처럼 환자복을 입은 남자만을 노리고 뛰어들었다.
『그만!』
그 소란 속에서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그만하십시오.』
잠시 현장이 조용해졌다.
『모두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그리 말하는 남자의 눈은 이상하리만치 퀭했다. 그리고 그쯤 되어서 현우는
깨달았다. 저 남자는 그날 밤, 레온에게 공격당했던 그 남자였다. 이름이 한
일이라고 했던가.
‘깨어났구나.’
그를 돕기 위해 나서려 했는데, 스스로 일어나다니. 어지간해서는 마기를
제거하는 게 힘들 텐데 이상한 일이었다. 현우는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
다.
『저는, 저는 진실을 알았습니다!』
『무슨 진실 말입니까?』
『지현우! 그에 대한 진실이요!』
자신에 대한 진실? 현우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형?”
뒤에서 선우의 목소리가 들리는데도 돌아볼 수 없었다.
『그는 마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타락한 다른 각성자처럼 말입니다! 겉으로
는 정의로운 척하지만 실상은 우로보로스의 일원이었던 겁니다!』
‘무슨 개소리람?’
어처구니가 없는 소리였다.
『그는 빌런입니다!』
한일은 크게 소리쳤다. 그리고 그 내용은 고스란히 방송을 타고 전국에 퍼
져 나갔다. 뒤늦게 나온 자윤이 기자들을 물리고, 한일을 끌고 들어갔지만
이미 늦었다.
“형?”
선우가 재차 현우를 불렀다. 그제야 현우는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선우야.”
“형, 저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또 내가 모르는 이야기야?”
“일단 진정해 봐. 내가 말하지 않으려고 한 건 아냐.”
현우는 선우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그럼?”
“그냥.”
알리기 싫었다. 마기를 사용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평탄하지 않았다. 그
기간 동안 현우는 고통받았고, 그만큼 괴로워했다. 그걸 선우가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뿐이었다.
“그냥? 형은 내가 아무것도 못 하는 어린애로 보여?”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왜 이렇게 감추는 게 많아? 왜 내가 모르는 게 이렇게 많아?
처음에는 형이 온 것만으로 만족해서 모르는 척하려고 했어.”
“알아.”
“그런데 갈수록 나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 가.”
그런 게 아닌데.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속이 바짝 타들어 가는 느
낌이었다.
“
그런 게 아니야.”
“그런 게 아니면!”
둘이 실랑이를 벌일 때였다. 멀리서부터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하
나가 아니었다.
“누군가 오는군.”
선우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간호사나 의사의 발소리가 이럴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저들은 누구란 말인가. 추측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
다.
‘헌터관리국.’
매번 길드에 트집을 잡지 못해 안달이던 그들이 이제야 기회를 잡았다. 선
우는 링거를 뽑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알베르크와 미리엘은 여기 있
지 않았다.
중간부터 거슬렸던 터라 길드원을 시켜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 놨다.
“형.”
선우는 현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드드드득.
그와 동시에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휴대폰이 떨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연락
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우가 그를 보며 망설이자, 선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
폰은 버려.”
현우는 망설이다 선우의 손을 잡았다.
“
돌입합니다. 하나, 둘, 셋!”
숫자세기가 끝나자마자 헌터관리국의 각성자들은 병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이닥쳤다. 하지만 그 안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를 본 무혁은 짧
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좀 더 상황을 두고 보자던 무혁의 말은 국장에게 막혔다. 그는 누구보다 빠
르게 현우를 잡아들이자 하였고, 그 때문에 각성자들은 뉴스가 뜬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으로 달려와야 했다.
“자리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침대를 손으로 쓸어 본 각성자가 보고를 올렸다.
“그래, 그럼 추척해 보도록 하지.”
말은 이렇게 하지만, 선우가 잡히질 않길 바랐다. 아직 제대로 받은 것도 없
는데 잡혀선 곤란하다. 게다가 새로 손잡기로 한 평화 길드의 도진도 둘을
보호해 주길 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지금은 수색을 질질 끄는 수밖에 없었다. 많이 끌 필요도 없었다.
조금만 끌어도 둘은 알아서 안전한 곳으로 도망칠 곳이다.
“
무혁은 그리 생각했다.
114.
푸른 나뭇가지 위에서는 작은 새가 지저귀고, 창으로는 햇살이 스며든다.
집은 작았지만, 필요한 물건은 전부 있었기에 딱히 문제는 없었다.
‘아니, 문제는 그게 아니지!’
현우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엉겁결에 선우에게 끌려와 이 작은 집
에 갇히게 된 지 이틀. 여기엔 TV도 라디오도 폰도 없어 바깥의 소식을 알
수 없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책을 읽거나 뒹구는 것뿐이었다. 새삼 마음 편하게 봐 왔
던 막장 드라마가 그리워졌다. 그동안 몸이 자극에 길들여진 모양이었다.
한참 동안 머리를 엉망으로 만들다가 발버둥을 쳤다. 그러다 침대 위에서
떨어졌으나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완전히 굴러떨어지기 전에 선우가 붙
잡아 주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아, 형?”
여기 오고부터 선우는 다시 예전 모습을 되찾았다.
“선우야.”
“왜?”
“그게 그러니까.”
“아, 점심? 점심은 고구마 그라탱이야. 형이 좋아했잖아.”
그래, 고구마 그라탱. 좋아하긴 했지.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우리 여기 이렇게 있어도 돼?”
“안 될 건 뭐람?”
“바깥은 난리가 났을 것 같은데?”
차라리 튀지 말고 만나서 해명을 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난리가 났겠지. 하지만 괜찮아, 형. 형한테는 내가 있잖아.”
선우는 그렇게 말하며 빙그레 웃었다.
‘웃는 모습이 귀엽긴 하다만.’
지나친 현실 도피`는 좋지 못하다. 이쯤 되어 현우는 슬슬 바깥일을 알아봐
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선우야, 혹시 폰 있어?”
“있어.”
“있구나. 그럼 형이 그걸 잠시만 봐도 괜찮겠니?”
“싫은데?”
“싫구나.”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이다. 이내 자리에
서 일어난 선우는 작게 달린 주방으로 들어갔다.
고구마 그라탱의 마무리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선우가 만든 고구마 그라탱
은 무척이나 맛있었다. 원래도 맛있는 고구마에 치즈를 얹었으니 말해 무엇
하랴.
‘문제는 지금 상황이지.’
선우는 보란 듯이 폰을 꺼내 식탁 위에 두었다. 그러니 고구마 그라탱을 먹
으면서도 자꾸 시선이 그리로 향한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낚아채서 인터넷 뉴스를 보고 싶지만, 그랬다가
는 선우가 가만있지 않을 테지. 현우는 한숨을 삼켰다.
그때부터였다. 선우는 현우를 시험하기라도 하려는 듯, 종종 폰을 잊고 다
녔다. 때로는 소파에, 때로는 식탁 위에, 화장실에 두기도 했다. 그리고 어
느 순간부터는 외출까지 하기 시작했다.
‘만지고 싶다.’
손이 근질근질했다. 한일이 그 후 뭐라 더 말했는지도 궁금하고, 도진이 뭘
하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심지어 가준의 일까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그렇게 또다시 며칠이 지나고, 현우는 외출에서 돌아온 선우의 손을 꾹 붙
잡았다.
“잠시 이야기 좀 해.”
“……좋아.”
둘은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선우야. 이렇게 있어도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거 알지?”
현우의 말에 선우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아니, 모든 건 내가 해결할 거야. 형은 여기서 편히 쉬고 있으면 돼. 이제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내가 가져다줄게.”
“뭐든?”
“뭐든.”
“노트북도?”
“어렵지 않지.”
선우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인터넷이 되는 노트북도?”
“그건 조금 어렵네.”
“그럼 인터넷이 되는 휴대폰.”
“그것도.”
“인터넷이 되는 패드.”
이번에 선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답은 대충 짐작이 갔다.
안 된다는 거겠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머리를 굴리는데 선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보다 형은 나에게 할 말이 그런 거뿐이야? 나는 형에게 듣고 싶은 게 많
은데.”
“어떤 거?”
“정말 마기를 다룰 수 있어?”
“……응. 하지만 그걸로 사람을 해쳐 본 적은 없어. 그건 그저 마계에서 살
아남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야.”
“그리고?”
가만히 듣고 있던 선우가 또 물어 왔다.
“그리고?”
“그거 외에 또 감추는 건 없어?”
감추고 있는 거라면 잔뜩 있다. 하지만 그걸 선우에게 전부 말하고 싶진 않
았다. 마음이 여린 동생이 자신이 겪은 고통에 슬퍼할까 봐, 언제까지고 감
추어 두고 싶었다.
“말해 줘.”
그렇지만 지금 현우는 깨달았다. 선우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이다.
‘
형 감추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야.”
알고 있다. 그럼에도 감추고 싶었다.
“그러니 이야기해 줘.”
어리기만 하던 동생은 이제 자라서 현우의 벽을 두드려 부수려 하고 있었
다.
“알았어. 대신 너도 이야기해 줘.”
“나도?”
“그래.”
현우도 선우가 겪어 왔던 모든 이야기를 알고 싶었다. 남에게 듣는 이야기
가 아닌 본인이 직접 하는 이야기를. 형제는 처음으로 제대로 마주 보았다.
그리고 짧지 않은 밤을 이야기로 지새웠다.
“힘들었겠다.”
“형이야말로.”
“아니, 네가 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이야기하다 웃음을 터트렸다.
“둘 다 힘들었구나.”
“그러게.”
“ ,
그런데 선우야. 정말 도진 형은 안 돼?”
“안 돼. 그런 사람에게 형을 맡길 순 없어.”
“도진 형이 어때서?”
현우가 입술을 삐죽 내밀자 선우가 그 입술을 자연스럽게 꼬집었다.
“몰라서 물어? 형에 비해 많이 부족하잖아.”
“형에 대한 평가가 너무 높은 거 아냐?”
“아니거든? 난 냉정하게 판단한 거야.”
아닌 것 같은데. 현우는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선우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내가 어떤 사람을 사귀길 원하는데?”
“아름답고 우아하고 예쁘고 현명하고 상냥하면서도 따뜻한 사람.”
“도진 형이네.”
“아니거든?”
둘은 잠시 투닥거리다 다시 늘어졌다.
“그보다 형의 이야기대로라면 레온이 마족이라는 건데.”
선우는 잠시 레온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
어려운 일이네.”
“그렇지. 그래도 어떻게든 해 봐야지. 외부에서 내 평은 어때?”
“그럴 리 없다는 의견이 반, 수상하다는 의견이 반. 그런데 날이 갈수록 수
상하다는 의견 쪽에 힘이 쏠리고 있어. 일단 한일이라는 사람이 너무 떠들
어 대고 있고, 거기에 레온도 은근슬쩍 거들고 있으니까.”
절로 주먹이 쥐어지는 소리였다.
“어떻게 해결할 순 없을까?”
“이쪽에서도 나름 언론을 끌어들이고는 있는데, 상대가 상대라 쉽진 않지.”
자윤과 아윤, 가준이 이쪽 편을 들어 주고 있으나 미국의 레온을 상대로 하
는 건 무리였다. 국내의 의견은 어떻게 바꾼다 치더라도 외국이 남아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형의 신변 양도를 요청했어.”
“미국에서? 왜?”
“바카디와 같은 부류라면 우로보로스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고. 히드라가 잡혀 있긴 하지만 그쪽은 어떻게 해도 입을 열지 않고 있거든.
정신 방벽도 높아서 정신 공격도 통하지 않아.”
“그렇단 말이지.”
역시 이대로 가만있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
좋아, 그럼 움직여 보자!”
“형이 직접 움직이려고?”
“응. 왜? 안 돼?”
“난 말리고 싶은데.”
선우는 현우가 듣게 될 나쁜 이야기들을 경계했다. 형은 스스로를 강하다
여겼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었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상처를 입을 수
있는 노릇이니까.
“괜찮아, 선우야.”
“아니, 그런 말로 넘어갈 일이 아니야. 이것만은 계속 반대할 거야.”
“난 그렇게 나약하지 않아.”
“그래도 안 돼.”
선우는 고집을 부렸다. 현우는 어떻게든 그 고집을 꺾어 보려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익숙한 얼굴이 집을 찾아왔다.
“좁군.”
미리엘이 말했다.
“네 날개를 접으면 되지 않을까?”
“
알베르크가 태클을 걸었지만, 미리엘은 꿋꿋했다.
“내가 왜 굳이 날개를 접어야 하지?”
그러면서 보란 듯이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나중에 현우한테 혼나기 전까지
는 말이다.
“두눈이도 왔네? 점박이도, 케로도.”
현우는 오랜만에 보는 몬스터들도 반갑게 맞이했다. 그리고 한 명 더 손님
이 존재했다.
점박이에게 붙어 있던 그림자가 스르륵 커지더니 사람의 모습이 되었다.
“현우야.”
도진이었다. 그를 발견하자마자 선우는 냅다 공격을 날렸으나, 도진에게 명
중하지는 못했다. 그가 그림자로 얼음덩어리를 삼켜 버렸기 때문이었다.
“쥐새끼가 붙어 왔었군요.”
“쥐새끼는 저보단 훨씬 작습니다만.”
장신의 남자 둘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사이 알베르크는 총총걸음으로
다가와 현우의 팔을 끌어안았다.
“둘 다 시끄럽지?”
“아니, 전혀.”
시끄럽기는커녕 제법 보기 좋았다. 저기서 살기만 빠진다면 더 좋을 텐데.
아쉬운 일이었다.
“떨어지십시오.”
“떨어져!”
싸우다 알베르크를 발견한 도진과 선우가 이번에는 타깃을 돌렸다.
“싫다면?”
그런 둘을 약 올리려 한 알베르크였으나, 현우가 나서서 말렸다.
“그만해. 여기서는 싸움 금지!”
그제야 시끄럽던 방이 조용해졌다.
알던 사람 셋과 천족 하나, 마족 하나, 몬스터 셋은 원을 그리며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좁다니까!”
미리엘이 다시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다들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리고 본격
적으로 이야기를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115.
이야기의 주제는 금방 정해졌다.
“어떻게 하면 누명을 벗을 수 있을까?”
도진이 입을 열자 미리엘이 손을 들어 올렸다.
“마족은 천족으로 막아야 하는 법. 내가 천족을 부르겠다.”
“기각!”
“어째서?”
“마족과 천족은 사이가 나쁘잖아. 괜히 불러왔다가 이곳에서 전쟁을 벌이면
힘들다.”
현우의 말에 미리엘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마족이 활개치고 있지 않은가.”
“천족도 마족과 크게 다르지 않은 종족이라고 들었거든?”
“그건 오해다. 음흉하고 사악한 마족과 천족을 비교하지 마라.”
미리엘은 한참 동안 천족의 장점에 대해 열변을 토해 냈다. 하지만 그를 진
지하게 듣는 이는 없었다.
“다른 의견!”
이번에는 알베르크가 툭 끼어들었다.
“지금 잡혀 있는 히드라 말이야. 걔를 확보하는 건 어때?”
색다른 의견이었다.
내가 레온이라는 녀석이라면 히드라를 죽이려 들 거다. 당장이야 입을 열
지 않은 채 버티고 있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죽은 자만큼 입이 무
거운 자는 없다.”
“그러니 먼저 빼돌려서 자백을 받아 내자는 거야?”
“그래,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그 자백이라도 있는 게 낫겠지.”
“나쁜 의견은 아니군. 히드라가 과연 쉽게 입을 열까? 싶긴 하지만.”
현우의 말에 알베르크가 씩 웃었다.
“데리고만 오면 입을 열게 만들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지.”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그러면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해. 지금 히드라는 미국으로의 이송이 결정
된 상태야.”
도진의 말에 선우가 이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송을 책임지는 길드는 가디언 길드지.”
“이송 수단은?”
“가디언 길드의 전세기를 사용한다고 해. 특성상 빌런의 이송을 자주 했기
에 관련 시설도 설치되어 있다는군.”
선우와 도진의 입에서 번갈아 가며 정보가 나왔다.
“
그럼 히드라를 탈취한다, 로 결정된 거로군?”
마지막은 알베르크가 마무리를 지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외부의 도움을 요
청할 수 없기에 여기 있는 사람들만으로 계획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 와중에 미리엘은 참여하지 않겠다고 빠졌다. 반면 알베르크는 제법 적극
적으로 참여를 주장했다.
“너무 적극적이니까 의심스러운데.”
“너무해, 현우. 날 못 믿는 거야?”
알베르크는 두 손을 턱밑에 대고 초롱초롱한 시선으로 현우를 올려다보았
다. 원래 모습이라면 끔찍했을 터이나, 지금은 미소년의 모습이다. 그렇다
보니 저런 행동도 제법 잘 어울렸다.
차마 손을 대기도 어려울 사랑스러움이었으나, 현우는 가차 없었다. 손날을
세워 그대로 머리를 내려친 것이었다.
“히잉.”
“뭐가 히잉이야! 제대로 말해!”
“현우는 냉정하군.”
알베르크가 투덜거리며 머리를 매만졌다.
“아프지도 않으면서.”
“그도 그렇지만.”
“
냉큼 손을 내리며 말하는 모습이 가증스럽다.
“좀 더 자세한 일정과 내부 지도는 내가 알아볼게.”
“그럼 나는 형과 같이 움직일래.”
도진과 선우는 경쟁적으로 의견을 내놓았다.
“도진 형, 고마워. 그리고 선우야, 넌 같이 갈 수 없어.”
“왜?”
“네 능력은 알아보기 쉽잖아.”
“능력을 안 쓰면 되지.”
“그 자리에는 레온도 있을지 몰라. 그런데 능력을 안 쓰고 해결이 될까?”
“그렇다고 형을 혼자 보낼 순 없어.”
선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혼자는 아닙니다. 제가 같이 갈 겁니다.”
“아니, 그냥 나 혼자 갈게.”
“그건 안 돼!”
“절대로 안 돼!”
처음으로 둘의 의견이 맞아떨어졌다. 그렇지만 현우는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둘 다 사회적인 지휘가 있는 사람이다. 혹시라도 들키게 되면 보통
문제가 아닌 것이다.
적어도 히드라를 이용해 레온의 정체를 밝혀내기 전까지, 둘은 끼지 않는
게 낫다. 현우는 그렇게 생각했기에 그에 관해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리고 알베르크도 있으니까.”
겉모습은 저래도 엄연히 마계 서열 1위의 마족이다. 작정하고 나서면 사람
으로서는 막아 낼 수 없었다.
“하지만 알베르크도 마기를 쓰잖아. 잘못하다가 형의 정체가 드러나면 또다
시 마족으로 몰릴 거야. 이번에 몰리면 더는 돌이킬 수 없다고.”
“주먹만 쓰게 하지, 뭐. 그럴 거지?”
알베르크는 생글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맹세하지.”
이후 도진과 선우는 현우를 설득하기 위해 애를 썼으나, 별 소용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흐르고, 흘러 히드라 이송 날이 되었다.
텅 빈 공항 안쪽의 화장실. 현우는 마스크를 쓰고 후드를 뒤집어쓴 채 폰을
툭툭 건드렸다.
연락용으로 받은 거지만, 인터넷도 된다.
제목: 정말 지현우가 마족과 손을 잡은 걸까?
제법 인기 있는 게시판에서는 현우에 대한 이야기로 한창 타오르고 있었다.
댓글
- 난 믿지 않아. 지현우가 뭣 하러 마족과 손을 잡겠어? 그리고 그는 테이머
라고!
- 테이머치고는 너무 잘 싸우지 않아? 이번에 바카디를 잡는 영상을 봤잖
아.
- 그 이유 하나만으로 마족과 연관 짓는다고?
- 그건 아니지. 드래곤과 싸울 때 마기를 사용했다잖아.
- 그걸 주장하는 건 한일이란 사람 하나뿐이잖아. 그걸 완전히 믿어도 돼?
- 하지만 그 일 이후 지현우는 모습을 감췄는걸? 결백하다면 모습을 드러내
야 하는 거 아닐까?
- 그냥 형을 아끼는 지선우가 숨겨 둔 거 아닐까? 형제애가 보통이 아니던
데.
- 앗, 그거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다른 길드들은 뭐 하는 거야? 한국
의 각성자가 위기에 처했는데 가만있는 거야?
- 그건 아냐. 내가 요람 길드의 사무원인데 여기도 요즘 한창 바빠.
가만있는 게 어때서? 애초에 마기를 사용한다면 빌런인 셈이잖아?
-아니라니까!
-
게시판은 무척이나 어지러웠다. 선우는 폰을 건네주면서 절대 다른 건 보지
말라고 했지만, 호기심이 당부를 이겼다.
‘음, 그래도 이 정도면 무난한걸?’
딱히 상처받을 정도는 아니다. 의견을 나누고 있긴 했지만, 생각보다 온건
하다.
‘일단은 오늘 일부터 해결하자.’
히드라, 카이를 빼돌린다. 이제 와서 예전의 이름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나
름 예뻐하며 지어 주었던 이름이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지. 그러
니 이름도 바꾸고 적이 된 것이리라.
[곧 가디언 길드의 전세기가 도착.]
화면에 떠오르는 문자를 확인한 뒤, 폰을 안주머니에 고이 넣었다. 그런 뒤
오른쪽 귀에 이어폰을 끼우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소리 들려?
도진이었다. 선우는 지금쯤 다른 길드의 길드장들을 만나고 있을 것이다.
히드라의 탈취, 그리고 국내 길드장들의 설득. 그게 이번 목표였다.
현우는 깊게 숨을 쉬고는 변기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미리 뜯어 둔 천장으
로 들어갔다. 길은 이미 알고 있기에 천천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움직
였다.
그렇게 히드라가 있는 방 옆까지 접근했다.
문 앞에는 헌터관리국에서 파견된 사람 몇이 서 있었다. 그중에는 무혁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 사람과는 싸워 보지 못했네.’
현우는 입술을 축이고 발아래 있는 천장을 슬며시 뜯어냈다. 그러고는 그대
로 몸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침입자를 눈치챈 각성자들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가장 먼
저 현우에게 닿아 온 건 무혁의 공격이었다.
뜨거운 불꽃이 현우에게 쏟아졌다. 그걸 손을 휘둘러 날려 버리고, 무혁에
게 주먹을 내뻗었다. 진심으로 내뻗은 주먹이었으나, 무혁은 그를 아슬아슬
하게 피해 냈다. 그리고 재차 공격하려 했으나, 현우는 그의 겨드랑이 밑으
로 몸을 빼 뒤로 이동한 뒤였다.
현우는 무혁이 돌아보기도 전에 소리를 지르려는 다른 각성자를 후려쳤다.
한 명이 기절. 이어 무전기를 들고 있는 두 번째 각성자의 목을 졸랐다.
숨이 통하지 않으니 곧 정신을 잃는다. 그사이 무혁이 다시 접근해 왔지만,
이 정도쯤이야. 현우는 연신 쏟아지는 공격을 팔다리만으로 막아 냈다.
‘이쯤 되면 소리를 지를 만도 한데.’
무혁은 아까부터 입을 다물고 있다. 그리고 현우를 문가로 몰아가고 있었
다.
미리 선우에게 들었던 대로다.
밀리듯 움직인 현우는 마지막으로 무혁의 턱에 주먹을 날리고는 문 안으로
뛰쳐 들었다. 다행히도 레온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얼굴에 주근깨가 박힌 여성 하나가 히드라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아나이스!’
힐러면서 무슨 배짱으로 앞을 가로막는지 모르겠다. 현우는 그대로 아나이
스에게 접근하여 그녀를 치워 내고자 했다. 하지만 아나이스는 손에 든 지
팡이로 공격을 전부 막아 냈다.
아무리 가볍게 공격했어도 공격을 한 상대가 현우였다. 그런데 이리 쉽게
막아 내다니. 뭔가 이상하다.
“드디어 왔군요.”
아나이스가 상냥하게 말했다.
“올 것 같았답니다.”
그러고는 입을 벌렸다. 기이할 정도로 늘어난 입꼬리가 귀 아래 걸렸다. 그
사이로 드러난 이빨은 몬스터의 것이 생각날 정도로 날카롭고 뾰족해 보였
다.
“오랜만입니다.”
그제야 현우는 뒤로 물러나며 아나이스를 노려보았다.
“넌 누구지?”
“아, 잊으셨겠군요. 하긴, 저 같은 존재를 기억하실 리가요!”
아나이스는 손을 입가에 대고 요조숙녀처럼 웃어 보였다.
“제 본명은 아이나스. 마계에서 소박하게 치료사 일을 하고 있던 마족이랍
니다. 딱히 서열에는 관심이 없어서 서열은 없습니다만.”
마계의 치료사 아이나스. 그녀는 다른 존재를 치료하는 데 관심이 많으나,
그 누구도 그녀에게 치료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치료의 방식이 괴팍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뛰고 싶어요.’
‘그러면 다리를 두 개 더 달아 주겠습니다. 더 빨리 뛸 수 있을 겁니다.’
대충 요약하자면 매드 닥터다.
116.
공항의 경비를 맡게 된 지헌은 내부를 누비는 소년 하나를 발견했다. 너무
당당하게 누비고 있는 탓에, 다른 이들도 멀뚱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누구야?”
“관련자인가?”
외양만 봐도 각성자 같아 보였다. 각성하면 대부분 외모도 더 나아지니까
말이다. 아니라면 저런 외모가 나올 리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누군지는 물어봐야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지.”
지헌은 동료 경비원과 소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지금 공항은 통제 중입니다. 신분은 알려 주십시오.”
지헌의 말에 소년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바닥
에 얼굴을 대고 있었다.
‘뭐지?’
옆을 보니 이상한 방향으로 꺾인 팔 하나가 보인다. 그건 자신의 팔이었다.
“아, 아아.”
지헌은 비명을 지르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곧바로 명치를 걷어차이며 정신
을 잃었다. 이후 다른 경비원들도 소년, 알베르크에게 달려들었다.
알베르크는 그런 사람들을 날파리라도 쳐내는 것처럼 휙휙 던져 버렸다. 그
렇게 던져진 사람들은 몸의 한 부분이 부러져 있었다.
‘이 정도면 되려나.’
적어도 놀지 않았단 증거는 될 것이다. 알베르크는 이쯤에서 손을 털었다.
제일 뒤쪽에 있던 경비원이 도망치는 걸 보았지만, 쫓지 않았다.
침입자가 있다는 걸 알려 줘야 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부
분은 현우와 얘기했던 사항이 아니다. 알베르크가 멋대로 굴고 있는 것이
다.
“슬슬 시간이 되었군.”
저 멀리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진다. 아마 레온과 그 일행일 터였다. 이제 알
베르크의 역할은 끝났다. 그는 그대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현우에게는 미안하지만.’
전부 필요한 일이었다.
아이나스는 강한 마족은 아니었지만, 상대하기 까다로운 축에 속했다. 게다
가 싸우기보다는 도망만 다녔다. 그러다 히드라에게 다가가면 공격을 한다.
척 봐도 시간을 끌려는 행동으로 보였다. 자연 초조해지는 건 현우였다.
‘안 되겠다.’
현우는 다시 마기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방 안을 빙글빙글 돌던 아이나스를
붙잡았다. 그런 후 히드라에게 다가가 그의 결박을 풀어냈다.
“허튼 생각 말고 얌전히 따라와.”
의외로 히드라는 반항 없이 얌전히 움직였다. 그렇게 모든 일이 조용히 해
결되는가 싶었다. 그때, 내내 조용하던 히드라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멍청하긴.”
뭐
“함정에 뛰어든 게 멍청하다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외부에서 수많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현우는 아이나스를 상대
하면서도 외부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거기다 도진도 주변을 살피고 있
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상대 쪽에서 무슨 수를 쓴 모양이었다.
“꺄아악!”
아이나스는 어느새 아나이스의 모습으로 비명을 질러 댔다. 외부로 통하는
유일한 창문의 블라인드를 걷자 저 아래 우글우글 모인 사람들이 보였다.
대부분이 각성자였지만, 일반인들도 끼어 있었는데 카메라를 들고 있는 걸
보니 기자 같았다.
─ 현우야!
도진이 다급히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됐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다.’
일단 마기를 거둬들인 현우는 아나이스를 놓아주었다.
“꺅!”
바닥에 떨어진 아나이스가 엄살을 부렸다. 그 엄살이 끝나기도 전에 단단히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레온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뒤에는 가디언 길드
“ ?”
와 헌터관리국의 각성자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오랜만이군요.”
레온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뭐라고 불러 드려야 할까요? 지현우 씨.”
“역겨우니까 내 이름 부르지 마.”
“역겨운 건 그쪽이죠. 바카디와 마찬가지로 마기를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
까?”
“같은 마기라도 사용 용도에 따라 다르지.”
“그렇다 해도 그 힘이 마족에서 비롯되었다는 게 달라지는 건 아닙니다.”
레온이 옆으로 살짝 비켜서며 말했다. 그 자리에는 처음 보는 남자 하나가
섰다. 안경을 쓴 지적인 외모의 남자는 헌터관리국 정보부의 이영진이었다.
“실망이군요. 지현우 씨. 그런 힘에 손을 뻗다니요. 그건 용납될 수 없는 힘
입니다. 미리 듣지 않았다면 못 믿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영진은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었다.
“우리 대한민국은 지현우 씨의 신변을 미국에 양도하는 데 동의합니다.”
어처구니가 없는 행태였다. 현우는 오늘 잡힌 셈이었는데, 당일 미국에 넘
기는 데 동의하다니. 이건 미리 말이 되어 있다는 소리 아닌가.
보통은 국내에서 먼저 취조를 할 텐데. 고국의 인물을 믿기보다 미국에 기
대는 걸 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원래 계획은 이대로 얌전히 잡혀가는 거였지만, 어쩐지 심술이 돋았다. 현
우는 주먹을 손으로 덮고 우득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당당하게 개소리를 지껄이던 영진이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싸울 생각입니까?”
“그렇다면?”
“상대해 드려야죠.”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현우는 손에 잡히는 책상을 레온에게로 던졌다.
그리고 잠시 시야가 가려진 사이, 레온에게 가까이 접근하여 주먹을 휘둘렀
다. 하지만 레온은 그리 쉽게 맞아 줄 이가 아니었다.
레온이 뒤로 물러나자마자 밖에 있던 각성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리
고 현우를 제압하기 위해 나섰으나, 미친 듯이 날뛰는 그를 쉽게 잡아 낼 수
는 없었다.
“으아아악!”
그래도 손속은 조정했기에, 화려하게 날뛴 것치곤 심한 부상자는 없었다.
나중에는 무혁과 레온, 아나이스가 힘을 합쳐서야 간신히 현우를 붙들어 둘
수 있었다.
그사이 히드라는 다시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그날, 미국으로 향하는 전세
기에 올라탄 사람은 현우 하나뿐이었다.
*
말렸어야 했는데.”
선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형이 걱정돼서 미칠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미국으로 건너가 형을 되찾아오고 싶었다.
“참으십시오.”
그런 선우를 도진이 말렸다.
“당신은 왜 그리 태연한 겁니까?”
날이 선 말이 도진을 찔러 댔다.
“……그래 보입니까?”
사실 초조하고 불안한 건 도진도 마찬가지였다. 현우가 괜찮다고 우기고,
우겨서 실행한 계획이었지만 걱정되지 않을 리 없었다. 무려 적의 내부로
들어갔으니 말이다.
“그렇습니다.”
도진은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런 건 아닙니다. 그저 저는.”
“
거기서 도진은 말을 끊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으려는 순간,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십시오.”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안으로 들어왔다.
“어때요, 계획대로 진행 중인가요?”
아윤이었다.
“네, 지금까지는 계획대로입니다.”
“그럼 저희도 빠르게 움직이죠. 미국행 비행기를 수배해 놨어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지금 어떻습니까?”
“한일 씨요?”
“네.”
아윤의 표정에 난처함을 담았다.
“어떻게든 데려와야 하겠는데, 문제는 주변에 기자와 각성자가 너무 많아
요. 지금 실종되면 여러모로 문제가 될 거예요. 그래서 상황이 좀 더 진행된
다음, 설득해서 데려오기로 했어요.”
“설득이 될까요?”
“안 되면 조금 난폭하게 나가야죠.”
한일의 이상은 자윤과 아윤도 알아차렸다. 하지만 레온이 비호하는 탓에 아
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도진과 선우에게 이번 일의 진상에
대해 듣게 되었다.
처음에는 믿지 못해 망설였지만, 이제는 그게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안다. 레
온의 행동에 이상한 점이 있음을 그들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요람 길드 내에만 존재하는 특이한 각성자를 통해 검증을 마
쳤다.
진실의 저울. 그 각성자가 가진 능력이었다. 상대가 거짓을 말하면 저울이
기울면서 타격을 입힌다. 하지만 도진도 선우도 멀쩡했다.
문제는 그것만으로는 레온이 나쁜 존재라는 걸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지나치게 많은 공적을 세워 왔기에 이 정도로는 사람들의 마
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일단 일어나요. 비행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저희가 준 폰은 단단히
챙기시고요. 모든 정보는 그리로 보낼 거예요.”
“외부로 정보가 샐 염려는 없습니까?”
“그러지 않기 위해 만든 기계랍니다. 그런 건 걱정하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아뇨. 지구를 위한 건데요. 이렇게 말하니 무척 닭살스럽고 어색하지만요.
지구방위대가 된 느낌인걸요?”
아윤이 작게 웃으며 답했다. 둘의 부담감을 덜어 주려는 생각에서 농담을
한 듯했다.
둘이 방을 나서자 밖에서는 가준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일이 있으면 나한테도 미리 말하지.”
가준이 서운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보다 미리엘과 알베르크는 어디 있습니까?”
“백호 길드의 안가에 모셔 놓았지. 그런데 이번엔 그 둘은 빼고 가려고? 데
려가는 게 도움 되지 않나?”
“믿을 수가 없습니다.”
현우는 알베르크를 믿지 않았다. 그동안 말을 잘 따라 주긴 했지만, 본질이
마족인 터라 온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최근 이유 없는 외출이 몇 차
례 있었다. 그렇기에 표면적인 정보만 알려 주고, 그 뒤에는 안가에 박아 두
라 일렀다. 더불어 미리엘을 붙여 놓으라 하였다.
아직 애송이이긴 하지만, 마족의 기척을 읽어 내는 건 인간보다 능숙하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지금 상황에서는 알베르크보다 미리엘이 더 믿을 만했
다.
“알았어. 그럼 나는 알베르크와 미리엘만 감시하면 되는 거지?”
“네.”
“따라가고 싶었는데.”
하지만 미리엘이 당신을 더 잘 따르지 않습니까?”
“그 무슨 소름 끼치는 소리를!”
가준이 손으로 팔뚝을 긁어내렸다. 하지만 도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
동안 계속 가준이 돌봐 줘서 그런지 미리엘은 그와 있을 때 마음을 더 잘 열
었다.
“
117.
영웅의 사슬. 한때 현우를 괴롭혔던 아이템이 다시 그를 속박했다. 그 상태
로 네모난 큐브 형태의 방에 갇혔다. 하지만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는 모
양이었다. 사방을 각성자가 지키고 섰다.
‘아주 작정했군.’
현우는 혀를 찼다. 그래도 이 안의 상황을 선우나 도진이 알 수 없어 다행이
다. 둘 다 자신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기에 이런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었
다.
‘후회할 거야.’
그런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하릴없이 멍하게 졸고 있자니 귓
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얌전하니 보기 좋군요.”
레온의 목소리였다. 현우는 눈꺼풀을 들어 올려 그를 노려보았다. 레온은
구속당한 현우의 맞은편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디서 내려다봐!’
몸만 자유로웠으면 두들겨 팼다.
“참 우습지 않습니까? 자신들의 적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당신을 의
심하는 사람들이 말입니다. 당신의 고국은 당신을 버렸습니다.”
“그게 뭐?”
“그렇게 추켜세우다가 순식간에 마음을 바꾼 겁니다.”
속살거리는 소리가 마음을 흔들려고 했다. 그 때문에 현우는 레이의 왜 저
러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현우가 같은 인간을 증오하길 바라는 것 같았다.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서 말입니다.”
알고 있다. 알고 있음에도 현우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애초에 현우는
사람에게 큰 기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마계에서 상황에 따라 비열해지는 사람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나약하다. 위기에 처하면 다른 사람을 희생양으로 던지는 걸 서슴지 않는
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지만, 소수에 불과했다.
그걸 알면서도 레온의 정체를 밝히고 세상을 구하려고 하는 건 모두 사랑하
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선우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도진의 웃는 모습이 보고 싶다. 가준에 이르러
서는 조금 고민했지만, 그가 불행하기를 원치 않았다. 처음에는 마음에 들
지 않아 두들겨 패긴 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친구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이 마족보다 더 사악한 것 같습니다.”
레온이 뱀같이 속살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현우는 다시 눈을 감았다. 들어서
좋은 소리는 아니었으니까.
*
갑자기 들어온 소식에 앰버는 마시던 차를 도로 내뱉었다.
“풉, 지금 뭐라고요?”
“지현우가 빌런으로 밝혀져 미국으로 이송되고 있다 했습니다.”
소식을 전하러 온 남자가 불쾌한 얼굴로 얼굴을 닦았다. 그러나 앰버는 사
과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뭔가 잘못 안 것 아닌가요? 지현우 씨는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만약 그날 현우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더 많은 사람이 바카디의 손에 죽어
나갔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중앙 본부가 제 역할을 못 하게 되었으면, 다른
지역에서 싸우는 각성자들도 큰 피해를 입었을 터였다. 그런데 그렇게 도와
준 사람이 빌런이라고?
앰버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믿으셔야 합니다. 레온 님이 직접 목격하셨다 하셨습니다.”
“레온 님이요?”
“그렇습니다.”
남자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 님이 뭔가 잘못 아신 게 아닐까요.”
지금까지 현우가 해 온 일을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
다. 하지만 돌아오는 남자의 대답은 차가웠다.
“지금 레온 님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그렇지 않다. 자신은 레온 님을 의심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말해야 함을 아
는데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한때 아는 사이라서 흔들리는 건 이해합니다. 그래도 공과 사는 확실히 나
누십시오, 앰버.”
“네.”
남자는 그 말만을 남기고 되돌아섰다. 뒤에 남은 앰버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헝클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럴 리 없어.’
뭔가 잘못됐다. 앰버는 상황을 좀 더 자세히 파악하고자 했다. 그리고 현우
가 잡힌 이유가 마기를 사용했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그건 마치 바카디
와 같았다.
‘하지만 피해를 입힌 거라고는 공항에서 사람들을 밀쳐낸 것뿐이잖아?’
그 난리를 쳤음에도 크게 부상입은 사람은 없다고 하였다.
앰버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어릴 적에 가졌던 버릇으로 고쳤다고 생각했는
데, 위급하니까 다시 튀어나온다.
앰버는 레온을 믿고 있었다. 그가 이뤄 온 업적 덕분에 사람들은 몬스터의
위협을 피해 좀 더 편안히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정의로운 사람이다.
그걸 알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자꾸 현우가 생각이 났다. 망설이던 앰버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외출 신청을 했다. 그리고 다급히 차를 몰아 가디
언 길드 본부를 벗어났다.
그 상태로 외곽에 위치한 한적한 마을에 도착한 앰버는 한 집의 벨을 눌렀
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온화한 인상의 노인이 밖으로 나왔다.
“오오, 앰버. 이게 얼마 만이니?”
“잘 지내셨어요, 할머니?”
2세대 실종자 이후 간헐적으로 자연 각성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리고 앰
버의 할머니는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각성이라니. 농담도.”
물론 앰버의 할머니는 그걸 농담으로 취급했다. 몸이 좀 더 건강해진 건 맞
으나, 흔히 보는 각성자처럼 대단한 일을 해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녀가 할 수 있는 건 딱 하나였다.
“할머니, 부탁이 하나 있어요. 이 사람 사진 좀 봐 주실래요?”
YES or NO.
그녀는 원래도 가지고 있던 감이 강해졌다. 그 정도로는 대단한 건 할 수 없
었으나, 일상에는 제법 큰 도움이 되었다.
앰버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현우의 사진을 할머니에게 보여 주었다.
“오, 예쁘장하게 생긴 소년이구나.”
“청년이에요.”
“이런, 아시아 사람은 젊어 보여서 나이 가늠이 힘들다니까.”
할머니는 안경을 고쳐 쓰며 사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에게 앰버는
물었다.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인가요?”
“나쁜 사람이냐고?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빌런일까요?”
“빌런이면 사회를 망치는 나쁜 사람들 말이지? 아니란다.”
모든 사람이 할머니의 능력을 의심할 때, 앰버만은 확신했다. 할머니는 진
실을 밝혀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특히 각성 이후엔 더 명확해졌다. 그런
이유로 확신했다.
‘지현우는 나쁜 사람이 아니야!’
뭔가 오해가 있는 것이다. 앰버는 이 사실을 레온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
다. 레온은 공정한 사람이니까 앰버의 말을 들으면 현우에 대해 다시 생각
해 줄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할머니의 집을 나섰다. 그리고 다시 차에 타려는 순간, 불길
한 예감이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갔다.
앰버는 조심스럽게 차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할머니처럼은 아니지
만, 강한 정신계 각성자인 앰버 또한 가끔 감이 오곤 했다.
‘누가 차에 손을 댔다.’
슬며시 물러나 몸을 숙여 차 아래를 바라보았다. 얼핏 보기엔 멀쩡해 보이
나 머리가 찡할 정도로 기분이 나빠졌다.
다시 몸을 세운 앰버는 일단 차와 떨어졌다.
‘이제 어떻게 돌아가지?’
고민하다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가디언 길드 본부를 떠올렸다. 일단은
그곳으로 찾아가야 할 것 같았다. 걸어가기엔 다소 거리가 있는지라, 이동
수단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가로등 아래 널브러져 있는
낡은 자전거를 보았다.
“자전거를 타 보긴 오랜만인데.”
앰버는 자전거에 몸을 싣고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다행히 못 움직일 정도
는 아니었다.
*
가디언 길드의 전세기가 떠나자마자 선우와 도진도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그들과 같이 전세기가 아니기에 시간이 소모될 수밖에 없었다.
지나가는 시간이 초조해 비행기 안에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도착이군요.”
일단 미국에는 도착했다.
선우와 도진은 요람 길드가 건네준 자료를 살펴보았다. 자료에는 그동안 레
온의 행적이 적혀 있었다. 둘은 그중에서도 특히 자주 들르던 곳 위주로 조
사를 시작하기로 했다.
“일단 역할을 반으로 나눕시다. 한 명은 서류에 적힌 장소를 확인하고, 다른
한 명은 가디언 길드를 감시하기로 하죠.”
“그럼 제가 가디언 길드로 가겠습니다.”
도진이 나서자, 선우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디언 길드로는 제가 가겠습니다.”
“숨어서 지켜보는 건 제가 전문입니다.”
“참으로 음흉한 능력이군요.”
이런 상황에서도 둘의 사이는 좋아질 수 없었다. 그래도 거기에 달린 것이
현우의 안위인지라 결국 선우가 뒤로 물러났다.
“최대한 빠르게 조사해 보겠습니다.”
그리 말하며 선우는 조심스럽게 동행한 선현 길드의 길드원 일부와 함께 이
동했다. 선현 길드의 길드원은 대부분 선우만을 보고 가입한지라, 충성도가
무척 높았다. 사전 설명이 부실함에도 그를 돕기 위해 나서는 걸 망설이지
않았다.
‘반면 평화 길드는.’
그들 또한 도진을 보고 모여든 사람이었지만,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원래
힘들게 살았던 사람이 많다 보니, 같이 나아가기보단 외려 도진에게 기대려
는 성향이 강했다. 그래서 도움을 요청하지 못했다. 대신 아윤이 요람 길드
에서도 은신 능력이 뛰어난 사람 몇을 붙여 주었다.
이제는 움직일 시간이었다.
118.
잡혀 들어온 현우를 감시하는 이들은 매일 바뀌었다. 하지만 심문을 하는
이들은 고정되어 있었는데, 볼수록 기분이 나쁘기만 할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인간이기를 거부하며 마기를 받아들인 빌런이기 때문이었다.
“용케 감추고 사네?”
비아냥거리는 현우의 말에 심문을 위해 들어온 여성이 방긋 웃었다.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 아니었나요?”
“난 적어도 남에게 피해를 준 적 없어.”
현우는 단호하게 말했다.
“저런, 그런 바른 사람이 여기 잡혀 와 있으니 답답하겠군요?”
놀리냐?”
“어머, 전혀요?”
여성은 진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레온이 그러했듯이 밖의 소식을 알려
주었다.
“당신의 인생은 끝났어요. 이미 빌런으로 찍혔으니 말이죠. 빌런을 옹호하
는 선현 길드 건물 앞에서는 데모가 일어나고 있어요. 선현 길드의 길드원
은 더 이상 부러운 자리가 아니죠. 시민들에게 테러를 당하거든요. 듣기로
는 길드장과 부길드장의 갈등도 만만치 않다던데.”
현우에게 처참한 진실을 알려 주었다.
“믿지 않는다.”
“세상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죠. 그러고 보니 한도진과도 친한 사이였
죠? 평화 길드 길드도 파탄 난 거 아세요?”
여성은 끊임없이 현우의 귀에 나쁜 소식을 속살거렸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듣고 있으면 마음이 울렁였다.
“
어떻습니까?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되어 가는 것 같습니까?”
레온의 말에 휴대폰 너머에서 답이 돌아왔다.
─ 그래.
“
이미 세상은 지현우를 버렸습니다. 죄도 없는데 별별 루머가 다 돌고 있지
요. 대부분은 저희가 작업한 것이긴 합니다만.”
─ ……현우의 상태는 어떻지?
“괴롭지 않을까요. 인간들이란 혼자서는 살아가지 못하는 존재니까요. 곧
세상에 대해 증오를 품게 될 겁니다.”
─ 과연 그럴까?
“그럴 겁니다. 저는 약속은 꼭 지키는 마족이니까요. 그보다 그쪽도 슬슬 움
직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지현우에게는 아직 이 세상에 남은 미련이 있지
않습니까.”
─ 그건 아직 생각 중이다.
“사랑 앞에서는 위대한 분도 별수 없군요.”
레온은 입꼬리를 올리며 히죽 웃었다. 그걸로 대화는 끝이 났다. 하지만 이
렇게 대답해도 결국엔 알베르크도 움직이게 될 터였다. 마족이란 결국 그런
존재니까.
“
미리엘은 오늘따라 따뜻한 핫초코가 먹고 싶었다. 하지만 평소에 핫초코를
만들어 주는 가준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게 뭐가 어렵다고.’
가준이 했으니 자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미리엘은 그렇게 생각하며 부엌
에 들어서다 통화 내용의 일부를 엿들었다.
휴대폰?’
가준은 미리엘에게도 알베르크에도 휴대폰을 주지 않았다. 급한 연락이 있
으면 누르라며 작은 리모콘 같은 기계를 건네준 게 다였다. 물론 본인이 흥
미가 있다면 휴대폰을 구해서 사용할 수 있겠지만, 뭔가 의심스럽다.
‘상대는 마족이니까.’
미리엘은 핫초코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존재감을 흐리게 만들었다.
‘지현우란 인간의 상태를 물었어.’
현재 미국에 가 있는 사람은 지선우와 한도진이다. 그럼 알베르크는 그 둘
중 한 사람과 통화한 것일까? 정석적으로 생각하면 그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이건 천족으로서의 감이었다. 미리엘은 끝까지 대화를 엿듣고서야 기척을
되돌렸다.
“미리엘?”
“비켜라, 마족.”
“부엌에는 무슨 일이지?”
“핫초코를 만들어 먹을 것이다.”
그 말에 예리하던 알베르크의 기세가 줄어들었다.
‘
만들 수는 있고?”
“만드는 건 많이 봤다.”
“그래, 알아서 해 먹어라.”
그 말과 함께 알베르크는 부엌을 떠났다. 남은 미리엘은 말한 것이 있으니,
시늉이라도 내기 위해 핫초코 가루를 꺼내 들었다.
“우유를 데워서 타기만 하면 된다고 했지.”
하지만 머릿속이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니 제대로 될 리 만무했다. 결
국 핫초코를 완성하긴 했으나, 맛이 미묘하게 씁쓸했다. 게다가 부엌은 엉
망이 되었으니 가준이 돌아와 머리를 짚을 건 정해진 미래였다.
‘자, 이제 이걸 어쩐다.’
가준에게 말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잘못하다간 대화를 엿들었던 걸 들킬 수
도 있었다. 알베르크는 마계에서도 알아주게 강한 마족이었으니까. 미리엘
은 엉망이 된 핫초코를 마시면서 고민에 빠졌다.
“
*
와아, 와아!”
앰버는 숨을 몰아쉬며 가디언 지부 근처에 자전거를 세웠다. 오래된 자전거
라 그런지 삐걱거리는 통에 제대로 몰기도 힘들었다. 차라리 달릴까도 싶었
“
지만, 정신계 능력을 가진 그녀는 다른 각성자에 비해 체력이 뛰어나지 않
았다.
“그래도 도착했네.”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지부로 향하려던 발걸음이 어느 순간 멈췄다. 감이 좋
지 않았다. 예전에 바카디가 중앙 지부로 쳐들어왔을 때야 아무리 감이 안
좋아도 버텨야 했지만, 지금은 아니지 않은가.
위험하면 가지 않는 게 맞았다.
‘하지만 왜?’
고작해야 변두리의 작은 지부일 뿐이다. 그런데 왜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
까. 앰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떻게 해야 하지?’
가서 정보를 알아봐야 할까, 도망쳐야 할까. 망설이는데 갑자기 지부의 문
이 열리며 사람 하나가 뛰쳐나왔다.
그는 입을 열고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그 비명은 이내 허공으로 사라졌다.
안에서 튀어나온 무언가가 남자의 목을 잡아채 도로 안으로 끌고 들어간 것
이다.
‘지부에 누군가 침입했다!’
전화, 전화가 필요했다. 앰버는 천천히 발걸음을 뒤로 물렸다. 아무것도 모
르는 사람처럼, 그렇게 멀어지려 했다. 하지만 이어 다시 뛰쳐나온 인영 때
문에 그러지 못했다.
악
앰버는 필사적으로 바닥을 굴러 공격을 피해 냈다.
“어머, 새로운 손님이네?”
눈앞에는 기다랗고 까만 머리카락의 여성 하나가 서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낯이 익다.
‘어디서 봤더라?’
그러나 생각을 지속할 시간이 없었다. 여성은 곧바로 다음 공격을 퍼부었고
앰버는 필사적으로 피했다. 그러면서 필사적으로 공격을 했다. 정신계 능력
자이기에 할 수 있는 건 상대의 뇌를 헤집는 것뿐이었지만, 통하기만 하면
그 무엇보다 효과적이다.
‘통하기만 한다면 말이지.’
앰버는 이를 악물었다.
“재밌네. 하지만 이런 건 통하지 않아.”
여성의 손이 앰버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대로 죽는 걸까. 그녀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막 기다란 손톱이 앰버의 이마에 박히려는
순간, 주변의 온도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운이 좋네.”
여성, 티아매트는 앰버를 두고 뒤돌아섰다.
“ !”
오랜만이야?”
그곳에는 몇 번인가 얼굴을 맞댔던 선우가 있었다.
“여긴 어떻게 왔대.”
“우연히.”
“우연히?”
선우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외곽에 위치한 작은 지부치고 레온의 출입이
잦았다. 그렇기에 첫 번째로 여길 들르기로 했던 것뿐이었다.
낡은 자전거 때문에 앰버의 이동은 느렸고, 선우의 이동은 빨랐다. 그렇기
에 이뤄진 기적이었다.
“지선우! 조심해요. 이 여자, 강해요!”
“압니다.”
선우는 즉각 주변을 얼리며, 물방울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물방울은 금
방 얼어 얼음 조각이 되었고, 그 자리에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다들 방심하지 마십시오.”
“네!”
레나와 묵현이 무기를 꺼내 들며 선우의 뒤편에 섰다. 그 모습을 본 티아매
트는 작게 웃었다.
“
나도 쉽게 보인 모양이네.”
이어 손톱을 뽑아낸 채 선우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티아매트가 간과한 게
있었다. 그동안 선우는 그녀에게 이긴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그땐 몸 상태
가 정상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은 혼자가 아니라 다른 길드원을 데리고
있었다.
1팀장인 아인, 2팀장인 레나. 둘은 선우를 동경하여 길드에 들어와 그 누구
보다 많이 던전을 격파했다.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들의
연계는 더욱 섬세해져 갔고, 여기서 그 효과를 보이고 있었다.
티아매트가 선우의 공격을 피해 뒤로 움직이면 그 자리에는 레나가 있었다.
그마저 피하려 들면 아인이 압박을 한다. 그 외에 동원된 길드원들은 멀리
서 지원사격을 했다. 지금 그들은 레이드를 하고 있었다.
“쳇.”
혀를 차 봐도 변하는 건 없었다. 결국 티아매트는 몸을 원상태로 돌렸다.
“그래, 이래야 싸울 맛이 나지!”
레나가 외치며 힘차게 무기를 들었다.
“거대 몬스터는 내 전문이다!”
아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들을 보며 티아매트는 오랜만에 위기감을
느꼈다.
“괜찮으세요?”
“
길드원 중 하나가 앰버에게 다가와 물었다.
“네, 괜찮아요.”
그냥 몇 차례 굴렀을 뿐이다. 앰버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전한 곳으로 위치
를 옮겼다.
‘그러고 보니 저들은 왜 여기 있을까?’
지금쯤 현우를 빼내려 애쓰고 있어야 하지 않나. 어째서 여기서 몬스터와
싸우고 있는 걸까. 앰버는 생각을 더듬어 정리했다. 그 결과, 결론이 나왔
다.
‘현우에게 씌워진 누명을 벗기기 위한 무언가가 여기 있구나.’
그래, 지부에서 몬스터가 뛰쳐나왔을 때부터 뭔가 이상했다. 앰버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저들이 싸우는 걸 도와줄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걸 해야 했
다.
“저는 지부를 조사할게요.”
“위험할 수도 있으니 같이 가겠습니다.”
“감사해요.”
하지만 이 난리가 나고도 아무도 나오지 않는 걸 보니 더 이상 적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앰버는 확신하며 지부로 향했다.
119.
끼이익.
반쯤 망가진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엉망이 된 내부가 보였다. 군데군데 핏자
국이 남아 있고, 사람이 쓰러져 있다. 그 모습은 뉴욕에 게이트가 열린 그
날을 떠올리게 했다. 바카디가 중앙으로 쳐들어오고, 수많은 사람을 죽인
그날 말이다.
흠칫 돋는 소름에 앰버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 뒤따라 들어
오던 남자와 부딪쳤다.
“괜찮으십니까?”
까만 옷을 입은 남자는 괜찮냐며 물어 왔다.
“괜찮아요. 그러고 보니 이름을 묻지 않았네요.”
“율무, 율무라고 불러 주십시오.”
율무는 내부를 훑어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일단 내부를 살펴봅시다.”
이번에는 율무가 앞서서 움직였다. 그는 로비를 살펴보다가 살아 있는 사람
이 없음을 확인하고 위로 올라갔다. 위쪽도 아래쪽과 상황이 다르지 않았
다.
“다시 아래로 내려가 보죠.”
앰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샅샅이 찾아본 결과 무너진 책장 뒤에서
지하로 향하는 문 하나를 발견했다. 아래로, 더 아래로. 둘은 점점 내려갔
다.
“생각보다 깊이 내려온 듯싶군요.”
“네.”
더는 밖에서 요란하게 싸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쯤, 앞을 가
로막는 문을 하나 더 발견했다. 앰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는 가디언 길
드의 지부다. 그런데 이런 깊은 지하에 문이 있다니, 이곳의 용도는 무엇일
까.
‘대피 용도인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가디언 길드는 급할 때 지역 주민의 대피소 역할
도 할 수 있게 지어졌으니까. 하지만 어쩐지 감이 좋지 않았다.
“열겠습니다.”
율무는 힘을 주어 문을 열어젖혔다. 안은 무척이나 어두워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었다. 앰버는 가방을 뒤적거리다 허리 가방에서 작은 손전등 하나를
꺼냈다. 다행히 망가지지 않은 모양인지 불이 켜졌다.
앰버는 그대로 손전등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손으로 입
을 막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곳은 실험실이었다. 좌우로 실험관이
늘어서 있고, 그 안에는 기괴하게 변한 사람들이 한 명씩 들어 있었다.
‘살아 있나?’
가장 가까운 실험관에 손을 대고 조심스럽게 두드려 보았다. 그러자 눈을
감고 가만있던 실험체가 꿈틀거렸다. 이어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게 누구람. 여긴 허락받지 않은 사람은 들어올 수 없습니다?”
돌아보니 가죽 잠바를 입은 갱같이 생긴 적발의 남자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
었다. 다른 부분은 인간과 흡사했으나… 눈. 살기가 담긴 역안의 눈이 인간
이 아님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를 알아차리는 순간, 바짝 붙어 있던 율무가 앞으로 나서며 등에 메고 있
던 무기를 휘둘렀다.
“어잇차!”
적발의 남자는 손쉽게 공격을 피해 냈다. 그 틈을 타서 앰버도 그에게 정신
공격을 걸었다. 그녀는 공격 쪽으로는 약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효과가 아
예 없는 건 아니었다. 남자가 순간이지만 비틀거렸고, 율무의 도끼가 그의
가슴에 박혀 들었다.
‘성공했나?’
앰버는 침을 삼키며 그를 바라보았다.
제기랄!”
티아매트는 험한 소리를 내뱉었다. 선우 한 명도 상대하기 쉽지 않은데, 다
른 이들이 붙어 서서 그 공격을 보조한다. 그리고 지쳤다 싶으면 다른 사람
과 교대한다.
“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저들은 정말로 거대 몬스터 레이드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더 짜증 나는 건 그게 제법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공격은 번번이 가로막히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도망치려고 하면 어찌 알
고 그쪽을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중간중간 머리가 찡하니 아파 왔
다. 정신계 능력자들이 티아매트의 정신에 간섭하려는 것이었다. 그녀는 위
대한 종족, 당연히 효과는 없었지만 정신이 사나워졌다. 전투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한 번은 날아오르려 했으나 날개에 집중 공격이 가해지는 바람에 포기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데미지는 착실하게 쌓여 가고 있었다. 그나마 원체 튼튼한
몸이니 버티고 있지, 인간 형태였더라면 진작 죽었을지도 모른다.
‘대체 그 녀석을 뭘 하는 거야?’
같이 지부를 무너트리러 온 녀석을 떠올렸으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
직도 지하에 머물고 있는 건가. 대충 불 지르고 나오면 되는 것을. 티아매트
는 혀를 찼다. 그러기를 한참이 지났다.
티아매트도 지치고 선현 길드의 사람들도 지쳤다. 하지만 선우는 여기서 티
아매트를 완벽히 없앨 생각이었다.
“준비해.”
그 때문에 만약을 가정하고 데려온 이들이 있었다. 지금까지 가장 뒤쪽에서
보호받던 몇몇 사람들이 빛에 휩싸인 손을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지금
까지 싸우느라 지친 길드원들에게 체력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심지어 정신
마저 맑아졌다.
“듣기로 마계의 블랙 드래곤은 회복 마법은 잘 쓰지 못한다더군.”
선우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럼 다시 싸워 볼까?”
레나가 처음처럼 씩씩하게 앞으로 나섰다. 아인과 다른 길드원들도 마찬가
지였다.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더라니.’
여기가 자신의 무덤이 될 모양이었다.
‘하지만 쉽게 목숨을 내주진 않을 거야.’
적어도 저들 중 대부분은 자신과 같이 죽게 될 것이다. 티아매트는 그리 생
각하며 피어를 내뱉었다.
헉헉.”
손전등은 망가진 지 오래, 연구실은 다시 어둠에 젖어 들었다. 그 와중에 율
무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적발의 남자는 한 번에 죽지 않았다. 외려 바
카디가 그랬듯이 한 번 더 괴물 같은 모습으로 변해 가며 둘을 죽이려 했다.
율무는 필사적으로 앰버를 지켰고, 앰버는 적발의 남자에게 끊임없이 정신
간섭을 했다. 그 결과, 마침내 그의 목을 자를 수 있었다. 목에 흐르는 땀을
닦아 낸 앰버는 시체에 다가갔다. 그리고 가방에서 꺼낸 작은 총으로 머리
에 한 방, 가슴에 한 방 총을 쏘았다.
“확인 사살. 원래 이런 괴물은 다시 살아나곤 하잖아요.”
“
그도 그렇군요.”
율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기를 갈무리했다.
“이제 자료를 찾아볼까요?”
다행히 적발의 남자가 모든 걸 파괴하기 전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실험 자
료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실험체가 된 사람들의 인적 사항과 그들이 바
라는 것이 상세히 적혀 있었고, 이어 사람과 마기의 결합이라는 연구 자료
가 정리되어 있었다.
[뛰어난 각성자일수록 마기에 더 잘 적응한다. 하지만 그래서는 아무런 의
미가 없다. 아무런 능력 없는 이들도 마기로 물들여 싸울 수 있게 만들어야
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그 모든 내용을 읽은 앰버는 허탈한 표정으로 말을 내뱉었다.
“미쳤네요.”
“동감입니다.”
율무는 가지고 있던 가방에 닥치는 대로 자료를 쑤셔 넣었다. 일부는 사진
으로 남겼다. 컴퓨터에 입력된 자료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자료를 챙겼으니 이제는 남은 실험체들의 처우를 결정할 차례였다.
‘하지만 어떻게?’
“
대부분 죽었지만, 일부는 살아 있다. 그렇지만 눈빛을 보아하니 지성이 사
라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평소대로라면 당연히 가디언 길드에 모든 걸 넘
기겠지만, 이번엔 그럴 수 없었다.
여기가 가디언 길드의 지부였으니까. 거기다 그녀의 감이 이걸 다른 가디언
길드 사람들에게 알려선 안 된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해?’
앰버는 재차 물음을 던졌다. 멍하니 서 있는 앰버를 율무가 빤히 바라보았
다. 뭔가 망설이는 눈빛이었다.
“당신들은 전부 알고 있었나요?”
“무엇을 말입니까?”
“가디언 길드에서 이런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을요.”
“저희도 전부 알고 있던 건 아닙니다. 그저 의심했을 뿐이지요.”
“……의심.”
지금까지는 조금도 의심을 품은 적이 없었다. 가디언 길드는 세상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움직인다고, 그렇기에 정의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굳건히
이루어진 그 세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앰버는 짧은 고민을 끝냈다.
“도와드릴게요.”
네
“손이 부족한 것 아닌가요? 그러니 도와드릴게요. 가디언 길드 지부는 어디
있지 전부 외우고 있어요. 특별히 찾는 곳이 있으면 제가 찾아 드릴 수 있어
요.”
“어째서입니까?”
“가디언 길드는 정의로워야 하니까요.”
타락한 자를 봤다고 해서 전부 다 그럴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 썩
은 부분만 도려내면 될 것이다. 앰버는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에 말입니다.”
“네.”
“길드장이 모든 일의 원인이라고 해도 도울 수 있습니까?”
“……레온 님이요?”
“네.”
앰버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네, 그래도 돕겠어요.”
“그럼 좋습니다. 따라오십시오.”
율무는 앞서서 지하실을 올라갔다.
“ ?”
둘이 밖으로 나서니 사슬과 말뚝으로 바닥에 고정된 거대한 드래곤이 보였
다. 상처투성이의 드래곤은 피를 무척 많이 흘렸지만, 아직 살아 있었다.
“율무.”
레나가 상쾌한 표정으로 땀을 닦으며 율무를 불렀다.
“거하게 해치우셨군요.”
“응! 해치웠어! 이제 마무리를 지으려던 참이었어. 사실 정보라도 뽑아내면
좋겠지만, 정신 공격이 거의 통하지 않더라고. 그렇다고 우리한테 유리한
증언을 해 줄 것도 같지 않으니 그냥 죽이기로 했어. 그런데 그쪽은 아까 봤
던 분이네?”
“앰버라고 합니다. 앞으로 같이 다닐 테니 잘 부탁드립니다.”
“아, 앰버. 뭐 하는 분이신데요?”
“가디언 길드의 길드원분이십니다.”
“중앙 본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네? 그런데 그런 분이 왜 여기에?”
레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정의를 위해서요.”
앰버는 그 말만을 남기고 드래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괜찮다면 죽이기 전에 제가 잠깐 접근해 봐도 될까요?”
선우는 그런 앰버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앰버는 깊게 심호
흡을 하고 두 손을 엉망으로 깨진 드래곤의 머리에 대었다.
“꺼… 져!”
티아매트가 으르렁거리며 앰버를 밀어 내려 했으나, 철저하게 구속되어 있
기에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앰버는 티아매트의 정신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
120.
끔찍하게 뒤틀린 심상에 구역질이 났다. 일반적인 몬스터보다 훨씬 역겹고
두려웠다. 이건 어떻게 손을 댈 수가 없는 괴물이다.
“허억!”
앰버는 진저리를 치며 티아매트에게서 떨어졌다. 그런 그녀를 보며 티아매
트가 킥킥 웃었다.
“어떻습니까?”
“건질 수 있는 게 없어요. 이건 그냥 괴물이에요.”
“그럼 살려 둘 필요가 없단 소리군요.”
“……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양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길드원들이 무기로 티
아매트의 머리를 내려쳤다. 한 번에 부서지지 않으니 죽을 때까지 같은 행
동을 반복했다. 그렇게 그녀는 허무하게 숨을 거뒀다.
혹시 모르니 심장도 뽑아내죠.”
숨을 쉬지 않는 걸 확인한 뒤에도 선우는 철저하게 확인했다. 그도 앰버와
같이 확실하게 해결해야 마음이 놓이는 타입인 듯했다.
그러는 사이,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드래곤이 날뛸 때는 숨어 있다가
이제 안전하다고 판단되니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돌아간다.”
선우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와 동시에 선현 길드의 길드원들
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좀 아깝긴 하네.”
드래곤의 시체를 포기하고, 무기를 갈무리한다. 그런 뒤에 잽싸게 준비된
차에 올라탔다.
‘이대로면 놓친다!’
그렇게 생각한 앰버는 용기를 내어 같이 차에 올라탔다. 그녀의 뒤에 타던
율무가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모르는 척했다. 당장은 급하니 끌어 내리지
않을 거란 판단에서였다. 그리고 그 판단은 맞아떨어졌다.
“출발!”
명랑한 여성의 목소리와 함께 차가 사람들 사이를 해치고 출발했다. 한참을
달려 나간 차는 은근슬쩍 따라오는 이들의 추격을 물리치고 어느 산속 깊은
곳에 도착했다. 차 문이 하나하나 열리고 길드원들이 쏟아져 내렸다.
“
자 그럼 다음으로 가기 전에 좀 쉬자고!”
여성이 그렇게 말하자 길드원들은 아무 데나 자리를 잡고 쉬기 시작했다.
그걸 확인한 뒤, 여성은 마지막 차로 다가와 앰버에게 말했다.
“그리고 귀여운 아가씨, 저와 함께 이야기를 해 보실까요?”
“귀엽다고 불릴 나이는 아닙니다만.”
“저보다 어려 보이면 다 귀여운 거예요.”
“제가 보기엔 그쪽이 더 귀여워 보여요.”
“어머나, 그래요?”
“속지 마십시오. 속은 마녀입니다.”
율무가 투덜거리며 말하자 여성은 그의 목을 팔뚝으로 졸랐다.
“악! 악!”
“자, 그럼 진지하게 자기소개를 할까요? 제 이름은 레나. 선현 길드의 팀장
이랍니다. 저보다 더 강한 사람도 있지만, 그쪽은 말을 많이 하지 않아서 제
가 당신을 담당하게 될 거예요. 그쪽 이름은?”
“앰버라고 합니다. 가디언 길드 정보부에서 일하고 있어요.”
“와우. 그런데 어쩌다 이런 일에 끼어드셨대요?”
“그게 그러니까.”
“ ,
잠깐! 일단 길드장님과도 같이 이야기해요.”
레나는 어느새 세워진 천막을 가리켰다.
“네, 좋아요.”
앰버는 심호흡을 하고 발을 내디뎠다.
“
오랜만입니다.”
선우는 앰버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가요.”
앰버는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러고는 준비된 의자에 앉아 지금까지 있
었던 일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현우가 빌런이라는 사실에 위화감을 느꼈던
일, 그 때문에 할머니를 찾아가 도움을 받았던 일, 지부를 찾아갔다가 율무
와 함께 이상한 실험실을 발견했던 일 등등.
“자료는 여기 있습니다.”
율무가 저장 장치와 카메라를 내밀었다.
“내부에서 끔찍한 실험을 하고 있더군요.”
“가디언 길드의 지부에서 이런 실험이라.”
선우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
아직, 아직은 몰라요. 이곳만 이런 곳일지도 모르니까.”
가디언 길드를 전부 믿어선 안 된다는 걸 알게 되었으면서도 저도 모르게
옹호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럼 더 살펴보면 되겠군요. 마침 추측 가는 장소도 조사해 두었으니까요.
그럼 앰버, 그쪽은 어떻게 할 겁니까? 앞으로 같이 움직일 생각입니까?”
“네, 그러려고 동행했으니까요.”
굳게 다짐한 앰버의 얼굴을 보며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앰버와 같이 하
는 건 그에게도 손해는 아니었다. 일단 그녀는 가디언 길드의 정보부에 속
한 사람이었고, 그런 만큼 아는 것도 많을 터였다.
지금까진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이제 도진만 제대로 하면 된다.
“
*
도진의 일은 선우와는 달랐다. 선우가 숨어 있는 가디언 길드와 레온의 치
부를 찾아낸다면, 도진이 할 일은 현우의 안전을 확인하고 레온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본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숙소를 마련하고 매일같이 그
앞에 있는 카페에 출근했다.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니 들킬 확률이 높았으나, 애초에 들키지 않는 게 어
려운 일이었다. 레온은 언제나 자신의 주위를 예민하게 살피고 있었고, 도
진의 그림자도 금방 잡아냈다. 하지만 그림자를 없애진 않았다.
씩 웃더니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어디 지켜볼 테면 지켜보란 소리였다. 레
온의 생활은 단순했다. 훈련, 아니면 몬스터 사냥. 그게 전부였다. 보기에는
세상에 다시 없을 모범생으로 보였다.
주변에 수상한 사람이 나타나는 일도 없었고, 의심 가는 행동도 하지 않았
다. 그런데 오늘 처음. 평소와는 다른 움직임을 보였다.
“오셨습니까, 레온 님.”
넓은 공간 중앙에 네모난 작은 집이 있었다. 정확히는 집이라기보단 좀 크
기가 큰 상자 같아 보였다. 사방이 막혀 있고 들어가는 입구는 정면에 있는
데, 각성자 둘이 거길 지키고 있었다.
‘최소 A급 이상.’
S급보다는 약하다 하더라도 소리 없이 한 번에 쓰러트리긴 쉽지 않을 것이
다.
“잠시 물어볼 것이 있어 들렀습니다.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네, 얼마든지요.”
짧은 대화가 오고 간 뒤 둘이 동시에 문에 손을 댔다. 그제야 문이 열리는데
그 두께가 상당하다. 레온은 몸을 굽혀 입구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 와중에
도진도 아슬아슬하게 그림자를 같이 집어넣는 데 성공했다.
‘현우!’
내부의 반대편 벽면에는 커다란 의자가 있었고, 현우는 거기에 구속되어 있
었다.
재수 없는 놈이 나타났네?”
입은 막아 두지 않은 모양이었다. 현우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도진은 손으
로 입을 틀어막았다. 지친 듯한 낮은 목소리, 원래도 가느다랗던 몸이 더 말
라 있었다. 분노로 인해 몸에 힘이 들어갔다.
“재수 없다니. 너무한 소리군요.”
레온은 상냥하게 웃으며 맞은편의 의자에 앉았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인데? 이미 아까 아이나스가 다녀갔거든?”
“아이나스라뇨. 그녀의 이름은 아나이스입니다. 벌써부터 이름이 헷갈리시
는 겁니까?”
“아, 그래. 그런 식으로 나오겠다?”
현우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좋아. 그럼 네 용건은?”
“딱히 없습니다. 그냥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찾아왔을 뿐입니다.”
“무슨 이야기.”
“이를테면.”
레온의 시선이 잠시 그림자에 닿았다 떨어졌다.
“이만 포기하는 게 어떤지, 라든가?”
“
그 말이라면 지겹도록 들었거든? 참신하지 않아. 그러니 다른 이야기를 하
도록 해.”
“그러면 저건 어떨까요?”
하얀 손가락이 구석을 가리켰다. 그에 따라 현우의 시선이 이동했다.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안을 엿보고 있군요.”
“일부러 데리고 들어왔군.”
현우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그렇습니다. 뭔가 꾸미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이렇게 노골적일 줄은 몰랐
습니다. 저렇게 그림자를 붙여 놓으면 아무리 저라도 눈치챌 수밖에 없습니
다. 레온은 인간 세상에서는 제법 강자니까요?”
“사람인 척하지 마.”
“사람인 척이라뇨. 지금의 저는 엄연한 사람입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
고 물어도 전부 같은 답이 나올 겁니다. 그보다는 오랜만에 보는 지인에게
인사를 하는 건 어떨까요? 나는 괜찮으니까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한다거
나.”
“구역질 나는 배려는 집어치워.”
“슬프군요. 전 당신을 위해 그런 건데.”
레온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
고는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맨손으로 현우의 뺨을 쓰다듬었다. 현우
“
가 고개를 돌리며 그 손가락을 물어뜯으려고 했으나, 간발의 차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런, 너무 난폭하군요.”
이번에는 강아지를 쓰다듬듯 머리를 쓰다듬는다.
“내가 풀려나기만 하면 너부터 죽인다.”
현우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그거 기대되는군요.”
머리를 툭툭 두드린 레온이 그대로 몸을 뒤로 물렸다. 내내 지켜보기만 하
던 그림자가 공격적으로 그를 찔러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제가 손대는 게 싫은 모양입니다.”
“누가 그걸 좋아하겠어.”
“전 남이 싫다고 하는 걸 하는 것도 제법 좋아합니다. 아, 벌써 다음 일정 시
간이군요. 그럼 다음번에 다시 뵙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도진의 시야가 잠시 까맣게 변했다. 레온이 들여보낸 그림자
를 없애 버린 것이다.
으드득.
도진은 이를 갈며 탁자를 내려쳤다. 순식간에 두 동강 난 탁자의 모습에 주
변 사람들이 당황했지만, 그도 보이지 않았다.
121.
분노가 시야를 가렸다. 이미 사전에 동의하고 현우를 보낸 거지만, 막상 모
습을 보니 더는 참지 못할 것 같았다. 이를 꽉 문 도진은 앞으로 걸어 나갔
다. 그러나 몇 걸음 걷지 못해 다른 사람에게 가로막혔다. 선현 길드에서 붙
여 준 사람 중 하나였다.
“안 됩니다.”
그녀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선현 길드내의 4팀의 팀장인 그녀의 이름
은 유리. 가진 능력은 정신계 능력이었다.
상대에게 환각, 환청을 유도할 수 있으면 정신 조종 및 파괴가 가능하다. 그
외에 정신계 능력자라면 대부분 가지고 있는 감정의 공유도 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유리는 지금 도진의 심정이 어떠할지 느낄 수 있었다.
분노, 절망, 괴로움. 여러 감정이 버무려졌는데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
였다.
“비키십시오.”
“안 돼요.”
유리는 양팔을 벌리고 그 자리에서 버텼다. 그리고 능력을 쓰려는 도진을
정신계 능력으로 건드렸다.
“이러려고 현우 님 보내신 거 아니잖아요. 지금 가시면 모든 게 엉망이 됩니
다. 그러니 제발 참으세요.”
도진은 고개를 숙이고 주먹을 쥐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간신히 진정했
는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장소를 옮겨서 계속 감시하지요. 여긴 제가 수습하겠습니다.”
유리는 일부 사람들의 기억을 조작하고, 부서진 테이블을 물어 주었다. 카
페 주인은 놀라긴 했지만, 연인이 싸운다면 그럴 수도 있다며 웃어 보였다.
“대체 설정을 뭘로 하신 겁니까? 팀장님?”
“내가 알아서 해. 그나저나 도진 씨는 괜찮아 보이셔?”
“네, 이제 감정을 가라앉히신 모양입니다.”
“다행이네.”
유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번 작전은 무척이나 중
요해서 틀어지면 안 된다. 잘못하다가는 길드장의 형을 구하기는커녕, 길드
의 존속이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니 실수할 수 없어.’
유리는 재차 다짐했다.
“
*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 뒤, 레온은 기자 회견을 열었다. 가디언 길드의 수장
이 아닌 각성자 협회의 협회장으로서 연 것이었다.
오늘은 중요한 사실을 공표하고자 합니다.”
진지한 레온의 목소리에 기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다른 회견장에서라면 시
끄럽게 떠들어 대도 여기서는 그럴 수 없었다. 여기 있는 사람은 미국의 영
웅, 세계의 구원자 레온이었으니까.
“우로보로스와 관계가 있어 보이는 빌런을 잡아 둔 상태입니다.”
“그가 대체 누구입니까?”
한 기자가 조십스럽게 물어왔다.
“여러분도 아시는 사람일 겁니다. 한국의 지현우.”
조용하던 회견장이 소란스러워졌다. 바로 앞에 레온이 있었지만, 지금만은
목소리를 억누를 수 없었다.
“지현우라면 저번에 미국을 도운 영웅 아닙니까?”
“그런데 빌런이라고요?”
“그래, 그런 소문을 듣긴 했어. 이번에 그가 빌런 혐의로 잡혀 들어갔다는
소문.”
“정말인가?”
다들 의견이 분분했다. 그런 와중에 레온이 재차 입을 열었다.
“저도 그의 행적을 압니다. 그렇기에 믿으려고 했습니다만, 의심스러운 부
분이 많아 어쩔 수 없이 잡아 두었습니다.”
“
세상에, 그럴 수가!”
“앞으로 한 달 뒤!”
레온이 손가락을 세우며 말했다.
“세계 각성자 협회에서 그를 재판하고자 합니다. 만약에 거기서 지현우의
범죄 사실이 뚜렷하게 밝혀지면, 그는 빌런으로서 처벌받게 될 것입니다.”
“그럼 선현 길드도 그와 관련이 있습니까?”
“아직 그는 알 수 없습니다.”
“이상 오늘의 회견은 마치겠습니다. 질문은 더 받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
럼.”
레온은 그대로 회견장에서 물러났다. 뒤늦게야 기자들이 우르르 달려들었
지만, 가디언 길드의 길드원에게 가로막혔다.
“
*
죽을 것 같다. 앰버는 고개를 숙였다가 그대로 잠들 뻔했다.
“허억!”
도로가 울퉁불퉁해서 달리던 자동차가 튀어 오르는 바람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괜찮으세요?”
옆에 앉아 있던 레나가 물었다.
“괘, 괜찮아요.”
앰버는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선현 길드는 지나치게 하드코어한 일정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먹는 것도 틈을 봐서 대충 욱여넣
는다. 그리고는 가디언 길드 지부 중 의심되는 곳을 전부 쑤셨다.
그걸 반복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가디언 길드에서도 그들을 쫓기 시작
했다. 그리고 지부마다 방비가 강해져 점점 더 침투가 어렵게 되었다. 그래
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어디서 이런 힘이 솟아나는지 모르지만, 최선을 다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와 같이 다니는 앰버는 거의 죽어 가고 있었다.
“오늘은 어디 들리기로 했지요?”
“여기서 30분 거리에 있는 지부에 들리기로 했어요. 지금까지 들린 곳 중
규모가 가장 작네요.”
“아, 거기라면 저도 알아요.”
가디언 길드의 지부는 큰 곳에만 위치하지 않았다. 다른 이의 안전을 위한
다는 이유로 작은 곳에도 간결하게 지부를 만들어두었다.
“거긴 사람이 적어서 자경단처럼 운영되고 있어요.”
길드원이 마을에서 도움이 되는 사람과 힘을 합쳐 안전을 확보하고 있었다.
“
흐음, 그래요?”
“네, 여기엔 뭐가 있을 것 같진 않은데.”
너무 피곤해서 이제는 감도 죽은 모양이었다. 어딜 가도 괜찮은지, 아닌지
판단하기 힘들어졌다. 그래도 설마 여기까지 인체 실험을 하고 있을까. 앰
버는 예전에 들러봤던 작은 마을을 떠올렸다.
무척이나 평화롭고 인심좋은 마을이었다.
“그럼 금방 끝나겠네요. 그동안 앰버는 쉬고 있어요.”
“아니에요. 저도 갈게요.”
아무리 힘들어도 인제 와서 빠질 수는 없엇다. 저들도 저렇게 열심히 움직
이는데, 당사자인 자신이 빠지다니. 말도 안 된다. 앰버는 손으로 자신의 뺨
을 때렸다. 그러니 정신이 조금은 돌아오는 것 같았다.
30분 뒤에 도착한 마을은 앰버가 설명한 대로 작았다.
“어머, 이게 누구람?”
차에서 우르르 내리는 사람들을 경계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노부인 하나
가 앰버를 발견했다.
“앰버, 앰버 맞죠? 예전에 여기 찾아왔었던. 나 기억해요? 그때 라즈베리
쿠키를 구워 줬잖아요.”
“당연히 기억하죠.”
“
앰버는 상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기억하고 있다니 기쁘네요.”
노부인은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나요? 전부 각성자 같은데.”
“그냥 지부에 잠깐 들릴 일이 있어서 그래요. 별일 없을 테니 집에 돌아가
계세요.”
“아니, 그럴 수야 없죠. 가디언 길드 지부의 일은 우리 마을의 일이나 마찬
가지인 걸요. 저도 같이 가요.”
“부인.”
앰버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원래 이렇게 겁이 없는 분이셨나? 아니
면 자신을 지나치게 믿고 있는 걸까? 알 수 없었다.
노부인은 그대로 앞장서 지부로 걸어갔다.
“이상하군요.”
그런 노부인을 바라보던 선우가 입을 열었다.
“뭐가요?”
“같이 있으니 각성자라 추측하는 건 이상하진 않지만, 전부 각성자라고 생
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전 마을에서 전부 옷을 갈아입고 평범하게 보이도록 모습을 바꿨다.
일부는 무기를 감추기도 했다. 그랬는데 저 노부인은 전부 각성자라 하였
다.
“어서 오세요!”
어느새 멀어진 노부인이 손을 입가에 대고 소리쳤다.
“무슨 의심을 하는지 알겠는데 아닐 거예요.”
노부인은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앰버는 그것만은 자신할 수 있었
다. 아까부터 머리가 찡 울릴 정도로 아파오긴 했지만, 그건 무리한 여파이
리라.
“그렇군요.”
선우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리고 모두들 노부인의 뒤를 따라
지부로 이동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작은 건물은 가디언 길드의 지부라
불리기도 민망한 크기였다.
그 앞에서 노부인은 문을 똑똑 두드렸다.
“알, 알! 나와 보렴. 손님이 왔단다.”
그 말과 함께 문이 천천히 열렸다.
끼이익.
얼마나 관리를 안했는지 열리는 소리가 거칠다. 뒤이어 그 안에서는 평범한
얼굴을 가진 남자가 하나 나왔다.
소 손님이 오셨군요. 대, 대접해 드려야 하는데.”
알은 더듬거리며 말하고는 고개를 앞뒤로 흔들어댔다.
“아이참, 정신 차리렴. 알.”
노부인은 그런 알이 이상하지도 않은지 어깨를 툭툭쳤다.
“부인?”
앰버는 질린 표정으로 노부인을 불렀다.
“응?”
“거기 서 있지 말고, 여기로 오세요.”
“왜?”
“왜냐니요.”
알이란 남자는 평범해 보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목 위의 이야기였
다. 목 아래를 보면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몸에서 촉수가 빠져 나와 있었
고, 그건 불쾌하게 구불거리고 있었다.
“왜, 이상해?”
노부인이 태연한 어조로 물었다. 그 말에 절로 숨이 막혀 왔다. 그 상황에서
알이 앞으로 발을 내딛고 그 뒤를 따라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작은 집에
들어 있는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수였다.
“ ,
다들 귀엽지 않니? 내가 힘들게 만든 아이들이란다.”
그런 그들을 보며 노부인은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금만 시간이 더 있었으면 전부 다 바꿀 수 있었을 텐데. 앰버, 타이밍이
좋지 않았어.”
“당신! 설마?”
“그래, 생각하는 게 맞을 거야.”
노부인은 알에게 다가가 그 머리를 쓰다듬었다.
“
122.
“
.
내가 전부 변화시켰어. 싫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결국엔 만족했을 거란다.
보렴 다들 이렇게 강해졌잖니.”
“미쳤군요.”
“미치다니, 너무한 말이네. 그러면 나도 화가 난단다. 혼내 줘야겠는걸? 자,
알. 전부 삼켜 버리렴.”
노부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알을 비롯한 변형된 사람들이 덤벼들기 시작
했다. 몬스터라면 죽이면 된다. 타락한 인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실험
에 의해 망가진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앰버는 이를 악물었다. 일단은 최대한 기절시킨다. 다른 이들도 그녀와 비
슷한 생각을 가진 모양이었다. 몇몇이 나서서 기절시키면 뒤에 있던 이들이
그들을 포박했다. 어쩌면 원래대로 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이
었다.
세상에. 다들 상냥하구나. 하지만 소용없어. 그 아이들은 이미 되돌릴 수
없단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거든. 한 번 변형된 이상 마기를 뽑아낸다고 해
도 모습은 변하지 않을 거야. 차라리 그대로 죽여 주는 건 어떨까? 그게 더
자비롭지 않을까?”
이 와중에 노부인이 떠들어 대는 말을 들은 레나가 외쳤다.
“미친 할망구! 사람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뭐긴, 훌륭한 재료지. 아이나스님께서 말씀하셨단다. 열심히 하다 보면 나
도 마계로 데려가 주겠다고. 거기선 마음껏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다고. 그
러니 안타깝지만 너네는 여기서 전부 죽어 줘야 해.”
“누가 죽어 준대?”
몬스터들은 하나같이 모습이 괴상했지만, 생각보다 강하진 않았다.
“후훗, 결국은 내 뜻대로 될 거란다. 왜냐하면 얘들은 내 실패작들이거든.”
쿵!
땅이 커다랗게 울렸다. 이어 작은 문이 부서지며 커다란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그걸 몬스터라고 불러도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적어도 가슴
에 박힌 얼굴은 사람의 것이었으니까.
그런 게 셋이나 나타났다. 다들 무기를 꽉 쥐고 그를 노려보았다. 바야흐로
전투의 시작이었다. 노부인은 제법 자신만만하게 나섰지만 결과는 좋지 못
했다.
“나름 강하지만 서로 협조가 안 되는 느낌이네요.”
“
그래, 그래도 살릴 수는 없었네.”
“그도 그렇죠.”
이번에는 사정을 봐줘 가며 살릴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이쪽이 다칠 것 같
았기에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리고 노부인을 사로잡았다.
“이럴, 이럴 수는 없어! 내 아이들이이! 아이나스 님! 아이나스 님!”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전투였다.
“너무 쉬워서 불안한데요.”
레나의 말에 선우도 동의했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모양이군.”
그렇게 생각하며 경계했지만, 시간이 흘러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혹시 몰라 마을을 뒤져보았지만, 살아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망
가진 지부 지하에서 드넓은 공간을 발견했다. 그곳에서 많은 이들의 시체를
발견했다.
살아 있는 이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끔찍한 환경과 실
험을 버텨 내지 못한 것이다.
“지독하네요.”
“그러게요.”
“
정말 이 모든 게 가디언 길드가 벌인 짓일까. 앰버는 비틀거리며 시체 앞에
무릎 꿇었다.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뿐이었다.
*
그런 식으로 몇몇 지부를 이동한 선현 길드는 다시 추격을 뿌리치고 뉴욕으
로 발걸음을 되돌렸다. 세계 각성자 협회에서 공개적으로 현우를 재판할 것
이라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미친 듯이 움직인 탓에 다행히 때 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재판 하루 전의
일이었다.
“형은 괜찮습니까?”
선우는 도착하자마자 도진에게 물었다. 그는 처음 보았을 때처럼 음울한 인
상을 하고 있었다. 양 볼은 움푹 패 있었으며, 입술을 단단히 다물고 있었
다.
“무사합니다.”
도진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레온은 정보를 위해 그림자를 쑤셔
넣는 족족 죽였다. 가끔 살릴 때도 있었는데, 그때는 현우를 희롱하는 모습
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몇 번이나 폭발하여 본부로 쳐들어갈 뻔했다.
선우는 도진의 말을 전부 믿지 않았다. 무사하다고는 하나, 그게 온전히 건
강하단 소리는 아니겠지. 그게 아니라면 도진이 저렇게 침울한 모습일 리가
없을 테니까. 그도 형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하루만 참기로 했다.
일단은 모아 둔 자료를 취합하여 내일 재판 때 반박할 근거를 마련해야 했
다.
“한 손 보태십시오.”
선우는 서류를 좀 본다 싶은 길드원들을 전부 모았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몸을 쓰는 데 익숙한 이들은 데려온 포로를 관리
하게끔 했다. 살려 온 포로는 정확히 셋이었는데, 전부 제정신이 아니었다.
마족을 동경하며, 사람 알기를 우습게 알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고통에는
취약하다. 참으로 역겨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밤을 새우고 새벽
이 되자 선우는 옷을 갈아입었다.
내내 입고 있던 피가 묻은 옷을 벗고, 익숙한 정장을 차려입었다. 그는 도진
도 마찬가지였다.
“맡겨 주세요!”
서류는 유리가 맡았다. 원래도 그런 부분에서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라
하였다. 그리고 해가 하늘 높이 떠오른 정오. 그들은 세계 각성자 협회 건물
앞에 도착했다.
“선현 길드의 지선우입니다.”
“평화 길드의 한도진입니다.”
입구를 지키던 이는 놀란 표정을 짓긴 했지만, 둘의 출입을 막지는 않았다.
아직 한국은 세계 각성자 협회의 회원이었고, 현우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죄목은 발견되지 않았다. 일단 오늘 재판이 진행되어야 알 수 있는 사항이
다.
와 여긴 무슨 낯으로 왔대?”
둘을 본 다른 나라의 길드 장들은 바쁘게 입을 놀렸다.
“그러게. 형이 빌런이잖아. 그렇다면 그 동생도 뭔가 있는 거 아냐? 뭔 낯짝
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한창 이야기를 나누는데 둘 옆을 작은 여성 하나가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잘 모르면 조용히 하지요?”
그렇게 말하는 여성 옆에는 각성자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아윤
과 자윤이었다.
“아윤아.”
“알아, 아는데 짜증 나잖아.”
아윤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오빠에게 대답했다.
“그래도 곧이잖아.”
“그래, 곧이지. 이제 판도는 뒤바뀔 거야.”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아윤은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다른 길드 사람들도 데려올 걸 그랬나?”
“도가준은 할 일이 있잖아.”
“ ,
그래, 할 일이 있지.”
천족과 마족의 감시 말이다. 그나마 혜선은 여유가 있었지만, S급 각성자
하나는 국내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움직이지 못했다.
“곧이어 재판이 시작됩니다. 각자 자기 자리를 찾아 착석 부탁드립니다.”
방송이 넓은 공간에 울려 퍼졌다. 그러자 이미 와서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임시 재판장이 된 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국의 각성자들도 마찬가
지였다.
홀은 중앙에 넓은 무대를 중심으로 의자가 그를 둘러싸고 있는 형태였다.
책상 위에는 각 나라의 국기가 작게 세워져 있고 모두 자리에 맞게 착석했
다.
“저건 뭘까?”
무대의 중앙에는 커다란 까만 천으로 가려진 네모난 것이 있었다. 아윤은
그를 보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쳤다.
“전부 착석하셨습니까? 확인 후 세게 각성자 협회 최초의 빌런 재판을 시작
하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무대에 있던 까만 천이 스르르 흘러내려갔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이는 눈과 가려진채 구속당한 현우였다. 그를 본 아윤은 불안한 눈
빛으로 옆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도진과 선우가 앉아 있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둘 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은 모양새다.
“
안 돼요. 안 됩니다!”
그걸 옆에 서 있던 여성이 필사적으로 뜯어말렸다.
“여기서 뛰쳐나가면 준비한 것들이 전부 수포가 돼 버려요!”
분노에 찬 깊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둘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무
대에 각성자 하나가 나타났다. 아나이스, 세계적으로 명망 높은 힐러였다.
“오늘 진행은 제가 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나이스는 선량한 표정으로 말했다.
“먼저 브리핑을 하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얀 벽면 위로 미리 준비된 자료가 떠올랐다. 그
걸 보면서 아나이스는 차근차근 현우가 빌런으로 지목된 이유를 설명했다.
이상할 정도로 힘을 숨기고 있었던 점, 마기를 다룰 수 있는 점, 그 외에 조
금 의아하다 싶은 부분은 모조리 끄집어냈다.
그것만 들으면 영락없이 현우가 빌런처럼 느껴졌다.
“저렇게 작은 녀석이?”
“네가 큰 거고.”
“내가 보기엔 아닌 것 같은데.”
하필이면 바로 옆이 일본이다. 익숙한 이와모토 준이치가 사나운 시선으로
무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
시끄럽습니다.”
떠들어 대던 다른 일본 길드의 사람들은 준이치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한
국을 싫어하니 적극적으로 몰아갈 줄 알았는데, 일단은 지켜보겠다는 태세
다. 그는 러시아를 비롯한 몇몇 나라도 마찬가지였다.
“가디언 길드? 정의를 위한 길드지. 그건 알지만 이번은 어쩐지 감이 좋지
않아.”
이반이 말했다.
“길드장님께서 감만으로 추측하는 건 지양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런데.”
고개를 기울인 이반은 한국 쪽을 바라보았다.
“선현 길드의 움직임이 묘했단 말이지. 그러니 일단은 지켜보자고. 일이 어
떻게 돌아갈지.”
그쯤 되어 아나이스의 설명이 끝났다.
“그러니 우리는 지현우, 그를 빌런으로 정의하고자 합니다. 이의 있습니
까?”
아나이스가 물었다. 그러자 지선우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
지현우는 빌런이 아닙니다. 진정한 빌런은 다른 이입니다.”
“그걸 증명하실 증거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드디어 그동안 준비해 온 것이 빛을 발할 때가 왔다.
“
123.
“ ,
아 슬슬 시간이 되었나?”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던 알베르크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무슨 시간?”
때마침 현우의 재판은 방송으로 송출되고 있었다. 이는 세계 각성자 협회에
서 동의한 사항이었다. 그렇기에 가준은 초조한 얼굴로 재판의 시작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작스러운 알베르크의 행동에 그를 바라보았다.
“내 현우를 데려갈 시간.”
알베르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처음 들어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금방 깨달았다.
“이번 일에 수작을 부린 건가?”
“수작이라기보단 약간의 협조랄까.”
“그게 그거지!”
가준은 소파에서 튕기듯 일어나며 품속의 병을 잡았다. 그러나 그가 미처
공격하기도 전에 알베르크가 더 빨리 움직였다.
“넌 이제 필요 없어.”
날카로운 손톱이 가준의 목을 긁으려 하였다. 그걸 아슬아슬하게 막은 건
미리엘이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이래서 마족이란 족속은 믿을 수가 없어.”
미리엘은 무기를 꺼내 든 채 알베르크를 노려보았다. 그래도 현우를 사랑하
는 마음은 진실인가 했는데, 결국은 이렇다. 마족의 진심이란 이리 덧없는
가.
“오늘에야말로 끝을 내주마.”
이를 악문 미리엘은 손에 든 창으로 알베르크를 찔러 들어갔다.
“엿차.”
나름 회심의 공격이었으나, 알베르크는 그를 쉽게 피해 냈다.
“그건 무리일 것 같은데. 넌 너무 어려.”
“넌 늙었고?”
“뭐, 그렇다 할 수 있지?”
둘의 대화 사이에 가준이 끼어들었다.
대체 왜? 왜 현우를 위험에 빠트린 거냐.”
“알게 해 주고 싶어서.”
“무엇을?”
“인간들이 얼마나 추악하고 쉽게 마음을 돌리는지를 말이야. 그리고 결국
내 뜻대로 됐어. 저것 봐. 자신을 도와주었던 이를 의심하는 모습을 말이
야.”
“뜻대로 되진 않을 거다.”
“알고 있어. 지선우가 현우를 위해 뛰어다니고 있는 일쯤은. 하지만 그래서
뭐? 그 자료가 세상에 나오는 일이 있을 것 같아?”
알베르크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리고는 허공에 문을 열었다. 그게 공간이
동을 위한 문인 걸 깨달은 미리엘이 필사적으로 공격을 퍼부었으나, 별 소
용이 없었다.
‘이렇게 된 거!’
미리엘은 잠시 공격을 가준에게 맡기고 틈을 엿보았다. 공간의 문은 누군가
통과한 뒤에도 잠시 남아 있다. 그걸 다시 열고 따라 들어가는 건 인간에겐
힘들겠지만, 미리엘이라면 가능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마침내, 알베르크가 문을 통과했을 때 미리엘도 따라가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다소 억지스러운 방법으로 따라온 탓인지 도착 시간이 어긋난 것 같
았다. 미리엘이 도착했을 땐, 이미 알베르크는 모습을 감춘 뒤였다.
“
그래도 포기할 것 같으냐!’
미리엘은 가만히 눈을 감고 집중했다. 가장 큰 마기를 쫓는 것이다.
‘미리엘, 너는 추적에 재능이 있다.’
아버지는 그리 말하셨다. 그리고 미리엘은 그런 아버지를 믿었다.
“찾았다.”
위치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그럴싸한 건물이었다.
‘
*
유리는 생각했다. 하룻밤 사이 추가된 자료를 정리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던
가. 그걸 생각하면 절대 이 기회를 허투루 넘길 수 없었다. 위로 올라간 그
녀는 앞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여기 있는 수많은 각성자를 설득할 시간이었
다.
‘난 할 수 있어.’
길드장님이 믿고 맡겨 주신 일이다. 어떻게든 훌륭하게 해낼 생각이었다.
“그럼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심호흡을 하며 입을 여는 순간, 건물이 흔들렸다.
쿵!
무언가 무거운 것이 내려앉는 소리와 함께,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러자
앞을 향해있던 다른 각성자들의 시선이 자연 돌아가기 시작했다.
‘안 돼!’
유리는 있는 힘껏 책상을 손으로 내려쳤다.
탕!
비록 정신계라도 그녀도 각성자다. 아무리 단단하게 만들어진 책상이라도
아이템이 아니라면 쪼개 버릴 수 있었다. 앞에서 들려온 소리에 사람들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들어 주십시오. 저희가 조사해 온 건 지현우 님의 일만이 아닙니다. 가디언
길드의 숨겨진 비리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유리는 단숨에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이때야!’
이제 지금까지 알아낸 것 모두를 토해 낼 시간이었다. 그걸 듣고 저들이 어
떤 반응을 보일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래도, 알려야 하는 일이었다.
“가장 먼저 이 사진을 봐 주십시오.”
하얀 벽면에 그로테스크한 사진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인체 실험?”
하나같이 눈이 좋아서 그런지 금방 알아보았다.
맞습니다. 전부 인체 실험의 피해자들입니다. 그들은 때로는 각성자이기도
했고, 때로는 아무런 능력 없는 일반인이기도 했습니다. 사진은 더 있습니
다.”
실험실의 수조에 갇혀있는 기이하게 변한 사람들, 대부분은 죽어 있었지만
드물게 살아 있는 이도 있었다.
“끔찍한데?”
“그러게. 인체 실험을 하는 미치광이들은 거의 다 잡지 않았나? 저게 또 어
디서 나온 거지?”
“방금 가디언 길드를 들먹였잖아.”
“가디언 길드가 저런 일을 저지른다고? 그럴 리가 있나! 그들은 미국을 살
리고, 전 세계를 살렸어!”
“일단은 더 들어보도록 하지.”
의견이 분분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유리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이 모든 사람들은 사람에게 마기를 접목시키고자 하는 실험의 희생자입니
다. 그리고 이들이 발견된 장소는 도심 외곽에 있는 가디언 길드의 지부였
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 같이 동행하며, 확인하신 분도 계십니다. 앰
버. 이리 와 주십시오.”
유리의 말에 앰버가 차분하게 앞으로 나섰다.
“앰버면 중앙본부에서 일하는 정신계 각성자 아닙니까?”
“
공격적인 면은 약하지만, 전파에 강해서 제법 큰일을 맡고 계시는 분이지
요. 그런데 그분이 왜 저기 있는 걸까요?”
“진정하십시오. 가디언 길드가 아닌 일부 지부의 일탈일 수도 있습니다. 아
시지 않습니까? 가디언 길드의 지부가 얼마나 많은지. 저는 레온 님을 믿습
니다.”
여기까지 해도 아직 레온을 믿는 이들은 많았다. 그러니 더 많은 자료로 저
들의 머리를 깨트려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입을 여는 순간, 무언가가 닫힌 문을 강하게 두드렸
다. 그러더니 결국엔 문을 부수고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는 세 개의
머리를 가진 커다란 개였는데, 두 눈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저, 저건?”
“몬스터다!”
일부가 습관적으로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지만, 무기는 이미 입구에 맡기고
온 터였다.
“제길!”
자연 육체를 다루는데 능한 각성자가 앞에 나섰다.
“이거 지현우가 다루던 몬스터 아냐?”
“맞는 것 같은데?”
“
그때 반대편에 있는 다른 문도 터져나갔다. 그리고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
오는 것은 블랙 드레이크 점박이였다. 초조한 마음으로 앉아 있던 선우가
몸을 일으켰다.
“케로!”
케로의 이름을 불러 보았으나 반응이 돌아오지 않는다. 이제 입에서는 거품
마저 질질 흘리고 있었다.
쿵!
다시 한번 천장이 울린다. 여기 둘이 있다면 다른 하나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두눈이란 이름을 가진 블랙 드래곤이 천장을 무너트리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상해.’
셋은 현우에게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현우의 명령도
없이 세계 각성자 협회에 쳐들어온다고? 선우는 그럴 리 없다고 믿었다.
“한도진.”
“네, 움직여야겠군요.”
여기서 저들이 날뛰게 두었다가는 이쪽만 불리하다. 현우의 결백을 증명하
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단 소리였다. 그러니 일단은 막아 내야겠
다고 생각했다.
“아인, 레나. 둘은 점박이에게 붙으십시오.”
네
“케로는 내가 상대하겠습니다. 남은 사람은 현우 형과, 유리. 그리고 자료를
지키십시오.”
“그럼 저는 위로 가 보겠습니다.”
그림자에 휩싸인 도진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걸 확인하자마자 선우는 케로
앞에 나섰다.
“뭐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케로를 막아서고 있던 각성자 이반이 투덜거렸다.
“둘 다 같은 편 아닙니까?”
“지금은 아닙니다.”
선우는 손을 앞으로 내밀어 얼음 결정을 만들어 냈다.
“쉽게 양보하긴 싫은데.”
이반의 말에 선우가 말했다.
“그럼 저는 보조를 하겠습니다.”
“탁월한 생각! 그럼 가 보겠습니다?”
이반은 양손을 부딪치더니 케로에게 달려들었다. 목이 문에 낀 케로가 곧바
로 입에서 화염을 뿜어냈지만,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러시아의 이반은 무
“ !”
혁과 마찬가지로 화염 속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으아아! 이럴 줄 알았으면 무기를 가져왔지!”
레나는 투덜거리며 안쪽으로 들어온 점박이를 노려보았다.
“율무가 그쪽으로 달려갔으니, 곧 무기를 가져올 거다.”
“그럼 그때까지만 버티면 되는 거지?”
주먹을 꽉 쥔 레나는 점박이 앞을 가로막았다.
“우리 귀여운 점박이가 왜 미쳤는지는 모르겠지만, 봐줄 수는 없단다. 이 누
나를 원망하지 마렴.”
순식간에 점박이에게 접근한 레나는 그대로 다리를 두꺼운 목에 휘감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힘을 주어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점박이는 그녀를 떼어
놓으려고 머리를 흔들었지만, 아인이 그걸 가만히 두지 않았다.
한편, 위로 올라간 도진은 지붕 위에서 쿵쿵거리고 있는 블랙 드래곤을 발
견했다. 그 또한 다른 둘처럼 상태가 이상해 보였다.
“두눈.”
이름을 부르자 드래곤이 고개를 들어 도진을 바라보았다.
“크르르르.”
붉은 눈에는 이성이 담겨 있지 않았다.
124.
“
정신 차리라고 해도 통하지 않겠군.”
도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림자를 불러들였다. 두눈이 아무리 마법에 서툰
드래곤이라고 해도, 기본적인 능력이 인간보다 뛰어났다.. 두꺼운 비늘과
살 또한 그러했다. 그걸 뚫기 위해서는 어지간한 힘이 아니면 힘들 것 같았
다.
건물에 퍼트렸던 그림자를 모두 그러모으자 두눈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이쪽
으로 향한다.
그래도 살기를 느낄 정도의 이성은 있는 모양이었다.
‘단숨에 간다.’
안타깝지만, 두눈에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현우는 묶여
있는데, 그 고통을 더 늘리긴 싫었으니까.
단단히 각오하고 손을 뻗는 순간, 하늘에서 떨어진 무언가가 두눈의 머리에
매달렸다.
미리엘이었다.
“잡아!”
갑자기 나타난 그는 도진에게 외쳤다. 그 말에 따라 그림자를 이용해 두눈
을 구속하자마자 미리엘이 양 손으로 머리통을 꽉 잡았다.
머리통이 커서 손바닥을 대는 형태가 되긴 했지만, 뭔가 하긴 한 모양이었
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눈은 그 자리에 스르륵 쓰러져 잠들었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쉬는 미리엘을 향해 도진이 물었다.
“여긴 어쩐 일입니까?”
“알베르크를 따라왔다. 그런데 소란이 일어났기에 이쪽으로 온 거지.”
“알베르크?”
“그래, 너희 설마 그 간악한 마족을 믿고 있었던 건 아니지? 그가 이번에 무
슨 일을 벌이려는 것 같다. 그 때문에 내가 직접 나선 거고.”
미리엘은 가슴을 펴고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래,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일단은 움직이면서 이야기하죠.”
도진은 미리엘을 잡아다 잽싸게 아래로 이동했다. 그리고 선현 길드 사람들
과 이반이 막고 있는 몬스터 쪽으로 그를 내던졌다.
“무례해.”
미리엘은 투덜거리면서도 용케 몬스터에게 접근하여 전부 잠재워 버렸다.
“와아. 감사합니다.”
힘겹게 막고 있던 레나가 미리엘에게 인사를 했다.
“
그런데 정말 천사같이 생기신 분이네요.”
“그야 내가.”
미리엘이 사실을 말하려는 순간, 도진이 그림자로 그의 입을 막았다.
“제법 재밌는 순간이었는데.”
이반은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런 그에게로 준이치가 접근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들지. 지금 상황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면 그건 이상한 놈이겠지.”
“갑자기 지현우가 테이밍한 몬스터가 난입한다니 너무 공교롭지 않습니까.
주인을 구하려 날뛰는 걸 수도 있겠지만 몬스터를 통제하지 못하는 행위는
재판에서 불리할 뿐입니다. 선현 길드장은 이럴 빌미를 줄 만한 사람이 아
닙니다.”
“형은 자신을 구하라고 몬스터들에게 명령한 적이 없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요. 보셨다시피 저희는 오늘 재판에서 현우 형이 빌런이 아니란 걸 증
명할 예정이었습니다.”
준이치는 자신의 라이벌인 지선우를 우습게 보는 듯한 수작이 불쾌하다는
듯이 내뱉었다. 선우는 준이치를 힐끗 보고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건물을 지키는 각성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이 정도 소란이면 사람이
더 몰려와야 하지 않나?”
이반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
그렇게 생각하는 게 둘만은 아니었다. 각 나라의 각성자들도 이상함을 느끼
고 저들끼리 무리 짓기 시작했다.
그때쯤. 중앙의 단에 아나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흥분한 듯 새빨간 뺨을
가진 그녀는 양손으로 뺨을 감싸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러분!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데 어떤 것부터 들려드릴까요?”
그 말에 몇몇 각성자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아나이스를 바라보았다.
지금 상황이 저런 이야기를 할 때였던가.
자연스럽게 모두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과연 저 앞에 서 있는 여자
는 진짜 아나이스가 맞을까?
“좋은 소식부터 말해 보지?”
어느새 러시아의 인원들과 합류한 이반이 아나이스에게 말했다.
“좋은 소식은요! 드디어 레온 님께서 원하던 목적을 이루셨어요!”
손을 앞으로 내밀며 열렬하게 외치는 모습이 광신도를 연상케 했다.
“나쁜 소식은 뭡니까?”
이번에는 도진이 물었다.
“음, 그건 말이죠. 오늘 여기 있는 분들의 대부분이 죽을 거라는 거예요! 불
쌍해라아.”
“아나이스님?”
평소 아나이스를 알고 지냈던 이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이름
을 불렀다. 그리고 유리는 서류를 품에 안고서 어떻게든 떨어지기 위해 애
를 썼다. 하지만 단의 끝까지 물러나서도 내려오지 못하는 건, 아직 전하지
못한 말이 많기 때문이었다.
“그럼 다들 저를 위해 죽어 주세요.”
아나이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커튼으로 가려져 있던 통로에서 무언
가가 구물거리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걸 가장 먼저 알아본 이는
선현 길드의 사람이었다.
마기를 품고 기괴하게 변형된 각성자. 그들 중 절반 이상은 가디언 길드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이거 하나만은 확실합니다. 저들은 적입니다.”
“누가 그걸 몰라? 그 적이 왜 가디언 길드의 제복을 입고 있느냐, 그거지.”
순식간에 내부가 소란스러워졌다. 혈기 넘치는 이가 앞서 괴이하게 변한 사
람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상대가 쉽지 않았다.
“원래 각성자였던 분들이거든요. 상대하기 쉽지 않을 거랍니다.”
아나이스가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웃음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곧바로 그녀를 공격해 오는 창 때문이었다.
“사악한 마족!”
어머, 햇병아리 천족 아니어요?”
“내 창 앞에 무릎 꿇어라!”
“그건 싫은데.”
아나이스는 웃으며 뒤로 물러나 현우 뒤로 숨었다.
“가까이 다가오면 이 사람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그 말에 다가서려던 선우와 도진이 발걸음을 멈췄다. 멈추지 않는 이는 미
리엘뿐이었다.
미리엘은 그대로 앞으로 나서 순식간에 창을 휘둘렀다. 그러자 축 쳐져 있
던 현우의 목이 툭 떨어져 낼렸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형!”
선우가 놀란 표정으로 다가서자, 미리엘이 말을 툭 내뱉었다.
“가짜다.”
실제로 가까이서 보니 뼈와 살이 있어야 할 부분엔 이상한 쓰레기 같은 물
질이 가득 차 있었다. 미리엘이 그를 확인시켜주자 아나이스가 혀를 찼다.
“에이, 재미없게. 그렇게 금방 눈치채면 재미없답니다.”
“알게 뭐냐. 가짜 인형으로는 내 눈을 속일 수 없다. 그러니 그만 목을 바쳐
라.”
“
미리엘의 말에 아나이스가 실실 웃으며 쓰러진 현우의 인형을 일으켰다. 그
걸 본 선우와 도진은 일단은 뒤로 빠지기로 했다. 선우는 차마 형의 모습을
닮은 인형을 공격할 수가 없어서. 도진은 미리엘이 했던 말을 떠올려서였
다.
‘알베르크.’
그를 찾아야 했다.
둘이 물러서자 미리엘은 다시 매섭게 아나이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를
보는 다른 각성자들은 저 천사같이 생긴 청년을 말려야 할지, 놔둬야 할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지금 미친 행동을 하고 있긴 해도 그동안 쌓아 온 것
이 많은 아나이스였다. 그 때문에 섣불리 손을 댈 수 없었다.
“세뇌당하셨을 수도 있으니까.”
“맞아. 그럴 수도 있어.”
의견을 내고 납득한 그들은 다른 이들과 손을 보태 밀려들어 오는 몬스터를
막았다. 하지만 상대하기도 까다로운 것이 수 또한 많았다.
“여긴 좁아! 나가자!”
몇몇 속성계 각성자가 나가려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문밖으로 나설 수가 없
었다. 허공을 두드리면 벽 같은 게 느껴졌으나, 깨지지 않았다. 최악의 상황
이었다.
알베르크는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마계에는 제대로 된 음악이 없기에,
지상으로 내려선 뒤로 익힌 음악이었다.
지상도 좋은 건 제법 많았지.’
하지만 그래도 알베르크의 고향은 마계였다. 언제까지 여기서 버티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세계의 존재에게 들키면 곤란해지기 때문이었
다.
“저, 저는 이만 물러나도 되지 않을까요.”
알베르크의 의상 주머니에 야무지게 들어가 있던 요정이 울상을 지으며 말
했다.
“안 돼.”
“진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요정은 울상을 지으며 다시 주머니 안에 콕 처박혔다. 길게 이어지는 복도
를 걷고 있자니, 반대편에서 레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날 속였더군.”
“아니요. 전 속인 게 없습니다.”
“없다고?”
알베르크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지현우를 망가트려서 내주겠다 했지요?”
‘
그랬지.”
“그 약속 지켜질 겁니다. 지금 벌어지는 소란은 원래 제 계획 속에 있던 겁
니다. 그러니 안심하세요. 당신을 속이고자 한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협회 건물에 각성자들을 가둬서 죽이는 게 원래 계획이었다고?”
“정확히는 좀 다릅니다. 저들 중 많은 수가 죽겠지만, 그래도 살아남는 자도
있을 겁니다. 딱 그 정도로 맞게 조정했거든요. 그리고 그들은 마지막에 놀
라운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레온은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인류의 구원자, 세상을 위한 정의, 가디언 길드의 수장이 사실은 빌런이라
는 것을요.”
“지독한 취미군.”
“알베르크 님만 할까요.”
지금 레온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냄으로서 사람들에게 불신을 심어 주고자
하고 있었다. 너희들이 절대적으로 믿어 오던 가치는 쓸모없는 것이었으며,
정의란 없다는 것을 알려 주려는 것이다. 그걸 위해 지금껏 얼마나 열심히
연기를 해 왔던가.
세상을 뒤흔들고, 사람들을 망가트린다. 그리고 그들이 한없이 연약해진 뒤
에는 이 세계를 손에 넣는 것이다.
“나는 그쪽에 비하면 선량한 마족이지.”
“
선량한 마족. 그것만큼 우스운 이야기가 어디 있습니까.”
레온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 그리고 이건 서비스입니다. 지선우와 한도진은 반드시 죽여 드리도록
하죠. 알베르크 님도 그걸 원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 그랬지.”
“그럼 이제 지현우에게로 가시면 되겠군요. 그를 구출하고 나면 이미 모든
상황은 어느 정도 정리된 뒤일 겁니다.”
손을 흔들어 보인 레온은 알베르크가 지나온 복도를 되짚어 걸어갔다.
“안, 안돼요!”
무서움에 웅크리고 있던 요정은 레온이 자취를 감추자마자 주머니에서 뛰
쳐나왔다.
“당장 저 마족을 말려야 해요! 이건 규칙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난 상관없는데.”
“알베르크 님! 나, 나중에 현우 님이 사실을 알고 미워하면 어쩌시려고요!”
“그 사정을 아는 입은 여기 하나뿐인데?”
알베르크가 서늘한 표정으로 요정을 바라보았다.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지?’
“
요정은 식은땀을 흘리며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125.
이후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레온과 알베르크는 서로를 경계하듯 스치
고 지나갔다. 이제 동맹은 깨졌으니 각자의 할 일을 할 때였다.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알베르크를 보며 요정은 입을 꾹 다물었다. 머리를
굴려 보아도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었다. 천족인 미리엘이 있었지만,
그쪽은 너무 꼬맹이다. 그저 속만 터져 나갈 뿐이었다.
그런 요정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베르크는 사뿐히 걸어 원하던 목적
지에 도착했다. 세계 각성자 협회가 등급 높은 빌런을 임시로 가둬 두기 위
해 만든 감옥에 말이다. 원래라면 그 앞을 지키는 각성자가 있어야겠지만,
지금은 비어 있다.
드디어 원하는 바를 손에 넣게 된 알베르크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오랜만에 현우를 만나러 가는 건데 이런 모습은 좀 그런가.”
알베르크는 지금도 여전히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모습도 나쁘진
않았지만, 그래도 처음 현우를 만났을 때처럼 성인의 모습을 하고 싶었다.
그랬기에 그동안 조용히 모아온 힘을 발휘해 모습을 변화시켰다. 자그마하
고 호리호리하던 소년의 키가 쑥쑥 자라더니, 몸에 근육이 붙기 시작했다.
“
잠깐의 시간 사이에 소년은 청년으로 거듭났다. 허리춤까지 오던 머리카락
은 더 길어졌고, 부드럽던 눈매 또한 더 날카로워졌다. 겉보기에는 한창때
의 청년처럼 보였으나, 그건 늙지 않는 마족의 특성일 뿐, 눈을 바라보면 거
기서 세월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럼 가볼까?”
“
알베르크는 열린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공간에 놓인 큐브의 문
은 여전히 닫혀 있었지만, 그 정도를 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가엾게도.”
큐브의 문을 부수고 들어가자, 안에는 전신이 속박당한 현우가 의자에 늘어
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보다 더 마르고, 힘겨워 보였다.
알베르크.”
그 상황에서도 현우는 알베르크의 목소리를 한 번에 알아냈다. 이름을 부르
는 목소리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
그래, 나다.”
“
현우는 다시 입을 열었지만, 달싹이기만 하다 다물었다. 말을 이어 나갈 힘
이 없는 모양이었다.
“내가 너를 구해 주러 왔어.”
알베르크의 상냥한 목소리에 요정이 괴로운 표정을 지었지만, 그게 다였다.
그는 그저 이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목소리에 마기가 담기기 시작했다. 사람을 현혹하며 마음을 바꾸게 만드는
힘. 그 힘이 현우를 어루만졌다.
“
원래라면 먹히지 않을 힘이었다. 현우는 마법은 잘 몰랐지만, 마계에서 지
내는 동안 마기에 대한 저항력을 키웠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그
는 지친 상태였다.
이를 악물고 있던 요정은 허공에서 힘차게 솟아올랐다. 흔히들 요정은 감정
도 없는 존재라고 말했지만, 아니다. 그들도 감정이 있고, 누군가를 좋아하
기도 했다.
요정 또한 그러했다.
틀렸네.’
‘
마계에서 지내는 동안 현우에게 정이 든 모양이었다. 하긴 같이 한 세월이
얼마나 길었던가. 무리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요정은 현우를 위해 알베르크
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다른 곳에 연락을 넣으려 하였다.
그건 천계일 수도 있었고, 요정계일 수도 있었다. 어디든 가장 빨리 연결되
는 곳으로!
하지만 막 힘을 발휘하려던 순간, 요정은 알베르크의 힘에 얻어맞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으윽!”
다시 일어나려 했지만, 알베르크가 요정을 재차 걷어찼다. 어떻게든 힘을
짜내 몸을 보호했지만, 목숨만 건졌을 뿐이었다. 요정은 헐떡이며 흐려져
가는 눈으로 알베르크와 현우의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하지만 이제 힘든 일이라곤 없을 거야.”
“
요정을 잔인하게 걷어찬 알베르크는 현우에게는 마치 솜사탕같이 굴었다.
내가 장담할 수 있어. 남은 건 행복뿐일 거야.”
네가 나와 함께 가 주기만 한다면.
“
같이 마계로 돌아가자.”
“
알베르크는 달콤하게 속삭이며 현우의 눈을 가린 천을 걷어 냈다. 이 정도
면 자신의 암시에 빠져들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걷어 냈으나, 틀렸다.
현우의 눈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맑게 반짝이고 있었다.
개소리를 참신하게도 하네?”
“
알베르크의 안색이 변했다. 그러나 그도 잠시, 아직 현우가 구속되어 있음
을 깨달은 알베르크는 재차 암시를 걸려고 했다.
“시발, 내가 이거 풀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르지?”
현우의 팔이 불쑥 올라와 그런 알베르크의 멱살을 잡았다. 어느새 그를 묶
고 있던 사슬은 풀려 있었고, 남은 건 구속복뿐이었으나 그마저도 찢어 냈
다.
자유의 몸이 된 현우는 멱살을 잡고 있던 알베르크를 밀쳐 냈다.
“마계는 너 혼자 가. 난 가지 않아.”
왜
“ ?”
왜냐니.”
“
인간들은 이제 널 싫어할 텐데?”
“그렇군.”
“
현우는 놀라우리만치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다른 이유는 더 없어?”
“내가 널 사랑한다.”
“
그것도 나에겐 중요하지 않아.”
“
현우.”
“나에게 더 중요한 건 말이지. 내가 갇혀 있는 동안 들었던 엿 같은 소리가
레온 혼자만의 계획이 아닌 것 같단 거지. 너도 손을 보탰지?”
“
그랬다면?”
“
알베르크의 대답에 현우는 한숨을 탁 쉬었다.
“그럴 줄 알았다. 마족이 마족이지. 변할 리가 없지.”
날 어떻게 할 거지?”
“
뭘 어떻게 해. 아무것도 안할 거다.”
“
그 말에 알베르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널 그렇게 괴롭게 만들었는데도?”
“그래. 너에겐 내가 복수하는 것보다 무관심을 보이는 게 더 괴로울 거란 걸
아니까.”
“
현우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안 돼.”
돌아서는 뒷모습을 보던 알베르크가 사납게 부정의 말을 내뱉었다.
“
이렇게 널 놓칠 순 없어.”
“
현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만약에 이대로 나를 두고 돌아선다면 밖으로 뛰쳐나가 인간들을 죽이겠다.
대부분의 강한 각성자는 이 건물에 걷혀 있으니, 딱히 막을 자도 없겠지.”
어떻게든 현우를 돌아보게 만들기 위해 알베르크는 닥치는 대로 말을 꺼냈
다.
인간들은 현실에서 지옥을 맛볼 것이다.”
“아, 진짜 귀찮네.”
“
현우는 손으로 머리를 긁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래, 언젠가 한 번 끝을 보긴 해야 했지. 싸우자, 시발놈아. 대신 나에게
지면 넌 더 이상 나에게 매달리지 않는 거다.”
“
내가 이기면?”
“네 맘대로 해.”
“
좋아,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
이어 둘의 격돌이 시작되었다.
진짜 끊임없이 몰려드는군.”
“
레나는 입을 크게 벌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대체 어디에 숨겨 두었었는지
끊임없이 밀려드는 괴물들에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벽을 두드리며 깨 보려
하던 이들도 이제는 전투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간 전부 괴물의
파도에 휩쓸릴 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뒤늦게 정신 차린 켈베로스와 점박이가 합류했지만, 그래도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데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건데.”
아인이 건물 위쪽에 설치된 카메라를 가리켰다.
저거 작동중인 건가?”
“모르겠어. 혹시 몰라서 깨 보려고 했는데 꿈쩍도 하지 않아.”
“
여기 상황이 외부로 나가면 큰일일 것 같다만.”
“
그렇지.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누군가 구하러 와주겠지만.”
“아니라면 이 상황을 보고 되레 절망하게 되겠지.”
“
어지간히 강한 각성자는 전부 여기 갇혀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둘의 걱
정은 틀리지 않았다. 실제로 카메라는 내부의 상황을 지상파 방송으로 송출
하고 있었으며, 그 모습을 보게 된 이들은 하나같이 당황했다.
인터넷 게시판에 글이 올라오고 그 아래로 댓글이 주르륵 달렸다.
제목: 지금 방송을 봐!
세계 각성자 협회에 테러가 일어난 것 같아! 상황이 최악이라고!
댓글
-누가 공격한 건데?
-
처음부터 봤는데 아나이스 님 같아.
님은 붙이지 말라고! 미친 여자 아니야! 수많은 사람을 괴물로 만든 게 그
여자 같다고!
-구조대를 보내야 하는 거 아니야?
-
-
누굴 보낼 건데? 저기엔 세계에서 손꼽히는 각성자들이 있다고.
그래도 내부에서 버티는 거랑, 외부에서 공격해서 도와주는 거랑은 다를
수도 있잖아.
-
세상에, 맙소사! 봤어? 봤어? 지금 레온 님이 난리가 일어난 곳으로 향하
고 계셔! 그분이 우릴 구원해 주실 거야!
-난 모르겠어. 레온 님은 아나이스 님과 사이가 좋았잖아.
-
-
그래도 그분은 아니지! 그분은 우리들의 구원자시라고! 정의의 표본!
각성자들이 모여서 싸우는 홀 앞에 선 레온은 카메라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어?”
레온을 구원자라고 부르던 소녀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닐까, 싶어 눈을 비벼 봤지만 보이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카메
라를 보며 비웃고 있었다.
뭘 비웃는 거지?’
이런 상황에서? 불길함에 심장이 뛰었다. 소녀는 저도 모르게 가슴에 손을
얹고 TV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중간에 영상이 끊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
는데,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방송국에서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하는 모양
이었다.
‘
레온은 카메라를 보던 시선을 돌려 홀의 문에 손을 댔다. 그리고 흡수되기
라도 하는 것처럼 손쉽게 안으로 들어갔다.
여 역시 외부에서 깨야 하는 거였네.”
“ ,
괜히 중얼거려 보았지만, 그 말을 듣는 이는 없었다.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
다.
126.
내부의 사람들이 레온의 등장을 눈치챈 건 금방이었다.
레온 님이다!”
“
누군가의 외침에 순식간에 시선이 쏠렸다. 입구에서 나타난 레온은 여느 때
와 마찬가지로 옅게 웃으며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레온 님, 도와주세요!”
지쳐 뒤로 물러나 있던 각성자 하나가 그런 레온에게 다가갔다. 미국 내에
서는 레온은 특별한 존재였기에, 그런 그에게 기대려는 건 특별한 일이 아
니었다.
이제 웃으면서 괜찮다고, 도와주러 왔다고 하겠지. 모두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놓았다. S급 각성자 하나 더해진다고 이 상황이 얼마나 나아지겠냐
마는 이상하게 그에게는 믿음이 갔다. 그러나 이어진 상황은 사람들의 상상
과 달랐다.
서걱.
고기를 써는 소리와 함께 가까이 다가간 남자의 목이 날아갔다. 덕분에 가
장 가까이에 서 있던 여자는 저도 모르게 그 목을 받아 냈다.
어 어?”
“ ?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레온을 바라보는 여자의 목덜미를 누군가 잡아
당겼다. 그 덕분에 그녀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레온,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내내 싸우다 잠시 숨 돌리던 선우는 여자를 뒤로 던졌다. 다행히 누군가 받
아 주긴 한 것 같았지만, 이후 터져 나오는 비명은 막을 수 없었다.
꺄아아악!”
그녀는 잘린 목의 남자와 아는 사이인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오열했다.
“
무슨 짓이냐니요?”
“
레온은 눈을 가늘게 접으며 선우를 바라보았다. 너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지 않는냐, 는 시선이었다.
‘그래, 알고 있다.’
알고 있기에 그의 정체를 드러내 형을 구하고자 했다. 그래서 많은 준비를
해 왔고, 아나이스의 방해에 초조해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랬는데 본인이
나서서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제는 아예 숨기지 않기로 했습니까?”
선우의 말에 레온이 답했다.
“
그렇다면 어쩌겠습니까?”
“
레온이 입꼬리를 길게 끌어 올렸다. 피투성이가 된 입구에 서서 기이하게
웃는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레온을 마음 속 깊이 믿고
있던 자들도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바로 뒤에는 몬스터가 드글거림을
알고 있는데도, 지금은 그가 더 무서웠다.
“이봐, 무슨 일인 거야? 뭘 숨겼다는 거지?”
둘의 대화에 이반이 끼어들었다.
저도 알려 주십시오.”
준이치 또한 그렇게 말했다.
“
흠 그게 그렇게 궁금하다면 제가 직접 알려 드리죠. 당사자가 말하는 게
가장 빠르지 않겠습니까?”
“ ,
레온이 피에 젖은 검을 털며 말했다.
“뒤늦게 말씀드리는 사실입니다만, 저 레온은.”
사람들은 숨조차 멈춘 채 레온의 입을 바라보았다.
아 아니다. 말보다는 행동이 빠를 수도 있겠군요.”
그 말과 동시에 레온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람을 검으로 찔러 들어갔다.
황급히 선우가 얼음으로 방어를 했지만, 그마저도 뚫고서 목숨 하나를 쉽게
앗아갔다. 심지어 그는 가디언 길드의 제복을 걸친 사람이었다.
“ ,
그 뒤로도 레온은 쉽게 사람들을 쓱쓱 죽여 나갔다. 다른 각성자들이 막아
보려 했지만, 그는 집요할 정도로 약한 이들부터 처리했다. 지친 몸으로는
그의 속도를 따라잡기 힘들었다.
아아, 역시 레온 님!”
아나이스는 양손을 모으고 눈을 반짝였다. 처음에는 인간 같던 외양은 어느
새 마족의 모습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
괴 괴물!”
“ ,
누군가 아나이스를 보며 외쳤다.
“저들은 괴물이야!”
아이, 그러면 듣는 괴물은 기분 나쁘죠.”
“
아나이스가 배시시 웃으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러자 괴물이란 소리를
내뱉은 사람 쪽으로 몬스터들이 몰려갔다.
“하아, 제길.”
이반은 필사적으로 레온을 따라다니며 욕을 내뱉었다. 조금이라도 느리게
움직이면 그의 검에 사람들이 희생된다. 그렇다고 맞춰서 움직이자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합을 맞춰 보도록 하죠.”
“
그 때문에 선우가 그리 말했을 때, 그 말을 거절하지 않았다. 이미 절반 이
상의 사람이 죽었다. 더 죽게 내버려 두었다가는 위험하다. 외부에 포털이
열릴 때 그걸 막아 줄 사람들의 수가 급격히 줄어든다는 소리기도 했으니
까.
좋습니다.”
준이치도 선우의 의견에 동의했다. 먼저 선우가 얼음을 이용해 레온을 붙든
다, 그러면 이어 준이치가 덤벼들고, 마지막으로 이반이 퇴로를 막는다. 속
성이 다르긴 했지만, 셋은 제법 그럴싸하게 합을 맞춰 나갔다.
“
덕분에 각성자의 살해 속도가 점점 늦어졌다. 거기다 어느 정도 몬스터를
처리한 미리엘이 아나이스에게 붙으면서 상황은 조금씩 나아졌다.
죽어라, 마족!”
“진짜 싫다니까. 천사들은 왜 같은 말 밖에 못한담.”
“
아나이스는 투덜거리며 미리엘을 상대해 나갔다. 하지만 애초에 그는 몸을
쓰는 마족이 아니었고, 반대로 미리엘은 어리지만 전투에 능했다. 그 때문
에 세월의 격차가 메꿔지고 있었다.
쿵!
그때 바깥쪽에서 거대한 울림이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천장이 아
닌 벽면에서 울린다.
어쩌면.”
“
상황이 긍정적으로 풀릴지도 모른다. 현우의 몬스터들은 전부 정신을 차린
뒤에 사람들을 돕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소리도 그의 몬스터가 내는 소리
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다.
난 이런 상황이 좋습니다.”
그때 구석에 몰린 레온이 난데없이 입을 열었다. 작게 말하는데도 이상하게
모든 곳에서 소리가 울렸다. 그렇기에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자는 없었다.
“
힘을 합쳐서 악을 물리치려는 순간, 사람들이 희망을 품은 그 순간이 말입
니다.”
“
레온의 파란 눈이 새카맣게 물들었다.
“그 기대를 깨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아십니까? 희망 뒤에 밀려오는 절망만
큼 맛있는 건 없죠. 그렇지 않습니까? 아이나스.”
히히힛.”
“
아나이스, 아니 아이나스는 싸우는 도중에도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리비 님, 제가 충성을 맹세하신 분! 자, 얼른 이들에게 절망을 주세
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새카만 연기 같은 것이 주변을 휩쓸었다.
저건 위험하다.’
‘
그걸 인식하자마자 선우는 잽싸가 몸 주의를 얼음 방패로 감쌌다. 준이치는
검을 정면으로 들었고, 이반은 화염으로 주변을 덮었다.
다들 피하십시오!”
그러면서 잽싸게 경고를 날리자, 나머지들도 각자 방어에 들어갔다. 여기
있는 자들은 대부분 유능한 각성자들이라 자신을 방어하기까지 걸린 시간
은 극히 짧았다.
“
그런데도 연기가 걷히고 드러난 광경은 참혹했다. 가장 약한 이들부터 차례
로 죽어 가고 있었다.
이걸, 이걸 어떻게 이겨?”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걸 보는 미리엘의 표정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역시
마족다운 행위였다. 순식간에 사람들을 절망에 몰아넣고 그를 즐기는 모습
이 끔찍해 보였다. 하지만 여기서 멈춰 설 수는 없었다.
“
일단 결계만 걷어 낼 수 있다면.”
“
미리엘에게도 숨겨 둔 한 수는 있었다.
쿵!
그 사이에도 쿵쿵거리는 소리는 지속적으로 들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결계
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음 그 멍청한 드래곤이 여길 뚫는 건 불가능할 텐데.”
“ ,
아이나스가 중얼거렸다. 티아매트라면 모를까, 현우의 편에 붙은 드래곤은
어려서부터 마법에 재능이 없었다. 한마디로 육체적인 힘이 전부란 소리였
는데, 그것만으로도 결계를 흔드는 게 가능해지려면.
설마 피를 쓰고 있나?’
아무리 마법을 못쓴다 하여도 육신은 드래곤. 피를 이용하여 결계를 두드린
다면 마법보다는 못해도 어떻게든 풀 수는 있을 것이다.
‘
슬슬 물러날 때가 되었나?’
아이나스는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
『자, 그래서 이제는 제가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피투성이 사체를 뒤로 하고 레온이 말했다.
살육의 장면을 고스란히 본 소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저도 모
르게 한 단어를 뱉어 냈다.
“빌런.”
하지만 왜? 그는 가디언 길드의 수장인데? 대체 뭐가 부족해서 빌런 짓을
하는 거야? 그동안 평화를 위해 힘써 왔잖아.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지내는
세상이 꿈이라고 했잖아!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거짓말, 거짓말이지?”
“
소녀는 다급히 노트북 앞으로 다가가 게시판을 열었다. 떨리는 손으로 마우
스를 움직이자 혼란에 빠진 글들이 보였다.
어느 글을 열어 보아도 다들 비슷한 말을 하고 있었다. 지금 본 게 혼자만의
환상이 아니란 소리였다.
말도 안 돼.”
“
소녀는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말도 안 돼.”
그럼 이제 이 세상은 어떻게 되는 거야? 저기 있는 각성자들이 죄다 죽어
버리면 누가 포털을 해결하지? 세상의 모든 각성자들이 저기에 들어간 게
아니란 건 알지만, 절망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소녀가 느끼는
심정을 다른 이들도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움직이는 이들이 있긴 있었다. 그건 놀랍게도 남은 가디언 길드 사
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수장이 빌런인 걸 알게 되었으면서도, 사람들
을 구하기 위해 늦게나마 몸을 움직였다.
레온에게 반해 들어온 이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내심 품고 있던 감정이 있
었다. 세계의 평화를 지키겠다는 그 마음. 그 마음이 그들을 움직였다.
127.
!
쿵
두눈은 다시 한번 힘차게 머리를 박았다. 어찌나 세게 박았던지 안 그래도
흐르던 피가 주변에 튀기 시작했다.
무리하고 있다.’
도진도 그걸 알고 있었지만 두눈을 말리지 못했다. 지금은 이게 최선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가 아니라면 결계를 깰 만한 이가 없었다.
‘
어서 결계를 깨고 들어가 현우를 구해야 한다.’
‘
현우를 생각하기만 하면 절로 초조해졌다. 그렇기에 두눈의 옆에서 힘을 보
태 보았지만, 결계는 흔들리기만 할 뿐 쉽사리 깨지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
할 수 없었기에 온 힘을 다했다. 그리고 마침내, 두눈이 결계를 뚫어 내는데
성공했다!
구멍을 뚫은 두눈은 그대로 그 자리에 쓰러졌고, 도진은 황급히 안으로 들
어서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바로 뒤에서 폭음이 터졌다.
무심결에 돌아보자 터져 나온 벽면 너머로 주먹을 치켜드는 인영이 보였다.
인영은 누군가의 멱살을 쥔 채로 몇 번이나 주먹을 휘둘렀다. 신체적인 조
건은 아래 깔린 이보다 못해 보였으나, 공격이 제법 매서워 보인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먼지 구름이 가라앉고, 도진은 두 인영의 얼굴
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래 깔린 건장한 청년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으나, 그
위에 올라탄 이는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시발 새꺄, 죽어!”
욕과 함께 다시 주먹을 내려치는 현우를 보며 도진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현우야!”
“
그제야 미친 듯이 주먹질을 하던 현우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도진을 바라보
았다.
“어?”
현우는 도진을 바라보다가 하늘을 한 번, 땅을 한 번 보았다. 그러더니 멱살
을 잡은 사람을 질질 끌고서 자신이 터트린 벽 너머로 넘어갔다. 그리고 얼
마 지나지 않아 반대편에서 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 너 때문이야!”
단단한 가죽 주머니를 두들겨 패는 소리가 났다.
“
하하, 뭐 어때서 그래? 어차피 본성을 보일 건 각오한 거 아냐?”
“
내 본성이 어때서!”
“마족하고 비슷하지.”
“
아니거든? 그래, 넌 좀 더 맞자.”
“
현우가 다시 주먹을 드는 순간, 도진은 벽을 넘어 그에게로 다가왔다.
“현우야.”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현우는 일단 알베르크의 멱살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울망거리는 눈으로 도진을 보며 목소리를 끌었다.
혀엉!”
“
현우야!”
“형!”
“
도진은 현우와 끌어안으려 했지만, 그 전에 방해가 들어왔다.
나도 여기 있거든?”
“그쪽은 누구십니까?”
“
와 같이 지낸 시간이 얼만데 못 알아보냐?”
“ ,
같이 지낸 시간? 그제야 도진은 엉망이 된 청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
고 그와 닮은 한 소년을 떠올렸다.
“알베르크?”
“그래.”
알베르크는 히죽거리며 대답했다.
“당신, 대체 여기서 뭘하고 있는 겁니까?”
보면 몰라? 현우와 싸우고 있었지.”
“
일방적으로 처맞는 걸로 보이던데. 도진은 알베르크와 현우를 번갈아 바라
보았다. 현우의 옷차림은 대체로 말끔하였지만, 알베르크는 먼지투성이였
다.
내가 좀 더 더러운 건 봐줬기 때문이지.”
“봐주긴 뭘 봐줘?”
“
내가 제대로 싸웠으면 네가 멀쩡할 수 있었을 것 같아?”
“
그럼 제대로 싸우던가!”
현우가 욱해서 다시 주먹을 쥐고 다가서려는 걸, 도진이 막았다.
“
일단 진정해, 현우야.”
“
손목을 붙잡고 부드럽게 말하자, 현우도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
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홀쭉해진 몸을 보니 가슴이 아파 왔다. 역시 이
계획에 찬성하는 게 아니었는데. 뒤늦은 후회를 하며 도진은 현우를 보듬었
다.
그때, 알베르크가 갑자기 뾰족한 귀를 쫑긋 세웠다.
와나. 저게 미쳤나!”
“
뭔데?”
“지금 결계 안에 애송이가 있는 거지?”
“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결계가 깨졌고?”
“
그렇습니다.”
“환장하겠네. 애송이가 같은 종족을 불렀다.”
“
부르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
어떻게 될 것 같아?”
알베르크가 답지 않게 상냥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
안에는 마족과 몬스터가 득시글하지. 사람들은 죽어 있지. 거기에 자기네
애기가 위급하다고 불러 댔으니. 결과가 어떻겠어?”
“
개판이 되겠군요.”
“그래, 그거다. 더 큰 문제는 천족의 단체적인 개입이 시작되면 마족이나 다
른 종족도 같이 움직이려 들거란 말이지.”
“
알베르크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때쯤, 한구석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꾸에에엑.”
다 죽어가는 요정이었다. 한때는 진짜 죽을 뻔했으나 어떻게든 상처를 봉합
하고 반쯤 기어서 여기까지 왔다.
“
그래서 제가! 얼른 돌아가시라고! 그랬는데에에에!”
“
요정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으나, 알베르크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뭐 그래도 천족이 오면 재밌는 일도 생기지.”
“뭡니까?”
“ ,
듣지 마, 형.”
“
천족과 싸우는 게 또 그렇게 재밌거든. 날개를 뽑을 때마다 지르는 비명이
일품이지.”
현우는 바닥을 구르는 돌덩이를 집어 들더니 알베르크에게 던졌다.
“
넌 닥쳐! 끼어들어서 싸우면 진짜 죽인다!”
“
너무하네.”
둘이 투닥거리는 사이, 구멍 뚫린 천장으로 하늘의 모습이 기묘하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푸르던 하늘에 구름이 끼더니, 그 사이로 빛이 내려왔다. 그리
고 그 빛 사이로 몇몇 인영이 반짝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
그냥 내려와도 되는 걸 꼭 저렇게 내려온다니까.”
“
맙소사!”
요정은 절망한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쳤다. 이러다가 진짜 천마전쟁이 일어
나게 생겼다. 그것도 그들의 영토가 아닌 생판 다른 곳에서 말이다.
“
그건 안 돼!’
‘
요정은 필사적으로 채널을 열기 위해 애썼다. 어떻게든 이 사실을 여왕님께
전달해야 했다.
음 그러니까.”
이반이 하늘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 .
내가 보는 게 잘못된 게 아니면 천사가 내려오는 것 같은데.”
“
그러면서 옆의 준이치를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같은 것을 보고 있습니다.”
“저도요.”
저도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준이치의 말에 동의했다.
“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요?”
“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틈 사이, 선우는 골치가 아픈 듯 머리를 짚었다. 미리
엘이 가진 한 수가 이것이었던 모양이었다.
“왜 하필?”
이제는 존댓말을 쓸 기운도 없었다. 그런 선우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까이 다가온 미리엘이 당당하게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제 안심해라, 인간. 도와줄 이들이 왔으니 모두 무사할 것이다.”
“
아니, 그러니까.”
선우는 말문이 막힘을 느꼈다. 이어 그는 있는 힘을 박박 끌어 모아, 미리엘
을 구석으로 끌고 들어갔다.
“
안 그래도 마족 때문에 힘들어 죽겠는데, 천족까지 부르면 어떡합니까!”
“
천족은 마족과 다르다. 그들과 같이 부당하게 인간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안 됩니다. 돌려보내십시오!”
“
하지만 이미 불렀는데.”
“
이번 일은 사람들 손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마족에 천족이 더
해지면 여기서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선우가 화를 내며 말하자, 그제야 미리엘은 조금 기죽은 표정으로 변명했
다.
“
친가 어른만 조금 불렀으니까, 괜찮을 거다.”
“
그럼 마족만 해치우고 돌아가는 겁니까?”
“아마도?”
“
확실히 대답하십시오.”
“
돌려보내겠다!”
“
그럼 됐습니다.”
미리엘에게 확답을 듣고서야 선우는 벽에 등을 기댄 채 그대로 주저앉았다.
뒤늦게야 지독한 피로가 몰려왔다.
“
아 이러면 곤란한데.”
“ ,
레온은 하늘의 빛을 보며 손으로 턱을 문질렀다.
“그러게요. 설마 저 천족 애송이가 저 정도의 천사들을 불러 낼 줄이야. 사
실 집안이 꽤 괜찮았나 봅니다?”
아이나스도 레온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럼 이제 어쩌죠? 철수할까요?”
“불리한가?”
“
그건 아닙니다. 리비님은 마계에서도 손꼽히는 강자. 저런 천족 따위 몇이
되든 쉽게 해치우실 수 있겠지요.”
“
그럼 죽이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괜히 저거 보고 희망을 가지는 인간
이 나오면 안 될 것 같아서. 게다가 지금 처리 하지 않으면 더 높은 애들을
불러올 수도 있고 말이지.”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장내에 울렸다. 그러자 잠시 멍하니 배회하던 몬스
터들이 다시 이빨을 세우며 그르렁대기 시작했다. 심지어 어디선가 꾸역꾸
역 더 기어 나와서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일단 결계가 깨졌으니 밖으로 나가요!”
레나의 외침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계 밖으로 튀었다. 레온은 그런 사람들
을 굳이 붙잡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내려앉는 천사들을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
미리엘.”
“
가장 먼저 내려선 이는 우아하게 생긴 남성 천족이었다.
“아버지!”
몰래 사라졌다 했더니 이런 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지? 내가 너한테 이렇
게 멋대로 굴라고 가르쳤던가?”
“
미리엘의 아버지는 생긴 것과는 다르게 엄하게 미리엘을 나무랐다.
“죄송합니다!”
자자, 그만하도록 해. 하이엘. 지금은 다른 걸 먼저 해결해야 되지 않을
까?”
“
그래, 그것도 그렇지. 미리엘. 모든 일이 끝난 뒤에 각오하거라. 이번엔 절
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
“
네 아버지.”
“ ,
하이엘은 이어 레온, 정확히는 리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간악한 마족이로구나.”
진짜 너희들은 언제나 하는 말이 똑같군요?”
“
리비 대신 앞으로 나선 아이나스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128.
천족과 마족. 그 둘이 한 자리에 섬으로써 기이한 대결 구도가 이루어졌다.
둘 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던 존재들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를 보고 놀
라는 건 현장에 선 각성자들이나 TV 너머로 보고 있는 시청자나 똑같았다.
“허, 허허허. 내가 살다 천사도 다 보네.”
레나는 허허거리며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웃다가 선우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선우는 침착한 표정이었다. 뭔가를 아는 사람 같았다. 그렇
기에 길드원인 레나나 아인도 좀 더 침착해질 수 있었다.
침착하자, 침착.’
속으로 연신 되뇌는 사이, 천사와 악마가 싸우기 시작했다. 악마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무시무시한 괴물들을 이용해 수적 우위로 천사를 누르려고 했
다. 하지만 천사들은 각성자들처럼 쉽게 당하지 않았다. 그들이 빛에 휩싸
인 무기를 휘두를 때마다, 괴물들은 쉽게 무너져 내렸다.
“꼭 게임을 보는 것 같네.”
누군가 중얼거렸다.
“갑자기 무슨 게임?”
“어느 게임이건 빛 속성하고 어둠 속성은 상극이거든.”
그 말대로였다. 천사가 휘두르는 무기에 의해 괴물들이 무너지고 있었지만,
반대로 악마들이 중간중간 끼어들 때마다 천사들의 전열도 무너지곤 했다.
‘
우리도 도와야 하는 거 아냐?”
“
어떻게?”
도무지 끼어들 엄두가 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때 저편에서 남자
셋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
어
“왜?”
“저 사람 그 사람 아냐? 지현우. 잡혀 있다더니 풀려났나 보네?”
그 말에 몇몇 각성자가 몸을 긴장시켰으나 그도 잠시였다. 그를 잡아 가둔
사람이 저 레온이다. 어쩌면 그도 잘못된 피해자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딱히 막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형!”
현우는 반갑게 그를 부르는 선우의 어깨를 도닥여 주었다. 그런 후에 바닥
에 떨어진 벽의 파편을 손으로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숨을 들이쉬었다. 그
런 다음 완벽한 아치를 그린 팔이 파편을 집어 던졌다.
평범해 보이던 시멘트 조각이 순식간에 무시무시한 흉기로 변했다. 그리고
그건 한창 싸우는 중인 천족의 이마에 명중했다.
“아하하하하하!”
그를 본 아이나스가 손가락질하며 웃었다.
“ ?”
넌 또 왜 웃어?”
“
그러나 이어 날아온 파편이 이번에는 아이나스의 뒤통수를 두드렸다. 미처
반응하기도 전의 일이었다.
“악!”
어찌나 빠르게 날아왔던지 평범한 파편인데도 머리통이 움푹 패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천족과 마족 양쪽에 공평하게 한방씩 먹인 현우는 알베르
크의 멱살을 잡았다.
“이번엔 너도 도와.”
“싫다면?”
“평생 미워한다.”
“마족한테 그런 건 의미가 없는데?”
“정말?”
현우는 알베르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정말 상관없어?”
그 말과 함께 현우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이대로 알베르크를 놓아 버리려
는 것이다. 알베르크는 뒤늦게야 현우가 말하는 미워한다의 의미를 깨달았
다.
아니.”
“
현우의 손을 잡은 알베르크는 그에게 고이 멱살을 내주었다.
“아무래도 조금 상관이 있는 듯하군.”
“그럼 닥치고 따라와.”
그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도진은 현우에게 속삭였다.
“굳이 멱살을 잡아서 끌고 가야 해?”
현우가 만져서는 안 되는 징그러운 거라도 만지고 있는 듯한 말투다.
“안 그러면 튀고도 남을 놈이라서.”
“신뢰도가 너무 없는데.”
닥치라고 했지?”
그제야 알베르크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먼저 알베르크를 안으로 밀어 넣
은 현우는 이어 도진과 함께 몸을 던졌다.
“어떻게 하면 돼?”
“
그냥 여기 있는 모든 녀석들을 때려잡으면 돼.”
“전부?”
“
도진이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그래도 날개 달린 쪽은 자신의 편이 아니던
가?
“천족이나 마족이나 그게 그거야.”
현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손에 잡히는 대 로 인정사정없이 두들기
기 시작했다. 그는 알베르크도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도진도
자연 그들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괴물을 썰고, 뭉개고, 던지고 천족 앞으로 다가간 알베르크가 그들을 상대
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하나 더 나타난 마족에 당황한 천족들이 그를
상대하는 사이, 현우는 아이나스를 상대하고 있었다.
아이나스는 어떻게든 피해 보려고 괴물들을 불러들였지만, 그 결과는 그다
지 좋지 못했다. 도진이 현우를 보조하는 사이, 그가 다가와 냅다 머리통을
두들기고 멱살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곤란하군요. 이런 건 계획에 없었는데.”
아이나스가 혀를 차며 말했다.
“잡혀 있는 주제에 말은 많네.”
“그게 제 장점이니까요. 원래는 이대로 멋지게 사라지는 거였는데.”
아련한 눈빛으로 장내를 훑어본 아이나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개판이군요.”
“
곧 더한 개판을 보여 주마.”
“
현우는 위협적으로 주먹을 흔들었다.
“앗, 저는 육박전에는 재능이 없습니다. 저보단 리비 님과 싸우시는 게 어떻
습니까?”
“너부터 족치고.”
하하하하.”
현우는 난감하게 웃는 아이나스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패고, 패고, 또 패
고. 곤죽을 만들어 놓고서야 만족하며 멱살을 놓았다.
“으으.”
“
이어 현우는 리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 방해만 되는 사람이군요.”
“나에겐 네가 방해야.”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림자가 리비의 시야를 가렸다. 이어 현우가
그를 향해 빠르게 달려들었다.
선우는 숨을 고르고 안쪽을 바라보았다.
더 싸울 수 있어.’
‘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음을 확인한 그는 다시 안으로 뛰어들었다. 형이 싸
우고 있는데 그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를 레나는 손
으로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아아, 역시 보고만 있을 수 없어!”
그 말과 함께 무기를 휘두르며 움직이자, 아인이 그 뒤를 따랐다. 이어 나지
막한 휘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럼 나도 가만있을 수 없지.”
“
각성자들 중 아직 싸울 수 있는 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누구를 쳐야 하는 거야?”
일단은 몬스터들?”
“
그리고?”
“몬스터를 조종하는 녀석들.”
“
그럼 저기 천사들은?”
“
다른 녀석들은 얼마든지 쥐어팰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천사는 망설여졌다.
“흠. 일단 마지막으로 미뤄 두면 되지 않을까?”
어차피 지금은 천사도 상대하고 있는 이가 있었다. 대충 합의를 끝낸 각성
자들은 다시 열심히 움직였다.
포털에서도 이렇게는 안 싸운 것 같은데!”
누군가 불평하며 몬스터를 붙들어 맸다. 그런 몬스터를 또 다른 누군가가
뭉개 버렸다. 불꽃이 살아남은 것들을 불태우고, 검이 확인 사살을 한다. 그
리고 그 모든 것은 여전히 방송을 타고 있었다.
“
에 떠오른 영상에 사람들은 또다시 새로운 희망을 가졌다. 그건 소녀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싸우기 위해 움직이는 각성자들을 보며 투
쟁을 느꼈다.
TV
아직 끝나지 않았어.”
“
갑자기 밖에서 커다란 고함이 들려왔다. 소녀는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
으나, 이내 다시 어깨를 폈다. 고함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옆집에서
거리에서 연신 들려왔다.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
힘내라고!”
“
할 수 있어!”
다들 싸우고 있는 각성자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희생자는 많았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분명 무섭고 괴로울 텐데도 물러서지
않고 나아가는 모습에 울컥 눈물이 솟아났다.
“
히 힘내요!”
“ ,
소녀도 커다랗게 소리를 쳤다. 인류를 수호하는 줄 알았던 레온은 사실 빌
런이었다. 한순간 절망했으나, 그래도 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누군가를 지
키기 위해 움직이는 이들이 있었다. 그렇기에 소녀는 재차 고함을 내질렀
다.
“모두 해치워 버려!”
평소 얌전했던 소녀지만, 지금만은 부끄럽지 않았다. 그저 힘을 모아 응원
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렇게 응원하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TV 화면
이 새까맣게 변하더니 이내 아무것도 비추지 않았다.
안에서 밖에서 터져 나오던 응원이 멈췄다. 혹시나 해서 TV를 두드려봐도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
현우, 도진과 싸우고 있던 리비는 잠시 한눈을 팔았다. 그 때문에 몇 차례
더 얻어맞았지만, 괜찮다. 그 정도는 각오했으니까.
“ .”
내 계획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말이죠.”
인간들이 좀 더 절망하고, 괴로워하길 원했다. 마족에게는 그마저도 달콤한
양식이 되니까. 그런데 이 모습은 뭐란 말인가. 약한 녀석들이 힘을 모아 괴
물들을 상대하며 분발하고 있다. 아이나스는 무력화된 지 오래였다.
어떻게든 몸을 회복시켜 보려 하고 있었지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 모
든 건 리비가 원했던 모양새가 아니었다. 리비는 머리를 흔들고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
진짜 짜증 나는군.”
“
리비는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던 카메라를 부숴 버렸다. 이제 인간들은 직접
여기 오기까지, 내부 사정을 알 수 없다. 게다가 때맞춰 히드라가 다시 모습
을 드러냈다.
“결계를 쳐.”
그 말에 히드라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결계를 쳤다. 바닥이 늪처럼 변하
고 결계가 건물을 뒤덮자, 각성자들의 움직임이 굼뜨게 변했다.
그 상황에서 리비는 내내 숨기고 있던 날개를 꺼냈다. 피막이 달린 새카만
날개가 펼쳐지고 이어 그의 모습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천족을
열심히 때리던 알베르크가 손을 놓고 현우의 옆으로 다가왔다.
“여기서 변한다고? 아무리 결계를 쳤다고 해도 천족들이 남아 있는데 진짜
막 나가네?”
알베르크가 혀를 찼다.
129.
“
.
우엑 저게 뭐야.”
열심히 싸우던 누가 중얼거렸다. 리비의 모습이 무너져 내리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형태의 괴물이었다.
얼핏 보면 거대한 식물처럼 보였으나, 가지가 무척 굵었으며 위에는 빼곡하
게 가시가 들어차 있었다. 중앙에는 꽃이 피어 있었는데, 촉수가 들썩일 때
마다 중심부에 가득 돋아나 있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빛났다.
저거 식물계였어?”
“
현우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알베르크에게 물었다.
“그런 모양인데?”
본의 아니게 알베르크의 원래 모습을 본 적 있는 현우였다. 그렇기에 리비
의 본모습도 인간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 것이라곤 상상하긴 했으나, 식물이
라니.
식물은 강한 힘을 가지기 어렵다며?”
“일단은 제자리에서 이동하기 힘드니까? 하지만 하나 예외적인 식물이 있
긴 하지.”
“
뭔데?”
“
블러드 메리라고 질 낮은 몬스터의 시체와 피를 찾아 움직이는 이동형 식
물이다. 원래는 저 정도 성장하기 쉽지 않은데 어디서 고위 마족의 피라도
흡수했던 모양이네.”
“그리고 저렇게 자랐고? 저거 지금도 더 자라고 있는데?”
“
현우는 조금 질린 표정을 지었다. 이대로라면 히드라의 결계 안을 꽉 채우
게 생겼다. 뭘 어떻게 하기도 전에 압사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얼릴까?”
“
어느새 옆에 다가온 선우가 의견을 제시했다. 예로부터 식물에게 위험한 것
이 둘 있었으니, 하나는 불이고, 다른 하나는 추위였다.
저걸 다 얼릴 수 있겠어?”
“해 볼게.”
“
선우가 비장하게 대답했다.
아냐, 됐어. 지쳤을 거 아냐.”
현우는 앞으로 나서려는 동생을 붙잡았다.
“
그래도 이대로 있을 수는 없잖아.”
“
불을 다루는 이들이 불을 붙여 보겠다고 나서고 있었지만, 별 소용은 없었
다. 촉수 같은 줄기에서 끈적끈적한 점액이 새어 나와 불이 옮겨 붙지 않았
다.
“여기서 얼리는 건 나만 가능한 것 같은데.”
그 말에 현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나도 가능해.”
현우의 능력은 죽인 몬스터나 마족의 능력을 복사하는 것이다. 그중에 마침
냉기 속성의 마족도 있었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여기서 그 능력을 발휘해
도 되느냐, 였는데.
“
안 하면 다 죽겠군.’
알베르크에게 묶여 있던 천족들이 리비에게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이라고 딱히 커다란 데미지를 주지는 못하고 있었다. 촉수의 재생력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었다.
“너 냉기도 다룰 수 있지 않아?”
‘
알베르크는 눈치도 없이 현우의 능력을 말했다. 아니, 정확히는 눈치 없는
척하는 것이리라. 현우는 그대로 알베르크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예전에는 지나치게 여려 보이는 미소년 형태가 손을 대기 다소 민망했는데,
지금은 거리낌이 없다. 워낙 튼실해 보였기에 인정사정없이 차도 양심의 가
책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프군.”
알베르크는 엄살을 떨며 옆으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리고 그 빈틈을 도
진이 채웠다. 뒤늦게 알베르크가 험악한 표정을 지었지만, 도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망설여져?”
도진의 질문에 현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
아무래도 조금은.”
“
원래 힘을 발휘하는 바람에 몰린 걸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 모든 게 레온, 지금의 리비가 꾸민 음모였지만 그걸 알아도 기분
이 나아지진 않았다. 그 음모에 동조해 현우를 비난한 건 같은 사람들이었
으니까.
그럼 하지 마.”
도진은 단호하게 말했다.
“
안 하면 사람들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
이기적이라고 할지는 몰라도 나는 네가 더 소중해.”
그러면서 웃어 보이는 도진 덕분에 용기가 났다. 현우는 작게 웃고는 마기
를 끌어냈다.
“
냉기를 다루던 마족.’
‘
그래도 초반에는 삼킨 능력의 주인들을 기억하고자 애썼는데, 후반으로 갈
수록 외우는 걸 포기했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인간인 현우에게 적대적이었
기 때문이었다.
그쯤 되었을 때, 리비는 부피를 늘리는 걸 멈췄다. 더 덩치를 키웠다가는 결
계를 빠져나가게 될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천사들은 그런 리비를 연신 공격해 댔다. 그리고 다른 각성자들도 그들이
때린 곳을 또 때렸다. 조금이라도 효과를 볼까 싶어서 그런 것이었다.
“간악한 마족 놈! 능력을 숨기고 있었구나!”
“뭘 새삼스럽게. 너희도 그렇지 않나?”
맞았다. 마족들이 본 모습을 숨기고 다니듯이 천사들도 능력에 제한이 있었
다. 정식 루트로 중간계에 내려오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
힘을 다시 풀려면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다.
혼자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이곳으로 들어온 리비와는 달랐다.
“너도 정식으로 들어온 건 아니었잖아?”
공격 준비를 하던 현우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알베르크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난 통로가 좀 좁았어. 그 때문에 약화된 채 넘어 왔는걸. 본모습으
로 돌아가도 금방 풀릴 거다.”
“도움이 안 되네.”
“
신랄한걸.”
“
알베르크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됐어. 저리 꺼져 있어.”
현우는 매정하게 말하고는, 손을 앞으로 들어올렸다. 그러자 일어나는 마기
와 함께 냉기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스멀스멀 솟아오른 하얀 연기는 촉수
를 감싸고 올랐다. 처음에는 심각하지 않다 생각하여 무시하던 리비는 어느
순간부터 몸이 둔해짐을 느꼈다. 그리고 그제야 냉기가 몸을 감사고 있음을
깨달았다.
여기엔 아까 불을 막기 위해 뿜어내던 액체도 소용이 없는지라, 좀 더 적극
적으로 촉수와 같은 줄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후웅!
어찌나 세게 휘두르는지 바람 소리가 살벌하게 났다. 몇몇은 그 촉수를 막
아섰고, 몇은 피했다. 결론적으로 피하는 쪽이 옳았다. 덩치만큼 촉수는 강
하고 단단했으며, 막아 낼 만한 것이 아니었다.
“정신 집중하십시오! 이제부터 저희는 몬스터 명 블러드 메리를 레이드할
겁니다!”
선우가 외쳤다.
“탱커는 앞으로, 원거리 딜러는 뒤로! 힐러와 지원계열은 안전한 곳으로 피
하십시오!”
지시가 떨어지자, 각성자들은 그에 맞춰 움직였다. 예전에 티아매트를 상대
할 때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본격적인 레이드가 되어 가고 있었다.
후욱.”
요정은 숨을 몰아쉬었다. 진짜 간신히 죽을힘을 다해 여왕님께 연락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고 나서 시선을 돌리니 히드라의 뒷모습과 그를 공격하려고
틈을 엿보는 두눈이 보였다.
“으으, 안 돼.”
“
이 상황에서 결계까지 사라지면, 마족의 힘이 더 멀리멀리 퍼져 나가게 된
다. 한마디로 개판이 된단 소리였다. 요정은 후들거리는 몸을 움직여 두눈
에게로 움직였다. 그리고 간신히 그의 머리 위에 착지하는 걸 성공했다.
안 돼요, 안 돼.”
“
요정이 머리를 철썩철썩 때리자 두눈이 멈춰 섰다.
“곧 여왕님이 해결해 주실 테니까. 일단은 가만 계세요.”
두눈은 고개를 내저었다.
안에 현우.”
“현우 씨라면 이 상황도 잘 버텨 낼 겁니다. 더한 상황도 이겨 냈던 사람 아
닙니까?”
“
그래도.”
“쓸데없는 걱정이에요.”
요정은 재차 두눈의 머리를 두들겼다. 워낙 머리 가죽이 두꺼워 별 느낌도
안 나겠지만, 나름의 화풀이였다. 실상 잘못한 건 두눈이 아니라 다른 쪽이
었지만.
“
조금만 참아 주세요.”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결계 하나를 두고 참으로 평온
하다.
아니, 그 말은 정정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각성자들이 우르르 안쪽으로 몰
려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
그들은 가장 먼저 두 눈을 보고 화들짝 놀랐으나 누군가 외쳤다.
지현우의 몬스터다!”
다행히 요정은 제대로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어 그들의 시선이 히드라에
게로 향했다.
“
저쪽을 물리쳐야 해.”
“
그러자 선두에 서 있던 거대한 방패를 든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요정과 두
눈은 모르고 있었지만, 뉴욕에서 세 번째 가는 길드 썬더의 길드장 록슨이
었다. 그는 오래지 않아 히드라가 홀 안쪽으로 통하는 곳을 막고 있는 걸 깨
달았다. 그렇기에 그를 목표로 잡았다.
“일단은 내가 지휘를 맡겠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모여든 각성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과 바카디가
빌런인 게 밝혀진 이상, 그들 길드의 명령은 받을 수 없었다. 의심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안으로 들어온 것도 그 두 길드를 제외한 이
들이었다.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가디언 길드의 각성자는 하늘을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
누군 이런 걸 원했나?”
“
피닉스 길드의 길드원이 뾰족하게 대답했다. 길드장은 빼도 박도 못할 빌런
에 길드원 대부분도 그에 동조한 게 알려진 뒤로 그들은 할 일이 없어졌다.
대부분 그들을 배척했고, 그 앞에서 무고를 주장해봤자 소용없었다.
정신 차려요. 그래도 우린 여기 모였어요.”
그 모든 걸 알면서도 사람들을 돕기 위해 여기 모였다.
“
우린,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하면 됩니다.”
단호한 목소리에 불평이 잦아들었다.
“그래,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하면 돼.”
“
그게 당장은 기다려야 하는 일일지라도.
130.
전투는 격렬하게 이어졌다. 리비의 몸은 점점 얼어붙어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니 둔한 표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각성자도 지쳤으
나, 리비도 지쳤다. 고작해야 인간을 이겨 내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현실
이 믿기지 않았다.
‘변수가 너무 많았다.’
생각보다 강했던 지현우, 갑자기 등장한 천족 꼬맹이, 거기에 알베르크까지
더해서. 그들은 어느 순간부터 계획을 틀어 버리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이
것이다.
물러나는 게 나을까.’
‘
죽은 척 쓰러져 있던 아이나스가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지금이라면
그녀가 가지고 있는 포털생성기를 통해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 리비는 일
단 이곳을 벗어나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몰아
친 차가운 바람이 전신을 얼려 버렸다.
“도망치게 내버려 둘 것 같아?”
현우가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손을 흔들던 아이나스는 어느새 알베
르크에게 목덜미를 잡힌 상태였다. 퇴로는 없었다.
이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힘을 쓰면 리비를 쓰러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모든 일의 원흉. 그만 죽이면 이제 세상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현우는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몸의 대부분이 얼어서 굼떠진 리비에게 일격을 날리려는 순간, 허공
에 포털이 열리더니 그 사이로 요정 하나가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각성자들이 보아 온 요정보다 덩치가 더 컸고, 화려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요정들의 관리자, 여왕이라고 합니다.”
“
여왕은 우아하게 인사했으나, 현우는 움직이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빠각.
얼어붙은 줄기 하나가 현우에 의해 조각났다.
저기, 잠시 제 말 좀 들어 주시겠어요?”
“
말해.”
“
그 상황에서도 리비는 여전히 버둥거렸고, 현우는 열심히 줄기를 줄여 나갔
다. 그는 도진과 선우도 마찬가지였다. 여왕은 그런 이들을 어처구니없이
바라보다가 헛기침을 했다.
“여러분, 이건 아시죠. 마족도 천족도 이 세계에 와선 안 돼요. 그건 모든 차
원계의 규칙이랍니다. 그런데 여기엔 마족도 천족도 있네요. 그래서 그를
수습하고자 제가 왔습니다.”
빨리도 왔네.”
“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여왕의 눈이 매서워졌다. 그러나 그 주체가
현우인 걸 알자 다시 눈매가 누그러졌다.
“저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답니다. 그보다 마족은 인제 그만 내버려 두는 건
어떨까요? 둘 다 제가 원래 세계로 돌려보낼 거랍니다.”
이걸 돌려보내겠다고?”
“
현우의 표정이 더 사나워졌다.
“여기 있어서는 안 될 존재니까요.”
“안 돼. 이건 여기서 죽어야 해.”
그동안 이 세상에 분탕을 친 게 얼만데 그냥 돌려보내란 소린가. 그건 납득
할 수 없었다. 자연 현우의 목소리도 날카로워졌다.
일단 진정하시고.”
“
여왕은 어떻게든 현우를 말려 보려고 했지만, 현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의무처럼 리비를 조각조각 내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돌려보내겠다고
끼어들었다가는 그녀의 날개도 잡아 뽑을 기세였다.
“그, 그럼 일단 천족분들부터 돌아가실까요?”
여왕은 어색하게 웃으며 천족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 마족을 두고 돌아가라고? 난 그럴 수 없다.”
천족은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 언제나 단정하던 옷차림은 엉망이 되어 있었
고, 머리도 흐트러져 있었다. 날개 또한 멀쩡하진 않았다. 마족 때문에 돌아
갈 수 없다고 우기긴 했으나, 실상은 인간들의 취급에 화가 난 상태였다.
그러나 그걸 여왕이 알 리 없었다.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꾹꾹 내리
눌렀다.
“
그러니까 그 마족은 저기서 죽어 가고 있는데요.’
규격 외 강자인 현우가 작정하고 덤벼드니 마족도 버티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나마 같은 마족인 알베르크는 아이나스를 붙잡고 히죽대기만 하고 있으
니 말이다.
‘
여왕이 천족을 설득하기 위해 다시 입을 여는데 뒤에서 무언가가 날아왔다.
리비의 얼어버린 줄기 조각이었다.
닥치고 당장 꺼져. 이 녀석 다음은 너희다.”
“
현우가 살벌한 시선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그 기운이 얼마나 험악한지 몇몇
이들을 빼고 전부 소름이 돋아 올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우리를 마족과 같은 취급 하는 건가?”
“마족이나 천족이나 이 세계에는 필요 없어.”
“
다를 게 뭐람? 현우는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고집했다. 그에 일부 천족이
반발했으나 미리엘이 말렸다.
“제가 남을 테니 다른 분들은 돌아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마족이 완전히 사
라지는지 확인한 후엔 저도 돌아가겠습니다.”
“세상에, 아직 어린 너만을 두고 갈 순 없다. 차라리 내가 남으마.”
아닙니다. 그나마 인간들과 관계를 지속해 온 건 저니까요.”
“
미리엘은 차분히 친가 어른들을 설득해 나갔다. 한참 실랑이를 하던 그들은
결국, 여왕에 의해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갔다. 미리엘만을 남겨 두고서 말
이다, 혼자 남게 된 미리엘은 사뿐히 걸어 알베르크의 옆에 섰다.
“여어, 꼬맹이.”
꼬맹이라 하지 마라, 마족.”
“
꼬맹이를 꼬맹이라고 하지, 뭐.”
알베르크는 아이나스를 내팽개치고 그 위에 주저앉았다.
“
그래, 네 음모는 전부 깨진 것 같다만. 이제 어쩔 거지?”
“
지금까지의 일로 상황을 전부 파악한 미리엘은 알베르크의 계획 또한 깨졌
음을 깨달았다.
“나도 잘 모르겠군.”
알베르크는 그리 말하곤 죽어 가는 리비를 바라보았다.
돌아, 돌아가겠다!”
죽음의 위기 앞에 선 리비가 여왕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이미 늦었다.
“
한 번 화가 난 현우는 나도 못 말리거든.”
“
마계에서 가장 강한 게 너 아닌가?”
현우가 알베르크와 종종 싸웠단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랑에 빠진 알베르크가 봐주었기 때문 아닌가? 미리엘은 고개를 갸웃거렸
다.
“봐줬다고?”
“
알베르크가 코웃음을 쳤다.
“그런 적 없어. 현우는 지금까지 순수한 자신의 힘으로 나와 겨뤄 왔다. 그
래서 더 사랑스럽지. 절대 굽히지 않는 그 성격이 마음에 들어.”
역시 마족. 취향이 최악이군.”
“
미리엘은 알베르크를 매도하고, 리비의 최후를 감상했다.
그만해!”
리비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하며 줄기를 휘둘렀다.
“
돌아가겠다고 했잖아!”
“
어찌나 다급한지 평소 쓰던 존댓말은 나오지도 않았다. 그도 현우의 능력에
대해 미리엘과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건 상정 외의 상황이
었다.
이제는 어떻게 학살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남는냐에 집중해야 했다.
그 사이, 결계를 유지하고 있던 히드라 카이가 쓰려졌다. 새로운 각성자들
이 안으로 난입했고, 그들은 들어오자마자 리비와 현우를 발견했다.
세상에, 저건 뭐람?”
“
괴이한 몬스터네.”
괴이쩍은 모습에 몸을 떨면서도 각성자들은 레이드에 끼어들었다. 내내 싸
우느라 지쳐 있던 이들은 뒤로 빠지고 새로운 이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
리비는 이를 으드득 갈았다.
이제 정말 끝이네.”
거의 모든 줄기를 뜯어 낸 현우가 중앙에 달려 있던 꽃 옆에 섰다.
“
정말 이 모든 게 끝일 거라고 생각해?”
“
이 세상엔 아직 리비가 심어 둔 수많은 몬스터들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그
가 사라지고 나서도 여전히 이 세상에 존재하며 움직일 것이다.
“그렇겐 생각 안 해. 이제 시작일지도 모르지.”
현우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두꺼운 꽃잎에 손을 올렸다. 순식간에
굳어 가는 몸을 느끼며 리비는 마지막 발악을 했다. 마기를 이용해 자신의
몸을 터트리는 것이었다.
다 죽어 버려!”
그렇지만 그도 큰 효과를 발휘하진 못했다. 일차적으로 현우가 마기로 폭발
을 감싸고, 이차적으로 도진이 자잘한 피해를 그림자로 삼켰다. 그래도 빠
져나간 건 있었지만, 여기 있는 이들은 손꼽히는 강자들이었다. 그 정도는
각자 막아 낼 수 있었다.
“
지금까지 모두를 속이고 세계를 엉망으로 만들어 온 가디언 길드의 수장은
생각보다 너무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자 이제 남은 문제는.’
리비를 해결한 현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급한 일이 해결되고 나면 다음
문제가 두드러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다음 문제는 바로 그였다.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 ,
아마도 배척이겠지.’
‘
자신이 가진 힘이 정상은 아니니까. 현우는 손을 털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소란스러웠는데 지금은 기이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도
그때 누군가 입을 열었다.
“ .”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
지쳐서 구석에서 쉬고 있던 앰버였다. 그녀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는 현우
에게 허리를 숙였다.
“현우 님이 아니었으면 저희 모두 죽었을 거예요!”
그건 그렇지.”
“
앰버가 나서자 이반도 거기에 말을 얹었다.
“진짜 끔찍한 괴물이었습니다.”
준이치 또한 그사이에 끼어들었다.
현우 님의 능력은 몬스터들과 달라요.”
앰버는 꿋꿋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
그리고 그 능력에 저희는 모두 도움을 받았어요.”
“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하나둘 현우를 향해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고마워.”
“네 덕분에 살아남았어.”
“
자칫하면 현우를 향할 수도 있던 적의가 사라졌다. 그는 앞서서 나선 앰버
덕분이었다.
131.
현장을 정리하는 데는 제법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아이나스에 의해 몬스터
가 되어 버린 사람들이 누가 있는지를 알아내야 했고, 그로 인해 죽어 버린
사람들도 명단에 올려야 했다.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다. 게다가 대부분이
가디언 길드 각성자들이라, 미국은 곤란에 처했다.
국력이 약해지기 때문이었다. 뿐이랴. 다른 나라에서는 미국의 길드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다며 책임을 지라 요구했다.
우리도 피해자입니다!”
“
외쳐 보았지만, 그들에게는 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 사로잡힌 아
이나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 입을 열게 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사용해 보았
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옆에 붙은 요정은 아이나스와 알베르크, 미
리엘도 돌려보내야 한다고 징징거렸다.
“때 되면 돌려보낼 거야.”
그때가 언제란 말입니까! 지금 보내 주세요, 네?”
“
요정은 무척이나 끈질겼다. 그 상황에서 아이나스는 현우에게 면회를 요청
했다.
그런 거 들어줄 필요 없어, 형.”
선우는 반대했지만, 현우는 한 번쯤은 만나 볼 필요성이 있다고 느꼈다. 그
렇기에 미국 정부의 허락을 받고 아이나스와 대면했다.
“
오랜만입니다.”
“
고된 생활을 했을 텐데 아이나스는 예전과 변한 것이 없었다.
“제법 매섭게 굴고 있지만, 그래 봤자 인간 아닙니까? 마족은 통증에 강한
편이라서요. 그들로서는 제 입을 열 수 없을 겁니다.”
아이나스는 장담했다.
그건 됐고, 왜 만나자고 했어?”
“따르던 분이 죽었으니, 저도 슬슬 살길을 찾아야 할 것 같아서요. 충실한
부하 필요 없으신가요?”
“
이게 돌았나.”
“
현우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아이나스를 바라보았다.
“종종 듣던 소리군요. 하지만 저는 진심입니다. 적어도 데리고 다니는 몬스
터들 보다는 훨씬 도움이 될 겁니다.”
난 네 적이었어.”
“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료가 되는 법이지요.”
“됐어. 헛소리하지 말고 아는 거나 빨리 털어 놔.”
“
싫습니다. 제가 왜 아무런 이득 없이 그걸 밝혀야 합니까?”
“
아이나스는 혀를 날름 내밀어 보였다. 아무래도 그에게서 정보는 뽑아내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 같았다. 저질러 놓은 일이 적기라도 하면 그
냥 돌려보내고 자력으로 해결할 텐데.
현우는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
지나가던 사람들은 현우를 볼 때마다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이 모든 것이
앰버덕분이었다. 그녀는 현우를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가디언 길드의 숨겨
진 죄악을 밝혔다.
그 때문에 현우가 힘을 감추고 있던 건 숨겨진 악인 레온을 처치하기 위함
이었다고 알려졌다.
그런 게 아닌데.’
‘
졸지에 히어로 취급을 받게 되었다. 그래도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되는 건
좋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모퉁이를 돌아서자 익숙한 남자 둘이 보였다.
하나는 귀여운 동생, 다른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
형 아무런 일 없었어?”
“ ,
선우의 물음이 끝나기 무섭게 도진도 입을 열었다.
“괜찮아? 아이나스가 해를 끼치진 않았어?”
말은 다르지만, 뜻은 똑같다. 둘 다 현우를 걱정하고 있었다.
나는 괜찮아. 그보다 선우는 바쁠 텐데 기다려 준 거야?”
현우의 말에 선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레온이 그런 최후를 맞이한 후, 각성
자들은 새 협회장을 뽑기로 했다. 그 후보 중 하나는 러시아의 표드로, 다른
하나는 한국의 지선우였다. 원래는 현우를 후보로 올리려 했으나, 극구 거
절했다.
“
이제 모든 일이 끝났는데, 협회장 같은 자리를 떠맡는 건 사양이었다.
아무리 바빠도 형을 기다릴 시간은 있어.”
아이고, 귀여워라. 현우는 선우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그러자 구겨져 있던
미간이 슬슬 풀려나간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협회장은 선우가 될 것 같
았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해외 거주가 늘어날 테고, 많이 바빠질 것이다.
“
도진은 그를 기꺼워했다. 현우에게 소중한 이는 그에게도 소중했지만, 선우
는 형과 조금 떨어질 필요가 있었다.
그보다 국장은 어떻게 할까?”
“김철수 씨 말이지.”
“
응
“ .”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돌아가는 미국의 상황에 국장인 철수는 당황했다
고 한다. 그리고 어떻게든 자리를 보존하고자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다니
는 모양인데. 딱히 효과는 없어 보였다.
“지금이라면 쉽게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을 거야.”
그럼 국장을 바꿀 수 있단 소리네?”
“
그렇지.”
“그럼 최무혁이 국장이 되는 건가?”
“
그건 아냐.”
“
선우와 현우의 대화에 도진이 끼어들었다.
“국장이 되기엔 최무혁은 너무 젊거든. 그 전에 다른 사람을 한 번 더 세워
야 할 것 같아.”
누구?”
“
그건 최무혁이 알아서 할 일이지. 우리가 도움을 주긴 하지만, 인재는 스스
로 찾아야 할 거야.”
“하긴, 그 정도는 스스로 해야지.”
“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얼추 상황은 정리되어 가고 있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장례식만 참여하고 돌아가면 되네.”
“
그런 셈이지.”
이번에 억울하게 죽은 각성자와 시민들의 합동 장례식이 치러진다. 그들은
비록 죽었지만, 남은 가족들을 위해 훈장과 연금을 수여하기로 했다.
“
가디언 길드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
피닉스 길드는 대부분의 사람이 떠나고 소수만 남았다. 길드장인 바카디가
빌런인 탓이었다. 그러니 가디언 길드도 그와 비슷하게 되리란 건 추측하기
어렵지 않았다.
“망하는 건가?”
“일단 가디언 길드는 사라질 것 같아. 하지만 남은 사람들끼리 뭉쳐서 새로
길드를 만든다고 해.”
가디언 길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은 매서워졌지만, 그래도 그들은 포기
할 수 없는 가치를 위해 다시 뭉쳤다.
[정의]
그 단어 하나를 위해서.
쉽지 않을 텐데.”
“그렇지. 편견의 시선도 있을 테니까. 그래도 그들은 노력하길 선택한 거
야.”
“
도진은 웃으며 답했다. 모든 것이 무너져서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일어서는 사람이 있다. 그렇기에 세상은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
다.
장례식은 엄숙한 분위기에서 치러졌다. 관의 절반 이상은 비어 있었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슬픔과 의지를 끌어내는 데는 충분했다. 까만 정장을 입은
현우는 그 모든 걸 바라보고 있었다.
“알베르크.”
그래.”
“
너도 이제 그만 돌아가.”
“너무 냉정한 거 아냐?”
“미리엘은 네가 돌아가면 곧바로 돌아가기로 했어. 아이나스는 못 돌아갈지
도 모르겠지만.”
“
아이나스는 원한을 너무 많이 샀다. 이대로 돌려보내기엔 상황이 여의찮았
다. 아마 그녀는 이곳에서 죽게 될 것이다.
“나는 갈 수 없어. 널 두고 내가 어딜 가.”
알베르크. 알잖아, 내가 누굴 좋아하는지.”
“
그래, 한도진을 좋아하고 있지. 언젠가 스러져 갈 허무한 생명을 말이야.”
“
괜찮아. 그때가 되면 나도 같이 갈 거니까.”
“
나와 함께 가면 훨씬 더 오래 살 수 있는데.”
그 말에 현우는 피식 웃었다.
“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냐.”
“
그래.”
알베르크는 잠시 하늘을 올려보았다.
“
강제로라도 데려갈까.’
‘
이후 요정의 참견만 없다면 현우는 자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이상한 생각 안 했는데.”
“
그걸 어떻게 믿어?”
현우는 손을 내저었다.
“
돌아갈 수 없다면?”
“
강제로 돌려보내야겠지.”
“
여기는 장례식장이니 싸우긴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니 다른 곳으로 끌고 가
서 싸우리라.
좋아.”
알베르크는 서글프게 웃었다. 현우를 손에 넣고 싶지만, 그에게 미움받고
싶지는 않다. 그렇기에 조금 인내심을 가져 보기로 했다. 어차피 마족의 삶
은 길지 않던가.
“지금은 돌아가도록 하지.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거야. 그땐 반드시
너와 함께 갈 테니 각오해 두라고.”
“
그때라고 따라갈 것 같아?”
“그땐 정말 강제로 데려갈 거야.”
“
죽여서라도, 영혼만 끌어안게 되더라도 데려갈 것이다.
어차피 인간의 삶은 100년.’
각성자는 좀 더 오래 살긴 하지만, 그래도 마족에 비해선 턱없이 짧은 시간
이다.
‘
아아, 대단하십니다!”
“
알베르크가 결정을 내리자마자 어디선가 요정이 뿅! 하고 나타났다.
“역시 현우 님이세요! 이렇게 훌륭하게 알베르크 님을 설득하시다니요!”
됐고 빨리 데려가.”
“
넵 문을 열겠습니다!”
요정은 두 손을 크게 펼치며 원을 그렸다. 그러자 허공에 사람이 하나 통과
할 만한 포털이 생겨났다.
“ !
그럼 마지막으로.”
“
알베르크는 가까이 나가와 현우에게 입 맞췄다. 워낙 순식간의 일이라 피하
지도 못했다.
“너!”
마지막이니 이 정도는 용서해 줘.”
“
현우가 주먹을 휘두르기도 전에 알베르크는 포털을 통과했다. 이제 남은 이
는 미리엘뿐이었다. 미리엘은 몸만 돌아간 알베르크와는 다르게 커다란 짐
을 가지고 있었다. 그게 무엇이냐는 물음에 그는 새침하게 대답했다.
“가준이 챙겨 줬다.”
제법 이곳의 삶을 즐겼나 본데? 좋아하는 게 한둘이 아니다.
언젠가 연이 된다면 다시 만나도록 하지.”
그 말을 끝으로 미리엘도 떠났다. 마지막에 그 말을 들은 요정이 절대로 안
된다고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이미 미리엘은 사라지고 난 뒤였다.
“
그럼 저도 이제 돌아가 볼게요.”
“
그래.”
현우는 요정을 배웅했다.
“
이제는 정말로 현우 님이 원하는 대로 사세요.”
“
그게 요정의 마지막 말이었다.
132.
현우는 러그 위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오른쪽으로 한
번, 왼쪽으로 한 번 굴렀다.
뀨우우.”
“
그 옆에는 케로가 배를 까 놓고 자고 있고, 점박이가 가끔 잠꼬대같이 기이
한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이 무척 귀여웠으나, 지금은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
는다.
“하아.”
현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암만 굴러다녀도 심심함이 가시질 않았다.
이미 실컷 보았다. 어찌나 많이 보았던지 이제 드라마 앞부분만 봐도
다음 내용이 저절로 떠오른다. 만화? 그도 마찬가지였다. 게임? 한동안 현
질까지 해 가며 서버 1위에 등극했으나, 더 하기 귀찮아져서 그만뒀다.
TV?
마지막으로 외출. 아서라. 아무리 꽁꽁 감싸도 들러붙는 기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어찌나 끈덕지게 붙는지 열이 오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
러다 결국엔 큰일이 날 것 같아서 나가지 않게 되었다. 물론 큰일이 나는 쪽
은 현우가 아닌 기자들이다.
범법 행위를 저지를 순 없지.’
이제는 평범한 준법 시민으로 살아가기로 했으니까.
‘
그럼 포털이라도 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지금 세계적으로 손이 모자라 보
통 난리가 아닙니다. 하나같이 격무에 시달리고 있지요.”
“
그렇게 말하는 부길드장 찬영의 눈 밑은 새카맸다.
“도움을 요청한 길드가 여럿 있는데, 목록을 보시겠습니까?”
너무하네요. 아직 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
아 네.”
현우의 말에 찬영이 눈을 세모꼴로 떴다. 하는 것 없이 뒹굴기만 하니 보기
싫은 모양이었다. 남들 눈엔 어떻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언제나 변함없이
대하는 그가 딱히 싫지는 않았다. 외려 예전과 다름없이 대해 주니 좋았다.
그걸 직접 말하면 진저리를 칠 테지만 말이다.
“ ,
하기 싫다는 데도 찬영은 기어이 길드 목록을 두고 나갔다. 이런 걸 옆에 두
고 가면 궁금해서라도 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지능범 같으니라고.’
‘
현우는 데굴데굴 굴러 서류 앞까지 도착했다.
유독 미국의 도움 요청이 많네.”
하긴 상위권 길드가 다 무너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거긴 땅이 워낙 넓어야
지.
“
어쩌나.’
‘
현우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일어나서 짐을 챙기고 미국에 가서 포털을 공
략하는 걸 말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류를 고이 덮었다. 심심하다
고 가기엔 너무 귀찮을 것 같았다.
그때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우야.”
“
도진이었다. 한동안 바쁘게 움직이더니 오늘은 시간이 좀 남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입구의 비밀번호 혹시 바꿨어?”
아니?”
“
그래?”
둘은 잠시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비밀번호를 바꿔 둔 것이 누구인지를
깨달은 것이다.
“
선우가 바꾸고 갔나 보네.”
“
도진은 그림자를 밀어 넣어서 안쪽에서 문을 열 수 있었다. 그러니 선우가
한 행동은 심통을 부린 거에 지나지 않았다.
귀여운 동생이라니까.”
“그건 너한테만 그런 거고.”
“
아냐. 객관적으로 봐도 선우는 귀여운걸.”
“
현우는 도진의 말에도 꿋꿋하게 자신의 의견을 주장했다.
‘그나저나 선우도 못 본 지 3일째네.’
정말 어지간히 바쁜 모양이었다.
끙차.”
현우는 생각하기를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도진이 왔는데 주스
라도 내줄 생각이었다.
“
참 나 이번에 미국에 다녀올 것 같아.”
“ ,
미국에?”
“그래. 그러니 같이 갈래?”
“어, 음.”
“
거긴 좀 그런데. 여기서도 기자들에게 시달리는데 미국은 더할 것이다. 거
긴 파파라치의 나라니까.
그거 꼭 가야 해?”
“앰버가 연락을 해 와서. 도움도 받았는데 가만있긴 그렇잖아.”
“
그것도 그렇네.”
“
당장 가는 건 아니니 고민 좀 해봐. 가면 일주일쯤 있다 올 거야.”
“응, 그래볼게.”
“
이럴 줄 알았으면 두눈도 남겨둘 걸 그랬다. 요정이 다른 둘은 괜찮으나, 두
눈은 규격 외라며 억지로 돌려보냈다. 때문에 남은 몬스터 케로와 점박이뿐
이었다.
가끔 현우에 의해 파견을 나가긴 하지만, 아닐 때는 언제나 그의 옆에서 졸
고 있었다. 주인이 게으르게 지내니 몬스터도 그를 본받은 모양이었다.
도진에게 주스를 건넨 현우는 그의 옆에 기대앉았다. 옆에서 보니 반 듯 선
콧날이며, 붉은 기를 머금은 입술이며 유독 어여뻐 보인다. 뽀뽀라도 한번
해 볼까? 그러면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그리 생각하고 있는데 눈이 딱 마
주쳤다.
이건 해도 돼.’
‘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도진을 올라타고 있었
다.
뭐 어때.’
‘ ,
현우는 그대로 고개를 숙여 도진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댔다. 가볍게
입술에 쪽쪽 거리자 도진이 간지럽다는 듯이 웃었다. 그게 사랑스러워서 이
마에 한 번, 잘생긴 콧날에 한번, 뺨에 한 번. 키스를 퍼부었다.
도진은 그런 현우를 끌어안고서 바닥을 굴렀다. 그러고 나니 어라? 어느새
현우가 도진의 밑에 와 있었다.
너무 익숙한데?”
“
무슨 소리야. 나는 순결한 몸이야.”
도진이 당당하게 자신이 동정임을 밝혔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혀로 현우
의 입술을 핥았다.
“
벌려 줘.
의도가 선명하게 와 닿았다. 그에 배시시 웃으며 입술을 벌리자 파고든 혀
가 여린 안쪽을 더듬기 시작했다. 얽힌 혀가 지나치게 뜨겁다. 뿐만 아니라
서서히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어느새 바닥을 짚고 있던 도진의 손이
허리에 와 닿았다.
헐렁한 티셔츠가 위로 걷히고 탄탄하게 단련된 현우의 몸이 드러났다. 겉보
기에는 말라 보이는데 벗기면 잔근육이 제법이다. 도진은 그 근육을 천천히
만져 보았다. 그 손길이 애타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갔다. 그리고 진도를 더
나가려는 찰나, 옆에서 귀여운 소리가 들려왔다.
키르륵.”
“
어느새 잠에서 깨어난 점박이와 케로가 둘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
습을 본 도진은 어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케로와 점박이가 대단한 몬스
터인 건 알지만, 작은 모습일 때는 한없이 여리게만 보였다. 그 때문에 차마
둘 앞에서 관계를 계속 이어갈 수가 없었다.
눈치 없긴.”
현우는 손가락으로 케로의 촉촉하게 젖은 코를 눌렀다.
“
왕왕!”
“
케로는 아니라고, 모든 것은 점박이 때문이라고 필사적으로 해명했지만 통
하지 않았다.
‘억울해!’
점박이한테 불평을 늘어놓아도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아무래도 점박
이는 이런 경험이 없는 모양이었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 새끼도 안 낳았나.
케로는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점박이를 바라보았다. 점박이로서는 알 수 없
는 일이었다.
일단 밥이나 먹자. 뭐 먹고 싶어?”
“스파게티!”
“
그래, 재료는 다 있으니까 해 줄게.”
“
몇 인분을 하면 좋을까, 고민하는데 문이 거침없이 열렸다.
혀엉!”
“
이어 선우가 애교 어린 목소리를 내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곧바로
현우에게 달려가 안겼다. 동생쪽이 키가 더 크기에 다소 어색한 그림이 나
오긴 했지만 말이다.
“흠!”
그런 둘을 바라보고 있던 도진이 헛기침 소리를 내었다. 암만 선우와 사이
가 좋지 않다고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체면을 챙겨 줄 참이었다.
당신이 왜 여기 있습니까?”
도진의 존재를 눈치챈 선우가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
일이 끝나서 잠시 들렀습니다.”
“
선현 길드가 동네 사랑방입니까? 평화 길드 길드장이 왜 여깄냐는 소립니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
뭘 말입니까?”
“
저랑 현우가 사.”
“그만, 그만 말하십시오!”
“
선우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분노했다.
제가 망상은 그만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
망상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그럴 리 없습니다.”
“
선우는 그리 말하며 애처로운 눈빛으로 현우를 돌아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장화 신은 고양이와도 같아 넘어가 주고 싶었지만, 그래도 언제까지 그래선
안 되겠지. 동생도 이제 어른이니까. 생각을 정리한 현우는 입을 열었다.
도진 형과 나는 사귀는 사이지.”
“형!”
“
선우야, 이제 인정할 때도 됐잖아.”
“
나는 인정 못 해! 왜 하필 저런 사람이랑!”
“형이 어때서? 형도 엄연한 길드장인데다가 잘생겼잖아.”
“
그래도 안 돼!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용납 못 해!”
선우는 흔한 시어머니가 하는 멘트를 내뱉었다.
“왕왕!”
“
케로는 그런 선우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아는 현우라면 실
제로 눈에 흙을 넣고도 남을 사람이다. 물론 상대가 사랑하는 동생이니 안
넣을 수도 있겠지만.
흙만 들어가면 돼?”
“
형
선우가 충격받은 얼굴로 현우를 바라보았다.
“ ?”
아니, 각성자니까 흙 조금은 괜찮지 않나 싶어서.”
“
이럴 수가! 형이 변했다. 선우는 서러운 얼굴을 하였다.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
그야 소중한 동생이니까.”
“
그런 그 소중한 동생의 말 좀 들어!”
“아니, 그건 또 별개지.”
“
선우는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으나, 현우에게 붙잡혔다. 그를 뿌리치
려고 해도 현우의 힘에는 이길 수 없었다. 현우는 강제로 선우를 잡아당겨
다시 끌어안았다.
선우야, 들어 봐. 나는 너를 사랑해. 하지만 도진 형도 사랑해.”
“난 싫어.”
“
왜 이렇게 싫어하는지 모르겠네.”
“
현우는 선우의 엉덩이를 토닥여 주었다.
너도 언젠가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거야.”
“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형이야.”
“아니, 형제로서 말고,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거라니까?”
“안 생겨.”
“
아니, 왜! 내 동생이 얼마나 잘났는데!”
형제가 서로 투닥거리는 사이, 도진은 스파게티 3인분을 완성했다. 더불어
케로와 점박이의 식사도 같이 준비했다.
“
133.
식사는 즐겁게 끝났다. 이어 간식으로 과일까지 깎아 먹으니 이 어찌 완벽
하지 않으랴. 이후 현우는 도진의 일정을 보며 그사이를 어떻게 보낼까, 고
민했다.
최근 바빠서 제대로 붙어 있질 못했으니 그 시간을 늘리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있었으니, 선우 또한 조금씩 시간에 여유가
생기고 있단 사실이었다.
“형, 뭐해?”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생은 형인 현우가 도진과 단둘이 있는 게 싫은 모양이
었다. 둘이 될 것 같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이에 끼어들었다.
안 되겠다. 외부로 나가야겠어!”
“
이제 이쯤이면 기자들도 좀 조용해졌겠지. 모자에 선글라스를 낀 현우는 도
진과 함께 외부로 데이트를 갔다. 적당히 거리를 걷고, 식사를 하고, 이후
호텔로 가는 완벽한 계획이었다.
선우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너 오늘 던전에 간다고 하지 않았어?”
그거야 다녀왔지.”
“
벌써? 어려운 던전이라며.”
“사람에게 불가능은 없더라고.”
“
상황이 이러니 현우도 서서히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욕구불만.
결국 원하던 호텔은 가지도 못하고 끝났다.
집으로 돌아온 현우는 대충 보고 던져 둔 서류부터 찾았다.
‘어디 보자.’
국내가 안 되면 미국에 가서 데이트를 하면 되지 않겠는가! 현우는 야심에
찬 생각을 가지고 찬영에게 말했다.
미국에 가겠습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 하더라도 미국은 미국입니다. 나
중에는 반드시 도움이 될 겁니다.”
“
찬영은 빠르게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눈치챈 선우는 자
신도 가겠다고 나섰다.
안 돼.”
현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형!”
“
어떻게 불러도 안 돼.”
선우는 어떻게든 현우를 설득하려 했지만, 그는 웃는 얼굴로 끝끝내 거절했
다.
“
이번에 따라오면 아프리카로 가 버릴 거야.”
“
그래도 따라가면 되지.”
“내가 작정하고 따돌리려면 못 따돌릴 것 같아?”
“
형
“ !”
현우의 말에 선우는 서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현우는 이번만은 꿋꿋하
게 버텨 보기로 했다. 도진과 데이트를 하고 싶다. 그리고 맨살을 만져 보고
싶었다. 키스도 좋으리라.
‘나도 엄연히 성욕이 존재하는 사람이다.’
현우는 요즘 들어 그걸 깨닫고 있었다. 더는 손만 잡는 것에 만족할 수 없었
다.
그러니 따라오지 마. 케로를 놓고 갈 거니까.”
케로라면 훌륭한 감시견이 되어 주리라. 그렇게 현우는 선우를 내버려 두
고, 도진과 함께 미국으로 향했다.
“
*
현우!”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앰버가 그들을 반겨 주었다.
“
이번에는 셋이 아니네요?”
“
선우는 할 일이 많아서 두고 왔어요.”
“저런. 하긴 이제 각성자 협회의 협회장이기도 하니 많이 바쁠 거예요. 일단
숙소부터 안내해 드릴게요.”
“
숙소는 제법 유명한 호텔이었다.
방은 일단 두 개 잡았는데요.”
“필요 없습니다.”
“
네
“ ?”
방은 하나면 충분합니다.”
“그럼 트윈베드 방이면 될까요?”
“
아뇨. 더블베드.”
“
현우의 말에 앰버가 작게 웃었다.
“알았어요. 침대는 하나면 된다는 소리죠?”
네
“ .”
좋아요. 그럼 그 방으로 잡아 줄게요. 더 원하는 건 없나요?”
“혹시 방에 그게 있나요?”
“
그거요?”
“
앰버의 물음에 현우는 수줍게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보였다.
‘저게 뭔데?’
의아해하며 바라보자, 현우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 연인들끼리 쓰는 거요.”
“
아하!”
“
그제야 앰버는 현우가 바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녀는 현우를 한 번 보고, 조
금 떨어진 곳에 있는 도진을 바라보았다. 그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귀끝이 조금 붉었다.
“기본적으로 비치되어 있지만, 원한다면 더 준비해 둘게요.”
감사합니다.”
“
대답하는 현우의 얼굴도 빨갛다. 워낙 급하여 요청하긴 했지만, 그라고 부
끄럽지 않을 리 없었다.
“일은 이틀 뒤부터 시작하니까, 그 전까지 데이트라도 하세요.”
친절하게 배려해 준 앰버가 호텔을 떠나고, 둘은 정해진 방으로 올라갔다.
제법 넓은 거실과 여러 개의 방을 갖춘 공간에는 침대가 하나 있었는데, 더
블베드였다.
완벽하네.’
현우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일단 씻을까?”
“
도진은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부터 씻을래?”
아니, 형부터 씻고 와.”
혹시나 자신이 씻는 사이 도진이 자리를 떠날까 봐, 현우는 그렇게 말했다.
“아니면 같이 씻을래?”
“
그런 현우에게 도진이 물어왔다.
같이?”
생각보다 도진은 대담하게 나왔다. 너무 대담해서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
작했다. 이러다가는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
조 좋아!”
“ ,
현우는 수줍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욕실로 들어선 도진이 먼저 상의를 벗었
다. 옷을 벗으면서 드러난 등 근육이 근사하다. 늘씬한 자신의 몸과는 전혀
달랐다. 그래서였는가. 저도 모르게 손가락이 움직였다.
쿡.
가느다란 손가락이 도진의 등을 찔렀다. 그러자 탄탄한 등이 움찔거렸다.
현우야.”
도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무언가를 꾹꾹 눌러 참는 듯한 느낌이었
다. 그리고 현우는 그게 뭔지 알고 있었다. 손가락에서 시작해 손바닥이 그
의 등에 닿아왔다.
“
너도 옷 벗어야지.”
“
아 그렇지.”
현우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상의를 벗었다. 도진과는 다른 몸이었지만,
그 또한 완벽했다. 마계에서 싸워온 세월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 ,
그래도 몸에 상처는 없네.”
“
없앴으니까.”
현우가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원래 그의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하지
만 강해지면서 자신의 몸을 수복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상처를 하나둘씩
없애 나갔다. 나중에 동생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서 했던 행동이었다.
“
도진은 조심스럽게 다가와 현우를 끌어안았다.
어느 쪽이건 넌 예뻤을 거야.”
“이왕이면 멋있다고 해 주지.”
“
현우도 도진을 마주 끌어안았다.
그래, 멋있기도 하지.”
잠시 끌어안고 있다가 전부 벗어 버린 둘은 얌전히 몸을 씻었다. 둘 사이에
는 기묘한 긴장감이 흘렀지만, 그걸 지금 터트리지는 않았다. 이제 처음인
데 좀 더 근사하게 치르고 싶었다.
“
그런데 왜 이렇게 손놀림이 좋아?”
“
현우는 자신의 머리를 감겨 주는 도진을 보며 투덜거렸다.
“어렸을 적에 가끔 동생 머리를 감겨 준 적이 있었거든. 그땐 나도 어려서
매우 서툴렀는데, 하다 보니 점점 더 나아지더라고.”
상냥한 오빠였네.”
“
다음에는 현우가 도진의 머리를 감겨 주었다. 그리고 깔끔하게 씻은 뒤 가
운을 걸치고 욕실을 나섰다.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손장난을 쳤다. 도
진은 보기보다 간지러움에 약했고, 현우는 간지러움을 거의 타지 않았다.
“후후후.”
그러니 자연 지는 건 도진이었다. 현우는 양 손가락을 현란하게 움직이며
도진을 괴롭혔다.
그만, 그만!”
웃다 지친 도진이 결국 백기를 들었다. 얼굴이 새빨개졌는데도, 여전히 멋
있는 모습은 반칙과도 같았다. 자연 간지럽힘을 태우던 손의 움직임이 달라
지기 시작했다.
“
도진도 바뀐 분위기를 눈치채고 얌전해졌다. 넓은 창밖에선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 사이로 둘은 가만히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 행위는 밤을
지나 새벽까지 이어졌다.
으음.”
“
현우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언제나 가볍게만 느껴지던 몸이 묵직
하다. 그래도 허리는 멀쩡하다. 원체 체력이 좋으니 그런 모양이었다. 헤실
거리며 웃던 그는 옆에 누워 있는 도진의 품에 파고들었다. 근육이 많은 몸
이라 그런지 따뜻하다.
“일어났어?”
방금 일어났음에도 도진의 얼굴은 여전히 멋있었다. 굴욕적인 부분이 조금
도 존재하지 않았다.
응
“몸은 괜찮아?”
“ .”
당연히 괜찮지.”
“
애초에 둘 다 각성자다. 이 정도 가지고 지칠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 아침에 일어나서 얼굴을 보면 좀 더 어색할 줄 알았는데.”
알았는데?”
“
아니네? 오히려 가슴이 벅차오르고 기쁜걸.”
현우는 웃으며 도진의 뺨에 입 맞췄다.
“
나도 그래.”
“
도진은 현우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럼 오늘까지는 자유시간인데 뭘 할까? 나갈래?”
“굳이 나가야 하나?”
“
현우가 은근한 표정으로 도진을 바라보았다.
“나가지 않아도 되긴 하지.”
“그럼 좀 더 침대에 누워 있자.”
그러면서 발로 도진의 종아리를 슬며시 문지른다. 그 행동에 자극받은 도진
은 현우를 잡아당겨 자신의 배 위로 올렸다. 만약에 그 배에서 꼬르륵 소리
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어제 했던 걸 계속했을지도 모른다.
배고파?”
“조금?”
“
그럼 밥 먹고 마저 할까?”
“
그것도 좋지. 룸서비스 시킬게!”
현우는 바닥에서 벗어 던진 가운을 주워 입고는 메뉴판을 뒤적여 보았다.
미국에서의 첫날밤은 완벽하게 지나갔다.
“
*
어쩐지 얼굴에서 빛이 나네요?”
“
이틀 후 안내를 위해 도착한 앰버가 웃으며 말했다. 둘 다 이틀 전에 보았던
것보다 안색이 좋고, 맑다. 마치 묵혀두었던 무언가를 모두 날려 버린 표정
이었다.
“데이트는 좀 했어요?”
아뇨. 방 안에서만 있었어요.”
“
그 말만 들어도 뭘 했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한창 좋을 때지.’
앰버는 그리 생각하며 둘에게 던전 목록을 보여 주었다.
134.
짧은 휴식이 끝나자 현우와 도진은 곧바로 포털을 닫는 일에 투입되었다.
“할당량만 끝내 주시면 됩니다.”
앰버의 그 말에 현우는 무시무시하게 날뛰었다. 하루에 여러 개의 포털을
닫기 시작한 것이다. 보통은 하나 닫고 휴식을 취한 뒤 다시 닫는데, 현우는
그런 것도 없었다. 무척이나 탐나는 속도였던지라, 중간 중간 관리하러 온
앰버는 이런 권유까지 했다.
혹시 국적을 바꾸실 생각은 없으세요?”
“
없습니다.”
“
그럴 것 같긴 했어요.”
현우의 단호한 대답에 앰버는 더 권유하지 않고 넘어갔다. 그동안 다른 사
람들도 이런 권유는 많이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만은 그런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너무나도 뛰어난 실력을 보니 절로 말이 튀어 나갔다.
“
어쨌든 이 속도라면 일정도 금방 끝나겠네요. 그러면 귀국까지는 시간이
좀 남는데 뭘 하실 건가요?”
“
데이트요.”
현우는 야무지게 말하며 도진의 손을 잡았다.
“
그것도 나쁘진 않죠.”
“
이미 둘이 사귀고 있는 건 제법 많은 사람이 알고 있었다. 저렇게 붙어 다니
며 애정에 가득 찬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는데, 모를 리 없었다. 앰버는 귀
여운 커플에게 데이트 장소를 추천해 주기로 하였다.
하지만 그 데이트 장소를 현우와 도진이 가는 일은 없었다. 둘은 빠른 속도
로 던전을 공략하고는, 곧바로 호텔에 틀어박혔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둘은 데이트보다 다른 것에 관심이 큰 모양이었다. 하긴 어디든
어떨까. 같이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을. 앰버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그렇게 둘이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선우도 미국에 도착했다. 주
변에서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으나, 그는 마침내 형을 따라오는 데 성공
한 것이다! 오자마자 선우는 곧바로 형이 머무는 호텔로 향했다. 그리고 망
설임 없이 벨을 눌렀다.
당장 문이 열리진 않았다. 예민한 귀에는 안에서 후다닥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선우는 침착하게 시간을 재며 기다렸다. 그렇게 30초가 지
날 무렵, 문이 열렸다.
“어서 와!”
현우가 웃으며 선우를 반겼다. 그런데 상태가 심상치 않다. 입고 있는 반쯤
흐트러졌으며 목에는 벌레에게 물리기라도 한 것처럼 붉은 자국이 남아 있
었다. 거기다 숨을 왜 몰아쉬고 있는 건데?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도 아닌데
호텔에서 숨을 몰아쉴 만한 일이 있는가?
선우는 침착하게 움직였다. 일단 형의 가운을 제대로 입혀 주고 허리끈을
꽁꽁 동여맸다. 그런 뒤, 뒤쪽에 서 있는 도진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순식간
에 주변 온도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만, 그만!”
현우가 그런 선우의 볼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여기는 다들 쓰는 호텔이야. 함부로 능력을 발휘하면 안 되지.”
“하지만 형, 저 벌레 같은 놈이 형에게!”
“
들켰나? 현우는 최대한 침착하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뭐 뭘 했다고 그러니. 아무것도 안 했어. 일단 멀리서 왔으니 차라도 마시
면서 좀 쉬도록 해.”
“ ,
안 하긴 뭘 안 해!”
그쯤 되어 현우는 부끄러움에 타 버릴 것 같았다. 선우는 도진을 닦달하고,
그런 선우를 도진은 관대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말리긴 했지만, 선
우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싸우는 건 좋은데 이럴 거면 그냥 포털에 들어가서 싸우자.”
“
알았어. 비어 있는 포털은 내가 잡도록 하지.”
“현우야?”
“
현우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도진에게 적당히 상대해 달라고 귓속말을 했
다. 그제야 도진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선우가 미국에 온 첫날,
둘은 포털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일은 앞으로도 쭉 이어지게 된다.
선우는 그 누구보다 훌륭한 시누이였다.
으아아, 일이 너무 많아!”
아윤은 칭얼거리며 책상에 엎어졌다. 포털 관련 사건은 외국에서 더 크게
문제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내가 편한 것도 아니었다. 외국에서는
연일 도움 요청이 들어오고 있었고, 유독 많은 길드와 동맹을 맺은 요람 길
드로서는 전부 무시할 수도 없었다.
“
조금만 더 힘내자, 아윤아.”
“
흑흑. 오빠.”
“
헌터 관리국의 국장이 바뀌고, 권력의 중심은 무혁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다른데 신경이 쏠린 선우 대신 자윤이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갔다. 덕분에
무혁과의 사이가 가까워지고 국내에서의 권력 지분이 높아졌다. 그래도 1
위 길드인 선현은 이길 수 없겠지만, 좀 더 위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두고 봐. 적어도 2위까지는 올라가 주겠다고.”
도가준이 들으면 난리 나겠는걸.”
“
뭐 어때. 지금 여기엔 없는걸.”
아윤은 헤헤 웃으며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 ,
그리고 그 사람, 요즘 뭔가 빠진 것처럼 굴고 있어서 예전보다 덜 무섭다
고.”
“
그건 그래.”
자윤은 아윤의 말에 맞장구 쳤다.
“
허전하다. 미리엘이 돌아가고부터 가준은 허전함을 느끼고 있었다. 있을 때
는 그렇게 귀찮더니 없어지니 가슴이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좋아했었던 건가.”
“
다 큰 성인이면서 코코아에 집착하고, 툭하면 악마에 대해 험담을 하곤 했
다. 가끔은 날개를 파닥이며 격렬하게 흥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과자를
쥐여 주면 다시 얌전해졌다. 어찌 보면 육아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육아는 개뿔이.”
이 마음은 자신이 돌보는 아이에 대한 마음이 아니었다. 명백한 사랑이었
다.
“
이 나이에 사랑이라니.”
“
그걸 깨닫게 되면서 가준은 자연스럽게 현우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여전히
현우는 좋았지만, 그에게 사랑을 느끼진 않았다. 아마도 그건 우정이겠지.
‘이제 다시 볼일은 없겠지.’
미리엘은 돌아갔고 요정의 말에 의하면 다시 돌아오긴 힘들 거라고 했다.
그게 규칙이니까요!”
세계의 평화를 위한 규칙이라 천족이라 해도 깰 수는 없다고 했다.
“
그래도 규칙을 깰 수도 있잖아?”
“
못 깨요. 꿈 깨세요. 알베르크 님은 그나마 마족에서 손꼽히게 강한 분이라
자기가 생각한 걸 밀고 나가셨지만요. 미리엘 님은 성인이라도 천족 중에선
어린 편이에요. 아직 보호받고 교육받을 나이라 이겁니다.”
“
성인인데요?”
“
성인이라도요. 특히 미리엘 님의 가문은 가족을 잘 보호하는 편이니, 더는
몰래 내려오실 수 없을 겁니다.”
요정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 뒤로 가준은 미리엘과 닮은 사람이라도 찾아보
려 했지만, 어디 그 미모가 흔한가. 그렇게 사랑은 끝난 모양이다.
“
누군가의 사랑이 끝나도 세상은 돌아간다. 최강 길드의 혜선은 국내 5위 길
드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상위 길드들이 갑자
기 성장한 탓에 간신히 끄트머리에 매달려 있는 꼴이었다. 그 때문에 혜선
은 길드를 부흥시키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와모토 준이치. 일본에서 선우의 라이벌을 자처하던 그는 선우가 세계 각
성자 협회의 협회장이 되면서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 좀 더 강해져서 다음
에는 협회장 자리를 빼앗을 생각이었다. 협회장은 5년을 주기로 바뀌니까.
연임이 가능한 걸 고려해 보면 지금부터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길드를 위해서 최고가 되어야 합니다.”
그 말과 함께 준이치는 모습을 감췄다.
이반. 평이한 이름을 지닌 그는 아버지의 밑에서 수련에 힘썼다. 예전에는
이리 부지런하지 않았으나, 미국에서 커다란 사건을 겪고 그는 변했다. 아
버지 표드로가 시켜도 하지 않던 훈련을 자진해서 하고, 훈련 시간을 늘렸
다.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정말 죽을 뻔했다. 다시는 그런 감각을 느끼고 싶지 않았던 이반은 자신을
갈고 닦기로 했다. 표드로한테는 잘된 일이었다.
한 편, 천족이 사는 천계에서 미리엘은 고민에 잠겨 있었다.
“미리엘!”
다른 천족이 불렀으나, 대답도 없이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뭐를
보고 있는가 싶어 궁금해 옆에서 같이 봐도 보이는 건 구름뿐이었다.
뭘 보는지 모르겠네.”
처음에는 옆에 달라붙어 이유를 알아내려던 다른 이들도 서서히 떨어져 나
갔다. 그리고 그제야 미리엘은 자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
이상해.’
‘
요즘 들어 자꾸 생각나는 얼굴이 있다. 인간 중에서는 나은 편이지만, 천족
중에서는 못생긴 편에 속하는 그 얼굴. 그 얼굴의 주인은 성질도 그리 좋지
못했다. 툭하면 욕을 내뱉고 거칠게 행동한다. 그런데도 왜 자꾸 생각나는
걸까?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모르지 않는다. 아무리 보호받는 중이라고 하더라도 미리엘은
엄연한 성체였다. 성교육도 이미 전부 받았다. 사랑의 의미도 알고 있었다.
그래, 이건 사랑이네.”
“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많고 많은 이들 중 다른 세계의 인간을 사랑한다니.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곤란하네.’
그 세계로 가는 길은 막혀 있었다. 이대로 죽을 때까지 그, 가준의 얼굴을
못 보게 될 수도 있었다.
‘
그건 싫은데.’
‘
다시 그를 보고 싶었다. 미리엘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흔들었
다.
135.
미리엘이 사랑에 대해 고민하며 괴로워하고 있는 시각, 알베르크는 마계를
횡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제법 넓은 풀밭 위에 세워져 있는 오두
막이 하나 있었다. 마계의 현자, 로스린이 머무르는 곳이었다.
여어!”
“
알베르크는 그대로 오두막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공간 확장 마법이
걸린 내부는 겉보기와는 다르게 넓었다. 그 안에는 팔이 여러 개 달린 인간
형태의 마족이 뭔가를 열심히 적는 중이었다.
“알베르크 님? 오랜만이군요.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로스린은 하던 걸 멈추지 않은 채 물었다.
물어볼 게 있어서.”
“
무엇입니까?”
“
중간계로 가고 싶은데, 방법이 있나?”
“아, 중간계 말이군요. 중간계, 중간계라. 중간계?”
“
로스린이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거긴 갈 수 없지 않습니까?”
“아이나스는 문을 여는 데 성공했던데.”
“
한동안 안보이더니 거기 다녀오신 겁니까?”
“
그래.”
“오, 맙소사. 그나저나 아이나스가 문을 여는 데 성공했다고요? 그 미치광
이가요?”
“
정확히는 리비라는 마족과 함께. 알고 있나?”
“
리비, 어디 보자. 기억납니다. 되게 특이한 걸 추구하던 마족이었죠. 순위
권 싸움에도 뛰어들기 싫어하고, 특이한 걸 많이 연구했습니다.”
“좋아. 그럼 그걸 너도 할 수 있나?”
“
저요?”
“
알베르크의 질문에 로스린이 심통 난 표정을 지었다.
할 수 있죠. 그들이 하는 거면 저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누굽니까! 마계의
현자 아닙니까.”
“
그럼 재료는 제공해 줄 테니, 그에 관해 연구해 봐.”
“연구야 어렵지 않지만, 해서는 안 될 일 아닙니까?”
“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딨어? 하면 하는 거지. 너도 사실 궁금하잖아. 어떻게
하면 중간계로 갈 수 있는지가 말이야.”
“
그건 그렇죠. 좋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그걸 연구해 보도록 하죠.”
로스린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알베르크로서는 기꺼운 일이었다. 말을 듣
지 않으면 패서라도 시킬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
이대로 포기할 줄 알고.’
‘
현우는 유일하게 사랑하게 된 존재였다. 마계로 돌아왔다고 해서 포기한 건
아니었다. 어떻게든 다시 돌아가서 데려올 생각이었다. 그걸 위해 알베르크
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기다려, 현우.’
알베르크는 지금은 여기 없는 현우의 이름을 불렀다.
*
어쩐지 귀가 가려워.”
“
현우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어디? 여기?”
도진이 손을 뻗어 현우의 귓가를 매만졌다. 만지는 손길이 제법 끈적거린
다. 며칠 사이 너무나도 많은 것이 변했다. 포털에 들어갔다 나온 뒤로 선우
는 조금이지만 얌전해졌다. 아무래도 도진에게 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선우는 선우, 사사건건 참견하는 건 멈추지 않았다. 그 때문
에 제대로 된 데이트도 불가능했기에, 둘은 지금 몬스터를 앞에 두고 있었
다.
“뀨우우웅!”
죽을 만큼 패서 쓰러트린 몬스터를 앞에 돗자리를 깔고 그 위에 바구니를
얹었다. 바구니 안에는 피크닉에서 먹을 법한 샌드위치와 주스 같은 가벼운
식사가 들어 있었다.
형이랑 같이 보고 싶은 게 많이 있었는데.”
“나도 그래.”
“
선우는 대체 형을 왜 이리 싫어하는지.”
“
현우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고는 도진의 다리를 베고 누웠다.
“아직 형이 너무 좋은 거겠지.”
나도 선우를 좋아해.”
“
그걸 아니까 선우도 저 정도 참는 거겠지.”
그게 참는 거라고? 시누이도 이런 시누이가 없다 싶을 정도로 도진을 괴롭
히던데. 잘만 하면 TV방송에 나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때문에 현우는
도진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
미안한 거야?”
“
조금.”
“그러면 미안한 만큼 뽀뽀는 어떠신지?”
“
뽀뽀로만 만족하는 거야?”
“
아니, 사실은 키스가 더 좋지.”
둘은 키득거리며 서로의 얼굴이 키스의 비를 퍼부었다. 그를 보는 몬스터의
눈빛이 썩어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몬스터가 할 수 있
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그는 죽어 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설사 멀쩡
해진다고 해도 다시 덤빌 생각도 없었다. 그만큼 둘은 강했으니까.
“
몬스터의 생각을 알지 못하는 현우와 도진은 식사를 마치고 한참 알콩달콩
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는 그 시간이 끝나고 나서야 몬스터를 편안하게
해 주었다.
자 그럼 나가 볼까?”
“ ,
참 저녁 일정은 없지? 내가 근사한 레스토랑을 예약해 뒀는데.”
“ ,
없어! 그런데 선우도 같이 가는 거야?”
“아니. 이번에도 우리 둘이서만.”
“
선우가 섭섭해할 것 같은데.”
“
현우가 아쉬운 목소리를 냈으나 이번만은 양보할 수 없었다. 도진은 부드러
운 목소리로 현우를 설득했다.
“이번은 둘이서 먹고 다음번엔 선우도 같이 오면 되잖아.”
그럴까?”
“
그래, 선우도 슬슬 형에게서 독립할 때가 되었지.”
“형이 그런 말 하는 거 처음 봐!”
“
그럴 수밖에. 그동안은 현우에게 잘 보이려고 선우를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
다. 둘이서 돌아다니는 와중에도 종종 선우를 끼워 넣곤 했던 것이다.
그래도 이번은 절대 안 되지.’
잘못하다간 준비해 뒀던 모든 일들이 엉망이 될 수 있었다. 일부러 선우에
게 일이 있는 저녁을 골랐는데 말이다. 도진은 감정을 감추며 현우에게 웃
어 보였다.
‘
그날 저녁, 도진은 현우와 함께 근사한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자리는 야
경이 보이는 제일 좋은 창가 자리였다. 현우가 자리에 앉도록 에스코트한
도진은 이어 자신도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차례로 나오는 음식을 음미했
다.
여기 음식 맛있네.”
“그렇지?”
“
현우는 맛있는 음식 때문인지 조금 들뜬 모양새였다. 그리고 본 식사가 끝
날 무렵, 직원이 자그마한 케이크를 들고 나왔다. 빨간색 하트모양 케이크
위에는 멋들어진 글씨로 현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뭐야, 오늘 무슨 날이야? 아직 생일은 아닌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현우에게 도진이 말했다.
“
일단 케이크를 썰어 보자.”
“
그 말에 현우는 칼을 들어 조심스럽게 케이크를 썰었다.
근사한 레스토랑의 식사, 마지막으로 나오는 작은 케이크. 이쯤 되면 현우
가 모르는 것도 이상했다.
뭔가 있네.’
‘
그리고 그 뭔가는 아마도 로맨틱한 무언가가 아닐까? 현우는 기대감을 가
지고 케이크를 반으로 갈랐다. 하트가 잘리는 모습이 조금 그렇긴 했지만,
이어서 그 안에서 나온 물건에 눈이 동그래졌다.
반지?”
그것도 제법 큰 다이아가 박힌 반지였다. 조심스럽게 반지를 꺼내서 바라보
는데, 도진이 의자에서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어디선가 가슴을 간
질이는 노래가 들려오고, 그는 꽃을 들었다. 이건 틀림없이 그거다! 현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도진을 불렀다.
“
형
“ ?”
현우야, 나와 평생을 함께해 줄래?”
청혼이었다.
“
세상에, 맙소사!’
‘
현우는 당황하여 도진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하지만 그는 승낙 전에는 일
어나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부끄러워!’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받아들일게, 청혼. 나도 형과 평생을 함께 하고 싶어.”
그제야 도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현우의 품에 꽃다발을 안겼다. 그가 미리
준비해 둔 반지도 닦아서 손가락에 끼워 봤는데 딱 맞았다.
“
형 거는?”
“
나도 있지.”
도진은 자신의 손을 들어 보였다. 똑같은 반지가 손가락에서 빛나고 있었
다. 그 모습에 어쩐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나저나 남자끼리의 청혼인데
용케도 레스토랑에서 허락했구나, 싶었다.
“
돈이면 다 되더라.”
“
현우의 궁금증에 도진이 답해 주었다. 그렇게 둘은 그곳에서 평생을 맹세했
다.
“형!”
뒤늦게 선우가 난입했지만, 이미 모든 상황은 종료된 뒤였다.
말도 안 돼!”
선우는 이 모든 것을 물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현우는
도진에게 홀딱 넘어간 상태였으니까. 행복한 마무리였다.
“
*
으히히히!”
로스린은 수많은 팔을 허우적거리며 춤을 추었다.
“
드디어 성공입니다! 성공이에요! 이제 중간계로 갈 수 있습니다!”
“
아직은 작은 몬스터만 가능하잖아.”
“작은 것부터 시작해서 커지는 거죠. 한 번 성공한 이상, 다음은 빠르게 진
행할 수 있습니다!”
당당한 목소리에 알베르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역시 마계의 현자답군.”
“칭찬은 마족도 춤추게 하죠. 더, 더 해 주십시오!”
“
원한다면 얼마든지.”
“
이제 다시 현우를 만나러 갈 수 있다. 그게 말 몇 마디로 된다면 뭔들 못 해
주겠나. 알베르크는 로스린에게 칭찬 몇 마디를 더 건넸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아니, 이제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된다. 알베르크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
다.
『동생이 영웅이라 꿀 빱니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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